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행복은 능동적(노연경)
꼭 무엇인가 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미 ‘나’ 자체로 다 되었다.
무엇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디서 나왔던 걸까. 무엇이 되려고. 가수? 작가? 사업가? 직급을 올리는 것? 직업을 가지는 것? 어떤 직업을 갖는 것이 진정한 내가 되는 것이었을까? 아니었다. 직업은 언제든 바꿔 입을 수 있는 옷에 불과했다. 낮에는 회사원이다가 저녁엔 작은 홀에서 노래를 부르는 록가수일 수 있다. 뭐가 되었든 회사원인 나도, 노래를 부르는 나도 결국엔 모두 ‘나’인 것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쌍둥이와 비교하면서, 또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얼른 훌륭한 업적을 이뤄내야만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포기해 왔다. 시작부터 완성을 바랐다. 너무 큰 부담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들을 대했다. 그럴 필요 없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면 작가가 되는 것까지가 완성이 아니라 ‘글 쓰는 나’ 자체로 이미 완성이다. 조급해할 필요 없다. 이미 내 안에 다 있다. 가수도, 화가도 무엇이든 이미 다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늘 ‘작가가 될 만큼은 아니지’라는 생각에 글쓰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꼴이라니. 작가가 될 필요가 있었나?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나는 글 쓰는 ‘나’ 자체로 이미 완성인걸. 그걸로 이미 다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계속해서.
그러니 나는 좋아하는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무언가 될 필요 없다. 직업이란 옷을 입고 성공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다시는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자. ‘직업’과 ‘성공’은 남들이 정해 둔 기준에 불과하다.
남들의 기준에 맞추어 서둘러 도착한 곳에 진정한 내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나 자체로 이미 완성이다. 나로서 이미 성공이다. 내 안에 내가 꿈꾸는 일들이 이미 다 있다. 단지 좋아하는 걸 조금씩 끄적여 봄으로써 세상 밖에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좋아하는 일을 매일 조금씩 쌓으면 내가 되고, 그게 나의 일상을 지킨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존재를 ‘나’라고 부를 수 있다. 내 인생도 내 것이라 할 수 있으려면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가득 채워 나가야 한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 남들이 해야 한다고 하는 것들은 결국 밖에서 오는 것들이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좋아하는 것들로 내 일상을 채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이 웃자. 결국 나는 또다시 내가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제일 좋아.”
이 말을 하기까지,
나를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다시 세우기까지
나는 내 20대의 전부를 바쳐야 했다.
집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나
나를 지독한 고독 속으로 내던져서 읽고, 쓰고, 울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나’를 깨우칠 수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응원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을 놓지 말아야 할
‘나’라는 존재가 여기 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평생에 걸쳐 치열하게 나를 찾아가는 단계였다.
나는 나를 찾았는가?
나는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나는 결심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큰 결심과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나를 사랑하는 데에도
그만한 결심과 용기가 필요하다.
나를 최고로 사랑할 용기,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은 내 편이 되어줄 결심.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어요.
내 직업이 곧 나인 건 아니에요.
직업은 직업이고, 나는 나예요.
그래서 내 행복이 직업에 달려있진 않아요.
물론 내가 행복해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싫어하는 일도 반드시 해내야 해요.
모든 일에 100% 좋고 나쁜 건 없어요.
모든 것에 조금씩 나쁜 부분이 있을 거예요.
나쁜 것에도 좋은 부분이 있을 거고요.
중요한 건 내가 가치를 어디다 두느냐예요.
직업은 그 뒤에 오는 거예요.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는 거야.
누구도 대신 못 써주는.
나는 너무 좋아서 카메라를 꺼내 들고 흔들리는 야자수의 잎을 담았다. 네잎클로버가 그려진 노트를 꺼내 당시의 감정도 마구 써내려갔다. 나는 이 노트를 ‘행운수집록’이라 부른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이 행운과도 같은 감정들을 발견해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지은 이름이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네잎클로버와 같은 행운을 모아둔다.
여전한 것들이 여전히 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이 여전히 많다.
나는 가끔 너무 괴로워서 소중한 것들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 때면 바람이 있는 곳으로 간다. 바람은 어디에나 있다. 만질 수는 없지만 반드시 나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 바람을 느끼면 나는 금세 다시 살아있음을 느낀다. 내게 소중한 것들이 항상 내 곁에 있음을 떠올린다.
생명, 시간, 사랑, 영혼.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흘러가는 것들과 함께 나도 흐른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쥘 수도 없지만 함께 흐르는 것들.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함께 흘러가는 소중한 것들. 그러니 일단 살아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들을 그저 느끼려고 애씀으로, 생명과 시간과 사랑과 영혼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매 순간 인식하려 부단히 노력함으로, 형체도 없는 그것들을 간신히 붙잡고 있다.
살아있는 것이란 소중한 것들을 살결로, 온 마음으로 느낀다는 것일까. 의식하지 않아도 매초 작고 가쁜 호흡을 이어가고 있음을, 해가 지면 반드시 밤이 옴을,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고 만질 수 있음을, 그럼에도 영원히 외로울 영혼이 여기 있음을, 살아있음으로 느낄 수 있다. 살아있다는 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청춘을 지나는 우리, 그래서 고통을 지나고 있는 우리. 처음 살아보는 미숙한 생 앞에 명확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 그 순간조차 반짝반짝 빛나고 있음을 깨닫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지나고 있는 순간에도 단 한 가지만은 명확하다. 어떤 고민과 아픔을 가지고 있든, 그래서 자신이 볼품없게 느껴지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성장하고 있는 각자의 청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다.
진흙탕에 발이 빠진 것처럼 한 걸음 내딛는 것도 버겁게 느껴지더라도,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일지라도 치열하게 고민하는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기 위해 발버둥치는 당신은 언제나 반짝인다. 당신도 내 눈엔 그저 아름다운 장면 속의 주인공이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을 그대로 느끼며 으흠- 흐흠- 아-. 아주 멀리서 그렇지만 선명하게 흘러오는 바이올린 소리와 여름 저녁의 선선한 바람을 탔다. 정말 완벽하게 심취해버렸다. 생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완전한 감상이었다. 촉각과 후각과 청각이 완전히 곤두세워지며, 모든 것을 느끼려는 그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비로소 느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온전하게 느끼며.
그때 나는 처음 감상을 했다. 이게 감상이구나. 느끼는 것이구나. 이 순간을. 이 예술을. 이 삶을. 이 예술 같은 삶을. 느끼며 걷는 것, 빠져들어 걷는 것. 느끼며 사는 것. 이 예술을 감상하는 것.
곧 나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집으로 돌아와 여독과 짐을 풀던 이튿날, 날이 화창하길래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갔다. 원래라면 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쉬웠을 것이다. 아니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구나. 나를 치유했던 곳에서 지긋지긋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구나. 지독한 현실로.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바로 뛰쳐나가 감상을 했다. 집 앞이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특별할 게 없는 익숙한 내 집 앞이었는데 나가자마자 정말 좋았다. 그냥 좋았다. 햇볕이 막 나에게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따뜻했다. 아, 햇살이 나를 비추고 있어. 온전하다. 행복하다. 나는 행복할 수 있어. 나는 느낄 수 있어.
그런 느낌. 나는 그때 감상을 했고, 감상을 배웠다.
아름다운 곳에 와서야 행복해지길 바랄 게 아니었다. 더 많이 감상해야겠다. 내가 있는 곳에서 일상을, 삶을, 모든 것을. 그럼으로써 행복해야겠다. 이것이 바로 감상이구나. 감명받는 일이구나. 아름다운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에서, 모든 찰나의 모든 순간이, 모든 삶이 아름답고 눈이 멀 것 같은 것이구나. 정말로 눈부신 것이구나.
행복하려 노력한 적 있던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마시고 보면서 억지로라도 행복하다는 말을 내뱉으려 한 적이.
눈 뜨자마자 ‘오늘은 행복할 거야.’ 다짐했더니 그날은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았다.
모든 날씨에 흥이 겨웠다.
행복해지려고 분투를 했더니 놀라울 정도로 행복해졌다.
행복하다고 믿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려는 에너지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꽉 채워 충전되는 기분. 마법 같은 일이다.
행복은 능동적인 것이라 아주 작은 것이라도 발 벗고 찾아 나서야 하나 보다.
주차장에 놓인 인형,
집 앞에서 발견한 허름한 책방,
마트에서 우연히 읽은 글귀,
아빠가 사다 둔 맥주.
전부를 흡수하려는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감상한다.
별것도 아닌 귀엽고 하찮은 것들이 다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나는 백화점에 전시되어 있는 명품 같은 것들을 갈망한 적이 없다. 그런 것들은 일단 갈망만 한다면 얼마든지 돈을 내고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내 시간과 노력이 환산된 화폐라는 가치를 지불하고서.
그러나 민들레를 만나는 그 순간은 내가 아무리 갈망한들 얻을 수 없다. 그런 건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고, 하찮은 것들을 사랑하는 시선이 없는 한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삶은 감상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유도, 사랑도, 우정도,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감정들도 모두 감상에서 나온다. 사전에서 의미하는 대로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감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 행복이라면, 행복 역시 감상에서 나온다. 느낄 수 없다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느낄 수만 있다면, 나는 이미 다 가진 사람이다.
내가 나의 불행에 대해 쓰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통과 불행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태어남과 함께 필연적으로 고통을 온몸 잔뜩 들이마시고 태어난다. 10개월간 안락한 엄마의 심장 밑에서 자라던 아기는 세상 밖으로 나오며 처음으로 폐를 통해 들어오는 공기를 느낀다.
몸의 안과 밖으로 가득 퍼지는 새로운 세상의 낯선 공기와 눈이 부실 듯한 밝은 비츠 전부에 가까웠던 엄마의 심장박동에서 멀어져 귀에 날카롭게 꽂히는 온갖 시끄러운 소음들까지. 갑자기 세상 밖에 내던져진 새로운 공포와 충격은 공포에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울면서 태어난다.
울면서 태어난 우리. 그때부터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이 미지의 세계에서 낯섦과 방황, 충격과 공포를 수도 없이 마주한다. 어쩌면 매일 우리는 당혹스럽다.
젖을 떼고서 처음 맛보는 음식들이, 엄마의 품을 떠나 혼자 가게 된 유치원, 학교, 직장으로의 첫 발걸음이, 처음으로 혼자 떠난 여행에서, 사랑보다 통증에 가까웠던 첫사랑이, 어젯밤 눈이 마주친 남자의 오묘한 눈빛에서 읽어낸 메시지들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서 느껴진 그리운 냄새가, 심지어는 매일 오고 가는 길에서 발견한 꽃 한 송이가 또는 그곳에서 벌어진 의외의 사건이.
우리에겐 매일 낯섦이 부과된다. 이 낯선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설명할 수도 없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어디에서 생겨나 어디로 온 것인지 알아낼 수조차 없다. 기껏해야 누군가 적어 내린 글에서 작은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 우는 것은 처음으로 폐를 통해 호흡하며 이 세상에 순식간에 적응했다는 건강한 신호, 아기가 이뤄낸 위대한 첫 번째 성장이다.
그처럼 우리는 낯선 세상이 두려워 계속해서 몸부림치고 엉엉 울어버릴 테지만, 그것 또한 우리가 여전히 잘 적응하고 있고 위대한 성장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는 건강한 신호.
그리하여 우리는 살아있는 한 영원히 고통받고, 불안할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처음 살아보는 생이기에. 그러나 인생이 늘 언제나 낯설고 새로운 것이라는 점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감명하고, 경험하고, 향유하고, 감동받을 수 있게 해준다.
나의 불행은 그것을 써 내려감으로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그것은 내가 불행을 이겨낼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이 된다. 불행이든 행복이든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이 써 내려갈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겪어봤을 만한 고통과 불행. 그래서 공감이 가는 너와 나의 이야기.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이렇게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어?”
“나는 그렇게 큰 고민을 안 해. 그냥 일단 해보는 거지 뭐! 안 해보면 모르잖아? 난 아직도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그의 눈이 순간 반짝이며 고양되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은 모두 다 해볼 거라는 듯이.
상처와 슬픔, 그리고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건네는 일. 깊은 눈으로 자신의 슬픔을,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의 꿈을 내게 건넨다. 그것은 간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이야기는 늘 나아가기 때문이다. 상처를, 슬픔을, 꿈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들은 나아가고 있다. 머무르지 않고.
고요하고 슬픈 눈, 반짝이는 눈.
그들은 모두 나아간다.
고요하고 슬픈 아픔, 반짝이는 꿈.
그것들은 모두 나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이 내게 그것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들의 영혼을 본다.
“너 정말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구나!”
K가 이번엔 내게 가장 최근에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 물었다. 나는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무슨 글을 쓰고 있는데?”
“감명받는 일에 대해 쓰고 있어.”
“감명? 무슨 이야기인지 설명해줘. 궁금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지. 우리 모두에게 햇빛, 바람과 같은 것들은 분명히 공평하게 주어졌단 말이지. 그것도 매일 말이야. 하지만 그것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어. 감명받기는 더욱 힘들지. 너무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니까. 그런데 그런 사소한 것들에 감명받지 못하면 일생 동안 아무것에도 감명받지 못한 채로 흘러갈 거야. 그래서 나는 많은 것에 감명받고 싶어. 매일 매일 감명받을 일이 참 많거든. 그럼 일상은 그 자체로 정말 풍요로워져. 아니 어쩌면 삶이.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쓰고 있어.”
“정말 신기하다. 나도 예전에 글을 써본 적이 있어. (역시 해보고 싶은 건 다 하고 본다는 K다운 말이었다.) 그런데 굉장히 비슷한 메시지야. 제목은 ‘나비는 어디로 갔는가?'야.”
“나비는 어디로 갔는가?”
“그래, 어린아이일 때는 나비를 보면 ‘나비다!’ 하면서 쫓아가 꽃 위에 앉은 나비를 구경하잖아. 예쁘고 신기하니까. 근데 어른이 된 지금은 나비를 봐도 별로 놀라지도 않지. 나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거야. 내 눈에 보이지 않은 지도 모래되었어. 보려고 하지 않으니까 안 보이는 거야. 나비는 분명 도처에 있을 텐데.”
“감명받지 않는 거지.”
“바로 그거야. 아무튼 정말 좋은 글이다. 나중에 책이 나오면 꼭 보내줘.”
아픔이 때때로 막을 새도 없이 밀려 들어오는 것처럼 행복도 그런 것이다. 나는 행복도 그렇게 막을 새도 없이 밀려 들어온다고 믿는다.
아픔이 그러는 걸 행복이 그러지 않을 리 없다. 모든 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바람과도 같이 불어온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유영하는 것.
밀려 들어오는 것이 아픔이라면 아픔을, 행복이라면 행복을 타고 이렇게 저렇게 떠다니는 일.
유영하는 것들은 거스르지 않는다. 그저 흐른다.
바람을 잘 타면 돛을 올린다. 역풍을 만나면 부는 바람에 몸을 맡겨 방향을 바꾼다. 태풍이라도 만나면 돛을 내리고 큰 파도가 지나가기를 죽은 듯이 기다린다.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대도 바람이 이끄는 방향으로 계속 흘러야 하는 것이다. 흘러간 곳에 다시 순풍이 불어올 것이므로.
바다 위에는 순풍도 불고 강풍도 분다. 날씨가 맑게 개는가 하면 순식간에 폭풍우가 몰아친다. 하여튼 별 악천후가 다 불어 닥친다. 그럼에도 배는 목적지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우린 그것을 항해라고 부른다.
그 모든 악조건을 다 헤치고서 항에 다다랐을 때 횡단에 성공했다고들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섬에 도착했다고 한들 울릉도에서 독도로 가는 배편을 타고선 횡단에 성공했다곤 하지 않는다. 기상천외한 일들이 펼쳐지는 드넓고 끝없는 바다를 지난 뒤에야 위대한 횡단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니 인생을 지나기가 오죽 쉬울까. 항해하기가 오죽할까. 우리는 그저 도착하는 게 아닌 횡단을 하기 위해 바람과 씨름을 한다. 목적지도 어딘지도 모른 채 삶이 다할 때까지. 그러다 결국 도착한 곳은 죽음인 곳으로. 아주 많은 날들을 지나, 기상천외한 기후와 수없이 놓인 별들과 구름, 그리고 햇빛을 지나, 방향을 계속 바꾸어가면서 아픔과 슬픔을, 기쁨과 행복을 유영하며. 위대한 횡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은 이래. (이것 봐. 말버릇이 또 나왔다.) 결코 내가 너보다 경험이 많아서 너보다 아는 것이 많은 게 절대 아니야. 오히려 네가 겪은 경험들은 내가 겪어본 적 없는 것들인걸.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어. 그런 건 정말 시간이 흘러야만 알게 돼. 그래서 내가 너보다 더 많이 겪은 건 오로지 ‘시간’ 뿐이야...”
“넌 정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내가 보기엔 넌 정말 반짝반짝 빛나. 네가 하는 모든 일이 잘될 것만 같아. 근데 너만 몰라. 너는 네가 안 될 것만 같지. 불안하겠지. 그래도 자신감을 가지고 하고 싶은 걸 해. 그거 하나만 알고 있으면 분명히 모든 일들이 잘될 거야. 내가 아는 것들은 그런 거야. 그런 건 말로 설명할 수 없어. 다만 시간이 지나면 너도 반드시 알게 될 거야. 내가 아는 것들은 그런 거야.”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나도 늘 즐겁게 있어야겠다. 사람을 들여다보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도 그들을 사랑하니까.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한강대교를 걸어 다녔던 한 달 동안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구름을 좋아한다는 것. 사진 찍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하늘을 보고 걸을 줄 안다는 것. 무엇보다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스스로 찾아낼 줄 안다는 것. 나는 매일 하루 한 시간 반 이상을 나를 배우는 데 투자했던 것이다.
바보에게 무슨 요령이 있을까. 그냥 요령 없이 살자.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좋고 나쁜 게 따로 없다고. 좋다고 좋기만 한 게 아니고, 나쁘다고 나쁘기만 한 게 아니라고. 좋고 나쁜 건 그냥 감정일 뿐이라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졌다고 조지기만 한 게 아니더라고.
“처음엔 잘 넘어지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정말 잘하기 위해 못하는 상태를 기꺼이, 심지어 열렬히 받아들이는 것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열렬히 넘어져봐야 한다.
“그냥 넘어져도 돼.”
엉망진창으로 구르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
넘어지지 않고는 잘 넘어지는 법을 배울 수는 없다. 수차례 넘어진 다음에야 잘 넘어지는 법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 말해 넘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걸음마를 떼고, 빙판 위를 쌩쌩 달리고, 눈밭을 시원하게 질주할 수 있게 된다.
넘어지는 건 두려운 일이 아니다. 실패를 기꺼이 즐기자.
가장 오래 남는 건 선함이다.
가장 오래 남는 건, 가장 깊게 남는 건 선함이다.
불안은 당연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없다. 많은 학자들이 밝히려 노력했지만 지금까지 결론 내어진 바론 생명체가 태어나게 된 일은 수많은 우연의 결합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우주를 나도는 돌멩이었다가 우연히 어떤 조건이 갖춰진 바람에 갑자기 살아 숨 쉬는, 게다가 의식까지 생겨버린 생명체가 되었다. 기적도 이런 기적이 없으나 24시간 살아있는 이 호흡과 깨어있는 한 돌아가는 이 의식이란 것은 우리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지나치게 똑똑해진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우연히 태어난 생명체에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인간은 고민한다. ‘그럼 죽지 않아야 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러니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내딛는 한 발자국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탄생한다. 지나간 1초는 곧장 과거가 되어 버리고, 한 치 앞도 감히 예상할 수가 없다. 더욱더 먼 미래는 어떻겠는가. 무슨 일이 생길까. 잘 살아 낼 수나 있을까.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우린 더욱 불안할 뿐이다. 유튜브와 뉴스에선 계속해서 미래에 닥칠 일들에 대해 위기감을 준다. 경제 위기, 저출산, AI의 출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미래를 고민할수록 삶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끝없는 불안만이 몰려온다.
그러나 나는 이 불안을 깊이 떠안는다. 팔을 활짝 벌려 받아들인다. 나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한낮 돌멩이에 불과할 수 있었던 내가 생명이 되었다. 살아있다. 맥박이 살갗 아래 팔딱이며 뛰고 있다. 삶이 내게 고통을 준다면 나는 최대한 몸부림치겠다. 삶이 불안정한 것이라 끝없이 불안해야 한다면, 나는 그러겠다. 그것이 내가 열렬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는 온몸으로 불안해하면서, 되려 행복을 꿈꿀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삶은 끝도 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다. 무엇이 펼쳐질지 모른다면 그게 불안이라 믿는 만큼, 행복이라 믿는 것도 말이 되지 않겠는가. 삶이 내게 고통을 준다면, 고통을 깊이 느끼겠다. 아주 깊이. 살아있음에 느낄 수 있는 고통이라 여기면서. 하지만 그만큼 삶이 내게 행복을 준다면, 행복 또한 깊이, 아주 깊이 느끼겠다. 온 마음 다해 감사하겠다. 이 또한 삶이 내게 준 선물임으로.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온몸으로 불안할 수 있는 나는, 또한 온몸으로 따스한 햇볕을 느낄 수 있다. 온몸으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행복할 수 있다. 감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웃음은 충실한 자들의 것이다.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고, 알 수 없는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일어난 일들에 웃음을 짓는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어떤 하루를 겪었을지 나는 전혀 알지를 못한다. 웃음 뒤에 숨겨진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진심을 다해 웃는다. 그 순간만큼은 제 것이라는 것처럼. 그 순간이 나의 삶인 것처럼. 그들은 순간에 충실해 있다.
역시 그러므로
나는 최대한 활짝 웃는다.
늘, 언제나, 웃기를, 웃어 보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방구석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든 그 어디에 있든 관찰하고 감상한다. 감각을 곤두세울 것. 느낄 것. 감동할 것. 생각이 깊어지는 것을 중요히 여길 것. 감성적이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 말 것. 마음껏 사랑할 것. 되도록 우울하지 말 것. 좋은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감상할 것. 그리고 감명받을 것. 삶은 아름다운 것이니까. 삶은 기적이니까.
클럽으로 가는 길에 그는 난데없이 식스팩을 자랑했다. 요즘 목표가 식스팩을 만드는 거란다.
“젊을 때 식스팩이 있는 건 당연해 보이잖아. 60대에 식스팩을 만드는 건 좀 더 색다른 목표일 거 같아서. 60대는 식스팩을 만들면 안 되나? 요즘 내 목표는 식스팩을 만드는 거야.”
그에게 있어서 나이란 그저 색다른 도전인 것이다.
저는 책을, 글쓰기를, 술을, 서울을, 여행을, 사랑을, 사람을, 광대 짓하기를, 영화를, 음악을, 바다를 참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은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책 읽을 때의 저는 그렇게 단정하고 진지하고 차분할 수가 없는데, 바다 앞에만 가면 광인이 되어 서핑을 해요. 진짜로 눈에서 광기가 돈다고 서퍼들의 표정이 서늘해집니다.
많은 모습들이 전부 다 저이지요. 여러분은 몇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나요? 자신을 한 가지 모습으로 정의 짓지 말아 보세요. 삶이 즐거워질 거예요.
첫 책을 출간한 소감이 어떠신가요?
‘첫 책은 다음 책을 쓰기 위해서 내는 거야.’
잘 쓰고 싶다는 부담이 있어 아직은 쓰고 싶은 글이 없다고 했을 때, 파리에 초대해 주신 아저씨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첫 책을 내는 거라면서요. 첫 책을 출간하고 나니 이제야 쓰는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많은 분들의 노력 덕에 오랜 꿈을 이뤘습니다. 그저 모든 일에 감사할 뿐이에요. 당분간 꿈을 안고 사는 기분으로 살 것 같아요. 글이 잘 팔리면 더 좋겠다, 그 정도 욕심만 내보면서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을까요?
No plan is the plan. 계획이 없는 것이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