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한수희)
모두가 다 근사한 아파트에 살 수는 없어.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야. 오래되고 낡고 좁은 집에 살아도 그 집을 자기 취향에 맞게 잘 꾸미고 가꾸면 괜찮아. 집은 네 몸을 담는, 네 하루하루가 만들어지는 공간이잖아. 하찮게 취급할 수는 없지. 이런 집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매일을 충실하게 살아나갈 수 있어. 그런 삶을 살 수 있어. 그리고 너희들이 어디에서건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거대한 것과 시시콜콜한 것을 동시에 바라보며 살고 싶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책임해지지 않으면서 하루하루의 생활도 잘 살아나가고 싶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매일매일 만족스럽게 잠자리에 들고, 또 새것 같은 하루를 기대하면서 눈을 뜨고 싶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좋은 날을 즐기는 법과 그렇지 않은 날을 견디는 법을 배우며 살고 있다.
적게 먹자. 밀가루와 카페인과 술과 기름진 음식을 줄이자. 욕심부리지 말자. 자신을 몰아치지 말자. 어깨에 힘을 빼고 심호흡을 자주 하자. 자연과 가까이 지내며 느긋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자. 마음이 복잡할 때는 나가서 걷자.
우선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다.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고, 기다려주고, 또 기다려준다. 한 번에 다 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긴다. 말을 잘 들었을 때는 적절한 보상도 줘야 한다('오후 2시까지 이걸 다 끝내면 맥주를 마시며 일할 수 있어!'). 그렇게 집에서도 눈을 뜨면 무조건 자리에 앉아 일을 하는 몸이 되는 데, 무려 10년이 걸렸다. 이럴 수가. 곰이 사람이 되는 것도 이보다는 빠를 것이다.
전에 도서관에서 여성 작가들의 일에 관한 인터뷰집을 발견해 읽어본 적이 있다. 지금은 죽거나 할머니가 되어버린 작가들이었다. 대개 헝클어진 머리에 스웨터와 면바지 차림이어도 어쩐지 멋진 그 여자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천천히 일해요."
그렇지, 천천히 해야 오래 할 수 있다.
글은 그냥 쓰면 된다. 누가 읽어주건 말건, 누가 좋아하건 말건 그건 다음 문제다. 굳이 말하고 다닐 필요도 없다. 글은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그게 그렇게 힘들면 안 하면 그만이다. 글 쓴다고 잘 먹고 잘사는 것도 아니다.
아니, 잘 먹고 잘살기 정말 어렵다.
내가 자라면서 갖게 된 마음속의 스승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누더기도사 같은 사람들. 어깨에 힘을 뺀 사람들. 욕심과 두려움에 눈멀지 않았던 사람들. 느슨하지만 날카로운 사람들. 가끔은 지질할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인간적이던 사람들. 세상의 속도보다 조금 느려서, 때로는 그 속도를 비웃어서 출세와는 거리가 있던 사람들.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고, 봄이 오면 또 겨울이 온다는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던 사람들. 자연스럽게 살던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이 멋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세상은 멋있는 사람을 끝내 내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누더기도사의 가르침은 한결같다. 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터득하는 것. 몸에 힘을 빼면서 정신은 칼처럼 날카롭게 벼리는 것. 뭐든 자연스럽게 하면서 욕심과 두려움에 눈멀지 않는 것. 모든 건 마음에 달렸다는 것. 자아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
결과를 바라는 행위일수록 과정이 고통스러워진다.
그 애는 지금 어떻게 살까. 아마 잘 살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더. 지금 생각하면 자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애는 우리보다 그 사실을 더 빨리 알아챘던 것 같다. 역시 똑똑한 아이였다.
혼자서 천천히 달리는 것이, 남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달리는 것이, 무언가를 피하거나 무언가를 쫓아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느긋하게 달리기만 하는 것이 좋다.
열정적인 사랑은 금세 식기 마련이니까. 운동을 시작했다면 열정보다는 끈기를 활용해야 한다.
나는 늘 더 뛸 수 있을 것 같을 때, 한 바퀴 정도 더 뛰어도 될 것 같을 때 멈춘다. 어떤 이는 더 뛸 수 없을 것 같을 때 한 바퀴를 더 뛰어야 능력이 향상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최고의 마라토너가 되려는 것이 아니니까. 그저 오래오래, 혼자서, 조금씩 달리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니까.
허리와 팔뚝에 근육이 있는 씩씩한 50대 여자가 되고 싶다. 그러려먼 40대 내내 달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아픈 데 없이 건강해야 할 것이다. 달리러 나갈 수 있을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음의 여유도 중요하다.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할 것이고 이런저런 일들로 삶의 의욕이 저하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20대에는 별일이라곤 없는 내 인생이 망작 같기만 했는데, 중년이 되어버리고 나니 별일 없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별일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심조심 살고 있다. 오늘도 별일 없고 내일도 별일 없기를. 오늘도 달릴 수 있고 내일도 달릴 수 있기를.
하지만 나는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더 나빠졌을 것이라 생각해버린다.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는 시스템이다.
지금보다 더 나빴을 경우를 생각하고, 지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좋은 점을 찾아보려 노력하는 이유도 아마 배포가 작아서일 것이다. 나처럼 배포가 작은 사람에게는 이런 라이프스타일이 잘 어울린다. 그리고 실제로 운이 좋건 나쁘건 간에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세상이 어찌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난 방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꼭 이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이상한 자신감인지도 모르지만, 나만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내 느낌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안자이 미즈마루, <안자이 미즈마루> 중에서
결국 꾸준함이라는 것은 무리하지 않는 것과 등을 맞대고 있다. 꾸준하게 오래 하려면 자기 속도를, 자기 한계를 잘 알아야 한다. 무리하면서 오래 할 수는 없다.
일하는 시간 외에는 할 수 있는 한 멍청하게, 미련하게 보낸다.
불안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나 자신을 다독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정말이야. 오늘 푹 쉬어야 내일 또 기분 좋게 일할 수 있어. 오늘 달리면 내일 못 일어나. 나는 단거리 주자가 아니라 장거리 주자야. 1년 달리고 말 것이 아니라 10년, 20년을 달리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야 해. 게으름을 피우겠다는 게 아니야. 꾸준함의 힘을 믿어보겠다는 거야.
잠은 충분히 자고, 욕심부리지 않고 하루에 중요한 일 두어 가지만 처리하며, 마감일은 스스로 이틀 정도 앞당겨둔다. 오늘 다 끝내고 내일은 노는 게 아니라, 오늘도 즐겁게 일하고 내일도 즐겁게 일하는 시스템을 만든다. 따지고 보면 일하는 시간 외에는 넋 놓고 쉬는 것도 내일 더 잘, 더 재미있게 일하기 위해서다. TV를 보고 책을 읽고 멍하니 공상에 빠져 있는 동안,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거나 무언가를 배우거나 깨닫기도 한다.
쓸데없이 애쓰지 않는다. 내 한계를 받아들인다. 내 페이스를 유지한다. 뭐든 천천히, 꾸준히 해나간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옮기면 어려울 것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나처럼 열정도, 에너지도 평균 이하인 데다 별 재능도 없고 대범하지도 않은 사람이 오래 일하려면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
"좋은 건 항상 괴로운 시간이 지난 후에 찾아오는 거야."
기다리는 일,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자. 추잡하다.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중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을 어찌해야 좋을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다만 조금 도움이 되는 방법은 있었다. 관계의 문제는 표면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 표면은 표면일 뿐, 그 일이 지나고 나면 다른 일이 시작될 것이고, 이 사람이 지나가고 나면 다른 사람이 문제를 떠안고 다가올 것이다. 타인은 언제나 나를 모르고 타인은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고 타인은 언제나 나를 화나게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것부터 일단 인정하지 않으면 무인도에 가지 않는 한, 아니 무인도에 가도 사는 건 지옥이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이군.)
그런 이유로 나는 누군가와 장시간 붙어 있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노력한다. 하루종일 함께 있어도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힘들다. 잘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꼴도 보기 싫어졌다면 우리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감이 있어야 예의를 지킬 수 있다. 하다못해 내가 낳은 아이들의 인생에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나의 콤플렉스로 남들을 괴롭히지 않을테니까.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핑계도 대지 않고 불만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계에 내 전부를 걸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떻게 굴든 나는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물론 이런 삶에도 애로사항은 있다. 이를테면 이렇게 외톨이처럼 살아가는 인생.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한 여배우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갖는 기분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나의 아침 시간이 더 귀중해졌다. 늦은 밤의 영화 시청과 달콤한 새벽잠을 포기하고도 쟁취할 이유가 충분한 귀한 것.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