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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평범한 결혼생활(임경선)

아름다운 존재 2023. 10. 13. 17:30

그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거짓이었을까.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어차피 '행간의 의미'를 남자한테 찾는 일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시가에 대해 외부에는 일절 뒷담화를 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도 시간 낭비였다.

내가 그것을 얼마나 중요한 문제로 간주하는지가 상황을 결정지을 것 같아서 아예 생각부터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남들이 '문제라고 해도 내가 문제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 내 인생의 시간과 마음의 전용면적을 많이 차지하는 것이 싫었다.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면 당사자와 대면하고 끝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신경을 쓸 수가 없으니 우리는 그 안에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조금 미안해하며) 선을 그어야만 한다.

 

나는 가급적 그 화두에 마음을 쓰고 싶지 않다.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면 시가 식구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첫째, 그들은 나의 진짜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고(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진짜 가족도 과히 편한 관계가 아닐 수 있다는 것) 둘째, 이 우연한 인간관계를 수직적이고 필연적인 권력관계로 고착시키려는 기성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짜놓은 권력의 역할극에서 주연을 빛나게 해주는 조연이 되기에는 우리의 젊음이 너무 짧고 소중하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된 그분들과 서로 인간적으로 존중할 수만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아이를 낳던 날, 시어머니는 내게 삐뚤삐뚤한 글씨로 짧은 메모를 써서 주셨다.

사랑하는 경선에게, 수고가 많았다. 아기를 사랑으로 섬기길 바란다.

그 글을 읽고 '섬기다'라는 단어가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 아닌, 부모가 자식을 겸허히 섬겨야 한다는 것이 무척 올바른 일처럼 여겨졌다. 나는 이를 앞서 체득한 그녀의 순한 마음씨를 생각했다.

 

매일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기에 가급적 어깨에 힘을 빼고 해버리는 것, 그것은 가사 일에 있어서 과히 나쁘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누가 무엇을 얼마나 할 것인가 신경전을 벌이기 전에 가사 일의 크기 자체를 먼저 줄이는 것도 괜찮다. 특정 가사 일을 일부러 즐겨 하는 것이 아니라면 식기세척기나 로봇청소기, 반찬 배달이나 다림질 스프레이 등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십분 활용하면 가사일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

가사 분담이 어느 수준까지 몸에 배게 되면 누가 얼마만큼 더 맡았는지 예민해지거나 저울질하는 게 조금 무의미해진다. 균형이란 부담의 비중이 시소처럼 그때그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부당하다는 감각을 느끼지 않는 상태이다.

 

결혼을 해서 배우자가 있다 해도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자발적으로 결혼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포함해서. 스스로 온전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흔히 속세에서 말하는 '가장의 역할'을 남편에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전형적인 '아내의 역할'을 기대하지 말아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전형적인 '남편의 역할'도 기대하지 않기로. 사회가 제멋대로 정해놓은 이상형은 인간이 스스로를 못 미더워하게끔 만들어버린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알고 보면 무척 쓸쓸한 인간이라는 것을 살면서 불현듯 깨닫는다. 뿐만 아니라 자기와 가까운 사람도 쓸쓸하게 만들어버린다. 아내와 남편으로서의 역할극은 집어치우더라도,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몸과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일, 거기에는 번잡함을 동반한 애틋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결혼은 참으로 복잡하게 행복하고 복잡하게 불행하다.

 

나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적당히 피하면서 사는 것도 인간이 가진 지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결혼이란 뭘까, 부부란 뭘까, 행복이란 뭘까, 같은 것들을 정색하고 헤아리려고 골몰한다거나, 100퍼센트의 진심이나 진실 따위를 지금 당장 서로에게 에누리 없이 부딪쳐서 어떤 결론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대개 실패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질문들의 종착지는 결국 '그럼 나는 왜 사는가'와 같은 막다른 골목일 뿐인데, 그렇다면 왔던 길을 도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패배가 아님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무엇인가의 당위나 절대성을 진지하게 사유하기 시작하면 급 피로가 몰리고 피가 머리로 쏠로 편두통이 재발할 것이다. 그럴 때는 운동화를 신고 동네로 산책을 나가 맛있는 스콘을 사 먹는 것이 현명하겠다. 적당한 때가 오면 부부가 무엇인지, 결혼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각 잡고 사색하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우리에게 어쩌다 한 번씩 알려줄 테니까. 마치 이제 알았냐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툭 치면서.

혹은 진심이나 진실은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말을 믿는다면, 그리고 진심이나 진실을 알고 싶다면, 마지막까지 따라가보는 수밖엔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