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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태도에 관하여(임경선)

아름다운 존재 2023. 10. 6. 16:02

어차피 우리는 정답이 존재하는 세상을 살아가지 않으니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잡고 내가 내린 답을 믿고 나아갈 뿐이다. 슬픈 얘기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내 인생은 스스로 알아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해서 행동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애초에 완벽한 선택, 완벽한 확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충족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정답 같은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숱하게 실패한 선택들이 공존했을 것이다. 실패를 통해 나에 대해 더 알게 되고 틈을 보완하며 계속 스스로에게 인생 결정권을 부여했을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실패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든 난 이걸로 됐어'라며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돌이켜보면 왜 과거의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을까 안타깝다. 만일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며 또 하나의 인생을 자신에게 주어진 옵션이라고 착각하고 제멋대로 상상하던 나는 뭐랄까, 내가 현재 살고 있지 않은 대안의 삶에 멋대로 싸움을 붙인 후 알아서 지고 있었다. 대안의 인생, 그런 건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행여 있더라도 분명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저쪽 인생의 나'도 똑같이 '이쪽 인생의 나'를 시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즐겁고 보람찬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의 재미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주관적인 문제다. 일이 내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일의 가능성에 기회를 줄 생각을 해보면 안 되는 것일까.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서 말이다. "일이 지루하다"라고 투덜대기 전에 '그럼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은?'이라며 고민을 해보면 안 되는 것일까.

 

앞날에 그 어떠한 기약이 없어도 자기만의 규율을 만들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글을 썼다. 예술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밤늦게까지 술이나 담배를 하면서 글을 쓰고 글이 도중에 풀리지 않으면 영감을 얻겠다는 핑계로 훌쩍 여행을 떠날 것 같지만 대부분의 창작자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책상으로 출근했다.

비가 오나 날이 맑으나, 숙취에 시달리든 팔이 부러졌든, 그 사람들은 그저 매일 아침 8시에 자기들의 작은 책상에 앉아 할당량을 채우지요. 머리가 얼마나 텅 비었건 재치가 얼마나 달리건, 그들에게 영감 따윈 허튼소리.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에세이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에서 시크하게 말한다. 영감이 떠오르든 말든 일단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사랑받기 위해 무리하는 것도 곤란하다. 무리한다는 것은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무리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리한 대가를 언젠가는 상대에게 딱 그만큼 받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겁고 힘든 연애의 서막을 예고한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려고 애쓰는 것은 착한 게 아니라 비굴한 것이다. 그것은 그저 갈등이 생기거나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서 미리 자신을 상처 입힐 뿐이다.

나의 이런 치부가 드러나면 상대는 멀리 가버릴 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그 관계는 거기까지다. 우리는 처음엔 서로의 멋진 모습을 보고 좋아하게 되지만 서서히 그 사람의 멋지지 않은, 결핍된 부분을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람의 이런 못난 모습은 나밖에 모른다'는 것, 그런 마이너스 부분의 연결 고리가 훨씬 강하다. 연애는 원래 폼 나지 않는 것이었다.

서로를 사랑한다면 힘닿는 데까지 자유롭게 해줘야 할 것이다. 상대의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으니 상대의 사생활을 지켜준다. 아무리 가까워도 인간으로서의 예의의 선을 넘지 않도록 한다. 사랑으로 협박하지 않고 '내가 설치한 덫에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까'라며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기 마음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다. 사랑은 이래야만 해, 라며 자꾸 사랑을 정의하고 범위를 좁히는 게 아니라, 이럴 수도 있다며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넓혀야 한다. 타인의 시선이나 주변의 상식과 기대치에 얽매이지도 말아야 한다.

관계가 정체기에 있거나 모호한 상태거나 상대가 자기 안의 동굴에 들어가버리거나 권태기일 때 상대를 몰아세우지 말고, 쉽게 끝났다고 단정 짓거나 화내지도 않았으면 한다. 가끔 버림받기 전에 내가 먼저 상대를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가 나올 때가 있는데, 이런 성급한 반응으로 오히려 관계가 정말 깨지는 경우가 많다.

'예전 같지 않다' 싶은 상황일 때는 잠시 시선을 일이나 다른 데로 돌리면서 시간을 얼마간 흘려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내가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상대방이 혼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에 너무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연애의 본질은 애초에 완전한 것도 아니었으며 연애를 하는 사람들 역시도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연애는 부모가 나를 사랑한 이래로 나의 존재가 전적으로 타인으로부터 긍정을 받는 유일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나밖에 모르던 내가 타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워도, 손해 본다고 해도, 상처받는다고 해도, 온몸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을 해두어야 할 것 같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는 매 순간 몸과 마음이 시큰시큰 타들어가는 사랑의 열병을 그려낸 <단순한 열정>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실로 그러하다.

 

어느 시점이 되면 어떻게든 꾹 삼키고 알아서 처리해버려야 한다. 애초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든, 누구나가 인생의 한 시기에는 저마다의 지옥을 품고 가는 것이고, 훌쩍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라는 과거에 휘둘리면서 고여 있기를 자처하면 슬슬 그 사람 자체의 기량이나 자립 여부를 묻게 된다. 더구나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문제들의 원인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가장 이상화된 부모 자식 관계에 내가 겪은 환경을 비추어보고 '난 남들이 당연히 가진 걸 가지지 못했다'고 부모에게 울분을 품는데, 그렇게 치면 우리 중에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또한 장차 우리가 부모가 되었을 때,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또 몇이나 될까.

자식은 부모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어른이 된다. 성장은 나의 부모가 나처럼 한낱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부모와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해결하지 못할 바에는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가족 운이 없다고 자조하고 떨쳐버리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가급적 빨리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부모 품을 벗어나는 것이 서로를 돕는 길이다.

거리를 두는 일은 완벽한 부모 자식 관계를 투사하여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들을 탓하지 않고 성인 대 성인,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대하며 의존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손에서 놔버려야 비로소 해결되기 시작하는 문제가 있고, 그러면서 점차 극복할 용기가 내 안에서 우러날 것이다.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며 계속 부모 이슈를 붙들고 산다면 어쩌면 내가 일부러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는 게 아닌지 냉정하게 자문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상처를 소중히 하려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은 그 상처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그 외에 소중히 할 만한 게 별로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상 그쯤 되면 그건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이다.

 

봄에는 부쩍 '어떤 상대와 결혼해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최적화된 상대란 없다. 17년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이 세상엔 내 남자, 내 여자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체념했다. 사람을 소유할 수도 없고, 상대를 내 입맛대로 바꿀 수도 없고, 끊임없이 같은 깊이로 사랑할 수도 없다. 

결혼이 인생에서 하나의 큰 획을 그어주면서 기분 전환이나 새로운 도전이 될 수는 있어도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결혼은 동화책처럼 "그들은 그 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도 아니고 결혼 전 일상처럼 좋았다가 좋지 않았다가를 반복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삶이다. 결혼을 해도 둘 다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그래도 나는 서로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애정 표현은 결혼이라 생각하고, 결혼을 하면서 다른 인간에 대해 깊이 이해하거나 내가 이해받으려고 노력한다는 면에서는 결혼이 꽤 의미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결혼에도 행복과 고통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결혼을 하면 보이지 않던 여러 갈등 요소가 생기며 어두운 그림자의 부분을 끌어안을 인내심과 이해심이 중요해진다. 결혼하면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라는 말은 그 순간에는 진심이겠지만 배우자 포함 그 어떤 가까운 인간관계도 나의 인생을, 나의 행복을, 내가 외롭지 않음을 보장해줄 수는 없다. 고독은 스스로 떠안고 처리해야만 할 것 같다.

 

불편한 인간관계를 견뎌내야 할 이유는 없다. 당장은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만 한번 관계를 자연스럽게 놓아버린 다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피차 홀가분해할지도 모른다. 둘 사이에 일부러 거론하지 않는 갈등이 있다면 그 갈등을 놓아보자.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자연스레 이해되고 용서되는 것들이 있다. 갈 사람은 가고 돌아올 사람은 분명히 다시 돌아온다. 관계의 상실을 인정할 용기가 있다면 어느덧 관계는 재생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의 자연스러운 생로병사를 나는 긍정한다.

 

'사랑파'냐 '현실파'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나쁜 것은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떤 가치가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독립적인 의사 결정이 어색한 것은 여태 그 나이가 되도록 자기 가치관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알지 못해서 그렇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스스로의 욕망에 무지하다 보니 그 어느 것도 우선순위가 모호해질 수밖에. 자신의 우선순위를 알려면 평소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주변에 휘둘리다 보면 정작 내가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로맨스도 필요하고 안온함도 포기 못 해'식으로 이것저것 다 원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다 어정쩡하게 타협하는 식의 결혼을 해버린 그녀들이 결혼 후 펼치는 불평불만과 자기 연민을 많이 목격했다. 그럴 거면 나는 차라리 돈이든 사랑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솔직히 인정할 줄 아는 여자가 낫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걸 정확히 알면 얻기가 더 쉽고 그러면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 수 있고 무엇보다도 함께 사는 그 상대를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사랑의 힘으로 현실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마음은 '사랑파'이지만 머리로는 그의 현실적 결핍, 혹은 나보다 못해 보이는 어떤 조건들을 차마 무시하지 못하는 눈빛으로 묻는 여자들이 많다. 그걸 타인에게 물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보다는 자기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사실 내가 제일 중요하다, 내가.

여자가 소위 말하는 가난한 남자를 선택하는 사치를 부리려면 일단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해 있어야 한다. 남자가 돈을 벌지 못하면 내가 벌어서 그 사람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담담하게 우러날 수 있어야 한다. '남자라면 막노동이라도 해서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해요'라며 남편의 벌이가 작은 건 용서되지만 여자인 내가 혼자 벌어 오는 모양새는 실하고 생각하면, 경제적 여건이 내 성에 차지 않는 남자와의 결혼은 무조건 관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요, 를 묻기보다 내가 이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지, 해줄 수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는 없을까? 언제까지 '이것만 빼면 참 괜찮은 사람인데'라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인가. 돈과 남자 사이엔 애초에 상관관계가 없다. 돈이 문제라면 그 돈, 내가 벌겠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을까.

 

사람의 몸만큼 정직한 건 없고 사람의 마음만큼 조작 가능한 것도 없는 것 같다.

 

무엇이든 '나와 맞고 맞지 않고'는 중요했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품위'가 아니라 '고유한 색채'가 아닐까.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고유한 색채'가 있으면 쉽게 시장 변화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방향이 어느 쪽이든, '세상은 원래 그래' 같은 명제에 나는 어쩐지 반항하고 싶어진다. 지금으로서는 그 반항과 저항의 방식이 기왕이면 창의적이고 지속적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현재 어떤 일을 하건 일의 기술적 내용보다 그 일에 접근하는 태도를 배우고 쌓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하는 방식의 틀을 견고하게 잘 잡아놓으면 그 안에 어떤 내용물의 일을 적용시켜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일을 잘해낼 수 있는 저력이 되어준다. 다시 말해 과거의 그 어떤 일 경험도 쓸모없는 것은 없다.

나는 20대 때 35살 이후의 인생을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35살까지 일하고 그다음엔 '그 후에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인 줄로만 알았다. 웬걸, 그 후에도 길고 긴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우리가 변해간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일에 대한 좋은 태도들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싶다.

'변화'라는 개념은 전혀 새롭거나 화려한 것이 아니다. '변화'는 '결코 변하지 않을 좋은 것들'에서 온다.

 

나는 살아가면서 내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내가 나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을 필요로 한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입하는 기분은 생생히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실감을 안겨준다. 그렇게 조금씩 걸어나가는 일, 건전한 욕심을 잃지 않는 일은 무척 소중하다. 결국 열심히 한 것들만이 끝까지 남는다.

 

자존감은 '나를 사랑하자' 같은 1차원적인 자기암시나 구호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낫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도 아니다. 자존감은 '나 자신을 아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나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좋은 점을 극대화하려는 선한 에너지가 앞으로 걸어간 만큼 나를 존중하도록 만들어준다. 다시 말해, 타고난 것이나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나 자신과의 관계에 자존감이 좌우된다.

 

소설가 스티븐 킹의 대중소설 옹호 연설을 반박 글로 깔아뭉갠 소설가 셜리 해저드에 대해 스티븐 킹은 다음과 같이 일침을 놓은 바 있다.

"일이나 해. 인생은 짧아. 가만히 앉아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진짜 일을 해. 신께서 재능을 주셨지만 살날은 많지 않으니까."

남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과 기력으로 나의 일을 하기로 한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상대보다 '나'에 대한 일말의 진실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니 초점을 상대에게 두기보다 내 마음에 먼저 두어야 할 것이다. 타인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쉽다. 나 자신을 정직하게 보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내가 어느 순간 타인에 대한 비난으로 열을 올린다면 나는 그것을 내 안의 공허함이나 불안함에 시선을 돌리라는 자가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행복하자'라는 말이나 '하면 된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건조한 성격으로 타고나서 그런 측면도 있겠다. 나는 행복이라는 감정은 '찰나'라고 생각하고, 하면 된다는 말보다 '최선을 다해 해보고 운이 따라준다면 어쩌면 될 수도 있겠다'라는 말이 보다 현실을 반영해서 신뢰한다. 인생은 근본적으로 지루하고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비관적 현실주의자인지라 아무리 애를 써도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지는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래 우울한 인생이라고 해서 그냥 놔둘 수도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태도일 것이다. 알맹이 없는 긍정이나 낙관이 아니라, 냉처한 현실감각과 공정한 비관 위에서 시작되는 그런 결기. 일관된 삶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무언가에 몰두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 인생의 방황을 줄여주고 공허함을 최소화시킬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한 권의 책으로 써내면서 '내가 이런 삶의 태도를 좋아하고 신뢰하는구나' 자연스레 깨닫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축약한다면 인생 전반에 임하는 태도는 자발적으로, 사랑은 관대하게, 일은 성실하게, 관계는 정직하게, 사안은 공정하게.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내게는 인생을 보다 나답게 살게 해준 태도들이었다. 다만 이것이 정답이니 이대로 하면 된다고 말할 의도는 없다. 나는 이런 틀에서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을 걸고 싶었다.

 

흔히들 고역이라 생각하는 시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자발적 태도를 관철시키기를 원했다. 가부장제 사회나 주변 사람들이 부과하는 의무를 따르기보다는 가급적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무리하지 않는 관계를 맺어왔다. 속으로는 미워하면서 겉으로만 며느리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것, 내키는 것은 먼저 나서서 하지만, 내가 하기 싫거나 이해가 안 되는 것(예로 용건 없는 안부 전화나 모두 모여 김장하기)은 미움받을 결단으로 딱 잘라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타자로서 남편이나 아이를 바라볼 때 그들을 한 개인이나 인격체로서 더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을 집과 가정생활과 아이를 함께 나눠 가진 동거인이라 생각했고, 심지어 딸아이도 '나'의 아이라거나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준, 우리 집에 배당된 아이인데, 기왕이면 잘 키우라고 우리와 닮은 아이를 보내준 것처럼 느낀다. 그러다 보니 시부모님도 시부모-며느리라는 전형적인 관계의 틀에 내가 맞추지 않고, 내 아이가 하늘에서 우리 집에 할당된 아이인 것처럼 사회에서 한 성인으로 살아가는 내가 책임을 가지고 돌봐드려야 하는 노인 커플로 간주했다. 남편의 좋은 점이 저기로부터 왔구나, 하고 이따금 감사하게 생각하는.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도 편해지고 심리적 거리 조절도 되었다. 외출이 쉽지 않은 90대 연세의 시아버지의 호호백발을 정기적으로 이발하고 손발톱을 잘라드리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이런 행동은 권위나 의무가 아닌 친밀감에서 나왔다.

 

'삶의 소소함을 즐기자'는 말이나 '성공을 향해 돌진하자'는 말, 둘 다 거리를 둬야 하는 말이다.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부분의 여유는 취하되, 뛰어야 할 시점에선 이 악물고 달려볼 필요가 있다. 열심히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해두지 않으면 그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돌이켜보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은, 절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 이대로 있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요구하고, 분명히 어느 선에서는 대가를 치르고 무리를 할 수밖에 없다. 내 꿈이 뭘까, 나는 꿈을 이루어야 하는데, 라며 꿈이라는 붕 뜬 명제에 사로잡히다 보면 오히려 지금 내 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이 현재 시간들을 놓칠것만 같다. 미래는 끊임없는 오늘의 반복일 뿐이니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고 실천하기로 한다. 

 

나이가 들수록 살아가는 방식을 단순화시키고, 우선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점점 중요해지는데, 이 책 작업 덕분에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들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은 어떤 완벽함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가장 본연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가고자 하는 시도인 것 같다. 모든 게 잘 안 풀리고, 내 뜻대로 안 될 때 도망가지 않고 나를 성찰하는 일. 그럴 때일수록 자신의 삶의 태도를 점검하는 것은 어지럽고 불안정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탱하게 하는 중심이 되어줄 것이다. 독자분들 각자의 삶에 어떤 저마다의 삶의 태도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런 상황을 겪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가능한 한 담담히 있는 그대로의 복잡함과 불편함과 예측 불가능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신에게 적응시키는 것. 어차피 답을 알 수 없는 내일이니, 아무것도 상상하지 말고 그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 한마디로 단정 짓기 어려운, 모순된 감정이 내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시실을 용서하는 것. 초연함만이 이 시간을 버티게 해주리라는 것.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말은 그럴싸하지만 사실상 나를 그 상황에 꾸역꾸역 길들이면서 적절히 멘탈을 보존하기 위한 현실도피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