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삶을 견디는 기쁨(헤르만 헤세)
별로 현대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는 내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어 왔던 생각 하나를 말하고 싶다. 적당한 쾌락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삶이 주는 맛을 이중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기쁨을 간과하지 말라는 조언도 꼭 하고 싶다.
결국 내 말의 핵심은 ‘절제’이다.
시간이 늘 부족하다며 늘 전전긍긍하고, 재미있는 일이 없다며 항상 따분해하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다. 날마다 벌어지는 사소한 기쁨들을 가능한 한 많이 경험하고, 거창하고 짜릿한 쾌락은 휴가를 즐길 때나 특별한 시간을 보낼 때 조금씩 맛보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지친 몸을 추스르고, 일상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거창한 쾌락이 아니라 사소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소한 일들과 그로 인해 얻은 작은 기쁨들을 하나하나 꿰어 우리의 삶을 엮어 나간다.
슬픔에 잠긴 채 혼자 멀리 떨어져 있다면 가끔은 아름다운 시의 구절을 읽고, 즐거운 음악을 들으며, 수려한 풍경을 둘러보고, 당신 생애에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려 보라! 당신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렇게 했다면 곧 기분 좋은 시간이 찾아올 것이며, 미래는 든든하게 여겨지고, 삶은 어느 때보다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행복과 고통은 우리의 삶을 함께 지탱해 주는 것이며 우리 삶의 전체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을 잘 이겨 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산 것이라는 말과 같다. 고통을 통해 힘이 솟구치며 고통이 있어야 건강도 있다. 가벼운 감기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푹 쓰러지는 사람은 언제나 ‘건강하기만’ 한 사람들이며 고통받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고통은 사람을 부드럽게도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하게도 만들어 준다.
나는 문득 우리가 우리의 삶을 너무나 사소하게 여기고, 시원찮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그 거장처럼 심오한 뜻을 가지고 거대한 틀을 만들며 신에게 간청하고 감사의 표현을 하겠는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하늘이 있는 풍경으로 더 자주 시선을 옮기고, 나무가 있는 자연으로 더 자주 발걸음을 하며,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더 확보하며, 아름다움과 거대함의 비밀을 느낄 수 있도록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말이다.
<혼자 걷는 길>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다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고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혼자서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지혜나
능력은 없다.
새로운 날에 주어지는 선물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받아들이려고 할 것
고통의 달콤함
그것의 필수불가결함
고통은 네가 막아 내려고만 하기 때문에 아픔을 주고 네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만 하기 때문에 너를 쫓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도망치지 말고, 변명하지 말며,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라. 너는 네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네 마음속에 구원과 행복이라는 마법 같은 단 하나의 힘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의 이름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고통을 사랑하라. 거부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라! 마지못해 억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의 은밀한 내면에 있는 달콤함을 맛보아라. 아픔을 주는 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을 거부하는 마음이 네게 아픔을 줄 뿐이다. 네가 그것과 함께 한다면 고통은 고통이 아니며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네가 귀를 기울여 그들이 내는 소리를 잘 들어 보아라. 그것은 훌륭한 음악임을 알게 된다. 그동안 너는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것과 다른 독특한 소리에 얽매여 그들이 내는 소리를 버리려고만 했다. 하지만 독특한 소리들은 고통의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다. 내 말을 들어라. 내 말을 잘 듣고 기억하라.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광기에 불과하다. 오직 너 혼자만 그 아픔을 만들어 내고 네 스스로 너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다.
“어떤 우상도 생각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네가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우상을 쫓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올바른 것은 저절로 나타난다. 그냥 고통을 달게 받아라. 그것을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맛은 더욱 쓰게 느껴질 것이다. 비겁한 사람은 운명을 독약이나 약물처럼 들이켠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와인이나 맥주처럼 마셔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운명이 달콤하게 느껴질 것이다.”
<쉼 없이 달려감>
그대 두려움에 감싸여 있는 영혼이여,
그대는 늘 이렇게 묻는다.
험난한 날을 그렇게 많이 보냈건만
평화와 휴식은 도대체 언제 오는가?
오, 나는 안다.
편안한 날을 맞이하자마자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랑스러운 나날을 고통으로 보낸다는 것을.
그대는 잠시 안식을 취할 뿐
다시 새로운 고통을 찾아 나간다.
성급하게 뜨는 샛별처럼
우주는 조바심에 가득 차 있다.
그 어떤 것에도 매달리지 않으며 선한 것이나 악한 것에 다 연연해하지 않는 것
거부하지 말라! 기꺼이 죽어라! 기꺼이 살아라!
새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문제점들은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이며, 그것은 그저 우리에게 고통 그 자체만을 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곧 우리의 삶이 되며, 기쁨이라는 감정과 삶에서 느끼는 고귀한 가치는 오직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으로부터 탈출하라.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시작이 있으면 최상의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햇빛과 악천후는
둘 다 하늘의 얼굴.
달콤하든 씁쓸하든, 운명은
내게 훌륭한 영양이 되리니.
영혼은 얽혀 있는 길을 간다.
그것의 언어를 배우라!
오늘 그대에게 고통이었던 것이
내일은 축복이 되리라.
인간은 궁극적으로 ‘건강’해질 수 없으며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다. 물론 내게도 고통이 없는 날이란 드물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또다시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고 운명을 사랑하게 된다.
다시 밝은 빛을 보고자 한다면 슬픔과 절망을 뚫고 나아가야만 한다.
고통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이 고통의 세계를 가장 빨리 통과할 수 있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고수해 왔다. 다시 말해 나는 고통과 그보다 높은 힘에 나 자신을 내맡겼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그와 같은 힘에 맡겼다.
인내하라, 싯다르타여!
하지만 인내하는 것은 어렵다. 인내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고행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힘든 일이면서 그와 동시에 유일하게 배울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세상의 자연과 성장, 평화, 번영, 아름다움은 모두 인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내는 시간과 침묵, 그리고 신뢰를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인내는, 개인의 일생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하며, 개인의 판단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과의 연관성도 고려해야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또한 ‘인내’와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앙, 지혜, 천진난만함, 그리고 소박함이다.
나는 ‘구별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다시 말해서,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의 정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 또 내가 그 체내 기관을 나의 진정한 자아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기쁨과 슬픔의 경지를 초월할 수 있다.
우리가 받아들일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며 고맙게 받아 마실 줄 모르는 것은 모두 독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생명이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사실상 해롭거나 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선하거나 중립적이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에게 속하며 스스로에게 유익하지만 표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는 것들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윤리는 그런 것들이 위로 올라오면 불행이 따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행복이 따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표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윤리에 복종하는 사람만 불쌍해질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는 일과 돈이 유일한 우상인 것과 반대로 찰나적인 유희를 즐기는 성향이나 우연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 변덕스러운 운명에 대한 신뢰가 더 필요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바로 그와 같은 것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발밑에는 대지가 충실하게
제자리를 지키면서
어머니처럼 묵묵하게 자연을 다스리고
씨앗과 새싹으로 자신의 영원한 생성을 표현한다.
우리가 아무리 겁에 질린 아이들처럼 소리를 질러도
대지는 미소만 지을 뿐이다.
나는 늘 생성과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우리는 떠나야 한다.
이 땅의 한바탕 유희에서
세상은 우리에게 기쁨과 고통을 주었고
많은 사랑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