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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정지우)

아름다운 존재 2023. 10. 27. 11:44

나는 글쓰기가 몸에 익은 습관 같은 것이고, 몸으로 삶을 살아내는 일이며, 몸이 머리를 이끌고 가는 일이라 믿고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매일 글을 쓴다. 관용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매일 글을 쓴다. 물론 불가피하게 쓰지 못하는 날도 있지만, 한 해에 글을 쓰지 않는 날이 열흘이 넘지 않는 건 분명하다.

 

매일 아침 일어나 피아노 연주를 하거나, 매일 저녁 강변을 달리거나, 매일 밤 춤을 추는 일처럼, 글 쓰는 일도 일상의 어느 영역에 밀착되어, 몸이 하는 일이다.

 

내가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설령 글쓰기가 내게 현실적인 이익을 뚜렷하게 주지 않더라도, 나는 글을 써왔고 쓸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글쓰기는 나를 병들게 하거나 병든 상태에 머물게 하기보다는, 늘 내 삶에 더 나은 지평을 열어주었고, 나를 더 건강한 순환 속에 들어서게 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백지라는 바다를 헤엄치는 해녀들과 같다. 해녀들도 때로는 저 요동치는 바다가 두렵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해저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질 것이다. 몸이 바닷물에 닿는 순간부터 짙어지는 차가움, 빛이 옅어지고 시야가 흐려지는 바닷속, 언제든 몸에 생채기를 내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지 모르는 바위와 언제 자신을 휩쓸어가버릴지 모를 파도에 막막함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닷속으로 뛰어들고, 평생 해온 일을 오늘도 해낸다. 글 쓰는 사람도 때로는 백지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막막함에 몸부림치다가도, 손을 키보드에 올려놓고, 첫 문장을 적어내고 또 다음 문장을 적어내다 보면, 어느덧 자신이 그 익숙한 바닷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글쓰기에서 더 핵심적인 것은 먼저 글쓰는 '몸'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어떤 구체적인 구상을 가지고 자리에 앉기보다는, 일단 자리에 앉으면 먼저 손가락이 움직여나가고, 그래서 손이 마음을 이끌고, 마음이 머리를 이끄는 그런 '자세'에 대해 아는 것이 언제나 글 쓰는 일의 출발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글쓰기의 바다를 헤엄치는 일에 관해서다. 바다에 들어가는 일, 그렇게 바다를 헤엄치는 일, 그러고 나서 전복이나 소라 같은 무언가를 건져내어 바다 밖으로 나오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글 쓰는 사람들의 동료의식 혹은 먼 우정, 아니면 느슨하게 이어진 연대라는 것을 믿어 왔다. 글 쓰는 사람들은 새벽의 책상 앞이나 오후의 어느 구석진 벤치에 앉아, 혹은 만원 지하철의 사람들 틈새에 끼어 서서 저마다의 백지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언뜻 고독해 보이고, 홀로 작은 세계를 마주하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백지가 이 세계 전체와, 특히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과 이어져 있다. 이 책은 그렇게 글 쓰는 모든 사람에게 바치고 싶은 헌사이기도 하다. 글 쓰는 당신은 더 이상 외롭지 않고 병들지 않을 것이다. 그 백지 안에는 나와 당신이, 그리고 세계가 있다.

 

지금까지 나는 참 다양한 글쓰기를 해왔다. 소설, 평론, 논문, 칼럼, 에세이, 때로는 학원 교제나 인터뷰집 같은 것도 만들어봤고, 각종 논설문, 요약 자료, 요즘에는 법률 의견서까지 써보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내가 가장 편안하게 쓰는 건 역시 에세이인데, 아마도 나에게는 이런 글쓰기가 가장 어울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온갖 글을 써보다가 에세이가 내게 어울리는 글쓰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에세이를 많이 쓰기도 하고, 어렵지 않게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글쓰기로 나온 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게 느껴지는 듯하다. 글 쓰기 영역에서도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 하나 찾는 게 참 중요하지 않나 싶다.

그런데 그 '자리 하나' 찾기까지 참 쉽지 않았다. 에세이를 쓴 것도 대략 서른 이후였으니, 그전에 15년 이상 온갖 글을 쓴 셈이다. 15년간 쓴 글들을 다 합치면 A4 1만 장은 족히 넘을 것이다. 온갖 어색함과 어려움, 지리멸렬함을 견디고 계속 써본 덕분에, 나름대로 내게 맞는 영역, 스타일, 깊이, 내용 같은 것도 꽤나 알게 된 셈이다. 물론 이것도 다 한 시절의 일일 수 있고, 또 다음 시절에는 그 시절에 어울리는 글쓰기가 내게 주어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세상일이란 대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자기에게 꼭 맞는 무언가를 부지런히 찾아가야 간신히 어느 정도 자기에게 어울리는 걸 알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일이든, 글쓰기든 크게 보면 다르지 않은 구석이 있다.

 

글쓰기는 대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대상을 매만지면서, 대상의 여러 틈새와 세부들을 드러내어, 결과적으로 의미에 이르는 일이다.

 

대상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대상화하는 것, 규정하는 것, 바라보는 것이 곧 글쓰기이다. 그래서 대상 자체가 나의 시선에 의해 고유한 가치를 지닌 세상 유일한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이 글쓰기의 과정이다.

 

결국 글쓰기는 우리의 고유한 시선을 찾아 나가며, 그 시선 안에 머무르는 일이다. 우리는 시선의 존재가 되기 위해 글을 쓴다.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응시하고, 그 응시의 기록을 남기고자 글을 쓴다. 관념으로 도피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대상 곁에 살아 있기 위하여 글을 쓴다. 글쓰기는 관념의 유희, 당위의 강요, 기준의 폭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해 하는 것이다. 매일 매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은 나의 시선이 나만의 것으로 생생하게 유지된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그래서 글 쓰는 일은 곧 가장 생생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나는 자주 우리 삶이 그저 삶을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달려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세상에서 박탈되었거나, 타인들보다 결핍되었다고 상상하면 나는 정말 그런 존재가 된다. 내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느리거나 빠르다고 상상하면 내 삶은 정말 그런 삶이 된다. 하지만 내 삶을 그저 내 삶으로 상상하면, 내 삶은 그저 내 삶이 된다. 부족하거나 박탈되지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그저 내 삶일 뿐인 내 삶 말이다. 나는 그런 상상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게 당연하다면, 내가 좋아하는 상상을 하며 사는 삶도 당연할 테다. 나는 이러한 삶을 부정할 수 있는 논리를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 그가 좋은 글을 쓰리라 믿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가 글을 쓰고자 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자' 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기다림이 이 세상을 분명 더 낫게 만들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글 쓰는 자의 기다림은 옳다. 그가 발굴해낼 것 중에서는, 그가 아니었으면 결코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을 그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다.

 

무엇이든 강박적인 틀을 너무 강요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빛난다.

 

지식이 많고, 사유가 깊고, 많은 것을 익히고 생각한 사람들이 좋은 글을 쓴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글은 계속 쓴 사람만이 잘 쓰게 된다. 누구나 이미 무한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내면의 창고는 언젠가 가장 좋은 순간에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항상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중에 더 멋진 열쇠가 생기지 않는다. 열쇠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고, 지금 여기에서 열기 시작한 사람이 언제나 앞서가는 것이다. 나중에 더 많은 책을 읽고, 글쓰기에 관해 공부하고, 학식이 깊어지고, 많은 경험을 한 뒤에는 또 다른 열쇠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열쇠가 우월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계속 써나가면서 깊이를 더해간 사람의 열쇠가 더 깊은 창고를 열어젖힌다. 계속 쓰면 더 깊고, 더 아름답고, 더 멋진 창고의 열쇠가 주어진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열쇠와 깊은 창고에 관해 알 거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그들이 만나게 될 자기만의 그 창고를 생각하면, 설렌다. 그들 역시 나처럼 글쓰기가 좋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뭉클하게 차오른다. 우리는 각자의 열쇠를 손에 쥐고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어느 깊은 세계로 들어서는 사람들이다. 그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는 어느 새벽, 어느 하얀 밤의 무한함, 어느 오후의 빛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연대감을 느낀다. 어느 책상 앞에, 고요한 벤치에, 소란스러운 카페에, 퇴근 후 자동차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누군가의 등을 바라본다. 그들은 정확한 삶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 스타일을 알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하든, 내가 어떤 스타일인지를 빨리 알아차릴수록 잘할 수 있고, 나아가 삶도 자기다운 삶으로 만들 수 있다. 사랑을 하든, 공부를 하든, 사업이나 일을 하든, 글쓰기나 예술을 하든, 우정을 맺고 관계를 만들어나가든, 삶의 어느 시점부터는 자기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자기가 어떤 스타일인지 잘 몰라서 삶에서 주어진 여러 과제를 잘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나의 이십 대도 내 스타일을 찾아가고, 알아가고, 안착하기까지 참 오랜 여정이었다. 사랑의 방식, 우정의 방식, 관계의 방식, 글쓰기의 방식, 무언가를 습득하거나 성취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 내 목소리의 톤을 알고, 제스처를 알고, 나에게 어울리는 분위기를 알고, 하루의 생활 방식을 알고, 그렇게 내 스타일을 가진 내가 되기까지가 참 쉽지 않았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끊임없이 세상의 온갖 말들과 남들의 방식에 휘둘리게 된다. 공부만 하더라도, 강사마다 주장하는 공부 방법이 다르고 박사나 교수마다 학문하는 스타일이 다르다. 그런데 어느 때는 이런 방법이 옳아 보이고, 어느 때는 다른 방법이 옳아 보여서 그저 이것저것 해보다가 결국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도 다를 게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사랑해야 할 것 같고,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렇게 사랑해야 할 것 같다. 인간관계도 어떤 명언을 들으면 그 명언이 옳아 보이고, 다른 명언을 들으면 그 명언대로 관계를 맺어보려 한다. 그러나 영원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시점에는 자기 스타일이 무엇인지 알고 확정 짓고 다져가야 한다.

그렇게 자기 스타일을 알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성취의 경험이 필요하다. 내가 믿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여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오랫동안 맺어본 경험, 주변 사람들과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갈등을 해결한 경험, 이런저런 방식으로 공부를 해보다가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암기나 이해 방법을 알고 그를 통해 약간의 성취라도 거두어본 경험. 아주 작은 성취여도 좋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나의 방식이 옳다는 경험들이 누적되어 삶 속에 작은 확신을 이루고, 그런 확신들이 모여 자기의 스타일이 된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끝까지 하나의 방법으로 시도해보고, 그 방법이 아니라면 아니라고 확정 짓고, 또 다른 방식으로 그 무언가를 해보고, 나에게 잘 맞는다고 느끼면 그 스타일을 기억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성취의 경험들은 삶의 전반에 있는 여러 영역들이 상호작용을 하게 한다. 일의 영역에서 약간의 성취를 거두어본 경험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에서도 나의 스타일을 어떻게 찾아내어 어떻게 확신을 더해갈 것인가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 사랑에, 일상에, 관계에, 일에, 여행에, 그 모든것에 나의 스타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져간다.

그래서 삶에서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한 번에 얻고 이루려 하기보다는, 그때 그 시절에 자기에게 맞는 작은 성취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이 좋다. 내가 청년 시절 내내 했던 것도 그런 작은 확신들을 모으는 일이었다. 사람은 그렇게 자기 자신이 되어 간다. 그렇게 자기 스타일을 알아갈 수 있다면, 그 삶은 더 의미 있는 무엇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싶다.

 

삶을 '나'라는 자아에 집착해서 보기보다는, 일종의 '인풋'과 '아웃풋'의 흐름으로 보면 견디기 수월해지는 측면이 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잘해야 하는 것들은 대개 아웃풋이고, 이런 아웃풋은 인풋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무턱대고 글을 열심히 쓰기보다는 글이 잘 나올 수 있도록 무언가가 먼저 '들어와야' 한다. 잘 쓰고 싶은 만큼 많이 읽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만큼 많이 경험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렇게 들어오는 것이 넘쳐나면 나갈 수밖에 없는데, 글쓰기란 그 나가는 통로를 정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나에게 들어온 게 그저 나가는 것일 뿐이므로, 그것은 대단한 일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며 그저 흘러가는 일이라고 믿는다면, 그런 믿음이 삶의 여백을 이룰지도 모른다.

아마 세상 모든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내가 받은 사랑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일이다. 부모 등 누군가로부터 얻은 사랑이 우리가 아는 최초의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혹은 연인이나 친구를 만나면서 사랑의 방법을 알게 되고, 사랑받아서 좋았던 경험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며 사랑을 해나간다. 만약 내가 사랑을 잘하고 싶다면, 사랑을 배우고 받고 얻어야 한다. 그런 배움은 현실에서도 가능하고, 여러 작품이나 교육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비폭력적인 사랑, 잘 사랑하는 방법, 좋은 사랑의 모습 같은 것이 '인풋'된다면, 비로소 그런 것들의 '아웃풋'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랑이 내게 들어왔다가 밖으로 흘러나가 누군가에게 닿을 뿐이다.

 

삶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인풋이 부족하거나, 인풋은 많은데 내 안에 적체되어 고인 물이나 막힌 댐이 되어버린 경우일 듯하다. 특히 들어온 것들이 나가지 못하는 건 삶이 꽉 막혀버린 채 병들어가는 상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아웃풋으로 이어질 방법은 다양하다. 지인들과의 수다로 털어버릴 수도 있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해소할 수도 있고, 예술을 하거나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이 그저 부지런히 들어오고 나가는 무한한 흐름이라면, 우리가 할 일이란 마음을 열어놓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인간의 의지, 자아의 힘, 우리의 현명함이 발휘되어야 할 지점이 있다면, 들어오고 나가는 길을 터놓는 것 정도에 있지 않을까? 들어오는 길을 잘 닦아놓고, 나가는 길을 적당히 뚫어두고, 그리하여 선순환이 가능하도록 갈고닦는 게 삶에서 일의 전부이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삶에서 무언가 힌트를 얻는 느낌을 받는다. 그저 잘 들어오고 잘 나가게 해줄 것, 나의 역할이란 나에게 맞는 방식에 따라 삶이라는 물길이 잘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는 것, 그게 사실상 인생의 전부라는 것. 때때로 그렇게 생각하면 삶이라는 게 참 투명하고 명료해서 어렵지 않게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생산을 보증하는 건 배움밖에 없다.

 

내가 속한 사회나 환경, 상황이 어떠하건 그런 현실과는 별도로, 한 명의 생명으로 태어나 이 삶을 최대한 잘 살아내야 한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충분히 많은 것을 사랑하고, 다양한 가치를 이해할 줄 알고, 매일의 삶의 기쁨을 놓지 않으며, 더 나은 삶을 향해 가야 한다고 믿는다. 돈도 적당히 있길 바라고, 사랑도 적당히 머물러주길 바라고, 쾌락이나 기쁨도 적당히 얻길 원하며, 존중이나 인정도 받았으면 싶다. 나아가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내 삶 안에 산재해 있어서, 어느 정도는 놀이하듯이 살아가고 싶기도 하다. 그런 삶의 감각들을 믿고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 또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사회를 꽤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우울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허비하거나, 내 삶에 희망이 없다고 믿지는 않는다. 반대로 삶이란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한평생 이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지만, 세상 모든 일에 관대하다든지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진실을 잃지 않는 선에서 행복하게 살길 바라되, 이 하나뿐인 삶이라는 것도 그런 양 날개에 태워서 어딘가로 날려 보내듯 살아가고 싶다. 그래야만 나 자신을 용인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 같다. 스스로가 너무 기만적이라 느껴지는 것도 원치 않고, 너무 진실에만 몰두한 나머지 삶의 기쁨들을 잃어버리는 것도 참을 수 없다. 결국은 그 사잇길을 계속 따라가고 싶은 것이다.

진실로 행복한 길을 걸어 아주 멀리까지 나아가고 싶다. 진실하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쉼 없이 글을 쓴다. 그렇게 나름대로 내게 어울리는 삶을 알아가고 있다.

 

삶의 모든 영역을 사랑할 수는 없다. 현실적인 모든 일과 의무를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삶에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영역 몇몇쯤은 필요하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그런 영역으로 남아 있고,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간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원해 온 글쓰기라는 것도 그런 차원의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온전히 몰두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지평에 서는 일 말이다.

 

나의 글쓰기는 대개 내 마음을 관리하기 위한 과정이다. 글을 쓰기 전에는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단 키보드를 부여잡고 써 내려가면서 내가 속한 상황을 더듬어보고, 나 자신을 일으키고, 삶을 바로잡아보고자 애쓴다.

 

글쓰기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기보다는, 언어라는 심층적이고 거대한 구조나 힘의 도움을 받아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게 하는 활동처럼 느껴진다. 언어 없이 그저 놓여 있는 나는, 어쩐지 축 늘어진 슬라임이나 헝겊 같고, 어딘지 정리되지 못한 채 흩어져 있는 반쪽짜리 존재 같다. 그러나 언어의 손길을 부여잡는 순간, 언어는 나를 특정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일어설 수 있고, 세상을 거닐 수 있고, 규정될 수 있는 한 인간으로 다듬어준다. 도자기를 빚듯이 언어가 나를 빚어준다.

 

좋은 언어로 늘 나를 일으켜 세우고 좋은 친구 같은 그런 언어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삶에서 꼭 필요한 기반을 얻게 된다. 좋은 언어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이자 든든한 우군을 갖게 되는 일이다.

 

마음의 치유라든지, 삶을 살아내는 힘이라든지, 세상과의 화해 가능성 같은 것은 상당 부분 '구술'과 관련되어 있다. 대개 자신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조리 있고 정확하게, 의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삶과 화해를 이루어간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화를 내고, 울고, 더 이상 말하지 못한 채 입을 닫아버리고, 신경증적인 반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삶에는 아직 제대로 말해져야만 하는 게 더 남아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나아가 자기 삶의 상처들을 어느덧 웃으며 말하고, 그 위에 유머를 더하고, 하나의 서사로서 부드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그는 온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봐도 될 듯하다. 그러니 사람은 계속 말해야 하고, 사람에게는 말할 창구가 필요하다.

 

사람은 서로 말하고, 들어주고, 인정을 나누고, 서로가 더 나아지길 빌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삶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계속하면, 그것은 세상에도 나에게도 중요한 것이 된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계속하면 그것이 곧 중요한 것이 된다. 반대로, 계속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다.

 

결국에 남는 것은 '계속한 사람'이라는 것, 결국 이기는 것도 '계속한 사람'뿐이라는 것

 

매일 아침 내려 마신 커피가, 매일 저녁 나선 아이와의 산책이, 매일 밤 읽은 성경 몇 줄이, 매일 새벽 녹음한 몇 분이, 매일 쓴 글 몇 장이, 매일 사진 직은 집 앞의 담벼락이, 매일 뛴 강가가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고유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역시 계속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어떤 영역에 있는 빛과 같다. 대개 계속한 것은 시대를 뒤바꿀 만큼 엄청난 무엇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내 삶을 증명하는 고유한 무언가만큼은 남긴다. 계속하는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삶의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오름으로써 삶이 내 것이 되고 신비로운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가치는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 결점들을 어떤 식으로 극복하려는 시도, 그런 결점들에 대처하는 방법 자체가 때로는 그 사람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자기의 어떤 구멍과 그 구멍을 메우려는 시도가 곧 그 사람이자 그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이다.

 

나의 결점이야말로 내 삶이 가야 할 길의 가장 결정적인 힌트가 되어주는 셈이다.

 

글쓰기의 동력이란 박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 회피, 불안에 있다. 그런데 동시에 어떤 존재로 규정되고, 고정되며, 고착되고 싶은 욕망이 글쓰기의 동력이기도 하다.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고정된 정체성, 안정된 나, 나를 뚜렷하게 붙잡아줄 수 있는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일이라면, 마침표가 찍히자마자 다시 그로부터 달아나려는 욕망이 뒤따라온다. 이것이 글쓰기를 멈출 수 없게 한다. 계속해서 도착하고, 계속해서 도망치기. 이 순환, 이 반복, 이 메커니즘에 들어서면, 그는 이제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이런 일은 연애를 할 때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당신이 나를 '이러저러한 사람이야' 하고 말해주는 데서 오는 쾌감이 있다. 나를 확인해주고,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호명해주는 데서 오는 안락함과 기쁨. 그러나 그러한 규정은 머지않아 어떤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아닌데? 내가 꼭 그렇기만 한 사람은 아닌데?' 이러한 전복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 연애의 과정이자,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고, 상대를 알아가는 일이다. 서로에게 서로가 되어가면서, 변화하고, 살아가고,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고정될 여지가 없다. 당신은 끊임없이 내가 되고, 나는 또 계속하여 당신이 되고, 내 안의 다양성과 당신 안의 다채로움이 어우러지며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간다. 그렇기에 사랑은 글쓰기와 닮았다.

한편, 글을 쓰면서 도망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나를 새로운 백지로 만드는 일이다. 내 마음을 붙들어 매는 것, 내 마음을 얼룩지게 한 것을 지우고, 채운 것을 털어냄으로써 끊임없이 다시 백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글쓰기를 추동한다. 백지 위에는 다시 오늘의 감각, 생각, 관념이 도래하는데, 오직 백지 위에만 그러한 새로움이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글 쓰는 이는 신을 모시기 위해 목욕재계하듯이, 자기 안의 언어들을 매일 털어낸다. 매일 털어냄으로써 매일 찾아오는 언어를 채울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세부적인 효용과 별개로 글쓰기 행위, 글쓰기의 반복, 계속 비웠다 차오르는 일이 그 자체로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그저 하는 일이다. 매일 아침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처럼, 흥얼거리고, 수다를 떨고, 산책을 하는 것처럼 그저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저 하다보면 삶이 좋아진다. 그저 하다보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 때로는 글쓰기 자체가 좋은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좋아서 하는 일이 삶을 배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글 쓰는 사람은 그래서 계속 쓰게 된다.

 

늘 머리 위 어디쯤에 떠 있는 정신을 가라앉히고 나의 자아나 존재를 이 삶에 소속시키는, 그러한 감각과 높이에서 실현되는 글쓰기라는 것이 있다. 그런 글을 쓰고 나면 확실히 삶이 더 좋아진다. 나를 둘러싼 이 삶 전체가 더 다정해지고, 더 소중해진다. 고요한 미소가 입가를 맴돈다.

 

내 삶을 보다 정답게 느끼게 해주는 글쓰기를 하며 살고 싶다. 나를 둘러싼 삶의 복잡다단한 조건을 어떤 묘한 드로잉과 색채로 뒤섞어 삶을 채색해주는, 인상파의 그림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런 글로 인해 나도, 내 곁의 사람도, 나를 둘러싼 사람도, 그리고 저 너머의 많은 사람도 자신의 삶을 한결 정답게 느끼면 좋겠다. 그런 글들, 은은한 색감의 어떤 세부들로 가득한 나의 에세이집 한 권을 갖고 싶다. 그런 책 한 권이 내 책장에 꽂혀 있으면, 언제 열어봐도 평생 내가 나에게 주는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의 존재란 그런 것이다. 세상 전체에서 보자면야 모든 인간은 대체 가능하고, 한낱 부품일 뿐이고, 먼지 같은 존재다. 그러나 각자의 삶은 각자에게 전적이어서, 우리는 그 속에서 충실함을 느낀다. 내가 하는 말, 내가 꺼내어놓는 것들, 내가 전하고자 하고 주고자 하는 것들, 그것들은 다 이 세상에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다. 그러나 내 삶에서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런 것들에 충실하면서 내 삶을 얻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글을 쓸 사람은 계속 쓴다. 글 쓰는 사람은 누가 뭐라 하든 계속 달리는 마라톤 선수와 같아서, 패배주의에 빠져 한탄만 하는 존재들과는 가장 반대편에 있다. 글쓰기에 관한 한 들을 가치가 있는 말은 계속 쓰는 사람의 말뿐이다. 쓰지 않는 사람의 개탄은 미세먼지처럼 멀리 대양으로 날려버려도 별반 상관이 없다.

 

문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순하게 생겼다. 그런데 흰 바탕에 검은 선이 그려내는 이 무미건조하고 볼 것 없는 문양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낸다. 문자가 지시하는 문자 너머의 세계에는, 어떤 영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광대한 상상이, 그 밖의 방법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심오하고도 복잡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 문자는 그 강대한 세상으로 들어서는 문과 같은데, 그 문에는 오직 인간만이 들어설 수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표현 방식이 있다. 그런데 문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감각적이고 즉각적이다. 아름다운 음악, 다채로운 색감, 풍요로운 촉감과 향기로운 냄새 등은 거의 모든 동물이 인식할 수 있다. 그들 역시 음악의 선율을 따라 몰입할 수 있고, 화려한 영상에 홀린 채 현실을 잊을 수 있고, 다양한 맛과 냄새를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를 통해 저 거대한 의미와 상상의 세계에 접근하는 일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고, 저마다 서로 다른 자기만의 세계에 입장하게 된다.

 

매개할 필요 없이 곧바로 향유할 수 있는 자극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현대사회의 '동물화'라는 것은 이처럼 감각 위주의 모든 게 돌아가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각적인 것들이 주는 좋은 시간을 그 자체로 부정할 수는 없다. 부드러운 음악을 듣고, 알록달록한 칵테일을 마시고, 번쩍이는 화려한 영상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홀려 있을 때 즐거움과 행복이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런 너무 많은 화려함 때문에 오직 문자만이 초대할 수 있는 더 광대하고 다채로우며 깊은 세계에 대한 접근은 점점 차단되어간다는 점이다. 오직 문자로만 이해할 수 있는 당신의 깊은 마음, 우리의 관계, 문자를 매개해서만 정확하게 되살릴 수 있는 나만의 기억들, 내가 품어온 꿈과 세상에 대한 이해, 무한하게 펼쳐질 수 있는 상상적인 세계가 점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나는 그것이 아쉽다.

 

어쩌면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거대하고 깊다. 우리 시대가 점점 그 거대함과 깊이를 잃어가는 것 같아 아쉽다. 마치 어느 숲속에 버려진 가장 맑고 아름다운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로 들어가면 믿을 수 없는 신화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걸 이제는 아무도 모르게 된 것처럼, 언어 너머의 세계는 잊히고 있다. 그 세계에 대한 접속법을 잃어버리는 것은 확실히 인간에게, 또 각자에게, 이 삶에 치명적인 상실일 것이다.

 

삶이 감각의 수면 위로만 지나가는 게 아니라, 내면적인 깊이로 이해되며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만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

 

나는 글로 쓰인 삶이나 일상이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풍부한 인상을 전달해주며, 그를 넘어 삶의 어떤 진실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기억에 관한 한, 오직 자기만이 알고 있는 자기 영혼에 새겨진 그 나날들에 대해서는 글이 가장 진실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간이나 삶, 사회나 세계에 관해 글은 그 무엇보다도 깊이 있고 밀도 높은 고찰을 가능하게 하여, 다른 매체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느낀다.

 

내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텍스트라는 매체의 소중함과 아름다움, 풍부함과 멋짐에 대해 알려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온당한 일을 하고 있다는 기쁨을 느낀다.

 

세상의 무수한 생각, 말, 사상 속에 나는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다. 그것들이 온통 나를 통과하는 가운데, 단지 나는 하나의 뜰채 같은 것이 되어 나의 맥락에서 몇 가지 언어를 주워 올릴 뿐이다. 나는 그것들이 가능하면 진실에 가까운 언어들이기를 바랄 수 있을 뿐, 내가 건져낸 말들이 정말로 옳은지, 절대적으로 타당한지는 알 방법이 없다고 느낀다. 단지 내 손끝을 통해 건진 것들이 온당한 진실에 가깝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내가 무언가를 지켜내며 사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삶은 늘 무언가를 잊는 일들로 가득해서, 사실 무엇 하나 지켜냈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지켰다고 믿으며,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쩐지 글쓰기는 그런 지켜냄을 해내는 데 무척이나 탁월한 도구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착각이 아니기를 바라며, 계속 쓸 것이다. 나는 모든 시절을 수집하는 고고학자가 되고 싶다.

 

인연과 우연을 소중히 여기며 그 앞에서 예의를 갖추는 일은 아마 자기 자신에게 가장 이로울 것이다.

 

나의 진실에 충실하며 나의 리듬에 발맞추고 나의 흐름을 따라 글을 쓰고 살아가면서도, 나의 글을 읽을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와의 인연을 기억하며 그 앞에서 예의를 갖추고, 가능하면 의미 있는 울림을 주고자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 나에게 글쓰기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삶 전체, 세상 전체, 자아 전체에 예의를 갖추는 일이자, 성의를 표하는 일이며, 어떤 관계성과 내부성에 동시에 충실하는 일이다. 나 자신과 삶과 타자에 대한 어떤 태도를 이어가는 것, 그것이 곧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글 쓰는 사람은 사실 글 쓰는 일 자체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끝을 맺고, 그 과정 속에 머무르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나 싶다.

 

한 분야의 일등이 되는 일에는 재능도 중요하겠으나, 각자의 인생이라는 것에는 역시 재능보다는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결국에는 어느 시절 얻어맞듯이 깨달았던 자기 삶의 방향이라는 것에 못 박힌 뒤로는, 그 마음을 따라 인생길도 걸어가게 된다.

 

글쓰기는 삶에 대한 조금 더 근본적인 감각과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도리어 삶에 충실했다는 느낌을 되돌려준다. 글을 써낸 만큼, 나는 삶에 최선을 다했고, 삶을 사랑했고, 삶다운 삶 속에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지나온 내 삶의 어떤 시간들을 온전히 그 시간 자체로 긍정하여 박제하고 큐브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싶다. 글쓰기는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게 해준다.

 

매일 글쓰기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는 내가 지난 15년간 해온 실험이라고도 할 법하다. 15년 중에서 글을 전혀 쓰지 않은 날도 있을지 모르나, 내 기억으로는 단 몇 줄의 일기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다. 어느 날은 몇십 장씩 쓰기도 하고 어느 날은 겨우 몇 줄을 쓰기도 했지만, 대략 한 편의 글을 매일같이 썼다.

 

하나 확실한 것은 매일 글을 쓰다보면, 매일 글을 써야 한다는 요구를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지난 15년간 커피를 마시지 않은 날이 거의 없는데, 커피에 길들듯이 글쓰기에도 길들게 된다. 글을 쓰지 않으면 이 하루에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쓰다보면 그것이 명확해진다. 역시 오늘도 글을 쓰는 게 맞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에스프레소 기계로 커피를 추출하듯, 마음에 쌓인 어떤 부분을 걸러내고, 드러내게 해주는 것이다.

 

결국에는 저 바깥 영역 혹은 현실 영역이라고 부를 만한 측면과, 자아의 내면 그리고 삶의 보다 깊은 층위에 대한 감각은 항상 같이 가야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정말이지 '내일 쓸 것'은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오늘 써내고 나면, 오늘이 된 내일에는 항상 그날 쓸 것이 마치 샘물처럼 차오른다. 그런 무한한 순환의 법칙 같은 것을 알게 된 뒤로는, 정말이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지금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써내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러고 나서 내일이 되면, 또 내일 쓸 것이 차올라 있다.

 

내 주위에는 자기 분야에서 꽤 성취를 거두어 명망이나 인기를 얻은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중 상당수는 그렇지 않았던 시절부터 봐온 사람들이다. 대개 그들이 나름대로 성취를 거둔 과정을 보면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남들이 하지 않는 모험을 하고, 자신이 동경하는 것에 충실하며, 무엇보다 깊은 열망으로 꾸준히 시간을 투여한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이 세 가지, 모험, 동경, 꾸준함은 그들 모두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뒤가 없다는 듯이 자기 삶을 자기가 동경하는 것을 향해 내던질 용기 혹은 결단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고, 계속하여 세상에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자 했으며, 또 어디로든 다니며 배우고 흡입하려 했다.

 

그런데 스스로의 초라함을 이겨내며 그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을 5년, 10년, 15년씩 하는 사람들만이 결국에는 자기 분야에서 자기만의 무언가를 가지게 된다.

 

꼭 삶을 걸고 모험을 하고, 그리하여 동경하던 것에 다가서고, 최초의 꿈을 이루었다고 할 법한 삶만이 좋은 삶이라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잃는 것이 더 많은 듯한 삶도 더러 보았다. 그럼에도 자기가 꿈꾸던 것을 따라 남들이 하지 않는 모험을 하면서 착실히 다가간 사람들을 볼 때면, 그 용기와 힘이 멋지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정말이지 간절하게 동경하는 어떤 삶이 있다면, 그것을 향한 남다른 고집을 부려보는 삶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한, 그렇게 꿈에 다가간 모든 사람은 확실히 남들과 다르게 살았고, 보다 모험을 했으며, 자기 꿈에 대한 집착을 잃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런 삶의 방식이 분명히 존재한다.

 

삶이란 원래 그렇게 어설픈 나날들, 우습고 비웃어주고 싶은 시간, 스스로도 확신 없는 불안으로 쌓아간 순간들이 만들어내는 무엇이 맞을 것이다.

 

'어느 한 자아'에 온전히 고정된 삶에 행복이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어느 자아에든 그 하나에 너무 오래 몰입하고 빠져 있다보면, 거기에서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느끼게 된다. 아무리 가족을 사랑해도 1년 내내 가족 속에서의 자아에만 몰입해 있다보면, 삶 자체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열대우림처럼 무거워져버린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사회생활 속에서의 내 자아와 직업을 좋아하더라도 그 속에만 항상 속해 있다보면, 거기에서 오는 피로감과 그 역할 속 자아를 견뎌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결국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 자아를 적절하게 가지고서 늘 갈아탈 수 있는 상태, 즉 늘 유동적으로 몇 개의 가면을 바꿔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닐까 싶다.

 

나이가 들어도 삶의 생기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여러 곳에서 다양한 '자기'를 지닐 수 있는 사람들이다. 종교 공동체나 동호회, 사회생활에서라든지, 집 안에서 또는 친구들 사이에서, 천진난만하게 웃을 때는 웃고, 근엄한 권위를 자랑할 때는 자랑하고, 다정한 우정을 나눌 때는 친근하고, 고요한 순간을 사랑할 때는 한없이 고독해질 수 있고, 때로는 활기차게 세상을 누빌 수도 있는, 삶의 여러 범주를 골고루 지닐 수 있는 사람들이 계속 건강한 행복을 영위해가는 듯하다.

 

살아가면서 어느 한 영역에서만큼은 전문가나 권위자가 되고, 어느 한 영역에서는 끊임없이 새로 배우는 초심자가 되고, 어느 한 영역에서는 그저 웃고 즐기는 해맑은 아이가 되고 싶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바로 그런 데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길 원한다. 그런데 자유는 여기를 벗어난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자유는 여기와 저기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마음의 힘에 있다. 자유란 벗어남이나 무조건적인 해방이라기보다는, 이동할 수 있는 능력, 오갈 수 있는 힘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삶에서 부지런히 오갈 수 있는 장소들, 옮겨 탈 수 있는 자아들을 적절히 만들어두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책에서 나는 "진실을 향해 파 내려가는 광부"가 되고 싶다고 썼다. 소로, 카뮈, 릴케, 루소, 도스토옙스키, 그르니에 등의 작가들에게서 본 것은 진실을 향한 집념 그 자체였고, 어느덧 나 역시 그러한 집념 속으로 걸어 들어왔음을 느끼곤 한다. 확실히 나의 글쓰기는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이제야 제대로 쓴다는 확신이 든다.

나아가 어떤 사람의 글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는 것도, 그 사람의 글에서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 솔직함이, 진심이 엿보일 때다.

 

우리가 믿는 육체적 실감이라는 것도 사실 뇌에서 일어나는 것(뇌를 통하는 것)이다.

 

대개 소설은 욕망하는 자와 욕망의 필연적인 좌절에 관해 이야기한다.

세상의 모든 삶에는 욕망과 좌절이 포함되어 있다. 누구나 다양한 것을 욕망한다. 특히 어릴 때일수록 욕망은 다채롭고 무수한 가능성과 꿈이 꿈틀댄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그 무수한 욕망은 무수한 방식으로 좌절된다. 어디로 가고 싶다든지, 무엇을 먹고 싶다든지, 누구와 친구가 되고 싶다든지 하는 사소한 욕망에서부터, 어떤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다든지,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든지,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얻고 싶다든지 하는 커다란 욕망까지. 우리 삶은 온통 욕망과 그 좌절, 그리고 소수의 성공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설이 삶의 정답을 내려주진 않는다. 그보다 소설은 무수한 욕망의 과정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아마도 소설의 성공이란,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의 욕망을 직시하게 하는가, 우리의 의식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온갖 욕망을 얼마나 날카롭게 벼려내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 욕망이 어떤 식으로 우리 삶을,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세계를 파괴하는지, 혹은 살려내는지까지 드러내는 데 달려 있을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소설 속에는 우리 삶보다 더 정확한 삶이 담겨 있다.

나는 여전히 좋은 소설에는 삶을 뒤흔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 삶은 어딘지 가상 같은 데가 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삶 속의 여러 욕망이 펼쳐지고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느끼곤 한다. 살아온 삶을 돌아보자면, 무엇이 그 모든 걸 만들고 이끌어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내게 새겨진 어떤 욕망, 어떤 작품 속에서 엿보았던 삶, 우연히 사소하게 마주친 환영들이 삶을 이끌어왔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우리 삶보다 더 명확하고, 우리 삶보다 더 우리 삶다운 데가 있다. 어느 순간, 그 서사가 우리가 느끼는 우리 자신의 삶보다 더 강렬하게 '나 자신의 삶'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랑이 어딘지 불분명하다고 느낄 때, 로맨스 소설을 읽자. 그러면 사랑이 분명해질 것이다. 꿈이 흐릿할 때, 청춘 소설을 읽자. 어느덧 우리는 삶을 명확한 이미지로 꿈꾸고 있을 것이다. 나의 고독이 허망하게 흩어진다고 느낄 때, 외로운 사람에 관한 소설을 읽자. 그러면 오늘 밤의 고독도 다시 지켜지고, 홀로 있는 시간이 다시 다가올 것이다. 누구도 기억나지 않을 때, 우정에 관한, 가족에 관한, 따뜻한 사람에 관한 소설을 읽자.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한결 더 살아 있는 존재로 다시 느껴질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 길이 된다.

 

글을 쓰는 이유를 알고자 했다면 많이 에둘러 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나는 이 공간으로 끊임없이 돌아와야 했다. 헐벗은 몸으로 신을 찾아 광야로 나섰다 돌아오는 탕아처럼, 그저 계속 이곳으로 수렴되어야 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통념과 편견에 의해 공격받는다. 하루라도 온전히 내 삶을, 나의 마음을 지키고자 한다면 세상의 무수한 말들과 싸워야 한다. 세상의 온갖 통념, 이미지, 말은 늘 내가 삶을 사랑하는 일을 방해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매일 우리 몸속으로 침투하는 바이러스와 세균과 싸우는 면역세포처럼, 글쓰기를 활용해 볼 필요가 있다.

당장 내가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기준이 멀리서부터 나를 찔러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좋은 삶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수준의 직장, 가정, 패션, 생활의 소품이나 명품, 외모 같은 것들이 거의 언제나 우리를 들들 볶고 있다. 글쓰기란 바로 그런 통념과 맞서 싸우며, 지금 여기 속한 내 삶을 지키려는 일이다.

이런 통념과의 싸움은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 필요하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에 관해, 세상에는 그것이 '온당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라고 속삭이는 말들이 수없이 떠돌고, 그런 말이 내가 온전히 사랑하는 일을 늘 방해한다. 내가 즐기려는 이 순간에 관해,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방식에 관해,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해, 그런 통념과 매 순간 싸우는 일이 곧 글쓰기인 것이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을 때는 나에게 그런 이상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과 대화를 한다. 나에게 불편한 것이 있을 때는 그런 불편함이 어디서 오며, 그래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이 나쁜 것인지, 불편함을 느끼는 내가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그것'과 대화를 나눈다. 글쓰기란 그렇게 매번 내게 말을 걸어오는 세상의 통념과 대화를 하고 싸우는 일이며, 어찌 보면 머릿속에서 혼잣말을 하며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글쓰기의 신비로움은, 그런 혼자만의 싸움이 어째서인지 글로 써낸 이후부터는 더 이상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게 된다는 점이다. 알고 보면 모든 사람이 그런 싸움을 하고 있고, 나에게는 무수한 동료가 있음을 알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글을 써야 좋을지 모를 때는, 통념과 싸우면 된다. 그러면 나의 싸움이 결코 혼자만의 싸움이 아님을 알게 되고, 계속 그 싸움을 이어나가고 싶어지고, 그리하여 꾸준히 글을 쓰게 된다.

 

집 안에 있을 때는 그토록 나가기 싫을 때가 있다. 나가봐야 별것 없을 거라고, 아무런 의미도 없고 힘겹기만 할 거라고 생각해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것조차 힘겨울 때가 있다. 그러나 현관문의 경계를 넘는 순간,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면서 바깥의 세상을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 아마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할 수 있음을 믿게 되었다. 하기 싫은 것도 그냥 해보면 괜찮은 것이다. 절대 할 수 없다고 믿던 것도 막상 시작해보면 그 나름의 흐름에 이끌려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세상이, 삶이 나에게 열린다고 느끼게 된다. 넘어서면 더 나은 것이 온다는 이 믿음은 무척이나 중요해서 어느 순간 나를 사로잡는 감정, 언어, 자기합리화, 거부감 같은 것을 넘어서게 하고, 결국 그 믿음이 옳았음을 인정하게 한다. 그렇게 믿음이 삶을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한다.

 

그러한 '인정'의 진정성 및 진실성이 어디까지인지, 얼마나 일관성 있고 객관성 있는지 등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인정은 그리 집착할 만한 것도 의지할 만한 것도 되지 못할 수 있다.

 

내가 과연 좋은 글을 쓰며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제대로 확인하려면, 내가 쓰는 글이 나를 진실로 행복하게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글을 읽고 좋아해주는 것이 유명한 누군가가 내 글을 인정해주는 것보다 때론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내가 쓴 글이 내게 되돌아와 실제로 내 삶을 이루고 내 삶을 보다 나은 곳으로 이끄는지를 기준으로 글을 쓰는 것이, 누구에게 인정받는 데 몰두하는 것보다 현명한 게 아닐까? 그렇지 못한 글쓰기란, 결국 왜곡된 욕망이나 잘못된 집착과 더 깊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쓰는 글들이 나 자신을 원래의 존재 이상으로 드높이는 측면이 있다면, 그런 부분들은 모두 가지치기하듯이 잘라내고 싶다. 나 자신에게 여러 모습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가장된 모습으로 세상을 떠돌고 싶지는 않다.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기 위해 순간순간 애를 쓴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나를 꾸미는 말보다는 내 내면에 일치하는 말을 하려고 한다. 적어도 그 순간에 분열되지 않고자 한다. 잘 보이려 하지 않고, 멋있어 보이거나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매일 글을 쓰는 이유도 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함이지, 스스로 분열되거나 누군가를 속이거나 그를 통해 무엇을 얻기 위함은 아니다. 내가 언제까지나 나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 수 있길 바란다. 그런 삶을 살고 싶어서 매일 쓴다.

 

한편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안이나 기쁨을 줄 수 있다면,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불행이나 슬픔, 박탈감을 줄 수도 있다. 아무리 선의로, 누구도 상처 입히려는 의도 없이 쓴 글일지라도, 그 글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해가 될 수 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진실과 같아서,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쓴 글을 불편해하며, 싫어하고, 그로부터 상처받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이제는 어디에서나 쓰이는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도 유사한 의미 지평을 지니고 있다. 타인의 존재 자체,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 타인의 시선 자체가 나의 존재에 때론 지옥 같은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어서, 표현하는 사람이 언제나 마주하게 되는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나의 표현은 그 누군가를 반드시 불편하게, 때론 불행하게 만든다.

 

글을 쓰는 일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일도 크게 다를 게 없다. 나의 존재는, 나의 삶은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게 나은 것이다. 살아가면서 그렇게 내가 누군가에게 불편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란, 꽤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일이어서, 그런 일 자체를 온전히 인정하는 데서 삶도, 글쓰기도, 그 밖의 내 존재의 표현이라는 것도 제대로 시작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불편한 것들을 불편한 것으로 인정하는 마음도 가지려 한다. 그러나 나에게 불편한 것들이 잘못된 것들은 아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불편하더라도 내가 잘못된 것도 아닌 것이다. 그저 이 세상에는 불편함이 산소처럼 퍼져 있어서, 모든 삶에서 인생 내내 불편함은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타인에게 느끼는 불편함이든, 타인이 내게 느끼는 불편함이든, 불편함은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때로는 그것 자체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나 평가 기준이 될 수도 없음을 여러모로 인정하게 된다.

 

너무 불편한 건 삶에서 자연스럽게 치워버리고, 때로는 불편한 것을 마주하며 받아들이고, 나를 불편해하는 존재들을 그저 인정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불편함이 없는 삶이란 역사 이래로 존재한 적이 없다.

 

가끔은 세상의 시끄러움에 신경을 끄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이들은 너무 많은 입을 가졌고, 그리하여 자기의 일이라면 발톱 깎는 일까지 거의 모든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있지만, 정작 이 세상에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한 이야기들이 발화되지도 못한 채 숨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의 귀가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을 듣기보다는,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 것까지 듣게 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들어야 할 것은 9시 메인 뉴스보다는 아무도 클릭하지 않는 포털 구석 뉴스에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문제보다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곳에 더 진정한 문제가 있을는지 모른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이슈보다는 포털 뉴스 댓글 한 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계정의 피드 몇 줄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거리를 걸으면서 시야가 선명해지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주상복합 건물이나 핫 플레이스, 명품 자동차를 볼 때가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관해 너무 모른다고 느끼게 하는 풍경을 무수한 골목에서 마주치게 될 때다. 반면 이전까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아왔던, 너무 화려한 세간의 이슈 거리는 무미건조하고 하찮게 느껴지곤 한다. 여기, 알려지지 못하는 삶이 도처에 널려 있다.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적다고 느낄 때는 그런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다. 정말이지 내가 아는 것은 너무 없다. 알아야만 하는, 말해지지 않는, 들릴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다.

 

우리는 늘 어떤 삶을 택하면서 어느 삶을 버린다.

 

많은 글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 쓸데없이 무언가를 미워하는 마음, 비합리적인 불안이나 걱정 같은 데서 비롯된다. 다만 직접적으로 그 사실들에 관해 쓰지 않을 뿐이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내가 어느 순간 미워하고 있는 그 무엇에 잘못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그 무엇을 '미워하는 마음'에 대해 글을 쓰면, 오히려 그 마음은 해소되어버리고, 그것을 미워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실제로 대단히 유용한 방법이어서, 내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뒤에서 욕하거나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재미 삼아 늘어놓거나, 순간적으로 뒷담화에 끼어드는 일을 많이 줄여준다. 보통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이 있고, 그런 마음을 가까운 사람에게 별다른 생각 없이 풀어놓기 마련이다. 그런 마음을 글쓰기를 통해 승화시키기 때문인지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 같다.

달리 말하면, 나는 늘 어느 정도 나를 미워하며 살아왔다. 내 안에 있는 생각, 걱정, 감정들을 때로는 너무 견딜 수 없어서 어떤 식으로든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찬가지로 그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그에게 잘못을 돌리고 싶은 마음, 그 무언가를 공격하거나 없애버리고 싶은 생각들에 자주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을 그저 표출하기보다는 해소해야 한다고 믿었고, 나름대로 그 방법을 잘 익혀온 것이다.

 

언젠가 글쓰기는 '적대'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았다. 그 적대란, 꼭 실제의 그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태도라기보다는, 내 안의 부정적인 것들과 매일 싸워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나는 늘 그 무언가와 싸우기 위해 글을 쓴다. 내 안에 있는 그것들과 싸워 이기고자 애쓰는 그 모든 과정이 글쓰기다. 나는 거의 매일 싸우고 있다. 그리고 거의 매일 조금씩 이겨내고 있다. 내가 써낸 글들은 아마도 그런 전재의 상흔, 혹은 기념비 같은 것들일지도 모른다.

 

프로가 지겨움을 이겨낸다면, 아마추어는 지겨움에 쉽게 굴복한다. 당장 반응이 없거나, 줄어들거나, 시시해진다고 느끼면 그 자리에서 금방 관둬버린다. 그러나 프로는 누가 무어라 하든, 반응이 예전 같지 않든, 스스로도 즐거움을 덜 느끼든,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끌어내어 그 순간 온전히 몰입한다. 기분이 나쁘든, 호르몬이 요동치든, 생각만큼 결과가 좋지 않든, 그들은 그저 아침에 일어나 할 일을 한다. 지겨움이라는 이름의 악마가 있다면, 프로는 그 악마와 싸워 이기는 용사다.

결국 버티는 사람이 이기고, 살아남고, 성공한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보면 어느 정도 진실이 아닐까. 물론 모두가 일등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겨움을 이겨낸 매일의 힘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삶은, 그 삶 자체가 자신에게 돌아와 힘을 주지 않나 싶다. 그런 힘은 타인들도 느끼게 되고 그 힘을 받게 되고, 그래서 그런 힘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결국에는 꾸준히 사랑받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나 세상에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것은 어떤 '힘'일 것이다. 그 힘은 타인들한테서도 받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자기 안에서 장애물들을 계속 극복하며 얻어낸 것이 가장 온전한 자기 삶의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람마다 꾸준히 할 수 있는 건 다를 것이다. 그게 꼭 콘텐츠라 불릴 만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리멸렬함과 싸우며 얻어낸 삶의 어떤 보물들이 저마다의 삶에 주어질 수 있다. 그런 힘을 알고 신뢰하게 되어간다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다. 어쩌면 삶의 진실한 의미이거나 가치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결국 오래된 관계는 사랑은 사라지고, 정만 남는다.

결혼을 하면 안정을 얻고, 자아를 잃는다.

연애는 낭만이지만, 결혼은 현실이다.

나는 세간을 떠도는 이런 낡아빠진 언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적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우리는 무척 유약한 존재여서, 한 번 규정해버린 언어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한다. 오래된 속담, 세간을 떠도는 말 중에는 주워듣고, 마음속에 새기고, 되풀이할수록 삶을 망가뜨리고 훼손하는 언어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 언어를 걸러낼 수만 있다면, 삶은 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는 그대로의 감각을 주고, 그 속에서 분열 없이 안착할 수 있게 한다.

 

요즘 나는 '사랑'이라는 문제에서 역시 언어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느낀다. 사랑이야말로 언어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한 번 잘못된 생각, 잘못된 언어에 사로잡히면 그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 잘못된 언어는 온통 우리를 사로잡아서 우리의 관계, 감정, 인생을 뒤흔들어버린다. 그 적폐 어린 언어들을 박살내는 것, 그것은 내 앞으로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실질적인 과제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내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며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이다.

 

나는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 타인들이 미리 '아이 키우는 일'에 대해 규정해놓은 말들을 가능하면 듣지 않으려 한다('헌신적이고 숭고한 사랑'이라든지). 그런 말들은 너무 손쉽고 단순하고 낡아서, 내게 도래한 이 새로운 삶을, 이 새로운 관계를 설명하는 일에 주로 방해만 되기 때문이다. 결혼도 육아도 내가 있는 여기에서 처음 시작되는 것이지, 그 이전의 언어들은 이곳에 침범할 수 없다. 나의 언어로 어떻게 이 생활을, 이 삶을 살아낼 것인가. 지금은 삶에서 그것보다 중요한 화두를 생각할 수 없다.

 

적어도 글쓰기에 관한 한, 그런 '외적 다양성'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외적인 왜소함'은 글을 쓰는 데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일상 하나, 작은 순간 하나, 작은 생각의 실마리 하나에서 쓸 이야기들은 넘쳐난다. 아이의 미소, 아내와 나선 잠깐의 나들이,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 한 토막, 아버지의 표정, 친구가 지나가듯이 건넨 말 한마디가 모두 글 한 편의 소재가 된다. 오히려 일상이 힘겨울수록, 그 사이를 비집고 터져 나오고자 하는 정신의 열망 같은 것이 있다. 내게는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마음, 억눌려 있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위해 잠깐의 시간과 키보드만 마련되면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다. 그렇게 나오는 글들이 지금보다 더 자유로웠고, 더 역동적이었고, 더 다양한 곳을 오가며 살았던 시절의 글보다 못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내가 쓰는 글들은 매일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다시, 나는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삶은 내가 놓인 이곳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견뎌내며, 이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 삶이 엉망이 된다면 좋은 글쓰기도 없다. 곁에 있는 사람의 표정, 기분, 말 한마디도 챙길 줄 알고 조율하려 할 때, 삶과 글쓰기가 어우러지리라 믿는다. 물론 나 자신의 마음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하는 것도 잘 알고 잘 챙기면서 말이다. 그러면 굳이 대단한 여행이 아니더라도, 집 앞 산책만으로도 글쓰기를 위한 저장 탱크는 가득 찬다. 새로운 사람에 대한 인상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도 풀어내야 할 것이 가득하다. 그렇게 좋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을 쌓아간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건 단지 내가 놓여 있는 삶에 대한, 지금 이곳에 대한 온전한 충실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못한 채 계속 삶을 미루고, 유예하고, 겁을 먹은 채 기다리기만 하던 탓에 오히려 글쓰기가 나아가지 못하고 지체되던 날들도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