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조그맣게 살 거야(진민영)
시간을 풍족하게 누리면서 사는 삶이 진정으로 부유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는 시간이다. 시간이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 삶의 행복 지수는 뜨겁게 높아졌다. 스트레스는 줄고 발견할 수 있는 일상의 아름다움은 늘어났다.
기다리는 10분, 20분은 내게 무가치한 시간이 아니다. 나는 시간을 보내는 최고의 방법을 연마해왔다. 글을 쓰고 독서를 하고 음악을 듣는다. 어디든 자리잡고 앉을 공간과 책 한 권, 수첩 하나, 펜 한 자루만 있다면 몇 시간이고 시간을 소중하고 알차게 쓸 수 있다. 내가 두려운 건 시간이 족쇄가 되어 나를 몰아세우는 상황이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으면 생각이 든 순간 떠난다. 나의 충동과 본능을 외면하지 않는다. 항상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 순간의 기분과 행복을 추구할 자유다.
시간을 알차게 쓴다는 명분으로 속도를 강조하기 시작하면, 매순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감상의 깊이가 떨어진다.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 표정, 기분, 스치는 풍경을 세세하게 느끼고 담아낼 수 없다. 시간적으로 빈곤한 사람에게 여유란 절대 허락되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든 그 모든 순간을 최대한 느끼고 싶다. 천천히 음미하고 녹여서 발효된 기억을 머릿속 앨범에 저장하고 싶다. 깊이 있는 감상에는 집중할 수 있는 군더더기 없는 환경과 여유로운 시간이 필수다.
팍팍하게 조여오던 일과가 빠진 자리는 텅 비어 있다. 그 시간은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다. 무엇이든 하며 채워진다. 무얼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다는 사실이 꽤 설렌다. 무언가를 하며 보낸 어떤 시간보다 오히려 더 가치 있게 보낼 수 있다. 빈둥빈둥 게으른 시간이 나는 좋다.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애초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이유란 주어진 시간을 풍족하게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닌가.
빡빡하게 살다 보면, 권태로움도 그만큼 빨리 찾아온다. 열정과 영감도 충분한 휴식이 있을 때 빛나는 법이다. 여유가 없는 일상은 새로움을 창조할 여력도,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에너지도 없다.
의문을 가져야 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열심히 사는 건지? 자아 발전이 행복을 준다면, 적당한 선에서 멈춰도 죄책감 따위 없어야 한다. 반드시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없다. 특별히 무언가 열심히 하지 않는 삶도 그런 대로 괜찮은 삶이다.
사람을 만나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책을 하고 음악을 듣고 집안일을 하기에도 하루가 부족하다.
나는 고갈되지 않는 충만함을 느끼는 인생을 원한다.
중요한 건 가진 옷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지, 얼마나 다양한 옷을 입느냐가 아니다.
나는 옷에는 큰돈을 들이지 않지만 운동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피부와 정신 건강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한다.
단언하건데,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옷으로 날개를 달았다고 한들 천사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멋진 사람을 좋아하지, 멋진 옷을 입은 추레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사람의 인상을 좌우하는 건 그 사람의 말투, 청결, 몸가짐, 표정 등이다.
사복의 제복화를 몸소 실천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가치롭게 생각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선택의 가지치기를 했다. 그 결과 아침에 옷 고르는 시간조차 가치로운 일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을 했고, 과감하게 단벌 생활을 감행했다.
돈을 벌고 빚을 내면 누구나 옷을 사고 스스로를 꾸밀 수 있다. 하지만 고유의 창의성, 통찰력, 재능, 강인한 체력, 신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은 돈 주고 살 수 없고, 신용카드 몇 번 긁는 일로 해결되지 않는다. 꾸준한 노력과 몰입, 축적된 시간이 빚어내는 자질들은 그 어떤 가치보다 과정이 쓴 만큼 나를 더 빛나게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집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유지하는 데는 관심이 많지만, 영구적으로 집 안을 어떻게 뼛속까지 가꿀지에 대해 더 깊은 사고를 하지는 않는다. 소비를 자주 하면 할수록, 공간을 가꾸기는 쉽지 않다.
나의 집에는 더 이상 물건이 쌓이지 않는다. 물건을 살 때는 여전히 계속해서 묻고 또 묻는다. 필요한가? 그렇다면, 그 필요는 진짜 '필요'가 맞는가? 그리고 내가 주장한 그 필요를 몇 번씩 심문하고 또 검열한다. 필요라고 느끼는 나의 허황된 착각은 아닌지, 가지고 싶다는 충동적인 욕망은 아닌지, 남들이 다 가졌다는 이유가 필요를 만든 건 아닌지.
내 성격과 스타일을 반영하면 좋지만, 경제적 허용 범위를 넘어서면서까지,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지는 않다. 아름다운 삶이 꼭 아름다운 물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샴푸, 세제, 생활 용품을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진열하고, 전시장 같은 집을 가져야 미니멀 라이프가 아니다. 색감이 다소 촌스럽고 통일감이 없어도, 꼭 필요한 단출한 세간살이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명백한 미니멀리스트다.
물건을 사는 매순간마다 색상을 통일해야 한다는 기준을 내세우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하면 물건을 사지 않을까를 고민하지, 아름다운 집을 연출하는 데 시간을 쏟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가 미니멀리스트라는 점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플라스틱이든, 나무든, 다이소든, 마트 제품이든 사면 평생 쓴다. 망가질 때까지 쓰고, 매일 소중하게 관리한다. 다이소냐 마트냐 백화점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없이 살아볼 수 있을 때까지 지내보는 게 내게는 올바른 미니멀리즘이다. 불편함이 평온함과 자유로 다가오면, 그 불편함을 지속하고 결핍을 즐긴다. 불편함이 스트레스와 피로감으로 이어지면, 그땐 물건을 산다.
물건을 고르는 기준은 관리의 편리성이 우선이다. 제 아무리 고급스러운 양품일지라도, 단순한 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나는 사지 않는다. 진한 회색을 산 이유도, 때가 잘 타지 않고 관리가 쉽기 때문이다. 또 가볍고 수납이 용이한 제품을 산다. 그래서 접이식이나 이중 활용이 되는 물건을 선호한다.
미니멀하게 사는 게 꼭 마음에 드는 명품 하나를 고집해야 정답은 아니다. 저렴한 단 하나의 물건으로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무게가 많이 나가고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물건은 순환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기왕이면 평생 쓸 각오를 하고 물건을 고른다.
평생 쓸 요량으로 물건을 소유한다. 소모품 중 샴푸, 세제, 비누와 같은 생활 소모품은 리필용을 사서 버릴 때 쓰레기를 최소화한다.
쉽게 처분할 수 없는 물건은 생활 속에서도 짐이 되고 미래에는 자유를 발목 잡는다. 언제든 원할 때 처분할 수 있고 떠나보낼 수 있는 물건만을 소유하면 스트레스도 부담도 없다. 그 어떤 물건도 나의 자유를 속박할 수 없다.
플라스틱은 피치 못할 상황을 제외하고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텀블러를 잊고 안 가지고 나왔거나 음료를 사야 할 일이 생기면, 재활용이 좀 더 용이한 유리나 종이를 선택하는 편이다. 플라스틱은 썩지도 않는다.
신념과 행동이 언제나 100퍼센트 일치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내 마음가짐이다. 본능과 욕구만 충족하며 있는 대로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게 아닌, 경각심을 가지고 항상 스스로 경계하면서 감독, 관리하며 생활하는 내 태도를 옳고 그름의 지표로 삼는다. 주어진 선택지 중에 내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을 택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다고 칭찬해줘도 된다.
물질적 집착만큼 경계해야 할 것이 지식과 생각에 대한 집착이다.
미니멀 라이프는 내게 물리적 소유물을 덜어내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미니멀 라이프는 삶의 전반에 걸친 단순화 작업이다. 정보와 생각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물건이 아무리 적어도 사소한 일로 늘 전전긍긍하고, 적어놓은 메모나 지식에 집착한다면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다. 그 어떤 것과도 시원하게 돌아설 수 있는 호기로움이 미니멀리스트가 지녀야 할 덕목이다.
텅 빈 머릿속은 텅 빈 공간만큼이나 내가 중요시하는 상태다. 그 상태는 물리적으로 가벼워진 그 어느 순간보다 더 큰 자유를 준다.
없이도 충분히 우아하고 세련된 삶이 가능했다. 다음에는 무엇이 사라질까? 설렌다.
매번 한계를 뛰어넘으며 설레고, 변화는 신선함이 되어 내 하루를 더 풍요롭게 했다. 불편은 자유였고 결핍은 아름다움이었다. 비워진 공간에는 포근한 안락함이 있었다.
소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매번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돈을 쓰지 않는 것만큼 빠르고 확실한 재테크는 없다.
나는 돈 계산하고 셈하려고 세상을 사는 게 아니다. 나는 흔적 없이 살고 자연에 순응하기 위해 산다.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 내게 자연스럽지 않고 대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수치와 경제를 앞세워 합리화할 수 없다.
형태가 있는 물건을 많이 가졌다고 그것이 반드시 풍요로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추억은 물리적 형체 없이도 가슴속에 잔잔하게 남는다. 과거를 대변하는 물리적 형태가 있든 없든 나는 변함없이 과거의 산물이다.
자신의 생활 방식과 체질에 부합하고, 그에 걸맞는 비움의 기준이 필요하다.
내게 여행이란, 지금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 일상을 걷는 것이다. 단지 그 배경이 낯선 땅이라는 점만 달라질 뿐이다. 그래서 떠나는 날짜를 정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정착하지만 한두 달 뒤면 떠날 요량으로 둥지를 틀지 않는다.
가야 하는 곳도 없고, 정해진 일정도, 꼭 먹어야 할 음식도 없다. 눈이 떠지는 시간이 움직이는 시간이고 배가 고파지는 시간이 식사 시간이다. 매일 홀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상은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카페를 가고 수첩을 꺼내 글을 끄적이고 책을 읽는다. 멍하게 창밖만 몇 시간씩 보고 있기도 하고, 공원에서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옆에서 말을 걸어오면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기도 한다. 걷다가 우연찮게 발길이 닿은 곳에서 예상치도 못한 아름다운 풍광을 마주하기도 하고, 목적 없이 탄 기차 안에서 무엇 하나 겹치지 않는 독특한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반나절씩 걸려 어딘가로 이동하거나 하지 않고, 지역도 잘 옮기지 않는다. 비행기표 알차게 쓰겠다는 포부로 대륙 횡단을 감행하지도 않는다. 나라 한 곳, 그중에서 마을 한 곳을 별 생각 없이 선택해, 어깨 너머로 구경하고 배우고 경험하고 성장한다. 본래가 생활 동선이 좁은 나는 여행지에서도 변함없이 이동 거리가 짧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걸음걸이, 즐겨 듣는 음악, 아침 풍경, 매일의 속도, 그들의 웃음 소리,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그려낼 수 있다. 관광과 쇼핑이 사라진 공백과 여유 자금으로 머무는 시간을 연장한다. 길고 느리고 밍밍하게 여행하며 오래도록 진하게 향기를 흡수한다.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래서 나는 늘 '1분도 희생하지 않는다'라는 모토를 문신처럼 마음속에 새겨놓고 산다.
나는 돈을 거의 쓰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교통 카드 한 장만 들고 돌아다닌다. 밥은 집에서 먹고, 옷과 생필품을 사는 때는 정해져 있다. 사치품도 사지 않는다. 외식도 거의 하지 않으니, 고정 지출이라고 하면 교통비, 휴대폰 요금, 관리비 정도가 전부다. 신용 카드는 평생 쓸 생각이 없고, 체크 카드는 보관해두었다 꼭 필요한 때만 꺼내 쓴다. 약속이나 미팅이 없는 날에는 텀블러와 노트북을 챙겨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한 달 식비도 얼마 들지 않는다. 주로 두부, 사과, 양파, 당근, 토마토 드으이 야채를 소량 사서 그때그때 먹는다. 번역, 글쓰기, 영어 강사, 교재 작업 등 여러 가지 일을 잡다하게 하지만, 결코 돈을 벌어야겠다는 부담감은 없다. 의미가 있고, 자기 계발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즐겁게 기꺼이 한다.
물론 행복의 조건은 모두가 다르겠지만 남들이 말하는 전형과 주류에 스스로를 끼워맞추기보다, 조금 독특하고 약간은 모나 보여도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나는 더 이상 돈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삶을 희생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돈을 벌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돈 쓰지 않고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회에 기여하면서 살아도 생존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다. 내가 책을 쓰고 번역을 하고 외국어를 가르치고 교재를 만드는 이유도 어떤 방식으로든 크든 작든 도움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함은 부수적인 이유다. 돈에 의존하지 않는 내성을 기르면 돈 없이 사는 삶도 그리 어렵지 않다. 돈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산 증인이 되어 몸소 실천하고 증명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돈을 최대한 쓰지 않고 살고 싶다. 휴대폰 대신 메신저로 연락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한다면 교통비도 들지 않는다. 와이파이가 되고 따뜻한 물이 나온다면, 충분히 차고 넘치는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안정을 추구할수록 직장에 집착할 게 아니라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
복잡한 요리를 하지 않는 이유도 원형 그대로 본연의 맛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다. 양념이나 복잡한 레시피 모두 본질을 벗어난 장식이다. 조리 없이 원형 그대로 먹는 음식에서는 자연의 향이 난다. 조미료나 양념이 없으면 본래의 맛을 해치지도, 미각이 마비되지도 않는다. 중독성이 생기지도, 식곤증이나 더부룩함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깔끔함 그 자체다. 뒷정리도 더없이 간편하다.
본질을 포착하는 안목은 단언컨대, 내가 얻은 최고의 선물이다. 군더더기와 본질을 판별해낼 수 있다면, 삶의 복잡함이 순식간에 단순해진다.
본질을 파악하는 안목은 효율만을 중시하는 단조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홍수 속에서 집중해야 할 단 하나의 중요한 가치를 보는 통찰력이다. 평범함 속 특별함을 발견하는 눈이 본질을 보는 능력이다.
오랜 시간 자아를 찾는 여정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그저 '내가 행복한 일을 하자'였다. 보편적인 즐길 거리에서 기쁨을 얻지 못할 때는 그 일이 제 아무리 트랜디하고 대중적이어도 쫓지 않는다.
사회를 만족시킨다고 내 행복의 부피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나의 힘으로 내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 삶이 그 어떤 삶보다 더 풍족하다고 확신한다. 사회로부터 성고으이 징표를 수여받았지만 꽉 막힌 도로에 갇힌 한 사람, 차 없이 걸어다녀도 자유와 시간을 얻는 또 한 사람. 더 행복해 보이는 사람으로 살면 된다. 선택을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자신의 범주를 인지하지 못한 채 무작정 많이 소유하려고만 하면 어느 것 하나 소중하게 관리할 수 없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충분히 관리, 통제할 수 있는 만큼만 소유해야 한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면 생활이 매일같이 활력으로 넘친다. 모든 일이 너무 쉽기 때문이다.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는 것,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 스트레스 없이 옷을 고르고 입는 시간, 느리지만 우직하게 목표를 달성하는 근성까지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소유의 무게가 나의 통제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서다.
축적된 시간은 전부 그 자체가 성장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눈에 담는 풍경이 달라진다.
성장이란 누군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감으로 스스로 느끼는 것은 모두 성장이다.
나는 그 누구와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다. 안전 거리를 확보하면 서로에게 좋다. 친밀함이 독이 되어 관계를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안전 거리는 누구든 지킬 수 있다.
자주 보지 않고, 매일 연락하지 않고, 좋은 이야기만 해줄 것. 이렇게 세 가지만 지켜도 마찰이 잘 생기지 않는다. 언제 봐도 늘 반갑고 만나기 전에 살짝 설레기까지 한다.
깊고 소중한 관계일수록 더 신중하게 지키려고 한다. 거리 두기는 관계에 대한 나의 가치관이다. 나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친구는 나의 가치관까지도 너그럽게 수용해준다.
나는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조심스럽게 대하고 말과 행동 모두 더 신중해져야 한다고 강하게 믿는다. 애써 상대방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지만, 불필요한 솔직함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도 안 된다. 중요한 사람은 한 번 잃으면 다시 되찾기 어렵고, 한 번 생긴 상처는 오랫동안 관계를 서먹하게 만든다. 영원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만나면 늘 긍정적인 기운을 가득 주려고 노력한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 듬뿍 담아 건네주려고 한다. 친한 사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곁에 오래 머물다보면, 서로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아프다'고 말하기 전에 토닥여줄 준비를 하게 된다. 친한 사이는 언제 만나도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고 친근하다. 어제 본 것처럼 대화가 물 흐르듯 흘러가고 어색함과 공백은 느껴지지 않는다. 안전 거리는 어색한 거리감이 아니다. 안전 거리는 친밀함을 더 아름다운 친밀함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기 위한 보험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그래서 나는 거리두기를 고수한다. 상대방은 어쩌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를 소중하게 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말과 행동을 최대한 아끼는 것이다.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강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지, 이 거리는 절대 거절의 신호가 아니다. 성급함은 모든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평범한 물건도 관리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고급이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취향이 없는 게 내 취향이다.
나는 취향이 없는 나의 취향을 끝까지 지켜낼 생각이다. 트랜드와 마케팅에 강요당해 없는 스타일까지 억지로 만들어내면서 광고의 순진한 타겟이 되지 않겠다. 취향이란 애초에 나를 꾸미는 장식물로 만들 수 없다. 확고한 취향은 소박한 옷차림과 수수한 겉모습으로도 말투나 어울리는 주변인들만 보아도 대번에 알 수 있다.
걸레질과 청소기를 돌리는 일은 일상 속 하나의 의식이다. 날을 잡아 청소를 한다든지, 지저분한 방에서 해방되기 위해 정리정돈을 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물건이 없는 환경의 가장 큰 장점은 정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물질로 선물을 하지 않는다. 밥을 한 끼 사주거나 영화를 함께 본다. 얼마 전 친구의 생일을 맞아 그녀의 이름으로 기부를 선물했다. 멀리 해외에 사는 친구라 만나서 축하해 줄 수도 없고 밥을 함께 먹을 수도 없지만, 어떻게든 축하하는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신발이 없는 아동들에게 신발을 한 켤레 보내주는 기부 선물이었다.
기부는 참 좋은 선물이다. 받는 사람도, 선물하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형체는 없지만 어떤 물건보다 값지다. 생일날 누군가가 나의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고 한다면,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다. 베풂과 나눔은 정말 신기하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사실 기부는 '나' 좋으라고 하는 것이다. 커피 몇 잔 안 마시면 될 돈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소년 소녀의 꿈을 이뤄줄 수 있다는 건, 기쁨이자 축복이다.
친구의 생일을 직접 축하해주지는 못했지만, 그 어느 해보다 아끼는 마음을 잘 전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를 즐기게 되었다.
과거에는 외향적인 사람, 또는 항상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 성공한 인생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다. 왁자지껄한 트랜드를 쫓아야 비로소 젊은 사람 다운 기운을 가진다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비롯된 생각인지는 모르나, 나는 압박감에 짓눌려 할로윈, 크리스마스, 새해맞이, 생일 모두 최대한 떠들썩하고 함께 어울리며 돈, 사람, 시간을 소비하며 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더는 나의 내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혼자가 좋고, 혼자만의 시간에서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만, 간혹 동굴이 필요한 나와 같은 소수의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미니멀리즘이 내 마음에 심어준 희망의 싹은 무수히 많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내 자신을 너무도 또렷하게 알게 됐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슨 취향을 가졌으며, 가치관과 궁극적 지향점은 무엇인지, 나를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책 한 권을 여러 번 읽는다. 예전에는 읽고 싶은 책도 많았고 읽어야 할 책의 목록도 백여 가지나 되었다. 소유욕도 덩달아 증식했다. 도서관을 가면 항상 읽고 싶은 책을 대여섯 권 팔 한 가득 힘겹게 자리로 가져와 옆에 쌓아놓고 읽곤 했다. 그 결과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지금은 읽고 싶은 책은 없다. 반드시 읽어야 할 책도 없다. 관심이 생기는 책은 사진을 찍어놓거나 메모를 해둔다. 그리고는 바로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서 읽거나 전자책을 구입한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읽고 또 읽는다. 책을 책장에 꽂아놓기보다 의식적으로 늘 곁에 두기 위해 유념한다. 전부 다 읽거나 흥미가 떨어지면 반납한다.
한 번에 여러 책을 읽지 않는다. 2주에 한 번 꼴로 도서관에서 대출을 하고, 한 권 이상 절대 빌려오지 않는다. 책 한 권을 빌리면 수차례 반복해서 읽는다. 순차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도 하고, 중간중간에 잡히는 대로 읽고 싶은 부분만 반복해서 읽기도 한다. 기억하고 싶은 부분은 메모도 하고, 포스트잇도 붙이면서 나의 일부처럼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든다. 책 한 권을 오랫동안 잡고 있으면 여러 권을 단발적으로 읽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자신의 언어로 재가공할 수 있다.
내게 외모 관리란 화장품과 액세서리를 활용한 꾸미기가 아닌,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몸과 마음, 자연을 닮은 밥상과 균형 잡힌 생활 습관이고, 명상과 독서로 풍부해진 내면 세계다.
물건을 줄이고 쓰레기를 의식적으로 경계하다 보니 요리를 다양하게 하지 않게 됐다. 최소한의 재료로 조리 과정을 간소화해서 필요한 영양을 보충하고 적당히 포만감을 주는 요리가 내겐 더 매력적이다.
미각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맛있는 음식은 분명 있다. 나도 달고 짭짤한 음식을 갈망할 때가 있다. 하지만 '맛' 한 가지만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정말 많다. 이 생각이 들면, 맛을 내려놓게 된다. 시간, 설거지를 하지 않는 편리함, 갖은 식재료와 양념을 사지 않아 줄어든 소비, 늘어난 부엌 공간, 가공 안 된 음식으로 강화된 면역력, 줄어든 쓰레기와 각종 조리 도구와 식재료의 부피, 정리가 필요 없는 냉장고... 그 이점은 끝이 없다.
물론 맛있는 요리를 다양하게 만들고, 또 먹어보는 즐거움이 곧 행복인 사람도 있지만 나처럼 깨끗한 환경과 건강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맛보다 더 중시하는 가치가 많아지면서 깨끗한 부엌, 청소하지 않아도 되는 간편함, 늘어난 시간 등을 얻는 대가로 나는 기꺼이 맛을 희생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늘상 먹는 음식이 고정되어 있다. 메뉴도 비슷하고 설거지도 하지 않는다. 장을 볼 때 무얼 살까 고민하지도 않고, 식재료와 세일 품목을 탐색하지도 않는다. 메뉴는 미리 짜놓고 사야 할 품목은 정해놓는다. 지출 금액도, 냉장고 속 식재료도 큰 변화가 없다.
쓰레기를 최소화할 수 있고, 조리 도구가 필요 없는 요리가 내가 선호하는 음식이다. 아침은 토스트 한 장과 땅콩버터, 오트밀을 먹는다. 끼니 개념도 없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하루 반나절 내내 아무것도 안 먹기도 한다. 끼니 개념은 배꼽시계가 대신한다. 저녁은 항상 카레를 먹는다. 지겨워지면 된장찌개나 미역국을 먹기도 한다. 카레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내게 음식은 요리가 아닌 양식이다. 기력을 보충하고 영양분을 주는 기능을 하면 된다. 맛을 추구하지도 아름다운 플레이팅에 노력을 들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음식을 먹는 시간만큼은 경건한 의식처럼 집중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바른 자세로 먹는다.
카레는 우선 맛이 괜찮다. 그리고 요리 과정 없이 '조리'만으로도 만들 수 있다. 그만큼 레시피랄 게 필요 없는 간편한 음식이다. 한 그릇 요리라 뒷정리도 쉽다. 채소를 풍부하게 먹을 수 있고 든든하게 배를 채워주는 포만감이 있다. 나는 육식도 즐기지 않고 기름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영양에 더 세심한 신경을 쓴다. 녹색 채소와 탄수화물, 적정량의 지방, 단백질까지 모두 골고루 섭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카레는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음식이다. 한 가지 요리만 먹다보면 영양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게 된다. 영양에 대한 고민과 우려를 덜 수 있다.
매일 다른 요리를 먹어야 한다는 건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트랜드다. 매일 같은 음식을 먹는 것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늘 레시피를 찾고 다양한 요리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나는 선택과 고민에 대한 열정을 모두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투자하고 싶다. 무엇을 먹고 입고는 내게 크게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건강한 식재료로 요리한 음식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가정식이 아니어도 괜찮고, 간이 심심해도, 반찬이 하나뿐이어도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면 그걸로 됐다.
살면서 뜻하지 않은 예외적인 상황을 심심찮게 마주친다. 그럴 때마다 불쾌해하고 짜증내고 성질내면, 그건 분명 누구의 탓도 아닌 세상을 보는 내가 문제인 것이다. 무엇보다 짜증을 낸다고 상황이 변하지도, 변수가 묘수가 되지도 않는다. 나만 손해인 가성비 떨어지는 감정 소모다. 내가 짜증이 많았던 이유는 타고난 성격도 한몫했겠지만, 분명 여유 없고 뭐든 빨리빨리 재촉했던 사고방식이 기여를 했을 것이다.
여유가 늘어나니 짜증을 낼 이유가 사라진다. 어떤 변수도 나를 불쾌하게 하지 못한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몇 분 늦어도 느긋하게 기다려줄 수 있게 되었다.
행복이 손에 잡힐 만큼 구체적이다.
나는 행복을 정의할 수 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그려낼 수 있다. 물론 나의 행복으로 가는 주관적인 지도다. 그 지도에는 육체와 정신의 성장, 영혼의 자유, 타인의 삶과 사회로의 긍정적 기여, 창의적인 직업 활동, 글로 남기는 나의 자취, 책과 음악, 글을 쓰고 생각을 할 수 있는 고요한 공간 등 수많은 구간이 있다.
행복을 구체적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내가 가진 지도는 매일매일 너덜거릴 만큼 자주 들여다봐서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고비와 난관에 부딪힐지라도 언제든 길을 잃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실천하고 있는 미니멀 라이프의 핵심은 두 가지다. 다운사이징과 싱클테스킹. 그중 선택지를 줄여주는 일등 공신이 바로 싱글테스킹이다. 싱글테스킹은 무엇이든 한 번에 한 가지만 한다는 뜻이다. 매일 같은 운동만 하면 밥 먹고 양치하듯 고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활 속 루틴으로 자리잡는다. 매일 같은 음식을 먹고 요일마다 정해진 옷을 입으며, 책 한 권을 긴 시간 반복해서 읽고 영화 한 편에 꽂히면 대사를 모두 외울 정도로 여러 번 본다.
생활을 대하는 태도를 가볍고 단순하게 만들면 수만 가지의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질구레한 선택이 사라지면, 더 큰 선택 앞에서 아껴놨던 신중함과 집중을 발휘할 수 있다. 모든 선택이 너무도 쉽고, 선택 후 돌아서서 후회하는 일도 없다. 설령 더 나은 선택이 있었다 한들, 그 당시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최선이라 여기며 심사숙고했을 것이다. 돌아가서 더 나아 보이는 선택을 한들, 또 다른 후회와 미련은 남는다.
이제 내게 하루 동안 내려야 할 결정은 매우 한정적이다. 선택의 기로에서도 잘 망설이지 않는다. 물건을 사는 기준은 누구보다 명확하고, 어떤 일과 행동을 가르는 기준은 오로지 나의 행복이다.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축복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닌 70억 인구 모두가 평생 젊음을 유지한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도 없을 것이다. 인구는 비대해질 것이고, 행복도 평생 누리지만, 마찬가지로 불행 또한 평생 누려야 할 것이다.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을 더 충실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며, 매순간을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를 빚어내는 요소이기도 하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언제 죽어도 미련 따위 없다. 오늘 당장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담대하게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흔적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 지금 가진 재산, 내가 쌓아온 성취 또한 죽음 앞에서 웃으면서 반납할 자신이 있다. 충분히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맛보았고,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 한들, 죽음의 운명을 거스르면서까지 아쉬워하고 싶진 않다.
나는 혼자의 시간도 두렵지 않다. 나 자신이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어떤 존재보다 나의 잠재력을 믿는다. 혼자만의 시간을 오랫동안 지켜오면서, 스스로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과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과 슬픔을 조절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길렀다. 누군가의 업적을 등에 업고 의기양양해하지도 않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타인의 힘에 기대지도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잡지를 보며 누군가의 삶을 동경하지도 않는다. 나에게 나는 최고의 동기 부여이며, 나태하지 않게 조절하는 라이벌이기도 하다. 또 사랑하고 아껴줘야 할 가족이자 연인이며 친구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내게 등을 돌린다 해도, 나는 자괴감에 빠지지 않는다. 외롭긴 하겠지만, 외로움 나름에도 아름다움이 깃들어져 있다.
지금까지 나는 내 행복의 부피가 커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망설이지 않고 시도해왔다. 그중 미니멀리즘이 가장 효과가 뛰어났다.
나는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내가 가진 물건은 전부 하나가 열 이상의 몫을 해내는, 쓰임이 뛰어난 물건들이다. 그리고 이 물건들은 내게 짐이 아닌 삶의 가치를 더해주는 훌륭한 보조제다. 한 가지 물건으로 열 사람 몫을 해내는 문명의 도움으로 내 소유의 무게는 더 가벼워졌다.
물건을 가득가득 가졌던 그 어느 때보다 나는 자랑할 게 넘쳐나는 사람이 되었다. 변한 건 하나도 없다.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고 상처받고 실수하지만 파도처럼 행복이 밀려온다. 이상으로만 우러러보았던 삶의 생기가 매일매일 느껴진다.
앞으로 이렇게 살고 싶다. 자유롭고 가볍게. 비우고 또 비워서 오직 내 존재 하나만으로 우뚝 서 있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