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보다 읽다 말하다(김영하)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는 삶이 아니라 휴대폰을 잠시 끄고 글을 쓰는 데서 얻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유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과 관련되었다는 겁니다. 글을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연극에 참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 여기엔 대부분 큰돈이 들지 않습니다.
많이 벌고 쓰고 많이 저장하는 삶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비관적 인식하에 지금 여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독자적으로, 개별적으로,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어차피 존재하는 감각,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감성 근육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육체의 근육이 발달한 사람은 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기초대사량이 높아 살이 잘 찌지 않는다고 하지요. 감성 근육이 발달한 사람 역시 더 많은 것을 느끼면서도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잘 느끼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자기 느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와인을 전문적으로 테이스팅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별점을 보고 와인을 고를까요? 평생 음악을 사랑하고 들어온 사람들이 남의 평가만 듣고 콘서트 티켓을 살까요? 저만 해도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살 때 독자 서평이나 리뷰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한 작가가 저에게 한 번이라도 깊은 즐거움을 주었다면 그 즐거움은 제 정신과 육체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 작가가 새 작품을 냈다면 일단 사보는 겁니다. 만약 그 작품에 실망했다면 그것 역시 고스란히 남습니다. 자신만의 느낌의 데이터베이스가 충분한 사람은 타인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참고는 하겠지만 의존하지는 않을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윤리적으로 건강한 개인주의를 확고하게 담보하려면 단단한 내면이 필수적입니다. 남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단단한 내면은 지식만으로는 구축되지 않습니다.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지식만 있고 자기 느낌은 없는 사람,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개인이라고 보기 힘들 겁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내 감정은 감추고 다중의 의견을 살펴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겠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느끼는가, 뭘,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자기만의 감각과 경험으로 충만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그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요즘과 같은 저성장의 시대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 한길로 나아가는 것보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개인들이 나름대로 최대한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것, 그런 개인들이 작은 네트워크를 많이 건설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문학을 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문학만큼 다양한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작가마다의 독특한 스타일로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우리에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입니다.
큰돈을 벌거나 명예를 쌓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감각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깊게 느끼는 삶, 남과 다른 방식으로 자기만의 내면을 구축하는 삶, 이런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즐 느끼자. 감성 근육을 키우자. 그리하여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고독한 개인들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한국사회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거예요. 그때의 저는 매일같이 벌어지는 술자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읽었으면 어땠을까? 잠을 자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그냥 거리를 걷든가. 이십대, 젊을 때에는 그 친구들과 영원히 같이 갈 것 같고 앞으로도 함께 해나갈 일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손해 보는 게 좀 있더라도 맞춰주고 그러잖아요. 근데 시간이 지나고 자기 취향이 점점 분명해지면서 결국은 많은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더군요.
인맥이니 인간관계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기울이고 영혼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게 나를 위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인간을 믿는 사람들, 인간을 믿는 휴머니즘 또는 어떤 종교를 믿거나 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역사의 악행들을 생각해보면 인간에게는 아주 굳건하고 경건한 허무주의가 필요하고, 그런 이들의 가장 좋은 벗은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소설과 함께 세계의 무의미를 견디고 동시에 휴머니즘이나 인본주의나 광신자들이 저지르는 역설적은 독선과 아집 그리고 공격성 이런 것들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하루의 삶이라는 것을, 사실 제가 십 년 전에 그러려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책을 읽지요. 매일 조금씩 글을 쓰고요. 그리고 사회적인 접촉면은 아주 최소화되어 있습니다. 웬만하면 집밖에 나가질 않아요.
대학교 때 철학개론을 보면서, 제 철학적 입장을 정리한 적이 있어요. 제가 가장 좋아했던 게 에피쿠로스학파예요. 스토아학파처럼 금욕적이진 않지만, 높은 형태의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고, 그 밖의 다른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아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느끼는 고통과 기쁨, 이런 것들에 점점 집중하게 돼요. 그에 비하면 책을 내는 일은 훨씬 지루한 일이에요. 큰 즐거움을 주지 않아요.
사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밤에 술 마시는 일도 거의 없어요. 취미도 없고, 다른 것에 탐닉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이 나에게 깊은 수준의 만족감을 주느냐.’ 그게 아니라면 그만두는 거죠. KBS 라디오에서 <김영하의 문화포커스>라는 프로그램을 매일 진행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좋은 프로그램이었지만, 그걸 하는 동안 충만한 만족감을 얻진 못했어요. 저는 진행자일 뿐이고, 진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손님으로 오는 거죠. 부러운 거예요. 내가 저거 하고 있어야 하는데 물어보고만 있으니까요. 그게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만,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았죠. 소설가로 살면서 다른 직업이 꾸준히 있었어요. 방송을 진행하거나 교수 혹은 어학당 강사인 적도 있었지만, 오래는 못했어요. 깊은 만족감이 없는 일들은 오래할 수 없었던 거죠.
제 장래희망이 소설가예요. 장래에도 계속 소설을 써야죠. 지금도 소설가지만, 장래희망도 소설가입니다. 이십 년 후에도 소설가이기를 바라고요. 특별한 계획은 그것밖에는 없어요. 소설을 계속 쓴다는 것이죠.
저는 단편을 쓸 때와 장편을 쓸 때의 자세가 완전히 달라요. 단편을 쓸 때는 이런저런 걸 해보자는 생각으로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써요. 장편을 위한 연습이랄까. 장편은 인생이 걸린 문제잖아요. 이삼년, 길게는 오 년씩 걸리잖아요. 그 기간 동안 작품 속 인물들하고 살아야 되는데, 제가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장편을 하나 끝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요. 전 일기를 쓰기 때문에 알 수 있거든요.
소설 쓰기는 다른 사람과 같이 하는 협업이 아니에요. 오직 저하고만 관련이 있어요. 사실 이걸 이해하기까지 오래 걸렸는데, 소설을 쓰는 건 독자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요. 순전히 저와 제 세계와의 문제예요. 저는 새로 완성한 장편을 발표 안 해도 이미 쓰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거든요. 소설을 쓰는 동안, 쓰고 나서 갖고 있는 동안 그 소설은 제 것이고요. 아무도 그 즐거움을 훼손할 수가 없어요. 굳이 지금 당장 소설을 발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면 집에 놔두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세계와 제가 관련되어 있는 것이죠. 독자는 소설 쓰는 행위 자체만을 놓고 볼 때 사실 크게 중요하지는 않아요.
작가가 하는 일과 독자가 하는 일이 너무 달라요. 작가는 글을 쓰는 것으로써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반면 독자는 글을 읽음으로써 즐거움을 누리거든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엄청나게 다른 거예요. 마치 발레리나와 관객의 관계처럼요. 발레리나에게 관객의 갈채가 있으면 좋겠죠. 그러나 발레리나가 진짜 고민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동작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이 감정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연기를 얼마나 실감나게 할 수 있을까, 주로 그런 것들이거든요. 작가란 늙지 않는 발레리나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늙었다고 퇴화하거나 점프의 높이가 낮아지거나 그러면 안 돼요.
한 권의 책과 그것을 읽은 경험은 독자 개인에게만 고유한 어떤 경험으로 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독서를 왜 할까요? 그것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거의 모든 것이 공개돼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하루하루는 시작부터 끝까지 공유되고 공개됩니다. 웹과 인터넷, 거리의 CCTV, 우리가 소비한 흔적 하나하나가 다 축적되어 빅데이터로 남습니다. 직장은 우리의 영혼까지 요구합니다. 모든 것이 ‘털리는’ 시대. 그러나 책으로 얻은 것들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독서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 내면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백 명의 독자가 있다면 백 개의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그 백 개의 세계는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읽은 책이 다르고, 설령 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그것에 대한 기억과 감상이 다릅니다. 자기 것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에 독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조용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 소박하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자기 침대에 누워 어제 읽던 책을 이어서 읽는 삶. 자기 서재와 마음속에서만큼은 아무도 못 말리는 정신적 바람둥이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세상이 제가 꿈꾸는 이상적 사회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꿈은 꿀 수 있겠죠. 그리고 그 꿈 역시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앗아갈 수 없듯이 말입니다.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작가에게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내게 있어 그 경험은 거의 전적으로 독서 경험이다. 나는 철이 들고 나서는 살아 있는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일급의 소설들로부터는 수도 없이 압도당했고, 그런 충격들이 나로 하여금 그 소설들을 ‘다시 쓰게’ 만들었다.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말은 진리를 찾아가는 중요한 도구였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학생식당에 간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방금 전 철학개론 수업에서 어설프게 감지한 바를 조금 흥분한 어조로 친구에게 떠들어댔다. 친구는 육개장 그릇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야, 밥은 좀 편하게 먹을 수 없을까?”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나는 대화라는 것이 꼭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실망스런 기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후로 내가 주로 소통해온 사람들은 현실의 인간이 아니라 책 속의 인물들이었다.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대화는 때와 장소, 기분이 잘 맞지 않으면 어그러지기 일쑤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대화에 적당한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기분도 잘 파악하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불행히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좀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다가 때와 장소에 걸맞지 않게 그 얘기를 꺼내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쪽이었다. 오래 생각해온 어떤 문제는 유창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일상적인 가벼운 대화에서 핀트를 잘 못 맞춰 오해를 사는 일이 잦았다. 글은 발표하기 전에 거듭하여 고칠 수 있지만, 말은 한 번 내뱉으면 주워담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말보다는 글을 쓰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내가 한 수백 마디의 말보다 제대로 쓴 한 줄의 문장이 더 나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