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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아무튼, 메모(정혜윤)

아름다운 존재 2023. 2. 20. 07:08

그때 나는 처음으로 '메모의 화신'이 되었다. 나 자신을 위한 메모를 했다. 문구점에 가서 가장 두꺼운 노트를 몇 권 샀다. 거기에 책을 읽고 좋은 문장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에게 도움이 될 생각들을 꿀벌이 꿀을 모으듯 모았다.

 

*나의 내일은 오늘 내가 무엇을 읽고 기억하려고 했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밤에 한 메모,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나의 메모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소로우의 일기>: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야 올바른 생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로우의 일기>: 나의 일기장이 사랑의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나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세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적고 싶다.

 

나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싶었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붙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

 

<우주 만화>에서 이탈로 칼비노가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변화라는 최초의 진정한 변화가 있어야 다른 변화가 뒤따르기 시작한다. 세상 무엇도 인간이 변하기 전에는 변하지 않고,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매일매일의 '단련'의 결과다.

 

"꽃이 폈다. 바깥에 좋은 것 많다. 나가 놀아라. 네 생각 바깥으로 나가 놀아라."

 

나는 이 사회와 닮지 않은 사람이 좋고 그런 사람을 만나고 알게 되는 것이 가장 재미있다.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 있을 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법하지도 않은 일을 해내려는 것, 그것만큼 내 빈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도 없다. 그것만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힘과 생각을 키우는 최초의 공간, 작은 세계, 메모장을 가지길 바라 마지않는다.

 

모름지기 영혼은 향이 나야 한다. 모름지기 사람의 눈은 빛이 나야 한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좋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내 속에 들어오는 이야기들에 빠지는 것이 더 좋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 포착한 문장이 나를 보게 만드는 것이 좋다.

 

되고 싶은 사람

나부터 나를 깔보지 않는 사람.

세상이 비합리적인 것을 알아도 이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새로운 것의 좋은 면을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사람.

 

굳이 꼭 사람을 비교하려면

각자가 가진 이상으로 비교하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자.

지난해의 나와 올해의 나를 비교하자.

 

메모도 책 읽기나 글쓰기처럼 자발적으로 선택한 진지한 즐거움, 놀이의 영토에 속한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을까를 스스로 결정하는데 왜 즐겁지 않겠는가?

 

메모는 자기 생각을 가진 채 좋은 것에 계속 영향을 받으려는 삶을 향한 적극적인 노력이다.

 

꿈꾼다는 것은 더 확장해보고 싶은, 더 키워보고 싶은 자신만의 단어를 갖는 일이다.

 

자연은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좀 더 자연에 가깝게 바꿔줄 줄 안다고 했던가? 나는 자연이 바꿔놓은 사람ㅡ자연의 작품이 되고 싶었다. 더 있는 그대로 감탄하고, 더 소박하게 원하고, 더 섬세하게 염려하고, 더 감사하면서 기쁨을 누리고, 평범하고 흔한 것을 경이롭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으로.

 

달력을 만든 인간의 마음을 잠시 생각해본다. 우리는 질서와 연속성을 사랑하고 다른 식으로는 살 수 없다. 자기만의 작은 질서, 작은 실천, 작은 의식(ritual)을 갖는 것이 행복이다. 메모는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방식, 자신만의 질서를 잡아가는 방식이다. 메모는 미래를 미리 살아가는 방식, 자신만의 천국을 알아가는 방식일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결국 평생에 걸친 몇 개의 사랑으로 요약될 것이다. 어떤 곳이 밝고 찬란하다면 그 안에 빛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해 한 해 빛을 따라 더 멀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