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강용수)
노년의 쇼펜하우어는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왕 태어난 인생을 한탄만 하지 말고 의미 있게 살아 보자
진짜 행복을 좇으면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 타인에게 비굴하지 않고 기죽지 않는 당당함,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는 품격이다.
불행한 이유는 대부분 타인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결핍되고 공허해서 타인에게 대신 희망을 거는 것이다. 많은 이가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의 눈이 아니라 타인의 눈으로 바라본다. 좁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이기적이고, 왜곡된 거울에 자신이 잘 비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
자긍심은 자신이 어떤 장점과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는 확고한 믿음에 근거한다. 우리는 자긍심이라는 보석을 찾아야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생은 즐기는 것이다. 그는 사람마다 자신의 능력과 선호가 다르므로 각자의 취향을 고려해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하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며 건강을 챙겼으며 클래식을 즐겨 들었다. 무엇보다 독서와 명상, 철학적 사고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의 핵심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즐긴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행복은 고통을 줄이고, 피하고, 견디는 것에 있다. '성공, 부, 명예 등을 얼마나 얻었는가'보다 '세상의 고뇌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관점이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기 마련인 존재다. 그러므로 욕망, 집착, 소유욕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명성, 권력, 지식 등은 내가 죽으면 다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욕망의 파도를 잘 다스리는 것이 마음의 행복을 얻는 출발점이다. 어두운 고통의 바다에서 눈을 뜨고 검은 파도를 들여다보라. 행복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가려진 삶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의 심연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풍부한 경험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시각이 필요하다.
인생은 우리가 영원히 고찰해야 하는 대상이다.
"인간은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다."
욕망은 외부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계없이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죽을 때까지 생존을 위한 욕망을 충족해야 행복할 수 있다.
지능은 생존 도구로서 발전해 온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지능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업데이트해 온 것이다.
우리는 신체의 각 부분에 맞는 욕망이 적절히 충족됐을 때 만족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해 신체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우리는 의욕과 결핍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요소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가 고통과 무료함인데, 우리의 인생이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적으로는 궁핍과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따라서 하층 계급 사람들은 궁핍의 고통과 끊임없이 싸우는 반면 부유하고 고상한 세계의 사람들은 무료함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
결핍은 고통이고 과잉은 무료함이다.
"모든 의욕의 기초는 결핍, 부족, 즉 고통이다. 인간은 이미 근원적으로 또 그 본질로 인해 이미 고통의 수중에 들어 있다."
뇌가 집중할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반면 휴식할 때 불행하게 느낀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 불행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의욕이 너무 쉽게 충족되어 욕망의 대상이 제거되면 인간은 무서우리만큼 공허와 무료감에 빠진다. 따분함은 감당하기 힘든 짐이 된다. 고통과 권태라는 양자택일 앞에 놓여 있는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욕망의 최대 만족은 권태이고 욕망의 최대 결핍은 고통이다. 그런데 인간의 감정은 왕복 운동을 하는 시계추처럼 지속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따라서 영원한 충족과 행복감은 없다.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은 같다.
이렇듯 욕망이 완전히 채워져서 행복의 가장 이상적인 상황에 있다고 해도 이 세상에는 셀 수 없는 고통이 남아 있고, 모든 어려움이 없어져도 권태는 결핍의 고통만큼 견디기 어렵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간이 모든 고뇌와 고통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 천국에는 무료함밖에 남아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는 부자와 빈자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곤궁이 민중의 계속적인 재앙이듯이, 무료함은 상류 사회의 재앙이다."
"고통과 무료함은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온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이런 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 내면의 풍요와 정신의 풍요다. 풍부한 상상력, 두뇌 활동력이 뛰어난 사람은 전혀 무료함과 따분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정신이 풍요로워질수록 내면의 공허가 들어갈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구의 결핍과 욕구의 과잉을 피해야 한다. 양극단은 불행이다. 결핍과 과잉의 중간을 택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바깥에서만 찾지 않고 자신의 안에서 찾는다. 자신의 고뇌를 객관적인 조건 탓으로 돌리지 않고 고뇌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려고 노력하면서 해결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무료함의 근원인 내면의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 외적인 자극 대신 내적인 풍부함을 추구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을 정도의 재산이 있고 여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자다. 우리도 행복을 위해서는 물질적인 결핍이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권태, 따분함, 지루함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쇼펜하우어의 지적처럼 과잉 충족은 불행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너무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자신의 저부를 쏟아붓기 전에 욕망의 양극단에는 불행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끊임없는 공부와 사색, 통찰로 욕망을 잘 다스려야 한다.
"성취된 소망은 인식된 오류고, 새로운 소망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오류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은 변하지 않는 본질보다 화려한 겉모양에 속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 준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외적인 것에 행복의 가치를 두기 때문에 일어난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 새로운 물건, 새로운 사람 등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행복감이 부족하다는 뜻이 된다. 변화하는 대상에서 찾는 행복이란 오래가지 않는다.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새로운 사랑을 원하는 것은 행복의 길이 아니다. 밖에서 새로운 것을 찾지 말고 원래 갖고 있던 것의 가치를 되새겨 봐야 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즉 세상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야, 마음가짐, 태도다. 오히려 자신 안에 행복의 가치를 둔다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을 늘 새롭게 유지하려는 것이 문제가 되는 호기심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원하는 바를 가져라.
행복하고 싶다면 가진 것을 즐겨라.
욕망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다.
풍족하지 않으면 궁핍해서, 풍족하면 권태로워서, 끝없는 욕망을 채우지 못해서 시달리는 것이 인간이다.
고통의 원인을 먼저 없애는 것이 쾌락을 찾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
행복한 인생을 결정짓는 진정한 가치는 고통을 잘 견뎌 내는 인내력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덜 불행하게 살 수 있는 용기가 있고, 고통을 그럭저럭 견뎌 내면서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 평가하는 기준은 성공, 부, 성취, 출세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겪는 고통의 정도다. 따라서 지금 고통이 없다면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셈이다. 세상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가지려고 질주하지 않으면 괴로운 일은 막을 수 있다.
"선량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은 몹시 궁핍한 상황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인색하고 시기심 많고 못된 성격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거대한 부를 쌓아 올려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쇼펜하우어도 타고난 성격이 평생 바뀌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도 교육 등 노력에 의해서 성격의 후천적인 개선과 변화가 가능하다고 봤다. 우리의 성격을 바꿈으로써, 현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힘으로써 세상을 다르고 풍부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빠질 수 있는 성격 유형론의 맹점을 조심해야 한다. 대신 타고난 성격을 교육이나 자기 성찰을 통해 바꾸려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면 갈등과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오랜 성찰을 통해 자신의 성격을 개선할 수 있다.
이것이 후천적으로 획득된 성격이다. 후천적으로 성격을 바꿀 수 있다면 노력 여하에 따라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획득된 성격"의 개념에 따르면 행복은 숙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정확히 알고, 이 두 가지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의욕하는지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나서야 비로소 참된 것을 이룰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 그리고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면 이외의 것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부, 명예, 지식, 미덕 그 무엇이든 자신이 진지하게 추구하는 목표를 수월하게 실현하고 향유하려면 목표와 무관한 모든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른 목표들도 포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의욕과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교육은 자신의 소질과 가능성을 인식하고 계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후천적인 성격이 타고난 성격보다 행복감을 느끼는 데 더 중요하다.
교육으로 제2의 성격을 만들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욕망)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분별하는 자기 인식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묘사했다.
"물고기는 물에 있어야, 새는 공중에 있어야, 두더지는 땅속에 있어야만 행복하다."
주어진 개성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면서 자신의 인격에 부합하는 일에만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자신의 개성에 맞는 일과 생활 방식, 직업을 찾아서 능력을 발휘해야 행복할 수 있다.
인간됨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자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의 인간됨을 자신에게 적합한 교육 방식으로 도야하고, 적합한 직업을 선택해 최대한 유익한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자신의 개성에 대한 무지, 자기 인식의 결핍이 불행의 원인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지식을 쌓아야 자신의 개성대로 즐거울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고 인격에 부합하는 일에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가치의 기준을 타인에게서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구해야 한다.
행복이란 자신의 개성과 소질에 맞도록 노력함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만족감이다. 이를 위해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 가운데 자신에게만 적합하고, 자기만이 할 수 있고, 자기에게만 즐거운 것을 아아야 된다.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일을 찾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어떻게 해야 인생이 더욱 행복해질지 고민해 보라.
지성과 이성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이 원래 비이성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행복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성이 잘못된 환상을 많이 만들어낸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상상력, 회상과 예상이라는 지성 활동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성과 정신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정신은 '뇌'라는 신체 기관 일부분이 활성화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형이상학과 논리학을 포함한 모든 지성적 활동을 의지의 차원으로 환원하여 설명했다.
인간의 지성은 단지 생존에 기여하는 도구일 뿐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인간이 이성으로 이 세계의 본질인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에게 지성은 이 세계가 무엇으로 돼 있는지, 이 세계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데 이르지 못한다. 지성은 '마야의 베일'에 싸여 있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눈과 같다.
쇼펜하우어가 사용한 마야의 베일은 브라만 사상에서 등장하는 용어다. 커튼을 내리면 사물이 가려져 희미하게 보이는 것처럼 마야의 베일 때문에 브라만의 빛이 은폐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베일에 의해 인간은 사물 그 자체를 보지 못하고 인과 법칙(근거율), 공간과 시간 등으로 잘못 식별하게 된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에게 지성은 이 세계의 본질인 의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성은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에서 생존을 위한 도구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며, 인간 행위의 동기를 결정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살려는 의지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에 주목한 융이나 프로이트의 이론과 결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지성 활동에 의존하다 보면 우리는 행복을 현실이 아닌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소망'에서 찾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간은 행복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많다. 인간의 삶이 동물의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 때문이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과 관련한 모든 일에 대한 상상력을 억제해야 한다. 지나친 상상력과 추측, 기억은 불행의 씨앗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행복을 미래에 두지 말고, 과거의 고통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된다.
에피쿠로서의 유명한 말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모든 감각과 의식이 끝나기 때문에 죽음에는 쾌락도 고통도 없다.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믿는 것만으로 종교는 답을 주지 않는다.
세상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을 잘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어떻게든 끝마쳐야 하는 과제와 같다. 그러므로 견뎌 내는 것은 그 자체로 멋지다.
바깥에서 좋은 것을 찾지 말고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데부터 힘을 써야 된다. 그것은 운동으로 만들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의 본질은 운동"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유기체의 전체는 끊임없이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장은 확장과 수축을 통해 끊임없이 혈액 순환 운동을 한다. 운동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경우 건강의 균형이 깨져 내적 안정감을 해칠 수 있다.
우리의 행복은 명랑한 기분에 좌우되는데, 그 기분은 건강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몸이 건강하고 튼튼하면 기분이 좋겠지만 병에 걸리면 짜증 나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나무도 튼튼하게 자라려면 바람이 필요하다. 인간도 건강하려면 운동이 필요하다."
"행복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사물의 객관적인 모습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결과다.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의 행복이 "90퍼센트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면 모든 즐거움의 원천인 건강을 관리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된다. 건강하지 못하면 위축되고 기가 꺾여서 부와 명예를 갖고 있어도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건강을 다른 일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어리석다. 승진, 명예, 공부 등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과로할 이유가 없다. 건강이 있어야 다른 모든 것도 있는 것이다.
명랑하고 쾌활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즐거워진다. 낙천적인 사람은 열 가지 일 가운데 한 가지 일만 이루더라도 기뻐하지만 우울한 사람은 열 가지 일 가운데 아홉 가지 일을 이루더라도 기뻐하지 않는다. 실패한 한 가지 일에 크게 상심하고 화를 내고 기가 꺾이기 때문이다. 명랑한 사람은 불행한 일을 겪어도 쉽게 화를 내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기질과 매우 관련이 있다. 그러나 꾸준한 운동이라는 노력으로 명랑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 심장과 혈관, 근육을 튼튼하게 하면 우울한 기질의 사람도 어느 정도 쾌활하게 살 수 있다.
40대부터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웃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무엇보다 운동을 통해 건강을 챙겨야 된다.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하라.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은 사람과의 불필요한 교제를 줄이는 것이다. 대화할 가치가 없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질투심을 갖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이런 흔들림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음식을 절제하면 몸이 건강해지듯이 외적인 자극의 비중을 줄여야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인간관계를 끊으면 오히려 따분하고 심심한 기분에 시달릴 수 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피해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를 좁혀서 자신의 생활방식을 단순하게 유지한다면 마음의 동요를 줄일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무료함을 야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될 수 있는 한 관계를 단순화하고 생활 방식을 극히 단조롭게 해야 행복해진다고 했다.
"우리는 자신의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말고 즐기자. 다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괴로워하는 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너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며 불행을 참고 견디기 바란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와 같은 존재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서 존재하는 일에 감사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이런 한탄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꿈이 깨지고 실패를 겪어도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의지와 마음의 동요가 적어야 한다. 사실 너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너무 행복해지려는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친구가 많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소망과 욕구의 접촉 범위가 커지면서 불행을 자초하는 기회와 환경이 커진다. 결국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단순하고 단조롭게 사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심플하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인 소망을 늘 갖춰야 한다.
마음의 평온이 행복이라면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외부의 자극도 줄여야 되지만 비교하는 감정, 시기심, 질투, 지나친 기대와 희망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평온은 고통이 없는 상태다. 현명한 인간은 무엇보다 고통이 없는 상태,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상태, 안정과 여유를 얻으려고 애쓴다. 우리도 욕망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때로 관심도 없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주변을 정리하고, 마음을 비울 때 더 좋은 것이 찾아온다.
음악은 아주 위대하고 대단히 근사한 예술이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참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을 예술에서 찾는다.
우리는 대상을 사사로운 관심이 없이, 어떤 목적도 없이, 의욕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늘 책을 가까이 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를 권한다.
"다른 사람들을 '우리'가 아니라 '그들'로 생각하는 것이 익숙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의 행복이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냐 하는 것보다는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철학적으로 향유하려면 사고하는 근육을 키워야 한다.
"먹은 것이 육체가 되고 읽은 것이 정신이 되어 현재의 자산이 된다."
"결혼은 자신의 권리는 절반으로 줄이고, 의무는 배로 늘리는 행위다."
결혼은 행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니며 이혼은 불행의 종지부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교의 욕망이 생기는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반증이다. 타인을 통해 얻는 가치는 행복의 본질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기억하면 좋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
너무 지나친 사랑과 관심 또한 상처가 될 수 있으므로 약간의 무관심과 냉정함을 통한 '적당한 거리 두기'라는 현명한 방법을 통해 '서로의 온기를 적당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이 공허하고, 의식이 빈약하고, 정신이 빈곤한 사람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한다.
"인간이 사교적으로 되는 것은 고독을, 고독한 상태의 자기 자신을 견딜 능력이 없어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 그럴수록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 기대할 일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드물다.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굳이 다른 사람과 만나 희생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고독을 견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독한 시간을 생산적으로 잘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력, 내면의 공허, 권태감 때문이다. 이럴 때 남과 어울리는 것은 자신의 고독을 혼자 대면하기 두려워 비겁하게 피하는 것이다.
남과 함께하고 싶은 이유는 자신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무능력, 내면의 결핍과 공허감 등이 있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은 홀로 지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서 결국 되돌아와 만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다. 다른 사람과 어쩔 수 없는 관계를 줄이면 자신만의 자유와 욕구가 회복된다.
더욱 참된 행복은 자신 안에서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야 한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이라는 용어가 꽤 유행한 적이 있다. 소확행은 그의 에세이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에서 쓰인 말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축약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돼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뜻한다.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이나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작은 만족에서 얻는다. 짧은 행복은 작을 수밖에 없다.
소식이 몸을 건강하게 하고 폭식이 건강을 해치듯이 '행복은 소소한 것'에서 찾아야 작고 짧은 행복을 즐길 수 있다. 행복은 늘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젊음, 모든 것은 잠깐 머무르다 떠나가기 때문에 작은 쾌락에 만족할 줄 알아야 된다. 갈증을 채워 주는 커피 한 잔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짧은 만남, 인연이 주는 작은 즐거움에 감사할 수 있어야 된다. 감당할 수 없는 너무 큰 행복, 만족은 따분함을 가져와 새로운 것을 찾게 만든다.
40대는 자신의 인생의 전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인생의 시작과 함께 끝을 생각하면서 자신만의 계획이 필요할 때다.
"미래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으로 급히 쫓아가는 반면에 현재는 거들떠보지도 즐기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이고 확실한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미래와 과거는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고 순간만이 실재한다.
하루하루는 하나하나의 인생이다.
우리가 인생을 가치 있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오늘뿐이며 내일이 오늘의 반복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만일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던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만약 노(No)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의 시선에 갇혀 살면 행복해질 수 없다. 타인의 평가에는 시샘, 질투 등 부정적인 내용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타인의 평가의 틀을 과감히 깰 필요가 있다. 타인의 평가에 휘둘릴 때 떠올려 보라.
"너라고 나보다 나을 게 없다!"
남이 시키는 것 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때 인간은 행복해진다. 남과 다른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일, 누구나 가는 길이 아닌 내가 가는 길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행복의 길은 천차만별이다. 가장 인간답게 사는 일은 자신만의 욕망을 아는 것이다.
타인과 비교함으로써 생겨나는 상대적인 박탈감은 행복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다. 플라톤은 <행복론>에서 재산, 외모, 명예, 체력, 언변에서 조금은 "부족함을 느끼는 삶이 행복한 살"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객관적인 평가보다 자신의 주관적인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보다 다소 부족하다고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마흔부터는 개성이 뚜렷한 삶을 살아야 된다. 남의 기대와 욕망에 맞춰 살아선 안 된다. '삶을 위한 삶'이라는 생존을 위해 자아실현이라는 가장 높은 욕구가 잊혀지면 안 된다. 겉보기에 사람들은 같은 지향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곳을 보고 싶어 한다. 동일화되고 표준화된 대중문화의 영향력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같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런 행복은 기만이다.
세상에는 늘 잘 알려진 유혹의 길이 있다. 성공, 행복, 명예, 부 등 행복으로 이끌 것으로 확신하는 통로다. 남들이 가는 길을 무작정 쫓는다면 적성도 맞지 않고 강요된 삶을 살게 된다. 결국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남을 따라서 '같음'을 추구하는 것은 낮은 단계의 욕망이다. '다름'을 추구하는 것은 높은 단계의 욕망이다.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 살면 갑갑하고 답답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비록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큰 부자가 아니더라도 타인의 시선에 맞추지 않고 자기 자신에 흡족한 삶이면 충분하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은 나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가는 것이다. 개성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다. 우선 남들이 전혀 알 수 없는 바, 나 자신만이 원하는 바,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타고난 재능과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마흔이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기 위한 시행착오와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충분해 보인다.
자신이 원하는 한 가지만 찾아보라.
원하는 바가 없는 인생은 타인에게 휘둘린다.
부가 인간의 본래 소유물이 아니라 운에 의해서 줄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부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이 줄어든다. 부에 대한 갈증이 줄어들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다. 따라서 부에 대한 욕심을 줄이면 행복감이 늘어날 수 있다. 이를 아는 사람은 돈을 잃어도 행복감을 되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재산이나 부의 가치와 비교해 더 가치 있는 것은 지적인 교양이다. 돈을 채워도 정신이 텅 비어 있으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은 소유하는 사람보다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에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
부에 대한 갈증은 절대로 채워질 수 없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타인의 의식이 얼마나 편협하고 변덕스러운 기분에 좌우되는지를 알게 되면 타인의 평가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타인의 거울에 비친 모습대로 살지 말고 자신의 기준에 맞게 당당하고 기죽지 말고 살도록 해야 된다. 자신이 자신의 가치를 긍정하는 흔들리지 않는 자긍심은 행복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게 확신이 생기는 순간 인생이 달라진다.
행복의 참된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우리의 행복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만들어진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각자 살아가는 세계는 무엇보다 그의 세계관에 의해 좌우되므로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세상은 달라 보인다. 관점이 빈약하면 세계는 진부하거나 하찮은 것이 되기도 하고, 관점이 풍부하면 세계는 재미있거나 의미심장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