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좋은 곳에서 만나요(이유리)
<오리배>
좋은 곳이란 어디일까, 아무도 나를 좋은 곳에 데려가기 위해 찾아오지 않았고 그것은 생전이나 사후에나 마찬가지구나. 그렇다면 내가 가는 수밖에.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둥실둥실 흔들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가까운 곳에서 어린아이가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마다 가족과 연인을 태운 오리배들이 부드럽게 떠다니며 서로 부딪히고 비껴가고 있었다. 새하얀 오리배들 위로 햇볕이 부서졌다. 눈에 들어오는 세상 속 모든 것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희재 사이에 몸을 내밀고 그들이 보는 것을 함께 보았다.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갈매기들과 목덜미에 시원하게 와닿는 바람과 발치에 찰랑이는 강물, 그 위에 뿌려진 빛의 조각들을. 그랬다, 그 반짝이는 알갱이들만큼이나 많은 슬픈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은 강물이 한 번 일렁이는 동안만큼만 빛날 뿐이라는 것을.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빛들은 강 하류로 흘러가면서 거대한 물결에 합쳐져 사라질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다음 번의 빛을 그 표면에 받아들이며, 강이 흐르고 해가 빛나는 동안 영원히 계속.
<아홉 번의 생>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는 알게 되었다. 다섯 번째 생에서 나를 절망에 빠뜨렸던 그 질문, 나를 사랑하느냐는 그 질문이 사실은 무의미하고 공허한 덫이었다는 것을.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사랑이란 매일 함께 있고 싶은 것,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것, 끊임없이 생각나는 것이라고. 물론 어느 부분에선 옳았지만, 그것들은 사랑이라는 거대한 우주의 아주 작은 별 하나에 불과했다. 별 하나가 없다고 해서 우주가 우주가 아닌 것이 되지 않듯이 사랑도 그랬다. 사랑을 무엇이라고 정의해버리는 순간, 사랑은 순식간에 작아지고 납작해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수천만의 행운이 겹쳐 만들어낸 오늘을 최대한 즐기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
때문에 나는 다음번 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저 바라는 것은,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애가 좋은 곳에 있기를.
그뿐이었다.
<이 세계의 개발자>
"죽고 나더니 비로소 자기가 생전에 뭘 하고 싶었던 것인지를 깨닫더라. 그걸 할 수 있는 몸과 시간을 갖고 있을 땐 하지 않던, 심지어 하고 싶은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그리고 이상하게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걸 해내고 나서야 떠났어. 원래 갔어야 했던 곳으로."
"아무래도 내가 세계를 너무 아름답게 만들었나 보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는 떠나기 싫을 정도로 말야."
사랑스러웠어요. 정해놓은 것을 거스르면서 뭔가를 발견하는 사람들, 이 세계를 더 복잡하고 끈질기게 즐기려는 사람들이 좋고 고마웠어요.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던 곳에 가고, 하고 싶은 말을 끝내 하고, 아무튼 원하는 건 거의 비슷한데, 거기까지 다다르는 과정이 또 얼마나 다양한지 몰라. 결코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어쩜 그렇게들 끈질기게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지. 맘대로 안 되는데도 어떻게든 저들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애쓰는 게 굉장하기도 하고."
"뭐, 그런 셈이지. 그리고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야. 내버려두면 결국엔 소원을 풀고 가야 할 곳으로 가니까. 그걸 지켜보는 게 또 재미있고."
"말했잖아. 원하는 건 거의 비슷하지만 거기까지 다다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아니야, 너는 충분히 잘했어."
정말 원하는 것이 없었나 묻는다면 물론 아니었다. 왜 지금까지 이걸 생각하지 못했지 싶을 만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것이 내게도 있었다. 다만 그게 타인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큰 것이었을 뿐. 그건 당연히 게임을, 그러니까 세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을 때 다른 세계를 만들어서 거기로 몸을 피했다. 그 세계를 더 정교하게, 재미있게,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몰두했고 삶을 바쳤다.
그건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결코 진짜 세계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므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지려고 애썼다. 찾아온 모든 이가 현실 세계에서 발을 떼고 이 세계 속에 살 수 있도록. 그러므로 나는 항상 생각해온 셈이었다. 이 세계를 만든 이는, 세상의 개발자는 어떤 마음으로 이것을 만들었을까. 왜 만들었고 어떻게 구동했을까. 세계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어떤 역할을 맡아 움직이고 있을까. 신이 이 세계를 짓고 부순 방법, 그리고 결국 사랑한 방법은 뭐였을까. 그것을 안다면 나도 이 불완전한 세계를 완전한 세계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해답은 내버려두는 일, 다만 그것뿐이었다는 사실을.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을 한발 물러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불완전함 속에서 완전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다만 애정 어린 눈으로 끝까지 지켜보는 것.
저는 이제 어디로 가죠?
"좋은 곳. 좋은 곳으로 가지."
신은 나른하고 평화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고 싶으면 직접 가보라는 듯이.
<작가의 말>
사랑은 계속될 것을
사람은 죽어서 무엇이 되며 어디로 갈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이다. 세상이 너무나 다채롭고 복잡하고 아름다워서, 한 번 머물다 가기에는 아무래도 아까운 곳이라서. 그런 의문은 이 세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세계를 이루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사후 세계에 대한 이 긴긴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난 지금도 답은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사랑은 계속될 것을 믿는다.
같은 의도에서, 내 삶에 기꺼이 포함되어준 감사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이 책에 많이 넣었다.
이렇듯 내 삶에서 얻은 황금 모래알을 작품 속에 사르르 뿌려 넣으며 이것이 소설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자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했을 만큼 재미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쓴다면 이런 짓을 하게 되겠지 싶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곁에 있어 주었던 모든 이이게 감사한다. 그리고 나를 이야기를 짓는 사람으로 역할지어준, 이 세계의 개발자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