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자격이 있어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 삶은 유능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불완전하고 모호한 그 상태로 그대로 살아남을 공간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 어떤 것도 되지 말고, 삶에 있는 여백을 즐기고, 어떤 집단에도 헌신하지 말라.
소로는 '월든'의 맺음말에서 자연에 대한 이야기 대신 윌리엄 해빙턴이라는 시인의 시구를 인용한다.
당신의 시선을 똑바로 내부로 향하게 하라
그러면 당신의 마음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천 개의 지역을 발견할 것이니
그 지역을 여행하라
그렇게 당신 마음속 우주 지형의 전문가가 되어라
인생의 어떤 것은 모순이고, 어떤 것은 실패이고, 어떤 것은 성공인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삶이다. 남들이 평가하는 것과 삶은 별로 상관이 없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천 개의 지역을 탐사하면서. 똑같은 삶, 똑같은 순간은 단 하나도 없다.
부족한 나를 평가하지도, 내가 되어야 하는 모습에 집착하지도 말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켜본다. 내가 외부의 조건들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세세히 관찰한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 찾아오는 변화는 보다 자연스럽고 쉽다. 어떤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나를 안 뒤에 내린 선택들은 나를 내 삶의 저자로 만들어준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책은 책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책이건 삶의 경험이건, 거기에서 빠져나와 나 자신의 눈으로 보는 습관이다.
당신은 독자나 학생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앞날을 보는 사람이 될 것인가? 당신의 운명을 읽으라. 당신 앞에 있는 것을 보라. 그리고 미래로 걸어 들어가라.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무지를 아는 것
뭐든 노력을 하면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타고난 자신만의 방법을 더 개발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와 동시에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의 방법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삶의 일들을 찾아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월든'에서 소로는 독서처럼 머리를 쓰는 일, 농사처럼 손을 쓰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의 하루하루는 일주일의 요일에 따르지도 않았고, 매 시간으로 쪼개지지도 않았고, 시계의 똑딱 소리에 쫓겨 분주해지지도 않았다. 나는 푸리 인디언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모두 같은 한 단어로 표현했다. 그들은 이제는 뒤를, 내일은 앞을, 당일은 머리 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표현했다."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독특한 개인으로서 나 자신과 함께 있는 것
사소하고 귀찮은 집안일을 즐거움이자 나만의 명상으로 여기는 소로의 모습에 나는 감동한다.
세상에는 나에 대한 비난이 많고, 그밖에도 온갖 소음이 많다. 거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나는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만 한다. 그리고 또, 내가 이런 편안한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공간에 스스로를 데려다 놓으려고 노력한다. 그것뿐이다.
나는 인간이 의식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는 확실한 능력이 있다는 것보다 더 고무적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림 한 점을 그리고 조각상 하나를 조각해서 아름다운 작품을 몇 개 만들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주변의 환경과 우리가 볼 수 있는 수단을 조각하고 그리는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이다. (...) 우리의 삶은 자질구레한 디테일 때문에 조금씩 낭비된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계산하기 위해서 열 손가락 이상이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라도 발가락 열 개만 추가하고 나머지는 하나로 뭉뚱그려도 된다. 간소함, 간소함, 간소함!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두세 개가 되게 해야지 백 개, 천 개가 되게 하지 말라. 백만이 아니라 여섯을 세고, 당신의 계산을 엄지손톱에 적어라. (...) 간소화하라,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끼가 아니라 꼭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어라. 백 가지가 아니라 다섯 가지 요리면 된다. 다른 일들도 이런 비율로 줄여라.
소로는 우리가 하는 일을 두 가지로 나눈다. 아름다운 그림이나 조각상 그 자체를 만드는 것과, 이를 둘러싼 환경과 이를 보는 방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으로. 그리고 후자가 더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환경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바로 단순화이고 간소화다.
시시한 나만의 일상에서부터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다른 무슨 더 대단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삶을 고양시키는 것
무조건 새로운 진리를 따라 나의 일상을 바꿀 필요가 없다.
어쩌면 우리가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믿음인지도 모른다.
"모든 문제에 해결책이 있어야 하는 걸까? 모든 문제를 기어코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지독하게 인간만이 지닌 특성이 아닌가? 인간은 도대체 왜 이런가?"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타인과 환경의 문제에 해결책을 찾지 않고도 문제 가운데에서도 만족과 즐거움을 찾아내며 사는 것이야말로 자유다.
모자라고 앞뒤가 안 맞는 그대로의 내가 되고 싶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
나는 누구에게도 내 삶의 방식을 어떤 식으로도 따라 하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내 삶의 방식을 배우기도 전에 나는 이미 다른 방식을 찾았을 수도 있고, 이 세상의 최대한 많은 사람이 서로 다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모두가 신중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가기를 바란다.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나 이웃의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말이다.
나는 선행을 해보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내 체질에 맞지 않다는 것에 만족한다. 이렇게 말하는 게 이상하게 들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착한 행동을 하고, 우주를 구하기 위해 나만의 특별한 소명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주를 지키고 있는 것은, 다른 곳에 있는 비슷하지만 무한하게 거대한 견고함이라고 믿는다.
우주를 구하는 것은 다른 데에 있다고 말한다. 그 다른 것이라함은 아마도 마음과 영혼과 삶을 전부 걸고 하는 나만의 그 무엇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남들이 초라하고 한심하다 조롱해도 말이다.
그가 말하는 가난이란 많은 재산을 갖고 그것을 관리하느라 제대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안락한 삶은 물질적으로 더 부유한 삶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삶의 풍요를 느끼는 삶이다.
인간이 자기 꿈의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고 상상했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면, 그는 평범한 시간에 예상치 않았던 성공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는 어떤 일은 버리게 될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경계를 넘게 될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며 좀 더 자유로운 규칙들이 저절로 그의 주변과 내부에 자리를 잡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과거의 규칙들이 확장되어 좀 더 자유롭게 그에게 맞도록 해석될 것이다. 그는 좀 더 높은 존재의 규칙이 주는 자유를 누리며 살 것이다. 그가 자신의 삶을 간소화할수록, 우주의 법칙도 덜 복잡해질 것이다.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가난은 가난이 아니며, 약점은 약점이 아닐 것이다. 그대가 허공에 성을 지었다 해도 그대의 노고를 헛수고로 여길 필요는 없다. 당신의 성이 있어야 할 곳은 딱 거기가 되도록 하면 된다. 이제 그 성 밑에 기초를 넣으면 된다.
꿈의 방향은 같을 수 있지만 성공의 모습은 모두에게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성공의 모습은 절대로 미리 알 수 없다. 해봐야지 안다.
정해진 순서대로 가지 않아도 나만의 성을 만들 수 있다.
정해둔 꿈이나 성공이 없는 것은 때론 다른 기회를 열어준다.
성공도 속도도 단계도 하나하나 스스로 실험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성공에 도달할지 혹은 실패에 도달할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하루는 나만의 실험으로 꽉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어떤 대상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내 안에 있는 날것의 부정적 감정을 보는 것
자기 안에 있는 비터니스(bitterness)를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은 사회에 반항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법칙에 복종함으로써 갖게 되는 태도를 지켜나가야 한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신이 가는 길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회에서 가장 신성한 법칙보다 더 높은 '나 자신의 존재의 법칙'이란 바로 이렇게 매 순간 새로운 길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비난과 비웃음 앞에서도 자신만이 살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 평가들 앞에서 항변하고 반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소로는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배움은 그저 나다운 것을 발견하고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개인마다 자신의 세계관을 선택해야만 한다.
내가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틀려도 된다는 것, 그래서 나의 진지하지 못한 삶의 태도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맞대응해서 나를 변호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안다.
남의 비난을 무시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냥 '나'이면 된다는 것을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달았다.
사는 것에는 능숙해질 수 없다. 나는 아마추어로 살아간다. 한때는 버리기에 열을 올리고, 또 한때는 아름다운 물건을 그러모으면서. 그 무엇을 해도 너무나 즐겁지만,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충실하면서도 가볍게 한다. 완성이 아니라 지나가는 일이기에. 단 한 번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기억한다.
그런 사람들은 약한 사람을 괴롭혀서 자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을 바꿀 수는 없어. 그들은 적어도 그런 순간에는 사람이 아닌 거야.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저 사람이 나쁘다,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어. 맞서서 싸울 가치도 없고. 그저 갑자기 내리치는 날벼락이나 소나기처럼 성가신 자연재해 같은 거라고 생각해야 해. 네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정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정하고 나면, 최대한 피해를 입지 않고 지나가는 법을 궁리하는 거지. 어쨌든 네 마음과 네 생각만큼은 네가 지키는 거야.
생각을 함으로써 우리는 온전한 정신으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물러날 수 있다. 의식적인 마음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초연할 수 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급류처럼 우리를 지나쳐 흘러간다. 우리는 '자연'에 완전히 관여하지 않는다. 나는 시냇물에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일 수도 있고 그 나무토막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공기 중의 신들을 관장하는 인도의 신 인드라일 수도 있다. 나는 연극을 보고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나와 훨씬 관련이 깊은, 실제 벌어지는 일에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인간 존재로 이해한다. 말하자면 생각과 감정이 벌어지는 현장일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큼 나 자신과도 거리를 둘 수 있다. 이런 이중성(doubleness)을 나는 의식한다. 내 경험이 아무리 강렬할지라도, 나의 또 다른 부분이 존재하고 이런 경험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걸 의식한다. 이 부분은 나의 다른 부분과는 다르다. 나의 경험에 참여하지는 않고 주의만 기울이는 구경꾼이다. 이런 나는 네가 아니듯 나 역시 아니다.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생이라는 연극이 끝나면 구경꾼은 제 갈 길을 간다. 구경꾼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연극은 허구이며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우리는 이웃이나 친구로서는 그다지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되기 쉽다.
타인과의 괴로운 관계에 대처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내 안의 구경꾼인 또 다른 나를 길러야 한다.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눈앞에 벌어지는 연극처럼 바라보는 것. 실제로는 무척 힘든 일이겠지만, 그런 가능성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네가 좋은 성적을 받거나 대학에 합격했을 때 엄마가 기뻐하지 않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어.
첫 번째 이유는 네가 공부하는 동기가 엄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길 바라서 그래. 네가 공부하는 걸 엄마가 싫어하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동생이랑 열심히 노는 거나, 열심히 공부하는 거나, 열심히 뜨개질을 하는 거나 다 똑같이 중립적으로 바라보려고 해. 공부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엄마가 정해주지 않아야 하지. 그래야 네가 스스로 제일 좋아하는 걸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공부라면 온전히 너 스스로의 동기이기를 바라. 엄마도 이번 결과가 기뻐. 왜냐하면 그건 네가 원했고, 네가 하나씩 스스로 만들어냈기 때문이야.
두 번째는 새옹지마 이야기야. 옛날 중국에 새옹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큰 재산인 말이 도망가자 마을 사람들이 위로를 했지. 하지만 노인은 별거 아니라며 담담했어. 얼마 후 도망간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돌아온 거야. 재산이 두 배로 늘었어. 마을 사람들은 축하를 했어. 이번에도 노인은 별거 아니라며 담담했지. 얼마 후 새옹의 아들이 새 말을 타다 다리가 부러져서 장애인이 됐어. 마을 사람들은 위로를 했어. 역시 노인은 담담했어. 얼마 후 전쟁이 터졌어. 마을의 다른 젊은이들은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잃었지만, 장애인이 된 아들은 마을에 남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죽지 않았다는 거야. 여기서 마을 사람들의 반응과 당사자인 노인의 반응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봐. 세상 사람들은 나의 실패나 성공 하나하나에 대해 평가를 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거기에 스스로가 휘말릴 필요는 없는 거야. 나만의 인생은 고유한 거라, 한 번의 실패나 성공으로 단정지을 수가 없거든.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이유는 세 번째야. 이건 오로지 엄마가 스스로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지 정한 것과 관련이 있어. 엄마는 너의 성공에 기뻐하지 않는 만큼 너의 실패에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한 거야. 네가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해도 위로를 하는 게 아니라, 그게 아예 위로할 만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말이야. 너와 그런 관계를 맺고 싶어. 네가 엄마를 생각할 때, '아, 이 사람은 나에게 어떤 기대나 예상도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냥 현재의 너 그대로를 보는 사람이라고 말이야. 너는 지금과 다른 무엇이 될 필요가 없어. 엄마는 너의 성적이나 합격 불합격 같은 외부적인 조건에 따라 변하는 무엇이 아니라, 그냥 너 자체가 궁금한 사람이 되고 싶어. 엄마가 너의 성적에는 관심이 없지만, 네가 만나는 사람은 누군지,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걸 느끼는지, 너는 어떤 기분인지,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하는지 그런 건 관심이 정말 많잖아. 그래서 엄마는 너의 성공에 기뻐하지도 않지만 대신 네가 뭘 해도 실망하거나 가슴 아파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많이 기쁘지는 않아. 네가 무엇을 이룬다 해도 그건 네 존재 자체로 엄마가 기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야.
'내가 너를 너라는 존재 자체로 받아주겠다. 너는 다른 무엇이 될 필요가 없다'라는 신뢰의 관계를 갖고 싶었다.
나는 아이의 성적에는 관심이 없지만, 아이의 존재 자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아이를 주의 깊게 본다. 내가 하는 말에 따라 아이의 마음과 감정이 어떻게 변할지 재고 또 잰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아이와 좋은 관계를 갖고 행복하고 싶어서이다. 바람이 있다면, 아이에게 상대방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습관과 시각을 가르쳐주고 싶다. 남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볼 때 자기 자신 또한 그렇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 노릇을 하는 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고자 하는 이기심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좋은 것들을 누리고, 어떤 성취를 이루는 것보다 더 깊은 이기심이다. 내가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그 깊은 행복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두고 관찰하고 더 많이 알게 되는 과정에서 온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타인과 맺는 연결 자체가 바로 천국일지 몰라요.
고통이 없는 삶은 결코 없어요. 오로지 나 자신이나 남을 해치지 않고 그런 감정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에요.
매일 착함을 반복하는 사람이었다. 로저스가 어떤 선행을 했느냐, 그래서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 그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는 매일, 매 순간 끊임없이 선하기로 선택했고 그런 선택을 곧 자기 삶으로 만들었다. 그는 남들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보다 그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악기를 연습하듯 친절함을 연습했다. 매일 피아노의 음계 연습을 하는 것처럼.
프랙티스는 매 순간 자기 자신만의 진지함으로 실천하고 지속하는 것이다.
나쁜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좋은 것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다. 언제나 변화하여 다시 발견해야 하는 움직임에 가깝다. 그래서 흥미롭다. 하지만 우리가 수행하듯 지속해서 실천하지 못하면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좋은 것은 연약한 것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강렬할 뿐이다. 인생에서, 타인에게서, 나 자신에게서 좋은 것은 그렇게 복잡하게 찾아내야 한다.
'보바리 부인'을 읽으면서 슬퍼하고 나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먼저 남편이나 아이에 대한 나의 사랑이 결국 전부 내 행복을 위하는 얄팍함이라는 것을 꺠닫게 된다. 그러면 그들에 대한 분노나 기대도 사라진다. 아니, 좀 줄어든다.
그다음으로 마음껏 '사랑할 용기'가 생긴다. 어차피 내 수준의 사랑이라는 것은 고작 나의 욕구, 나의 이유일 뿐이고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위하는 능력이 없으니, 그냥 마음껏 하자고 마음먹게 된다.
세 번째로 모범적인 이상향의 가족이나 사랑에 대한 질투나 부러움이 없어진다. 보바리 부부처럼 본능에 충실하다가 절망적인 끝을 맞이하든, 약사 부부처럼 세속적인 가치들을 받들며 성실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든, 결국 사랑을 하지 않고도 사랑을 바라며 사는 인간의 삶은 슬프게 되어 있다.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오는 자유로움과 가벼움
나는 상상력을 나 자신의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나의 이익과 판단, 그리고 중요성을 내려놓는 일로 받아들였다.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건,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가능할 때에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회사가 싫었을 때는 두려워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3년 반의 시간 동안 나는 회사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 나만의 이유를 매 순간 발견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회사를 사랑하는 일은 결국 일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회사를 위해, 회사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거였다. 그러자 두려움이 없어졌다. 물론 가계 수입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걱정은 반나절 정도 했지만 경력이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기자로서 취재 능력도, 취재를 하면서 쌓은 인맥도 없으니 경력 측면에서는 완전히 끝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이 회사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성장은 남김없이 다 누렸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 설령 직업을 찾을 수 없다 해도,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다고 해도 내가 찾아낸 나만의 성장, 나만의 기쁨은 영원히 내 것으로 남을 것이다.
집안일은 놀이다.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흔히 말하듯이 해도 티도 안 나고, 안 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누구한테 칭찬받거나 경쟁할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놀이다. 놀이는 즐거워야 한다. 이런 건방진 태도, 나는 이 태도를 아이들과 나누고 싶었다. 만 3세부터 최초로 시작한 놀이가 빨래 개기와 널기인데, 빨래를 각 잡아서 개고 정리할 필요는 없다. 각자 원하는 재미있는 형태로 개고, 그러다가 귀찮으면 아이와 함께 낄낄거리며 서랍에다 마구 구겨 넣는다.
실험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해 보는 그 과정 자체가 놀이의 핵심이다. 무엇을 배우고 나아지는 게 아니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장난처럼 이것저것 해보는 태도 말이다.
일단 해본 다음 실패했을 때 그것을 실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 보는 것
장난처럼 가볍게, 무엇이든 해보고 아니면 '어라? 아니잖아. 다르게 해볼까?'라고 생각하는 것. 이런 태도는 놀이를 통해서만 기를 수 있다. 그런 놀이를 같이 하기에 집안일만큼 완벽한 건 없다. 정말 신나는 놀이이면서도 부모와 함께할 수 있는 놀이다. 놀이이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부담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의 질이 반드시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열중하게 되니까. 지루한 놀이는 없다.
집안일이 노동이 되면 아이에게 가르치기 어려워진다. 같은 노동이라면 더 인정받는 일이 훨씬 많고 집안일을 대체할 기계며 서비스, 간편식이나 외식 등도 넘쳐나니까. 하지만 노는 것만큼은 남이 대신 해줄 수 없다. 아이만 그런 건 아니다. 어른도 죽을 때까지 놀아야 사는 게 재미있어진다.
집안일을 할 때 나는 어떤 기준이나 완벽한 상태를 지향하지 않는다. 대충해도 되는 놀이로 만들어 열정적으로 이런저런 시도를 한다. 온 가족이 재미있는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재미있을 만큼, 어린아이도 자신감 있게 해낼 수 있을 만큼 하려다 보면 집안일은 자연스레 단순해지고 줄어들게 된다.
아이가 가사를 주도적으로 하도록 한다.
인간 존재의 핵심은 집안일
집안일은 해야 한다. 아무리 우울해도 변기에 노란 테두리가 생기기 전에 일어나 청소를 해야 한다. 이제 나는 대단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컵을 씻기 위해 산다. 집안일은 하찮기 때문에 놀듯이 하고 아무렇게나 한다.
나 자신도, 이 세상도, 별것 아닌 나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도 하찮다.
별것 아닌 삶을 가볍게, 그러나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한탄에 푹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생각을 더 멀리까지 밀고 나아가는 것.' 아무리 시시한 생각이든, 초라하고 유치한 감정이든 한번 더 밀고 가는 것.
나의 성공은 나의 노력과 별로 상관이 없었고, 나의 실패 역시 별로 억울할 것 없다. 그토록 중요하다고 여긴 성공도 실패도 실은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은 것이다.
력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면 그냥 포기해도 될까. 물론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갈 수도 있다. 성공을 하찮게 여기면 저절로 그냥 계속할 수 있다. 기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이어트도, 주식투자도, 공부도, 양육도 결국 단순하게 버티는 것이다. 특별한 기술이나 엄청난 노력보다 아마 더 중요한 건 그냥 무심하게 기다리면서 계속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불안이나 기대에 발목 잡히지 않고 하고 싶은 만큼, 납득할 수 있는 만큼 지속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걸 하는 동안 갖는 무심하고 건방지고 진심으로 결과를 하찮아하는 마음이, 어쩌면 악을 쓰며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오래 기다리게 만들지 않을까.
집안일은 내가 선택했던 방법 중 하나였다. 모든 사람이 집안일을 나처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의 욕망이 향하는 사회적 성공을 위한 일이나 중요한 일들을 할 때에도 그 결과에 완벽하게 무심하면서도 집중할 수 있는 태도를 매일 실천할 수 있도록 연마하는 수단으로 택한 것이다. 그런 태도에 다다를 수만 있다면 수단은 무엇이든 좋다.
어차피 안 될 거야. 그러니까 대강 할 거야. 그런데 계속할 거야. 그렇게 멈추지 않고 계속하기 위해서는 몰입하고 집중해야 해.
열심히 해도, 절대 네가 생각하는 합당한 보상이 오지 않아. 세상은 불공평하고, 이해할 수 없지. 그건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말든지 "네가 먹은 걸 스스로 치우는 건 여전히 멋진 일이야"라는 말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다.
결과는 어쩔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결국 하찮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영향력을 주고받지만 그 결과가 분명한 인과로 드러나는 일은 드물다. 훌륭한 부모가 최선을 다해도 의욕상실에 빠지고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기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아이들도 있다. 정반대의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렇게 무엇도 장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아이가 삶이 무엇을 가져오든 담담하게 그 순간에 충실할 수 있는 태도를 연습하는 일이다. 말로만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오늘도 같이 대강 집안일을 한다. 대강이지만 꽤 즐겁고 진지하게 한다.
단 한순간도 집안일이 버겁거나 힘들다고 느끼지 않겠다. 소꿉놀이하듯이 언제나 즐겁고 재미있게 하겠다.
외식이나 가공식품은 편의가 아니라 재미로만 이용한다.
지속하기, 그러기 위해서 되도록 안 하기
나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내가 뭘 하든 안 하든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성공이나 실패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 그러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남는다. 성공을 원하지 않는다거나 실패가 두렵지 않다는 게 아니다. 아무리 간절해도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의 목적이 지금 이곳에 없는 무언가를 얻거나 도달하는 것이 아닌, 매 순간 달성할 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집안일을 완벽한 수준에 도달할 만큼 하기보다는 어느 순간이라도 싫어지거나 힘들지 않고 영원히 즐겁게 할 수 있는 상태로 살아간다는 게 내게는 더 엄청난 야망이다.
더 좋은 글을 쓰거나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일으키는 글을 쓰는 게 목표가 아니다. 다만 글을 쓸 때 쉽고 즐거우면 의심 없이 이렇게 생각한다. '아, 역시 난 글을 너무 잘 써.' 여기서 쓰이는 '잘'이라는 부사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글을 쓸 때 내가 즐거우면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집안일과 달리 글쓰기는 즐거울 때까지만 쓰면 되고 죽을 때까지 써야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세속적인 즐거움과 성공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세상 일이 만만해 보인다. 하지만 루소가 그랬듯, 누구에게나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정말이지 변덕스럽다. 그러니 우연히 얻으면 좋고 아니어도 괜찮다. 어느 쪽이든 나는 지속적으로 즐겁게 할 것들이 있으니까. 내가 좀 더 세상의 기준에 맞게 열심히 살았다면 성공을 했을지, 그러지 않았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세상이 내게 어떤 즐거움을 줄 거라는 기대가 없는 대신, 내가 지속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들을 잘 관찰하기로 했다. 돈을 모은다 해도 그 돈으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다. 돈 걱정이 오늘 하루의 낮잠이나 집안일, 좋아하는 사람과의 쓸데없는 수다를 방해하지 않게 하는 게 목적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발전은 없다. 그냥 변화하며 살게 될 뿐이다. 집안일이건 글쓰기건 개선되지 않는다. 나 자신의 체력을 증진시키거나 내 글의 단점을 고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니까. 대신 나는 내 얼마 안 되는 체력을 어떻게 쓰고 즐길까 궁리한다. 글쓰기도 어떤 단점을 의식하며 고치려고 하는 대신 생각이 펼쳐지는 걸 가만히 따라간다. 그러자 매 순간이 다른 가능성들로 풍부해졌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 환경 등 변하지 않는 건 없기에 그 조합들도 언제나 새롭게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명확하게 더 좋아지고 나아가는 방향으로만 가려고 하면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줄어든다.
한편 뭐든 열심히 하지 않으며 살아가면 언제나 에너지가 남아 돈다. 남편과 집안일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것도 남편이 일을 벌이지 못하게 말리느라 벌어지는 일이다. 집안일뿐 아니라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무리를 하기 쉽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은 내게 큰 교훈이 되어준다. 물이 들어오면 반사적으로 노를 마구 젓고 싶어지지만 실은 물이 들어올 때야말로 정신차리고 재빨리 도망을 가야 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비축하는 걸까? 아낀 에너지를 뭐에 쓰려는 걸까?
더 젊었을 때의 나는 기를 쓰고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런데 무언가를 이루고 나면 정말이지 하나도 기쁘지 않아서 놀랐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그중에는 기뻐하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런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나는 그걸 천천히 깨달았다(물론 그다음 목표가 바로 재설정되니 만족을 느낄 여유가 없기도 했다). 굉장히 억울했다. '애걔, 이게 뭐야? 마구 자랑하고 싶고 신이 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요새 매일 낮잠도 푹 자고 집안일도 설렁설렁 하면서도 대단한 걸 이룬 것처럼 뿌듯한 건 비축 에너지 때문이다.
아이들이 잘하는 것,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찾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이나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도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궁리한다.
남들의 기준이 어떻든 내가 하고 싶은 건 계속 한다는 걸 매일 실천하고 연습했다.
무엇이든 주어지는 대로 받는 것이다.
내 것으로 언제나 꽉 채워져 있으면 받을 수 없다.
풍요란 가 나의 것을 축적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를 통해 흘러 들어오고 흘러나가는 그 흐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돈으로 사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공짜로 널려 있고 그것이 곧 풍요로움임을 알아채야 한다.
궁금해진 것들을 하나하나 시도해보고, 불편이 만든 공간을 인내로 견디는 대신 그 안에 채워진 새로운 경험들을 천천히 받아들여본다.
어떤 것 하나만을 선택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정해진 기능에 따라 일을 완수하는 기계처럼 완벽할 수 없다. 장점도 단점도 있는 것은 물론, 그런 장단점이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환경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유일무이한 사람이 된다. 그 과정이 성장이다. 성장이 단지 능력을 키워서 남들보다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건 자신의 무지를 기억하는 거라는 소로의 말을 좋아한다.
정직성은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것
직업 밖의 나는 누구인지, 그 열린 시간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보낼 것인지 적극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은 적성에 맞는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는다. 일이 힘든 건 적성에 맞지 않아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정도에서 일차적으로 만족하고, 그 후에는 최선이나 최고보다는 내 단점도 함께 수용하면서 적당히 일을 하려고 한다. 어쩐지 이제는 무슨 일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똑부러지게 일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가 다른 리듬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떄문일 것이다. 그가 듣는 음악에 맞춰 걷도록 하자.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자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봄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데, 굳이 여름이 되어야 할까?
각자 타고난 모습대로,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야 한다.
주변 환경에 맞추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실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다른 시도들을 해보고, 다양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고,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존재
중요한 건 아직 상상하기 어려운 그 무엇을 상상해 보는 것
이루면, 또는 가지면 온전히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몰라서 원할 수도 없는 다른 것들을 갈망하는 나를 상상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여전히 저 너머에 있을 거라는 상상 말이다. 그런 미래를 가늠할 수 있을 때에라야 비로소 희망과 목표가 없어도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된다.
상상의 나래를 상상할 수 없는 것까지 펼쳐서 많은 것들을 시도해 보는 것, 아닌 것은 바꾸고 괜찮은 것도 더 이상 괜찮지 않게 되면 바꾸는 '유연성'
그 어떤 것이 바람직하거나 나쁘다고 정해지지 않았다는 관점
내가 속한 사회와 자연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거기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고 수정하고 또 실험하는 과정의 연속
공부를 하라고 하지 않지만, 대신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하도록 놔둔다. 내버려 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주변 상황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가능한 선택들을 찾아낸 다음 그에 책임지도록 시간과 공간을 주고 지켜본다.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고 남들이 대신해 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괜찮은 사람이기도 하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별 볼 일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글을 통해 늘 하려는 이야기는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주어진 나의 정신상태나 주변 환경을 바꾸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때때로 아쉽게 삐걱거리는 집이나 좀처럼 바뀌지 않는 내 단점을 그대로 안고서 살아보는 것이다. 그것도 꾸역꾸역 견디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당신 안에 있는 새로운 대륙과 세계를 탐험하는 콜럼버스가 돼라. 무역이 아니라 생각의 새로운 통로를 열어라. 모든 인간은 한 왕국의 왕이며 차르의 제국은 그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국로 얼음이 녹고 남은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존중'이 없이 애국심에 사로잡혀 위대한 것을 사소한 것에 희생하기도 한다.
자기 마음 안에 펼쳐진 유일무이한 넓은 땅을 탐험하는 길에 나서는 것은 세상에 불만을 품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세상의 요구에 너그러워지게 된다. 그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은 문명을 거부하는 것도, 문명의 이기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담담하게 치른 대가였다.
나 또한 내게 주어진 하나의 삶이 제멋대로 펼쳐지는 모습을 직접 보고 또 느끼고 싶었다. 내 안의 여러 세계를 탐험하고 싶었다. 설사 그것이 부족하고 모순된 것이라 해도. 나는 소로만큼 강인하지 못하기에 때때로 불안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나'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탐험을 앞두고 으레 그러하듯, 불안은 설렘과 함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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