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고등어를 금하노라(임혜지)
나는 소중한 존재이고 내 노동력 또한 소중하기 때문에 그 평가를 남에게 맡기거나 돈으로 재고 싶지는 않다.
에너지를 쓰지 않고 살 수 없는 문명인으로서 에너지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는 방법을 나는 딱 하나밖에 모른다. 에너지가 그다지 아쉽지 않은 생활 습관을 실천하는 것이다.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별로 어렵지 않다.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과 자전거를 이용하고, 겨울에 집에서 내복을 입고 지내며 난방을 줄이는 일은 마음먹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니다. 따지고 보면 마음먹기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환경이라는 공동의 자산을 지키는 일이 내 것을 남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더 공평하고 당연할 뿐 아니라 쉽기도 하다는 간단한 이치만 깨치면 되기 때문이다.
욕조가 3분의 1 정도 차자 물을 잠그고 거품을 풀었다. 수면 위로 나온 부분이 좀 춥다 싶으면 요리 누웠다, 저리 엎어졌다 엎치락뒤치락하며 때를 골고루 불려서 '이태리타올'로 박박 문질렀다. 살갗에는 이태리타올이 남긴 분홍빛 열기가 행복감처럼 번졌다. 남편에 대한 복수심뿐 아니라 목욕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나는 죄의식을 동반한 스릴을 느꼈다. 사탕을 몰래 훔쳐 먹는 아이의 심정이 이럴까? 이브가 하나님 몰래 따 먹은 사과의 맛이 이럴까? 물 위로 나온 내 몸을 부드럽게 덮어주며 사치스럽게 반짝이는 거품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참 퇴폐적일 만큼 부유한 생활을 하는, 지구상의 몇 퍼센트 안에 드는 행운아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뒤이어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시기가 우리 대에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자식 대에서는 목욕이란 풍습이 존재했던 호시절을 환상처럼 그리며, 선조들이 참 파렴치하게 지구를 말아먹었다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아, 나는 파렴치한 사치를 누리고 있구나. 누가 이런 나를 본다면 참 궁상스럽게 산다고 생각하겠지? 어쩌다가 목욕 한 번 하면서, 그것도 물을 아낀다고 반도 안 채운 욕조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행복에 겨워 사치니 행운이니 어쩌고저쩌고 말도 많구나.
나는 품위 없이 사는 사람일까? 아니다. 몰락해가는 로마에서 우유에 목욕하는 귀족 여인네들이 품위 없는 사람이지, 에너지의 불평등한 분배에 항거하고 물질의 속박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목욕을 자제하는 것은 대단히 품위 있는 행동일 것이다. 생각이 로마의 여인네에게 미치자 나의 호기가 슬금슬금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구 저편에서 식수마저 부족한 사람들이 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사람이 마시는 물에 비누 거품을 풀어놓고 들어가 앉은 나를 본다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우유에 목욕하는 로마의 여인네들을 떠올릴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야채나 과일 씻은 물을 모아 마당의 화초에 물을 주고, 장바구니를 늘 챙겨 가 물건을 살 때 딸려오는 비닐봉지를 거절하고, 귀찮더라도 쓰레기를 분리하여 멀리 있는 공동 수거장으로 가져가고, 재생지를 사용하고, 원시림에서 벌목한 나무로 만든 가구나 생활용품을 피하고, 생산에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은박지와 알루미늄 캔 음료를 피하고, 겨울에는 난방을 조금만 덜 하려고 집안에서 스웨터를 입는 나의 사소한 일상을 다른 투사들의 무용담과 비교하여 하찮은 일이라 과소평가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세상은 앞에서 활약하는 주연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경을 이루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주연이 아님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이 '배경'의 위력을 항상 생각하며 '좋은 배경'이 되겠다는 뜻으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씨를 뿌리며 사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기로 했다. 티끌인 나에게 태산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내가 프리랜서로 하는 일도 경기를 예민하게 타는 편이라 이럴 때 초점을 내 인생에 맞추면 미리부터 화병이 나려고 한다. 행여 패자의 그룹에 속할까 겁나고, 겨우 요 정도밖에 이루지 못한 내 능력이 부끄럽고, 죄 안 짓고 부지런히 살아온 나를 패자로 만든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원망스럽다. 이럴 때 초점을 나에게서 전체로 돌리면 또 다른 진실이 보인다. 아하! 이건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로구나. 내가 이 시스템 안에서 승패의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동안 그 여파로 굶어 죽는 사람도 있구나. 나 역시 이 시스템의 수혜자였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나 하나 어떻게 될까 봐 엄살을 부릴 염치가 사라진다. 전체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탤 열정이 솟는다. 무기 수출국인 독일에서 내가 290유로나 빼돌려 피해자 어린이들의 의족을 마련하는 사업에 힘을 보탰으니 얼마나 장한가? 당장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는 일이 바로 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기쁨 아니겠는가? 사회가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변치 않는 나의 가치를 확인한 것, 이것이 인생의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가정이 화목할 수 있는 비결은 참으로 사소하다. 바로 세끼 식사를 온 식구가 함께한다는 것이다. 비결이라 하기엔 대단치 않아 보이겠지만, 독일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부부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고 있다. 남편은 학교에서 갓 돌아온 아이들에게 학교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버지로서 대단히 유익하다며 매일 점심을 집에서 먹는데, 이렇게 하다 보면 회사 동료나 상사와의 친분에서 오는 이익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프리랜서로 문화재를 실측 조사하는 나 역시 먼 곳에 있는 일거리는 웬만하면 거절하다 보니 일감이 오래 끊어지기 일쑤다. 하지만 그럴 때면 글 쓸 시간이 많아져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절약하며 살기 때문에 돈이 더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남들 눈에는 별 볼일 없을지라도 우리 스스로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기에 승진이나 출세에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더 이상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데, 가족과 함께하는 점심시간의 행복을 포기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래도 가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나 밥순이 노릇이 지겨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부엌일이 영재 교육의 일환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우리 아이들이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식탁에서 배웠다"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 성적은 그저 그래도 영재임에 틀림없다. 학교라는 거대한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적성이 비슷한 아빠를 따라 도약하는 아들, 취향이 다른 부모 밑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딸, 자긍심 지수를 학교 점수와 동일시하지 않는 현명함, 이런 점들이 모두 우리 아이들이 영재라는 증거다.
지금은 둘 다 예전의 꿈과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돈은 못 벌어도 시간이 넉넉한 일, 즉 우리 인생관에 어울리는 일이라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열심히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돈이 아니라 부모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평생에 걸쳐 철저하게 실천할 수 있었던 걸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감사한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풍요로운 인생을 맛볼 생각도 못 했을 것 아닌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우리가 결혼 초반에 직업 세계에서 승승장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도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관이 확고하게 서기 전에 일에 대한 유혹이 먼저 들어왔다면, 승부욕 강한 우리의 성격으로 보건대 진로를 그 방향으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랬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종류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아무런 후회 없이 이렇게 행복한데, 내가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폄하할 이유는 없다. 나는 이런 행복감이 나만의 거짓말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나와 남편은 공부를 많이 한 편이지만 공부 덕분에 부귀영화를 누려본 적도 없고, 또 부귀영화가 없다고 해서 불행하게 느낀 적도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학력에 대한 강박관념이 적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도 초보 부모인데 자식의 앞날이 불안하지 않을 리가 있나? 그렇지만 아이들의 성적에 참견해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관리하는 방법을 터득할 기회를 앗을 수는 없었다. 자녀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모의 도움으로 잘 사는 게 아니라, 부모의 도움 없이 잘 사는 것이기에.
성적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우리가 교육에 무관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자녀 교육은 남편과 내 인생에서 늘 우선순위이다. 단지 우리는 아이들이 본능적인 열정으로 공부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갓난아기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뒤집기 연습을 열심히 하듯이, 어린 아이들에게도 스스로 열정을 바치는 놀이들이 있다. 우리 아이들은 레고나 인형 놀이같이 스스로 택한 프로젝트를 할 때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몰두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학습은 없다고 느꼈고, 어떤 선생님도 이보다 더 잘 가르칠 수는 없다고 여겼다.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의 놀이를 진지하게 보호하고, 행여 아이들이 도움이라도 청할라치면 갖은 상상력을 동원해 도와주었다. 이런 것이 바로 영재교육 아니겠는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실력과 점수는 동의어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성적이 별로 좋지 않다고 걱정하는 선생님들께 나는 우리 아이들은 정서가 안정되었으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라고 도리어 위로를 해드렸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이 우리 품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고유한 특성과 재주를 스스로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그간 열중해서 노는 와중에 자신이 원하는 것,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서 계발해왔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내 아이들이 그렇게 중대한 과업을, 그 나이에, 자기 힘으로 이룩했다는 자신감을 안고 세상으로 걸어 나가 어렸을 때 자긍심 지수를 학교 성적에 두지 않았듯이, 커서도 행복 지수를 부귀나 영화에 두지 않는 현명하고도 소박한 인생을 살기를 기원한다.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경험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립을 통한 자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경험한 나는 아이들의 자율성을 어려서부터 존중했다. 아이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관찰하고 내가 거기에 맞췄다. 책을 많이 읽어줬지만 아이들이 글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제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알파벳이 세 개 들어가는 이름만 쓸 줄 알았지 성은 쓰지도 읽지도 못했다). 학교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씩 배워가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 인생에 유익한 일이지, 그 나이에 남보다 조금 더 먼저 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성장 발육에도 순서가 있다.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는 것을 연습해야 할 시기에는 충분히 뛰어놀아야 뇌도 발달하고 똑똑해진다. 그런 시기의 아동에게 엉뚱하게 글자나 숫자를 가르치는 것은 정상적인 발달을 저해하고 자발적인 학습욕구를 방해하는 행위라는 연구 결과는 학계에 수두룩하다.
미취학 아동을 위한 음악, 미술, 체육 조기 교육(영재교육이 아니라 놀이를 통해 기초를 다지는 준비 교육에 가깝다)을 받지 않은 아이들은 주변에서 우리 아이들밖에 없는 것 같다. 나도 아이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뭐든지 한 번씩 데리고 가기는 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즐겨 하던 일이라도 단체로 줄 서서 하라면 싫어했다. 암만 재능을 길러줘도 본인이 즐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서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들의 학교 공부도 돌봐주지 않았다. 암만 성적이 좋아도 본인의 학구열이 싹트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부모가 재능을 길러준답시고 설치다가 도리어 흥미를 꺾지나 않을까, 도와준답시고 주인 의식을 빼앗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조심했다. 교육의 목적은 도토리 시절의 키재기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은 부모가 적극적으로 공부시키는 아이들에 비해서 학교 공부와 예체능이 늦되었다. 그러나 성년이 된 지금 남보다 못하는 일은 별로 없다. 시기상조로 배우려면 힘든 일도 적절한 나이에 이르면 쉽게 배울 수 있다. 글을 세 살에 깨쳤는지, 일곱 살에 깨쳤는지는 나중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어른이 되었을 때 글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얼마나 즐겨 사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온 우리 아이들은 부모 품을 떠난 후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교육의 목적이었다.
또 하나 우리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이 평생 신념과 사랑을 가지고 전념할 일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공부든 기술이든 상관없다. 공부 잘해서 성공한 판사나 교수도 조직의 노예가 될 수 있고, 평범한 기술자도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다. 나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늘 강조했다.
"너에 관해서 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엄마 아빠도 네 일에 관해서 너보다 더 잘 알 수는 없어."
아이들에게 너를 사랑하는 어른들을 믿고, 어른들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라고 가르칠 수 없다. 그 대신 아이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야 하고, 때로는 세상의 이목과 부모의 반대를 무시할 수도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엄마 아빠가 아니라 본인이라고, 스스로의 판단을 믿으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학교 성적은, 물론 좋지 않았다. 이를 걱정하는 선생님들께 나는 우리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언젠가는 공부를 잘할 거라고, 그러니 그것 때문에 너무 심려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곤 했다. 독일 학교의 성적은 주관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선생님의 재량이 제법 영향을 미치지만 점수 흥정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진정한 언어 실력은 맞춤법이 아니라 정확한 사고에 있으니 부디 선생님께서 아이가 지금의 받아쓰기 점수가 자신의 언어 능력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달라고 부탁드렸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내가 선생님이라면 참신한 아이디어와 비상한 문장력을 높이 사서 만점을 줬을 거야. 하지만 네 선생님이 잘못한 건 아니야. 선생님은 올바른 작문법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사람이거든. 네가 성적을 잘 받고 싶다면 선생님이 원하는 작문 형식에 딱 맞춰서 쓰면 돼. 그건 네 선택이야. 하지만 내가 너라면 성적 때문에 글 쓰는 재미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토마스 만의 일화를 들려주곤 했다. 토마스 만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 그의 독일어 선생님은 "이 학생의 이런 독일어 실력으로는 앞으로 사회에서 어떤 쓸모 있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서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토마스 만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 외에 내가 또 아이를 위해 한 일은 아이가 좋아하는 독서를 훼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점이다. 한창 허영심에 부푼 시기여서 유치찬란한 청소년용 여성지를 정기 구독하거나 소녀 취향의 DVD를 즐겨 보았지만 책이나 영화에 대한 우리 나름의 근엄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그 취향을 존중해주었다. 또한 말하는 걸 즐기는 딸아이를 위해 남편은 하루 세끼 식사를 집에서 하면서 딸의 수다 스파링 상대가 되어주었고 나는 가족을 위한 식탁을 정성껏 차렸다.
나는 우리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영어로 읽고 쓰고 듣고 대화하는 일에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 자체가 목적이었던 적은 없다. 영어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인 자동차 같은 것이었고, 목적지에 대한 열정이 크다 보니 자동차 운전도 열심히, 빨리 배웠을 뿐이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열정의 불가사의한 힘을 알 것이다. 열정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 열정이 저절로 솟도록 용기를 꺾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이 아이들의 진정한 힘을 기르는 교육이 아닐까?
전반적으로 크게 빗나가지 않는 한 자식들의 사적인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교육 방침이다. 어려서부터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고 책임지는 습관을 들이지 못해 어른이 되어서도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나는 독일에서도 숱하게 보아왔다. 곱게 자란 대학생들이 특히 심했다.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독일 대학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서, 학업을 끝내지도 그만두지도 못한 채 질질 끌려 다니며 시간만 보내는 불행한 학생들을 보며 나는 학력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난독증이 있고 구구단도 외우지 못하던 우리 아이들은 의외로 김나지움에 입학했고, 가끔씩 낙제할 기미를 보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강력하게 부탁한 것은 단 하나였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자신의 소질과 취향을 관찰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를 알아내라는 것이었다. 열정 없이 남 보기에만 그럴듯한 턱걸이 인생만 피해도 성공한 인생이라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공부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이 단지 성적이 된다고 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큼은 가장 피해야 할 일이라고 아이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다. 세속적인 경쟁력도 열정이 좌우하지 학력이 좌우하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체험하지 않는가?
엄마의 초조함을 아이의 평화로운 마음에 물들이지 말라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들은 앞으로도 몸뿐 아니라 마음도 잘 다스리며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핸디캡을 억울해하는 대신 핸디캡에 평화롭게 적응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극복할 것이다. 본인이 이렇게 의연할진대 옆에서 괜스레 측은해하거나 억울한 마음을 품는 것은 엄마로서 예의가 아니겠지요?
소금물 목욕 방법: 욕조에 섭씨 37도 정도의 물을 받아 바닷소금 5백 그램을 넣고 잘 저은 다음 15~20분간 몸을 담근다. 피부에 소금기가 남도록 샤워나 비누질을 하지 않고 그냥 나온다. 목욕 후 당장은 아토피 부분이 빨개지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가라앉는다. 목욕 후 이불을 따뜻하게 덮고 누워서 30~60분 쉬면 좋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개인이 자신의 양심과 판단 능력을 저버리지 않는 것
남과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경쟁적인 사람보다 감정의 소모가 적어 실력 발휘에 거침이 없다. 남과 자신에게 너그럽다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자 사회의 힘이 아닐까?
'어차피 하루하루 꺼 나가는 인생인데 까짓 거 비 오는 날 풀밭에 드러눕는 자유 정도는 누리며 살자구. 남이야 뭐라거나 내 양심 정도는 지키며 살자구. 남편에게 이롭고 자식들에게 이로운 일이 결국은 내게 이로운 일이란 걸 알았다면, 그리고 그 이치가 가족을 넘어 이웃, 사회, 지구로 확장되는 게 당연한 일이란 걸 깨달았다면, 남이야 뭐라거나 말거나 나만큼은 나의 양식을 믿고 실천하자구. 풀밭에 드러누운 지지배가 뭐라고 흉을 보거나 말거나.'
나 같은 보통 사람도 내 인생과 지구의 주인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걸 다른 보통 사람들과 더불어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면 나는, 너는, 우리는 허세의 갑옷을 벗어 버리고 편안하고 가볍게 실천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너와 나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