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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가장 젊은 날의 철학(이충녕)

아름다운 존재 2025. 1. 6. 15:20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너무나 다릅니다. 한 명 한 명의 삶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노력도 다르고, 방황도 다릅니다. 다름의 다른 표현은 ‘고유성’입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특성과 관점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회는 모두가 같다는 듯이 말합니다. 똑같이 추구해야 할 것이 있고, 똑같은 노력을 들여서 똑같은 길을 가야 할 것처럼 말합니다. 지금 사회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습니다. 침대에 맞춰 사람을 늘리거나 다리를 자르듯, 사회가 정한 표준에 모두를 맞추려 합니다. 이런 문화에서라면 표준에 잘 맞는 소수만 별문제 없이 살아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쳐갈 겁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각자의 다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고민이 있으면 이렇게 해라” 하는 식으로 고민과 그 해결방식을 일방적 틀로 재단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각자의 입장에서 고민을 헤쳐 나갈 가능성을 제시하고 용기를 응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논리적으로 따지는 게 아닙니다. 막혀 있는 시야를 뚫는 것입니다. 방황과 고통은 언제 생겨날까요? 뭐가 옳은지 모를 때가 아니라, 한 가지 길밖에 보지 못할 때입니다. 지금의 사회는 한 가지 길만 강요합니다. 표준에 맞춰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압박하죠. 그러다 보니 그 길이 아니면 안 될 것 같고, 내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면서까지 그 길을 좇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삶은 고난스럽고 공허해집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방황을 겪지 않으려면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나의 길’이라는 독자적 가능성이 존재하며, 매 순간이 고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삶에서 ‘순수한 혼자’라는 건 없습니다. 이 책을 펼친 여러분도 이미 수많은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금의 순간에 이르렀을 겁니다. 실존주의적으로 내 고유성에 주목하는 일은 내 존재의 9할 이상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이뤄졌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의 모든 고민 역시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 속에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내 고민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기도 합니다.

 

나다움 메시지는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정말로 나다운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야 하죠. ‘남들이 말하는 나다움’을 무작정 좇아선 안 됩니다. 그건 역설적으로 가장 나답지 못한 일이며, 자본주의 광고에 놀아나는 꼴이 될 뿐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만족을 느끼는 겁니다. 그리고 파스칼은 그 이유를 지금의 상황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영역에 다가갈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이며 그 높은 영역에 다가갈 수 있는데, ‘아직’ 그러지 못해 불만족을 느낀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파스칼은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신의 은총을 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 말고, 인간을 넘어선 세계에 자신을 내려놓고 내맡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희망과 행복의 가능성을 품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절망과 공허를 품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나의 긍정적인 면만 보고 거기에 희망을 품으면 내 반쪽과만 관계하게 됩니다. 그런 기대에 기초해 인생 계획을 세우면 머지않아 문제가 생기지요. ‘나’의 부정적인 면이 그 계획에 제동을 거니까요. 나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기 긍정보다 더 중요한 건 긍정과 부정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한 부분이 아니라 여러 부분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거죠. 나 자신에 대한 깊고 종합적인 이해에는 반드시 겸손이 필요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 할 수 없는 것, 극복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 무력함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평생에 걸쳐 끈질긴 힘을 발휘하는 나의 모습입니다.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해 꼭 특별함을 추구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나답기 위해 반드시 남들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특한 진로를 선택하거나 특별한 취향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죠. 이런 생각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오히려 때로는 남들이 세워 놓은 체계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게 나다운 선택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파스칼의 ‘겸손한 정신’은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파스칼은 ‘반만 지혜로운 사람’과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을 구별했습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반만 지혜로운 사람은 대중이 따르는 기존 체계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합니다. 남과 다른 생각을 해야만 더 훌륭한 줄 알지요. 반면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기존 체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줄 압니다. 자신의 무력함과 세상사의 복잡성도 인정합니다. 새로운 해결책으로 상황을 개선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압니다. 지금의 체계가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름의 합리성이 있기에 지금까지 유지되었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기존의 질서를 없애기보다 보존하는 게 나을 때도 많다는 걸 인정합니다.

 

남들이 평범한 길을 걷는 건 나름대로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함을 추구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건 그 자체로 존중받을 일이지만 반드시 지혜로운 일인 건 아닙니다. 꼭 나다움을 실현하는 길인 건 더더욱 아니죠. 사람에 따라서는 안정적인 길을 선택하는 게, 전통을 지키는 게, 대세에 따르는 게 가장 ‘나다운’ 일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은 인과에 따라 일어나고 끝없이 변화하니, 하나의 일이나 대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거죠. 집착은 심리적 고통의 주요 원인입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는지 답을 얻으려는 태도 자체가 어쩌면 ‘나’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기엔 세상은 너무 복잡합니다. 한 가지 답을 내리기에 삶 안에는 너무 많은 가능성이 얽혀 있지요. 따라서 여러 각도의 생각에 마음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남들이 제시하는 개념 구조를 그대로 따르기 보다, 여러 방향으로 치열하게 생각하며 스스로 개념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허무와 무력감에 대해서도 효과적인 치료제가 될 것입니다.

 

‘고민’을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기존 것과 전혀 다른 유형의 답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

 

나의 본질, 진짜 나, 순수한 나 같은 게 정말로 있는지를 의심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어쩌면 나의 존재는 매 순간 흐르며, 고정적인 본질이란 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찾는다’는 말보다는 나를 ‘만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죠.

 

‘자기-되기self-becoming’ 혹은 ‘자기-창조self-creation’

 

도전하고 고통과 실패로부터 배우며,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라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특수한 자기를 창조하며 현재를 살아가라

 

정말로 자기다움을 경험하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내 존재에 변화가 일고, 그 변화를 통해 비로소 자기다움을 발견하거나 창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찾기보다 만들어나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에 훨씬 여유가 생깁니다. 조바심과 걱정이 호기심과 창의성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정해진 보물을 찾는 게 아니라, 이제껏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걸 만들어내는 겁니다. 도달해야 할 목표, 따라야 할 모범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참고할 자료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특수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 창조 끝에서 어떤 기쁨을 마주하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사이에서 종종 고민합니다.

저는 잘하는 일을 우선시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재능은 정말 소중한 자산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타고난 강점을 외면하고 ‘잘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면, 자신의 세계가 쪼그라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행복에는 성취의 피드백루프가 큰 역할을 합니다. 뭔가를 해냈다는 느낌 혹은 증표가 있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그 기분은 다음에도 또 노력할 동기부여로 작동하지요. 그렇게 노력과 성취를 반복하다 보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 자신감은 행복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신감은 여유의 원천이며, 인간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삶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한 영역에서 전문가가 되어본 사람은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볼 마음을 먹게 됩니다. 자존감도 높아져 있기에 부족한 점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 인정은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발전의 계기로 이어지고요.

 

하이데거는 인간은 어떤 성질을 가진 대상으로 정의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보다 인간은, 말하자면 주변과 나 자신을 신경 쓰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음식을 마련하고, 집을 청소하고, 사람과의 갈등을 해결하듯이, 실용적인 자세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존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우리가 어떤 의미를 파악하며 살아가는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세계의 의미는 ‘할 수 있음’의 감각이 강화되는 만큼 확장되고, 약해지는 만큼 쪼그라듭니다.

 

소위 ‘경험 많은 삶’이 적은 삶보다 과연 더 멋진 인생일까요?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기준이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어떤 관점에선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인지하는 건 가장 깊은 수준의 자기의식입니다. 이 가변성을 망각할 때 삶은 폭력적인 전체주의로 변모합니다.

 

지금의 기준이 나중에도 유효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은 순간이 아닌 전체적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졌는지 알려고 하기보다, 확실한 앎 없이도 삶을 만끽하고 상황을 헤쳐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의 기준에 뿌리 내리는 것보다 두둥실 떠다니며 삶을 이끌어나가는 자세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부터 도망가는 분석이 아닌, 실체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는 분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말로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욕심나는 일일수록 잘 보이려는 마음에 지나치게 긴장해 어김없이 경직됐고 일은 어그러졌습니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저는 ‘마음을 가볍게 먹는 것’의 중요성을 많이 느꼈습니다.

잘하려고 부담을 가지면 내 다짐에 짓눌려 내면의 공간이 좁아집니다. 동시에 여유가 없어지죠. 나를 둘러싼 상황이 전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이고, 대상이 실제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집니다. 위협에 하나하나 대응하려고 분투하느라 에너지가 남아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고,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그간 겪어온 실패의 핵심 원인입니다.

가벼운 마음을 가지면 많은 게 달라집니다. 마주한 일에 ‘꼭 성공해야 한다’거나 ‘최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게 됩니다. 그럼 훨씬 자연스럽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주변 대상을 위협적인 것,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 마주하고 있는 것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친구처럼 대하며, 평소 하던 대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실패한다고 해서 인생이 망하는 건 아니다. 이 또한 지나간다. 기회는 또 온다.’ 이러한 자세가 용기와 여유의 원천이 됩니다.

 

인생을 연극처럼

내게 주어진 상황이 두렵고 부담스러울 때, 삶이 한 편의 연극 같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영원히 지속될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지금 이 무대를 채우다가 시간이 되면 사라질 존재라고 보는 거죠. 우리 행동은 정해진 시간 동안만 유효하고 머지않아 흙먼지와 파동이 되어 흩어질 거라고요. 점점 증가하는 엔트로피 속에서, 한 운명의 행적은 완전히 망각될 거라고요. 그러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겁니다. 가벼운 마음이 되면 정신에 여유 공간이 생기고, 상황은 덜 위협적으로 보이게 될 겁니다.

 

카뮈는 인간 존재를 훨씬 더 가볍게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고유한 결정의 책임을 떠안은 존재라기 보다, 그 어떤 최종적 책임 없이도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봤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만 살 수는 있고, 행위를 할 이유 따윈 없지만 행위 할 수 있는 그런 애매모호한 운명에 처한 게 인간이라는 거죠.

그래서 소설가이기도 했던 카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나 의미를 주는 소설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칫 사람들이 소설에서 영원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걸 삶의 희망으로 받아들일까 우려했거든요. 사람들이 희망에 의존하고, 그걸 계속 붙잡으려 전전긍긍하다 보면 무거운 마음을 갖게 될테니까요.

그는 삶에 희망을 주는 의미를 발견하기 보다, 그런 게 없이도 그저 살아갈 수 있는 가벼운 마음을 갖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그런 희망 없는 삶의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희망 없이도 살아지는 삶을요.

 

현대사회에서 두려움은 주로 너무 많은 희망 때문에 생겨납니다.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지금, 일상에서 생명의 위협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는 비교적 적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희망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런 현대적 삶의 조건에서 카뮈가 말하는 희망 없는 삶의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삶을 하나의 연극으로 바라본다면 희망과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펼친 행위가 모두 공허 속으로 사라질 테지만 그래도 연기를 하는 연극배우처럼, 지금의 삶이 언젠가 사라져버릴 테지만 그저 살아가는 것이라고 여기고 이를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은 줄어들 겁니다.

사실 저는 희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생을 잘 살고 싶다는 욕망과 희망 속에 살고 있으며,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을 품고 삽니다. 이런 마음이 커질 때마다, 희망에 부풀어 무거운 마음을 먹을 때마다 카뮈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잊힐 헛된 시도를 하는 거라고요.

 

그때 루드비크(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의 주인공)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복수하려던 대상은 과거에, 자신의 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며, 현재 시점에서 진정한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요. 지난 15년 간 자신은 엉뚱한 증오심에 휩싸여 쓸데없이 침울하게 살아왔다는 것을요. 비로소 그는 자신의 운명에 관해 묘한 따스함을 느낍니다. 현재를 옭아맸던 과거의 사슬이 스르르 풀려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현재를 살 수 있다고, 과거에 겪었던 억울함과 수모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규정짓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과거는 결코 현재를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형성된 조건 속에서 살아가긴 해도, 그것으로 지금 나의 생각과 선택이 정해지는 건 아닙니다.

과거를 완전히 묻어버리자는 말은 아닙니다. 과거를 필요 이상으로 실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거기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과거의 아픈 사건을 머릿속에서 매일 재구성하고, 그것으로 오늘의 삶을 덮어버리면, 오늘은 새로운 날이 아닌 어제의 반복이 됩니다. 매일매일 잊히지 않는 과거의 환상과 싸우면 현재는 두려운 곳이 됩니다. 우리는 그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얼마든지 우리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전락을 새 출발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즉 기존 체계에 흡수돼 살던 과거에서 벗어나,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과거와는 다른,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셀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갈림길에 서지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과거를 확대 재생산해서 미래로 짊어지고 갈지, 아니면 과거를 과거대로 존중하고 그것이 속해 있어야 할 자리에 놔둔 채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갈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당신에게 무슨 아픔을 주었든, 주변 사람이 당신을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든, 그 과거는 지금의 당신과 무관합니다. 그 과거가 당신 존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을지언정, 당신의 정체성 전체를 확정짓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잡아먹히도록 자신을 놔두지 마세요. 과거에 맞설 수 있는, 자신이 마주한 지금의 힘을 느끼세요. 그게 곧 자신감의 발판이 될 겁니다.

 

카프카가 그레고르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건, 인간에게는 저마다 모두가 혐오하고 비난하고 거부할 만한 면모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롭습니다. 친구를 만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면 외로움을 ‘달랠’ 수는 있겠지만, 외로움은 단지 일시적 감정이 아닙니다. 뿌리 깊은 외로움은 없앨 수 없습니다. 그건 나와 세계 사이에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차이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지구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예측 불가능하고 다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주변 사람들과 여러 ‘심각한’ 차이점을 가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차이점이 때로는 소통을 가로막고, 심리적 장벽을 만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고립을 겪습니다. 인간에게 외로움은 숙명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인 외로움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외로움의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건 다른 사람과 합일에 이르기를 욕망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합일의 경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기대하곤 합니다. 나와 ‘정말로’ 죽이 잘 맞는 사람,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죠.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내 존재 전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 사이에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기준을 낮춰야 합니다. 내 안에는 절대로 남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타인과 관계할 때는 적당한 소통, 적당한 이해, 적당한 합일감에 만족해야 합니다. 내 모든 걸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괜찮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타인과의 사이에 놓인 이해의 장벽을 인정하고, 제한된 공통분모로 만족하며 함께 살아가는 게 가장 덜 외로울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 이상으로 외롭지 않은 상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외로움은 내가 그것에 끌려 다닐 때 고통이 되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한다면 오히려 마음의 치유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레고르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나를 지치게 하는 사람들, 성장을 향해 나아갈 틈을 주지 않는 사람들에 둘러싸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외로움을 견디기 두려워 그들과의 결별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관계는 그저 내 에너지를 갉아 먹기만 할 뿐입니다.

때로는 인간관계를 과감히 털어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사람과 거리를 두면 그만큼 자신만의 공간이 생깁니다. 생각할 시간도 주어지고, 내 감정을 곱씹을 여유도 생기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런 틈을 잘 활용해,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나로서 살기 위해선 다른 존재와 나를 구별짓고 내 입장을 우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주류’, ‘다수’ 혹은 ‘강자’인 남들이 눈치를 줄 때, 그들만 주인공이 아니며 모든 인간은 각자가 주인공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합니다. 인간이 실존한다는 건 자기를 의식하면서 자기 관점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가졌든,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 인간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주체입니다. 나에게는 오직 나만 주체이고, 다른 사람은 모두 객체입니다. 타인은 항상 내 삶에서 조연입니다.

 

가깝던 사람과 멀어지는 건 생각보다 그리 고통스러운 경험은 아닙니다. 나를 위해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많아지고, 정말로 내가 원하는 걸 찾아 나설 여유도 생깁니다. 이런 여유는 그동안 잃어가던 주체성을 회복하는 에너지원이 됩니다.

 

만약 당신이 그동안 타인과 멀어지는 걸 지나치게 두려워했다면, 그건 오랫동안 타자화를 겪으며 주인공으로서 살아가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공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타인에게 의존해 조연으로라도 의미를 부여받는 데 익숙해진 것입니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주체로 살아가는 감각을 조금씩 키워가야 합니다. 내가 타인을 타자화하고, 내 기준을 타인에게 요구해야 합니다. 눈치가 보일 때는 나도 남에게 눈치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세요. 이런 사고의 훈련을 통해 주체성을 회복하다 보면, 결국에는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게 별로 두렵지 않을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야 비로소 더 건강한 인간관계가 가능해집니다.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타자화하는 게 아니라, 서로 타자화하는 관계.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면서, 타인 또한 그의 삶의 주인공으로 존중하는 관계. 이런 관계를 우리는 충분히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한 사건을 기억에서 점차 회상으로 전환해가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숙한 인간은 순간의 좁은 시야에 매몰되지 않고, 순간의 의미를 인생 전체와의 연결 속에서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회상 능력이 있는 사람은 과거를 멀리 놓고 전체적으로 바라봅니다. 여러 사건을 하나의 줄기로 연결하면서, 단독적으로 봤을 때는 알 수 없던 의미를 발견해내죠.

 

회상은 전혀 다른 차원의 창조성을 요구합니다. 회상은 과거를 뛰어넘는 커다란 맥락과 관계하면서 과거에 대한 나의 의식을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회상 능력을 키우려면 일단 과거에 대한 이런 제한적 이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의미를 만들어나간다는 걸 이해하는 게 중요하죠. 회상 능력이 발달한 사람은 과거 이야기를 하더라도 현재나 미래의 관점에서 말할 줄 압니다. 매번 똑같은 관점에서 과거를 논하는 게 아니라, 같은 사건도 현재의 상황 혹은 그간의 다른 경험과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냅니다.

 

큰 맥락 속에서 개별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훈련

 

소크라테스는 즐거움이 무엇보다도 정신의 조화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즐거움은 단지 물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느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얼마나 지혜롭고 안정적으로 물질세계를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의로운 철인 통치자는 거시적인 행복과 국소적인 쾌락 사이에서 조화를 찾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인 이타성이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가하는 많은 사람은 자신 안의 이타성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윤 추구가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타성은 없는 존재 혹은 부자연스러운 존재로 취급되곤 합니다. 이기성을 우대하는 문화의 영향아래 내리는 가치 판단은 진정으로 나의 입장에서 내리는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남들의 판단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죠.

 

이기성만큼이나 이타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대체로 남들의 판단 말고, 진짜 내 판단이 뭔지 잘 생각해보기를 요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을 잘 들여다봐야 하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나의 진짜 뿌리 깊은 본성은 어떤지,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뭘 느끼는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선행되지 않고 그냥 무작정 ‘나는 이게 좋다고 생각해’라고 판단을 내려버리는 건 무책임합니다. 그런 판단은 깊이가 얕을 뿐 아니라 나를 온전히 반영하지도 않죠.

 

인간 정신에는 다양한 힘이 공존합니다. 남을 찍어 누르고 내 이득을 챙기고자 하는 힘,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내주고자 하는 힘, 쾌락을 좇는 힘, 평안을 찾는 힘 등등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인간의 정신적 삶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그중 하나를 과대평가하는 바람에 시야가 좁아집니다. 지금 내 안에 있는 하나의 욕망, 감정 혹은 생각이 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느낍니다. 내게는 오직 한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것처럼 판단하죠. 이는 내 안의 다양한 힘을 정작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이고, 자신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겁니다.

정신의 균형을 강조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내면의 여러 면모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지 말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이 선행될 때, 우리는 비로소 즐거운 삶이 뭔지, 내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착하게 살아야 할 ‘절대적인 객관적 근거’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남을 적당히 도우며 살아가는 게 행복하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충분하죠. 그게 나 자신을 좀 더 잘 아는 삶일테니까요.

우리 안에는 분명 이타성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을 때만 우리는 이기심에 잡아먹히지 않고 정신적 균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의식을 통해 자기 자신과 거기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분열을 만듭니다. 이전의 나, 지금의 나, 내일의 나, 모레의 나...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 자기의식을 통해 ‘새로운 나’를 만들어냅니다. 이 초월 속에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어져 있는 보편적 원리에 의존해 사랑의 의미를 규정할 게 아니라, 내 사랑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걸 의식해야 합니다.

 

특정 규정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라

 

때로는 ‘앎’보다 ‘느낌’이 더 중요합니다. 언어적으로 사랑을 정의하기보다 내 느낌에 주의를 기울일 때, 사랑의 의미를 쉽게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인지 아닌지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더 가까이에, 즉 내 안에 있을 겁니다.

 

내가 상대방과의 유일무이한 관계에서 무엇을 특수하게 느끼고 있는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래야 나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내 존재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면, 정말로 순수하게 ‘나의 것’이라고 부를 만한 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내가 어떤 목표를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목표는 사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의해 구성되었습니다. 내가 뭔가를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욕망 자체는 타인의 욕망에 영향을 받습니다. 순수하게 나의 결정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매 순간 남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죠.

 

다른 사람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으며, 내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자들을 통해 이뤄진다는 걸 인정하면, 주기와 받기를 계산하느라 골머리 앓는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는 것 같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지요. 손해의 의미가 내 자아의 경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아니까요.

 

사랑을 줄 거냐 받을 거냐, 이 양자택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유연한 정신을 갖고 자유롭게 살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죠. 내 존재의 경계를 명확히 정하고 그 경계 안에 얼마나 많은 이익이 들어왔나 시시때때로 헤아리는 게 과연 행복할까요? 그건 조금 더 자유롭게 생각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세상을 느끼며 살아갈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겁니다.

상대방과 나의 경계를 조금 더 관대하고 여유롭게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자신의 존재에도 더 관대해질 겁니다. 또한 나를 비롯한 세상의 대상들을 더 따뜻하고 정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게 될 겁니다.

 

자기중심성은 자칫 프로그램이라는 환상의 경계를 넘어 현실 연애에 침투하기도 합니다. ‘내 애인은 TV에 나온 사람보다 못생겼네’, ‘TV에 나온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자상하게 챙겨주던데, 내 애인은 아무것도 안 하네’ 하는 식으로 환상을 투영해 상대방을 규정하게 됩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된 보편성이 상대방의 고유성을 가려버리는 거죠.

이렇게 되면 상대방을 ‘한 명의 대체 불가능한 사람’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누구보다는 낫고 누구보다는 못한 사람’, ‘더 나은 사람이 온다면 대체될 수 있는 사람’으로 대하게 됩니다.

 

용서는 내가 나의 분노와 증오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상대를 죄인 취급하며 배척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 마음이 쉴 틈을 마련해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 김혜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는 “나 자신이 생활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는 것”, “내 현재를 갖는 것”이라고요.

 

우리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용서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죄와 분노, 증오를 과거에 남겨두고, 다른 마음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무엇으로 만들 것인지는 내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분노와 증오를 품을지,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을 품을지 말입니다. 이 선택에 따라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시간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용서가 가진 힘으로 이미 채워진 집착을 비워내고 다른 것을 채울 자유 공간을 만들 수 있다.

 

타인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없다면 꿈을 꿀 수 없을뿐더러 꿈을 실현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인간 사회에 어쩔 수 없는 일 같은 건 없습니다.

 

창의성의 핵심은 얼마나 대단한 걸 생각해내느냐가 아니라, 하던 대로 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특정 상황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생각이나 행동 방식을 의심하고,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새로움은 빈틈에서 나옵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과정을 블록 쌓기에 비유해보죠. 방 안에 블록에 가득해서 빈 공간이 없다면 블록을 새롭게 배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블록끼리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렇지 않지요. 곳곳에 빈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유 공간을 통해 블록을 움직이고, 새로운 시도를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

 

부산한 정신으로 흘낏 봐서는 의미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의를 기울여서 보고 해석할 때 비로소 풍부한 의미가 생겨나지요.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적극적인 여행자가 되어 주의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인생 경험’을 얻게 됩니다.

 

저는 한국 사회의 일부, 남성이라는 범주의 한 부분, 가족의 일원이지만, 이 전체성이 저를 완전히 규정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그 어떤 전체에도 완전히 포괄되지 않는 고유한 삶을 매 순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전체성은 분명 제 삶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전체가 없다면 저는 결코 지금의 저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존재는 부분과 전체 사이의 불가분한 관계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 양극 중 하나만 주목해서는 결코 존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감정이나 생각을 독자적 대상처럼 대하다 보니 오해가 생겨납니다. 사실 모든 감정과 생각은 내 삶 전체와 주변 공동체, 문화, 사회라는 배경 속에서 순간순간 부각되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과의 연결성을 보지 못하면 나의 존재를 공정하게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감정에 휘둘리거나 독단적인 생각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으면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립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돈보다 다른 게 훨씬 더 중요해집니다. 바로 자신의 실존을 떠안을 수 있는 능력이죠. 어떤 일이 닥치든, 무엇을 얻고 잃든, 그런 일들로 스스로를 판가름하지 않고 그저 내 존재를 감당해내는 겁니다. 그러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하면 삶은 송두리째 쓸려갑니다. 평소 남들이 선망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어도 말이죠.

 

우리는 스스로 성공을 정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그 어떤 것도 최종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운명이 장난을 치는 순간, 그 모든 기준은 소용이 없어집니다.

 

부조리를 떠안고 살아간다는 건 성공과 실패에 초연한 걸 뜻합니다. 남들이 실패라고 부르는 상황에서도 좌절할 최종적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며, 남들이 성공이라고 칭송하는 상황에서도 우쭐댈 최종적 이유가 없다는 걸 아는 겁니다.

 

부조리를 떠안고 살아가는 건 절대적인 허무와 덧없음을 체험하면서도 삶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것이지요.

 

부조리를 떠안고 살아가는 건 긍정과 부정의 최종적 근거 자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겁니다.

 

카뮈는 자신의 그 어떤 믿음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기를 요구합니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삶은 바닥이 없는 밑을 향해 끝없이 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 낙하의 중간 중간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어떤 단단한 바닥도 없어서 영원히 어둠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정답도 발견할 수 없는 채로 끝없이 헤맬 뿐입니다.

과연 이 떨어짐, 헤맴 자체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 밝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 거라는, 나를 구해줄 거라는 희망 없이 사는 게 가능할까요?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어둠이야말로 내가 나아갈 운명의 길이라는 걸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는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볼 문제입니다.

 

왜 지금의 내가 있는 걸까? 왜 나는 지금 이런 정신상태로 존재하는 걸까?

 

저는 균형 있게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아가 세상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물질적 체계나 경제적 구조를 바탕으로 개인을 설명하는 압력이 아무리 강해져도, 내 안에는 오직 자신을 직접 들여다봄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나를 깊이 들여다볼 때,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건 고독, 불안, 불확실성입니다. 이걸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커다란 부담이자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다른 누군가가 제공해주는 확실성의 요새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이런 도피의 상태에서 빠져나와 자기 존재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비로소 자유와 창조의 가능성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나는 하나의 빈 공간으로 존재합니다. 이걸 허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자유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사라지고 나서도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지 없을지는 엄밀히 말해서 모릅니다. 어쩌면 타인을 포함한 이 세계 전체는 모두 내 환상에 불과한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가 모든 환상의 출발점이듯, 다른 사람들도 각자 하나의 고유한 출발점일 수 있습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듯, 다른 존재자들도 자신으로서 각자 다르게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죠. 이렇게 각 대상을 그 자신 이외의 다른 대상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고유의 출발점으로 보는 사고가 다름을 인식하고 존중하는 태도의 전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세계를 지탱하는 중심점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굳이 세계의 한 사상에 의지해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항상 여러분 고유의 것이 존재합니다. 그걸 파헤치는 건 절대적으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그 과정 속 작은 하나의 점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