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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때로는 워밍업 없이 가보고 싶어(김수지)

아름다운 존재 2025. 1. 1. 19:53

이동진 영 평론가는 <밤은 책이다>라는 책에서 어떤 일을 할 때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면 그건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괴로울 때마다 이 지난한 시간이 내 목표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양만큼의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그건 5천 원을 지불하고 커피를 마셔야 하는 당연함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치러야 할 값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숙명을 이고 가는 인간처럼 퍽 순응이 되었다.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가진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

김초엽 작가의 소설 <지구 끝의 온실>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다. 현재로서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돔’에 머물지 위험한 밖으로 나갈지, 주인공은 ‘현상 유지’는 없다는 판단 아래 종말을 피해 낯선 곳을 향해 간다.

 

어떤 일을 두고 마음이 불안한 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간절하기 때문이다.

 

완벽해지기를 기다리며 망설이고 싶지 않다. 워밍업 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손과 발을 물에 적응시키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때는 늦는다. 당장 뛰어들기. 뛰어들고 나면 화들짝 놀란 내 몸과 마음이 더 빠르게 작동한다. 나는 그 힘을 믿는다.

 

떠오르는 감정을 섣불리 믿어버리지 않는 것.

 

하지만 매일 작아지는 이 시간도, 어쩌면 죽은 가지 안에서 발버둥 치는 새순의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가는 게 어려울 뿐 그 안에서는 새로운 잎이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변신할 때마다 옷이 뜯기는 헐크처럼 내 가능성도 껍질이라는 까만 하늘을 뚫고 언젠가 튀어나올 수 있지 않을까.

 

사전 정보 없이도 막연한 가능성을 믿고 모험을 떠나는 것. 언제나 내가 꿈꾸는 모습이다.

 

낯선 길에서 행복을 줍게 될 수도 있는 거라고 믿어보는 것.

 

언젠가 들을지도 모르는 ‘싫은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보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웃어넘길 수 있게 좀 더 유연하고 담대해질 것.

 

분명한 건 나에게나, 나를 대하는 사람에게나 어느 정도의 무심함이 지나친 관여보다 낫다는 것이다. 내 마음도 뜻대로 안 움직이는데 남의 마음이 어디 쉬울까. 나는 상대를 귀찮게 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바로 ‘관여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너의 인생은 너의 것, 나의 인생은 나의 것. 내가 기대한 반응을 상대가 내어주지 않아도, 우리는 애초에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서운할 필요가 없다고 기본 설정을 해두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소유욕 때문이었을까. 사람이고 물건이고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니 쓸데없는 관심이 줄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공간만큼 숨 쉴 구석이 많아졌다.

 

만져지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감정 같은 것에 나를 잠기게 두는 것보다는 내가 나를 이끌 방법을 찾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