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기획자의 독서(김도영)
"아, 모르겠다. 일단 걷고 와서 마저 고민하자."
기분이 별로 일 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민이 머릿속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와 어깨 위로 올라타 짓누를 때 일단 걷고 보자는 심정으로 집 밖에 나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조금씩 흩어져 있던 생각이 정리되고 고민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진다죠.
자신의 기분에 지지 않기 위해서, 쓸데없는 고민이 생활을 지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걷기를 택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삶 자체가 '기획'의 연속일지도 모르죠.
그런 의미에서 누구든 스스로를 기획자라고 생각하고 살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나는 어떤 스타일로 기획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가려는 노력을 한다면 대환영이고요.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나에게는 의외의 힘을 가져다주는 원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거든요. 그 힘을 바탕 삼아 나만의 무기 하나쯤 만들어둔다면 더 바랄 것 없겠죠. (그리고 단언컨대 그 무기는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강력할 겁니다. 분명히요.)
저는 손에서 책을 떼지 못하는 그런 타입은 아닙니다. 신문 귀퉁이의 부고란까지 찾아 읽는다는 텍스트 중독자도 아니며 대각선 읽기, 사진 찍듯 읽기 등의 속독법을 연마한 사람도 아닙니다. (앞으로의 이야기에도 '하루에 3권 읽기' 같은 독서법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하지만 책이 참 좋습니다. 지금 당장 읽지 않더라도 맘에 드는 책은 언제나 보이는 즉시 사서 책장에 꽂아두죠.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이라는 그 물성과 속성에 가장 큰 매력을 느낍니다. 제목, 표지, 목차, 구성, 삽화 같은 요소들과 손으로 느껴지는 적당한 무게감까지. 하나의 브랜드 같기도 하고 가끔은 인격체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그 '끌어당김'이 좋습니다. 그러니 책을 많이, 빨리 읽는 사람보다는 말 그대로 책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설사 읽고 나서 상세한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괜찮습니다. 책을 읽으며 생각의 결을 맞추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훨씬 중요한 것 같거든요. 좋은 사람과 대화를 할 때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에게 공감과 영향을 준 특정한 부분이 있고 대화 전체를 둘러싼 분위기가 있는 거죠. 결국 그것들이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것처럼 책도 누군가와 대화하듯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내 속에만 가둬두지 않는 게 중요하다.
좋고 싫은 이유를 찾는 과정이 결국 '살아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일 테니까요.
언젠가 야구선수 오승환 선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마무리 투수로서 한창 전성기를 달릴 때 기자가 그 비결에 대해 물었습니다.
"투수로서 공을 던질 때 제일 중요한 게 뭔가요?"
"온몸이죠."
"온몸이요?"
"네. 공 하나를 던지려면 정말 온몸을 다 써야 하거든요. 그러니 온몸으로 던진다고 보는 게 정확하죠."
소설가 장강명 님은 "모든 영감은 불완전한 형태로 다가온다"라고 했습니다. 광고인 박웅현 대표님도 "옳은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무엇인가를 선택한 후 옳게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죠. 매우 동감합니다. 두 의견 모두 과정과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말하는 숙성이란 생각을 머릿속에만 가둔 채 질질 끌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뭔가 좋은 아이디어라고 판단되면 이를 적당한 시간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노출시키라는 얘기죠. 마치 와인이나 고기를 에이징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한 뒤 그 메모와 자주 마주하는 방식을 즐겨 씁니다. 그래서 메모를 노트에 쓰고 덮어두기보다는 PC나 핸드폰 바탕화면에 고정시켜 놓는 걸 더 선호해요. 내가 떠올린 생각을 나 자신에게 먼저 보여주고 그 반응을 자주 체크하는 거죠.
생각도 근육이라 계속 연습과 훈련을 반복해서 그 탄성을 유지해줘야 하는데, 내 힘으로 진득하게 끝까지 생각을 완성한 경험이 없으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여긴 왜 공백으로 두셨어요?"
"공백이 아니라 여백인데요..."
"네?"
"비워둔 게 아니라 남겨둔 거라고요."
저는 아직도 이 대답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늘 무엇인가 아쉬울 때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하죠. 이건 비워둔 것인가 아니면 남겨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책의 본질을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책의 본질은 '읽는 경험'이라고 봅니다. 책이란 결국 읽히기 위해 쓰였고, 역사적으로도 더 많이, 더 오래, 더 잘 읽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읽는 경험을 더 좋게 만들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을 저는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책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파리에서 마주한 경험들은 제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습니다. 이들에게 책이란 숨 쉬거나 걷거나 먹는 행위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자,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는 걸 매 순간 느낄 수 있었거든요.
또한 적어도 제가 만난 대다수의 사람이 책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비겁한 폭력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우리의 일상을 파괴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늘 하던 것을 평소와 똑같이 하면 되는 거죠. 보세요. 파리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어요. 평소처럼 책을 찾고, 읽고, 사랑하고 있잖아요."
"세상 어느 곳을 가든지 강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드는 법이죠. 바로 생명력 때문이에요. 물이 주는 생명력을 따라 사람들이 모이는 거죠. 책도 마찬가지예요. 책에도 생명력이 있거든요.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을 살아 숨 쉬게 해주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죠. 센 강에 부키니스트가 있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건지도 몰라요. 인간이 책을 찾는 이유는 물을 찾는 이유와 같거든요."
저흰 책 읽는 걸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아주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죠. 언제 어디서나 읽고,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또 책을 읽어요.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고요. 대신 주위를 둘러보면 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신들의 삶과 책을 분리하지 않는 바로 그 마음
실제 일본 출판계에서는 작가가 책을 출간한 이후에도 혹시 잘못된 부분이 더 없는지, 시간이 흘러 시대 상황과 맞지 않는 표현이나 단어는 없는지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한 직업윤리 중 하나로 여겨진다고 했습니다. 출간된 작품을 완성작이라 생각하지 않고 계속 다듬고 관리해줘야 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죠.
무엇이든 한 번에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전문가들을 통해 수차례 교정을 거친 책도 어디선가 잘못된 부분이 발견될 수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정오표판, 신장판이라는 건 잘못을 바로잡아 더 좋아진 것,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계속 완벽해지고자 노력하는 것인 셈이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정말 냉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적극적으로 정오표를 발행했는가?'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죠. 끊임없이 잘못된 것을 찾고 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는지 아니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냥 다시 시작하자는 '리셋 증후군'이 돋은 건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린 스타트업Lean Startup'이라는 개념이 있죠. 처음부터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보다는 일단 무엇인가 하나를 만들어놓고서 이를 끝없이 측정하고, 수정하고, 개선하며 발전시켜나가는 방식을 말합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매년 무수히 많은 히트 제품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고요.
초정밀의 극한으로 불리는 우주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루트를 따라 목표물을 향해갈 것 같지만 실상은 비행 중에 수백만 번의 미세한 궤도 수정이 이뤄진다고 합니다.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정오표를 만들고 있고 그 오류를 바로잡는 데 한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죠.
제가 말하는 건 커다란 변화라기보다는 '변주'에 가깝습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조금만 다르게 시작해 보는 거죠. 패션의 흐름이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라면 일상의 변주는 '변안변(변한 듯 안 변한)' 정도 될지 모르겠네요.
늘 읽던 책 말고 새로운 분야의 낯선 책을 골라보는 것. 주말 아침마다 동네 근처 새로운 카페를 한 군데씩 발견해보는 것. 차곡차곡 정성스레 쌓아놓은 플레이리스트 대신 누군가가 추천해준 음악에 하루를 맡겨보는 것. 옷장에 무채색 옷만 한가득이라면 포인트로 노란색 스니커즈 하나 들여놓는 것. 당장 쓸모는 없어도 왠지 마음이 가니까 그냥 덜컥 사보는 것(물론 적정한 예산 안에서...). 이유도 없이 낯선 동네를 방문해 밥 한 끼 먹고 차 한잔 마셔보는 것.
유난 떨지 않아도 우리 일상에 변주를 줄 수 있는 것들은 차고 넘칩니다.
편하고 익숙한 것에서 조금씩 나아가려는 노력이 어느덧 낯선 것을 초월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거겠죠.
각도를 1도만 틀어도 햇빛이 닿는 면적은 어마어마하게 달라진다고 하죠. 우리의 시야도, 생각도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덕분에 요즘은 평소 제 마음이 닿지 않던 곳에 조금씩 길을 터보는 기분으로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기획된 모든 것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항상 구조를 보는 연습을 하자.
우아한 형제들의 김봉진 대표님은 SNS를 통해 늘 책 이야기를 하십니다. 책에 관해 포스팅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김봉진 대표님이 책을 보는 관점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항상 '일'과 '사람', '사회'에 대한 밸런스를 유지하며 책을 읽으신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기업의 본질인 경영도 중요하지만 내 구성원들을 어떻게 대하고 성장시킬 것인지, 나아가 나와 우리는 사회에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흔적이 보입니다.
일본의 크리에이터이자 편집가이며 <편집의 즐거움>이란 책을 쓴 스가쓰케 마사노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의 시대에는 기자보다 편집자의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다. (중략) 게다가 각 분야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져서 다양한 분야를 연결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편집자는 이 좋은 재료를 활용할 줄 아는 요리사가 되어야 한다. 칼질 전문, 밥 짓기 전문처럼 장인의 방식이 아니라 자르고, 굽고, 짓고, 담아내는 모든 걸 해낼 요리사의 재능을 가진 사람의 가치가 비약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앞으로의 교양>, 스가쓰케 마사노부, 항해, p.26
개인적으로 편집을 '기술'이 아닌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세련된 스킬보다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고, 일인자가 군림하기보다는 다양한 스타일이 함께 공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게 에디터의 세계니까요.
자기소개서를 쓰라고 하면 늘 어렵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기소개서만큼 에디팅을 잘해야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관점), 그 속에서 어떤 능력과 장점을 끄집어낼 것인지(주목), 마지막으로 내 경험과 이야기들을 어떻게 엮어 배치할 것인지(구성)에 대한 거니까요.
'내 인생에는 특별한 게 없어'라고 생각하셨다면, 우선 작은 경험들이라도 자르고, 굽고, 짓고, 담아내는 과정을 반복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내 삶의 주인공도 나지만, 내 삶의 에디터 또한 나니까 말입니다.
루틴은 좋은 결과를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한 행동들을 반복하는 것
모든 루틴이 명확한 결과로 연결될 수는 없겠지만 좋은 루틴은 좋은 결과를 위한 영양제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평소에 꾸준히 잘 챙겨 먹으면 훗날 어느 시점에는 분명 도움이 될 거니까요.
"인생은 반복이다.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취한다."
저는 기획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게 중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어떻게 일을 풀어가는 사람인지에 대한 스타일 정도는 정립되어 있어야 하는 거죠.
누군가의 마음에 창을 내고 그 안으로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어주려면 결국 내가 가진 '공기'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남의 공기를 뺏어다가 밀어 넣어줄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러니 여러분만의 공기, 여러분이 전달하고픈 원형, 여러분만의 자유로움. 그 오리지널리티를 발견하는 데 최선을 다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외부의 경험을 받아들이느라 내 안의 오리지널리티를 점점 잃어가는 건 최소화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