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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사소한 불행에 인생을 내어주지 마라(요한 크라우네스)

아름다운 존재 2025. 3. 17. 09:47

우주의 원칙들과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스토아 철학의 목표다.

 

만물은 신성한 유대로 맺어져 있다. 서로 생소한 것이란 없다. 모든 피조물은 상호보완하면서 똑같이 세상의 조화로운 질서를 목표로 한다.

 

세상만사는 뜻깊은 의미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행복은 삶을 대하는 태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이성과 그 원칙들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의 결과다.

 

스토아주의에서 내건 최고의 이상은 ‘아파테이아Apatheia’, 즉 초연함이다. 어떠한 정념이나 욕망에도 휘둘리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초연함은 변화무쌍한 운명 앞에서 각 개인이 어떤 마음으로 대처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인생 최악의 또는 최고의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일희일비하는 태도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아파테이아’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만사를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고통과 쾌감에 대해 똑같이 무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간과 우주 간에 고차원적으로 맺어진 관계를 깨닫는 지혜이기도 하다.

 

매일 어떤 일을 하면서도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자. 그렇게 우리는 현대 소비사회가 짜놓은 보상 체계의 유혹에서 벗어나 절제하는 일상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이제 당신이 음식을 가져올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손님으로서 받는 대접 중에서 최소한만을 기대하라.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허기를 달래는 데 필요한 양만 가져오라. 욕심낼 필요가 없다. 그저 한 입 한 입 음미하며 감사함을 느끼자.

연회가 끝나고 모두 돌아가면 이제 이타심을 훈련할 차례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공동체가 잘 유지되고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바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초대한 주인을 도와 함께 뒷정리를 하자.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도움 되는 일들을 행하자.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

 

“바라는 게 적을수록 부족함도 줄어든다.”

 

과한 기대와 바람을 품고 사는 사람은 인생의 값진 시간을 허비하며 내면의 공허함만 키운다. 뿐만 아니라 좌절감에서 온 정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남긴 말을 되새겨보자.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은 신들의 특권이고, 적게 바라는 것은 신과 닮은 인간의 특권이다.”

 

에픽테토스는 “굳건히 고통을 감내하고 당신이 받는 인상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라”고 조언한 바 있다.

 

인생 최악의 날씨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평정심을 습득한 스토아주의자라면 날씨가 어떻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날씨가 그렇다는 것을 느낄 뿐 날씨는 살아가는 방식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내 앞에 놓인 하나의 도전이라는 걸 깨닫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여파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럴 때 당신은 운명의 변덕을 스토아적 덕목을 닦는 과정에서 자기 향상을 위한 긍정적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

인생의 굴곡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데 거창하고 복잡한 계획이 필요 없다. 대단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그 대가가 어떻든 오직 그 계획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사물을 보는 눈도 흐려질 수 있다.

 

“이보게, 젊은이.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내가 원했던 걸 얻은 적이 드물었다네. 그래서 삶이 주는 걸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지. 오늘 날씨가 내게 유익하리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네.”

 

“잡다한 의견 속에서 길을 잃기보다 단순함 속에 머무르라.”

 

그 어떤 질문에도 항상 답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판단 자체를 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벌어지는 일에 관여하지 않고 관찰하는 법을 연습하라. 머릿속으로 거리를 두자.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외부의 사물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에 대한 왜곡된 판단이라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살면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침묵이야말로 영혼의 금이 될 때가 많다는 사실을 배우자.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내가 따라가야 할 목소리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수많은 잘못된 전제와 신념을 퍼뜨리고 있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내면의 목소리 외면 현상은 오늘날 일종의 사회적 합의처럼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대신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조언을 경청하고 그것이 진리인 양 따른다. 덴마크의 유명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윤리적 개인은 확신 속에 자기 자신 안에 가만히 머문다. 그에게는 여러 의무가 아닌 단 하나의 의무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무는 외부에서 명령처럼 강요된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내면적 본질의 표현으로서 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것도 결국에는 모두 내면에서 온 것이다.

 

너의 존재 안에 대답이 있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것이 진실된 것이라면 소중히 여겨라.”

 

사람들이 많은 돈과 삶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대상은 결국 아무 가치 없는 하찮은 것들이다. 고통의 길로 들어서지 않기 위해선 이 점을 꼭 명심하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한 번도 제대로 삶을 시작하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라.”

 

“어제 일로 울지 말아요. 이제 다 지난 일이에요. 내일 찾아올 일로 걱정하지 말아요. 그건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어요. 이 화창한 날을 즐거운 마음으로 즐겨요. 당신이 슬퍼하는 건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에요. 그 사실에 기뻐하세요. 당신은 특별한 존재예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인생은 어떤 생각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우렐리우스는 “생각은 오랜 시간에 걸쳐 영혼을 물들인다”고 했다.

 

“네가 자주 떠올리는 생각들이 너의 신조가 된다. 영혼은 생각들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로베르트 무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성을 독재자처럼 여기며 거기에 복종한다.”

 

정신을 한눈팔게 하는 것이야말로 물질적인 것의 기본 특성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관계를 통해서만 정당성을 얻으려는 자들과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정신적 요소들 앞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신이 물질에 비해 훨씬 포괄적이고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에 충실한 이에게만 삶의 진정한 가치가 보인다.”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세간에 통용되는 틀에 박힌 사상을 좇지 않는다. 반짝 지속되는 유행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 쉽게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에 관심을 둔다. 남들과 똑같이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동요 없이 감정과 충동을 적절히 통제한다.

마음속으로 바라는 자기 모습이 있는가? 그럼 그런 사람이 되자.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는 사람이 되자. 니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를 둘러싸고 유령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삶의 매 순간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지만 우리는 이 유령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혼자 조용히 있을 때 무언가가 속삭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고요함을 싫어한 나머지 사교로써 감각을 무디게 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이겨낼 수 없다.”

 

스토아주의자에게 아름다움은 정직함의 결과물이다. 둘 다 내면에서 나온다. 스토아적 인식론에 따르면 정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선행을 하면서 아름다움을 바깥세상으로 내보낸다.

 

사회의 요구와는 어긋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자연이 준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원한 정의란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 속에 담겨 있다. 결국 우리 생각 속 아름다움과 정의가 영향력을 펼쳐 행복한 삶을 만들어준다. 아우렐리우스는 정의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원인이 밖에 있는 일에 대해서는 평정심을 가져라. 그리고 자기 행동에서 비롯된 일에는 정의를 보여라. 다시 말해 너의 노력과 행동은 공동체에 최선이 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너의 본성에 맞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창조되어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토아적 정의감, 마음의 평정, 특히 책임 의식 같은 요소들이 모여 그런 아름다움을 이룬다.

 

“그대 미래에 관해 정해진 건 없소. 어떻게 될지는 온전히 그대에게 달렸소.”

 

“매사에 인생의 마지막 일인 것처럼 임하라.”

 

하루하루의 중요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수확해나가야 한다.

 

만일 타인이 일으킨 문제와 직면한다면 그를 용서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지는 말라.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한 뒤 그 문제의 해결에 나서고, 문제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해결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자.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힘과 권한이 바로 나 자신에게 있음을 늘 기억하라. 스토아주의자라면 매사에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불필요한 자기 비난을 하지 않는다. 또 어쩌다 난관에 부딪혀도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공정하다고 보고, 자신의 인생행로가 순탄치 않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질투, 시기, 불행의 길이 아닌 영감과 가능성으로 가득한 길을 걸어가라. 다시 말해 플러스섬 게임을 선택하는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라. 남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깨달음은 언제나 몸소 경험하는 과정에서만 얻을 수 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결국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의 시선을 가지고 마주하는 상황을 현명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안 좋은 상황에 지나치게 좌절하지 않고, 좋은 상황에 교만하게 반응하지 않는 내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쉽게 무너지거나 들뜨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가져라.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온갖 조언 사이에서 현대인들은 길을 잃은 채 갈팡질팡하고 있다. 정답이라고 제시된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내면이 분열된 현대인들을 두고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부는 내면의 자유를 뜻한다. 그리고 스토아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무를 수행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삶의 목적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은 풍요로워진다.

 

아우렐리우스는 “네게 주어진 의무를 행할 때는 사람들이 너를 비방하든 칭찬하든 개의치 말라”고 했다.

 

“우리 본연의 모습대로 존재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자유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의무를 행한다는 것의 의미도 잘 알고 있다. 자유와 의무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중요한 의무들은 의지와 미덕의 힘으로 단박에 이행해야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말한다. “누가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선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낄 뿐이다.”

 

“행복은 의식을 다스림으로써 생겨난다.”

 

스토아 철학에서 기쁨은 결코 일시적인 미소나 웃음으로 표출되는 감정적 행위가 아니다. 스토아주의자에게 기쁨이란 밖으로 드러나는 유쾌함이 아닌 보다 깊은 차원의 깨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참된 기쁨은 진지한 깨달음과 원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스토아주의자는 올바른 일을 하는 자신을 의식함으로써 기쁨을 느낀다. 이런 기쁨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과도하거나 변덕스러운 법이 없다. 또 밖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내면을 향한 채 절제되어 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가 가져다주는 것은 변함없는 기쁨”이라고.

각자의 사명에서 비롯된 이 기쁨은 그 사명을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지혜로운 자에게 실수는 새로운 발견으로 향하는 문이다.”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은 것은 쓸모없고 자연스럽지 않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완벽한 것, 모난 데 없이 매끈한 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창조적 생명력 역시 지니고 있지 않다. 불완전한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오히려 우리를 사로잡고 감각을 일깨운다.

 

고대 이집트 사제들은 전 우주를 통틀어 어디에도 완벽한 원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원을 머릿속으로는 계산할 수 있어도 우주론적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환상이자 그럴싸한 이상적 관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원칙 중 하나는 활동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맡겨진 의무를 다하는 것에 기반한 그런 삶은 사물을 판단할 때 완전함과 불완전함, 미와 추 같은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우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완벽함을 바라는 사람은 삶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착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완벽은 행동의 적이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음먹은 일을 이루지 못할까 봐 그것을 포기해서는 안 되네.”

 

“이 길이 가시밭길이거든 돌아서 가라! 더 말해 뭣 하랴! 왜 성가신 것이 존재하는지를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는가? 그런 생각은 자연을 탐구하는 이들의 비웃음만 살 뿐이다.”

 

어떤 사물을 대할 때는 통상적인 의견이나 이념에 따른 것이 아닌, 그 자체의 모습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라. 사물의 본성과 성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둘러싼 정황을 제대로 알아라.

 

삶의 모든 순간과 경험을 유용하게 활용하라

 

“걸음을 내딛는 것만큼 멈춰 쉬는 시간도 중요하다.”

 

삶에서 주어진 모든 것은 당신에 의해 좋게 쓰이기를 원한다. 그럴 때 비로소 자신에게 마련된 운명도 성취된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저절로 새로운 것들을 배우며 성장해나간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연이 지금 이 순간 네게 요구하는 것을 하라”고 했다. 이 ‘지금’은 언젠가가 아니다. 항상 지금 이 순간을 말한다. 또한 당신이 내딛는 걸음걸음에 스스로 만족할 때만 일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음을 뜻한다. 당신이 걷는 모양새를 두고서 자신을 비난하지 말자. 프란츠 카프카가 “길은 그 위를 걸어감으로써 생긴다”고 한 말을 기억하자.

자기 방식대로 일하고, 그렇게 거둔 성공을 축하하면 된다. 그런 성취 하나하나가 다음 성취를 향하는 길에서 등대가 되어 당신이 걸어가는 길을 비출 것이다. 종종 작은 걸음이 큰 걸음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멀리 당신을 이끌어주기도 한다. 보폭이 너무 넓으면 삶에 대한 조망을 잃기 쉽다. 그러니 힘차게 나아가다가도 때로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가기도, 멈춰 서서 쉬기도 하며 삶의 모든 순간을 생생히 음미하자.

 

“쉬운 길은 약한 자를 위해 있고, 어려운 길은 강한 자를 위해 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 결정하라! 지금 이 순간 적절히 대처한다면 그 같은 상황은 미래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자기 삶에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 밖의 것을 위해 시간을 허비할 때 괴로움이 찾아온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고통을 수없이 겪어왔다. 그것은 너의 이성을 본연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의 임무는 새롭게 삶을 살도록 하고 삶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질서는 당신을 자신의 고유한 운명에 가까워지게 하면서 점점 하나로 일치시킨다. 이 운명은 당신이 행하는 모든 일의 총합으로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제 당신에게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아 있다. 그러니 왜 의심하고 망설이는가? 왜 고통스러워하는가? 괴테는 말했다. “거치적거리는 돌을 가지고도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진정으로 의지가 자유로워지려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 즉 (궁극적 행복을 의미하는) 예정된 운명의 실현까지 원할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세네카는 “너의 행복을 믿어라. 그러면 너는 행복을 불러올 것이다”라고 했다. 그 세네카 역시 오늘날 화제가 되는 ‘끌림의 법칙’을 모르지 않았던 것 같다.

 

행복은 행복을 불러온다. 우주에서는 같은 것끼리 서로 모이는 경향이 있다. 내면이 깨어 있는 자, 지금 현재에 머무르는 자는 생각에 의한 왜곡이 없어 외부 세계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미묘한 차원에서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발전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발전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한다.”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는 동시에 유연하게 머물러라

 

스토아 철학과 비슷한 점이 많았던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전체가 그의 의지의 현상에 불과하므로 성찰에 근거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른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것만큼 잘못된 일도 없다. 그것은 의지가 자기 자신과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운명을 따라가야 하지만 운명의 카드를 들여다볼 수는 없다. 마치 밤중에 차를 몰고 깜깜한 시골길을 달리는 상황과도 같다. 운전석에 앉은 우리는 전조등이 밝혀주는 만큼만 전방의 길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계속 앞으로 달리다 보면 어느새 주행거리는 점점 쌓여간다. 그러므로 장차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는 삶의 행로에 대해 미리 해석하려 하지 말자.

 

“아이들이 자라면 깨끗하게 치운 부엌이나 반짝반짝 닦인 창문은 떠올리지 못하겠지만 너와 함께 보낸 시간만은 또렷이 기억할 거야.”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사람들이 살면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운명과 소명, 천직과 책무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이 일들을 진심 어린 애정을 쏟아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일시적인 만족감을 주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인생 전반을 봤을 때 소중한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고유의 잠재력을 펼치기도 힘들다. 가령 이런 식이다. 창조적 인간이라면 자기가 가는 길에 맞는 창조성을 발휘해야 한다. 큰돈을 벌거나 명예를 거머쥐는 일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만일 부와 명예라는 이 두 가지 유혹을 따라간다면 본래의 창조성과 재능에서 점점 멀어지고 결국엔 고갈될 것이다. 그래서 세네카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사람에게 유용한 자만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자신을 올바르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만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어떤 일을 할 때 이 두 가지 스토아 원칙을 명심한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소명 또는 천직을 따라 나아갈 것이다. 주어진 운명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하나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로 문제가 생겼을 때 당황하는 것은 내면의 의지력을 불러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부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잘못된 길로 빠진다. 그러니 세네카의 말을 명심하자. 

“자연이 원치 않으면 어떤 일도 헛수고일 뿐이다.”

 

“현자는 성공 여부가 아닌 의도만 바라본다.”

 

“나쁜 습관은 주어진 운명을 악용하는 것이다.”

 

삶이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삶은 움직인다. 이 세상에 그대로 한 자리에 머무는 삶은 없다. 그러니 이왕이면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그동안 익숙해진 습관을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나쁜 습관의 힘은 강력하다. 하지만 좋은 습관의 힘은 훨씬 더 강력하다. 내면의 힘을 발휘한다면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키케로는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 했다. 나를 좁은 울타리에 가두는 나쁜 습관과 인생의 길에서 전진하도록 돕는 좋은 습관, 어떤 것을 제2의 천성으로 가지느냐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 운명을 만들어가는 주인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씨를 뿌리는 날에 수확하는 것처럼 신중하다면 그 일은 성공한 것이다.”

 

<신약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미혹되지 마십시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자기 운명의 씨앗을 뿌리는 셈이다. 씨앗을 뿌리듯 매사에 신중하게 임하는 사람은 다른 이의 귀감이 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발전해나간다. 내 생각은 행동의 씨앗이 된다. 남들과 나누는 대화를 포함해 내가 하는 말들은 씨앗을 심는 땅이다.

 

스토아 철학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규칙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4단계로 이루어졌다.

생각을 심으면 행위를 거둘 것이다. 행위를 심으면 좋은 습관을 거둘 것이다. 좋은 습관을 심으면 수확물을 통해 품성을 완성시킬 것이다. 마지막으로 품성을 씨로 심으면 자기 삶에 부여된 사명을 수확할 것이다. 

이 규칙을 지키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골라 쓰는 일이다. 매사에 단어 선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씨를 뿌리는 일이 수확만큼이나 쉬워질 것이다. 도가에는 “말은 씨를 뿌리는 것이고 침묵은 수확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스토아 철학의 중요한 사상 또한 이와 일맥상통한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활용하라.”

 

“세계는 하나의 생명체이자 하나의 세계 물질이며 하나의 세계 영혼이다.  세계 의식에 만물이 포함되고 만물이 거기서 나온다. 각각의 존재는 다른 존재의 원인이 되고 이들은 끈끈하게 엮여 있다.”

 

삶에서 가장 필요한 건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스토아 철학은 이를 ‘순응의 기술’이라고 한다. 세네카는 “내일이라는 날의 주인도 아닌 우리가 일생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라고 했다. 그러니 삶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면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을 위해 긍정적으로 활용하자.

두 번째는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고 묵인할 뿐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품에 안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아모르 파티다. 지금 내 상태에 만족하고 비현실적인 소망과 기대에 빠지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하자. 그러면 위기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게 하는 회복탄력성을 갖추게 된다.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놓아주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아모르 파티’를 넘어 ‘Armor Fati’, 즉 ‘운명의 갑옷’을 얻게 된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운명이 우리에게 선물한 보호막이다.

 

“자연적 욕구는 한계를 알지만, 망상에서 비롯된 욕구는 그칠 줄 모른다.”

 

“나는 뛰어갈 때는 뛰어갑니다. 쉴 때는 쉬지요. 일할 때는 일을 하고 만족할 때는 만족합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의 철학을 “만물은 흐른다(판타 레이Panta Rhei)”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다.”

 

새 하루가, 그리고 새로운 달과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마다 스토아의 가르침에 따라 대응할 새로운 도전이 찾아온다. 스토아주의자는 덧없는 것에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않고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 이러한 태도의 바탕에는 세계의 원인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형체를 띠면서 나타난다는 우주론적 인식이 깔려 있다. ‘만물은 흐른다’라는 깨달음에는 이 같은 인과관계에 대한 통찰뿐 아니라 삶의 끝없는 흐름 속에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도 포함되어 있다. 시간에 대한 의식은 인간 의식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며 대단히 ‘인간적이다’. 동물도 유사한 시간 의식을 갖지만,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지각한다. 즉 생물체에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와 개인의식이 상호작용을 벌이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시간’이라는 관념이다. 이런 상호작용은 그것이 아무리 진짜처럼 보이더라도 결국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누구도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스토아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도가 사상에는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에 몰두하지 말라.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삶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경구가 있다. 당신이 삶의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면 모든 순간이 현재로 존재한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에서는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과거와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운명을 전적으로 신뢰한 채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훈련이 필요하다. 동시에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경험을 겁내지 말자.

 

“자연스러운 삶이 곧 행복이다.”

 

“의미 없는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매 순간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라.”

 

인생은 불완전함 속에서 쉼 없이 나아가는 일이다.

 

“이 테스트를 진행한 이유는 여러분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오로지 빨간 점에만 집중했어요. 주변의 하얀 종이에 관심을 둔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지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얀 종이와도 같지요. 우리에게 삶이 주어진 것은 삶을 구체적으로 가꾸면서 잘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빨간 점에만 자신을 가두어 한정 짓고 있지는 않은가요?”

 

“자기 형성이란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미완성인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역시 미완성인 채로 세상을 떠날 것이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스토아 철학을 따르는 당신은 부단히 발전해나가는 사람이다. 자신이 계획한 일을 얼마나 많이 이루었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니 늘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지금 하는 이 일을 위해 내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를.’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스토아적 책임감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비로소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발전할 수 있는 한 주어진 일을 포기하지 말라.

동시에 당신은 작은 걸음걸음이 때로는 최대의 효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늘 작은 것들에 만족해야 한다. 당신에게 발전이란 내면의 성장을 의미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러한 성장을 흔히 ‘품성’으로 번역되는 ‘에토스Ethos’라는 개념과 연관 지었다. 따라서 당신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또 얼마나 몸이 아픈지에 상관없이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자신에게 맞는 최선의 방식으로 오늘 하루를 마치게 해달라고 소원해야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같은 스토아적 삶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두르지 않고 게으름 피우지 않으며 가식 없이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아간다면 완벽한 인격을 닦을 수 있을 것이다.”

 

도가에서 말하듯 자연의 아름다움은 곧 불완전함 속에 있고, 우리 인간도 그런 자연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들아, 그건 메아리란다. 우리 삶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우리가 말하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단다. 삶에 우연이란 없기 때문이란다.”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 말고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음을 두려워하라... 탄생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자연의 신비이다. 둘 다 각각 동일한 질료의 결합과 해체를 뜻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죽음을 경멸하지 말고 자연의 의지에 따른 변화의 한 부분으로써 죽음을 겸허히 맞이하라.”고 했다.

 

“오직 내가 경험하고 깨달은 것만이 가치 있다.”

 

생각 없이 사는 나태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남의 지혜를 가져오는 것은 스토아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스토아적 관점에서 자기 생각을 말한다는 것은 종교에서의 ‘신앙고백’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니 당신이 어떤 일을 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기억해 두자. “우리는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에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세네카는 이렇게 지적했다. “노인이거나 노인이 되기 시작한 이가 수첩에 적어놓은 지식만 갖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우리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외부의 방해와 유혹에 굳게 맞설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경험이고 오직 그것만이 가치가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경험과 지혜도 자기 자신의 것보다 우선일 수 없다. 그들이 깨달은 바를 자기 자신을 위해 활용한 것처럼 당신도 자신의 깨달음을 자기 삶에 적용해야 한다. 삶이 던지는 도전을 받아들이고 경험을 지혜로 탈바꿈시키면 당신이 깨달은 것들이 언젠가 이 세상에 살아갈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매 순간을 내게 중요한 의미와 목적으로 채워나가자

 

이제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수많은 길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길을 발견해 스토아적 원칙에 충실하게 굳센 자세로 걸어 나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