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이렇게 살면 큰일 나는 줄 알았지(리틀타네)
사는 데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아도 '될 일'은 됐다.
부모님과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원한다면 자식이란 특권 역시 내려놓아야 했다. 늘 따뜻한 밥상을 받는 것도, 매사에 의존하는 것도, 당연한 듯 받기만 하는 것도 그만둬야 했다.
진짜 독립은 집에서 나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홀로 서는 일이었다.
밖에 나가서 햇빛 쬐고 운동하면 그런 건 싹 다 낫는다.
시골로 내려오고 나서는 정말 단숨에 건강을 되찾았다. 그때까지의 병치레가 민망할 정도였다. 집 안을 돌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다 보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삶의 리듬을 되돌리자, 몸의 균형은 물론 마음 역시 균형을 되찾았다. 예전에는 내 마음을 거스르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몰랐던 것이다.
나 자신의 응석을 항상 받아줄 필요는 없다는 걸.
내 마음 또한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걸.
그렇게 게으름과 높은 이상 사이에서 난 오랫동안 자신을 소중히 하는 법을 찾지 못했다. 답은 간단했는데 말이다. 나는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잘 살면 됐다. 나는 이제 스스로를 하찮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는다. 섣불리 재단하지도 않는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나도 내 삶도 그 순간부터 달라진다.
"어휴, 난 돈 줘도 저렇게 못 살아!"
언젠가 들었던 한마디...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남들 눈에는 답답하고 불편한 일상이 내게는 구원이었다는 걸, 이제 나는 안다. 그저 지금의 나는 매일 아침 밖으로 나가 밤새 야채가 얼마나 자랐는지, 꽃은 싹을 틔웠는지 확인한다. 손길이 필요한 집안 곳곳에 손을 내어주며 오늘을 충실히 살아간다. 손수 가꿔나가는 인생은 할 일이 태산이라 '나'라는 인간에게 화를 낼 틈이 없다. 그 시간에 꽃에 물이나 한 번 더 주고, 대추나 하나 더 따고. 아, 평화롭도다. 밖에 나가 땀 빼고 일하면 마음의 병 따위는 다 낫는다던 어머니. 그래요, 당신은 언제나 옳았습니다.
인도에서의 1년, 나는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재미있는 추억을 쌓았다. 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난 삶은 나로 하여금 자유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자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내 눈앞에 펼쳐진 신세계를 바라보며 여태 나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건 전부가 아니었고, 옳다고 믿었던 건 내 주관적 견해에 불과했다. 잃으면 큰일 날 것 같았던 것들은 없어도 큰 일 나지 않았으며,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일들도 막상 겪으면 별일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정형화된 틀을 벗어난 곳에서 바라본 내 삶은 그리 잘못되지도 위태롭지도 않았다. 나는 아마도 잘 살아가고 있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인생 첫 실패를 경험했고, 크게 넘어졌다. 그때는 넘어져 생긴 상처가 다만 아플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난 그때의 아팠던 시간이 암흑기가 아닌 '작전 타임'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너무 맹목적으로 달린 것은 아닌지, 정말 이 방향이 맞는지, 왜 넘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작전 타임을 가진 덕분에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작전을 짤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경기는 다시 재개됐다. 어쩌면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을 때마다 울린 건 경기 종료 휘슬이 아니라 작전 타임 휘슬이 아니었을까? 넘어졌다고 경기가 그대로 끝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런 시간들은 언제나 실패가 아닌 변화의 기회가 되었다. 어쩌면 넘어진 것이 다행인 순간들이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내가 눈앞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고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니. 아, 나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연필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서 내가 이렇게 힘이 센지 몰랐지 뭐예요.
때로는 세상의 상식과 맞지 않는 일이 인생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기도 한다.
오늘 알게 된 건, 굴삭기가 있어도 땅은 여전히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며, 아름다운 정원을 위해선 그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 그저 주어지는 건 없고, 정성을 쏟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현상 유지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는다. 실수를 했으면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되지.
한 번 해본 거 두 번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리플레이.
실수하면 다시 만회하면 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걸, 그 편이 넘어질까 두려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백번 낫다는 걸 깨달았다.
중요한 건 인생이 과정이라는 걸 이해하는 것이다. 갓난아기도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나길 반복하는데, 어른의 사정이라고 다를 리 없다. 일곱 번 넘어졌다 일곱 번 일어나면 그만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달리든 걷든 구르든 넘어지든 제자리걸음만은 하지 않는 것.
이 역시 인생을 잘 사는 방법이 아닐까?
야심차게 떠난 영국 유학은 성패만 두고 보자면, 실패에 가까웠다. 난 만화 속 주인공처럼 엄청난 멘토를 만나지도 못했고, 각성을 하지도, 천재성을 재발견하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유학을 다녀오기 전과 후의 내 그림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딱 하나. 큰물에서 노는 이들은 모두 넘치는 자신감의 소유자들이란 사시이다. (근데 이제 그 자신감의 근거라곤 하나도 없는...!)
그들은 부족한 실력으로도 꾸준히 뭔가를 만들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본인이 좋아하는 걸 그렸다.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았고, 남들의 인정을 좇지도 않았으며,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작품을 하고 있었다. 나에 비해 그들의 현실이 더 나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 역시 여러 걱정, 불안을 안고 있었고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렸다. 그들과 나의 차이라면, 그들은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어찌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과 나의 차이였고, 나에겐 시작조차 어려운 일을 그들이 겁먹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래서 나도 그들처럼,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으로 되는 일이었다.
때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행복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택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주 슬럼프에 빠진다. 그건 아마 우리가 위만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고 느낄 때,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고 느낄 때, 내가 먼저 나를 평가하기 시작할 때 좋아하는 일은 두렵고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하찮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세상은 1퍼센트의 특별한 사람들과 99퍼센트의 평범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는 걸. 1퍼센트의 살마들이 세상이 갈 방향을 정한다면, 그 방향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건 99퍼센트의 사람들이라고.
우린 꼭 무엇인가가 되지 않아도,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일 수 있다.
완벽하거나 특별하거나 독보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나만의 세계에서 나만의 일을 하며 나만의 속도로 성장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분명 인생의 끝에는 어딘가 도달해 있지 않을까? 먼저 인생을 살아낸 세상의 다른 모든 이들처럼 말이다.
아픈 것도, 흔들리는 것도 당연하다. 강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려운 순간을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그저 마음속 작은 돌멩이를 털어내고 자신의 길을 가면 그뿐인 것이다. 충분히 강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인생은 설계되어 있다.
평생 함께할 만한 이는 드물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상하고 유별나니까.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모두가 누군가의 부슬비인 상대성의 세계에서 진짜 말이 안 통하는 놈이 누군지, 또 진짜 이상한 놈이 누구인지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일까. 사람들이 모나게 보인다면, 그건 내 시선이 모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점점 불편해지고 있다면, 그건 되레 내가 불편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제멋대로 생긴 퍼즐들 사이에서 무엇이 올바른 모양새인지 재고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어느 정도는 마음을 내려놓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모두와 어울릴 수 있었던 단순하고 순수한 어린 시절처럼. 그러면 최소한 조화로운 삶은 가능하지 않을까?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에게 친구는 아니더라도 친절한 사람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혼자 와서 혼자 가는 인생,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목표가 아닐까 싶다.
살아낸 시간만큼의 배움은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삶의 우선순위가 확실하다. 나이가 들수록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점점 적어지다 보니 쓸데없는 짓은 차츰 그만두고 중요한 일에 집중하게 됐다. 에너지를 우선순위에 따라 필요한 곳에 집중하자 그만큼 인생이 정갈해지고 성취감도 커졌다. 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하는 기술이 생겼다고나 할까.
어른이 된 뒤로는 좀 더 꼼꼼해졌고,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한다. 쉽게 뒤통수를 맞지도 않는다.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 좋아하는 마음은 현실을 버티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정체기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 누군가는 방황을 하고, 누군가는 자기계발을 하며, 누군가는 취미 활동을 하고 누군가는 덕질을 한다. 이런 시기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면 어떠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때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 하고 싶다. 인생은 길고, 언제 변곡점이 찾아올지 모르니까. 마냥 딴짓도 해보고, 개인적인 성취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걸 사랑해보기도 하는 거다. 쉬어가는 구간에 자신의 삶에서 한발 떨어져보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인생 뭐 있어? 성급한 사람의 것이나 느긋한 사람의 것이나 인생은 죄 똑같은 속도로 흘러가기 마련인데, 매 순간 똥줄 빠져라 열심히 살 필요는 없다.
가끔 뒤도 돌아보고, 거울도 한 번 들여다 보고, 유치한 사랑도 해보자.
그러다 보면 진짜 내 열정을 불태울, 진정한 사랑이 찾아올지도 모를 테니까.
수년간의 덕질로 유사 사랑을 경험해봤으니 진짜 사랑의 대상이 나타난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잘해낼 자신이 있다. 연습을 많이 한 사람이 실전에도 능한 법이다. 그날이 오면 또 한 번 기꺼이 온몸을 불살라야지.
엄마는 인간과 동물과 자연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고 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해치지 않으며 그들을 착취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자연은 거대한 생명 에너지로 이뤄져 있으며, 인간은 대자연의 이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걸. 자연과 교감하기 위해서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동식물 주민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대자연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엄마로부터 배웠다. 그렇게 내 채식은 시작됐다.
"사랑을 말로 하면 뭐 해. 실천해야지."
세상의 모든 동물들에게는 그들만의 존재 이유가 있다. 흑인이 백인을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듯, 동물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행동과 생활 방식에 의해 초래된다면, 나 또한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존중받고 싶은 만큼 다른 생명을 존중하고 있었고, 사랑받고 싶은 만큼 다른 생명을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가고 싶은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당연한 이치를 간과하고 있었다. 평화는 그저 바란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바람을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란 걸, 나는 그때 알았다.
행복하고 싶으니까 다른 생명의 행복도 존중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다. 이유가 없다는 것만큼 완벽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하찮은 생명은 없다.
머리로만 아는 건 지식으로 끝나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건 삶을 바꾼다.
사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일지 모른다. 사랑한다면 그들이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도록 지켜볼 것이고, 존중한다면 그들의 삶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을 대하듯,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대하듯, 자연과 그 안의 모든 생명체들을 대한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위기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진실로 느끼는 대로, 양심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면, 아마 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이 지구라는 아름다운 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난 결혼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러려면 자신부터 존중해야 했다. 나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남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니까.
그렇게 시골로 내려온 나는 주변 환경을 아름답고 청결하게 꾸미려고 노력하며 체계적으로 살기 시작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아침에는 운동을 한다. 설거지, 청소, 빨래는 바로 한다. 집에 고쳐야 할 곳이 있으면 그날그날 수리한다. 돈을 벌면 되도록 저축하고, 여유가 생기면 순간의 쾌락보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투자했다. 내게 스스로를 존중한다는 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의미했다.
나는 여전히 혼자서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 습관들을 익히고 있다. 혼자서도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곁에 누가 다가오든 함께할 수 있어 고맙다는 마음으로 공생할 수 있을 테니까.
스스로 정돈된 사람은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 여유가 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 그런 연유로 혼자서도 온전히 존재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열심히 스스로를 교육하고 있다. 비혼이든 기혼이든 싱글이든 커플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일단 사람부터 되고 보련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스스로의 시간을 책임져야 하는 날을 맞이한다. 자신의 시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때, 비로소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다.
나는 자신의 가치를 내면으로부터 일궈내기로 했다. 내가 살아온 시간만큼의 가치를 하는 사람이 되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지금의 난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한다. 전에는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됐다. 내 나름대로 나잇값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대부터 잘 준비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거라 예상했던 삶에는 의외로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삶은 그저 예측하지 못한 방향과 형태로 계속될 뿐이었다.
인생은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고, 결국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오늘을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어느새 나와 닮은 결을 지닌 무언가가 되었다.
준비와는 상관없었다. 그건 아마도 인생이야말로 준비와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난 지금까지도 몰랐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건사고도, 불운도 행운도 나는 예측할 수 없다.
돈을 벌겠다고 시작한 일은 때로 손해를 불렀고, 수입과 상관없이 하던 일은 의외의 행운을 불러오기도 했다. 남드링 하고자 하는 일들은 모두가 원했기에 그로부터 많은 걸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들이 무시하고 회피하는 일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기에 비로소 내게 기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귀촌 생활이 지속될 수 없다고 했지만, 귀촌했기에 시작할 수 있었던 일들 덕분에 나는 이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인생이 미지의 것인 만큼 무엇이 나를 인도할지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오늘도 나는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얼렁뚱땅한 하루를 보냈고, 미래를 보장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미래를 준비하려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내 삶을 믿고 그저 오늘을 살아간다. 살아보지 않은 내일보단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일을 준비하는 내 나름의 최선이니까!
식물들을 키우다 보면 적합한 땅에 심었을 때, 비로소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사람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와 맞는 땅 위에선 어떤 시련과 장애도 나를 더 단단히 하는 자양분이 된다.
시골에서는 대부분의 일을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 이곳에서 나는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며 몸을 움직인다. 인터넷 속의 지식과 사람들의 말, 도시의 넘쳐나는 정보와 무관한 나만의 경험을 쌓아간다. 그리고 난 그것을 통해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여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남의 것을 보고 듣고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상 변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내게 맞는 환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맞는 땅을 찾으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꽃을 피울 수 있다. 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구는 사막의 회전초처럼 살아가던 나는, 마침내 시골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을 만났다.
나는 오늘도 시골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천천히 자라 마침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들처럼, 그렇게.
대학교에서 철학과 수업을 들으며 배운 것이 있다면 삶의 진리는 가장 단순한 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당대 최고의 천재였던 철학자들의 공통된 가치관은 인간은 자유롭고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쪼록 무리하지 않으며 내게 허락되는 만큼 천천히 걸어가는 것.
철학과에서 배운 지혜가 이렇게 삶에 녹아들기까지 무려 7년의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앞으로 살날이 구만리인데 7년이 뭐 대수라고.
'만약에'라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나는 그것을 끝내 붙잡았던 것 같다. 결과는 나조차 알 수 없지만, 괜찮다. 용기를 내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면 그것으로 된 거다. 용기의 기록이 쌓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깊어진다. 인생을 겁내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난 오늘도 한발 앞으로 나아간다.
누구와도 다르게, 누구보다 느리게.
세상이 살라는 대로 살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썩 잘 살아가고 있다.
나와 내 인생을 의심했던 모든 '나'에게.
이렇게 살면 큰일 날 줄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