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치우치지 않는 삶(웨인 다이어)
미래는 꿈으로 만들어졌다. 그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미리 미래를 보려는 자는 늘 꿈을 꿔야 한다. 꿈은 멋진 것이다.
애쓰지 마라. 결국 네 운명대로 살게 될 것이다. 운명이 이끄는 대로, 살아지는 대로 살아라.
우리는 우주적 존재들이다. 가장 깊은 곳에서, 한 방울의 바닷물 안에 모든 바다가 들어 있듯, 한 개인은 인류의 보편성을 공유한다. 인류의 집단 무의식은 다양한 개인을 싣고 스스로의 길을 간다. 우리의 미래 역시 그 길 위에 있다.
이 서양인의 해석이 이렇다면, 나의 해석은 무엇일까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독법이다. 남의 글을 따라가되 자신의 견지를 갖추어 되묻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잘 배우는 방법이다. 전통적인 <<도덕경>>의 해석에 갇히지 말고, 이 서양인처럼 스스로 자신만의 <<도덕경>> 주해를 해보는 것이다. 전통으로부터 나를 풀어주고, 기존의 해석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견해를 갖는 것이야말로 멋진 자유의 연습이 아닐 수 없다.
심장을 빼내 한 여인에게 주는 것이 사랑이다. 마음을 끄집어내어 인생에게 바치는 것이 삶이다. 사랑에서 멀어지면 삶에서도 멀어지는 것이고, 마음의 본질을 떠나 돈과 명예에 매이면 한 번도 해보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채 헛산 것이다. 가지가지의 일로 몸과 영혼이 추울 때, 할아버지 옆에서 불을 쬐며 장작이 타오르는 것을 보라. 자신을 죽여 태움으로써 나를 돕는 것이니, 내 삶이 하루인들 어떤 우주적 존재의 호의와 도움 없이 살아질 수 있겠는가?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그 무엇도 변화시킬 수 없다.
-조지 버나드 쇼
이름을 규정하는 것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변화하고 순환한다. 우리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슬픔, 공포, 좌절 혹은 그 어떤 근심도 끝없이 계속될 수는 없다. 끝나지 않는 폭풍은 없다. 불행 속에는 항상 행운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욕심이 없으면 신비로움을 볼 수 있고 욕심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그 신비로움은 모든 이해로 향한 문이다.
도는 모든 것이 시작되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영역이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의 내면에 존재한다. 이 볼 수 없는 신비로움을 보고자 할 때 우리는 형태를 가진 외부 세계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하려고 한다. 노자는 그 신비로움을 보려고 애쓰지 않아야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내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마음을 내려놓고, 신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원함’과 ‘내버려둠’이 마치 하나로 이어진 물체의 양 끝처럼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더 많은 모순된 생각들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함이라는 땅’으로부터 신비로운 도는 만개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치 ‘원함’이 ‘내버려둠’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원하지 않음’은 믿고, 허락하고, 내버려두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함’은 ‘원하지 않음’의 시작이고 토양이며, 또한 ‘내버려둠’의 처음이자 근본이다. 그것들은 같기도 하고 또한 다르기도 하다.
세상이 단지 이름으로 규정된 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우리 몸을 구성하는 피부와 뼈, 그리고 체액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도 말하는 혀와 듣는 귀, 그리고 분명한 것과 신비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눈에 보이지 않게 생기를 불어 넣는 영원한 도로 이루어진 셈이다. 의식적으로 이 이름 없는 신비로움을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도를 터득하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도를 행하라. 신비로움 속에 사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라.
<<도덕경>>에서 말하는 ‘내버려둠’은 신비로움 속에 머물며, 아무런 방해 없이 당신을 통해 그 신비로움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한다. 신비로움이 펼쳐지도록 내버려둠과 동시에 형태 안에 머무는 모순을 허락하는 것이다.
신비로움을 즐겨라.
항상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애쓰지 말고 세상이 그냥 펼쳐지도록 내버려두라. 모든 것은 신이 주신 순서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므로 그냥 내버려두라.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서 너무 열심히 노력하지 마라.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라. 당신의 친구와 자녀, 부모님, 상사 또는 다른 누구라도 너무 깊이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도는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뜻대로 일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라. 긴장을 늦춰라.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은 이래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자신을 매 순간 인식하라. 예리한 관찰자가 되라. 비판은 적게 하고 많이 들어라. 신비로움의 매력과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불확실성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여는 시간을 가져라.
물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물이 아닌 것처럼 이 우주의 무엇도 그것에 붙여진 이름과는 다르다. 사물의 범주를 분류하고 나누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동물, 꽃, 광물, 인간은 결코 정확하게 묘사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는 우리에게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분류하고 외우는 것이 아닌, 보고 느끼는 것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오늘 하루 중 당신이 다른 사람이나 상황과 관련해서 겪고 있는 힘겹고 화나는 일에 주목하라. 원함과 내버려둠의 사이에서 당신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도를 행하겠다고 결심하라. 그 성가신 일이 사라져버리길 바라는 동시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모순을 허락하라. 당신의 생각 속에서 그 느낌을 찾아보고 그것이 당신의 몸속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라.
아무런 편견 없이 마음을 열고, 당신 안에 있는 그 신비로움과 친해질 수 있도록 마음을 확장하라. 그리고 그 느낌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에 주목하라. 아마도 배 속을 돌아다니고, 뼈를 단단하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거나 때론 목을 조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느낌을 당신 안의 알 수 없는 정체의 메신저로 여기고 지켜보라. 판단을 미루고 주의를 기울여라. 그 느낌이 사라지길 바라는 자신의 마음에 주목하라. 그 느낌을 관찰하라. 어떤 느낌이든 그냥 받아들여라. 규정하고, 설명하고, 방어하지 말고 내면의 신비로움과 만나라. 그것은 혼자서 알아내야 하는 미묘한 느낌일 것이다. 신비로운 삶을 경험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삶의 매 순간마다 모순 속에 살며 이를 호흡하는 연습을 하라. 우리 몸은 육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몸은 시작과 끝이 있고,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은 이러한 물질적인 요소가 아니고 무한하며 형체가 없다. 당신은 만물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위대한 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서로 상반되는 생각들을 당신 안에 함께 머무르게 하라. 그리고 그 상반된 생각들이 서로를 해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품어라.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당신의 자유의지와 능력을 굳게 믿어라. 그리고 동시에 내면에 있는 강렬한 에너지에 몸을 맡겨라. 선과 악은 한곳에서 나온 서로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도의 조화로움을 유지하면서, 물질세계의 이중성을 수용하라. 그러면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판단할 필요가 없어진다.
반드시 어디에 있어야 한다거나 혹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에서 벗어나 착한 짐승이 되어 자유롭게 움직여라. 예를 들면, 한 마리의 수달이 되어서 ‘수달다운’ 삶을 사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당신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아름답거나 못생기지도 않았으며, 부지런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은, 그저 한 마리의 수달일 뿐이다.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자유롭게, 평화롭게, 그리고 재미있게 물속을 헤엄치고 뭍에 오르는 한 마리의 수달이다. 육체를 벗어나야 할 순간이 오면 하나 됨의 순수한 신비 속으로 당신만의 공간을 찾아 떠나라.
“그저 존재하라.”
지금 그대로의 상황과 어우러져서 그저 존재하라. 옳고 그름이라는 이원성에 빠져들지 마라. 모순된 통합, 즉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하나 됨 속에 머물기로 결정한 자신의 선택을 축하하라. 현명함을 기꺼이 실천하는 당신의 마음과 그럴 수 있도록 해준 그 기회에 대해서도 감사하라.
노력하지 않음으로 행하라.
행함이 순수하고 자기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완전한 제자리를 찾는다.
누구나 자신의 영혼을 위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창조의 근원은 물질적인 소유나 사회적인 지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필요한 것을 줄 뿐이다. 그것은 당신과 모든 이들을 이끌고, 가슴 뛰게 하고 또 움직이게 할 것이다. 에고와 욕망이 줄어들수록 그 자리에 도의 아름다움이 채워진다. 시기, 분노,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도를 실천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라.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다.
행복은 그 여정에 있는 것이다.
욕망은 불안과 스트레스, 그리고 시기심을 낳을 뿐이다. 외적인 사건이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고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소한 일들 속에서 행복을 찾아라. 도의 여정에 조화롭게 머물면,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모든 것들이 삶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좋은 사람들, 경제적인 뒷받침, 그 밖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함께 찾아올 것이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 지금 있는 그대로에 감사와 경외의 마음을 가져라. 당신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원대한 포부를 위해 마련된 시시콜콜한 목록들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그 어떤 것이다.”라고 노자는 말한다.
도는 만물의 근원이다
도의 완전함을 믿으라
도는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며, 당신을 위해 작용한다. 도의 조화로움을 믿으라. 도는 당신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삶의 첫 아홉 달을 보내는 동안 모든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돌봐주었고, 당신이 태어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었다. 당신이 도를 믿고 무위를 행한다면 도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원하는 것의 목록을 만들어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도’에게 넘겨주라. 그것들을 넘겨주고는 그냥 믿으라. 그와 동시에 도의 안내에 귀를 기울이고 살펴보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공급해주는 완전한 에너지와 당신을 연결하라. 에고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영원한 도가 당신을 통해 작용하도록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된다. 이것이야말로 노자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노자는 당신 자신의 무한함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내면에 흐르는 창조적 에너지의 근원에 다가서는 길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불행한 사람들을 돕고 싶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그들을 도울 시간과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직업이나 생활수준에서 한 걸음 나아가 무한한 창조의 에너지가 이미 당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알지 못했던 시간과 힘이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자신의 무한함에 이끌려 다른 사람을 돕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결국 도라는 공통된 원형에서 비롯된 당신의 비전을 완성하여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당신이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건 그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도는 비어 있지만 틀림없이 존재한다. 도는 “다함이 없고 끝없이 깊으며 모든 것의 근원이다.”라고 노자는 다시 말한다.
언제 어디서나 도가 존재함을 아는 것은 결핍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이것은 내 운명이 아니야.” 또는 “내 주제에 그런 행운이 오겠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즐거움은 사라진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 대신에 당신이 원하는 것이 곧 이루어질 거라고 상상하라. 아니, 벌써 이루어졌다고 믿으라. 이 새로운 자화상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멋진 삶을 살게 한다. 우리는 활기로 가득해지고 도와 영원히 연결된다. 당신이 무한함 속에서 산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고, 평화로운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이야기가 오늘의 세상에 전달하는 바다.
골칫거리처럼 보이는 모든 문제들을
영원한 도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느껴진다면 이 문제를 도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돈도 개인이 필요한 것보다 훨씬 풍부하게 존재한다. 이 점을 이해하고 그 무한한 공급에 접속하라. 먼저 “지금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라고 스스로를 확신시켜라.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무한한 본성에 다가서서 실천을 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된다.
도 안에 조화롭게 머물면서 모든 문제에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라. 잘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 주변에 충분히 존재한다. 내키지 않고 불행하게 느껴지는 일에 힘을 쏟지 말고 도와 어우러져라. 결코 고갈되지 않으며 모든 것의 시작이자 창조적 근원인 도 안에 머물러라. 도를 마음에 품고 느끼고 실천하면, 도는 당신의 내면에서 당신을 위해 작용할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데까지 사랑하라.
도는 차별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처럼 도는 치우치는 법이 없다.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며, 보이지 않게 만물을 부양하는 위대한 공급자다. 도는 다른 것에 줄 힘을 거둬서 유독 하나에만 쏟는 편애를 하지 않는다. 바람, 햇빛, 공기, 비 같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요소들은 이 땅의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다. 의식의 내부와 외부에서 도의 이 강력한 특징과 조화를 이루면 진정한 자아를 깨달을 수 있다. 진정한 자아는 도와 조화를 이루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사려 깊은 태도다. 진정한 자아를 깨닫게 되면 어떤 삶을 다른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세속적으로 인기 있는 것들을 추구하지 않는다.
<<도덕경>>의 5장은 우리에게 공평하고 치우침 없는 도를 깨닫고, 그 모순적인 기질을 즐기라고 말한다. 도의 에너지를 더 많이 접하고, 도의 시선을 가질수록 우리는 도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도는 결코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쓰면 쓸수록 더 생긴다. 그러나 우리가 도를 가두거나 저장하려고 하면 어느새 부족해지고 한 움큼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 고갈되지 않는 힘은 우리가 공평한 본질에서 무엇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사라져버린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거나 우월하지 않다는 도의 가르침을 따르면 삶의 다양한 모습들은 그저 착각을 일으키는 눈속임일 뿐임을 알게 된다.
우리를 조각조각 분열하게 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하나로 뭉치도록 엮어주는 것이야말로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스펙트럼에 필요한 것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이 매 순간 도가 하는 일이다.
보물을 모두에게 나누어주라.
도를 따르는 과정을 간단하게 3단계로 생각해보자.
내면에 존재하는 남에 대한 판단과 편견을 최대한 없애라
이를 위한 가장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은 모든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이 평가하고 판단하는 상대방 사이에는 도라는 공통점이 있다. 짚으로 만든 개에 불과한 겉모습이 아닌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한 도를 발견하라. 그러면 그들을 비판하고 함부로 규정하려는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2. 당신의 단어 사전에서 ‘특별하다’는 말을 지워버려라
한 사람이 특별하다면 우리 모두가 특별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특별하다면 더 이상 특별하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특별하다는 말에는 결국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치우침 없이 도를 실천하고 내면의 공간과 연결됨으로써 너그러운 마음을 펼쳐라
내면의 공간 속에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자신만의 것이 아닌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소유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다. 조건 없이 나누다 보면 도를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편견이 사라지고 있음에 전율하게 될 것이다. 도는 바로 당신 내면에 존재하는 진리다. 결코 마르지 않는 도와 연결되어 그 평화와 기쁨 속에 머물러라.
당신은 부모님이 아니라 위대한 영혼의 신성한 어머니인 도에 의해 태어났음을 깨달으라
당신이 가진 에너지와 지속적으로 접촉할 때, 비로소 진정한 지혜와 재능을 이 세상에 펼쳐 보이게 될 것이다. 도에서 처음 시작되었던 그 모습 그대로인 자신의 본질과 함께 어우러져서 창조적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도는 무엇을, 어떻게 창조할지에 대해 헷갈리는 법이 없는데, 이것은 우리가 신비의 여인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내면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라.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삶을 이끌려고 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마라. 당신의 내면 아주 깊은 곳에 있는 그것을 향해 뻗어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놓아주라. 끝도 없고 고갈되지도 않는 재능과 능력, 그리고 지혜의 저장소가 당신 내면에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당신이 시작된 곳은 바로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끝없는 창조적인 신성한 어머니, 즉 도의 신비한 여인이다. 내면에서 소명으로 느껴지거나 삶의 기쁨처럼 느껴지는 일이 있다면, 이런 흥분이야말로 가슴속에 숨겨둔 열정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증거다. 이것이 바로 창조가 일어나는 방식이며 도와 조화를 이루는 힘이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하라. 창조적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과 편견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것이다. 또한 재능이 자연스럽게 발휘될 수 있도록,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을 부숴버리는 것이다.
당신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창조적인 힘은 개인의 삶보다 위대한 동시에 삶 자체이기도 하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 없이 베풀면 필요한 모든 것들이 모여든다.
모든 이가
곧 신의 목소리다.
어찌 무례할 수 있겠는가?
어찌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욕망을 추구할수록 그것은 교묘히 당신 눈을 속이고 달아날 것이다. 삶이 스스로 다가서게 하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에 주목하라. 도의 관대한 특성으로 인해 당신은 항상 무언가를 받고 있다. 들이마시는 공기나, 마시는 물, 먹는 음식, 내리쬐는 햇빛, 육체를 지탱하는 영양분, 심지어는 당신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생각까지 모든 것이 바로 도가 주는 선물이다.
도에서 모든 것들이 흘러나왔음을 느끼고 당신이 받은 것들에 감사하라. 무의미한 추구를 그만두고 멈춰 서서 바라보라.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쫓으려는 마음을 진정시켜라. 스스로를 내려놓고 신에게 맡겨라. 이렇게 내면의 신이 드러나는 삶을 살면 당신은 세속적인 에고로부터 멀어지고 신에게 다가서게 된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도를 찾아라. 받아들임, 온화함, 친절함이 당신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하라.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다투는 삶, 또는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삶은 잊어버려라.
생각이 자유롭게 떠다니도록 하라.
삶은 시인 것이다. 행간을 건너뛰는 텅 빈 공간들은 논리와 이성으로 채울 수 없다. 그 심연을 지배하는 것은 우연과 운명이다. 읽고 쓰는 것이 시가 아니다. 살아지는 것, 그것이 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을 간직하라.
할 일을 다 하면 한 걸음 물러서라. 겉치레와 무절제한 소비 대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라.
에고의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고 있는 일 속에서 즐거움을 찾으라
에고는 당신이 한 일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보상받기를 원한다. 재산을 축적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매 순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 없앨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생각하지 말고 바로 그 일 안에서 즐거움을 찾으라. 이 물질만능의 세상에 당신을 태어나게 한 무한한 지혜인 도를 믿어라. 어쨌든 도는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정확한 시기를 알고 있었다. 도는 “아홉 달의 임심으로 이렇게 예쁜 아기를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그 기간을 5년으로 늘리겠어. 그러면 더 완벽한 아이가 태어나게 될 거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 도는 아홉 달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아홉 달이면 충분하다. 더 이상의 시간은 필요 없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유혹이 당신을 찾아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도를 생각하라. 이 창조의 원리는 할 일을 다 하면 거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노자는 이것이 “바로 하늘의 길이다.”라고 말한다.
왜 굳이 하늘의 길을 거스르려고 하는가?
몸과 정신처럼 겉보기에 상반된 것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라.
재산과 성취를 통해 얻은 신분 따위는 잊어버려라. 단지 행하고 그 흐름 자체를 지켜보면서 당신이 하는 일, 그리고 당신의 삶으로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을 즐겨라. 당신은 아무것도, 아무도 소유할 수 없다. 한 번 모인 것은 반드시 흩어지기 마련이다. 한 번 손에 들어왔던 것은 다시 당신을 떠나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 그러니 한 걸음 물러서서 이 물질의 세계를 지켜보라. 이렇게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은 소유에 대한 집착을 느슨하게 해주는 동시에 당신을 환희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 놓아주는 과정 속에서 당신은 도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가진 것에서 즐거움을 누리되
집착하지는 마라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창조물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라. 우리는 하나다.
당신의 본질인 이른바 ‘없음’에 주의를 기울여라. 텅 빈 그 공간은 모든 창조를 책임지는 ‘눈에 보이지 않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신 내면의 자아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은 바로 순수한 사랑과 어짊이다.
내면의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당신에게서 따로 떨어져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 신비로운 중심을 찾아서 탐험하라. 육체적인 자아에 둘러싸인 공간, 그곳으로부터 당신의 모든 생각과 이해가 흘러나온다. 긍정적이려고 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대신, 단순히 당신 존재의 본질에 섬세한 관심을 기울여라.
도의 길은 억지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순수한 사랑 같은 내면의 중심이 그 쓰임새를 작동시키도록 놓아두라.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들이 당신의 육체에 들어왔다가 다시 떠나도록 두라. 마치 들숨과 날숨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라.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본질의 놀라운 힘을 살피는 데 매일매일 조금씩의 시간을 쓰겠다고 다짐하라.
노자는 우리가 감각적인 즐거움과 경험에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감각적인 것에만 몰두하면 결국 환상에 불과한 외형 중심의 세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모든 것은 오고 가기 마련이므로 물질이 중심인 세상의 본질은 잠시 동안의 덧없는 상태일 뿐이다. 우리가 사물의 표면에 드러난 색깔에만 집착하면 결국 그 껍데기 너머의 것은 볼 수 없다. 온 신경을 피조물에만 기울일 때, 우리는 창조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창조 행위 너머의 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창조성을 잃는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은 감각의 서로 다른 영역들이다. 만약 감각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믿는다면 삶은 노자가 “말 달리고 사냥하는 것”이라고 말한 그것으로 인해 황폐해질 것이다. 이렇게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에너지의 낭비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노력함에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생각에 당신은 결코 내면의 평화와 만족에 이를 수 없다. 노자는 이런 무모한 추구가 끝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말한다.
성인이나 현인처럼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세상에 살면서 그와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인은 물질적인 유혹이 아닌 내면의 신념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오감을 현혹하는 것들을 멀리하고,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도 고요히 즐긴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성인은 자신의 무한한 본질을 깨닫고 세상의 겉모습이 덧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잠시 거쳤다 떠나는 우리의 육신도 이런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성인은 또한 겉모양을 좇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기에 부와 명성에 유혹당하지 않는다.
초자연적인 시선으로 모든 생명을 바라보라. 당신은 물질적인 성취를 추구하는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본질은 이 물질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외부에 관심을 갖는 대신 그것이 안쪽을 향하게 하라. 더 많이 바라고, 축적하고자 하는 외부의 기준을 따르지 말고 경외와 감사의 마음을 내면의 기준으로 삼아라. 아름다운 풍광을 보거나 매혹적인 음악을 듣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감각적인 즐거움 안에 자리한, 꽃을 피우는 것과도 같은 기적을 생각하라. “드러나는 것이 아닌 내면의 것을 취하는” 성인처럼 행하라. 가고 옴의 덧없는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흐르게 하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타인의 의견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독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들이 우리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우리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우리 자신의 생각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몹시 괴로워진다.
당신은 자신만의 독특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본성을 통해 도의 본질을 믿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근본적인 존재, 즉 독립적인 마음을 강하게 만드는 ‘타고난 자신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라.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남들이 선호하는 지위나 고상한 직책을 맹목적으로 추구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외부의 신호에 의존하는 삶이다.
도는 어떤 일에 대해 강요하거나 간섭하는 법이 없다.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도록 내버려둘 뿐이다. 당신이 하려는 일에 어떤 허락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완벽한 조화에 따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어떤 반대에 부딪치게 되더라도 그것 역시 조화의 한 부분이다.
도의 정신 속에서는 다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외부의 칭찬과 동의를 추구하지 않고, 당신이 타고난 진정한 본성을 따르게 될 것이다.
세속적인 자아는 결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진정한 자아를 굳게 믿어라. 독립된 마음으로 내면의 본성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당신의 비전을 존중하고, 사랑 가득한 도의 본질과 어우러진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생각을 믿어라.
지금 당장 자신에게 물어보라.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거나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외부의 압력이 없다면, 나만의 고유한 본성은 무엇일까?
무엇이 되라는 압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본성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가운데 하루를 살아라.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그것이 될 수는 있다.
정보가 아니라 영감 속에 자신을 빠뜨리라
모든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는 그 영원한 원칙을 끊임없이 자각하라. 우연히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신을 느낌으로써 당신은 좀 더 신과 닮아갈 것이고, 그 연결고리를 녹슬지 않게 할 것이다. 당신에게 다시 균형을 가져다주고 에고가 사라진 진정한 본성과 조화를 이루게 할 것이다.
당신의 존재와 다른 모든 창조물은 고요함에서 태어났다. 노자가 ‘통나무’라고 묘사한 창조적이고 간결한 상태에 머물러라. 삶과 더불어 기꺼이 흐르고, 도의 영원한 힘에 순응하는 마음을 가져라.
언젠가 불쑥 솟아올라 운명을 시작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흙 속의 새싹과 같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자연의 어떤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창조는 스스로의 계획표에 따라 저저롤 이루어진다. 당신은 신이 준비한 순서에 따라 태어난 것이다.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주어질 것이다. 갖고자 하는 욕심을 놓아버리고 도가 완벽히 펼쳐질 것을 믿어라.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도와 발맞춰 나아가라.
결국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이 맑아진다.
꿈을 좇아가는 그 걸음을 멈추라
그 꿈들이 적절한 순간에, 완전한 순서에 맞춰서 당신을 찾아오게 하라. 미친 듯이 내달리는 당신의 속도를 조금 늦춰라. 동굴처럼 ‘텅 비어 있음’을 실천하고 통나무처럼 모든 가능성에 스스로를 열어두라. 매일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여 고요해지는 연습을 하라. 인생을 통해 당신이 경험하고 싶은 모든 것을 상상하라. 그러고는 놓아두라. 마치 도가 이 땅 위의 모든 만물에게 그러하듯 당신에게도 완벽하게 작용할 것을 믿어라.
서두르거나 무엇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삶을 관리하려 들지 말고 관찰자인 동시에 수혜자가 되라. 당신은 서두르지 않고 펼쳐지는 도의 방식으로 생활을 지배할 수 있다.
삶의 흐름에 올라타
그 흐름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려가라
억지로 애쓰지 말고 도의 지혜를 믿어라. 당신에게 와야 할 것은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 때 찾아온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내내 욕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당신 내면을 통해 흐르는 영원한 지혜를 믿어야 할 시간이다. 위터 바이너가 1944년에 번역한 <<노자를 따르는 삶의 길>>은 15장을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냥 흘러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면
삶이 어떻게 그 방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흐름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힘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그들에겐 고칠 것도, 치료할 것도 없다.
서두르지 않는 삶을 위한 멋진 조언이 아닌가?
지금 당장 이 책을 내려놓고, 10분 동안 조용히 앉아 신이 예비한 시간표에 따라 당신이 가진 것과 갖게 될 모든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평화로운 마음으로, 당신의 삶을 이토록 온전하게 펼치는 그 힘에 감사를 드려라.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서두르는 마음을 놓아버려라.
변화를 파괴적이고 불필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삶의 수많은 변화들은 도 중심의 생활 속에서 긍정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이라는 사실을 알면 변화는 자신의 고유한 목적과 의미를 향해 삶이 나아가고 있다는 반가운 징후로 인식하게 된다. 변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근원을 경험하게 되고, 치우침 없이 균형 잡힌 관점을 통해 고요함으로 돌아가게 된다. 에고 중심의 생각들을 바꾸고 도와 하나가 되는 환희를 경험하면서 이 과정을 시작하라. 당신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예리하게 관찰하라. 모든 살아 있는 만물의 순환과 조화를 이루라.
만물은 때가 되면 태어나고 때가 되면 물러 간다.
사랑하던 사람이 당신 곁을 떠나면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 매진하던 사업이 실패하거나, 학교에서 퇴학당하거나 혹은 고통스러운 질병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당신은 깊이 좌절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에 갇히면 이것들 역시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신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당신은 “세상일들의 혼잡함 속에” 빠져 “끝이 다시 시작이 되는” 한결같음을 기억할 수 없다.
현실 속에서 ‘시작’은 종종 고통스러운 ‘끝’의 모습으로 위장을 해서 나타나곤 한다. 현재의 실망스러운 일 너머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것을 알면 “이것 역시 지나갈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당신이 만물을 바라보는 법을 바꾸면 당신이 바라보는 그 만물들이 달라짐을 인지하라.
당신의 모든 감정이 순환의 주기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예를 들어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슬픔을 관찰하면서 그 슬픔의 끝이 새로운 시작으로 전환되게 하라. 그러한 당신은 도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합리성은 대중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특별한 관계를 위해서는 독약과 같다. 특별한 관계, 그것은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이며, 서로 끌리는 감정에 의해 유지되고 깊어진다. 머리가 가르치는 대로 하지 마라. 그저 자연이 마음에 심어둔 것을 따르라. 이것이 노자의 가르침이다.
세상은 온통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노자는 당신의 가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라고 말한다. 다른 어느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 당신에게 알려줄 수 없다.
“나는 몸가짐이 단정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비범한 존재다. 제도적인 기록이나 은행 잔고와는 상관없다.” 이것이 살아가는 방식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다짐하라.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에서 벗어나면 즉시 내면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세속적인 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데서 벗어나 주어진 삶을 경험하라.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지금 여기에 존재해야 한다. 갈망은 버리고 감사의 마음만 간직하라. 옳은 일을 하는 데 있어 의심하는 마음은 내려놓아라. 만약을 걱정하는 마음과 미래를 위한 목표도 모두 놓아두고 대신 이 순간의 힘을 따르라. 여기에 존재하라.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다른 어딘가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현재의 순간들을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성인은 언제나 ‘현재’에 완전히 몰입한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Be Here Now’의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라.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의 속도를 늦추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대한 기대로 매 순간을 채우는 노력을 멈추라.
위대한 근원이 이끄는 대로 그저 자신을 내맡기면 된다. 미래에는 더 많이 가져야 하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현재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온전하고 완전한 존재로 바라보라. 당신은 모든 과정 속에서 언제나 존재하는 무한한 풍요로움과 영원한 빛의 증거가 될 수 있다. 부족함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이 위대한 근원이 모든 존재에게 그래 왔듯 앞으로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어라.
노자는 더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삶을 단순하게 만들라고 한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았다고 깎아내리거나 무지하다고 놀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당신은 이 자리에 항상 손님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오는 내면의 평화를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언가라는 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당신은 더 이상 다른 누군가가 되려는 욕망이나 무언가를 얻으려는 욕심에 갇혀 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애쓰는 대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기를 선택한 것이다.
만물을 주관하는 힘이 그 모두를 바로 당신을 위해 조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만물의 근원과 당신 자신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삶
당신을 들여다보라. 당신은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도의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애쓰고 노력하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재촉한다. 명예를 좇고 쾌락이나 목적을 추구하도록 몰아붙인다. 노자는 정확하게 이와 반대로 행동하라고 이른다. 치열하고 무의미한 경쟁에서 벗어나 걱정하고 싸우는 대신 도와 조화를 이루어 마음을 평화롭게 하라.
노자는 집요한 걱정과 두려움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주라고 한다. 도는 언제나 이 세상과 만물을 보살핀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고, 앞으로도 또한 그럴 것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을 놓아버려라
그저 당신이 살고 있는 우주의 완전함 속으로 녹아들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라.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바로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제공된다. 이 순간 속에 존재하라.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얻거나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쓰는 마음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라. 이것이 도의 평화를 느끼는 훈련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라.
“삶은 정말로 완전하다. 신의 따스한 사랑은 모든 곳에 미치고 어느 누구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바로 이 힘이 나를 인도해줄 것을 믿는다. 여기에 내 에고가 끼어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걱정도 두려움도 없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 얼마나 자유로워지는지 한없이 느껴보라.
매일 마음을 내려놓고
신에게 맡기는 시간을 가져라
“마음을 내려놓고 신에게 맡겨라.”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라. 놓아버리는 것은 아주 뚜렷하고 분명한,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경험이다. 이는 애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당신의 이런저런 요구 사항들을 내려놓아라. 당신의 인생에서 무언가가 빠졌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함께 내려놓아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변화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바로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고 마음 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긴장을 풀고 이 깨달음 속으로 빠져들어라. 그리고 계속 반복해서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신에게 맡긴다. 나는 모든 것을 주는 위대한 어머니의 젖을 먹는 영광스러운 아이다.’라고 되새겨라.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를 행하라. 즉, 이 상황이 애씀에 길들여진 당신의 에고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사실은 위대한 어머니가 당신에게 주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여라.
당신을 포함한 모든 창조물은 형태가 없는 에너지에서 형상으로, 정신에서 육체로, 이름 없는 도에서 이름을 가진 객체로 움직여가는 일련의 운동 작용이다.
만물의 근원이 도와 규칙적으로 소통하라. 도에서 길을 구하고 그 신성함에 대해 명상하라. 보이지 않는 도를 공경할수록 자신이 도와 연결되었음을 더 많이 느낄 것이다. 도와 연결되면 에고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인 걱정, 스트레스, 불안 등에서 벗어날 것이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부나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당신은 자신을 포함한 ‘만물의 살아 있는 숨결’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짐으로써 따뜻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도와 신성한 협력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됨으로써 당신은 더욱 안전함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가진 비전의 정당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애쓰지 마라. 그들 또한 준비가 되면 그들을 위한 스승을 만날 것이다.
마음속에 품은 목적이 없기에 하는 일마다 이루어진다.
파괴적인 에너지가 찾아오면 구부러져서 부러짐을 막아라. 저항하지 말고 그것이 흐르게 함으로써 폭풍을 이겨낼 만한 때를 찾아라. 싸우는 대신 힘을 뺀 채 직면한 모든 것과 어울려 함께 가면 당신은 ‘도의 시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만약 당신이 부, 지식, 건강, 사랑, 그리고 도를 상징하는 다른 모든 것들을 원한다면 그것들을 잘 받아들여야만 한다. 노자는 가득 채우기 위해 먼저 비워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집착이 가득 찬 당신의 자아 속으로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다. 따라서 신념, 소유, 에고가 이끄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린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것이 도와의 어우러짐이다. 그래야만 어떠한 관점이나 방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유연한 사람은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다. 또한 그 무엇도 증명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모두 도의 책임 하에 있으므로.
온전함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긴다.
도는 어떤 목적도, 욕망도, 비난도 품지 않는다. 그저 어디든지 흐른다. 도는 창조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도와 조화를 이루는 방법은 어떠한 목적에서 벗어나 성과에 대한 걱정 없이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매 순간 만물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창조의 근원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이렇게 산다면 실패는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찾고 근원의 지혜를 완전히 믿는데, 어떻게 실패할 수가 있겠는가? 당신의 삶에서 실패가 사라지면 노자가 “하는 일마다 이루어진다.”라고 말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목표나 목적이 없는 사람이 되라. 그 대신 자연의 힘에 순응할 수 있도록 단단히 잘 서 있으라. 마치 허리케인 같은 바람 속에서 허리를 구부린 나무처럼 처음부터 그 힘을 느끼도록 자신을 내버려둠으로써 무슨 일이 닥치든 기꺼이 받아들여라. 비판하는 이가 있거든 기꺼이 들어라. 강력한 힘이 당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더라도 싸우지 말고 머리를 숙여라. 부러지는 대신 몸을 구부려라. 그리고 경직된 규칙의 틀에서 벗어나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부러지지 않고 보호받을 것이다.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어려운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다짐하라.
“내 안에는 경직된 마음이 없다. 나는 어떤 바람이 불어도 스스로를 굽혀 부러지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그 바람의 힘을 이용해서 더 강해지고 앞으로 나아질 것이다.”
도의 에너지를 향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기회로서 폭풍을 받아들일 때, 그 폭풍은 당신의 진정한 본질인 사랑을 더 많이 드러내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도에게 자신을 열라.
그리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믿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순환하는 자연의 일부가 되는 쪽을 택하라. 심지어 하늘도 강압적인 행위를 지속할 수 없다. 모든 행위는 일시적인 모습을 지녔으며 다시 고요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모든 것은 가라앉기 마련이다.”라고 할 수 있다.
다툼이나 긴장의 한복판에 있다면 잠시 멈춰서 고요와 평화가 다가오고 있음을 떠올리라.
자연이 거세게 몰아치다가 어떻게 다시 고요해지는지 기억하라.
당신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순환 법칙의 일부다. 만물은 그 근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 자연스러운 선함과 함께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불안과 실패 속에서 주어진 순간들을 낭비하길 원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의 에고 속에 있지 않다. 에고는 밀어붙여서 일을 성취하거나 높은 위치에 오르려는 당신의 능력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가 억지가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만물을 책임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몹시 파괴적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순간에는 완전한 자애로움일 수 있다. 우주의 자연스러움에 순응하면 만물을 창조하는 힘이 당신을 통해 흐른다. 에고가 이끄는 계획은 뒤로 미루고 당신을 창조한 힘과 함께하라. 그 힘이 당신의 삶을 이끌도록 하라.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 무시무시한 바람을 파괴적이고 불편한 사건으로 보지 말고 곧 지나갈 일시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라. 강압적이고 불쾌한 상황이 닥치면 자연의 순환 고리를 찾아내라. 그러고는 이렇게 다짐하라.
“이것은 일시적인 방해일 뿐이다. 나는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런 후 이 순간의 상황에 마음을 열고 그 안에서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관찰하라. 이것이 자연의 방식임을 기억하라. 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자연의 방식에 마음을 집중하라.
받는 사람보다는 주는 사람이 됨으로써 도의 길을 가라. 보답을 바라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라. 자랑하거나 칭찬받고 싶은 욕망을 쓸데없는 것들로 간주하라. 당신이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구보다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에고의 길을 걷는 것이다. 도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당신의 작품을 창조할 수 있게 해주는 손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갖고
당신의 삶을 변화시켜라
현재 당신의 상태, 즉 이루거나 받은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면 당신의 삶은 변화할 것이다. 깨어 있는 동안, 그리고 잠들 때와 일어날 때 “감사합니다.”라고 조용히 반복해보라. 그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다. 하나님, 알라, 신, 크리슈나, 부처 혹은 자기 자신이어도 좋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이름들은 전해져 내려오는 위대한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햇빛, 비, 그리고 당신의 육체에 감사하라. 뇌, 심장, 간, 심지어는 발톱에 대해서까지 감사하는 날을 가져라! 이렇게 감사하는 연습을 하면 당신이 에고에 갇히게 되더라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만물의 진정한 근원에 집중할 수 있다. 이 조용한 연습을 매일 실천하라. 당신이 잠자는 침대, 이불, 베개, 그리고 방에게 감사하라. 아침이 되면 눈앞에 놓인 것들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그러고 나서 이 땅의 다른 누군가에게 다정한 무언가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라.
본래의 겸손함으로 돌아가 모든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순간, 당신의 삶에서 자만심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도의 방식이다.
우주란 영원히 움직이며 살아 있고,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불가분의 실재
우리는 고립된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궁극적 실재인 우주와 공명하고 연결된 존재
모든 만물의 내면에 존재하는, 겉모습에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하고 영원한 에너지
릴리안 스미스는 1954년에 출판된 그녀의 책 <<여정>>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람이 그 삶의 하루하루를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보다 큰 무언가, 자기 자신보다 더 활기찬 무언가, 자기 자신보다 더 오래된 무언가,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무언가, 즉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이어질 무언가와 교감하는 것이다.
노자는 이 땅과 땅 위의 사람들, 그리고 하늘을 깊이 살피고 거대함을 깨달으라고 이른다. 그다음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 역시 그들 모두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자신 안에 숨겨진 거대함을 발견함으로써 창조의 거대한 신비와 친구가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거대함을 알아채라. ‘거대함이라는 유산’을 가지고 당신은 도를 의식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거대함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당신에게서는 오직 거대함만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내면에 열등함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믿음에 걸맞은 사건들만 벌어질 것이다.
자신의 거대함을 믿으라
지금 당신이 갖고 있는 육체가 당신의 전부는 아니다. 육체는 일시적인 것이며, 당신은 자신이 태어난 미지의 장소로 돌아가고 있다. 당신은 순수한 거대함이다. 모든 생명을 창조한 바로 그 거대함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 생각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라. 그러면 창조의 힘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기게 될 것이다. 적절한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당신이 바라던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재정적인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거대함은 더 큰 거대함을 스스로에게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마치 당신이 현실을 불평하면 그러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요동치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물음에 다음과 같은 대답이 자동으로 튀어나올 수 있도록 계속해서 다짐하라.
“나는 거대함에서 비롯되었고, 거대함을 끌어당긴다. 내가 바로 거대함이다.”
자신이 탁월하지 않다는 믿음 뒤에 숨어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애쓰는 것은 지나친 반응이다.
이런 그릇된 신념들을 찾아라. 그리고 그들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으로 변모할 기회를 주라. 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거야.’가 아닌,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내면의 변화를 이루어내라. 그러고 나서는 당신이 소망하는 것이 정말로 이루어질 것임을 믿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증거라도 찾아내는 과정을 시작하라.
다음의 격언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
거대함을 가진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생각해보라. 이제 당신은 궁극적인 모순의 삶을 살 수 있다. 당신은 거대한 사람일 수도 있고 동시에 보잘것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가 느끼는 것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필요가 없다. 비록 세상에 비난과 모함이 가득할지언정 우리의 감정과 행동은 우리 자신의 몫이며, 주변의 환경이 우리의 마음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정하는 힘은 오직 자신에게 달려 있다. 혼란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할지라도 평화로운 내면을 유지하면 삶을 달라진다.
평온하지 못하다고 원망을 늘어놓는 것으로는 당신이 원하는 존재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자기 통제력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 느낌에 대해 책임질 때에야 피어난다.
조급한 삶에 대한 처방은 바로 고요함을 택하는 것이다. 도의 고요함은 만물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소란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도가 되라. “고요함은 조급함의 주인이다.” 당신은 매 순간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침착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사랑과 빛으로 당신을 감싸겠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내면의 빛을 따라 산다. 이 내면의 빛은 훔치는 행위가 진실된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 그 위에서 빛난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잠글 필요가 없다. 도의 완전함인 내면의 빛을 따라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재산은 안전하다. 도움이 필요하거나 방향을 묻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근원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노자는 계산하거나 보답을 바라지 말고 그냥 주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도의 본성이며, 당신이 곧 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빛에 따라 살 때, 주는 것과 받는 것은 하나가 된다. 당신을 이끄는 내면의 빛을 믿어라. 그것이 당신의 숙명이다. 당신은 부모나 국가, 또는 어떠한 문화로부터 받은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도로부터 물려받았다.
좀 더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삶에서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완벽하게 처리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당신은 철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내면의 빛은 그 어떤 여행 안내서보다도 믿을 만하다. 이 빛은 당신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이로운 방향을 알려줄 것이다. 도에 대한 믿음이 쌓이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의 탁월함과 명쾌함에 경탄할 것이다. 공포, 걱정, 스트레스, 조급함은 일렁이는 도의 빛 속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당신의 단편적인 모습들이 될 것이다. 그 빛은 당신의 길을 비추고 모든 사람을 당신의 일부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노자는 “지혜를 갖고 어느 하나 포기하지 말고 모든 존재를 치우침 없이 도와주라.”라고 말한다. 남을 돕는 데 있어 다른 사람의 규칙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아낌없이 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당신은 도라는 내면의 빛을 따르기 때문이다. 주는 것과 당신은 하나다. 받는 것과 당신도 둘이 아니다. 이런 결합 속에서 당신은 모든 사람과 하나다.
최소한의 계획만 가지고도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라. 다른 사람이 마련한 획일적인 계획에 의존하지 말고, 당신을 이끌어줄 도의 에너지를 믿도록 스스로를 허락하라.
사람들의 행동이나 겉모습을 비판하지 마라. 대신 다음의 문장에 따라 생각을 바꿔보라.
“나는 나 자신의 학생이며, 이것을 기회로 하여 비판하기보다는 교훈을 얻는 법을 배울 것이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대신에 도를 실천함으로써 서로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단순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전쟁, 다툼, 혼란, 그리고 심지어는 질병까지도 사라질 것이다.
삶의 강물이 당신을 통해 흐르게 하라. 하늘 아래의 계곡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허락하는 비옥한 자비의 공간이 되라.
당신의 길을 가로막는 원인들을 모두 끌어안고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의 계곡이 되라.
억지로 바꾸거나 바뀌지 않으려고 버티지 말고 삶의 배를 저어 부드럽게 흘러가라. 당신이 시작된 그곳으로 당신을 데려갈 도의 완전함을 믿어라. 노자는 결국 마음을 내려놓고 도에 맡기라고 말한다. 당신이 만들어낸 에고를 무너뜨려라.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을 그 세상 안에 존재하게 하라.
에고에 따라 살기를 멈추고, 당신의 골짜기 안으로 흐르는 도를 의식할 때 영원한 힘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자만심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욕구가 아닌, 무한한 본질과 조화를 이룬 선과 덕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라. 영원한 힘과 조화를 이룬 존재로 자신의 이미지를 바꿔라. 그러면 당신이 깨달으려고 하는 덕 있는 삶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삶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내버려두라.
마치 날숨을 위해서 들숨을 삼켜야 하듯이 당신은 ‘뒤처지는 경험’을 통해 앞설 수 있다.
그 모든 것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오늘의 경험을 포함한 모든 일은 때에 맞춰 다가온다.
에고가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한낱 환상일 뿐
성장을 막는 것은
지나친 자극, 지나친 친절.
우리는 사랑하는 것들을
홀로 내버려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도는 오직 창조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의지만을 품고 있다.
학문을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점점 더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지식이나 욕망이 점점 더 줄어든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해 걱정이 되거나, 고통스럽거나, 화가 날 때도 고민의 원인으로 지목한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둬라. 정신의 에너지를 이동시켜라. 자신의 감정에 대한 원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말고 도가 자유롭게 흐르게 하라. 그리고 당신 자신도 나무라지 마라! 그냥 도가 펼쳐지도록 하라. 당신의 동의 없이는 그 누구도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수 없다고,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권한을 주지 않을 거라고 자신에게 말하라. 감정들을 자유롭게 경험하되 그것들을 ‘틀렸다’고 폄하하거나 몰아내려고 하지 마라. 이제 도 속으로 흘러들어가라! 이런 간단한 훈련을 통해 당신은 어떤 불편한 순간에서도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단계로 들어서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까지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대신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집중하라.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스스로 책임을 짐으로써 당신은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꾼다면, 무한한 가능성의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그저 조용히 사랑의 에너지를 보내도록 하라.
다른 사람들이 방해받지 않고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기회로 활용하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자신에게 강요하지 마라. 그보다는 당신의 순수한 본성이 빛나도록 하라.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일러주라. 다른 누구보다 뛰어날 필요가 없다. 승리할 필요도 없다. 1등이나 27등 같은 특정한 등수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에게 그저 타고난 그대로 존재할 권리를 허락하라. 하나뿐인 당신의 존재를 간섭하는 일을 그만두라.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 있고, 부유하며, 성공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 당신이 지고 있는 짐을 내려놓아라. 그 자리에 도를 향해 다가서는 내면의 다짐을 채워라.
전지전능한 손님으로 하여금 만물을 바로잡게 하라. 그리고 당신은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라.
법규를 준수해야만 덕에 이르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덕은 당신의 순수한 본성과 공명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에게는 무엇이 적절하고, 선하며, 무엇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합법적인지를 말해주는 어떤 법전도 필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법에 미혹되기보다 자신의 높은 본성이 이끄는 사랑을 실천하도록 자신을 믿어라.
16세기 시인이며 고난의 성자인 요한이 쓴 글은 이러한 자세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나는 슬펐고 그래서 산책을 나섰다.
나는 들판에 주저앉았다.
토끼 한 마리가 내 처지를 눈치채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때로는 누군가를 돕는 데 이 정도면 족하다.
말하지는 않아도
이해심으로 가득하고
사랑이 넘치는 피조물들과
그저 조금 가까이에 있는 것.
그들은 단지
아름다운 이해의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다.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마차의 각 부분들은 소용이 없고
우주와 어울리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우주와 조화를 이루어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겸손함이다.
지나친 영광은 영광이 아니다.
옥처럼 빛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니
돌처럼 소박한 소리를 내라.
정신이 생명을 낳는다.
“나는 진정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시작된 곳에서 멀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있는가?”
항복하라!
이것이 약함의 전부다. 당신의 보잘것없는 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반면에 도는 당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나는 지금 좋아하는 공간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종이 위에 신비롭게 펼쳐지는 단어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항복했다. 나는 신이 모든 책을 쓰고, 모든 음악을 작곡하고, 모든 건물을 짓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는 힘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혁신과 창의성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생각하는 힘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고 생각하는 힘은 이완과 휴식을 필요로 한다.
작은 일이지만 살다 꼬이는 일이 생기면 나는 그것이 무엇을 경고하는지 묻곤 한다. 그러면 그 일은 내게 썩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일은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을 것이고 나는 그 메시지를 받아들인다. 그러면 내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내가 써가는 것 같지만 종종 글이 스스로 자신의 길로 나아가는 듯 보이는 것처럼, 삶도 우리를 넘어 스스로 흘러가는 듯이 보일 때가 있다. 삶의 강물 위에 내가 떠서 흐르는 것 같을 때, 그때는 잠시 쉬고 배를 탄 듯 그 삶이 어디로 흐르는지 관조하고 즐길 일이다. 즐기다 보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여울에 다다를 것이다. 그때 더 갈 것인지 내릴 것인지 결정하면 된다. 여행은 내가 의도하지만 그 여행 중에 어떤 일, 어떤 사람이 기다릴지는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의도하지 않은 모험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여정은 살 만할 뿐 아니라 오히려 흥미진진한 것이다.
날씨가 흐리면 빗속을 걷게 될 것이라 생각하라. 햇빛이 쨍하면 지금 바닷가로 달려가라. 지루하면 자고, 그래도 권태로우면 지도를 펴놓고 눈을 감은 뒤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쿡 찍어라. 그리고 배낭을 지고 그곳으로 가라. 권태로움은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행복하면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돕고, 삶이 시시하면 책을 읽어라. 그래도 시시하면 술을 마시고, 그래도 시시하면 글을 써라. 그림을 그리든지. 음악을 들어도 좋다. 그래도 시시하면? 기다려라.
그래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진짜 내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법 하나를 말해줄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일을 만나려면, 잃을 때도 있어야 한다.”
머리를 믿지 마라.
겉으로 보이는 것들을 무시하고 진실 안에 머무르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중요하다.
도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을 전혀 다르게 바라본다. 내면의 평화가 곧 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애쓰지 않을수록 더 쉽게 이룬다. 당신이 마음을 느긋하게 갖고 도에 따라 저절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둘 때 일이 이루어진다. 이는 목표를 갖고 다른 사람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맞춰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에게 맡겨라.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순수함과 맑음을 보라. 사람이나 사물의 겉모습은 변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선함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숨겨져 있고 이름도 없으니 찾아서 꼬리표를 붙이는 데 집착하지 마라.
무심하게 보이는 무언가를 보면서 그 안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라. 도는 그 성실함을 증명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언제나 그 자리, 그리고 모든 곳에 존재한다.
도가 당신의 삶으로 스며들어와 마법을 펼치도록 하라.
무언가를 진실로 받아들이려면 물적 증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버려라. 도는 영원히 숨겨져 있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그러니 그저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여라. 물질적인 형태 속에서는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경계도 없고, 이름을 붙이려는 순간 사라져버릴 것이다.
잃음으로 얻기도 하고
얻음으로 잃기도 한다.
덜어냄으로써 얻고 더함으로써 잃는다
당신의 집착을 점검하라
물건, 지위, 문화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애착조차도 당신이 위대한 도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로막는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지켜보고, 걱정하고, 보호하고, 다듬고, 구분한다. 그리고 그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달리 말하자면, 얻기 위해 애쓰느라 조화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재산을 대가 없이 나눠주고, 가지고 있는 물건과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욕심을 놓는 연습을 하라. 당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사물들과 연결된 끈을 상상하고 그 끈들을 끊어라. 소유자가 아닌 관찰자의 입장에 서라. 이것이 바로 당신이 도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방법이다.
시인 하피즈는 말한다.
이제 모두를 신처럼 바라보라.
그러나 이를 비밀로 하라.
부드럽게 사는 것은 물 흐르듯이 사는 것이다.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고 머리가 몸에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알아서 물을 가르고 나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지고 그저 물 속에 있기만 하면 된다.
욕망들이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라
평온하 마음으로, 허먼 멜빌이 “신의 유일한 음성은 침묵”이라고 말한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라.
성공이나 소유에 부여한 가치와 의미를 바꿔라. 그것들은 도와 당신 사이의 유대감을 약하게 만들 뿐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힘을 쓰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는 혹은 만족을 찾아 끝없이 애쓰는 불합리한 순환의 덫을 경계하라.
삶에 있어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를 따져보면, 사랑과 충만한 감정은 언제나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원칙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기 때문에 당신은 온전히 사랑받고 있으며 모든 면에서 풍요롭다고 느낄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관계는 바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라.
“내 삶에서 첫 번째 우선순위는 내 존재의 근원과 나 사이의 관계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우선이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다른 것들도 더 많이 바라지 않게 될 것이다. 지상낙원에 살며 애쓰지 않고도 도를 따르게 될 것이다.
바라고 원하고 소유하는 데 매달릴수록 당신은 도와의 관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멈추어야 할 때를 알면, 평생 애만 쓰고도 성취하지 못하는 어려움과 이별하게 된다.
채우지 않아도 아이스티가 계속 흘러나오는 주전자를 떠올려보라. 당신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도가 하는 일이다. 도는 결코 마르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도는 고갈될 수가 없다. 노자는 당신에게 다함이 없고 언제나 가득한 도처럼 되라고 말한다. 편협해지지 말고 고요하며 평온해지라고 한다. 이 세상과 그 안의 모든 생명들을 존재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이 펼쳐지게 하라. 내면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간으로부터 느껴지는 그것으로 하여금 참된 운명의 방향으로 이끌게 하라.
비록 당신의 에고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불완전한 것들을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바라보라.
더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 이 단계를 거쳐야 한다.
결함 속에 감춰진 완전함을 보라.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를 신의 피조물이라고 인식하라. 이것은 당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떤 실수나 실패를 저질렀는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비록 이러한 표면적인 문제들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반복된다고 해도 말이다. 자아의 근원인 영원한 도는 흠이 없고, 곧으며, 완전하고, 진실하다.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들을 싫어하고 비판하느라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결점투성이라고 여겼던 도이자 완전한 자신의 자아에게 도움을 청하라. 스스로 애정을 갖고 감싸 안으면 사랑받지 못해서 상처받은 겉모습과 감정은 평온하게 가라앉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완전함을 허락하라
겉으로 드러난 당신의 모든 불완전함에게도
도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도록 두라. 도는 편협한 판단을 하지 않으며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도를 잃는 것보다 큰 잃음이 없고
지나친 욕심보다 더한 재앙이 없으며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비극이 없다.
가장 큰 허물은 언제나 더 많이 원하는 것이다.
만족만으로 충분하다.
만족 안에서 진정으로
영원한 환희를 찾을 수 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매일 감사하고 만족하라
매일 아침, 당신의 발이 땅을 딛고 일어설 때마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당신을 통해 자유롭게 흐르는 도의 신비로운 힘을 불러들이고 하루 동안 당신의 반응을 살펴보라. 이러한 방법으로 감사와 만족을 간절히 원할 때 당신의 근원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노력하고 힘을 써야만 성공한다는 믿음을 버려라.
본성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정확히 알고 있는 심장처럼 당신의 온전한 자아에 대해 생각하기를 바란다. 즉, 당신은 세상을 알기 위해 어디에도 갈 필요가 없다. 당신이 이미 그 세상이기 때문이다. 심장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런 노력이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당신의 심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 도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육체와 물질세계라는 ‘형태 속에in-form’ 머물면 정보information를 얻는다. 그러나 형태form를 넘어서면 영감을 얻는다. 그러므로 정보가 항상 지식은 아니며, 지식이 항상 지혜도 아니다. 지혜는 당신이 깨어나는 순간, 당신과 당신의 심장을 연결한다. 이것이 도의 작용이다. 노자는 더 많은 사실을 알기 위해 애쓰는 것과 그 자체로 완전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차이를 인식하라고 이른다. 이러한 지혜의 관점을 가지고 살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는 깨달음의 느낌을 믿으라
모든 일이 이치에 맞게 돌아갈 때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어서 당신의 타고난 창조성을 경험하라. 마치 흐르는 물이 썩지 않는 것처럼 당신은 간섭할 필요도 없이 당신의 내면에서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자연스러운 힘에 의해 움직일 것이다.
도에 이끌려 내면에서 쏟아지는 창조적인 무언가를 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라. 그림 그리기, 시 쓰기, 공원 산책하기,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무엇이라도 좋다. 어떤 식으로든 그냥 스스로를 놓아주라. 이제부터는 이 도의 마법을 당신 삶의 모든 면에 더 자주 불러들여라.
학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이고
도는 하루하루 덜어내는 것이다.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에 이르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진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각자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둘 때 이루어진다.
간섭해서는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
도를 경험하고 그 경험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 원칙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물질에 의지하는 마음을 덜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무언가를 사고 싶다는 욕구를 덜어내기 시작하라.
우리는 빈손으로 여기에 왔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삶 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흠뻑 즐겨라.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스스로의 삶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추가하느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한 깨달음 속에서 더 큰 기쁨을 만끽하라. 덜어내는 삶이 곧 도의 길이다.
무엇을 사는 대신 그동안 쌓아온 소유물들 중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 보라.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우주 속에서 소유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아라. 본질은 형태가 없기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노자는 말한다. 사물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내버려둘수록 당신은 도와 더 조화롭게 살고 있는 것이다. 꽃과 구름, 석양과 폭풍, 별, 산, 그리고 우연히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즐겨라. 세상과 함께하라. 그것과 열애를 하며 그 속에 살되 소유하려 들지는 마라. 이것이 평화의 길이다. 이것이 바로 도의 길이다.
비난하는 대신 그냥 바라보라.
당신의 세계관이 변하면 당신의 그 선함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퍼져나갈 것이다.
생각을 바꾸고 비난하지 않는 삶을 살아라. 이런 관점에서 잠시 흔들렸다고 해서 자신을 ‘그드라’고 비판하거나, 잘하고 있다고 해서 ‘대단하다’고 판단하지 마라. 당신은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무한한 ‘개방성’과 유한한 ‘한계’가 함께 뒤섞인 존재임을 명심하라. 때때로 비난하는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바라볼 필요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진짜 모습뿐이며, 당신의 본성은 비판적이지 않다. 당신은 모든 사람 속에서 자신을 본다. 그들도, 당신 자신도 비난할 필요가 없다.
모든 면에서 선함과 어짊을 펼치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
확고한 관점을 버리고 자신을 유연하게 바라보라.
비난하는 사람이 아닌 지켜보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라.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의 관점에 매달리는 것은 삼가라. 모든 사람, 그중에서도 특히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내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고 어질게 대하면서,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함을 잊지 마라.
“나는 이 사람에게서 나를 본다. 그리고 비난이 아닌 선함의 자리에 머물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살아가는 무한한 도다.
당신의 관점이 달라짐으로 인해 세상도 변하게 된다.
노자는 우리에게 시야를 넓혀 자신을 도의 창조물로 바라보라고 요청한다. 당신이라는 작고 여린 묘목이 다른 무언가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당신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도’라 불리는 이 근원은 우리가 해야 할 일, 귀 기울여야 할 사람, 살아야 할 곳, 숭배하는 방법 등에 대한 일정한 원칙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위대한 어머니인 근원은 당신이 삶의 여정 속에서 내리는 결정에 대해 아무런 참견도 하지 않는다. 그 근원은 당신이라는 묘목이 무엇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 안에서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도라는 이름의 어머니는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는다. 아무런 욕심도, 당신이 치러야 할 전투나 전쟁도, 본받아 행동해야 할 역시도 없다.
궁극적인 근원이 당신을 보호하고 완성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도록 연습하라
자기 내면과 자신을 낳은 근원의 덕을 믿고 하루하루를 살아라. 보살핌, 보호받고 있다는 안전한 느낌은 당신의 소유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 안에 있는 덕의 기운과 당신이 항상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숨은 힘이 당신의 존재를 책임지고 돌본다.
당신은 도에게서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호흡과 행동은, 삶 그 자체인 내면의 덕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힘은 이 글을 쓰는 내 손 안에 담겨 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눈동자 속에 존재한다. 그 힘을 믿어라. 그 숨은 힘 안에서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껴라. 이것이 완전함을 느끼는 데 필요한 전부다.
도는 낳지만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도처럼 살아라. 소유하기보다는 돌보는 사람이 되어라. 그 누구도 통제하려고 하지 마라. 지배하거나 조종하려 들지 말고 그저 성장하게 도와주어라.
놓아버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라. 생각을 놓아버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의 본성을 발견하라. 편견과 관념을 내려놓고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경험하라.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라. ‘다 놓아버리면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당신의 답을 찾는 시간을 가져라. 이 연습을 실천하면서 삶에 감추어진 더 많은 덕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당신과 나의 영원한 어머니를 매일 조금씩 알아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렵지 않다. 존재함을 믿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면 된다. 일단 그 존재를 알고 공경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자신을 포함한 어머니의 자식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모든 만물을 그 어머니의 소산으로 바라보면 겉으로 드러난 덧없는 모습 너머로 도가 펼쳐지는 세상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자식인 만물을 어머니와 별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머니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 의미다. 그러므로 모든 창조물이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다시 돌아가 어머니를 받들어야 한다.
입이 영혼을 지키는 문이라고 생각하라.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그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영혼이 당신의 내면에 안전하게 숨도록 하라. 귀도 마찬가지다. 온갖 풍문과 가치 없는 대화로부터 귀를 덮어라.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함부로 충고하지 말고,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며, 험담하는 데 끼어들지도 마라. 언제 말하고 언제 들어야 할지를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유연함을 통해 당신의 강함을 길러라.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들고 싶을 때면 영원한 어머니의 단 하나뿐인 음성은 침묵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라. 그렇게 하라.
그러면 당신이 자유와 환희 속에서 어머니를 받들고 있다는 것을, 살아 있으면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도처에서 당신을 낳아준 영혼을 발견하고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 무엇도 더 이상 평범하거나 열등하거나 혹은 불필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당신과 당신을 낳은 영원한 어머니, 그리고 다른 모두는 하나다.
당신의 삶을 통해 매일 변화를 만들어내겠다고 맹세하라. 그것은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나쁘다’ 혹은 ‘부족하다’라고 낙인찍는 자리를 거절하고 돌아서는 일 등의 단순한 행동일 수도 있다.
당신의 삶을 도의 일부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세상 속으로 균형을 불어넣어라.
당신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을 품지 마라. 지구를 위한 비전을 세우고, 그 비전에 온전히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라.
나비가 그 날개를 펄럭이면 거기서 나온 에너지가 수천 킬로미터에 영향을 미친다고들 말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바깥으로 뻗어나가고 증식된다. 당신이 선택한 변화가 파괴가 아닌 온전함을 향한 것임을 명심하고 살아라. 분명 어질지 못한 하나의 행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온 우주에 영향을 미칠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침묵 속 축복이나 사랑의 마음은 우주 전체에 걸쳐 울림을 준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 개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모래 한 알에서 세상을
한 떨기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해
손바닥 안에 무한을
한 시간 안에 영원을 움켜쥐라.
당신이 모든 생명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달아라.
가정, 공동체, 나라, 세상을 향해 어진 생각과 행동을 펼치는 하루를 보내라. 가정 안에서는 슬퍼하고 있는 누군가를 격려하라. 공동체 안에서는 욕하고 비난하지 말고 쓰레기를 줍고 재활용하라. 나라 안에서는 고요한 기도를 올리고,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애정이 깃든 기운을 보내라. 그리고 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속해 있는 세상을 위해서도 똑같이 그렇게 하라.
내려놓는 삶을 선택한다면 행운은 살아가는 내내 당신의 것이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순간, 도의 힘을 끌어당기게 된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꿔라. 당신의 삶이 얼마나 행운 가득한 모습으로 변하는지 바라보라.
내려놓는 삶은 걱정, 긴장, 공포를 놓아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위험해 보이는 일에 직면해서도 평안과 행복의 느낌을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근원과 조화를 이루게 되고 강압에 따라 행동하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 노자는 “억지로 된 것들은 잠시 자라는 듯하나 이내 시든다.”라고 일깨워준다.
내려놓음은 삶의 자유로운 리듬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당신을 통해 흐르게 하는 방법임을 알라.
파괴할 수 없는 자신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품어라.
변하지 않는 자신과 조화를 이루면 아무것도 당신을 파괴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위험에 대비하려고 애쓰지 마라. 삶을 살아가는 내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는 그 운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라.
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당신이 가진 잠재력을
새롭게 바라보라
스스로에게 “난 운이 없는 사람이니까,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어.”라고 말하지 말고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행운이 나를 이끌어줄 거야.”라고 다짐하라.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도의 흐름 속으로 당신을 안내할 것이다. 평화가 긴장을 대신하고, 조화가 수고의 자리를 채우며, 수용이 간섭과 강압을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행운이 공포를 몰아낼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다. 심지어 이전에는 불운의 증거라고 믿었던 것들도 이제는 더 큰 조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상징으로 보일 것이다.
내려놓는 삶을 통해 당신은 임어당의 작품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에 담긴 그의 비꼬는 듯한 사고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완벽하게 헛된 방식으로 완벽하게 쓸모없는 오후를 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침묵은 깨달음의 증거다.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하는 것은 들으려는 사람의 필요보다 자신의 욕심이 앞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 애쓰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그저 깊은 만족을 주는 내면의 깨달음을 즐겨라.
당신을 세속적인 규칙에 붙들어 매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라. 이익을 자랑하고 승리를 증명하는 데 몰두하는 삶과 연결된 매듭을 풀어라. “신비한 포옹” 속에서 고요히 도를 바라보라.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불쾌한 눈으로 노려보고픈 충동이 느껴진다면 이는 당신 자신이 내면의 말없는 앎과 멀어지고 있다는 경고다.
소동을 벌이지 마라. 다른 사람들의 행동 방식에 분노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 그러한 자신의 성향을 자각하라. 화가 나서 탁자를 두드리며 소리치고 있다면 멈춰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라. 마치 커다란 바다의 파도와도 같은 당신의 감정이 광대하고 차분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라.
경쟁이 있으면 질 때가 있고,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다. 노자의 사상은 한때 지고 실패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구부리면 도리어 온전해지고, 낡으면 오히려 새로워질 수 있고, 적으면 오히려 많아질 수 있다.”(<<도덕경>> 22장)
죽지만 죽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지 못하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사는 동안 끝없이 죽고 다시 살아야 새로워질 수 있다.
위대한 지도자가 되고자 한다면
도를 따르는 법을 알아야 한다.
지배하려 애쓰지 말고
고정된 계획과 개념을 놓아버려라.
그러면 세상이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다.
가족들에게 강요하던 제약들을 살펴보라. 바람직한 부모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기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기댈 필요가 없도록 교육한다. 당신은 자녀들이 책임감 있고, 건강하고, 성공하고, 거기에 더해 정직하기를 바랄 것이다. 감시하고 간섭해서가 아니라 그들 내면에 있는 본성에 따라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스스로 알아서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라. 무엇을 결정할 때마다 지침서보다는 자신들의 고귀한 본성을 믿고 따르도록 하라.
자신을 내버려두는 기술을 연마하라
자신을 더 자연스럽게, 덜 통제받도록 놓아두라. 아무런 계획 없이 짧은 여행을 떠나라. 본능적으로 끌리는 곳으로 가라. 당신이 가진 권위적인 부분에게 잠시 휴식 시간을 갖자고 말하라.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어느 누구의 규칙에 따라 살 필요도 없으며, 나의 행동을 가로막던 규칙들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함으로써 자신과 세상에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면을 보여주라.
자기 자신을 엄격한 통제가 필요 없는 사람으로 바라보라.
그런 해로운 생각과 행동이 당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것들에 대해 무감각해져라.
당신을 감싸고 있는 보호막을 떠올려보라. 이 보호막은 세상에서 악이라고 인식되는 것들로부터 당신을 지킨다. 오직 도와 조화를 이루는 기운만이 이 막을 통과할 수 있다. 사랑, 어짊, 자비 등의 기운은 모두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해로운 무엇이 당신에게 다가오면 이 막에 의해 튕겨나갈 것이다. 이는 당신이 도 안에서 단단한 믿음을 갖게 되었음을 뜻한다.
내면에 이런 믿음이 있다면 악의 기운이 아무리 사납게 휘몰아친다 해도 당신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당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사랑으로 다스리고, 그 무엇에도 상처 입지 않는 성인이 되라. 그렇게 선언하고 실천하라. 위험의 한복판을 자유롭게 걸어라. 이것은 안전 불감증이 아니라 당신과 도가 하나라는 깨달음이다.
당신에게 열려 있는 보물창고의 문을 보라
언제나 열려 있는 도, 그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가라. 또한 자신을 도의 신성한 창조물로 바라보라. 지금껏 부정적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라도 보배로 가득한 도의 공간 안에서는 결코 부정적일 수 없음을 이해하라. 내부의 신성한 온기에 몸을 맡길 수 있는 편안한 집을 떠올려보라. 모든 불안과 공포를 뒤로한 채 그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라.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는 명상 기술을 이용해서 이 집을 언제든 원할 때마다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피신처로 삼아라. 그것은 신성함 그 자체이며, 언제라도 당신의 성소가 되어줄 것이다.
악한 사람을 내치지 말고
다만 악함만을 내쳐라.
함 없이 함을 실천하고
일함 없이 일하며
맛없이 맛보라.
작은 것을 크게 여기고
적은 것을 많게 보며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
복잡함 속에서 단순함을 보고
사소함 속에서 위대함을 이루라.
어려운 일을 하려거든 그 일이 아직 쉬울 때 하고
큰일을 하려거든 그 일이 아직 작을 때 하라.
성인은 큰일을 벌이지 않기에
결국 큰일을 해낸다.
너무 쉽게 대하면 신뢰를 얻지 못한다.
성인은 언제나 모든 일을 어렵게 대하기에
결코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가 가진 전부는 바로 지금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사건을 확대하거나 결코 일어나지 않을 미래를 걱정하는 버릇을 버려야만 한다. 세상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들이며, 삶을 단순하게 유지하면 혼란은 사라진다.
여러 날, 여러 주, 여러 달, 여러 해 혹은 전생애에 걸쳐서가 아니라 매 순간 속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모든 일을 ‘그저 할 만하다’가 아니라 ‘쉽고 작다’로 받아들이도록 생각을 전환할 수 있겠는가? 끝마치려면 수년이 걸리는 어려운 학습 과정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미래에서 헤매거나 현재의 순간을 걱정거리로 삼지 말아야 한다. 아이를 출산하는 길고 어려운 과정을 어떻게 견뎌내는가? 시시각각 조금씩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지금 하며, 항상 현재의 순간 속에서 살아간다면 어려움은 없다.
지금 갖고 있는 것을 보라. 그리고 당신은 바로 이 순간에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
“미래가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만족하거나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정신 이상이다.”
작게 생각하라
‘크게 생각한다.’는 개념을 ‘작게 생각하고 크게 이룬다.’로 바꿔라. 너무 거대해 보여서 시작할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겁이 나는 일이 있다면 천천히 살펴보라. 오늘 당신의 소중한 현재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전체 그림 같은 건 깡그리 무시하라. 당신이 작은 일에 착수하면 그것이 크게 확장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역설적이게도 큰 결과를 이룰 것이다.
“당신은 지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사실 당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늘, 당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라. 그것이 무엇이든 작게 쪼개서 오늘, 그리고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작은 단위로 만들어라. 큰 그림은 잊어라.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그리고 나머지 것들은 사라지게 놓아두라. ‘당신’이라는 소설의 첫 단락을 써나가라. 짓고 싶은 집의 청사진을 펼쳐라. 가까운 교육 기관을 찾아 듣고 싶었던 강좌에 등록하라. 2분 단위로 달려라. ‘지금’ 속에 존재하라. 작고 간결하게 머묾으로써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도를 행하는 것이 어떻게 커다란 결과를 가져오는지 지켜보라.
기억하라.
아름드리나무도 작은 씨앗에서 자라고
아홉 층 건물도 한 줌 흙에서 쌓여 올라가며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모든 목표는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라. 이러한 생각은 너무 어려워서 엄두가 안 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하면 당신 앞에 놓인 문제들의 어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저 몰두하라. 그러면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그저 시작하라. 그러면 어느새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이 경험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나는 이 불행 속에 나를 위한 선물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찾는 데 집중할 것이다.’
최종 결과는 잊어라. 가고 싶었던 곳에 도달하면 어느새 새로운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매 단계에서 모든 것을 즐겨라. 모든 목표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저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라.
내가 알코올이 들어 있는 음료를 마지막으로 마셨던 것은 약 20년 전이다. 만약 그때 앞으로 20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더라면 그것은 너무 큰 목표여서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하루하루 조금씩 그렇게 해왔다. 앞으로의 20년에 대해 나는 함부로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이다. 나는 그저 순간순간, 하루하루씩 술을 마시지 않으며 살아갈 것이다. 내 삶의 매 순간 속에 도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삶에서 여러 문제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그것들을 완벽하게 예방하겠다고 마음먹어라.
우리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소리 없는 운명은 항상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개인적인 의견과는 관계없이 모든 삶에는 불행과 행운이 함께 찾아든다.
다양한 각도에서 상황을 따지면서 눈에 보이는 분명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처음의 직관을 믿어라. 가장 단순하고 의심의 여지가 적은 길을 택하라. 엉뚱한 곳에 힘 빼지 마라. 당신에게 주어진 많은 선택사항들을 곰곰이 살피다 보면 문제 스스로가 쓸데없는 자잘한 부분들을 알아서 정리하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연륜이 있고, 지혜롭고, 부유하고 거기에 더해 큰 영향력과 권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누군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작은 물줄기들이 흘러오도록 허락하고 격려하는 거대한 바다를 닮은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라. 낮은 곳에 머무르고 부드럽게 말하며 겸손함을 잃지 마라. 사람들이 최대한 자신들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라.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이 땅에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특히 당신의 리더십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기회를 찾아라. 바다는 그 풍요로움을 함께하고자 하는 모두를 받아들이고 그 생명을 유지해줌으로써 그들을 섬긴다는 것을 기억하라. 바다를 닮으라.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고 적은 것에 만족할 때 너그러움이 생겨난다.
조화로운 삶의 열쇠는 연민과 자애로움이다. 당신은 누구와도 경쟁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을 물리쳐야 한다거나 자신을 어떤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자애로움과 연민을 모든 형태의 생명에게로 뻗어라. 당신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라. 모두를 향해 애정과 존중을 보낼 때 당신은 도와 조화를 이룰 것이고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처럼 보호받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상대를 자신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인생이라는 춤을 함께 추는 동료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테니스 경기나 축구 시합을 할 때 상대에게 화내거나 증오의 마음을 품지 마라. 오히려 자신의 발전을 돕는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라. 그들이 없다면 좋은 경기를 할 수 없고, 더 나아질 수도 없으며, 승리를 거둘 수도 없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내 편’에 서고, 나의 동료가 되어 함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책의 저자들이 나와 경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보다 더 많은 책을 팔고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의 행운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책을 사서 읽으라고 권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유명해지고,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는 진심으로 축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동료로서 내 임무를 도와주었다고 여길 것이다.
나는 테니스 경기를 할 때 상대에게 소리없는 애정과 격려의 마음을 보낸다. 덜 스트레스 받고, 덜 화내고, 더 부드럽게 생각할 때 노자가 말한 “하늘과 짝을 이룬 지극한” 순간에 이르게 되고, 점수와는 상관없이 내 우수한 능력은 더욱 발전한다.
삶에서 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워버려라. 그리고 이 결심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실천하라.
“적이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 없다.”
“두 상대가 만나면 적이 없는 자가 이긴다.”
보고 듣는 모든 것 속에서 신의 보이지 않는 힘을 발견하는 연습을 하라.
“전 생애에 걸쳐 해야 할 기도는 ‘감사합니다.’ 하나면 된다. 그것으로 족하다.”
범사에 신께 감사하다고 말하는 습관을 가져라. 이것이 신을 깨닫는 길이다.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 안에 있는 자신들의 신성함을 경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통은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지요. 나는 괴롭지 않습니다. 육체가 나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외하는 마음이 부족하면
재앙을 겪을 것이다.
세속적인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더 큰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자신의 시야에 한계를 두지 마라.
태어난 환경을 원망하지 마라.
삶의 자연스러운 행로에 저항하지 마라.
그리하면 세상에 지치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인은 스스로를 알되
스스로를 드러내 뽐내지 않고
스스로를 사랑하되
스스로를 치켜세우지 않는다.
성인은 외면의 것을 버리고 내면의 것을 취한다.
자신을 만물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싹을, 언젠가는 열매를 맺게 될 보이지 않는 내면의 그 본성을 사랑해야 한다. “성인은 외면의 것을 버리고 내면의 것을 취한다.”라고 한 노자의 말처럼.
모든 일에서 기적을 보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라. 기적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모든 일을 기적으로 바라보라.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정신적인 권태나 실망을 피할 수 있다. 모든 사람과 사물을 통해 흐르며 그들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도를 보려고 노력하라. 폭풍우가 불가사의한 사건이 되고, 번개는 매혹적인 불꽃놀이가 된다. 그리고 천둥은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을 일깨우는 놀라운 충고가 된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봄으로써 신비로운 삶을 경험하라.
자신의 몸과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사랑하라
자신의 몸과 자신의 모든 면을 사랑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라. 그리고 이렇게 다짐하라. 나의 몸은 완벽하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태어났고, 지금 내 나이도 딱 좋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우주의 완전한 조화 속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 몸의 자연스러운 행로에 나를 맡긴다.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당신의 몸을 보라. 그러면 노자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 지치지 않는다.
“그대들의 의문을 실제 체험을 통해 풀어라.”
“스스로 풀어야 한다.”
그는 여전히 스스로 풀기를 요구한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로 귀의하는데, 그 하나가 바로 개인적 체험이다. 청주에 있을 때 일곱 근 나가는 옷을 지어 입은 것만큼 개인적인 일은 없다. 그것이 우주의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개별적 사건들 중 어느 하나도 이 하나와 손잡지 않은 것이 없다. 우주와 내가 공명하는 것이다. 그때 스승이 큰 소리로 외친다.
“그대들이 이 늙은 중을 만나보았다 해서 갑자기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이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는 부처라는 말을 듣기 싫다 했다. 도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에 편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는 그것을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했고, 장자는 그것이 “똥무더기 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머리의 활동이 창자의 활동보다 더 우주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첫째,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그대로 던져버려라. 내던져라. 둘째, 만일 장애물이 안에 있으면 그 작용을 멈추어라. 셋째, 만약 그 장애물이 안팎에 다 있으면 도를 지키려 하지 말고, 도가 그대를 지켜주기를 바라라.
삶의 문제에 걸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는 그 문제들을 옆으로 제쳐놓고, 스스로 더 높은 곳에 올라섬으로써 그 문제들의 함정을 굽어보라는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가 소멸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집착을 벗어나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워진다.
자유의 경지에 이르면 어떻게 될까? 조주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안으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밖으로 아무것도 구할 게 없다.”
하늘의 도는
싸우지 않고도 훌륭히 이기고
말하지 않고도 적절히 답하며
요구하지 않아도 충분히 채우고
서두르지 않아도 제때에 이룬다.
사람의 노력 없이도 도에 의해서 자연스럽고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자연은 항상 이긴다. 도는 애쓰지 않고도 이 모두를 행한다. 이렇게 하라. 하늘의 그물 안에서 편히 쉬라.
더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하늘의 방식에 따르라. 더 많이 듣고 덜 말하라. 그리고 당신에게 필요한 대답은 아무런 예고없이 당신을 찾아올 것임을 믿어라.
당신은 필요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부탁할 필요가 없다. 하늘의 방식에 따라 신성하고 완벽한 질서 속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당신은 그 질서의 한 요소다. 다가오는 모두를 기꺼이 맞이하면 필요한 것을 얻게 될 것이다. 하늘의 그물에 수많은 틈이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그 사이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정해진 때에 맞춰서 이루어진다. 당신은 운명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요구하거나 애쓰지 않고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경탄할 것이다.
도는 신의 적절한 타이밍에 따라 작용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할 때 이루어진다. 도는 하늘의 방식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속도를 조금 늦추라고 조언한다. 당신이 더디다고 생각할지라도 사실은 모두 제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두를수록 더 적게 이룬다. 10킬로미터를 달린 후에 급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면 땀이 멈추기는커녕 계속해서 흐른다. 그러나 마음을 늦추고 긴장을 푼 채로 땀이 몸을 타고 흐르도록 내버려두면, 서둘러 샤워를 하는 것과 같은 시간에 땀은 멈추고 더 상쾌한 느낌을 받게 된다. 당신의 에고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진실이다. 모든 것은 하늘의 그물 아래 자기만의 때가 있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상황이 펼쳐지게 하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라. 원하고, 애쓰고, 밀어붙이는 대신 먼저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애쓰지 마라.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이해하라. 그러니 어떤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하나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다른 무언가를 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재물뿐만 아니라 당신의 육체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자각을 하든 못하든 간에 당신의 몸은 이 글을 읽기 시작할 때와 다르며, 같은 상태에 머무르려고 시도하는 순간 또다시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본질이다. 이런 현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덜 불안할 것이고, 결국에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노자는 단언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자신의 가장 고귀한 자아를 깨달아라. 당신이 이룰 수 없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라.
절대로 당신의 신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라. 간섭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덕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다.
마주치는 모든 생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보라. 너희들 하나하나가 정말로 놀랍기에 어느 누구도 다른 이보다 더 훌륭하지 않다.
너무 많이 요구하지 말고 가능한 한 그냥 내버려두라.
자신에게 과도한 요구를 해서 부담을 갖게 되면 당신은 우울, 불안, 근심, 심장 질환 혹은 다른 수많은 육체적 질병에 시달리거나 지쳐서 쓰러질 것이다. 부담을 떠안은 중압감에서 벗어나 쉴 수 있도록 자신에게 휴식 시간을 주라. 자연을 가까이하고,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혹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시간을 충분히 허락하라.
머릿속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짧은 휴식 시간을 가져라. 당신이 맡고 있는 책임들도 잠시 잊어라. 15분 정도라도 마음을 정리하고 ‘요구 사항 목록’을 비워라. 스스로에게 덜 엄격할 때 찾아오는 자유를 만끽하라.
노자에 따르면 삶은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것이다.
경직되어서는 오래갈 수 없으며, 유연해야만 모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음을 잊지 마라.
다음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라는 시인데, 이 장의 메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착해지지 않아도 된다.
후회하며 백 마일의 사막을
기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
몸 안의 그 연약한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당신의 절망을 들려주오. 그럼 내 절망도 말할 테니.
그 사이에 세상은 굴러가고
그 사이에 태양과 비의 맑은 방울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인다.
대초원과 깊은 숲을 건너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 사이에 기러기는 맑고 푸른 창공을 높이 날아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당신은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다.
기러기처럼 거칠고 달뜬 소리로 당신을 부른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세상 모든 것 한가운데라고.
간섭하고 도와주는 것은 그만두라. 그 대신에 당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물처럼 흐르는 쪽을 택하라. 온화하게, 부드럽게, 그리고 겸손하게.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을 향해 나아가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을 향해 나아간다.”
6조 혜능은 말한다. 마음은 하나다. 단지 정지해 있지 않다. 끝없이 움직인다. 항상 흐르는 강물처럼 어느 때는 맑고 어느 때는 흙탕물이다. 어떤 때는 잔잔하고 어떤 때는 소용돌이친다. 이것이 마음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 곳에 고이지 않아야 한다.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 이 뜻은 기존의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허간 물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걸림이 없이 자유롭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문득 내가 자유롭다고 느껴질 때, 내 안에 신이 머문다는 생각이 들 때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홀로 엎드려 경배하니 내 몸이 확장되어 엎드린 마루로 흘러내리는 듯하다. 이런 순간이 내 삶 속으로 기어드는 날이 있으니 삶은 얼마나 찬란한가? 그러다 이런 깨달음을 까맣게 잊고 다시 찌푸리고 살다 또다시 마음이 맑아질 때가 있으니 잊었던 기쁨이 다시 몰려든다. 그러니 그날이 또한 얼마나 좋은 것이냐! 마음은 저 혼자 계곡의 밑을 구름으로 감돌기도 하고, 돌연 산의 정상을 향해 기쁨으로 치달리듯 한다. 맑은 날, 비오는 날, 흐린 날, 바람 부는 날, 그 날이 어느 날이든 날마다 그날로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이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이다. 종심.
백성이 적은 작은 나라를 떠올려보라.
그들은 무기가 있으나 쓰지 않는다.
그들은 직접 손을 써서 일하기를 즐기고
도구를 만드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멀리가지 않는다.
거처가 편안하여 이동에 관심이 없다.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는 이가 없다.
그들은 음식이 좋아 만족하고
옷이 편안하여 기뻐하며
집이 아늑하여 만족한다.
그리고 그들의 풍속을 이어간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다 보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평화롭게 내버려둔다.
수고를 덜어주는 수많은 기구들이 있지만, 당신은 단순한 삶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보의 과부하, 너무 많은 도구, 과도한 복잡화의 영향이 느껴지는 순간을 찾아내라. 그리고 당신을 만족시키는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옮겨가라.
작은 것에 감사하라
당신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과 행복한 전투를 시작하라. 거기에는 매일 접하지만 결코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집, 정원, 식사, 옷, 가족, 그리고 친구들처럼 편안함을 주는 존재들이 있다. 관심을 기울여라. 애정이 깃든 감사를 표현하라. 당신의 삶을 구성하는 작은 보물들에 대해 경외의 마음을 갖고 가까운 주변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라.
주위에서 천국을 발견하라
더 나은 삶을 찾아 여행을 하고, 세속적인 이익을 구하고,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사람들을 경험해야 한다는 믿음을 버려라. 실제로 당신은 일생 동안 이사 한번 가지 않고 같은 곳에 살면서도 도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볼테르는 “내가 서 있는 곳이 천국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명심하라. 만약 당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사진들, 그리고 똑같은 가구들로 인해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그곳을 당신의 천국으로 삼아라. 단순함 속에서 기쁨과 위로를 발견하라. 당신이 가진 것, 머물고 있는 곳,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 안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도록 사고방식을 전환하라. 모든 공간 속에서 도를 느낌으로써 당신만의 낙원을 느껴라.
당신의 진정한 본질은 형태가 없다.
더 많이 내주고, 덜 따지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
쌓아두지 않는 삶을 통해 자신의 비존재nonbeing, 즉 도의 본질을 가진 자아에 다가서라
점수 쌓기는 이제 그만두라
따지고 다투려는 성질을 버리고 당신과 의견이 다른 누군가가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 상대방에게 그저 “당신이 옳다. 당신의 의견을 들려줘서 고맙다.”라는 의미의 말을 전함으로써 다툼을 마무리 지어라. 이렇게 하면 싸움은 끝나고 동시에 비난과 책망도 남지 않는다. “당신이 옳다.”라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 자신만 옳기를 바라는 에고를 다스려라. 이 한 마디가 당신의 삶을 훨씬 더 평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스스로를 ‘아무것도 없음’의 수준까지 낮춰라
당신의 몸과 모든 소유물들을 관찰하라. 그러고 나서 그 모두가 변화하는 세상의 일부분임을 받아들여라. 마하트마 간디는 “당신이 진실의 대양 한복판에서 헤엄칠 거라면 당신 자신을 ‘0’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명심하라. ‘아무것도 없음’ 혹은 ‘0’의 자리에서 관찰자가 되어 물질의 세상 속에 당신이 쌓은 것들을 살펴보라. 그럼으로써 세상에 확실하게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유물이나 사고방식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이 느껴질 때마다 이를 실천하라.
D. H. 로렌스는 이런 개념을 극적으로 포착해낸다.
당신은 스스로 사라지고.
지워지고, 철회되고, 홀대받는가?
하찮게 여겨지기를 마다하지 않는가?
기꺼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가?
아니라면, 결코 진정으로 변하지는 못할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달라진다. 기쁘게 변화하라.
평화 가운데 머무르고, 타고난 본성을 믿고, 그 모두가 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아무리 힘겨운 상황에 직면해 있더라도 생각을 바꾸고 변화하는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도의 지혜를 실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