[필사] 글쓰기의 태도(에릭 메이젤)
항상 주어와 서술어를 갖춘 완전한 문장으로 글을 쓴다.
글쓰기의 의미를 나 자신에게 되새긴다. 글쓰기란 나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재해석하여 재생산하는 창조물이다.
당신은 글을 써야 할 운명이다. 하지만 아직은 잠재적인 운명에 불과하다. 글쓰기에 적합한 생각과 태도를 갖추고 실제로 글을 쓰면서 그 운명을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그다지 완벽하지 않다 하더라도 어쨌든 글을 쓰자.
작가가 되려면 반드시 글을 써야 한다. 하지만 글을 쓴다고 반드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지 걱정된다면 머리를 세게 한 대 후려갈겨라.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당신이란 사람이 자신의 신경 회로망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가 창작물을 가지고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용감하냐 아니냐이다. 당신은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탐험가이자 발명가이자 마술사이다.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그만두라.
픽션 혹은 논픽션 형식의 상상에 흠뻑 빠져보자. 지금 당장 시작하라!
창작에 적합한 사람으로 존재하려면 가장 먼저 일상적 자아를 벗어버려야 한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날씨와 사과 가격을 걱정하는 사람,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에게 창피를 당했던 사람, 지난 20년 동안 흡족할 만큼 충분히 글을 쓰지 못한 사람, 손님이 온다며 미친 듯이 집 안을 청소하는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 무게도 없으며 한계도 없는 영혼이 되어야 한다.
결심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의무적인 글쓰기를 하루에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으로 나누어 해보자. 하루에 한 번보다는 그 이상 글을 쓰는 것이 아무래도 더 낫지 않을까?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을 고르자. 그 하루에 네 번의 글을 쓰자. 하루 네 번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듯이. 이 네 번의 글쓰기 시간에 모두 글을 쓰자. 혹은 더 자주 써도 좋다. 글을 완성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고 규칙적으로 글 쓰는 일을 앞으로 조금 더 잘할 거라고 다짐하자.
글 쓰는 사람은 매일 선택해야만 한다. 오늘은 어떤 글과 씨름할까? 20분 동안 글을 쓸까 세 시간 동안 글을 쓸까? 잘 안 풀리는 작품을 이쯤에서 버릴까 한 번만 더 손볼까? 여기에 쉼표를 찍을까 아니면 빼버릴까?
작가의 인생은 그가 내리는 지속적인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가장 중요한 선택은 글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집이 쉬는 공간이자 일하는 공간이라면 집에 머물 때의 내 생활을 어떻게 계획할 것인가?
매일 간단하면서도 구체적인 글쓰기 계획을 세우자. 예컨대 “오늘 나는 아침 6시부터 8시까지 글을 쓸 거야” 같은. 글을 쓰기로 선택하자.
어쩌면 당신은 스스로를 용서하는 법부터 연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용서하기로 새로이 다짐하면 글쓰기를 몇 번 건너뛰거나 글을 기대한 만큼 써내지 못했다고 해서 지나친 자기비하에 빠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문장들을 당신의 뇌에서 종이 위로 옮기는 일은 특별한 물리적 공간을 요하는 장기적인 사고 행위이자 감정 행위다. 물리적 공간이 어떠한가에 따라 이 과정이 더 수월해지기도 하고 더 힘들어지기도 한다. 당신의 물리적 공간은 이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가? 공간 철학.
지금 당신이 있는 물리적 공간을 평가해보라. 조용한가 아니면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소음이 있는가? 고립되어 있는가 아니면 개방되어 있는가? 체계적인가 아니면 ‘체계적으로’ 어질러져 있는가? 차분한가 아니면 활기가 넘치는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물리적 공간은 당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공간인가?
당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글쓰기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보라. 현재의 공간을 어떻게 변형하면 그 공간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가?
현재의 공간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가능성 있는 세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본 다음 가장 실현 가능한 방법이 무엇인지 선택해보자. 그런 다음 그걸 실천해보자.
당신의 공간은 사적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더 사적으로 만들거나 완전히 사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
어떤 공간은 다른 공간보다 확실히 글이 더 잘 써지고 나에게 잘 맞는다. 최적의 공간을 찾아보자. 아직 그런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면 창조해보자. 가구를 구석으로 밀어내든 안 쓰는 방을 치우든 필요하면 뭐든 한번 해보자.
쓰려고 마음먹어라. 그러지 않으면 어떤 공간도 필요 없다. 머릿속으로 비전을 그린 후 글을 쓸 공간을 정하자. 그 공간의 성능을 테스트해보자. 그곳에서 직접 글을 써보자. 그곳에서 계속 글을 쓰자.
우리는 기술을 단련해야 하며 집중해야 하며 규칙적인 일과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준은 충분히 높게 잡아야 한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 나에게 글을 쓰는 생활, 지금 하는 글쓰기 프로젝트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의도한 대로 인생을 살게 된다면 아마 당신은 앞으로 수 천 번 이상 글쓰기 공간에 들어갈 것이다. 60년 동안 작가 생활을 하고 하루에 두 시간씩 쓴다고 가정하면 글쓰기 공간에서 5만 시간을 보내는 셈이다. 형편없는 글일지언정 반드시 쓰라. 다른 방법은 없다. 최선을 다해 당신의 글쓰기 공간을 존중하라.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당신의 글쓰기 공간에서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이다. 글쓰기 공간에 적합한 일을 하자.
글쓰기 공간을 존중한다는 것은 잡다한 업무, 극적인 사건, 심리적 위기나 집안일에 말려들고 있다가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스스로 경종을 울린 다음 이 모든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노트와 연필은 물론 이젠 컴퓨터까지도 이동 가능하다. 이 얼마나 환호할 일인가! 어디에서나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작업실에 있지 않을 때도 머리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그때그때 잡아낼 수 있다.
매일 똑같은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지루할 땐 짧은 창작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다. 글을 쓰기 좋은 곳을 몇 군데 알아두었다가 그 날 순간의 기분에 딱 들어맞는 장소를 고를 수도 있다. 주로 작업하는 나만의 글쓰기 공간은 유지하되 몇 개의 대안을 추가해보자는 것이다. 어디에 있건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그곳이 나의 글쓰기 공간이다.
이번 주에 써야 할 목표를 정하고 다양한 장소에서 글을 써보자. 의지만 있다면 이 세상 어디서든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자. 글쓰기에 좋은 은신처 목록을 만들거나 보물지도처럼 생긴 지도를 그릴 수도 있다. 글 쓰는 사람이 머무는 곳은 어디나 작가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가 찾을 수 있는 보물은 그곳에서 완성하는 글이다.
마음을 열고 창의적으로 생각해보자. 넓은 식탁 위에 소설의 목차를 펴놓고 인덱스카드에 챕터 제목을 적은 다음 챕터를 조금 더 쉽게 재배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네 스타벅스에 가서 새 책을 위한 마케팅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런 작업은 그다지 재미가 없으니 이렇게 휴식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치과 대기실에서 에세이 한 줄이 될 메모를 할 수도 있고 길을 거닐다가 지금 쓰고 있는 시의 마지막 줄 내용이 떠올라 서둘러 적을 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나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자! 어쩌면 주된 공간 딱 하나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대안이 될 만한 공간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을 깨줄 선물 같은 혹은 여행지 같은 공간 말이다. 대안 공간을 잘 활용할 때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글을 쓸 수 있고 또 써야만 한다는 변치 않는 진실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다.
글쓰기란 결국 생각하고, 느끼고, 갈겨쓰는 일이므로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서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작가가 침대에서 글을 썼고, 쓰는 걸 즐겼다. 노트북, 무릎, 커피나 차 한 잔 그리고 따뜻한 발 외에 글쓰기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정신이 상상을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떠다니기만 하면 된다.
온갖 억압을 깨부수고, 죽어 있던 존재 안에 창조적인 에너지가 자유롭게 흐르도록 한다.
침대에서든 다른 어떤 곳에서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신과 당신의 노트 그리고 당신의 펜에 의해 규정되는 당신만의 독특한 기운이다. 내가 존재하는 바로 이곳이 나의 생각과 감정이 살아 있는 곳이다. 당신이 그걸 꺼낼 마음만 있다면. 머릿속 공간 그거면 충분하다. 당신 자신이 글 쓰는 기계이고 글 쓰는 공간이며 글을 쓸 때 필요한 전부다.
잡념에 이별을 고하다
이제 불필요한 업무, 불필요한 기억, 불필요한 걱정을 하는 데 아까운 뉴런을 낭비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비생산적인 걱정거리에 단 하나의 뉴런도 할애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훌륭한 글을 쓰는 일에 충분한 뉴런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뉴런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리려면 온 뉴런을 사용해 생각에 몰두하던 때와 똑같은 노력이 든다. 쓸데없는 잡념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유로운 뉴런은 차분히 다른 일에 할애할 수 있다. 모든 뉴런을 다시 돌아오게 하자. 그렇게 하면 우리에겐 침묵하며 실존하는 시간, 상상력이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뉴런을 해방해야 한다. 수십억 개의 뉴런을 쓸데없는 정보, 치졸한 감정, 오락이나 헛소리에 쓰고 있다면 당신이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글을 쓰려면 우리의 소중한 뉴런들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섬세하고 매력적인 물질들이 있다. 뉴런과 시냅스와 신경전달물질과 온갖 종류의 복잡한 부품들이다. 우주가 작가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신경 체계다. 이 귀한 뉴런들을 양말 짝 맞추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임무에 낭비하지 말자. 아주 작은 뉴런 하나하나가 모여 위대한 아이디어를 이룬다. 그리고 당신, 오직 당신만이 그 뉴런들을 자유로이 해방할 수 있다.
시동생 전화번호는 그냥 잊어버리자.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가. 1억 6,300만 개의 뉴런을 다시 되찾아오자.
생각하는 연습뿐만 아니라 생각을 버리는 연습도 해야 한다. 마당에 있는 잡초를 생각해보자. 그런 다음 잡초와 관련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해야 하는 일, 걱정거리 등이 그저 증발하게 내버려두자. 표류하는 10억 개의 뉴런이 단 1초라도 죄의식과 놀아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배우자의 생일은 기억해야 하지만 본인의 생일은 잊어도 된다.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가 정말 그렇게 중요할까? 살아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뉴런을 어디에 쓸지 엄격하게 선택해야 한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자. “뉴런을 30억개나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생각인가?”
정신을 바짝 차리자. 그러면 뉴런들이 오히려 자유로이 해방될 것이다 멋진 역설 아닌가?
뉴런을 관리하자!!!
10초 안에 집중하는 법
이 기술에는 두 가지 단순한 요소가 있다. 하나는 호흡이고 하나는 생각이다.
일단 5초간 숨을 들이마시고 5초간 숨을 내뱉을 수 있을 때까지 심호흡을 연습해야 한다. 그런. 다음 호흡에 생각을 삽입한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생각의 반 정도를 조용히 떠올리고 숨을 내뱉으면서 생각의 나머지 반 정도를 되뇌며 된다. 이게 다다.
먼저 이 10초에 익숙해지자. 손목시계를 보면서 10초를 경험해보자. 10초는 생각보다 아주 긴 시간이다. 아마도 기대했던 것보다 더 길고 더 풍부할 것이다. 이 10초를 구성하는 각각의 1초는 완전한 독립체로 그 앞의 1초나 그 뒤의 1초와 확실히 떨어져 있고 구분이 가능한 1초로 느껴진다. 10초가 마치 짧은 생애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의식적으로 조금 더 천천히, 더 깊게 호흡하면 우리 몸은 지금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사실, 무언가 다르게 행동하고 싶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린다.
길고 깊은 호흡은 구체적인 생각들을 위한 저장고 역할을 한다. 또한 잠시 멈춰서 내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알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무언가 강박적이고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하고 있다면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각할 수 있다. 과도하게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다면 호흡을 의식적으로 길고 깊게 조절함으로써 마음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불안한 생각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선사하기도 하는데,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의 흐름을 방해하는 불안한 생각과 싸울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길고 깊은 호흡은 현재의 상태에 마침표를 찍는 방법이자 주어진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핵심 열쇠다.
몇 번의 예비 호흡으로 계속해서 호흡 패턴을 심화한 다음 긴 심호흡으로 천천히 바꿀 수도 있다. 결국에 당신은 굳이 이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일반적인 호흡과 일반적 사고 패턴에서 집중을 위한 호흡으로 단숨에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계속해서 호흡을 더 깊게 한다고 생각해보자. 호흡을 길게 하는 법을 터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워밍업 호흡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
이 기술의 핵심은 특정한 생각을 잡아두는 그릇으로 심호흡을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심호흡 안에 집어넣을 때에는 그 생각을 어떤 생각을 어떻게 쪼갤지 결정해야 한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게 나누어지도록 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완전히 괜찮다’는 ‘나는’과 ‘완전히 괜찮다’로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긴 호흡 안에 어떤 구체적인 생각들을 집어넣을지 고민할 준비가 되었다. 다음은 열두 가지 주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일을 / 하고 있다
나는 내 재능을 / 믿는다
나는 지지받는 / 느낌이다
나는 이 순간을 / 받아들인다
나는 과거에서 / 자유롭다
나는 / 의미를 만든다
나는 기쁨을 / 받아들인다
나는 나는 이 도전을 / 감당할 수 있다
나는 / 실천하고 있다
나는 / 더 강해질 것이다
지금 당장 이 열두 가지 주문을 시험해보자. 시간을 갖고 목록을 천천히 보면서 각각의 문장을 길고 깊은 호흡 안으로 집어넣어라. 먼저 준비 호흡을 조금 한 다음 계속 심호흡을 하며 1번 주문을 생각해보자. 그런 다음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이 열두 가지 구절의 힘을 완전히 경험해보자. 열두 가지 구절은 각각 목적과 논리를 갖고 있다. 성취하고 싶은 일에 따라서 매번 다른 문장으로 응용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이 열두 가지 중에서 한두 문장을 골라 사용하면 마음을 비우고 집중하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이 10초간 집중하기 방식을 당신의 마음과 기분을 조절하는 프로그램의 가장 핵심에 놓기 바란다. 심호흡과 유용한 생각을 결합하는 일은 매우 단순하다. 글을 쓰기 위해 워밍업할 때, 주의가 산만하다고 느껴질 때 혹은 어떤 순간을 더 깊게 경험하고 싶을 때 심호흡을 하면서 ‘나는 이 도전을 감당할 수 있다’, ‘나는 내 재능을 믿는다’ 혹은 당신이 좋아하는 다른 구절을 생각하자. 그리고 이러한 ‘집중 기술’을 지속적인 습관으로 만들자.
빨리 집중하는 법을 배우라. 글을 쓸 준비가 되는 데 매일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10초로 족할 수도 있다. 무엇이 더 이익이고 더 경제적일까?
호흡을 관리하자!!!
작가의 운명, 고정된 어떤 것이 하루아침에 유동적인 것으로 변하고 마는 운명.
글을 쓸 때 우리는 갑자기 천둥 번개를 맞듯이 난데없고 고통스러운 변화를 겪어야만 한다. 마치 크리스마스 쿠키에 설탕을 넣을 때처럼 비약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당신이 작가라면 견고한 기반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려야 한다.
그럼에도 버텨야 한다. 일단 공중그네 곡예사처럼 버티고 있어야 한다. 공중에서 떨어지면 파트너의 손이 어디선가 나타나 그를 잡아 주리라 믿으면서 머물러야 한다. 비록 거기가 허공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춤추는 뉴런만이 결과를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이 모든 변화가 우리에게 몰락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 당장은 잠재적인 에너지, 이상한 아이디어, 바뀌는 풍경만이 존재한다.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책은 계속 도망치며 절규하고 변화한다. 계속 그곳에서, 허공에서 버텨라. 그곳은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하지만 전망 하나는 기가 막히게 멋질 것이다.
당신의 머릿속에서 생태계 전체의 역사보다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는 당신을 신과 비슷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다만 유의할 점은 무력하고 괴팍하고 살짝 정신이 나간 신이라는 거다. 당신의 신성을 즐겨라. 만약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택시를 운전하거나 사업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책이 탄생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창조적 과정이 지닌 극적인 속성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는 풍요와 혼란이 함께 춤출 것이다.
책 한 권 한 권이 모두 모험이다.
계속 돌고 돌아야 한다. 당신은 폭풍 속에서 바람에 올라타야 한다. 그러고서 뿌리 뽑힌 나무들, 도로시, 토토가 날아가는 것과 같은 장면들을 포착해야 한다.
변화를 예상해보자. 사나운 변화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 열에 아홉의 작가가 짐을 쌀 테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내면의 시계에 가속도가 붙었다.
시간은 질주하고 당신은 추락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이러한 것들 중 어떤 것도 불가피하지 않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허락했기 때문에 겪는 일일 뿐이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다. 단 두 시간만이라도 연필로 글을 쓰면서 시간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난 이번 두 시간만큼은 아주 천천히 조용하게 소중하게 글쓰기에 바칠 거야. 내면의 시계를 이렇게 돌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경험으로서의 시간은 심리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이다. 나의 시간 경험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경험하는 시간에 푹 빠져들면 시간이 빛의 속도로 흘러가도 개의치 않게 된다. 그저 세 시간이 지난 후 문득 고개를 들어 소설 일곱 페이지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알고 뿌듯해할 뿐이다. 누구도 삶이 아무 의미 없이 속수무책으로 흘러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스피드가 문제가 아니다. 시간도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삶의 질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꿈을 꼭 붙잡고 글쓰기에 전념하면 시간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시간은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흐를 수도 있고 빛의 속도로 흐를 수도, 아니면 멈춰버릴 수도 있다. 이 또한 아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글쓰기에 푹 빠져 있기만 한다면 말이다.
객관적인 시간이 있고 경험으로서의 시간이 있다. 당신은 글쓰기를 위해 시간을 만들어내고 싶고 그 시간을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싶을 것이다. 머리를 집중하고 가슴을 열고 손목시계는 앞에다 풀어놓고 말이다.
5분 동안 아날로그시계의 분침을 보는 방법으로 시간의 속도를 늦춰보자. 5분이라는 시간의 환상적인 길이와 풍부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누군가 바지에 제트기 엔진을 넣어놓은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돌아다니지 말라.
당신의 책상에서도 유럽 카페에서와 같은 시간을 만들 수 있다. 매일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조용히 당신의 명작을 창작하라.
시간을 갖거나 시간을 낭비하거나 둘 중 하나다. 당신이 선택하기에 달렸다.
불필요한 감정 다스리기
우리는 모든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 감정이란 곧 예술의 생명이니까. 감정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표시이고 인간의 가장 강력한 내적 동기이며 인생을 벼리는 날카로운 칼과 같다. 당연히 우리는 감정과 더불어 살아가길 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감정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가령 한 동료 작가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치자. 당신은 일주일 내내 그 소식 때문에 울적해하고 싶은가 아니면 고통을 순식간에 제압해버리고 싶은가? 편집자가 당신의 단편소설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밤마다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싶은가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고 싶은가? 2년 동안 아무 작품도 발표하지 못했다. 깊은 절망에 빠져 반 고흐처럼 테레빈유를 마실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에게 긍정적 낙관주의를 주입하며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패배하지도 않았다”라고 외칠 것인가? 이 모든 경우 당신은 아무도 후자를 원할 것이다. 감정이 당신을 조종하게 내버려 두면 당신은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 인형이 될 뿐이다. 감정이 당신을 지배하게 내버려 두면 당신은 새로 깎은 뾰족한 연필로 훌륭한 소설은 안 쓰고 당신의 심장을 찌르게 될 것이다.
당신은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감정의 주인이 되길 원한다. 이것이 너무 벅찬 목표 같다면 다시 한번 생각하기 바란다. 이제껏 ‘이런 기분은 느끼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한 뒤 그 감정을 털어내자마자 바로 기분이 나아진 적이 한 번도 없었는가? 내 말이 그 말이다. 당신은 할 수 있다!
본디 우리를 쓰러뜨리는 모든 감정들, 예컨대 고통, 좌절, 회한, 자책, 분노, 슬픔, 공허함, 무력감, 질투, 두려움 등은 자극에 반응해 자동적이고 반사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감정이 도착한 다음 순간, 그 감정을 열렬히 받아들이며 기꺼이 머물라고 자리를 내어줄지 아니면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가리키며 저기로 나가 달라고 할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원치 않는 감정이 도착하는 순간 단 몇 초 안에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서적 균형 잡기(emotional mastery)이다.
마음챙김은 우리의 감정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일도 포함한다. 작가 에이전트에게서 온 퉁명스러운 이메일을 다시 읽을 때마다 상처가 된다면 그 메일은 지우는 편이 낫다. 무엇 때문에 저장하고 있는가? 읽으면서 한 번 더 속이 뒤집히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언젠가 복수할 수 있을 때 그에 딱 맞는 독설을 해주기 위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에게 신세지고 있는 친구에게 이메일을 전달해서 대신 한 방 갈겨달라고 부탁할 셈인가? 그러지 말고 지우라. 그냥 떠나보내라. 그것이 당신에게 이롭다.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챙기기 위해 할 일이다. 겨울을 대비한 연료라도 되는 것처럼 분노를 비축하지 말자.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아낌없이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
가끔 우리는 행운을 빈다는 따뜻한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작가가 어떤 연유로 이런 분노를 품고 있는지 알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방대해진 소설을 수정하고 다듬는 고된 작업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풍부한 지성은 정서적 미성숙함에 완전히 굴복해버리고 말았다.
부정적인 감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고, 자랑스러워하고, 미성숙함으로 둘둘 말아 식지 않게 유지한다면 엉망진창인 상황이 줄줄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또 시작일 것이다. 동요하고 분노하고 분을 참지 못해 결국 냉장고 안에 있는 술을 향해 돌진하는 일 말이다.
감정을 잘 보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참한 날들을 맞이할 수 있다. ‘낙관’이나 ‘침착함’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감정을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완전한 마음챙김의 핵심이다.
가만히 있는 스노글로브와 누군가 세게 흔든 스노글로브를 상상해보자. 두 스노글로브의 외관은 똑같지만 혼돈의 유무는 천지차이다. 둘은 똑같이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지만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띤다. 첫 번째 스노글로브에서는 어떤 상상도 가능하다. 하지만 두 번째 스노글로브에서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도, 여행할 방법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첫 번째 스노글로브에서는 미니어처 자동차에 올라탄 후 운전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두 번째 스노글로브에서는 유리 벽에 부딪혀 사고가 나고 말 것이다. 평온 혹은 정서적 혼돈, 어떤 쪽이 당신이 원하는 방향인가?
작가들의 세계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당신은 처음 낸 소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리란 원대한 희망을 품었다. 결과는 반대였다. 고통이 폐부를 찌른다. 당신은 편집자가 당신의 두 번째 소설을 출간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편집자는 원고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더 큰 고통이 엄습한다. 이러한 고통은 약간의 의지력이나 올바른 사고력, 몇 번의 심호흡으로 단번에 털어낼 수 있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글 쓰는 삶은 당신에게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러한 종류의 실망감이 바닥을 치는 기분과 앞날에 대한 절망이라는 형태로 계속 맴도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재앙을 맞닥뜨리더라도 감정적으로 균형을 잡고 정서적 위기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가끔은 분노하고 싶을 수 있다. 가끔은 피할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을 수도 있다. 가끔은 인생을 말도 안 되게 비관적으로 바라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가장 어두운 감정들이 찾아올 때도 있고 기분이 나아질 이유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식은 아니다. 초콜릿을 자제해서 먹듯이 어두운 감정 또한 자제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달콤한 초콜릿과 마찬가지로 씁쓸한 감정도 우리 건강에 오래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서지능이 뛰어난 사람,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떤 감정을 피하려고 고군분투하지 않고 원치 않는 감정이 생기지 않으리란 헛된 희망도 품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며 원하는 감정은 받아들이고 원하지 않는 감정은 버림으로써 감정의 주인이 된다. 쉽지 않지만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다음에 화가 날 때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결정하라.
다음에 침울해질 때는 침울해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라.
다음에 질투가 날 때는 질투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라.
다음에 어떤 감정을 느낄 때는 그 감정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버릴지 바로 선택하라.
마음챙김의 여섯 가지 원칙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재산이다. 당신은 갑작스러운 상황과 변덕스러운 기분 변화에 당신의 풍부한 영감을 도난당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ᄄᅠᇂ게 하면 그러한 도난 행위를 막고 마음의 평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고요함 안에서 당신의 뉴런이 우주의 점을 자유로이 연결할 수 있을까?
창조적 마음챙김(creative mindfulness)을 연습하면 이 도난 행위를 예방할 수 있다. 창조적 마음챙김은 일반적 마음챙김(mindfulness, 알아차림, 깨어 있음)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고 내 생각을 관찰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당신은 자신이 ‘난 지금 내 글에서 도망치고 있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그걸 알아차리고, 생각은 다시 사라진다. 마음챙김의 목표는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으려 하지 않고, 그 생각에 산 채로 잡아먹히지 않고 아무 정신적 고통 없이 어떤 생각이든 왔다가 사라지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전통적인 마음챙김은 훌륭한 마음 수련 방식 중 하나다. 여러 심리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음챙김 명상을 하면 건강이 좋아지고 행복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짧은 명상만으로 마법처럼 평정심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정심만 찾으면 그걸로 끝일까? 평정심을 찾았다고 해서 온전히 깨어 있거나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거나 뭔가를 창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당신은 첫걸음을 커다랗게 뗐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용기를 내 똑바로 쳐다보고 그걸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하지만 창조적 작업을 하려면 그 이상이 필요하다.
‘난 지금 내 글에서 도망치고 있어’라는 생각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고통과 절망에 허우적대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면 훌륭하게 잘 해낸 것이다. 하지만 작가들에게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창조적 마음챙김’이 필요하다. 창조적 마음챙김의 목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내 생각을 힐난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 다시 글쓰기의 세계로 들어가고 정신건강을 회복하는 데 있다. 그저 차분하게 집중하고 각성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고 난 후 미친 듯이 글을 쓸 수 있어야만 창조적 마음챙김의 목표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마음챙김은 특별한 방식으로 관심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자각은 순간의 현실을 더 또렷하게 인식하고 더 명확하게 바라보고 더 잘 수용하게 한다. -존 카밧진
설거지를 할 때는 설거지만 해야 한다. 이 말은 자신이 설거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한다는 뜻이다. 완전히 내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내 호흡을 따르고 내 존재를 의식하고 내 생각과 행동을 의식하는 것이다. -틱낫한
한 걸음 더 나아간 창조적 마음챙김이란 이 두 사람이 설명한 마음챙김을 숙달하고, 이에 더해 깊은 생각과 왕성한 실행력, 완전히 꺠어 있는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완전히 깨어있는 삶’이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일찍이 설명한 개념과 비슷하다.
수백만 명의 사람이 육체노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깨어 있지만 오직 그중 한 명만이 정신의 분투를 위해 깨어 있다. 그리고 수천만 명 중 오직 한 명만이 시적인 삶이나 신성한 삶에 깨어 있다. 우리는 수없이 다시 깨어야 하고, 또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창조적 마음챙김의 여섯 가지 원칙>
두려움 없이 나의 생각을 관찰한다.
온갖 변명, 스스로를 미치게 만드는 모든 방식, 도피, 비밀스러운 불평, 고통의 근원, 이 모든 것이 당신이 하고 있는 그 생각 안에 들어 있다. 당신의 생각을 인식하기 위해 깨어 있으라.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에서 한 발 떨어져보자.
이 말은 약간의 호기심과 낙관적 확신 그리고 철학적 사유를 갖춘 채 자신의 생각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관찰하라는 의미다. 즉 자신의 생각을 이해는 하지만 그것에 짓눌리지는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이 정말로 거리를 두는 것은 생각 자체가 아니라 생각에 붙어 있는 고통, 아픔, 중압감이다. 거리를 두고 나면 당신은 ‘나는 지금 내 글에서 도망치고 있어’와 같은 괴로운 생각을 참아내고 나아가 그 생각을 생산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찬찬히 뜯어보자.
판단은 하지 않되 현명한 재판관이 되어보자. ‘난 지금 내 글에서 도망치고 있어’라는 생각이 들 때 자기 자신에게 혹독한 비난을 퍼붓지 말라. 그보다는 잠시 멈춰서 그 생각의 진실이나 잘잘못을 따져보고 숨은 뜻을 이해하라. 그런 다음 자신이 내린 평가를 근거로 해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하라. 다시 말해 일단 멈춘 다음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내린 평가에 근거해 자신의 의지를 다시 말해보자.
만약 곰곰이 생각해본 후 자신의 글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 긍정적인 의도와 일치하는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시는 글쓰기에서 도망치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평가를 내리기 이전의 생각에 자신이 새롭게 이해하고 결심한 내용을 가지고 응답하라는 뜻이다.
뇌 속 신경세포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마음을 비우고, 창작할 준비를 하자.
일반적인 마음챙김은 단순히 생각을 관찰하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적 마음챙김은 거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사라지게 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야 한다. 창조적 아이디어들이 샘솟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관찰하고, 평가하고, 다시 말하라. 그런 다음 점점 깊어지는 고요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라.
작업에 몰입하자.
다시 요약하자면 관찰하기, 거리두기, 평가하기, 다시 말하기, 비우기, 몰입하기의 여섯 단계다. 이 과정을 따라가 보면 아마 이런 생각의 흐름을 거칠 것이다.
‘아! 난 내 소설에서 도망치고 있어. 지긋지긋해! 난 정말 나약해 빠졌어! 이 생각만 하면 괴로워 미치겠어. 잠깐, 생각을 조금 더 해보자. 난 내 소설에서 도망치고 있어. 그래. 이제 나를 평가하지 않고 다시 말해볼까. 나는 내 소설에서 도망치고 있어. 그래. 다시 들으니 조금 참을 만하네. 휴, 하지만 생각하기조차 너무 힘들었어. 젠장, 진정하고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내 소설에서 도망치고 있어. 그래. 이건 엄연한 진실이야. 상황을 정직하게 평가해보건대 맞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래.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하군. 인정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괜찮아. 그럼 이제 난 무엇을 하고 싶지? 맞아, 나는 소설을 다시 쓰고 싶어. 그래,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 꼭 그렇게 하고 말 거야.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렇게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까지 내 소설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 생각을 받아들이자. 이제 내가 할 일은 고요한 상태로 머릿속을 비우고 신경세포들을 자유로이 놓아준 다음 내 소설로 즐겁게 다시 돌아가는 거야!’
막상 이 과정을 글로 써놓고 보니 매우 시끄럽고 정신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 두뇌에선 그렇지 않다. 창조적 마음챙김의 원칙만 따른다면 불평, 의심, 방해, 완전한 자유, 집중, 이 모든 과정을 눈 깜짝할 새에 끝낼 수 있다.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말이다.
창조적 마음챙김이 좋은 이유가 또 있다. 창조적 마음챙김을 연습하다 보면 마음이 안정되면서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당신을 좀먹는 일이 점차 줄어든다. 하지만 당신의 생각이 어떠한 고통, 힘겨움, 불안, 의심, 절망도 낳지 않는 완벽한 때란 결코 오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 창조적 마음챙김을 연습해야 한다. 그게 작가의 내면을 건강하고 생산적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면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중심 공간이다. 당신은 그 공간을 온통 어수선하고 시끌벅적하게 만들 수도, 온갖 생각이 당신을 깊은 우울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도록 방치할 수도 있다. 혹은 창조적 마음챙김을 훈련해 자기 내면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 내면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내면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창조적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갖는 개성이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에너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격렬한 욕망.
자신의 개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 이 몸부림은 이들을 남들과 다르게 만들고 이들의 삶을 일생 동안 질주하게 만든다.
하지만 신은 바보가 아니다. 어떠한 개인에게 개성을 부여했다면 그에게 충분한 능력과 열정과 에너지와 개성을 펼칠 욕구도 함께 준다. 그렇지 않으면 개성이란 것이 우주적 농담이 되어버릴 텐데 신은 그런 식의 장난은 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개성이 강한 사람에게 남들보다 더 큰 추진력을 준다. 따라서 개성이 강한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있고 더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으며 더 커다란 욕구와 더 강한 필요와 더 뜨거운 열정과 더 질긴 생명력과 더 큰 갈망이 있다. 개성 강한 이들이 가진 남다른 추진력과 야망, 자부심, 욕망은 늘 뭔가에 쫓기고 만족을 모르게 만든다. 이 모든 남다른 요소들을 잘 관리하고 규제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신의 후한 조치에 감사할 것이다. 하지만 이 남다름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인생은 제멋대로에 위험투성이로 변할 수 있다.
신은 개성이 강한 사람을 창조해 반드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신의 길을 가야 하고,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하게끔 만든다. 그런 다음 자신이 지구를 흔들고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하고 그런 일을 추구하는 에너지와 세상 전체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까지 줘놓고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뒤로 돌아서 그를 고문하는 식이다. 그는 실존을 고민하고, 어떤 것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온몸이 아드레날린에 휩싸이고, 꽉 차서 무거워진 머리 때문에 몸 전체의 균형을 잃고 자기만의 세계로 나동그라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을 더 짙게 만든다.
창조적인 사람은 개성이라는 권한을 가진 대가로 인생에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들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는 애도의 시를 쓰고 체제 전복적인 소설을 쓰고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안고 지구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실존적인 반응이며 신이 그를 떨어뜨려놓은 이 세상을 향하 ㄴ애처롭고도 통렬한 질문이다. 그뿐 아니라 신은 그에게 이 세상을 지킬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기를 기대한다.
물론 우리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개성이 강하고 훌륭하지만 또한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클 수도 있지만 작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예컨대 시를 쓰기 위해 혹은 우리 안에 있는 풍차와 싸우기 위해 가까스로 인내하는 정도지만 앞서 말한 일들은 수천 번의 부침, 좌절과 실망, 분노와 애통함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혹시 지금까지 내가 묘사한 것이 당신 내면의 풍경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히 신이 내린 개성을 가진 사람이다.
개성은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신은 당신을 개성이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놓았을 수 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설계도는 주지 않았다. 그것은 당신이 알아내야 한다. 설령 머리와 가슴에 깊은 고통이 따른다 해도 말이다.
당신이라는 존재 그대로 개성이 강한 사람이 되어라. 당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기 관찰자와 같은 태도로 감정의 풍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불의에 분노하되 그 분노가 당신의 몸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관찰하자. 미친 듯이 글을 쓰면서도 혹시 너무 빨리 달리는 것은 아닌지 관찰하자. 스스로를 모니터하라! 이것은 의무다.
느리고 깊게 숨을 쉬면서 차분해지는 훈련을 하자. 호흡 조절보다 더 좋은 진정제는 없다. 호흡 조절을 내적인 혼란과 조급함에 대항하는 도구로 사용하자.
개성의 무게를 최대한 가볍게 만들자.
욕망하고 또 욕망하라
본능적으로 우리는 지금껏 별의별 세상이 수도 없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러다 가끔씩은 지구처럼 놀랍도록 아름답고 의미 있고 온전한 세계가 창조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이 지구처럼 아름답고 의미 잇고 온전한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싶은 이 욕망은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른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첫 번째 단계는 재료를 모으는 일이다. 우리가 말하는 재료는 아이디어, 이미지, 감정, 맞춤법과 문장부호 활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만들 세계를 구성하는 분자일 뿐이지 소립자는 아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는 에너지다. 우리의 글도 그렇다. 글이란 결국 욕망이 창조해낸 문장들로 이루어진다.
욕망이 꺾이는 순간 세계를 창조하겠다는 의지도 꺾인다. 반면 욕망이 되살아나면 어느새 언어의 세계에서 뛰놀고 있다. 욕망에 집중하자! 욕망에만 집중하면 눈은 언제나 아이디어와 글이 샘솟는 근원지를 바라보게 된다.
글을 쓰면서 어떤 문제를 만나게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욕망을 되살리는 데만 집중하라. 인물이 평면적이어서 문제라면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욕망에 불을 지펴라. 소설의 시놉시스를 써야 하는데 자꾸만 의기소침해진다면 작품을 대중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을 되살려라. 책의 3장은 훌륭한데 4장이 지루하다면 4장을 더 재미있게 만들려는 욕망을 불러일으켜라.
목적의식과 욕망 없이는 어떤 작품도 창조할 수 없어요.
그렇다. 동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단지 동기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경력을 쌓아온 분야에 관해 훌륭한 논픽션 책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단순한 동기에 불과하다. 동기는 작은 장애물만 만나면 바로 약해진다. 글의 첫 번째 페이지 어딘가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불타오르지 않는다면 실제로 무언가를 창조해낼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작품을 위해 뜨거워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흥분하라! 약간 미쳐도 좋다. 불교는 차분하다. 욕망과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런지 계율을 가르치는 스승은 글을 많이 쓰는 편이 아니다.
작가라는 인간은 욕망으로 똘똘 뭉친 존재이며 그야말로 욕망덩어리다. 그들은 섹스를 갈망하고 쥐꼬리만 한 돈을 갈망하고 노벨상을 갈망한다. 그들은 미친 듯이 원하고, 너무 원해서 괴로워하며,, 욕망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 있다. 이 넘쳐흐르는 욕망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느냐 못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하지만 이처럼 춤추는 욕망이 없다면 작가들은 줄줄이 양로원 복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노인들처럼 무기력해지고 말 것이다. 불타는 욕망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겠다는 목표를 세우자. 그 목표를 존중하자. 그리고 격렬해지자.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세상을 만드는 사람
그건 쉽지가 않지
하지만 난 세상을 만드는 사람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상을 만드는 사람
욕망은 완전한 처방
책의 1장에 머물러 있건 2장을 쓰건
어디에 있건
욕망이 없다면 나는 죽은 몸
매일 나는 욕망을 되살리지 어떻게든
할렐루야!
당신이 가진 욕망에 불을 붙일 때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 너무 냉담하지 말고 너무 거리 두지 말고 너무 침착하지 말라. 그러다가는 본인도 굶고 예술도 굶는다. 타오르자! 이 타오르는 불길 안에서 묘사할 가치가 있는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원하라. 그거면 된다.
정말 원하라. 정말 그거면 된다.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면서도 그 욕망을 억눌러왔다면? 억누르다가 결국 말살해버렸다면? 식탁을 꾸미자. 촛불을 켜자. 아끼는 접시를 꺼내자. 아주 맛있는 음식을 해 먹자. 열정을 아끼지 말자.
욕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는가? 아마 수백 가지의 의심과 실망 밑에 묻어놓았을 것이다. 그곳에 섬광을 비춰보자. 아니, 스포트라이트를 비춰보자!
의식적 자아 성찰(mindful self-reflection)이란 생산적인 변화를 이루고 싶을 때, 창조적인 삶을 살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싶을 때, 자신이 목표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을 때 필요한 태도다. 의식적 자아 성찰은 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한 레시피의 결정적 재료다. 비생산적이고 단순한 걱정과는 다르다. 의식적 자아 성찰이 갖는 정서적 요소인 차분함은 호흡으로 불안을 다스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꿈을 존중하는 방법을 연습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쓸 다음 소설은 어디에서 올까? 단언컨대 찬장이나 옷장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초대해야 온다. 우리는 새 작품의 저장고이자 주인이고 전달자다. 새 작품이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건 우리가 가진 창조성을 꽃피우지 못하게 막는 것과 같다.
타인의 창작만 도울 게 아니라 내가 앞에 나서고 내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돈도 더 많이 벌고 내가 가진 재능을 펼치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정말 작가일까? 만약 내가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그는 한 가지 존재일 필요가 없었다. 꿈속 동물들처럼 변신하고 변모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성 작가들의 산파 역할이 가진 정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도 쓰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이것이 정답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명확하게 이것 아니면 저것 중에서 답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을 돕거나 내가 나서거나 둘 중에 하나만 해야지 둘 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 그는 이 무의식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삶을 이처럼 깊게 돌아보지 않았다면 나는 갇혀버렸을 거야. 완전히 갇혀서 내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겠지. 글을 쓰려면 먼저 자신과 관계를 맺어야 해. 치어리더나 감독이 될 게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사건을 맡은 사설탐정이 되어 증거를 뒤지고 단서를 찾아야 해. 언제나 삶이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탐정이 필요하단 뜻인 줄은 미처 몰랐네.
당신은 미스터리다. 동시에 탐정이다. 당신만의 의식적 자아 성찰 훈련을 시작하라.
고요하고 차분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자아 성찰을 시작해보자. 그런 다음 내 글쓰기 생활에 무엇이 필요한지, 그 필요를 어떻게 충족할지 고민해보자.
고요해져라. 성찰하라. 차분함을 유지하라. 깨달은 바를 실천하라.
트라우마와 동거하기
자유로이 실수하는 법 배우기. 그도 이 세상 모든 사람과 같이 실수를 한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생각,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건 누군가 이미 말했다거나 자신은 이런 의견을 낼 만큼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갖지 못했다는 걱정 없이 자유롭게 써 내려가기.
몇 년이라도 더 빨리 문제를 직시했다면 이렇게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후회가 되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문제를 직면할 수 있어 다행이다.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 것도. 앞으로 겪을 과정에서 어떠한 감정이든 느낄 준비가 되었고 그 여정을 숨김없이 기록하겠다고 다짐했다.
어려움 앞에서도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매일 컴퓨터를 켬으로써 오히려 아픔을 극복해나갈 수 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상처 입은 내면을 발견한 후 글쓰기를 향해, 인생을 향해 더 단단한 걸음으로 내딛기를 바란다.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자. 그리고 무엇이 글쓰기를 가로막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보겠다고 결심하자.
어쨌든 나는 글을 쓸 것이다. 삶의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글을 계속 쓸 수 있는지 살펴보자.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글 쓰는 시간을 하루 중 어디에 집어넣을까?
글을 써야 한다거나 글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책에 대해서만 생각하길 바랐다.
매일 자아 성찰을 하지 않으면 글쓰기 생활이 다시 바람처럼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최소 한 시간씩 글을 쓰고 주말 아침에도 거르지 않기로 다짐했다.
글쓰기 생활을 되돌아보고 유지하고 개선하도록 도와주는 코치가 있다. 바로 당신 자신이다. 그 코치의 조언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성찰하는 태도’를 갖추고 최선의 답을 구해보자.
더 나은 글을 위해 더 나은 사람 되기
작업실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지만 당신 인생이 엉망진창이라면 행복하게 작품을 생산해내기 어렵다. 글쓰기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다른 모든 것들 외에도 당신의 자아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킨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당신은 지금보다 덜 혼란스럽고 더 자신감 있고 더 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덜 방어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자아는 지속적으로 성숙하지 않으면 퇴행하게 되어 있다. 나는 나의 내면을 업그레이드해야 해. 지금 당신에게 정확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내면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보자. 당신이 지향하는 자질이나 가치를 적어 목록을 만들고 거기서 서너 가지 항목을 선택한 후 다음과 같이 단순한 문장을 만든다. “나는 더 차분하고 더 절제하고 더 사려 깊은 삶을 살 것이다.” 혹은 “나는 더 열정적이고 더 생산적이고 현재에 더 집중하는 삶을 살 것이다.” 혹은 “나는 조금 더 관대하고 더 야심 찬 인생을 살 것이다.” 그다음에는 이 훌륭한 문장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무언가 관대한 일을 하라. 무언가 야심 찬 일에 도전하라. 조금 더 차분해지도록 명상을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절제력을 키우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존중하기 위해 매일매일 글을 쓰라.
단순하다. 어렵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고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
“이번 일요일엔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다음 소설을 써보겠어.”
훌륭하다. 이제 실제로 일요일 내내 가만히 앉아서 새 소설을 쓰자.
“나는 불안감과 열등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렇게 하기 위해 심호흡 기술을 배울 거야. 그리고 나의 이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한 톨도 남김없이 밀어낼 거야.”
훌륭하다. 깊이 숨을 쉬고 열등감을 몸 밖으로 내보내고 가치 있는 글을 한 편 써보자.
“나는 감정을 불필요하게 과장하는 습관과 나르시시즘을 고치고 싶어.”
훌륭하다. 월요일에 일어나서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15분이 흐른 뒤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해도 괜한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드라마를 만들지 말라. 그 대신 계속 글을 쓰라.
물론 이 모든 것이 말처럼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괜찮은 문장을 하나 만든 후 그대로 실천하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은 거짓에 가깝다. 그렇지만 누가 알겠는가? 시도해서 잃을 게 뭐가 있겠는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끌어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자.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당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 한 단계 성숙한 자아를 그려보자. 그 비전에 잘 맞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적어보자. 그 구체적 행동을 실천에 옮기자. 그런 사람이 되자!
탁월한 의도가 매혹적인 배경을 만들어낸다. 의도에 따라 배경을 만들어보자. 배경은 단순히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의하는 장소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개념의 일부다. 이 상상 속 공간은 현실에서 가져왔으나 마치 꿈속 배경처럼 비현실적이다. 이 상상 속 공간은 오로지 저자의 의도를 지지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배경도 작가의 의도로 여기라. 배경은 인물, 구성, 주제 등 작가가 만들어낸 모든 것만큼 중요하다.
세상 속에서 무언가 창조하는 습관 들이기. 복잡한 마음을 고요하게 달래기.
어쩌면 작가란 풍경을 무시하고 초월하는 사람이다. 작가라면 꽃 카탈로그 사진작가나 새 관찰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는 자꾸만 떠오르는, 끝도 없고 무게도 없음 보이지도 않는 이 몽상 속에 빠져들어야 한다.
당신은 파도 소리를 듣는 순간, 어치의 지저귐을 듣는 순간, 서재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 순간 생산적인 공상을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예술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잡생각을 하는 나쁜 습관에 빠진 사람인가?
상상하는 시간을 정해두자. 한 시간에 2-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살짝 웃어보자. 이제부터 몽상에 빠져 더 먼 장소를 방문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복잡한 잡념을 천천히 멈춰보자. 오디오 볼륨처럼 그 소리를 낮출 수 있다고 상상해보자. 소리가 잦아지다 아예 안 들릴 때까지 볼륨을 줄여보자.
계속 웃자. 침묵이 약간 불안하게 느껴진다 해도.
기다리자. 상상력의 문을 열었으면 닫히지 않게 잡고 있겠다고 결심하자. 얼마 후 푸른 코끼리나 우주 정착민들, 새로운 소설 아이디어가 들어올지 모른다.
웃으면서 기다리자. 마치 선물을 푸는 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계속 기다리자. 오래 기다릴수록 근육은 더 강해진다. 상상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근육이다.
의식적으로 마음을 활짝 열어젖혀 꿈과 아이디어가 들어오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상상력의 문을 여는 것은 자동으로 되지 않는다. 다른 차원의 문을 여는 것 이상이다. 시간 여행을 위해 뒤틀린 공간의 겹을 분리해야 할 수도 있다. 상상하려면 일상적인 생각을 잠재워야 한다. 그리고 연습해야 한다. 사실 아주 재미있는 연습이다. 침묵을 초대하고 꿈꿀 준비를 하는 연습이라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연습이다.
자기 자신에게 상상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정말 상상력을 사용할 수 있다. 당신에게는 상상력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이 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욕구에 귀를 기울이자.
당신의 상상력에 선물을 하나 주자. 어떤 선물이 좋을까? 상상력을 맘껏 펼쳐보자.
한 문단도 충분히 아기자기하게 꾸밀 수 있다. 첫 문단은 당신이 가진 완전하고도 열린 상상력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세계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진 에세이집.
상상력을 규칙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용해보자.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첫 문장이든 가슴 뛰게 하는 마무리 문장이든, 당신이 쓴 한 글자 한 글자 모두가 풍부하게 상상했다는 느낌이 들도록 말이다. 문장 안에서, 문단 안에서 세계를 창조하라. 한 페이지에서 세계를 창조하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작품을 상상하고 다시 첫 번째 문단으로 돌아가라. 당신이 방금 한 여행에서 포착한 무엇인가를 이용해 첫 번째 문단을 더 풍부하게 만들라. 그런 다음 작품의 제목을 정하라. 그러고 나서 작품의 마지막 문단을 쓰라. 자신의 성공을 가볍게 축하하라.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는 방식 혹은 앉은자리에서 단번에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축하해도 좋다.
자신만의 글쓰기 공간을 마련하되 글 쓰는 장소를 확장해나가라.
장소가 어디이고 이유가 무엇이건 그곳에서 당신이 글을 썼다면 당신은 자의식에 방해를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당신은 지금 있는 그 장소에서 글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당신이 있을 곳이니까. 여기 아닌 어딘가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 가끔씩은 그곳을 벗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여행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으로 떠나자. 꿈도 이루고 길 위에서 글쓰기도 경험할 수 있다.
‘글쓰기 휴가(writing retreat)’
작업 도구와 현재 작업 중인 프로젝트를 가져갈 것. 목적지를 생각하는 것만큼 글에 대해서도 생각할 것.
당신의 무기는 당신만의 창조적인 정신이다. 지금 가는 장소의 역사를 준비할 필요 없다. 당신이 챙겨야 할 것은 기차 스케줄이 아니라 글을 향한 열망이다. 왜 뇌를 ‘화장실이 어느 쪽인가요?’나 “이 샐러드에 달팽이가 들어가나요?”같은 외국어로 채워야 하나? 소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는데.
당신은 인간의 실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작가로서 여행하자. 티켓을 사고 짐을 가볍게 싸면 그걸로 여행 준비는 끝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조적인 본성을 열어 앞으로의 경험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상상력과 미적 감각, 영혼에 어울리는 여행 일정표를 짜는 것이며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2주간의 이탈리아 여행 기간 동안 나는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의 전체 구성을 잡고 여러 장면을 생각해 돌아올 거야. 아주 많은 장면을 얻어서 돌아올 테니 아이스크림 때문에 몸무게가 1.5kg킬로그램 정도 늘어도 울지 않겠어.”
여행을 떠난다. 노트북을 챙기는 일이 그리 즐겁지 않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고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자마자 노트북을 켤 것이다. 탑승하기 전 대기 시간 동안 글을 쓸 것이다. 주변 사람 누구도 글을 쓰고 있지 않지만 당신은 예외라는 걸 벌써 증명했다. 맞은편에 앉은 작가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고 옆에 있는 작가는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지만 당신은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비행기에 탑승한다. 비행기가 이륙한다. 고도를 느낀다. 이제 전자 기기 사용이 가능하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 비행기에 있는 다른 작가들은 이 안내 방송을 신경 쓰지 않지만 당신은 노트북을 꺼내고 쓰던 글을 마저 쓴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영화의 흥행이 아니었다. 대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과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지금 우리는 이 영역에 와 있다. 세상에 무언가 말하고 싶은 영역 말이다.
이 세상에 100퍼센트 순수한 묘사는 없다는 사실만 깨달으면 작가로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 세상에 예술적 중립성이란 없다. 그런 건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나는 당신이 조금 더 대담하고 조금 더 정직하게 선택하길 바란다. 중립성 따위는 없다. 하고자 하는 말을 하라.
파리의 역사를 쓰려고 할 때 반드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할까? 바로 어제부터 시작해도 역사라는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모든 역사 기록물은 주관적이다. 99퍼센트는 버려지고 그나마 남은 1퍼센트도 사실이 아니라 관점일 뿐이다. 문제는 ‘파리의 진짜 역사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당신의 의도는 무엇인가?’이다.
글쓰기는 해석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아무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늘 행복하고 소소한 이야기만 하고 싶어서 순진한 척 연기할 수도 있다.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하라. 그럴 때조차 당신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으며 독자들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전하게 갈 수도 있고 말하고 싶은 진짜 속내를 꺼내놓을 수도 있다. 진짜 생각을 숨기는 게 목표라면 왜 굳이 위험하게 독자들과 관객들이 우글거리는 공적 공간으로 들어가려 하는가? 뭔가 쓰려고 했다면 정말 하고자 하는 말을 써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솔직하게 말하라. 긴 침묵의 시간은 어차피 때가 되면 올 테니까.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은 참여적 창조 행위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공적인 발화를 함으로써 자신이 믿는 것을 지지하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집회에 참여하는 작곡가는 현실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집회를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다면 그는 운동가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대의를 위해 노래를 작곡했다면 그것은 참여적 창조 행위다. 자신의 재능, 기술, 마음, 가슴, 손, 개인이 가진 존재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이것은 청원서에 서명하고 기부금을 내고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일이다. 무엇이 더 훌륭하다거나 더 용감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다를 뿐이다. 똑같은 관점에서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의사가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의료 행위를 제공했다면 그를 사회참여를 한 운동가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후에 그 땅의 조건에 맞는 새로운 의료 절차를 개발했다면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 혁신이 필요한 분야에서 창조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 저항곡 작곡과 새로운 의료 절차 개발은 모두 참여적 창조 행위로, 이들은 이런 노력을 통해 이 사회에 윤리적인 봉사를 한다.
‘참여’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참여적 창조’는 윤리적 서비스 영역에서 창조적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작가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 문명을 살아 있게 한다. 인간으로서도 참여하고 작품으로서도 참여한다. 작가는 한 인간으로서 어떤 조직에 들어가고 어떤 운동을 지지할 수 있다. 또한 일정 시간을 할애해 분명한 사회적, 정치적 견해를 담은 예술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참여적 창조성’이나 ‘참여파 예술가’라는 이 유용한 문구를 더 자주 사용하고 실천해야 한다. ‘참여적 창조성’은 오직 시간의 일부만 할애해 사회, 정치적인 글을 쓰는 행위다. 자신의 소설을 쓰지만 가끔은 ‘멋진 신세계’나 ‘동물 농장’ 같은’ 작품을 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작가들은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을 탄압하려 하는 거대한 힘에 저항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진실을 말하는 상징적인 작품은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카프카적인’ 혹은 ‘오웰적인’ 작품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매일 더 많이 원해야 한다. 어떤 작가들은 사회적 참여 작품을 자신의 유일한 작품이나 주요 작품으로 삼길 원치 않을 수 있다. 그래도 파트타임으로 참여할 수는 있다. 그렇지 않은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내가 사는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작가라면 적어도 가끔은 참여적 창조성의 길을 가길 바란다. 당시니 작가로서 머물러야 하는 공적 공간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당신의 목소리를 더하고, 당신이 쥔 펜촉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원칙을 옹호하라. 나는 작가인 당신이 공적 공간에서 당신만의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 때로는 생계가, 때로는 우정이, 때로는 사회적 위치가 위험해질지라도 이곳에는 당신이 필요하다.
공적 공간에 당신이 믿는 것을 지지하는 참여적 글을 퍼부으라. 그러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고 위트 넘칠 수 있으며 매력적인 작가가 될 수 있다. 불의에 맞서라.
위험을 감수하라. 어떤 종류의 위험이어도 좋다. 작가로서 위험을 감수하는 습관을 갖는 연습을 하라. 일어섰을 때 따라오는 불안과 두려움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라.
이슈를 고르라. 문맹, 불관용, 착취, 핵무기 등. 그런 다음 아름다우면서도 논쟁적인 픽션이나 논픽션 작품을 써보라. 당신 손으로 예술과 신념을 결혼시켜보라.
사적인과 공적인이란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당신의 작품이 대중에게 발표되지만 사적으로 남길 바라는가? 아니면 사회적 미디어나 강연 연단 같은 공적 공간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일어나라.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다.
일상 예술화 전략
이전까지 숨겨왔던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을 지금 시작하자.
진실을 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라.
세상에 없던 의미를 만들라
인생이란 나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인생은 선물인 동시에 의무이며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이미지로 우리 자신을 창조할 의무가 있다.
나는 의미를 만든다. 내가 만들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의미를. 그전에 존재하는 건 다만 의미의 가능성뿐이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의미 있는 경험을 할지 모를, 배우자와 아이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나눌지 모를, 내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지 모를 가능성이다.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면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을 살아갈 기회를 낭비하는 셈이다.
의미 창조자의 역할을 선택하고 인생에서 반드시 의미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거나 다짐하지 않는 이상 고요한 서재, 최신 컴퓨터, 위대한 아이디어, 맞춤법 요령, 다른 어떤 글쓰기 도구나 글쓰기 습관도 모두 무용지물이다. 의미 창조자로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건하게 침묵을 지키며 의미가 저절로 생겨나길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의미 창조자로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혁명적인 자세를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이 혁명의 기반은 지난 200년에 걸쳐 완성된 하나의 개념, 즉 ‘우주에 의미가 없다고 해도 인생에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환경과 조건이라는 틀 안에서 취향과 핑계, 약점과 현실에 묶여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의미를 만들고 싶은지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신이 우리에게 내린 본성이다. 나는 어떤 것이 나를 옳게 또는 행복하게 만들지 선택할 수 있고 당신도 그렇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했을 때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당신은 의미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누군가를 돌아보며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묻는 순간 당신은 가식과 우울에 빠지게 된다. 상대가 구루이든 작가이든 성직자이든 부모이든 정치가이든 장군이든 손윗사람이든 편집자이든 작가 에이전트이든 간에 단순히 그 사람이 가진 명성 때문에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자신만의 의미 창조에서 벗어나 얄팍하고 평범한 사람이 된다.
당신, 오직 당신만이 의미 결정권을 갖고 있다. 이는 모든 현대인에게 해당하는 굉장한 대전제다. 우리는 생물학적 혹은 심리적인 면에서 제한되어 있지만 실존적인 면에서는 자유롭다. 이러한 실존적 자유를 존중하며 살지 않으면 악몽이나 공황발작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면 자신의 참모습을 선택하고 중요한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지 않은 것, 그렇게 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이 무의미한 우주 안에서 자신이 언제라도 대체 가능한 존재이며 그러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방법 따윈 아무것도 생각하면 무척 고통스럽다.
지금 즉시 그러한 고통일랑 날려버리고 내가 의미를 만드는 한 반드시 의미가 존재한다고 선언하라. 그렇게 하는 순간 이전에 있던 모든 신념 체계, 즉 당신에게 무엇을 믿으라 말하거나 이 세상에는 믿을 것이 없다고 말하던 온갖 신념 체계가 저절로 사라진다. 이 우주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신경 쓰지 말고 마음속에 자리 잡은 두려움도 버려라. 오직 당신이 의도하는 인생의 의미를 만들겠다고 자신 있게 선언하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 선언이 아닌가!
의미란 전통적인 신념 체계가 가르치듯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허무주의자들이 느끼듯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세계가 당신 앞에 펼쳐진다.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려는 당신의 노력을 지지하는 철학적, 심리적 버팀목이 생긴다. 당신은 한계, 요구 사항, 나르시시즘으로 가득 찬 전통에서 벗어나 당신의 삶을 가치 있는 무언가로 만들 수 있다. 아직 선언만으로는 그런 가치를 만들지 못했을 수 있지만 방향은 훌륭히 잡은 셈이다. 자신만의 창조라는 방향이다.
당신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중심 교리는 이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좋고, 무엇이 가치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당신만의 우주를 창조하라. 아무것도, 그 누구도 당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선택하지 못하게 막을 수 없고 당신의 고결함과 영웅주의가 발현되지 못하게 막을 수 없다.
의미 창조자의 길은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부여하는 길이기도 하다. 당신은 현실이라는 눈부신 불빛 속으로 걸어 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할 것이며 이러이러한 이유를 가지고 이렇게 하겠다.
당신은 매 순간 자신이 가진 자원, 의도, 에너지, 단호함을 투자해 그 순간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 한 시간 한 시간, 한 해 한 해 그렇게 하라. 때로는 앉거나 바라보면서, 때로는 안거나 키스하면서, 때로는 미친 듯이 일하면서 당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가지고 의미를 만들어라. 당신은 신이 아니다. 그렇다기에는 지나치게 지상에 묶여 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존재다. 거울 속에서 보기 바라는 바로 그 존재다.
이것이 바로 작가에게 필요한 실존적 자세이자 실존적 행위이며 실존적 외침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밖에 없다. 작가가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패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글이 중요하다고 믿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매일 글을 씀으로써 삶이라는 도박에서 이길 수 있다. 그러한 하루가 지나면 작가는 자신의 인생에 끝내주는 한 방을 날렸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으로 보상받는다.
의미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실수다. 의미를 찾는 것도 실수다.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도 실수다. 의미의 부재를 애도하는 것도 실수다. 유일한 진짜 길은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일어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외쳐라. “그래, 결정했어!” 그러고선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다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라.
‘의미를 만들기 위한 투자’와 가장 유사한 글쓰기 프로젝트를 가져온 다음 글을 쓰기 시작하자.
‘의미 창조자의 길’이라고 적은 문장을 만들어 가지고 있는 모든 옷에 꿰매어 붙이자. 조금 더 현실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싶다면 어떤 프로젝트가 당신에게 가장 의미 깊은지 최선을 다해 알아내자. 당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글쓰기 프로젝트의 목록을 만들고 목록에 있는 각 프로젝트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적어보자.
다음 한 시간을 ‘의미가 부재한 시간’으로 그려보고 그런 다음 ‘의미가 충만한 시간’으로 그려보라. 잠시 명상에 빠져보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지난 1-2년간 당신이 쓴 글들을 떠올려보자. 어떤 글이 더 의미가 있고 어떤 글이 더 의미가 없었는가? 보다 의미 있는 글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매 순간 불안을 선택하기
의미 창조는 개인적 책임, 용기, 약속, 진정성 같은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숙함과 평정심을 가지고 해결해야 한다.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 눈 깜짝할 새에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 의미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일어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일어나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지만 새로운 불안을 동반한다.
우리 유전자는 어두운 터널을 피하라고 말하고 우리의 휴머니티는 그곳에서 내 글을 찾을 수만 있다면 뒤져보라고 말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안을 피할지 아니면 진짜 삶에 수반하는 불안을 끌어안을지에 따라서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가 결정된다. 불안을 최소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면 절대 게릴라는 되지 못할 것이다.
진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불안을 감수하고 불안을 껴안고 불안을 기꺼이 맞이해야 한다. 의미창조자에게 불안에서 완전히 은퇴하는 날이란 평생 오지 않는다.
그러니 선택하자. 선택 자체가 불안을 야기하겠지만 그래도 의미를 창조하려면 매번 의식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 선택하지 않는 한 지적인 자유도, 개인적인 자유도, 인간적인 자유도 없다. 특히 당신에게 중요한 가치 앞에서는 반드시 선택을 내려야 한다. 선택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당신에게 의미 있는 어떤 일이 위험을 안고 있다면 그 일을 하길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아서 실패하는 수밖에 없다. 당신은 선택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의식적 선택이 없는 하루는 무의미한 하루아도 같다.
의미란 고정될 수 없다. 의미란 언제나 위태롭다. 의미는 도전이지 정해진 결론이 아니다.
평생 흔들리는 땅 위에서 살겠다.
현실은 늘 움직이고 변화한다. 오늘은 오늘에 맞는 적절한 의미를 만들고 내일은 내일에 맞는 적절한 의미를 만들자.
무엇을 쓸까, 어떻게 쓸까, 묻고 답하기
실존지능, 삶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의미의 영역에서 더 넓은 렌즈로 삶을 살펴보는 능력
다른 지능의 활동을 조직하고 조정하는 지능, 다른 모든 지능이 섬기는 지능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것이 더 의미 있을까? 의미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쓰고 있는 작품에서 의미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 어떻게 다시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