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
삶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은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프레임, 이론
We cannot think clearly about a plant or animal until we have a name for it.
행복에는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삶이란 가슴에 관심 있는 것 하나쯤 담고 사는 삶
행복= 관심 있는(interested), 영감 받은(inspired), 감사(gratitude), 경외감(awe)
나는 행복한가? = 나는 무언가에 관심이 있는가?
행복은 철저하게 일상적이다.
우리가 충분히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의 옳은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직된 사고
남의 시선과 기대에 연연하지 않고 내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삶의 자세
고통이 없어야 행복이라는 오해
어떤 오류도 없어야 한다는 완벽주의적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듯이, 이상적인 관계에는 어떤 갈등도 없어야 한다는 비현실적 기대 역시 우리를 힘들게 한다.
행복의 우연성을 허하라
자연스러운 행복, 우연한 행복, 심각하지 않은 행복이 설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행복은 비장한 전투에서 얻어내는 승리가 아니다. 행복은 우리 삶에 우연히 찾아와 준 것들에 대한 발견이다.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려는 자세.
행복의 본질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타인의 웰빙에 기여하는 것
자신이 성장하는 것
행복을 위한 11가지 활동
명상하기
운동하기
친절 베풀기
자신에게 중요한 목표 추구하기
감사 표현하기
낙관적 마음 갖기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기
스트레스를 이기는 효과적 전략들을 사용하기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
우리는 남들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한 시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원할 뿐이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는 행복을 향한 노력, 제자리로 돌아온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긍정할 줄 아는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같은 일상을 다른 마음으로 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애초부터 서로 다른 일상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첫 번째 그룹은 ‘심리주의자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마음의 기술이다. 명상을 하거나, 감사한 일을 세어보거나, 부정적 사건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해보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 그룹은 ‘환경주의자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특별한 마음의 기술을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애초부터 쉽게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행복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 예다.
행복한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기술을 자유자재로 그리고 균형 있게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사회에는 심리주의자의 기술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행복의 기원이 전적으로 마음에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는 법, 미움받을 용기를 키우는 법, 신경 끄는 기술을 배우는 법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일체의 심리적 기법들에 큰 관심을 갖는다. 이런 기술들은 부정적인 사건이 발생한 후에 사용하는 기술들이기 때문에, 소극적이며 사후 처리적인 특성이 강하다. 애초부터 부정적인 사건과 경험을 최소화하고 긍정적인 사건과 경험을 원천적으로 늘리려는 환경주의자의 기술에는 무관심한 편이다. 어쩌면 환경주의자의 기술이 지나치게 합리적이어서, 행복의 신비함을 반감시킨다고 느끼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행복한 사람들의 ‘마음의 기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배우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같은 일상을 다른 마음으로 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애초부터 서로 다른 일상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행복한 사람들의 마음보다 행복한 사람들의 일상을 분석해보려는 시도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애초부터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누구를 만나든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고, 지루한 일도 기쁘게 할 수 있는 마음의 비결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
행복한 사람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일을 택하면 평생 하루도 일하지 않아도 될 것
스티브 잡스, 위대한 성취를 이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love what you do), 좋아하는 일의 중요성
좋아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 자율성을 만족시키는 통로
인간은 유능감을 경험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도 지니고 있기에 잘하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행복한 학생들은 설사 자신이 잘하지 못하더라도 그 일을 좋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행복하지 않은 학생들은 잘하지 못하는 일이면 그 일을 좋아하는지 여부는 처음부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은 둘 중 어느 것도 양보할 수 없는 행복의 다이내믹 듀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 성적, 성취를 중시해온 우리 사회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사치로 치부하면서 “사람이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우리를 좋아하는 일에서부터 멀어지게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이기적이거나 독특한 사람,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혹은 먹고살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으로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어왔다. “네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는 조언을 철없는 젊은이들의 클리셰 정도로 폄하하는 시선도 있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어른스러운’ 조언이 들려올 때, 늘 잘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도 없다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행복한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되어야 하는 나보다 되고 싶은 나를 본다.
한 사람의 내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 자기(actual self), 되고자 열망하는 이상적인 자기(ideal self),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당위적인 자기(ought self) 사이의 괴리와 갈등을 이해하는 것
행복한 사람들은 자기 삶을 전진시키기 위해 이상적 자기라는 엔진을 장착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당위적 자기라는 브레이크를 장착한 사람일까?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가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때 행복이 찾아온다.
이상적 자기와 현실 자기의 괴리를 좁히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상, 비전, 열정, 도전을 중시한다. 반면에 당위적 자기와 현실 자기의 괴리를 좁히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마땅히 되어야만 하는 자기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기에 의무, 책임, 예방, 현상 유지를 중시한다. 전자의 괴리를 줄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후자의 괴리를 줄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실수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따라서 전자의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기뻐하고 흥분하지만, 후자의 사람은 실수하지 않았을 때 안도감을 느낀다.
행복은 역할, 의무, 책임, 조심, 경계, 현상 유지로 대표되는 당위적 자기의 브레이크보다는 꿈, 비전, 이상, 열망으로 대표되는 이상적 자기라는 엔진을 달고 전진하는 사람에게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이상적인 자기 엔진을 달고 사는 사람 첼리스트 요요마는 자신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터닝 포인트를 이렇게 소개했다.
19세 때 뉴욕에서 독주회를 했다. 완벽하게 연주하고 싶었고 1년을 준비한 무대였다. 아주 잘 준비된 무대였다. 연주가 시작됐고 모든 것이 잘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이건 아주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살아 있지 않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때가 나의 전환점이었다고 본다. 완벽해야 한다는 마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들릴까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이때를 ‘해야 한다(should)’를 ‘하고 싶다(want to);로 바꾼 순간으로 부른다. 완벽해야 한다가 아니라 완벽하고 싶다고 생각을 바꾸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다. 이 점을 59세가 아닌 19세에 알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가!
‘Should’를 ‘Want to’로 바꾼 것, 그것이 자신의 음악 인생을 바꾸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당위의 브레이크가 지배하는 삶에서 이상의 엔진이 지배하는 삶으로 바뀌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행복한 사람은 당위의 영역을 줄이고 이상의 영역을 넓히는 삶의 기술을 발휘하면서 살아간다.
비교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들은 지지와 유대감을 주는 사람들을 선호하고, 행복감이 낮은 사람들은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을 선호한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의 기술은 ‘비교’다. 반면에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은 ‘관계’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비교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행복한 사람들은 관계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
돈의 힘보다 관계의 힘을 믿는다.
다른 사람 카트에 어떤 먹거리가 담겨 있는지 관찰하는 것은 식료품 매장에서 남몰래 맛볼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무엇을 해 먹으면 좋을지 막막할 때 힌트를 얻을 수도 있고, 때로는 저런 것도 먹는구나 하는 신기함을 경험할 수도 있다. 명품을 휘두른 여인의 카트에 족발이 담겨져 있을 때는, 역시 사람을 외모로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까지 얻기도 한다. 이렇듯 남의 카트를 관찰하는 행위는 취향을 다양성에 대한 인류학적 체험을 제공한다.
마트의 인류학적 체험에서 발견하는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사람들의 입맛이 놀라울 정도로 제각각이어서 내 카트에 담겨있는 것들과 완벽하게 똑같은 것들을 구입한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만일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와락 껴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취향이 원래부터 그렇게 다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취향이 동등하게 존중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고칼로리 제품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 있거나, 야채나 생선이 전혀 없는 누군가의 카트는 별로 부럽지가 않다.
식료 매장 카트의 내용물이 그 사람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의 반영이자 동시에 그 사람의 건강을 예측할 수 있는 중요 단서가 되듯이, 우리의 ‘경험 카트’도 그렇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매장에서 경험을 쇼핑하는 사람들이다. 시간과 돈을 지불하고 다양한 경험을 카트에 집어넣는다. 식료 매장에서 다른 사람의 카트를 보며 느끼는 감정들을 다른 사람의 경험 카트를 보면서도 느낀다. 따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도 있고, 저런 것도 하면서 사는구나라는 신기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경험 카트의 내용물 역시 각자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의 반영이지만, 동시에 그들 삶의 중요한 결과들을 예측하게 하는 단서다.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카트에 어떤 것들을 담을까?
행복한 사람들은 ‘좋은 사람과 보내는 시간’을 자신의 카트에 집중적으로 쓸어 담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금전적 이득’을 주로 담는다.
행복한 사람들은 친밀한 사람들이 주는 위로를, 행복감이 낮은 사람들은 돈이 주는 위로를 찾았다.
관계를 추구할 것인가? 돈을 추구할 것인가?
개인적 취향이라고 치부해버릴 문제가 아니다. 술을 술로 풀면 해롭듯이, 힘든 삶을 물질과 돈으로 푸는 것은 해롭다. 행복한 사람들의 경험 카트를 유심히 훔쳐보고, 그들이 담는 것을 따라 담을 필요가 있다.
소유보다 경험을 산다.
소유를 위한 소비란, 소비의 결과물로 물건(thing)이 생기는 소비를 의미한다. 옷, 자동차, 시계, 집과 같은 물건을 사는 소비다. 반면에 경험을 위한 소비란, 소비의 결과물로 물건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험(experience)과 추억(memories)이 생기는 소비를 지칭한다. 여행, 뮤지컬 관람, 영화 관람, 스포츠 활동 등이 해당한다.
소유 소비보다는 경험 소비가 행복에 미치는 힘이 단연코 크다.
한편 경험을 사지 않고도 경험 소비에 의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역설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소유물을 보는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소유를 위한 소비인지, 경험을 위한 소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애매함은 프레임이 작동할 기회를 제공한다. 책장이라는 물건을 사면서 ‘지식을 저장하는 경험’을 산다고 의도적으로 프레임할 수도 있고, 명품을 사면서 ‘독특한 디자인을 경험’하는 행위라고 프레임할 수도 있다. 우리 연구팀은 소유물을 경험으로 프레임화하는 작업이 경험을 사는 것만큼의 행복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행복한 사람은 소유보다는 경험을 사는 사람이다. 소유를 사더라도 그 소유가 제공하는 경험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경험보다는 소유를 사는 사람이다. 심지어 경험을 하면서도 그 경험을 소유화, 혹은 물화(thingify)해버리는 사람이다.
사는(buy) 것이 달라지면 사는(live) 것도 달라진다. 행복한 사람들이 다르게 사는(live) 이유는 사는(buy)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돈으로 이야깃거리를 산다.
경험의 삶이 곧 무소유의 삶이다. 경험의 삶으로 목표를 바꿔볼 필요가 있다. 소유하지 않는 삶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소유에 대한 욕망을 삶에 대한 경험과 관찰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경험하기 위한 소유, 관찰하기 위한 소유, 시간을 사기 위한 소유로 프레임하기 시작하면 소유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소유에 얽매이지 않는 무소유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경험이 무소유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이유
1) 소유물은 비교를 불러일으키지만 경험은 비교를 유발하지 않는다.
경험은 본질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비교가 쉽지 않다. 소유와 달리 경험은 ‘지금 여기’의 심리 상태를 강하게 유발하기 때문에 경험하는 그 순간에 몰입하게 만든다. 경험은 우리를 비교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경험의 삶이 곧 무소유의 삶인 이유는 무소유의 본질이 소유가 유발하는 비교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소유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소유의 삶이 부담스러운 우리에게 경험의 삶은 아주 좋은 대안이다.
2) 경험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우리가 보유한 소유물들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지 못한다. 소유물들이 우리의 취미나 선호, 그리고 성격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기는 하지만, 우리 내면의 심층까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 목록을 보아야 한다. 경험은 우리의 의식과 철학과 가치를 구성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진정한 자기(authentic self)를 만나는 경험이며, 진정한 자기와의 조우는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무소유의 삶은 진정한 자기를 만나는 삶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 리스트를 늘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이력서(experiential CV)를 빼곡하게 채워나가는 사람이다.
3) 경험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소유가 대화의 주제가 되면 그 대화는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소유는 비교를 유발하기 때문에 소유에 대한 대화는 관계를 위협한다. 사람들 사이에 ‘내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그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반면에, 경험에 관한 대화는 즐거움을 창출한다. 행복에 관한 연구들은 경험을 나누는 ‘수다’, 특히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경험을 나누는 수다가 최고의 행복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돈으로 경험을 산다는 것은 결국 돈으로 이야깃거리를 산다는 것이다. 이야깃거리는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경험이 제공하는 이야깃거리는 관계를 강화시킨다. 우리는 함께 경험하기를 원한다. 설사 혼자서 한 경험이라도 수다를 통해 그 경험을 나누기를 원한다. 친구와 함께 백화점에 간 경우에 사려는 물건이 서로 다르면 헤어져서 각자 쇼핑한 후에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등산을 함께 간 친구들이 서로 좋아하는 봉우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헤어져서 각기 다른 봉우리를 등산하고 내려와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경험은 소유보다 훨씬 더 관계 지향적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소유의 영역에서 살면서 비교하지 않으려고 결심만 한다. 행복한 사람은 애초부터 비교가 일어나지 않는 경험의 영역에서 살아간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소유를 늘려 타인을 위협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경험을 늘려 관계를 강화한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소유를 통해 정체성 결핍을 은폐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경험을 통해 정체성을 구축한다. 결정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돈으로 경험을 사서 삶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장식거리보다는 이야깃거리가 우리를 훨씬 더 행복하게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돈으로 시간을 산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인간의 땀과 눈물로, 자연의 섭리와 선물로, 때로는 신의 은총으로 구해야 한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돈으로 사야 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물질만능주의도 경계해야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인내로 견디려는 우직함도 마냥 칭송해서는 안 된다.
돈으로 시간을 사야 한다. 시간은 본질상 유한한 자원이기 때문에, 돈을 버는 데 쓰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다른 활동을 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활동에는 여행, 운동, 수다, 걷기, 먹기, 명상 등이 포함된다.
행복에 가장 중요한 관계적 자원인 가족이나 친구와 보내는 시간.
돈으로 시간을 사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유쾌하지도 않고 의미도 느낄 수 없는 일들을 아웃소싱해야 한다. 한마디로 ‘비서’를 두는 것이다. 여기서 비서란 자신의 시간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나 서비스 전체를 뜻한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들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한다.
알뜰하게 사는 것은 소중한 미덕이다. 그러나 시간의 결핍을 줄이려는 노력도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돈으로 시간을 사기 위해서는 돈보다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먼저 필요하다. 이제는 ‘돈이 시간이다(Money is time)’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데 주력해야 한다. 알고 보니, 행복한 사람들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걷고 명상하고 여행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불행한 일을 당하고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기술만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행복한 활동들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다.
행복한 삶이란 여행을 자주 하는 삶이다. 여행은 행복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은 행복에 가장 중요한 기본 욕구들(유능감, 자율성, 관계)이 극대화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행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자발적 행위이고, 업무와 달리 성과가 평가되지 않기 때문에 유능감에 대한 위협이 적으며, 대개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하는 관계재(relational goods)이기 때문에 관계를 강화해준다. 여행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행복은 극대화된다. 일정, 숙소, 볼거리, 먹거리를 찾고 기획하는 일을 통해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의 유대감이 충족되기 시작한다.
운동은 몸의 건강뿐 아니라 즐거움과 의미를 제공해주는 효자 종목이다. 또 눈여겨볼 활동은 걷기다.
여행, 걷기, 운동, 먹기, 수다 등과 같은 동적이고 감각적인 활동.
명상, 종교 활동, 자원봉사와 같은 정신적이고 영적이며 타인을 지향하는 활동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한 경험을 제공해주는 활동들을 애초부터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불행한 일을 하면서도 행복한 마음을 유지하는 마음의 기술을 부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애초부터 행복한 경험들을 많이 하려는 사람들이다.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발견한다.
행복은 긍정 정서 대 부정 정서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달려 있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Versus Negative Affect).
어쩌다 한 번 강한 자극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자주 경험하는 것이 행복에 유리하다.
행복한 사람은 작은 것도 크게 보지만, 행복감이 낮은 사람은 큰 것만 크게 본다.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을 ‘음미하기(savoring)’라고 한다. 음미하기란 소소한 현재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마음의 습관을 의미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가 유명해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자주 인용되기 시작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는 이 음미하기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등 소소하게 음미할 것들은 이처럼 우리 일상 곳곳에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소소한 즐거움들을 더 자주 경험하려고 일상을 재구성하는 사람들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이전부터 이미 소확행의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비움으로 채운다.
시간을 내어주면 역으로 시간이 생긴다(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시간을 내어줄수록 시간이 많아진다(Giving time gives you time)
행복한 사람들이 자원봉사처럼 시간을 남에게 할애하는 일을 많이 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을 비움으로 자신을 채우는 삶의 비결을, 시간을 내어줄수록 시간의 부자가 된다는 삶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채움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비움으로 채우려고 한다. 시간과 돈의 여유가 없어서 나누어줄 수 없다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하소연할 때, 행복한 사람은 나누지 않으면 시간과 돈의 여유는 갈수록 없어진다는 믿음으로 나눔을 실천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마음과 일상에 묘술을 부린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느냐에 관한 심리주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쉽게 행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일상을 다르게 배치하는 환경주의 기술도 중요하다.
의미 있는 삶
좋은 음식이란 맛은 부족하더라도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 화학제품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 셰프의 철학이 담긴 음식.
좋은 기분을 많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살 만한 이유와 가치를 충분히 느낀다면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그 삶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존재다.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계획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소위 ‘connecting the dots’라는 의미 창출 작업을 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이 작업은 삶의 순간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관한 것이다.
삶이란 해석과 재해석의 연속이다. 과거의 즐거움이 지금 생각하니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후회하고, 과거의 고통이 지금 생각하니 축복이었다고 감사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comedy in long-shot)”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순간의 경험들은 그 순간에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평가된다. 따라서 순간의 기분만을 가지고 좋은 삶을 이해할 수는 없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이 두 가지의 구분을 위해 경험하는 자기(experiencing self)와 기억하는 자기(remembering self)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우리에게는 현재 순간을 경험하는 자기가 있고, 나중에 그 경험을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새롭게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가 있다. 카너먼은 우리에게 두 가지 자기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경험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이다. 경험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만족과 기분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기억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삶 전체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현재의 즐거움을 희생해서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 당장은 오해받더라도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것,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않는 것은 모두 경험하는 자기의 행복을 희생하더라도 기억하는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다.
굿 라이프는 의미가 가득한 삶이다. 의미는 우리 삶에 질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준다.
의미에는 무거운 의미뿐 아니라 가볍고 경쾌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무거운 의미 혹은 큰 의미란 삶에 대한 목적의식과 소명 의식, 자기희생, 대의명분 같은 것을 뜻한다. 인류애, 자연과의 합일, 신의 영광, 국가에 대한 충성, 순교자적 삶, 공동체에 대한 헌식 같은 것도 그 예다. 만일 의미 있는 삶이 이런 것들뿐이라면, 사람들이 걱정하는 바와 같이 의미 있는 삶은 즐거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기희생의 삶이자 도덕적인 삶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의미에는 무겁고 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고 가벼운 의미도 존재한다. 작은 의미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를 뜻한다. 아침마다 아이들의 밥을 지어주는 것, 연로한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거는 것, 맡겨진 과제를 제시간에 해내는 것, 아이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는 것, 식사 기도를 하는 것,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것, 화초에 물 주는 것,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것 등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 경험되는 의미다. 자기를 희생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의미가 아니다.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작고 확실한 행복 ‘소확행’이 있듯이 작고 확실한 의미 ‘소확의’도 있는 것이다. 의미의 의미를 이렇게 확장하면, 의미 있는 삶에 대한 불필요한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의미란 중요성(significance)이다. 개인적으로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이 모두 의미다. 의미 경험은 철저하게 주관적이어서 아무리 타인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간주하더라도 자신이 의미를 경험하면 그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의미는 유용성(usefulness)이다. 자신의 행위가 쓸모 있다고 느낄 때 그 일은 의미를 갖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시간 낭비가 아니다’라고 느끼는 경험이 의미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설사 그 행위가 타인의 눈에 아무리 무의미하게 보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의미 있는 행위가 된다.
의미는 이해(understanding)다. 인간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욕구 중 하나는 세상을 이해하려는(sense-making) 욕구다.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의미 없음’을 경험한다. 어떤 고통이 다른 고통보다 특별히 더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 고통이 설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의 무의미함은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경험에서 발생한다.
의미는 정체성(identity)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행위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과 연결되어 있을 때, 즉 자신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사람들은 의미를 경험한다. 의미 있다는 것은 곧 자기다움을 뜻한다.
의미의 의미를 이렇게 해부해보면, 의미를 경험하게 하는 행위이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대아를 위해 소아를 희생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자기다움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 국가적 목표를 추구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막 태어난 자녀를 위해 담배를 끊는 것, 종교적 신념을 위해 순교자적 삶을 사는 것만이 아니라 기념일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 한 송이를 선물하는 것도 동일하게 의미 있는 행위다. 의미 추구는 엘리트 도덕주의자의 강압적 명령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우리의 본성이다.
의미를 향한 인간의 의지.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지.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것은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였지만 그것은 자기 일이라는 의미를 창출해내는 행위였다. 자기 이름을 적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 일이라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Man’s search for meaning. 큰 의미든 작은 의미든 의미는 그렇게 중요한 법이다.
의미의 발견이 고통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 있다.
굿 라이프는 의미가 가득한 삶이다. 의미는 우리 삶에 질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준다. 의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며, 죽음의 공포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존재론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심리학자 에릭 클링거(Eric Klinger)의 말처럼 “인간의 뇌는 목적 없는 삶을 견딜 수 없다(The human brain cannot sustain purposeless living).”
의미의 원천, 자기다움
“반성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소크라테스의 경고, 가치 없는 성공을 경계, 의미 없는 성공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너 자신을 알라”는 가르침.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제시.
삶의 궁극적 목표: 자아실현, 의미의 실현, 인격적 성숙 등
인간이 경험하는 의미의 중요한 원천이 진정한 자기를 만나는 것, 즉 자기다움의 삶을 사는 것
개인 프로젝트, 한 개인이 일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 예를 들어 살을 빼는 것, 10킬로미터를 뛰는 것, 자기 전에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 토요일에 고아원에서 봉사하는 것 등 개인마다 관심을 갖고 실행하고 있는 혹은 실행하고자 계획하는 것들. 이상적 자기가 추구하는 것.
개인 프로젝트의 5가지 차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self benefit)
성공 가능성(efficacy)
재미(fun)
타인의 지지(support)
통합(integrity)
우리의 자기(self)는 단일 요소가 아니라 매우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종적으로는 과거의 자기부터 현재의 자기와 미래의 자기까지, 횡적으로는 자신의 다양한 역할, 목표, 가치관 등이다. 이처럼 자기는 방대한 요소들의 집합이다. 통합이란 자신의 개인 프로젝트가 이런 다양한 자기 요소와 얼마나 잘 연결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이 자신의 정체성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나타낸다.
행복은 긍정 감정과 부정 감정의 균형, 삶의 만족도로 측정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고 느낄 때, 인간은 의미를 경험한다. 일이 잘되면 기분이 좋지만, 그 일이 자기다운 일이면 의미가 경험된다. 우리가 성공, 성취, 효용, 효율 등 무엇을 이루는 것에만 집착하게 되면 순간적인 기분의 행복을 누릴지는 모르지만, 의미 있는 삶을 경험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의미 있는 삶이란 자기다움의 삶이다.
행복한 국가 덴마크의 라이프 스타일
일과 삶의 균형을 강조하는 휘게(hygge) 라이프 스타일,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겸손과 배려를 강조하는 얀테(Jante)의 법칙, 질주하는 삶에 잠시 브레이크를 걸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도록 돕는 덴마크식 인생학교
Personal Well-being
전반적으로 요즘 당신의 삶에 얼마나 만족하십니까?
전반적으로 당신이 인생에서 하는 일들이 얼마나 가치 있다고 느끼십니까?
전반적으로 어제 얼마나 행복을 느끼셨습니까?
전반적으로 어제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습니까?
의미의 일상성을 인식해야 의미 있는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굿 라이프란 쾌락과 의미를 균형 있게 추구하는 삶이다. 기분 좋은 삶과 의미 있는 삶은 중첩되는 지점이 많지만 동시에 미묘하게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을 잘하는 것(성공 가능성)과 자기다움의 삶을 사는 것(통합)이 우리를 행복과 의미로 이끄는 두 개의 트랙이다. 일을 잘하는 것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고, 자신에게 충실한 것은 우리를 의미로 이끈다. 나이가 들면 자신에게 충실한 것(통합)이 의미뿐 아니라 행복에도 중요하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이 하는 일들이 ‘who am I?(나는 누구인가?)’와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어야 행복(즐거움)과 의미 모두를 강하게 경험한다.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이가 들수록 더 중요해진다는 뜻이다.
자기를 성장시키는 것, 타인의 안녕에 기여하는 것
굿 라이프는 자기를 성장시키고 타인의 삶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
쾌락과 의미는 굿 라이프의 양대 산맥이다. 다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의미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는 범.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중시해야 하는 이유.
쾌락적 행복 측정을 위한 질문들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자주 당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셨습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자주 당신의 삶에 만족하셨습니까?
의미적 행복 측정을 위한 질문들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자주 당신의 삶이 의미가 있다고 느끼셨습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자주 당신 삶의 경험들이 당신을 성장시키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느끼셨습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얼마나 자주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일을 하셨습니까?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격리시킨 상태에서 경험하는 성찰의 시간이 성장과 의미 경험을 제공했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주는 행복을 부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반면에 즐거움 혹은 쾌락은 혼자 있을 때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훨씬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즐거움과 의미 모두를 균형 있게 추구해야 한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명작 <헤라클레스의 선택>
자신에게 제시된 두 가지 삶을 놓고 고민하는 젊은 헤라클레스를 그린 작품
이 그림에는 두 여인이 등장하는데 한 여인은 고통스럽고 험난하지만 탁월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헤라클레스에게 조언하고, 다른 여인은 즐겁고 신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두 여인의 의상부터 서로 다른 삶에 대한 지향성을 암시한다. 탁월한 삶을 권장하는 여인의 옷은 정숙하고 노출이 없는 반면에, 쾌락적 삶을 추구하는 여인의 옷은 시스루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처럼 우리는 즐거움과 의미, 쾌락과 탁월함, 향유하는 삶과 성찰적 삶 가운데서 꼭 하나를 택해야 하는 존재일까? 우리는 이 어려운 선택을 놓고 고뇌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인가?
쾌락과 의미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비록 이 둘의 상대적 중요성을 평가하는 개인차(의미형 인간과 재미형 인간)와 문화 차이(한국은 대표적인 의미 중심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이 가운데 한 가지만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균형 있게 선택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우리 안에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추구하도록 하는 어떤 내적인 장치가 있지 않을까? 마치 서로 다른 장르의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연인들이 두 영화를 번갈아 가며 보는 것처럼, 우리도 어떤 경우에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의미를 추구함으로써 두 본성 모두를 충족시키고 있지는 않을까?
해석 수준 이론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할 때는 그 일의 의미와 가치 같은 큰 그림을 보지만, 임박하면 그 일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를 보게 된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보이는 부분을 상위 표상(중요성 desirability), 가까이 있을 때 보이는 부분을 하위 표상(가능성 feasibility)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우리는 그 일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한다. 그러나 거리가 증가할수록, 특히 시간상 거리가 증가할수록 사람들은 어떤 일의 중요성을 중시하고, 시간이 임박할수록 그 일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당장은 신나고 즐거운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나중에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를 즐기고 만끽하려는 바람과, 나중에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려는 바람이 절묘학 공존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가 즐거움과 의미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지 않고 두 가지 본성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키며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시간의 중재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이 짧게 지속될 경우 사람들은 쾌락적 경험을 선호하고, 어떤 경험이 오래 지속될 경우에는 의미 있는 경험을 선호한다.
사람들은 즐거움과 의미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연구는 이런 이분법적 구분보다는 한 개인 내에서도 경험의 지속 시간에 따라 즐거움과 의미에 대한 선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더 쾌락주의자거나 더 의미주의자인 것은 맞지만, 모든 인간은 때로는 쾌락을 때로는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쾌락 추구와 의미 추구가 한 개인 내에서 시간에 따라 역동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추구하는 굿 라이프의 내용이 각자가 생각하는 삶의 길이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누군가가 인생이란 별거 없으니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인생은 짧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누군가가 인생이란 소중한 것이니 읽고 쓰고 봉사하라고 조언한다면, 그는 인생을 길다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굿 라이프란 의미와 쾌락을 균형 있게 추구하는 삶이다. 기분 좋은 삶과 의미 있는 삶, 향유하는 삶과 성찰적인 삶은 중첩되는 지점도 많지만 미묘하게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의미의 중요성은 나이와 함께 더 증가하고, 의미는 홀로 있어도 경험된다.
우리가 쾌락과 의미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지 않고 의미형 인간과 재미형 인간을 오가며 균형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시간의 중재가 있기 때문이다. 신나고 즐거운 일은 당장 하고 싶어 하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은 나중에 하려고 한다.
의미와 쾌락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때로는 쾌락을 때로는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행복은 성공을 포기하는 대가가 아니다. 성공과 성취를 행복의 장애물로 보는 시각을 유지하는 한 의미 있는 성취를 통한 유능감, 자부심, 고요함을 경험하기 어렵다.
굿 라이프란 좋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이다. 좋은 일이란 높은 연봉, 좋은 복지, 승진의 기회 등이 보장된 직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좋은 일이란 직업의 종류와 상관없이,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일이다. 자신의 일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삶, 즉 소명이 이끄는 삶이 굿 라이프다.
물질주의적 가치를 위한 성취는 행복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성취를 위해서 인간관계와 시간을 지나치게 희생하는 것도 행복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을 무너뜨리며 얻는 성취가 행복에 독이 될 수 있다.
성취를 위한 지나친 경쟁도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매사를 남들보다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행복에 장애 요소가 된다.
성취와 성공은 굿 라이프, 특히 의미 있는 삶의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의미 있는 삶은 의미 있는 성취를 필요로 한다.
행복에 가장 중요한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로 유능감 욕구가 있다. 유능감 욕구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 있는 결과들을 만들어낼 때 충족된다. 의미 있는 결과가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일 필요는 없다. 의미 있는 성취에는 어린아이가 혼자 힘으로 숟가락을 사용할 줄 알게 되는 것, 구구단을 외우는 것, 자신이 키운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을 경험하는 것,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것,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 등 매우 사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이 포함된다. 개인 프로젝트에서의 성취가 의미 있는 성취다.
자랑스러운 감정, 즉 자부심(proud)이란 사회가 인정하고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서 성취를 이루었을 때 경험되는 뿌듯한 감정을 말한다. 고요함(serenity)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새벽 숲 속에서 경험하는 고요함도 있지만, 중요한 일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에 찾아오는 고요함도 있다. 1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연주를 마치고 대기실 의자에 털썩 앉았을 때 그 순간의 끝자락에 찾아오는 고요함도 있다. 밤이 늦도록 글을 쓴 작가가 잠시 동네를 산책할 때 느끼는 고요함도 있다. 이런 유의 고요함은 의미 있는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경험된다.
의미 있는 성취의 끝에 찾아오는 자부심과 고요함, 그리고 그로 인해 충족되는 유능감은 행복에 매우 핵심적인 요소다. 행복과 성취는 양립 가능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유발하기도 한다. 성취가 행복을 유발하고, 행복이 다시 성취를 유발하는 선순환적 구조가 존재한다.
확장 구축 이론(broaden-and-build theory)이란 긍정 정서 상태가 인간의 삶에 가져오는 혜택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긍정 정서는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확장시켜주고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자원인 건강, 관계, 수명, 창의성 등을 구축해준다고 주장한다.
목표가 있는 삶
소명과 성취는 목표를 전제로 한다. 의미 있는 목표를 성취하고, 그 목표가 자신의 소명이 되는 삶이 의미 있는 삶의 핵심이다.
어쩌다 우리 사회는 목표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삶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 채 무의미한 노동을 되풀이하는 시시포스로 치부하게 되었을까? 어쩌다 우리는 목표를 포기해야만 행복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마르지 않는 행복의 원천이라고 칭송받던 ‘목표’가 워라밸을 위협하는 흉물스러운 존재로 전락하게 된 데는 목표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큰 역할을 했다. 목표 지상주의에 대한 경계가 목표에 대한 일방적인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벼룩을 잡기 위해 초가삼간 전체를 태우는 것과 같다.
어떤 대상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거나 호기심으로 충만한 상태 역시 행복이며, 그런 관심과 호기심에 기초하여 의미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다.
개인의 행복 수준은 그 개인의 소망과 필요, 목표가 달성된 정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행복은 행복을 추구하려는 강박적 목표를 가지고 노력할 때가 아니라 자신에게 의미 있는 목표를 달성했을 때 그 부산물로 경험된다. 목표는 행복의 원천(wellspring)
어쩌다 우리는 아무런 목표 없이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목표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목표에는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것, 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 가문을 빛내는 것 등과 같은 큰 목표도 있지만,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일상적이고 소소한 목표도 존재한다.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목표의 크기가 아니라 목표의 개인적 의미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일지라도 개인에게 의미가 없다면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적 목표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개인적 목표보다는 집단적 목표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대아를 위해 소아를 희생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목표란 늘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 반의 축구 경기보다는 국가대표 축구팀의 경기가 늘 더 중요했었다. 그런데 살아보니 과연 그러한가?
체중 조절을 위해 간식을 먹지 않기, 주말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기, 타인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하기, 물질주의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등등 개인적 목표는 비록 우리의 연봉을 올리거나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우리 삶에 규칙과 질서를 제공하고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제공해준다. 우리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타인의 기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오다 보니 정작 중요한 개인적 목표가 사라진 것이다.
목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의 조건이다. 남의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발견해야 한다. 무엇보다 목표의 일상성을 회복해야 한다. 특별하고 거대한 것들만이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목표 지상주의에 대한 경계라는 이름으로 작고 소중한 목표들을 등한시한다면, 자신만의 행복 수원지를 스스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목표는 활주로와 같다. 그것이 없다면 삶은 충돌의 연속일 뿐이다.
자기를 절제하는 삶
자기 통제(self-control), 그릿(Grit), 장기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단기적인 유혹을 이겨내는 힘
심리학자 로이 F. 바우마이스터, 의지력의 재발견, 지능과 자기통제야말로 인간 성취의 양대 근원
긍정 정서를 자주 경험하는 사람들이 건강, 학업, 인간관계, 직장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더 많은 성취를 이룬다. 긍정 정서가 성취의 부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를 가져오는 선행 변인이 될 수 있다.
PSI 성취 방정식
지능x자기통제x긍정정서=성취
자기통제는 학업과 직장 내 성취와, 긍정 정서는 인간관계에서의 성취와 강한 관련을 맺고 있다.
긍정적 기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 긍정에 대한 맹신이 긍정교 수준으로까지 치닫고 있고, 행복 전도사라는 용어도 스스럼없이 사용되고 있다. 기질적으로 긍정 정서를 덜 경험하는 내향적인 사람들이나 신경증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마치 원죄를 가진 양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 연구가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부정 정서보다 긍정 정서를 더 많이 느끼는 것이 바람직한 상태인 것은 맞지만, 학업과 직장 내에서의 성취를 위해서는 쾌의 상태보다는 눈앞의 유혹을 이겨내는 자기통제 능력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 삶에는 긍정적 기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많이 있다. 의미가 대표적이다. 즐거운 삶과 의미 있는 삶이 제공하는 혜택이 다르다는 점을 시사하는 우리 연구는 즐거운 삶과 의미 있는 삶의 균형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삶의 4대 의미: 일, 사랑, 영혼, 초월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자 애쓰며,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도 다른 동물들처럼 순간의 쾌감을 즐기지만, 인간만이, 오직 인간만이 ‘삶’을 살아간다. 따라서 인간이 추구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어떤 의미를 추구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인간 의식의 내용(contents of consciousness)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의 의식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서 만날까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내용들에서부터 빈곤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왜 자국우선주의가 팽배하게 될까, 인간의 목적은 행복인가와 같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내용들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스펙트럼의 내용들을 주제별로 분류한 학자들에 따르면 인간 의식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나뉠 수 있다.
인간의 4가지 의식: WIST
일(WORK)
사랑(INTIMACY)
영혼(SPIRITUALITY)
초월(TRANSCENDENCE)
위의 네 가지는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주제들이다. 인간은 이 네 영역에서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
일을 통해 의미 있는 성취를 경험하려는 행위는 실존적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의미 있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삶,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도전 앞에서 실망하고 좌절하지만 결국에는 이겨내려는 용기와 기백, 그리고 그 일이 자신만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소명을 발견하는 기쁨. 이런 목표가 우리를 굿 라이프로 인도한다.
사랑은 단순히 이성 간의 애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을 신뢰하고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삶, 타인에게 베푸는 삶, 타인에게 친절한 삶, 궁극적으로 인류 보편에 대한 자애심을 품으며 사는 삶까지를 포함한다. 사랑에 대한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삶이 좋은 삶이다.
영혼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종교를 갖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과 친밀히 관계하는 것, 초월적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 그리고 우주의 기원과 질서에 대하여 경외감을 갖고 사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한마디로 성스러운 것(the sacred) 자체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삶이다.
초월에 대한 관심이란 의식의 중심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이다. 의식의 중심에서 현재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관심, 공동체에 대한 관심, 미래 세대에 대한 관심,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통해 후대에 어떤 유산(legacy)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오직 자기에만 집착하여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며 살지 않는 삶이 좋은 삶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이 네 가지 영역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다. 일, 사랑, 영혼, 초월에 대한 목표를 갖고 살 때 의미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의미는 의미 자체를 강박적으로 추구할 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중요한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의 끝자락에서 자연스럽게 경험되는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은 의미를 경험해야 한다는 결심을 되풀이하는 행위가 아니라 일, 사랑, 영혼, 초월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늘도 묵묵히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품격 있는 삶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의 삶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아끼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 최고 덕목 중 하나가 타인의 행복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보면, 덕스러운 삶을 굿 라이프의 핵심 요소로 끌어안아야 하는 점이 더 분명해진다.
실수와 오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는 품격 있는 행위다.
자기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같은 원칙으로 설명하는 것(내가 늦은 이유는 차가 막혔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이 늦은 이유는 책임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착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것(괜히 기부를 많이 해서 우리 모두를 바보로 만들었어라며 선한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것), 그리고 냉소적이지 않은 태도(알고 보면 다 꿍꿍이 속이 있을 거야라며 저의를 의심하지 않는 것)
생각과 태도의 관점에서 품격 있는 삶. 생각과 태도에 격을 더하려는 성찰적 행복의 필요성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
일부러 부의 수준, 교육 수준, 인종, 성별이 다른 사람들과 자주 교류하려는 사람, 다양한 모임 속에 자신을 집어넣어서 관계 편중성으로 인한 의식의 편중성을 극복하려는 사람이 품격 있는 사람이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지리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에게 존경, 경외감, 영감, 통합의 정신, 삶의 고귀함, 의미, 자신의 가치를 전염시킨다.
관계의 지리적 편중과 의식의 편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만나는 사람과 삶의 공간을 바꿔야 한다. 시간을 바꿀 것. 지리적 공간을 바꾸는 일이 자신이 접하는 사람을 바꾸는 일이고, 그것을 통해 의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사를 하기 위한 좋은 시기란 집값이 떨어지는 시기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싶을 때여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곁에서 사는 삶은 그 자체가 축복이다.
여행의 가치를 아는 삶
어떤 여행은 인생을 바꾼다. 다작+더 나은 작품 생산. 새롭고 낯선 환경을 의도적으로 접하려는 노력. 외부와의 접촉을 활발하게 시도했던 사회는 새로운 사상과 예술을 역사에 남겼다. 반면 외부와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지나치게 동질적인 문화를 추구했던 사회는 지식과 예술의 침체기를 겪었다. 외부 세계에 대한 개방성이 문화 발달에 끼치는 영향.
개방성(openness), 한 개인의 정신적 경험의 삶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독창성과 복잡성.
편협한 사고, 외부 세계와의 단절, 새로운 사상과 예술에 대한 무관심, 동일성에 대한 압력은 우리의 정신을 폐쇄하게 만든다. 그런 조직과 사회에서 혁신적인 성과가 나오기는 쉽지 않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거꾸로 우리 안의 개방성과 창의성을 불러일으킨다.
당장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친숙한 환경에서 비슷한 사람들과 유사한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예측 가능한 세상이 주는 안락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도시의 공기’가 없다. 중세 농노들이 주로 도시로 도주하거나 이주하여 느꼈던 자유와 경쟁과 개성의 공기가 없다. 파격을 꿈꾸고 새로운 사상에 마음을 여는 것을 장려하는 공기가 없는 것이다.
여행과 이주를 보는 우리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여행은 단순한 레저가 아니며, 이주는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개인에게는 확장된 자아, 개방적 자아를 심어주는 일이고, 사회에게는 미래를 위한 장기 투자다. 무엇보다 삶의 품격을 세우는 일이다.
이동을 꿈꿔야 한다. 소수를 품어 안고,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다수의 힘으로 소수, 이주자, 이단아를 단죄하여 동질성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멈춰야 한다. 이사를 하든지, 제3의 공간을 만들든지, 여행을 하든지, 하다못해 다른 기관으로 출장이라도 가야 한다. 이주하는 자의 이점(The mover’s advantage)이라는 한 논문의 제목처럼 이동하는 자, 여행하는 자에게는 열린 의식이라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여행하는 자들이 누리는 행복은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이 가져오는 도시의 공기는 주변인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그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는 신나는 수다를 통해 주변을 행복하게 만든다.
인생의 맞바람과 뒷바람을 모두 아는 삶
품격 있는 자신에게 불고 있는 맞바람만을 탓하기보다 뒷바람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자신의 맞바람이 더 세다고 불평할 때, 맞바람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뒷바람을 떠올리는 사람이다. 이런 품격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우리의 삶은 뒷바람을 타고 순항하는 항해와 같을 것이다.
냉소적이지 않은 삶
냉소적 불신이란 선한 행동 이면에 이기적 욕심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칭한다.
냉소적 불신이 가득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늘 기분이 좋지 않다. 우울을 경험할 가능성도 높다. 한마디로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냉소주의자의 특허인 적대적 태도, 공격성, 분노는 건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냉소적 불신은 치매 가능성까지 높인다.
진정한 의미의 탁월서 자체에 관심 갖기.
착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의심과 경계의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기보다 지지와 존경의 따뜻한 격려를 건넨다.
냉소적 불신을 유발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결함들이 있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냉소적 인간은 자신의 냉소로 인해 짧은 쾌감을 누릴지는 몰라도 건강, 인간관계, 수입, 성취 등 삶의 많은 분야에서 거센 역풍을 만나게 된다. 냉소적 불신은 의식의 미세먼지 같은 것이다. 늘 뿌옇게 세상을 보고 있으니 좋을 게 없다. 더욱이 냉소주의자들의 불신, 비웃음, 공격성, 우울은 주변 사람들의 삶까지 우울하게 만든다.
품격 있는 사람은 비판적 사고와 냉소적 불신의 미묘한 차이를 아는 사람이다. 비판적 사고라는 이름으로 냉소 어린 독기를 뿜어내지 않는 사람이다. 건설적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기를 꺾는 사람이 아니다. 굿 라이프란 이런 격이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삶이다.
질투하지 않는 삶
진정 탁월한 조직이란 집단의 단합이라는 대의명분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조직이다.
품격 있는 사람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채용한다. 그러나 격이 없는 사람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채용해서 우월감을 느낀다. 품격이 없는 사람은 스타의 몰락을 보고 고소해하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즐긴다. 품격이 없는 조직은 벗길수록 처음보다 작은 인형들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갈수록 못한 사람들만 채용해서 결과적으로 퇴보의 길을 걷는다. 품격 있는 사람은 자신보다 뛰어난 후배를 자랑스러워하며 그를 스타로 성장시키기 위해 진심으로 돕는다.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 진실로 축복받은 삶이다.
한결같이 노력하는 삶
첼로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파블로 카살스는 아흔이 넘어서도 꾸준히 연습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어느 날, 그 세계적인 거장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이 의아했던 누군가가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왜 아직도 그렇게 연습을 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카살스의 대답은 품격 있는 삶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I’m beginning to notice some improvement. (요새 실력이 느는 것 같아.)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유혹을 이겨내는 삶
어떤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충분하고 체계적인 분석 없이 너무 빨리 진단과 대책을 마련하는 위험성. 이뿐 아니라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착각은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착각을 강화시켜서 우리를 오만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폄하할 가능성이 높다.
후견지명의 착각은 우리에게서 사고의 집요함을 빼앗아간다. 후견지명의 또 다른 위험성은 놀람의 실종이다. 어떤 일이 예상을 벗어나거나 정상 범위를 벗어나면 우리는 놀라게 된다. 놀람이라는 감정은 지적 호기심의 가장 강력한 원천이다. 그런데 무슨 일에든지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내 그럴 줄 알았지’ 하게 되면 어떤 일에 대해서도 결코 호기심을 갖지 않게 된다.
품격 있는 삶이란, 후견지명이라는 달콤한 지적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스스로 똑똑하다고 느낄지는 몰라도 이런 반응이 습관이 되면 곤란하다.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남들을 비난하며 우쭐해한다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나요?’라는 냉소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품격 있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해서 솔직하게 놀라는 사람이다. 모두가 빠른 진단과 대책을 앞다투어 내세울 때, 몇 년이고 그 문제를 집요하게 그리고 골똘히 생각해서, 그 문제로부터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는 사람이다. 자신의 전문 분야든 아니든 모든 문제에 대해서 늘 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우리가 경계하는 이유는, 그에게서 자신의 지적 한계를 인정하는 격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이 아름다운 삶
인격이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정의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은 도덕적 완성의 정도가 아니라 한 개인이 세상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가정들의 정확성과 품격의 문제다. 그러므로 인격 수양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정들을 점검하여 나쁜 가정을 좋은 가정으로, 근거가 없는 가정을 정확한 가정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을 뜻한다.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가정들의 차이다. 누구나 하는 평범한 가정을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이 품격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죽음을 인식하며 사는 삶
나이가 들면 일상의 모든 행위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고 믿게 되며, 지금의 나는 무한히 얽히고설킨 사건과 인연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고, 실패에서도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인생이 하나의 스토리임을 깨닫게 된다. 자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어느새 자기 이야기를 써야만 한다는 운명으로 바뀐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풍경들이 정지 화면처럼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인식되기 시작한다. 현재를 음미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는 지금 여기의 삶이 살아지게 된다. 젊은 날, 그렇게 깨닫기 어려웠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원리가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깨달아진다. 나이 듦에 따라 변화하는 타구의 방향을 정확히 포착하여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적절하게 시프트하는 인간이란, 야구로 치면 귀신같은 명감독이 아닌가.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큰 위로와 지혜를 얻는다. 미움받을 용기가 가득한 그들에게서 경외감을 느낀다. 죽음을 의식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삶의 품격이다.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 삶
생명력 있는 삶이 좋은 삶이다. 생명력이 있는 글이란 불필요한 부사가 많이 쓰이지 않은 글이다. 좋은 삶도 그렇다. 불필요한 부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는 인생은 생명력이 없다. 필요 이상의 권력, 부, 명품, 이미지 등이 인생의 부사들이다. 글에서 부사를 한번 남용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부사의 수가 늘어나듯이, 인생의 부사에 의지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그 수가 늘어난다. 결국 생명력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그저 그런 글과 그저 그런 삶이 되고 만다.
아무리 자기 확신이 강하더라도 지나치게 단정적인 어조로 삶을 살아가면,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자유의 침해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확신에 찬 주장이라 할지라도, 더 나은 주장이 존재할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인 경우에 잣니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은 의식의 편협함을 드러낼 뿐이다.
유연한 삶이 곧 타협하는 삶은 아니다. 삶의 복잡성에 대한 겸허한 인식이고, 생각의 다양성에 대한 쿨한 인정이며, 자신의 한계에 대한 용기 있는 고백이다. 확신을 갖되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품격 있는 삶이다.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친 확신으로 타인을 몰아붙이는 것은 타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상대의 행복을 위협하는 행위다.
인생의 부사를 줄이고, 삶의 어조를 낮추고 지나치게 심각하게 살지 않는 삶의 태도
굿 라이프 10계명
좋은 기분
좋은 평가 (만족)
좋은 의미
좋은 사람
좋은 돈
좋은 일
좋은 시간
좋은 건강
좋은 자기
좋은 프레임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생각. 자신의 삶에 품격을 더해주는 생각.
삶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이 명확하고, 동시에 그 기준이 건강하면 살아가는 데 거침이 없다. 그 기준 외의 것들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흔들리는 이유는 자기 기준이 없어서다. 스스로 자기만의 기준 만들기. 나만의 자작곡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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