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정아은)
글쓰기는 철저히 주관의 산물이며, 글쓰기에 관한 이론 또한 결국엔 주관의 산물일 수밖에 없으리라.
어차피 제대로 쓰지도 못할 게 뻔한데 이걸 계속 써서 뭐 해? 이렇게 엉터리로 쓸 바엔 차라리 쓰지 말자.
이런 생각을 반복하다가, 끝내는 글쓰기를 중단하게 된다. 그리고 다짐한다. 다음에. 충분히 준비하고 다시 써야지. 생각을 가다듬은 뒤에 제대로 써야지. 이렇게 중단된 글쓰기가 훗날 다시 이어질 확률은 0.0000000000000001퍼센트 정도 된다.
쓰고 있는 글이 ‘잘 쓴 글’이 아닐 거라는 의심과 회의를 극복하고 끝까지 계속 썼다면 그 글은 생명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그만두어버린 글은 다시 소생하기 힘들다. 내용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개의치 않고 생각했던 화두를 끝까지 밀고 나가 완성한 글은 ‘초고’라고 불린다. 이 초고를 손에 쥐는 것과 중간에 포기해버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낳는다.
왜 그럴까. 글쓰기는 생각한 뒤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와 비슷한 확률로, 혹은 그보다 더 큰 확률로, 글쓰기가 생각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한 뒤에 쓰지만, 또한 쓰기 때문에 생각한다. 초고를 완성하는 것은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이 떠오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초고로 인해 일었던 생각들은 초고를 완성한 뒤 다시 고쳐 쓰는 퇴고의 과정에서 글에 반영된다. 첫 번째 퇴고를 마치면, 그때부터 글쓴이는 서서히 감을 잡게 된다. 자신이 원래 쓰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감을. 같은 일이 두 번째 세 번째 퇴고에서도 일어나고, 글을 쓰는 이는 무의식의 영역에 잠들어 있던 자신의 다양한 사유를 끄집어내 글에 흩뿌려놓게 된다. ‘나도 몰랐던 나 자신과의 만남’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글쓴이는 점점 희열을 느끼게 된다.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과한 욕심을 낳는다. 어떤 욕심인가? 여러 번의 퇴고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을 처음부터 통째로 거머쥐겠다는 불가능한 욕심이다. 세상에 단번에 완성도 높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죽하면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는 말이 있겠는가. 초고는 가건물이다. 세워놓은 뒤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다가, 결국 무너뜨리고 새로 짓기 위해 건설하는, 일종의 제물 혹은 희생양 같은 글더미다.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다 사라질 어설픈 가건물을 건너뛰고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의 건물을 만들겠다는 불가능한 소망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글을 쓰고 싶다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잘 쓰지 않겠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끝까지 쓰겠다.
나는 천근의 무게를 지닌 손을 가까스로 들어올려 자판에 올려놓으며 부르짖는다. 잘 쓰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잘 쓰겠는가? 나는 ‘그냥’ 쓸 것이다. 지금 쓰는 것이 쓰레기라는 거 안다. 나는 절대 잘 쓰지 않겠다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이렇게 다짐한다.
나는 그저 많이 쓰겠다.
글쓰기는 양이다!
그렇다. 글쓰기를 잘하는 유일하고 효과적이고 치명적인 방법은 단 하나, 많이 쓰는 것이다. 그리고 많이 쓰기 위해서는, 잘 쓰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초고를 쓰고, 고쳐 쓰고, 또다시 고쳐 쓰고, 그걸 또다시 고쳐 쓰는 과정에서 몇 개의 문장을 통째로 빼거나 덧붙이고......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그 과정에서 잘 쓰겠다는 욕심이 홀라당 잊히고 무한정 다시 쓰기의 파도에 휩쓸려 들어가 화면 속 문장들과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이 진공 상태에 들어간 순간, 비로소 나온다. 무엇이? ‘잘 쓴 글’이. 잘 쓰겠다는 마음이 형체도 없이 사라진 순간에야 비로소 그 개념을 반영한 산출물이 나오는 것이다.
글쓰기는 혁명이다. 서서히 진행되는 혁명. 내 내면의 지층을 이루는 요소들을 들여다보고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끝내는 지층 위에 세워진 구조물 전체의 성격을 바꾸어나가는 혁명.
바깥에 나가야 한다. 나가서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낯선 곳에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환기가 되지 않는 곳의 공기는 탁해지는 법, 내 삶에 바람이 들어오도록 해야 했다. 혼자 틀어박혀 읽고 쓰기만 하는 일상에 균열을 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쓰는 글에도 현실감과 생동감이 들어찰 것이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요청에 전부 응하자고 결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들어오는 제안은 다 받아들이자. 겁나고, 못할 것 같고, 혹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고, 그런 생각은 모두 사치다. 쓰는 삶을 유지하면서 ① 생계를 유지하고, ② 외부와 접속해 있으면서 계속 자신을 업데이트해가기 위해서는 들어오는 제안을 무릎 꿇고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진정한 배움은 실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지식을 전수받기 위해 작정하고 앉아 있었던 학창시절이나 소설 공모전에 당선되기 위해 앉아서 하루의 대부분을 각 잡고 글을 쓰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분량과 강도의 배움이, 발전이, 작가가 되어 맡은 여러 생경한 역할들을 소화하던 때에 일어났다.
글쓰기로 국한해서 본다면, 나의 글쓰기 역량은 공모전에 당선돼 작가로 불리게 된 다음에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각종 기고 요청에 응하면서 수없이 많은 글을 썼고, 그 과정에서 강제로 역량이 부풀어 올랐다. 칼럼, 중편소설, 논픽션, 에세이 등, 내가 쓸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에 발을 들이고, 그 장르의 책을 출판하기까지 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처럼, 글쓰기 또한 쌓일수록 더 많은 글쓰기를 낳는다. 내가 내보낸 글이 쌓일수록 청탁이 더 들어오고, 그 청탁에 맞추어 글을 쓸수록 그에서 파생된 글쓰기 경험이 늘어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알게 된다. 내가 어떤 궤도에 올라 있음을.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분량’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내가 엄청나게 많이 썼다는 것. 이건 글쓰기만이 아닌 다른 분야의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뭔가를 10년 동안 주구장창 해대면, 실력이 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게 일어난 일은 그것이었다. 소처럼 웅크리고 앉아 많은 분량의 일을 했고, 어느 분량을 넘어서던 순간부터 일이 굴러가는 원리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도약’이라 불릴 만한 찰나를 맞아들였던 것이리라. 물론 이를 내가 엄청나게 뛰어난 결과물을 내는 작가가 되었다고 자화자찬하는 것이라 해석하지는 말아주시기 바란다. 내가 말한 도약이란, 내가 무엇을 쓰고 싶어하는지 알고, 그것을 쓰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으며, 어떻게든 써내게 만드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다.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장악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히 ‘도약’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었다.
이렇듯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는 합평 자리에 임하는 원고 제출자에게, 마음의 상처는 예정되어 있다. 관건은 그 상처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혹은 그 상처를 어떻게 내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을 것인가이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배우려 할 때는 그저 내가 배우려 하는 사람의 특수한 인생 역사를 들여다보면 된다. 그에 기반해 흘러나온 그 사람만의 정수를 알아보고 그것을 쏙쏙 빼가면 된다. 앎을 전수해주는 사람들 간의 차이는 그들이 걸어온 인생 역사의 차이이다. 배우는 이는 그저 그 ‘다름’의 조각들을 자신의 인생 역사에 옮겨와 제 고유의 것으로 체화하면 된다.
평소 내가 머리에 집어넣었던 것들이 결국 손끝으로 흘러나와 글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평소 제 안에 집어넣었던 것들을 밖으로 꺼내놓게 된다. 머리에 많이 넣었던 것들이 결국 일정한 화학작용을 거쳐 자신만의 버전으로 나오고, 그것이 창작품이라 불린다. 그런데 나는 집어넣은 적도 없으면서 ‘잘나가보겠다고’ 단편소설을 억지로 뽑아내려 했다.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데 뭔가를 뽑아내려 했으니 그게 되었겠는가.
글을 쓰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무엇을 쓰게 될까? 간단하다. 자신이 평소 많이 보아왔던 것, 접해왔던 것, 그것을 쓰게 된다. 조금 더 응용해보자. 무언가가 쓰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분야의 창작품들을 많이 보라. 시간을 들여 많은 양을 밀어 넣다보면 어느 날 몸 바깥으로 자신만의 비전이 비어져 나오는 걸 목도할 것이다. 자, 이제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과 비교해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으며 해당 책을 조명하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 본시 지식이란 비교와 대조를 통해 새로 들어온 정보에 자리를 찾아주는 과정이다. 이러한 서평 작업을 통해 새로 습득한 지식을 정리해 자신의 내면에 나만의 것으로 정착시킬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른 내 인생의 장면들을 끼워 넣는 것도 흡인력 있는 글을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한 권의 책을 매개로 글을 쓰면서 내 인생의 한 단면을 살짝 보여주고, 그에 대한 현재의 소고를 들려주면, ‘나’라는 사람이 독자에게 한결 친근하게 다가가는 현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두려움에 시달리던 어느 날, 칼럼 초고를 ‘날림’으로 쓰자고 결심했다.
100퍼센트 버릴 글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쓴다. 10분 내에.
100개의 알을 낳으면 100번째 나오는 알이 쓸 만할 것이리라 가정하고 처음 낳는 알에는 약간의 에너지만 집어넣기로 했다. 설령 나중에 다 버린다 하더라도 어쨌든 존재하는 초고가 있으니 압박감이 덜할 것이었다.
글쟁이는 사람에 대해 언제나 관심을 갖고 탐구해야 한다. 사람이라는 깊고 복잡한 존재를 진심으로 대하고 사랑해야 한다.
결국 에세이는 ‘거리 두기’의 예술이라는 것. 내게 일어난 일을 기술하되, 그 일을 어느 정도까지 드러낼지, 어떤 톤으로 드러낼지를 저울질하는 기예라는 것. 내 이야기를 공개하되 있었던 일 그대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맞게 정제된 형태로 기술해야 한다는 것. 즉 주제에 봉사하는 선 안에서만 개인사를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제 우리 인류는 천문학적인 돈을 놓고 벌이는 금융가의 쟁탈전이나 핵무기를 놓고 벌이는 소수 열강의 기싸움이 아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내 앞의 밥 한 공기, 내 곁에 살아 숨 쉬는 한 명의 사람, 볕 좋은 베란다에 가지런히 널린 빨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살아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작은 사물, 작은 관계가 ‘인간’이라는 우주를 이루는 가장 치명적인 입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베스트셀러 순위에 에세이가 자주 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 독자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이야기를 보고 싶어한다. 이런 독자에게 공감받는 에세이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 쓰면 된다. 진솔하게, 구체적으로,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쓰면 된다. 내가 부여받은 하루하루에 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진솔하게, 구체적으로, 써내려가면 된다. 솔직함과 디테일, 이 두 가지가 핵심이다.
우리 시대에 진정으로 ‘있어 보이는’ 서사는 ‘없는 것을 없다고 담백하게 드러내는’ 서사이다. 인간의 못남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서사, 가까이 있는 사람, 밥 한 공기, 청소하는 행위, 빨래하는 행위에 정성을 들이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서사이다. 인간이 가진 한계와 애정에 대한 끝없는 갈구를 인정하고 담담하게 조명하는 서사이다.
그동안 주로 썼던 것과 다른 부위의 뇌를 쓰는 동안, ‘나’라는 인물의 우주가 번쩍이며 확장되어가는 광경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논픽션, 누구나 쓸 수 있다.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덤벼들자. 누구나 작가가 되는 시대라고 하지만, 일부 장르는 나와야 할 책이 채 10퍼센트도 나오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다. 논픽션은 이곳저곳 뚫린 공백이 많은 블루오션 같은 분야다. 마음속에 이글거리는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언어로 코딩해 전달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세상에 자료는 널려 있다. 손 뻗으면 도와줄 사람도 지천에 포진해 있다.
우리는 교과서와 책과 각종 강연을 통해 들었던 지혜의 샘물 같은 말보다, 누군가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보다는 누군가의 ‘삶’을 통해 배운다.
타인의 삶을 엿보고 내 삶의 밑거름으로 삼는 데 소설은 가장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이다. 작은 소설책 한 권을 손에 쥔다면, 우리는 어디서든 타인의 삶에 빠져들 수 있다. 비소설이 우리에게 ‘말’로써 방향성을 제시해준다면, 소설은 ‘삶’으로써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인간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직설적인 교훈을 꽂아주는 것이 비소설이라면, ‘흥부와 놀부가 있었는데 흥부는 제비를 치료해준 뒤 부자가 되었고 놀부는 억지로 제비 다리를 부러뜨렸다가 어느날......’이라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소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전자보다는 후자에 마음의 감화를 받는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조한 엑기스형 한마디보다 ‘착한 삶’이라는 개념을 형제인 두 인물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이야기가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개념을 둘러싼 맥락이 소거된 짧은 말 몇 마디보다, 표정과 말투와 생김새와 습관 등 인간으로서 가진 체취가 생생하게 체감되는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가 훨씬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보여주기와 설명하기는 소설가가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 하는 숙제다. 어느 정도의 비율을 택하는 게 좋은지, 어느 부분에서 보여주기(혹은 설명하기)를 택하는 게 알맞은 선택이었는지는, 그 소설의 생산자인 소설가도, 독자도,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난제이다. 다만 이야기 전체로서 소설이 매력적으로 다가갔다면 그 소설은 성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표현 기법을 어떤 비율로 동원했든 독자를 잡아끄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산출해내는 것, 진짜 현실에 존재하는 듯한 생생한 인물을 주조해내는 것, 소설 쓰기의 핵심은 그에 있을 것이다.
소설의 구도를 잡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미리 설계도를 그리는 것이다. 우선 어느 연령대의 어떤 인물이 나와서 어떤 사건을 겪으며 어떤 변화를 겪어나간다는 커다란 이야기의 뼈대를 잡는다. 다음에는 등장인물을 스케치한다. 생김새, 출생 연도, 성별, 직업, 살아온 이력, 성격적 특성, 장점과 약점, 주된 콤플렉스, 주된 욕망 등 사람을 이루는 외면적, 내면적 요소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을 스케치한다. 필요하면 관련 직업군 종사자에 대한 인터뷰를 병행한다. 인물들 간 관계와 결정적인 내면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도 명시하면서 기술해나간다. 다음에는 한 챕터 한 챕터 장면을 설정한다. 각 챕터의 계절, 날씨, 시간대, 장소,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정한다. 진행되는 사건을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구성해 써넣는다. 챕터가 전체 스토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전 챕터와 다음 챕터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지에 대한 언급도 섞어 넣는다.
이 작업을 해나가다보면 대사나 구체적인 사건의 정황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때는 그대로 받아적으면 된다. 이 단계에서 본문을 쓰듯 자세하게 써나가가게 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앞뒤 생각하지 말고 푹 빠져들어 그냥 쓰면 된다. 그렇게 나온 내용을 실제로 소설에 쓰느냐 마느냐는 나중에 생각하자. 쏟아져나오는 내용이 많을 경우, 설계도는 매우 길어진다. 이렇게 각 챕터의 개요가 끝나면 그다음부터 본문을 써나간다.
소설의 구도를 잡는 또 하나의 방법은 생각나는 대로 죽 쓰는 것이다. 떠오른 장면 하나를 붙잡고 연이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써나가다보면 처음에 떠오른 장면이 맨 앞 장면일 수도, 클라이맥스일 수도, 마지막 장면일 수도 있다. 직감에 따라 써나가면서 이야기와 등장인물도 즉석에서 만들어낸다.
그것은 내가 나를 해소하는 방식이었다. 소설 쓰기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내 안에 일었던 설렘, 타인과 친밀감을 형성하면서 경험했던 가슴 벅참, 누군가에게 버림받던 때의 고통, 면접시험에 떨어졌을 때의 열패감,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서 배척받았을 때의 절망감, 주위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아프게 곱씹었던 열등감처럼, 살면서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소화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춤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춤을 통해,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해,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자신을 해소했으리라.
내가 품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 중 가장 간절한 이야기,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소설이 되어 나온다.
“그런 얘기를 써야 합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세계, 속속들이 치부를 알고 있는 징글징글한 세계, 잘못 썼다가 호되게 질책을 받을까봐 무서운 세계, 밤이나 낮이나 내 머리를 점령하고 있는 골치 아픈 세계. 그런 세계에 대해 써야 합니다.”
펜대를 손에 든 당신이 할 일은 그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그 인물, 모든 준비를 마친 채 밖으로 나갈 기회만 노리고 있는 그 인물을 끄집어내 언어로 형상화해주는 것이다.
명심할 것은, 세상에 ‘온전한 나만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의 이야기’는 모두 ‘남의 이야기’이다. 무인도에 떨어져 혼자 살지 않는 한, 나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는 남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와 다름없다. 이는 ‘내가 속하지 않은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쓴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쓸 때보다 더 서툴고 역량이 떨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내가 써나가는 이야기에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일부가 담기게 된다. 내가 속하지 않은 낯선 세계를 써나가는 옵션을 택해도, 결국엔 제 주변 사람들을 투영하게 된다는 말이다.
소설을 처음 쓰는 당신이 감응을 주는 ‘진짜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쓰는 편을 택하는 게 최선이라고. 그것은 당신 내부에 당신이 조사해야 할 세계에 대한 방대한 자료가 이미 넘치도록 쌓여 있고, 이입해 들어가야 할 인물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똬리를 틀고 자리 잡은 그 인물은 언제든 세상으로 튀어나가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그러니 당신이 첫 소설을 쓰려 고심하고 있다면 ‘나’의 이야기를 쓰라.
받아들여야 한다.
체념처럼, 한편으로는 선물처럼, 수용을 독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을 눈 위에 올려놓고 내게서 나오는 숨소리를 들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나의 성향, 나의 본질, 그리고 빌어먹을, 나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글쓰기를 통해 잘나갈 수 있든, 그렇지 못하든, 나는 언제나 글을 쓰고 싶어하는 인간이었다. 출판이 되든 되지 않든, 베스트셀러가 되든 되지 않든, 사회적 인정을 받든 못 받든, 나는 감각하고 경험한 모든 것을 부지런히 글로 옮기도록 코딩된 그런 생물이었다.
문학상을 받은 뒤 장편을 세 권 출간하고, 그로 인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나는, 글쓰기는 그런 명예와 속세적 영광을 얻을 때만 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기쁘나 슬프나, 원고에 대한 거절 메일을 받으나 받지 않으나, 마음을 언어로 옮기고 싶어서 환장하는 것, 그게 글쓰기의 본질이었다. 그것은 학창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하이텔과 천리안과 프리챌 동호회 게시판에 틈만 나면 주저리주저리 글을 써서 올렸던 인간에게 내정된 운명이었다. 중간에 문학상 수상이라는 특별 이벤트가 따라붙는 바람에 잠시 ‘영광’을 글쓰기의 필수 동반자라 착각했을 뿐, 시간만 나면 쪽지와 편지를 쓰던 중학생은 성인이 된 지금, 영광이 있건 없건 남은 생을 주구장창 쓰면서 살아가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광이 없어도 쓰는 것이다.
아무도 출간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중요한 건 내가 쓰고 싶다는 거야. 쓰고 싶은 마음을 내가 이겨내지 못하겠다는 거야.
그렇다. 쓰고 싶은 마음 때문에 쓰는 것이다. 그것이 쓰는 사람의 핵심이고, 쓰는 사람의 전부다.
글의 가독성과 재미는 ‘진심’과 직결된다. 작가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할 때, 글에는 가독성과 재미가 따라붙는다.
내게는 개인적 욕망이 1도 없고 오직 이타적 마인드만 있는데, 너는 이타적 마인드가 1도 없이 오직 개인적 욕망에 꽉 차 있다면서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우리네 사피엔스 종은 모두 인정욕구를 타고 태어난다. 신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이러한 욕망을 장착해 세상에 내보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를 존속시키겠다는 욕망은, 폼 나게 잘 존속시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절대로 꺼뜨릴 수 없고 꺼뜨려서도 안 되는 ‘생명체의 핵심 욕망’이다. 내게도 있고 네게도 있는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보다 근사하게 실현시킬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더 세련된 대응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쓰고 싶은 메시지가 생겨날 때, 그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싶다. 내가 하는 말에 설득력이 있도록, 읽은 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시간적, 물질적, 육체적 모든 종류의 노력을 동원해 공들여 문장을 주조해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책, 자료를 폭넓게 섭렵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혹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근거가 불분명한 주장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독자를 가르치려 들고 있지 않은지, 내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일을 소리 높여 같이 하자고 부르짖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체크해야 한다. 인정욕구를 제대로 만족시키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글을 쓰면 그런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왜 돈을 갖고 싶어하는지, 돈을 갖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하는지,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내 말과 행동과 표정과 몸짓이 보인다. 몰입해 글을 써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돈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막강한 자본의 시대를 사는 내가 허우적거리며 헤엄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내 옆에서 함께 허우적거리는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인다. 거대한 그림 속에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보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가 해왔던 일, 하고 있는 일, 앞으로 하게 될 일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가치의 전복이 일어난다. 돈의 자장 안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돈에 완전히 포박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돈의 소유가 행복의 보장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만족감에서 온다. 만족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앎’에서 온다. 내가 무엇을 가질 수 있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사회의 탓이고 무엇이 내 탓인지, 돈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와 같은 인과관계를 알게 되면 막연했던 욕망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바뀐다. 내가 진짜 갖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고 갖지 않아도 별 상관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물질에 대한 욕망도 제어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순간에 굴욕감에 지배당하고, 어떤 순간에 굴욕감을 소화할 수 있는지 파악하면,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분노의 순간을 분류해 각각 다르게 대응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가장 빠르게,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글쓰기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내 자본주의적 욕망을 인정하고 잘 제어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자본주의가 몇십 년 내에 사라질 가능성은 없으니, 아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평생 자본주의와 ‘밀당’을 해야 할 것이다. 돈을 우습게 보지 않되 돈에 점령당하지 않는 것은 금전의 위력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필수적으로 장착해야 할 ‘존재 실력’이다. 결국 이런 실력을 갖춘 이의 삶과 존재 방식을, 동시대인들은 인정하고 선망하게 된다.
남들에게 제대로, 고급스러운 방식으로 인정받겠다는 마음이 곧 이타적 마인드로 연결된다.
내 욕구를 채우는 것이 곧 공동체의 선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
인정욕구와 이타적 마인드는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선명하게 보인다. 거절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던 시절,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원고만이 예외적으로 책이 되었던 이유가. 이유는 ‘아무 생각 없이’ 썼다는 데에 있었다. 책 출간과 그에 따라오는 영광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썼다는 데에. 읽은 책들에 대해 떠오르는 상념을 기억해두겠다는 내적 소망에 자연스럽게 부응했다는 데에.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소망을 ‘진짜’라고 한다면,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에는 ‘진짜’가 담겼던 셈이다.
그 어느 시대 버전보다 정교해지고 강력해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돈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윤 창출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이윤 창출 동기에 완전히 점령당하는 것은 미학적으로 그리 아름답지 않다. 그러니 태어나 한 생을 부여받은 우리들 각자는 자기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시대가 부여해준 이윤 창출 의무와 인간이 대대로 품어온 전통적 욕망(자기 삶을 아름답게 만들려는)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어떻게 살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네가 살아온 역사와 그 역사를 통해 몸에 익힌 삶의 기예에 달렸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의 삶을 모델 삼아 너의 삶을 미학적으로 세련돼 보이게 만들어보도록 하여라. 수줍은 듯 웃으며 그가 내게 보낸 것은 이런 메시지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메시지를 제대로 수신하지 못했다. 만남이 지속되면서, 나는 출판계 대선배인 이 원로의 메시지를 서서히 알아듣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돈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는 고고한 학’이었던 내 자아상은 ‘비자본주의적 동기가 자본주의적 동기보다 눈곱만큼이라도 더 많이 들어 있는 삶을 영위하려고 버둥거리는 유한한 사피엔스 종’으로 바뀌었다.
세상에는 구름처럼 많은 사람이 있고, 그 모든 사람이 내가 쓴 글을 좋아할 수는 없다!
진실은 상대가 뭘 ‘모르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와 ‘다른’ 종류의 책을 읽고 ‘다른’ 가치를 쌓아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대결의 여정이 실은 배움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배움은 자고로 ‘다름’에서 오는 법일지니. 우리가 여행을 다녀오면 인생이 리셋된 것처럼 느끼는 것은 여행지에서 온갖 ‘다름’을 만나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 내가 머무르던 곳과 다른 장소, 내가 해오던 행동과 다른 행동을 하면서 배움을 얻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결국 나와 타인 간의 간극을 인식하고 소화하는 과정이고, 내 글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은 세상에서 나와 가장 ‘다른’ 사람들이다. 글쟁이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엉겁결에 혹평러들을 당겨 끌어안았는데, 그 삶들에게서 의외의 배움을 얻었으니, 혹평러와의 만남이 꼭 마이너스였던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질문을 골라서 해주셨으면 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꼭 내 책의 안위를 위한 마음에서만은 아니었다. 번듯한 명함을 가진 ‘기자’가 공사를 구분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은 나라는 인간이 몇 마디 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한 사람의 인성, 직업인으로서의 태도 혹은 전문 인력으로서의 자질에 해당하는 요소였다. 그 사람이 자기 인생의 여러 과정을 거쳐서 쌓아가야 할 기술이자 태도이지, 감히 일개 인터뷰이에 불과한 내가 몇 마디로 가르쳐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의 성격을 파악하고 인터뷰 도중 넘어가면 안 되는 선을 설정하고 지키는 능력은 결국 기자의 존재 실력과 관련된 문제이다. 공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 복잡하게 서로 얽혀 돌아가는 학연, 지연, 혈연의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의 프로페셔널한 기품을 배양시켜왔는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성찰하고 훈련해 왔는가?
타인의 모습이 결국 내 모습이다. 모든 타인은 내가 미쳐 보지 못하는 지점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스승이다.
바깥에서 보이는 한 사람의 모습은 그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판이하게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