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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온전히 나답게(한수희)

아름다운 존재 2023. 10. 2. 10:43

이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때로는 독립적이지만 때로는 의존적인 나를, 어수선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하는 나를, 못됐지만 착한 나를 받아들인다. 온전히 나답다는 건 이렇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나라도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복잡한 존재인 나를 인정하는 것, 완벽해지려 애쓰지 않는 것,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온전히 나답게'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 삶의 전체적인 모습과 방향은 매일매일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닐까. 오직 작고 사소한 것들만이 우리 삶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직 그것들을 통해 삶은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활'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 건 20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였다. 건강하게 살지 않으면 건강한 사고도, 건강하지 않은 사고도 할 수 없었다. 토대를 탄탄하게 쌓아놓지 않으면 나의 비관에 나 자신이 무너져버릴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 끝없이 헤매는 것이 아니라 여기와 저기 사이를 왕복하는 산책을 하게 되었고, 운동을 하게 되었고, 요리를 하게 되었고, 마음에 드는 이불보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생활의 토대를 단단히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제야 마음속 깊이 안심이 되었다. 그제야 덜 휘청거리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잃은 것도 있을 것이다. 원대한 포부나 꿈꾸던 자유로운 인생 같은 것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으니까.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인생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한다.

하찮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인생이 된다는 것. 하찮아 보여도 그게 인생이라는 것. 그 하찮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인생이 즐거워질 수도 비참해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나는 살아가면서 배웠다.

 

가볍게, 최대한 가볍게 쓰려고 노력했다. 어깨에 힘을 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천천히 쓸 때도 있었고 빨리 쓸 때도 있었다. 어찌 됐든 한 단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무언가를 배우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에세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나는 에세이를 썼다는 생각이 든다. 쉽지 않았다. 에세이는 이토록 시시콜콜한 일들을 쓰는 것이로구나, 그것을 진심을 가득 담아 쓰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배웠다.

 

임혜지의 방식대로 크루아상을 나눠 먹는다고 대단한 액수를 모을 수는 없을 거다. 그래봤자 천 원 정도다. 그렇지만 그것이 상징하고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너무 많이 먹지 않는 것, 너무 많이 갖지 않는 것, 너무 많이 사지 않는 것, 그래도 괜찮다는 것.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건 애들 탓도 아니고 남편 탓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결혼을 한 것도 나고, 애를 낳은 것도 나고, 애들을 혼자 힘으로 키우겠다고 무식하게 나선 것도 나고, 그러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나였다. 아들이 뭔가 실수한 후에 늘 하던 투로 말하자면 "범인은 나였어."였다.

잘하려고 하다 보니 부담스러웠고, 예전처럼 늘 이루고 싶은 것들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걸 못 이루는 상황들이 괴로웠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다 보니 더 하기가 싫어졌던 것이다. 그냥 하면 되는 거고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는데.

이제껏 열심히 일하고 쫓기듯이 몰아치며 살아왔으니 지금은 좀 쉬어도 됐다. 애들이 잘 때 자고 일어날 때 일어나면 되는 거였다. 같이 빈둥거리면 되는 거였고, 밥이야 뭐 대충 먹어도 되고, 살림이야 뭐 좀 젖혀둬도 되는 거였다. 애들한테 잘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좋은 엄마나 훌륭한 엄마나 멋진 엄마가 되려고 고군분투하는 것보다는 그냥 엄마면 되는 거였다.

내 인생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다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쩌면 달라졌다기보다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거나, 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건 누구의 책임도 아닌 나의 책임이므로 도망칠 수도 없고 무를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므로 이 일을 받아들이거나 선택해야 한다면 가장 최선의 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엄마와 아빠들이 자식을 가진 후 겪게 되는 새로운 성장의 단계일지도 몰랐다.

 

인생이 선택의 문제라면 인생은 이를테면 자장면과 짬뽕처럼 중국집의 메뉴 같은 것이 되어 버리는데, 살아 보면 알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인생은 그냥 닥치는 건지도 모른다. 닥치고, 수습하는 일의 반복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이런 것이다. 책이 있고 커피가 있고 날씨가 좋고 실내는 쾌적하고 나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좋은 책을 읽으며 에디 히긴스를 듣는다. 재즈를 좋아하지만 재즈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한다. 에디 히긴스 정도면 언제 들어도 괜찮다. 귀에 거슬릴 일도 없고 다른 일을 하기에도 좋다.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하고 즐거워지기도 한다.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지나치게 울적하지도 않다. 나에게는 그 정도면 족하다. 그러고 앉아서 '이 정도면 성공적인 인생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나의 부모님은 많이 배운 사람들도 아니고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냉동 피자 한 판을 사주려고 해도 몇 번을 들었다 놓았다 고민을 해야 했을 정도로 팍팍한 살림살이를 꾸려나가야 했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기적적일 정도로 '멋'을 찾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빠의 생일날 엄마는 언제나 요리책을 보면서 직접 만든 돈가스와 수프로 식탁을 차렸다. 포크와 나이프, 하얀 식탁보, 물병에 꽂은 장미꽃 한 송이, 와인글라스도 잊지 않았다. 시골 도시에서 가뭄에 콩 나듯 열리는 문화행사에도 아이들을 꼭 데리고 가려 했고, 차도 없이 먹을 것을 잔뜩 싸서 양손에 들고 등에는 텐트를 짊어진 채로 주말마다 산으로 바다로 들로 놀러 다녔다.

아빠가 수개월에서 1년 정도 해외 근무 생활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엄마는 아파트 1층부터 우리 집이 있는 3층까지 벽에 환영의 메시지를 달아 두었다. 가족의 생일에는 신문지를 깐 찜통에 카스텔라를 찌고 빵집에서 구해온 버터크림을 발라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다. 아빠는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초대해 외국에서 찍어온 슬라이드 필름을 영사기에 넣고 벽에 비춰 보여주었다. 근처 작은 교회의 목사님이 이사를 가면서 클래식 레코드를 박스째로 버리자 그걸 주워온 아빠는 매일매일 음악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차가 없어도, 우리 집이 산 아래의 허름한 아파트라도, 고등하교 때까지 남동생과 같은 방을 써야 했어도, 엄마가 공사장에서 돌을 나르고 공장에서 냉동식품을 포장하는 일을 해야 했어도 내가 그렇게 가난한지는 모르고 자랄 수 있었다.

 

냉철한 현실감각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에 환상의 색채를 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1년의 구석구석 보물찾기처럼 선물 같은 계획들을 숨겨 두었다. 봄은 소풍의 시즌이다. 이 좋은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즐겨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우리는 사실 별로 잘하는 것이 없는 인간들인지도 몰라. 우리는 대단한 일을 할 수도 없을 거고, 대단한 사람이 될 수도 없을 거야. 그래서 순간순간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야.

그래, 그거야. 우리는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해. 일할 기회가 생겼다면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하고, 놀 기회가 생겼다면 최선을 다해 놀아야 하고, 배울 기회가 생겼다면 최선을 다해 배워야 해. 그리고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않는 걸로. 그 다른 것들, 우리가 이룰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걸로. 이룰 수 있었다면 언제든 우리는 이루었을 테니까.

 

가난하게 살기 위해 냉장고를 더 큰 것으로 장만하지 않았다. 먹을 만큼만 사고 먹을 만큼만 보관한다. 먹을 것이 떨어져 장을 보러 가기 전에는 일단 냉장고 안에 있는 식재료들로 어떻게든 만들어 보려고 애쓴다. 놀이공원보다는 그냥 공원으로 소풍을 더 자주 간다. 새 옷을 사고 싶을 때는 우선 있는 옷으로 꾸며본다.

 

모든 사람이 가슴속에 가난을 품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다정해지고 좀 더 담백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좀 더 인간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자주 쓰는 것을 경계한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행복은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목표로 삼을 만한 것도 아니다. 행복은 살다 보면 우연히 떨어지는 보너스 같은 것이다. 행복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오히려 불행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저런 단계를 거친 나는 최고의 인테리어는 비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은 아름다워야 하지만 또 편히 쉬는 곳이어야 하기에, 유지하고 관리하느라 허리가 휘어서는 안 된다. 짐이 적어야 관리하기가 편하다.

물건이 적으면 자연히 집이 깨끗해진다. 물건이 적으면 정리 정돈의 부담도 줄어든다. 청소도 간편해진다. 우리를 둘러싼 물건들 중에 정작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의 숫자는 얼마나 적은지. 이러다가 내가 급사했을 때 내 물건들을 처리하느라 쩔쩔맬 가족들을 생각하면 어서 빨리 정리해야겠다 싶다.

 

인테리어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지? 나는 집에서 어떤 일을 가장 많이 하지? 내게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무엇이지? 우리 가족들은 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지? 우리 가족들은 어떤 스타일로 살고 있고, 또 살고 싶어 하는 거지?

 

모든 일은 그런 식이다. 처음부터 힘들기도 하고 처음에는 괜찮다가 나중에 힘들기도 하다. 그리고 힘들고 그만두고 싶을 때는 아무 생각도 안 하는 편이 낫다. 그저 몸을 웅크리고 바닥을 바라보며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빵을 굽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어렵게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제대로 해야겠다는 마음만 버리면 그렇게 어렵지만도 않다. 무엇보다 처음에는 당연히 실패한다고 생각하면 좌절할 일도 별로 없다. 실패해도 계속해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마음에 드는 빵을 구울 수 있게 된다. 밀가루와 이스트, 약간의 설탕과 소금, 물만 넣고 휘휘 섞은 뒤 밀폐용기에 넣어 부풀도록 둔다. 밤새 냉장고에서 숙성시켰다가 아침에 다시 꺼내 모양을 잡고 두배로 부풀려 오븐에 굽기만 하면 된다. 모양이 못나도, 맛이 심심해도, 갓 구운 빵은 언제나 최고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진리는 당장에 무언가를 이루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될 턱이 없다.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끝장을 보려고 뜨겁게 도전하다 보면 각자가 가진 능력과 개성, 자기 안의 힘이 크게 꽃피는 날이 반드시 온다.

-와타나베 이타루,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정문주 역(더숲, 2014)

 

빵 한 덩이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빵을 만드는 데 익숙해질 시간이 우선이다. 수없이 많은 빵을 만들어 보아야 반죽의 질기, 부푸는 모양, 냄새, 촉감에 익숙해진다. 몇 번 해보고 잘 안 된다고 포기해서도 안 되고, 단번에 성공하려는 급한 마음을 품어서도 안 된다. 밀가루 반죽을 한 번 발표시키고, 다시 모양을 잡아 두 번째로 발효시키는 데는 적어도 두세 시간은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빵을 만들면서 나는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작고 단순한 자신감들 중 하나를 갖게 됐다. 그것은 바로 내가 먹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을 직접 만들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다. 이런 작은 자신감들이 모여 한 인간을 단단하게 만든다.

앞으로도 나는 이 말을 명심하려 한다. 당장에 무언가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기다린다. 반죽이 손에 익을 때까지, 빵이 제대로 부풀 때까지. 그건 빵을 만들면서 내 몸에 밴 것이니, 전보다는 조금 수월해질 것이다. 그렇게 묵묵히 만들어 나가다 보면 어쩌면 나도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어쩐지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싼 호텔의 바삭거리는 침구를 떠올리면서 눅눅한 이불을 빨아 햇볕에 널었다. 돼지갈비와 감자를 넣고 맑은 국도 끓여보았다. 힘들 때면 더운 날씨에도, 가난한 살림에도 웃으며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유를 잃지 않던 그곳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늘이 유달리 높을 때는 그곳의 하늘을 생각했다. 우리에게 언젠가 그토록 자유롭던 때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리 새로운 물건도 빛이 바랜다. 어딘가에 돈을 쓰고도 아깝지 않으려면 경험에 쓰는 것이 가장 낫다. 그래서 여행을 가는 것은 돈을 가장 잘 쓰는 방법 중의 하나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나 자신이나 내 생활을 조망하기란 쉽지 않다. 여행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비록 모든 것을 잊게 된다 하더라도, 여행은 투자 대비 효용 가치가 가장 높은 일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 인생을 풀을 먹여 다리미로 주름 한 점 없이 빳빳하게 다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를테면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 같은 고상한 책을 읽고 났을 때처럼. 잡지나 인테리어 서적에서 싱크대 위에 물기 한 점 없고, 제멋대로 널린 아이들의 장난감도 없고, 서랍 속의 옷가지들은 유니클로의 베테랑 점원이라도 다녀간 듯 깔끔하게 개어져 있는 누군가의 집 사진을 보았을 때처럼.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서 살림의 여왕의 인생을 훔쳐보았을 때처럼. 하루에 서너 시간, 집중해서 글을 쓰고 나머지 시간은 달리기를 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도자처럼 글 쓰는 방식에 대해 읽었을 때처럼.

하지만 사진은 사진일 뿐이다. 사진의 좋고 나쁨은 프레임 바깥에 있는 것들을 얼마나 완벽하게 잘라내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인생을 어떤 식으로 편집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집 안을 먼지 한 점 없는 완벽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쓸고 닦아야 한다. 나처럼 처음엔 의욕에 불탔다가 금세 기력이 떨어져 짜증을 부리곤 하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쩌면 만 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유별나게 성실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도미니크 로로가 짜증 나는 잔소리꾼에 성격 파탄자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사실 그랬으면 좋겠다).

결국 남의 인생은 남의 인생일 뿐이다. 어느 정도 참고하는 것으로 족하다. 나에게 맞는 인생은 나 스스로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녀나 성인군자처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완벽함 따위는 지그시 밟아 무시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힘든 산행의 절반쯤에 다들 억지로 힘을 내어 올라가고 있을 때 "이 정도 왔으면 됐지 뭐." 하고 내려가 버리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하루 종일 집 안을 쓸고 닦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더러움만 적당히 치우고 느긋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아무거나 잘 먹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민박집에서도 부티크 호텔이나 다를 바 없이 즐겁게 지내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쿨하게 인정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완벽해지느라 스스로를 들들 볶는 대신에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관대한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완벽한 장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해나가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그랬다. '완벽하기에 인생이 너무 짧다'고. 적당한 느슨함, 적당한 지저분함, 적당한 게으름, 적당한 혼란, 적당한 비겁함, 적당한 무책임. 그런 것을 배워나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실컷 맛보면서 자라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무엇이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하기를 바란다. 밭에서 직접 키운 토마토의 살아 있는 맛을 알고, 배기가스로 범벅이 된 포장마차 떡볶이의 중독적인 감칠맛도 알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음식 가지고 까탈 부리는 어른으로 자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음식 가지고 까탈 부리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20대의 어린 시절 내가 했던 여행들은 그때의 내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20대의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내게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필요했다. 쓸 수 있는 모든 패를 꺼내 쓰고, 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시도해봐야 했다. 이상을 향해 달리다 고꾸라지거나 실망한 채 뒤돌아서는 경험들이 필요했다. 아주 먼 곳에서 나 자신을 만나야 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내게는 그런 일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제 이것이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좋으나 싫으나 이 몸뚱이와 정신머리를 끌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나 자신을 발견하기보다는,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꾸려나가고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전처럼 여행을, 떠나는 일을 갈망하지는 않는다.

대신 나는 움직이지 않는 여행을 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상을 영위하며 조용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살아갈 때, 나는 여러 가지 자극들에 좀 더 민감해지는 것 같다. 매일 똑같은 것들을 매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내게는 더 중요한 일이다. 그러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질 때 훌쩍 떠나는 것이 좋다. 일상에서 떨어진 곳에서 내 일상을 바라본다. 눈에 익고 몸에 익은 것들이, 때로는 지겨워진 것들이 새로워 보인다.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는 말을 나는 여전히 믿는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내 아이들이 좀 더 크게 되면 그 아이들도 스스로를 향한 여행을, 고독한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부모로서는 분명 걱정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들이 내 걱정을 짓밟고 더 먼 곳을 향해 떠나보기를 바란다. 그 먼 곳에서, 거대한 세상에서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의기소침해진 채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런 일이야말로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이니까.

내 모험심의 불씨를 이제 그 아이들에게 넘겨준다.

 

<고민하는 힘>을 쓴 강상중은 사랑은 원래 그 모습이 계속해서 변해 가는 것이라 말했다.

 

나는 10년 동안 한 남자와 살면서 계속해서 이 남자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어. 2년째의 이 남자는 누구지? 3년째의 이 남자는 또 누구일까? 5년째의 이 남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러니까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엄청난 자만일지도 몰라. 어쩌면 상대방 역시 내 걸음걸이나 버릇 같은 것들에 넌더리를 내고 있을 수도 있겠지. 사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나는 나이가 들수록 운명론자가 돼.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해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거든. 그럴 때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받아들여야지. 결혼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모두 결점을 지닌 인간들이기에 조금이라도 겸손해지려고 애쓰면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어. 결혼은 결과가 아니야. 결혼은 오직, 시작일 뿐이야.

 

아무튼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이란, 아이들을 타고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큰아이가 예민하고 다루기 힘든 이유는 그저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고, 그 덕에 그 아이는 센스 넘치는 여자로 자랄 수 있을 거라 믿는 것. 작은아이가 밝고 다루기 편한 이유는 그저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고, 그 덕에 그 아이는 편안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 거라 믿는 것.

결국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저 '건강한 어른'이 되자고 다짐한다. 건강한 어른은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어른일 거다. 건강한 어른은 자신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어른일 거다.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했을 때 사과하고 반성할 줄 아는 어른일 거고, 완벽하진 못해도 좋아지려고 노력하는 어른일 거다. 농담하는 여유를 잃지 않고, 크게 웃는 법을 잊지 않고, 싸울 때는 싸울 줄 알고, 화해할 때는 화해할 줄 아는 어른일 거다.

그런 어른이 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좋지 않은 재료에 조미료를 듬뿍 넣은 질 나쁜 외식과 몇 번 입다 싫증나서 버릴 옷들, 불필요한 잡동사니에 돈을 쓰지 않으면 아름다운 것들에 쓸 돈이 생긴다. 남들 눈에 있어 보이는 것, 남들이 다 하고 다니니까 나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 원하는 것,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작은 가치들에 돈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의 동네 친구는 가끔 동네 여기저기서 꺾은 들꽃들로 꽃다발을 만들어 나를 찾아온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정겹다.

 

대문 위의 좁고 위태로운 공간이나 고무 대야, 빈 깡통에라도 꽃을 심는 할머니들은 가진 게 없어도 삶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내 눈에는 그런 것이 품위로 보인다.

 

그들이 그곳에서 잃었던 것, 그리고 그토록 되찾고 싶어 했던 것은 바로 '인생'이었으리라.

인생. 우리가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라 믿는 인생.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보험으로나 지키려는 인생. 아이들이 떠나고 나서도, 퇴직을 하고 나서도 이어질 거라 예상하며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인생.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값어치 없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인생.

그즈음부터 나는 우리의 삶이 어딘가에서 시작해 어딘가로 달려가는 코스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살다 보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누가 아주 작은 돌만 하나 던져도 우리 삶을 떠받친 토대는 삐걱거릴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약하게 만들어진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인생의 결과 같은 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관심을 쏟을 만한 일도 아니다. 그런 데 신경을 쓰고 살면 너무 피곤해진다.

그러므로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만이 최선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그러면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아이들에게 공부를 더 시킨들 그게 아이들의 인생과 정말로 관계가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앞날에 대한 불안에 종종 사로잡히곤 하지만 그 앞날이 정말로 내게 올지 안 올지는 누구도 장담치 못한다.

인생이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면 인생의 구석구석 지뢰처럼 매복해 있는 어려움들을 건너는 것이 조금은 수월해진다. 선택을 하는 일도, 결정을 내리는 일도 조금은 더 쉬워진다.

 

인생이란 건 방향성도, 목적성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느슨하게 방향을 잡는다.

내일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의 햇살과 바람과 공기를 제대로 느껴보자. 아이들에게 품는 욕심도 슬쩍 접자. 그냥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과 두려움도 어차피 내일이 오지 않는다면 부질없다. 그냥 현재에 충실하면 된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며 후회 없이 살아가자. 미래 같은 건 운에 맡기자. 어차피 미래란 건 차곡차곡 쌓아올린 현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평생을 싸워온 자신의 단점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잘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부단히 노력해 이룰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 아닐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 그건 어떤 변명이나 무례가 아니라, 일종의 무겁고도 홀가분한 체념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목욕탕 수영은 남과 경쟁하지 않는다. 남과 경쟁하려야 할 수가 없다. 목욕탕 수영은 그저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는 것이 목적일 뿐, 누구를 이기거나, 기록을 단축하거나, 누구에게 멋져 보이려는 수영이 아니다. 목욕탕 수영은 쿨하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방법을 모른다. 다시 말해, 내가 무언가를 싫어한다면 그건 그 무언가가 나에게도 있다는 증거다.

 

그 시절 나는 재미라는 것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내가 찾지 않으면 절대로 즐거워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것이 내가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거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거나, 좋은 남자를 만나는 데 무슨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매일이라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나날들을 살아가는 데 즐거운 마음을 가진다는 건 정말로 중요하기에, 그런 준비는 그때부터 착실히 해왔다고 생각한다. 다 너무 심심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아이들에게 시키는 체험학습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물론 체험학습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런 걸 시키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가고 나 자신도 시켜 본 적이 몇 번 있으며, 아이들도 좋아했다. 하지만 거기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 회의적인 기분이 든다. 진짜 인생은 체험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니까.

요리를 하고 싶어 한다면 체험학습장에 데리고 가는 것보다는 매일 저녁 식사 준비를 거들게 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자칫 딸기를 키우는 고생은 모르고 딸기를 따먹는 재미만 알게 되지는 않을까? 직업 체험이 노동의 아픈 현실을 가리고 있는 건 아닐까? 모든 것을 힘들지 않을 정도로만, 귀찮지 않을 정도로만, 재미있고 신기하고 반짝거리는 정도로만 체험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직도 세계의 한편에서는 다음 끼니 먹을 일도 걱정인 아이들이 배를 곯고 있는데, 수완도 없이 무작정 거리로 나가 나프탈렌을 팔고 있는데, 손님에게 웃어가며 접시를 나르고 있는데,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독한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데, 아이의 심심함에 죄책감을 느끼는 건 조금 우스운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심심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심심함으로 가득 차 있던 유년시절을 떠올린다. 심심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벽지를 뜯고 장판 위를 데굴데굴 구르고 햇살 속의 먼지를 보고 적막함의 소리를 듣고 세계의 냄새를 맡던, 그러면서 모든 것에 대한 감수성이 깊어지던 그 시기를 말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런 데는 크게 반응해 주지 않는 것이 낫다.

아이들도 알게 될 것이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아, 오늘은 정말 최고의 하루였던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해도 집에 돌아오면 밋밋하고 재미도 없고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한 남은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해야 하는 숙제와 방 정리, 싫어하는 반찬도 골고루 먹기, 양치질, 동생과의 싸움,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드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맥이 빠진 채로 잠이 들겠지만 결국 남은 인생은 그런 날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다. 만약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아이라면, 멋진 하늘과 길에 핀 이름 모를 꽃과 겨울의 기대를 품은 바람과 좋은 음악과 아름다운 문장과 벅찬 대화와 긴 산책과 맛있는 음식에 설렐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모든 것 말이다.

 

느릿느릿 살고 싶다. 이러면 어떠하리, 저러면 어떠하리 유유자적 살고 싶다. 고민해 봤자 달라질 것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다. 해가 나면 볕을 쬐고, 비가 오면 처마 아래서 빗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다. 내년도 올해와 같을 거라고, 올해 굶어 죽지 않았으니 내년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살고 싶다.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사는 게 팍팍하고 어렵고 두렵게만 느껴질 때는 사실 정말로 그렇다기보다는 마음이 좁아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시야는 좌우 1미터 정도밖에 미치지 못한다. 사는 데 무슨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고, 내가 거기에서 자꾸 비껴 나가는 것 같고, 앞날이 무섭기만 할 때는 심호흡을 좀 하고 나의 롤모델들을 떠올린다. 그 사람들 중에 엄청난 부자나 대단한 능력자는 없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몸을 움직여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몫을 살아낸 후 조용히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동물농장>에 나온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처럼. 나의 롤모델이 그런 사람들인데, 나는 대체 어딜 보고 있는 걸까?

 

하지만 역시 장사를 해보니 알게 된다. 장사는 버티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되건 못 되건 버텨야 한다. 손님이 있건 없건 버텨야 한다. 힘들건 괴롭건 버텨야 한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을 텐데 이런 날과 저런 날을 묵묵히 감내해야 한다. 나는 그런 것을 배우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말도 안 되는 꿈처럼 느껴지는 것들 중 대부분은 막상 해보면 별것 아니다. 집이 아닌 곳에 나만의 공간을 꾸리는 건 약간의 목돈을 들이고 지출을 감수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대박을 바라지만 않는다면 카페의 주인이 되는 것, 장사를 하는 것도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꾸려나가는 일이 힘겨울 뿐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내가 겪은 모든 일들에서 배운 것들을 자양분 삼아 살아가고 있다. 가난할 때도 부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돈이 좀 있을 때도 가난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의 내 인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쁘기만 한 인생도, 좋기만 한 인생도 아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 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피천득, <인연>, (샘터, 2002)

 

이 세상에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알아주든 말든, 룰루랄라 즐겁게 살아가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여기저기에 숨어 있을 것이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꽤 살 만한 곳인 것만 같다. 나도 그런 아저씨, 아주머니들 중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아저씨, 아주머니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의 한구석에서 룰루랄라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이제부터의 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