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11
네, 저는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건 더 큰 성공을 바라는 마음과는 좀 다른데, 두려운 상황이 점점 줄어들고,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편안하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아직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알지 못하는 일'에 몸을 던지길 좋아하고, 그 일이 '잘할 수 있는 일'이 되어 또 한 뼘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시 직장으로 돌아오기로 한 마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끌어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내 모든 능력을 다 쏟아 부으면서 숨 가쁘게 달리면서 얼마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이런 마음은 저의 성향일 뿐이고, 윤리나 덕목 같은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모든 일하는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일을 규정하고, 각자의 리듬에 따라 일하며 살면서도, 적당하게 먹고살 수 있는 사회를 꿈꿉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나의 최대치를 넓혀가고 싶어 하는 제 욕심이 만들어낼지 모를 나쁜 외부효과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p.23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뛸 수 있는 1킬로미터에 집중하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달릴 수 있는 거리가 조금씩 늘어난 것처럼, 삶의 트랙에서도 어느 날인가 나도 모르게 2.5킬로미터를 뛸 수 있게 되었다. 하루 계획에서 한 달 계획으로, 그다음엔 한 분기 정도의 계획으로 생각의 용량이 늘어나더니, 요즘에는 다시 5년 짜리 목표나 계획을 세워보곤 한다. 이건 10킬로미터쯤 되는 트랙일까. 일단 시작해서 3킬로미터까지만 견뎌보면 된다. 1킬로미터 트랙을 세 번 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거기까지는 이제 식은 죽 먹기다.
p.27
더 나이 들기 전에 그렇게 자신에 대한 단단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뭐, 다른 비결은 없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이는 것, 그게 글쓰기든 요리든 달리기든 그림 그리기든 무엇이든. 시간을 들인 효과는 누구보다 먼저 자신이 알게 된다.
p.28-29
한때는 내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한다고 착각했고, 어떤 때는 내가 하는 일이 너무도 무의미하고 심지어 부끄러운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괴롭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일의 바깥에 내 좌표를 놓고 나서야, 그 일이 세상의 다른 모든 일과 그리 다르지 않을 만큼의 의미와 무게로, 어떤 과장이나 비하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아주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하찮지도 않으며, 어떤 구석은 재미있고 좋으며, 어떤 구석은 짜증스럽고 부끄럽기도 한 그런 일로. 그 일은 더 나은 배치 안에 있었더라면 더 좋을 수도 있었던 일이지만, 나쁜 조건이 추가되었더라면 더 나쁠 수도 있었을 일이다. 적당한 정도의 행운이 있었고, 몇 가지 불운도 있었다. 직업은 개인들의 삶에서 이렇게 개별적으로 구현되기 마련이다.
나와 너무 가까운 것에 대해 담담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떤 일이나 상황에서 나를 떼어내고 바라보는 데 서투르다. 그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듯, 늘 그것을 지나치게 포장하거나 지나치게 낮추어보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일을 더 큰 그림 안에서 바라보려면, 그 일의 여러 층위와 의미를 다면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다. 일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를 보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때만이 나 자신도 온전히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자기'로부터 놓여나는 만큼 어른이 된다고 믿는다. 한때는 무엇보다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에 전전긍긍했다. 그러다가는 일이 잘되게 하는 데 매달렸다. 나보다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일이 곧 나, 일의 성과가 곧 나를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에서 멀어지고서야 비로소 그 일을 둘러싼 맥락과, 그 안에서 교차하는 나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의 이해와 욕망이, 그리고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덕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그때그때 다르다. 상황은 늘 변하게 마련이고 당연히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일하기 위해 모였으므로 각자의 사정보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닥친다면 그때는 각자의 사정을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직장에 속해 있을 때나 혼자 일할 때나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인간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면 일은 결국 일일 뿐이다. 그럴 수 있다고 믿을 때에만 지금 이 순간 마음껏 일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거리가 허락해주는 자유다.
p.36-37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언제나 함께 온다. 그중 무엇을 중심으로 내 과거를 이야기로 엮을지는 내 선택이다. 내 이야기에 대한 편집권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신을 위한 배려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필요하다. "차별받은 적 없어요"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내가 겪은 차별뿐 아니라 세상에 버젓이 존재하는 차별까지 지워버리는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렇다고 "차별받았어요"라고 말하자니 차별이라는 말 하나에 과거의 모든 경험이 빨려 들어갈까 두렵다. 이런 이야기의 화자는 그저 피해자로 납작하게 평면화되고 만다. 길고 자세하게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자꾸 입을 다물게 되는 이유다. 입을 다무는 게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서 길고 자세한 이야기를, 나뿐이 아니라 일하며 분투해온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자리들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더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p.39-40
내 훈련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정확하게 깨달은 것은 얼마 전 시어도어 다이먼의 《배우는 법을 배우기》를 읽으면서였다. 몸을 쓰는 기술에서 인간의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다룬 책이다. "대개 배움의 열쇠는 애쓰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명료하게 생각하는 데 있다. 즉, 당신이 늘 하던 방식대로 행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배움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서문에 등장한 이 구절에서 나는 뒤늦은 '아차'의 순간과 마주했다. 한 시간 안에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을 목표로 훈련을 시작했는데, 내가 달릴 줄은 알지만 단지 '10킬로미터를 한 시간 안에' 달릴 줄을 모를 뿐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나의 훈련은 어떻게 '달릴까'가 아니라 어떻게 '빨리, 오래', 그러니까 한 마디로 '잘' 달릴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다이먼은 대부분의 사람이 배움을 시도할 때, 진정한 의미의 시도가 아니라 그저 '잘하려고 애쓰기'를 수행할 뿐이라고 말한다. 특정 기술을 익히기 위해 어떤 세부 동작이 필요한지 분절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판에 박힌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또 "'결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실패의 보증수표"라면서 "결과가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방법'에 오롯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10킬로미터를 한 시간 안에'가 아니라 내 무릎이 어떻게, 팔이 어떻게, 발바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10년 늦었지만 유튜브에서 '달리는 법'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 제일 윗줄에 있는 영상을 클릭하니 첫 장면에서 발뒤꿈치를 디디며 달리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고관절 부상으로 가는 지름길이란다. 10년 전 나는 왜 몸과 마음만 부지런하고 머리가 게을렀을까. 참으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배우는 법부터 시작한다. 아직 달리기를 좋아하니 다행이다.
p.40-41
잘하고자 하는 욕망은 대개 우리를 더 걱정하게 만들 뿐 부담을 덜어주지는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에서 주의를 거두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행위에 집중하고 불안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시어도어 다이먼, 원성완 옮김, 《배우는 법을 배우기》, 민들레, 2017, 121쪽.)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은 어쩌면 '애쓰기'로 인도하는, 잘못 끼운 첫 단추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까요?"와는 분명히 다른 질문이다. 핵심은 '나'의 '성장'이 아니라 내 눈앞의 과업(무엇)과 그것을 해내는 방법(어떻게)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발 한 발을 제대로 올바르게 내디딜 수 있어야만 부상 없이 잘 달리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나의 지성이 집중해야 할 지점은 한 발을 잘 내딛는 것이다. 성장은 한 발들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가닿을 수 없는 결과물이다.
성장은 과정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결과이고, 잘 수행된 과정은 세상이 성공이라고 정의하는 결과를 담보하지는 못해도 성장만은 가져다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수행의 과정에 지적으로 집중하며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의식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자신이 무엇에서 나아졌는지 발견하게 된다. 그걸 발견한 사람은 거기에 '성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p.44
성장에는 과정을 요소들로 분절하고, 요소들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과정을 요소들로 분절하는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세상에는 천재가 있으니까), 일을 배워낸 사람들, 그리하여 결국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그 요소들을 보여준 선생님이 있기 마련이다. 대개 그 선생님들은 가르치는 줄도 모르고 가르쳤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도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고 배우지만, 내 첫 직장에서처럼 아주 명확한 시스템이 곧 선생님이기에 빠르고 효과적으로, 무엇을 배우는지 인지하며 배우게 되기도 한다.
"성장을 목표로 하지 말고, 오늘의 과업에 집중해야 해요"라고 그 동료에게 말하고 싶었던 마음을 거둔다. 유튜브에서 주법 레슨 영상을 봐야 했던 나처럼, 모두에게 선생님이 필요하다.
p.54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갈 수 있는 한 멀리 가보고 싶어졌다. 나에게 주어진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다 써보고 싶다. 남김없이, 전부.
p.68-69
어차피 what if를 확인할 방법은 없고, 단 하나의 경로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는, 내가 의식적으로 내리는 선택보다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행운과 불운, 그 행운과 불운을 대하는 나의 태도로 결정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고, 그 덕에 선택은 가볍게 하고 오늘은 단단하게 살려고 한다. 역시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일상뿐이다.
가끔 멋진 일이 생기고 난 직후에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일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일들이 생긴 후에 되돌아보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현재가 과거를 재배치하는 것이다.(리베카 솔닛, 김현우 옮김, 《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359쪽.)
p.76
무엇을 얻는 대신 무엇을 버릴 것인가. 모든 선택은 현실 안에서 자기 기준에 맞춰 나름의 최적화를 해나가는 과정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좋아 보이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착각하기도 쉽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아니더라도, 삶의 무수한 선택이 결국 자신의 우선순위에 맞춰 얻을 것과 버릴 것을 추려가는 과정이다. 모든 것을 다 누릴 수는 없다. 하나를 새롭게 시작하는 선택은 필연적으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다른 무언가를 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이제 제법 내 삶의 우선순위가 뚜렷해졌다는 것, 그래서 선택과 결정이 조금은 쉬워진다는 데 있다. 이제 내 삶에 대해,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해 제법 많은 데이터가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p.78
모든 삶에는 빠진 구석이 있고, 또 그 덕에 채워진 구석이 있다. 모든 삶에는 부러운 점이 있지만 나름의 어려운 점도 있다. 다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붙들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버리거나 견뎌야 한다. 내가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다 해도, 크게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나라는 사람은, 모두가 그렇듯, 이런 식으로 생겨 먹어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선택들에 그토록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나온 시간에 조금쯤 애잔한 마음이 드는 이유다.
p.82
나는 지난 경험을 과거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고쳐 쓰곤(혹은 말하곤) 한다. 이야기를 갱신하는 순간들은 다른 그릇에 미래를 담길 바라는 욕망이 떠오를 때(혹은 그러지 않을 수 없을 때)다. 갱신된 이야기가 과거에 썼던 이야기를 배반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 속 재료들은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로 조합될 수 있고, 과거에 썼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새로운 이야기의 재료가 된다. 이야기의 세계는 언제나 움직이고, 거기에서 의미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직 우리가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만이 있을 뿐.
p.83
인간은 한 인간을, 그가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어떤 노력으로도 과거를 없던 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은 언제나 미래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선택을 할 힘이 있다.
p.88
미래를 그릴 때 현재를 그대로 연장하는 대신, 여지를 많이 두는 힘을 기르고 싶습니다.(안은별, 《IMF 키즈의 생애》, 코난북스, 2017, 373쪽)
현재의 경향을 그대로 연장해 미래를 예측하는 대신, 다른 미래를 만들어내는 가능성을 상상하는 데는 진실로 힘이 필요하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p.98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기존 서사의 압력을 이겨내고 우리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겐 이 이야기가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대신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기존의 운동에서는 약간씩 비껴서 서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주는 득도 실도 있었습니다. 득이라면 우리 고유의 관점을 계속 형성하면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과 공명할 수 있었다는 점일 테고, 실이라면 역시 그 관점을 알아보는 사람이 적어서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겠죠. 어쨌든 우리는 원하는 곳으로 곧장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BIYN 리-런칭 파티 자료집.)
p.106
그렇지만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고 싶다. 매일 스키를 탈수록, 어제보다는 몰라도 작년보다는 오늘 스키를 더 잘 타게 되었다고 느낀다. 실은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매일 아침 슬로프의 첫 런에서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그날의 마지막 런까지 조금씩 고쳐나간다. 산은 아름답고, 공기는 맑다. 나만 알고 있어도 충분한, 자기완결적 우주가 여기에 있다.
p.107
나는 애호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겹겹의 우주가 있다는 걸 '안다.' 믿는 것이 아니라 안다. 그리고 나의 그 우주 안에서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
춥고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던 어떤 날, 그 덕에 바삭바삭한 질감의 눈이 두텁게 슬로프에 다져진 날, 해가 밝게 떠올라 저 멀리까지 쨍한 풍경이 펼쳐지는 날, 신기하게 스키가 잘 밟히고 평소보다 조금 빨라도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 날, 사람 없는 슬로프를 가르며 아침의 첫 활주를 마치고 바닥에 내려왔을 때 '충분하다'라는 말이 내 마음에 떠오른다. 오늘 스키는 이것으로 충분하고, 내 삶은 이런 즐거움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세상 쓸모 없(어도 되)는 이 일 때문에 나에게 부과되는 모든 쓸모 있(어야 하)는 일들의 무게가 별것 아니게 느껴지는 순간. 내 일상 속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다.
p.110-111
더 자유로워졌다는 느낌
훈련은 매일 공을 들임으로써 조금씩 더 잘하게 되는 것을 느끼고, 그 느낌을 바탕으로 좋은 스킹을 자신만의 언어로 규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점점 더 잘하게 된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느낌에 달려 있다. 내가 매일 스키를 타면서 기문을 꽂아놓고 기록을 재거나, 어떻게 스키를 탔는지 촬영해서 자세를 점검해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말인즉슨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은 이런 일을 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의 활주가 바로 지난번 활주보다 나았는지 아닌지 느낄 수 있다. 오늘의 활주를 어제의 활주에 견주어도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다. 스킹이 더 나아졌다는 느낌은 더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에 가깝다. 컨디션이 더 나쁜 슬로프에서도, 더 빠른 속도에서도 편안하게 두 스키를 내 발 밑에서 컨트롤하고 있다면, 그게 더 나은 스킹이다. 그리고 그걸 아는 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훈련이 필요했고, 지금도 여전히 좋은 선생님의 코칭은 큰 도움이 된다. 아마도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내가 훈련을 통해 누리는 기쁨 그 자체에 누군가의 승인이 필요하지는 않다. 내 머릿속에 좋은 스킹, 좋은 턴의 모델을 점점 더 정교하게 만들고, 그걸 내 몸이 수행할 때 느끼는 충만감이 내 삶의 무게중심이 되어준다. 이번주 활주에는 그 모델 중 어떤 요소를 빠뜨렸는지 찾고, 다음의 활주에 그 요소를 다시 채워 넣는다. 이것을 반복해가는 과정에서 나는 눈 위에서 더 자유로워진다. 이 과정에서 느끼는 만족감이야말로 그 어떤 객관적 성취보다 단단한 지반이다.
p.111-112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
굳이 휘슬러까지 가서 스키를 타는 것은 물론 3월에도 좋은 눈에서 스키를 탈 수 있기 때문이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제대로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이상을 매일,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넓디넓은 스키장의 다양한 슬로프에서 오래 스키를 타면, 하루하루 새롭게 익히는 감각의 폭이 한국에서보다 훨씬 크다. 그렇게 보름쯤 지나면 하루하루의 성장이 쌓여, 나는 첫날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다란 스키의 날이 설면을 날카롭게 베고 지나갈 때, 마치 스키는 내 발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보름 전에는 존재하는 줄 몰랐던 미지의 감각이 이제 내 것이 되어 있다.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스키를 더 잘 타게 될 때,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거대한 산의 눈곱만 한 일부가 되어 스키 위의 자유를 누리는 만큼, 다른 모든 일이 결국은 별것 아니라는 마음이 된다.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이 되고, 작은 일에도 흥이 난다. 피아니스트 시모어에게 피아노와 삶이 연결되어 있듯이, 내게는 스키와 삶이 연결되어 있다. 시모어는 좋은 삶을 통해 좋은 피아노로 가는 것이 더 쉽고, 동시에 좋은 피아노가 좋은 삶으로 가는 통로가 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스키가 잘될 때, 스키가 내게 마지막 비빌 언덕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만으로 좋으니 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 다른 모든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 잠깐이나마 그런 넉넉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넉넉한 마음이 들 때의 나를 나는 좋아한다.
p.115-116
진지하게 운동을 하다 보면, 일상 속에서 감지하는 것보다 빠르게 내 신체가 정점을 지났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하루키의 말대로, 일상적인 활동에서는 전혀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데도 그렇다. 점점 나은 몸(보기 좋은 몸이 아니라 기능이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한다는 생각에서 이 상태라도 오래 유지하고자 운동한다는 생각으로 넘어가야만 하는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옮기지 못하면 더는 진지하게 운동을 하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을 이행시키는 것은 조금 쓸쓸한 일이지만 미리 맞는 예방주사 같은 것이다. 다른 모든 활동에서는 아직 전성기처럼 보이고 모두가 그렇게 말해주니 곧 닥쳐올 하강의 국면을 알아채기 어렵다. 운동을 하면서 몸에만 오롯이 집중하는 동안, 나는 몸이 전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계속 하는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쓴다.
그런 하강이 존재하지 않는 양 이를 악물고 전처럼 하려고 애쓰다가는 부상을 당하고 몇 달을 꼼짝없이 쉬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어떤 자책감에 빠질지 잘 안다(물론 내가 그런 일을 이미 여러 차례 저질러봤기 때문에 안다). 삶의 다른 많은 일에 대해서도 머지않아 비슷한 상황이 닥칠 것임을 새긴다. 나의 '할 수 있는 만큼'이 매일 달라진다는 것이 기뻤던 시기에서 쓸쓸한 시기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p.116-117
나만이 아는 기쁨
그런데 동시에 이러한 이행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는 희망 역시 몸을 통해서 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몸의 능력이 점점 좋아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운동이 는다는 느낌은 여전히 가능하다. 사람의 감각이 완벽하게 객관적이거나 총체적이지는 않아서, 어떤 구체적인 부위, 구체적인 동작에 집중해보면 어제는 몰랐던 새로운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특정한 동작은 어제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특히 과거에는 팔팔한 체력 덕에 의식하지 않고도 자동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던 동작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예전에는 지나쳤을 근육의 움직임을 인지하게 된다. 거기에는 그 자체로서의 즐거움이 있다. 혼자서 고요히 누리는 기쁨이다.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아마 다른 많은 일도 그러할 것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분명히 나의 다른 능력들도 어떤 것은 이미 정점을 찍었거나 또 어떤 것은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내 능력의 총합이 계속해서 커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도 크고 작은 정보를 금세 까먹는다. 머리도 전처럼 쌩쌩 돌아가지 않고, 고유명사가 떠오르지 않아 말문이 막힐 때도 점점 잦아진다. 능력의 총합이 서서히 줄어들 것이라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저 지난 이력이 쌓아준 자원과 관계에 의존해 자리만 붙들고 있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결심한다. 그렇지만 그게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거나 일이 전처럼 재미있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운동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능력의 총합과는 상관없이 매일매일 새롭게 얻게 되는 앎이, 전에는 몰랐던 기쁨이 또 있을 것이다. 하루에 두 개를 잃고 한 개를 얻는 식이 되더라도, 새로이 얻는 하나가 여전히 있다면 충분히 계속해 나갈 이유가 있다.
p.117-119
운동으로 얻는 새로운 렌즈
몸을 진지하게 단련해보면, 모든 종류의 단련이 그렇겠지만, 존재하는 줄 몰랐던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또 다른 렌즈를 획득하게 된다고 할까? 내가 몸의 기능에 주의를 기울이고, 운동을 진지하게 시작하게 된 것은 모두 스키 덕분이다. 어쩌다 스키를 처음 타게 되었고, 스키 타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정말 스키를 잘 타고 싶어졌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스키는 몸으로 하는 스포츠이고, 스키를 잘 타려면 스키만 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스키는 겨울 스포츠이므로 봄부터 가을까지(이른바 '비시즌' 동안)는 지상 훈련을 해야 한다. 체력을 키우고 하체와 코어 근육을 강화하고 균형감각을 높이는 운동이 다 도움이 된다. 스키 덕에 나는 몸을 단련하는 운동에 진입했고, 그 이후로는 꼭 스키 때문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운동을 해왔다. 물론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에 소홀해지는 시기도 있지만, 결국은 다시 운동으로 돌아가곤 한다. 일정 기간 이상 몸을 단련해보면, 몸의 컨디션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게 된다. 심폐지구력이 떨어진다거나 근력이나 유연성이 줄어드는 것을 지각하면, 어쨌든 다시 운동으로 돌아가게 된다.
운동을 하면서 획득한 새로운 렌즈는 내 몸을 이루는 근육과 뼈의 물리적 존재에 대한 감각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발목과 무릎과 고관절,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와 견갑골을 느끼면서 움직이는 것, 광배근과 승모근을 분할해 움직이는 것, 햄스트링을 쓰는 동작과 둔근을 쓰는 동작을 구분할 수 있는 것 등이다. 몸의 특정한 부위를 움직이는 감각, 그 부위가 다른 어떤 부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인지하면서 몸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그 덕에 한국 사회를 사는 여성으로서 어쩔 수 없이 느껴오던 '보기 좋은 몸'에 대한 강박에서 제법 자유롭게 되었다. 물론 완벽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남들이 예쁘다고 해주는 몸보다 기능이 좋은 몸이 훨씬 탐난다.
p.120-121
내 수준에서는 머리로 이해하고 동작의 단위들을 감각하고, 몸이 그 과정을 자동으로 수행하도록 훈련하는, 몸과 머리 사이를 오가는 이 반복 훈련의 과정이 즐겁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식의 훈련이 다른 일에도 적용된다는 걸 안다. 거절하기, 회의를 잘 진행하기, 발표 잘하기, 좋은 판단을 하기 등등. 운동이나 악기 연주뿐만이 아니라 모든 게, 결국 몸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몸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만큼, 다른 일에 대해서도 단단한 코어 근육이 생기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유난히 스키가 잘되기도 한다. 어제까지는 영 갈피를 못 잡았던 어떤 동작이 갑자기 몸에 쑥 들어오는 날이 있다. 그런 날 느끼는 짜릿함은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짜릿함만큼이나 조바심이 든다. 오늘 새롭게 몸에 들어온 그 동작의 감각을 잘 기억해두려고 노력한다. 내일도 그 동작을 재현하기 위해 최대한 몸의 부분 부분에 신경을 쓰고 그 감각을 의식에 각인시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역시 어쩔 수 없다. 다음 날에는 무조건 실망이 따른다. 분명히 그 동작을 세세히 기억에 입력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완벽하게 재생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전보다도 스키가 잘 안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까먹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된다.
이런 환희와 실망의 주기를 수없이 반복한 뒤에야 깨달은 사실이 있다. 어떤 날 갑작스럽게 생겨나는 새로운 능력은 그날따라 나도 모르게 수행한 다른 기본기들 덕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새로운 동작은 다른 수많은 동작을 딛고 이루어진다. 새로운 무엇이 갑작스럽게 되었다면, 여태껏 훈련했던 많은 것들이 나도 모르게 몸에 배어 자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음 날 그 새로운 동작을 구현하려 애써도 잘되지 않는 것은 어제 나도 모르게 수행했던 다른 많은 동작 중 무언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새로 익힌 동작을 되살리는 게 아니라 빠뜨린 다른 동작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다.
p.121-123
기대를 내려놓기
실력을 기르는 일은 돌 하나씩을 쌓아올리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점을 찍고, 그 점들을 이리저리 연결하고, 때로 찍었던 점을 잃어 애써 연결에 성공한 선분이 함께 사라지고, 그러면서도 거듭 점 찍기와 연결하기를 시도하면서 커다란 그림을 완성해가는 일에 가깝다. 실력은 절대로 단선적으로 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갑자기 스키가 잘되는 날, 그냥 온전히 오늘을 즐기자고 마음먹는다. 물론 여전히 새롭게 몸에 들어온 감각을 기억해두려고 노력하지만, 내일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 당연하다고 미리 기대를 내려놓는다. 내일이 어찌되었든 오늘 이렇게 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새로운 감각도 이런 식으로 몸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며 언젠가는 내 것이 될 것이다.
사실 어제 들인 노력을 고스란히 쌓아서 다음 단계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운동을 꾸준히 할 수가 없다. 사람의 몸은 항상적이지 않아서 계속 노력을 들이는데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오히려 점점 나빠질 때도 있다. 한 발을 나갔다가 두 발 뒤로 다시 밀려가는 날이 부지기수다. 더구나 스키는 겨울에만 할 수 있는 운동이다. 한겨울 내내 애를 써서 간신히 언덕까지 돌을 굴려놓아도, 비시즌 동안 주르륵 돌이 굴러 저 바닥으로 내려가버리는 것이다.
시즌 첫날은 언제나 작년의 최고점에서 얼마나 후퇴했는지 실감하는 데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예전에는 그게 그렇게 속상하고 억울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계속 그런 마음이었다면 스무 시즌이 넘도록 스키를 탈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시즌의 마지막 날 내 돌이 어디에 있었는지, 심지어 어제의 마지막 활주가 어느 수준까지 올라갔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오늘 아침 첫 활주에 비해 돌을 제법 굴려 올릴 수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매일의 스키를 마친다. 스키 타기를 여전히, 실은 매해 더욱 사랑하는 이유는 아침의 출발점이 어디였든, 그보다 조금 위로 굴려 올리는 하루의 시간이 거의 언제나 즐겁고 짜릿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쨌든 긴 시간을 돌아보면, 굴려 올렸다 미끄러져 내려 오기를 계속 반복한 것 같아도 서너 시즌 전보다는 분명히 더 올라와 있다. 물론 이런 더딘 향상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다. 분명히 더 이상은 실력이 늘지 않는 시기가 닥치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하루하루 조금씩 상승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 그조차 불가능한 날이 와도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 여전히 스키를 타고 있을 것이다. 그게 내 바람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다른 많은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p.126-127
빌은 내가 약한 부분에 강하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할 때 완전하다. 우리 둘은 각각 필요한 것의 절반은 바깥세상에서 얻고 나머지 절반은 서로에게서 얻는다. 나는 속으로 그의 월급을 올리고 실험실을 계속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겠다고 맹세했다. 노력하면 될 것이다. 나란히 자리한 두 실험실에서 우리는 각각 라디오를 켜서 서로 다른 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호프 자런, 김희정 옮김, 《랩걸》, 알마, 2017, 45쪽)
얼마 전 회사 동료와 술을 마시다가 오래 일하는 비결은 '꾸역꾸역'하는 거라는 이야기에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이고 성별도 같은 그 동료가 이르기를, 20대 후반의 여자 후배 하나가 "어떻게 하면 오래 일할 수 있느냐.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라고 했고, 거기에 "그냥 꾸역꾸역 하면 된다"라고 답했다는 거였다. "하다 보면 치사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거야.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고. 그럴 때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꾸역꾸역 하면 돼."
동료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한바탕 웃었지만, 마흔 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과연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걸까 툭하면 의심에 빠져드는 나에게도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의심이 들 때면 그냥 머리를 파묻고 꾸역꾸역 하면 된다.
"중요한 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긴 하다. 나 역시 이 말을 좋아한다. 이 말은 돈 받고 일하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하는 게 아니라 계속 하는 게 중요하다"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계속 하는 것과 열심히 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문제다. 계속 하다 보면(언제나 열심히는 아니더라도) 그것만으로 이르게 되는 어떤 경지가 있다. 당장의 '잘함'으로 환산되지 않더라도 꾸역꾸역 들인 시간이 그냥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고 믿고 싶다).
p.128
꾸역꾸역 채우는 매일은 그다지 아름다울 게 없더라도, 그렇게 하다 보면 운이 따르는 어느 날, 두 사람의 프리댄스와 같은 아름다운 순간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점수가 전광판에 뜨기도 전에 뜨겁게 포옹하며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면서, 꾸역꾸역이 준 보상은 점수가 아니라,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차리는 그 아름다움의 순간이라는 걸 실감한다. 바로 그날이 올림픽에서라면 최고겠지만, 관중이 없는 연습 링크에서라고 값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아름다움은 그걸 만들어낸 본인들이 가장 먼저 알고, 거기에는 이미 보상이 있다.
p.134-135
프로젝트와 태스크
일에는 프로젝트의 층위가 있고 태스크의 층위가 있다. 프로젝트는 정해진 목표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을 중심으로 정의된다. 태스크는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매일매일의 과업이다. 예를 들어 "6개월 안에 '새로운 시대의 일하기'라는 주제의 책을 출간한다"는 것은 프로젝트이고, 책의 기획서를 쓰고 목차를 짜고 매일매일 글을 써서 원고를 완성하고 탈고하는 것은 태스크다. 하나의 프로젝트에는 늘 여러 태스크가 포함되고, 프로젝트 차원에서는 내가 원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 프로젝트 안의 모든 태스크가 즐거울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프로젝트일수록 그 안에는 반드시 괴롭고 어려운 태스크가 더 많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p.136-137
훈련 후에는 근육이 자란다
그런데 일만이 아니라 운동도 고행이란 생각이 든 그 순간, 그럼에도 운동만은 '요즘 내 삶의 유일한 낙'이라며 즐겁게 붙들고 있는 이유가 동시에 떠올랐다. 괴로운 운동을 즐겁게 견디는 건, 이 끝에 더 강하고 유능한 몸을 얻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운동의 영역으로 오면, '고행이다' 싶게 운동한 날 오히려 더 뿌듯하다. 힘들다고 느끼는 만큼 근육이 자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운동을 했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오늘의 운동은 훈련이 아니라 그저 에너지 소모일 뿐이라는 것도 안다. 지금 내 깜냥을 한 뼘씩 비껴나며 나를 괴롭게 하는 태스크도 운동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 태스크의 괴로움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요즘 하는 일들에서 내가 괴로움을 거듭 느끼는 건 이 일이 내게 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5킬로그램이나 증량한 스쿼트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이 괴로움은 내가 힘을 늘려가는 과정에 있다는 뜻일 테다. 이 시간이 훈련이라면, 이 훈련의 끝에 근육은 반드시 자라 있겠지.
힘에 부치는 태스크의 목적이 프로젝트의 성공이라고 생각할 때는 이 모든 일이 결실이 불확실한, 무용할지 모르는 노력이라는 회의가 들었다. 내가 이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인지도 자꾸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괴로운 하루하루를 훈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게 훈련이라면, 그것만은 반드시 성공해낼 수 있다는 자신도 생겼다. 나는 괴로운 훈련을 끈질기게 버티는 데는 능하다. 이 훈련의 끝에 운이 좋게, 내가 그토록 바라는 프로젝트의 성공도 뒤따른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건 운이 따라야 얻을 수 있는 보너스다. 그러나 이 태스크들에 점점 편안해지고 더 유능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은 분명하다. 훈련이 일등을 담보해주지는 않지만, 훈련 이전보다 근육이 자라는 것만은 보장해주는 것처럼.
그날 밤 나는 업무 계획 대신 훈련 계획을 세웠다. 지금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태스크, 가장 부족하다고 여기는 일을 연습하기 위한 루틴이다. 일단 1년쯤 이 루틴을 무조건 반복해보기로 한다. 프로젝트는 어떨지 몰라도 태스크만은 조금 수월해질 테고, 나는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숲이 아니라 그냥 나무를 보는 게 필요한 시기도 있다.
p.146
조소담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한 산업의 이름이나 숫자로 된 지표들을 조금 포기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애매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시도들을 조금 더 많이 응원하는 체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147
과거에는 명확했던 기준으로 더 이상 분류할 수 없는 사람과 사레들이 점점 늘어난다면, 애매함을 포용해주는 영역이 필요하다. 과거의 기준으로 보아 단일하고 깔끔한 목표는 의미 있는 차이,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억누를 가능성이 크다.
p.150
일은 가장 먼저는 먹고사는 수단이어야겠지만, 행복하게 일하는 데에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다양한 욕망과 능력이 있다. 하나의 일자리가 모든 것을 해소해줄 수 없다면, 스스로 일들의 조합을 만들어내 직업을 창조하려는 이들이 바로 n잡러다.
p.152-153
"자신을 여러 정체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로서 받아들여라." 사람들은 흔히 일관성이 진정성의 표식이라고 생각하지만, 늘 한 가지 모습이어야 진정한 것은 아니다. 인간에겐 여러 측면이 있다. 복수의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그런 여러 측면에 빛을 드리워 다양한 성향과 능력을 발현시키는 일일 수 있다. 자신을 하나의 고정된 주체로 상정하고, 거기에 딱 맞는 하나의 직업을 찾으라는 게 여태껏 들어온 조언이기 때문에 n잡러는 "대체 나는 누구인가"에 명료하게 답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그러나 n잡러에게 필요한 것은 고정된 단 하나의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답들을 서로 연결하여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서사가 유동하는 정체성을 붙들어주는 하나의 정박지가 된다.
p.156-159
'진정한 나'라는 착각
어빙 고프먼이 쓴 《상호작용 의례》에 따르면, 가면 뒤에 숨은 실체가 진정한 나라는 믿음은 착각이다. 고프먼은 일상 속 상호작용을 일종의 공연으로 인식하여 "자아를 이중의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는 공연된 "이미지로서의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공연을 수행하고 평가하는 "의례 게임의 선수와도 같은 자아"다.(어빙 고프먼, 진수미 옮김, 《상호작용 의례》, 아카넷, 2013, 43쪽) 공연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와 공연된 결과로서의 자아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둘이 한 세트로 '나'를 이룬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공연은 언제나 무대를 전제로 하므로 자아를 무대와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 무대는 공연된 자아에 영향을 미치며, 다시 공연된 자아는 공연자로서의 자아를 변형시킨다. 따라서 무대로부터 아무리 멀어져도, 그리하여 공연자로서의 자아만이 남는 장소에 이른다 해도, 그 자아에는 공연이 일으킨 변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니 크리스토퍼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정한 나는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십 몇 년 동안 누리던 것을 버리고 떠난 여행에서 그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비로소 행복해 보이는 듯했지만 잠깐뿐이었다. 그는 그 관계들을 뒤로하고 또다시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한다. 어떤 관객도 동료 배우도 찾을 수 없는 그곳에서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렇게 '공연'한다.
넌 어디든 갈 수 있어. 돈도 권력도 모두 허상이야. 넌 여기에 있을 수 있어. 너와 나 둘이서.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수행할 어떤 공연도, 의식해야 할 어떤 관객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크리스토퍼가 마주한 것이 진정한 나였을까.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연기하며, 심지어 일기를 쓸 때도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89쪽)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죽음을 예감하며 남긴 마지막 메모에 스스로 부여한 이름 '알렉산더'가 아니라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남긴다. 그는 다시 사회가 부여한 자신의 자리로, 바로 그 이름으로 돌아간 채 죽는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배역
공연된 자아와 공연하는 자아는 결코 일치할 수 없다. 그 둘은 애초에 다른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쪽이 물리적 실체를 가진 현실에서 작동한다면, 다른 한쪽은 의도나 관념, 의지와 판단, 상상과 서사의 차원에서 존재한다. 현실에서 작동하는 쪽은 공연된 자아다. 한 차원의 것이 다른 차원의 것으로 이동할 때, 필연적으로 편집되고 해석되며, 일부는 버려지거나 더해진다. 그 둘 사이의 이 피할 수 없는 차이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둘 사이의 불일치 때문이 아니다. 공연된 자아가 오른 무대와 맡은 배역을 공연하는 자아가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여러 개의 무대에서 여러 배역을 공연하며 살아간다. 그 배역 중 유난히 진정한 나와 부합하다고 느끼는 것이 있을 테고, 또 유난히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끝끝내 확인할 수 없는 진정성의 정도로 매겨지는 것이라기보다는 각 역할의 이미지, 그 역할의 논리를 스스로 얼마나 수긍하느냐로 결정된다.
신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교회 공동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교회에서의 자신을 가장 자랑스러워할 것이며 그 모습이 진정한 나에 가깝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갖는 여성이 명절마다 이름 없는 '며늘아기'가 되어 부엌 한구석에서 하루 종일 전을 부쳐야 한다면, 명절날의 자신을 진짜 나의 모습으로 여길 리 없다.
일상에서 수행하는 모든 역할을ㅡ가족 내에서의 역할부터 직장에서의 역할, 심지어 소비자로서의 역할이나 동네 주민으로서의 역할까지ㅡ진정한 나와 견주어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그 역할들을 유기적으로 종합한 총체로서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느냐다. 정체성, 자기 서사의 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 배역(들)이 있는지, 그 배역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과 대본을 납득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역할이 연기하는 대본에서 얼마나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따라 '나'는 좀 더 진정해진다(납득할 수 없는 대본을 연기할 때, 자신이 싫어하는 그 역할의 내가 '진정한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일 것이다. 동시에 그 공연을 보고 있는 관객에게 호의적일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자아는 원래 여러 역할로, 여러 가면으로 조각나 있다. 그 조각들을 이어 붙여 스스로 납득할 만한 정체성을 만들 수 없을 때, 그 조각들을 가짜라고 생각하게 된다.
크리스토퍼가 새로운 자기 자신과 만나고 싶었다면,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돌멩이와 대화할 게 아니라 이전과 다른,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공연과 배역을 찾았어야 했다. 지금의 관계들로부터 도망쳐 온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과거의 공연들이 남겨놓은 흔적이 아니었을까. 찾아야 할 것은 '진정한 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다른 무대 위의 다른 배역이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비로소 공연된 자아와 공연하는 자아는 화해할 수 있다.
p.162
미리 계획된 경로를 밟아 차근차근 전환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전환의 욕구나 필요가 닥쳤을 때, 대부분 먼저 '방황기'를 겪는다. 그 방황기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 우연히 마주친 기회들이 전환의 경로를 제시한다.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최적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로 안에서 마주치는 경험과 관계망 안에서 자신의 선호와 기준에 따라 하나의 답을 만들어가는 것이 '어쩌다 전환의 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술에는 우연성에 열려 있는 방식으로 일과 관계를 조직하는 삶의 태도와 구체적 지침들이 포함된다.
p.163
나는 "전통적인 의미의 전문성을 어떻게 갖추느냐보다는 자신만의 탁월성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답했다. 전문성이 한 가지 이름의 직업과 결부되는 것이라면, 탁월성은 일을 바라보는 접근법, 다양한 분야로 확대할 수 있는 중심 기술과 연결된다. 중심 기술은 사실 하나의 서사이자 이름 붙이기다. 기자였다가 번역가이자 작가로 일하고, 또 비영리단체의 옹호부장에서 사업본부장을 거친 김희경 작가는 자신의 중심 기술이 "정보를 구조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직업과 직위는 계속 바뀌었지만, 정보를 구조화하는 것이 언제나 자신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며 '우연히' 다음 단계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두는 것,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찾아가는 것. 전통적인 이름으로 담을 수 없는 파편적 경험들을 관통하는 '이름'을 붙이고 말하는 것. 어쩌면 이런 조언들은 유동성이 불가피한 현실에 맞춰 진화한 자기계발의 복음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p.166
엄윤미 님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팀을 리드하는 입장이 된 후 계속 느꼈던 것 같아요. 처음 프로젝트 팀장을 맡았을 때 '나 스스로 이 답이 맞다고 믿는가'와 '디렉터가 어떻게 생각할까' 중에 어떤 질문을 먼저 고민할까 돌아본 적이 있어요. 그러면서 나는 아직 내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있나 싶기도 했고요.
맥킨지라는 모범생 조직 안에도 교복 입은 학생 같지 않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딱 보면 알 수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정말 멋있게 보였는데, 나와 뭐가 다른가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풀고 싶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하더라고요. 탁월하게 일을 하기 위한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탁월하게. 이 단어가 내 눈길을 잡아끌며 튀어 올랐다. 전문성이 아니라 탁월함이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을 해오던 터이기도 했다. 전문성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인정이라면, 탁월함은 자발적인 동기부여를 통해 스스로 쌓아가는 역량이다.
p.168
사람들은 누군가와 직접 일해보기 전에 이력서의 몇 줄, 그러니까 '어디'에서 '얼마나 오래' 그 일을 했느냐를 가지고 전문가인지 아닌지 판단한다. 시스템의 교복을 입고 차곡차곡 모범생으로 보낸 시간의 총량이 전문성의 훈장으로 환원되는 셈이다. 이렇게 전문성이라는 이름의 디딤돌은 한곳에서 오래 일할 기회를 누리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에 딱 그만큼 점점 더 희소한 자원이 된다. 이런 식으로 규정되는 전문성은 불가피하게 배타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p.168-171
자기 목표를 가진 사람
그에 반해 탁월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럼에도 더욱 가지기 어려운 것이다. 탁월성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자격 조건 같은 것은 없지만, 시스템의 내부에 안착해 그저 시간을 쌓는 것만으로 탁월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와 별개로, 자기만의 만족 기준,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진 사람이 탁월성을 만들어낸다.
탁월성은 또한 자신이 해온 일,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반추하며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같은 일을 해도 그 일의 경험을 통해 써내려갈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얼핏 보아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일관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 기준에 맞춰 자기 일의 경험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만들어내는 탁월성은 전문성으로 치환되지 않더라도 굳건한 디딤돌이 되어준다. 탁월성의 세계는 교복 입은 학생의 세계와 다르다. 탁월한 사람이 언제나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은 아니다. 한 조직 내에서 가장 먼저 승진하고 가장 좋은 고과를 받는 사람이 언제나 가장 탁월한 사람이란 법은 없다는 의미다. 스스로 탁월성을 향해 움직이는 사람은 자기 목표를 향해 자기 기준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일하는 사람은 외부의 훈장이 주어지기 '전에' 스스로 자기 일의 보상을 누린다.
전문성이라는 디딤돌이 정적인 것, 자격증이나 회사 타이틀, 직책의 이름을 획득하기 위해 한참 머물러야 얻어지는 것이라면, 탁월성은 끊임없이 이것과 저것을 조합하고, 그 모든 경험을 관통하면서 만들어내는 자신만의 역량이자 고유한 스토리일 것이다. 1~2년짜리 계약직만이 가능한 선택지일 때, 그게 아니더라도 이 직장에서 3년 이상은 일하기 어렵겠다는 전망이 들 때, 혹은 처음부터 프리랜서의 길로 뛰어들 때, 이런 경험을 통해서라도 디딤돌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프로 n잡러이자 1980년대생인 홍진아 님에게 물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하겠느냐고. 그의 대답은 이랬다.
"분절적인 경험밖에 할 수 없다면, 나는 여기서 뭘 얻어갈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해야겠죠. 그리고 일하는 과정에서 계속 개인적인 결산을 해나가는 거죠. 그러니까 조직의 목표와는 별개로, 개인적인 층위 안에서 목표 설정이 되어 있고, 그 목표에 따라 계속 점검해야 한다는 거예요. 일의 경험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지 못하면, 자기 언어가 없이 분절적 경험만을 가진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으니까요.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간판을 획득하고, 그 간판으로 자신의 경험들을 이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스스로 언어를 만들고 자신의 경험들을 해석할 수 있는 틀을 규정해 나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어요. 꼭 원대하게 해석을 하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크건 작건 스스로 만든 해석의 틀이 없으면 계속 분절된 자신으로 사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내가 여기에서 일하는 이유를 사장님이 정하게 하지 말라고, 자기 스스로 정한 방향으로 계속 생각하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요."
p.171-173
탁월성을 만드는 힘은 필요 이상을 쏟아 붓는 것
CBS 〈김현정의 뉴스쇼〉를 진행하는 김현정 PD는 "필요 이상을 쏟아 붓는 시기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2017년 여름 롤링다이스에서 기획했던 '여성의 일 새로고침' 연속 강연에서 한 청중이 "저는 미래 걱정까지 가기도 전에 당장 일을 잘 못해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김현정 PD는 처음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를 회고했다. 10분짜리 인터뷰를 위해 밤을 꼬박 새워가며 준비했다고 한다. 그런 시기를 지나고 보니 어느 순간 웬만한 주제는 한 번씩 파고든 적이 있는 것이더라고 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내공이 쌓였고, 이제는 밤을 새워 준비하지 않아도 비슷한 수준의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제가 (앞서) 100만 원 받는다고 100만 원어치만 일하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작은 일을 크게 해보세요. 어느 순간 내공이 쌓여서 큰일을 하는 데도 고생이 작은 날이 올 겁니다."(김현정 외, 《여성의 일, 새로고침》, 닐다, 2017, 153쪽.)
나에겐 '내 삶의 신조'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하는 그래프가 하나 있다. 실은 일을 하면서는 아니고, 스키를 타면서 갖게 된 믿음이다.
x축을 시간, y축을 실력이라고 하면, 좌표면상 직선의 기울기는 고됨의 정도다. 같은 시간 안에 빠르게 실력을 늘리려면, 더 고되기 마련이란 의미다. 그런데 이 직선 아래의 면적은 즐거움의 양과 같다. 좌측의 경로를 따르면, 초반에는 더 고되지만 같은 시간 동안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의 총량이 크다. 우측의 경로를 따르면, 고된 시기를 겪을 필요는 없지만 즐거움의 총량은 작다. 나는 이 그래프를 보여주면서 "이왕 배울 거면 빨리 배우는 게 낫지. 그래야 빨리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니까"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기왕이면 좌측의 그래프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초반에 쏟아 붓는, 어찌 보면 과잉의 노력이 결국 즐거움의 총량을 늘릴 것이라고 믿는다고 할까. 초반의 이 급속한 성장의 직선을 만들어내는 것은 외부의 기준이라기보다는 대개 자기 스스로의 동기부여다. 빨리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든, 능숙함을 통해 빨리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열망이든, 내 마음속 저 목표점에 빨리 닿고 싶다는 욕심이든.
이 이야기를 일의 현장으로 가져와 일을 고용주와 나 사이의 거래 관계로 생각하면, 과잉의 노력을 쏟아 붓는 시간을 셀프착취라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크건 작건 스스로 목표를 정하면, 고용주와 나 사이의 제로섬 게임 바깥에 내 일의 또 다른 층위가 생겨난다. 과잉의 노력을 쏟아 붓는 것은 고용주에게 필요 이상의 노동력을 갖다 바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내 삶에서 개인적 충만함을 위한 기울기를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가파른 기울기의 짜릿함을 맛본 사람은 다른 경험에 직면해서도 그런 기울기를 추구한다. 가파른 기울기는 즐거움의 총량을 늘린다. 즐거움은 탁월함의 다른 이름이다. 무엇이 즐거운지는 나만이 정할 수 있고, 탁월함 또한 그렇다.
p.198
일은 사람이 한다, 제각각의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런 제각각의 얼굴이 드러나도 좋은 곳에서 일하며 산다는 것, 그 얼굴이 지닌 맥락을 상상해보고 이해해볼 여유를 갖고 서비스를 사고판다는 것은 일의 본질을 바꾸기도 한다.
p.205-206
우리는 서로 달라도 이해할 수 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신과는 정말 잘 통한다고, 당신은 나와 정말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거꾸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나와 무척 비슷하다고 느낀다면, 내가 아직 그를 모른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는 사람에 대해서 "그는 나와 비슷해"라고 설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알면 알수록 나와 그가 얼마나 다른지 실감하게 되며, 시간은 그 다름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전제로서 받아들이게 해준다. 다르다고 생각할 때에만 '척하면 알아듣겠거니' 하며 얼버무리지 않고, '그의 마음도 나 같겠거니' 미루어 짐작하지 않는다. 파악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귀를 기울이고, 이해시키기 위해 찬찬히 설명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 달라도 이해할 수 있다. 관계의 밑바탕에 동질감이 있을 때보다 가치 판단 없는 지적 이해가 있을 때, 나는 훨씬 더 안정감을 느낀다. 동질감은 대체로 착각이거나, 진실이라 해도 쉬이 흩어질 수 있는 것인 반면, 지적인 이해는 시간과 함께 축적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 당신이 나와 같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보일러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보이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처럼, 나는 시간을 들여 공부함으로써 당신을 이해한다. 그런 이해를 통해 나는 당신과의 관계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많은 착각이 있을 것이다. 착각만이 우리를 느슨하게나마 묶어주는 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 종류의 착각이 또 다른 종류의 착각으로 진화해갈 때 공동의 것이 지속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 진화 속에서 앎의 비율을 조금씩 높여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잠깐이나마 기꺼이 착각을 좀 해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좋은 착각들과 오해들과, 어긋난대도 해로울 것 없는 기대들. "너와 정말 잘 통하는 것 같다"라는 말을 할 때의 기분 좋음을 애써 떨쳐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 착각이 실망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그 착각 덕에 이해하려는 노력이 시작되기도 한다.
p.211
선순환의 경로를 만들자. 개인은 공공에 기여하고, 공공은 개인의 역량이 발휘될 수 있는 기반을 보장하는 순환. 우리는 그 흐름을 '개인'의 회복에서부터 틔워보자고 제안한다. 고전적이지만 낡지 않은 이 처방은 나와 당신을 곧장 행위자로 지목한다.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는 대신 자신의 욕망과 책임과 영향력을 이해할 때, 다시 말해 개인의 동선을 구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공의 장을 가늠하고 구성할 수 있다. 그에 필요한 자원을 모색할 수 있다. 목표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2015년 00그라운드 취지문 중)
p.213
가족이야말로 우리가 떠올리는 공동체의 원형일 것이다. 시장 거래가 멈추는 곳, 무조건적 보호가 존재하는 곳. 그러나 시장 거래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관계는 어떤 종류가 되었든 교환을 바탕으로 한다. 무조건적 보호의 대가는 무조건적 일체감이며, 무조건적으로 받은 만큼 무조건적으로 돌려주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더구나 무조건적 보호는 당위적 선언일 뿐, 더 이상 현실의 반영이 아니다. 이제 가족은 생산의 단위로 기능할 수 없게 되면서 절대적 안전망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 공유할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많은 가정에서 무조건적 보호는 껍데기만 남은 말이 되었고 무조건적 일체감만이 의무로 주어진다. 어느샌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가족 같은 공동체'는 버팀목이 아니라 억압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오늘날 실제로 기능하는 것은 시장사회, 그리고 시장사회 내 행위자로서의 개인뿐이다. 그 사이의 완충지대였던 전통적인 공동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는 누군가에게는 과거에 대한 향수로 이상화된 대상, 누군가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진 의무만 남은 억압의 기제다.
p.216
개인들은 삶의 여러 단계를 거치며 필연적으로 변화한다. 정해진 삶의 패턴이 무너지고, 한 곳에 정주할 부동산도, 평생을 책임져주는 직장도 가능하지 않은 세대에게 그 변화는 개별적으로 일어난다. 결국 제각각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는 세대에게 삶의 여러 단계를 관통하면서도 머무를 수 있는 공동체가 과연 존재할까?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는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공유를 전제한다. 그러나 우리 세대,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시간과 공간을 안정적으로 공유하는 관계망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만일 공동체가 이런 전제 아래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공동체'는 계속해서 불안정할 것이다. 그 불안정성이 꼭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다.
p.222-223
이소연 님 글의 일부다.
세상은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한 곳이며, 힘든 순간엔 결국 모두 혼자니까 믿을 건 너 자신밖에 없다는 말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결국 그 두려움이 사람을 길들이게 된다.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남의 말이 나의 문제에 대신 답하길 기다리게 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세상을 만인의 만인을 향한 아레나로 보느냐, 혹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커다란 학교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은 성장하거나, 성장하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실수하거나 넘어지거나 되돌아가는 것이 더 장기적인 계획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내가 넘어질 때 당신이 기다려주고, 당신이 넘어질 때 내가 기다려주겠다는, 장기적인 신뢰와 환대를 주고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세상을 학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나보다 5년 젊은 사람이 지금, 세상은 고독한 곳이며 완벽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있는 힘껏 그렇지 않다고 말해줄 것이다. 세상은 충분히 넓어서 선의와 호의에 의지해 걸어갈 수 있는 길도 무수히 많다고. 우리는 용기를 내고 그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여,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또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 호의를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물론 지금도 예전에 느꼈던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다. 하지만 환대와 가능성의 세계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실제로도 그곳에 이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걸 전부 허울 좋은 거짓말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데 가능성의 세계가 갑자기 발치에 떨어지진 않을 테니까. 사실 어쩌면 그런 세계는 그걸 믿는 순간에 이미 오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통해서 이미 그런 곳에 사는 것이다.
p.228
권위는 이렇게 행사하는 것이다. 자신이 행사하는 권위의 상징적 무게를 이해하고, 안일하게 둘러쳐 있던 테두리를 필요한 순간에 딱 한 걸음 넘어서 주는 것.
p.233
고독은 사적인 것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고독은 집단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시다. 그 속에 거주하는 방법을 말하자면, 규칙도 없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다만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지는 의무를 짓밟지도 면제해주지도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뿐이다. 우리는 상처가 켜켜이 쌓인 이곳, 너무나 자주 지옥의 모습을 보이는 물리적이고 일시적인 천국을 함께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다.(올리비아 랭, 김병화 옮김, 《외로운 도시》, 어크로스, 2017, 392쪽.)
p.249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도 그것이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말이 되려면, 자기기만 없이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곤 한다. (내 기준에서) 좋은 글을 쓰려면, 대단한 삶은 아니더라도 기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자기기만 없는 글쓰기의 비결은 어쩌면 내 삶 안에서 떠올릴 수 있는 얼굴들, 내 삶을 비교적 잘 아는 얼굴들을 향해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p.253-254
"창업자가 되고 사업체의 대표가 되는 데 충분한 준비 같은 건 없어요. 아무리 준비를 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치고, 어려운 일 투성이일 텐데요. 결국 그 모든 걸 무릅쓸 만큼 충분히 큰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가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넘어서야 할 어려움의 크기보다 '하고 싶은 마음'의 크기가 더 커야만, 그 괴로움을 뚫고 나갈 동력이 생기는 거니까요. 책임을 줄이고 느슨한 형태로 조직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 속도와 밀도가 떨어지는 건 당연해요. 가닿을 수 있는 크기도 당연히 다르겠죠. 적당히 손익분기를 맞추면서 작지만 꾸준히 꾸리는 수준도 괜찮다면, 그렇게 파트너십의 형태로 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죠. 그렇지만 최대한 멀리, 최대한 빨리, 최대한 크게 가고 싶다면, 책임과 리스크를 피하고도 그럴 방법은 없어요. 둘 다 가질 순 없어요. 그걸 외면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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