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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내향인입니다(진민영)

아름다운 존재 2023. 10. 20. 13:25

나는 떠들썩한 술자리도 즐기지 않고 클럽이나 놀이공원도 잘 가지 않는다. 때때로 사람들은 내게 무슨 재미로 사냐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매일같이 떠들썩한 파티를 하고 놀이 공원과 축제를 분기별로 참가해야만 즐겁고 다채로운 인생을 보내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하고 많은 놀이 문화와 즐길 거리가 있다. 또 그것을 향유하는 방식 또한 천차만별이다.

 

나의 주변 사람들은 늘 내게 '에너지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에너지를 주는 편이다. 모든 내향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에너지를 주는 편에 속한다. 좋아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내가 인간 관계를 맺을 때 힘에 부치는 이유다. 원하든 원치 않든 상대가 누가 됐든 에너지를 뺏긴다.

그래서 나는 감정에 더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힘들면 지속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서 쉬어 간다. 그래야 더 나아갈 힘이 생긴다. 억지 웃음을 짓거나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으며 얼마 없는 에너지를 굳이 허비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민감성과 예민함을 더는 감추거나 둔감해지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예민할 때는 예민한 모습 그대로 행동한다. 지독하게 민감한 나의 성향을 오히려 키우고 태워서 연료로 사용한다. 둔감한 사람들의 삶이 편해 보인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나 더 이상 그들이 부럽거나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둔감한 만큼 감동도 감상도 깊이가 다르다.

내가 가진 민감성은 나에게 충만감을 맛보게 하고, 사소함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게 한다.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내향인이든 외향인이든 사회에서 말하는 호불호에 휘둘리지 말고 나 자신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며 응원해주어야 한다. 결국 내재된 본성이란 쉽게 변하지 않아 스스로 아무리 부정하고 외면하고 감추려 해도 본인이 가진 타고난 내향성과 외향성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내가 가진 최고의 성격과 품성이 드러난다. 잠재력도 결국 스스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따뜻한 손길로 보듬어줄 때 그 힘이 발휘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향적인 당신은 쉽게 지치는 스스로를 너그럽게 이해하자. 자신을 몰아세우면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도, 밝은 체하지도, 고통 받으며 자리를 지키려 하지 말자. 애써 기운찬 표정을 짓지도 말자.

 

집은 내게 변함없는 최상의 공간이다. 그 어느 곳에 가도 집에 견줄 수 있는 편안함이 없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즐거운 것은 사실이다.

집에 있다고 무언가를 특별히 하지 않는다. 글을 쓰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쌀을 안치며 옷도 차곡차곡 개켜서 정리한다. 음악을 듣고 요가를 하고 춤도 춘다. 가계부를 쓰고 다림질을 하고 구두 손질도 한다. 그림을 그리고 책도 읽고 밥도 먹는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특별한 건 없지만 많은 일을 끊임없이 한다. 해도 해도 해야 할 일이 계속 생기는 곳이 집이다.

집에 있으면 이렇게 나 자신과 내가 사는 공간을 가꿀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내게 아주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집에 있다 보면 할 일이 끝도 없이 나를 기다린다. 집에 오래 있는 이유는 나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바빠서다.

 

왜 참았을까?

나의 타고난 기질을 왜 억눌렀을까?

혼자의 고요함을 즐기는 내 성향을 왜 오답이라고 판단했을까?

오랫동안 부정해온 내 성격은 긴 시간이 부질없게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내향적인 나의 성격은 점점 더 골이 깊어졌다. 그래서 관뒀다. 더 이상 버티며 참고 익숙해지려고 나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내 몸과 마음이 우선이다.

 

이제 무언가를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는다. 괴로움을 일부러 만들어내면서 연습을 한들 본성이 달라지지 않는다.

자꾸 부딪혀보면 나아진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아져서 특별히 좋아지고 싶지 않다. 사람 많은 곳이 익숙해진다고 그 능력이 특별히 나를 더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대면은 내향 외향 관계없이 일상 속 중요한 일과로 인식되어야 한다. 산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자급자족하며 살지 않는 이상,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신세 지고 은혜 입고 도움 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싫든 좋든 개개인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결국 내향인의 모습 그대로 '함께'를 잘 풀어갈 최상의 방법을 연마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다.

 

애석하게도 외로움은 오직 더 강력한 고독과 결핍된 시공간에서만 완화된다. 외로움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친해져야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혼자의 시간은 삶에 대한 수많은 난제에 해답을 던져준다. 타인과의 교류를 이미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을 더 잘 알도록 해주지만,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해주지는 못한다. 혼자의 시간은 깊숙한 곳 어딘가 웅크리고 있는 자신의 한 부분이 조용히 걸어나오는 순간이다.

 

나는 우울감이 지배적인 성격이다. 애써 행복을 가장하지도, 긍정을 스스로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웃을 일이 없으면 웃지 않고 웃음을 구걸하며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일상의 대부분은 우울한 채 흘려보낸다. 나는 나의 우울을 사랑한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도 아니다. 부정적인 편에 속해 모든 상황의 악수를 늘 고려한다. 표정도 무표정이다. 사람들은 웃지 않으면 내가 화난 줄 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무표정을 유지한다.

나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에 좋고 나쁨을 단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치관의 차이일 뿐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나름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평생을 미적지근한 감정의 온도를 지닌 채 살았다. 명랑하고 밝은 또래들과 달리 나의 기분은 항상 영상 12도 안팎이다. 온도는 완만하게 떨어질 뿐, 급격하게 상승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삶을 비관하지 않는다. 우울할지언정 불행하지는 않는다. 미지근하고 적당히 기력 없는 나의 내면은 날 선 나의 외적 예민함을 중화시켜주는 훌륭한 자가 면역 체계이기도 하다.

나는 내 감정 앞에서 그저 언제나 솔직할 뿐이다. 미지근하면 미지근한 대로 침울할 때는 온 몸으로 침울해 한다. 그래서 늘 에너지가 넘친다. 나는 내 자신의 기분을 날 것 그대로 인정하고 그 기분을 표현하며 존중한다. 절대 상대방에게 나의 기분을 강요하거나 역으로 강요당하는 일은 없다.

 

좋은 기분, 안 좋은 기분 모두 존중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형태에 상관없이 그 기분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함, 분노, 섭섭함, 부끄러움, 창피함, 질투는 나쁜 기분이 아니다. 수많은 기분 중 하나일 뿐이다. 우울할 때는 우울하게 있는다. 더 우울한 책과 눈물이 뚝뚝 흐르는 영화를 보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 같은 습도 높은 음악을 듣는다. 나의 무드를 우울의 최정상에 올려놓는다.

 

우울함을 쫓아내지 않고 옆에 앉혀놓는다. 받아들이고 마주하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더 귀를 기울인다. 우울할 때는 우울해도 괜찮다. 우울의 심해 속으로 빠져들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함이란 생각보다 싱겁디 싱거운 녀석이란 걸 알게 된다.

 

외로움이란 느끼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나름인 감정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외로움은 누가 느끼느냐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부피와 농도도 제각각이다. 나의 태도만 살짝 바꾼다면 얼마든지 때에 따라 즐길 수도 있다.

나는 외로움이 싫지 않다. 남들은 외로움을 경계하고 두려워하지만 외로움은 그냥 곁에 두면 되는 거다.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배고프다, 춥다처럼 또 하나의 상태일 뿐이다. 싸우고 이겨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언제나 옆에 있게 마련인 그런 존재다.

 

외로움은 '혼자'라는 상황이 만드는 감정이 아니다. 내향적인 사람이라 외로움을 덜 느끼고 사교적이라서 더 느끼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인간은 외롭고 고독하고 공허한 존재다. 사랑받아도 사랑해도 혼자여도 어울려도 언제 어디서 '외롭다'고 느낄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외로움이 별안간 밀려오면 나는 가만히 조용히 곱씹어본다. 매번 그 향도 맛도 다르다.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맵기도 하고, 뜨거울 때도 있다. 달콤쌉싸름한 이 외로움의 존재가 가끔은 아이러니하게도 외로워하는 나 자신을 위로한다.

외로움을 더는 떨쳐내려 하지도, 잊으려 애쓰지도 않는다. 거부하고 부정하고 경계해도 더 강하게 나를 짓눌렀던 감정을 담담하게 그 자리에서 맞이해보니 별 것 아닌 여린 존재였다. 우울이 그랬고 부정적인 감정이 그랬듯 덩치만 컸지 속은 가볍디 가볍고 연약했다.

모든 감정이 다 그렇듯, 외로움도 시간이 흐르면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찰나에 머물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게 외로움이다.

 

매일같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온전히 홀로 떠올ㄹ도 될 생각마저 사람을 통해 푸념하게 만든다. 주위에 사람이 많고 매일같이 누군가를 만나 대화하고 교류한다는 사실은 떠벌리고 다닐 만한 사건도, 기세등등해질 자랑 거리도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외향적 기질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학습하려고 발버둥치지도 않는다. 부정하고 꾸짖었던 과거와 달리 내향적이고 혼자를 좋아하고 긍정적이지 않고 예민하며 까칠한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하자 사는 게 너무너무 편해졌다.

이 세계에서 내향인으로서 더욱더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다.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 타인의 방식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것만큼 자신의 재능을 망치는 건 없다. 사회적으로는 폭력이고 개인적으로는 재능 낭비다.

 

지독하게 혼자가 되고 사람과 세상과 거리를 두면 둘수록 사람이 점점 더 좋아졌고 세상이 점점 더 아름다워졌다.

 

나는 나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랑하는 나 자신을 위해 더 건강한 마음, 건강한 신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집에서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책이 있으면 언제나 충만하다. 해마저 저버린 어둡고 쓸쓸한 오후도 책이 있으면 오후 2시의 맑은 기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불빛마저 희미해진 적막한 시간에도 오래된 수필 한 권, 너덜너덜한 공책과 연필 한 자루면 읽는 나와 쓰는 나로 시간은 완전해진다.

퀴퀴하고 타분한 종이 냄새와 책 넘기는 소리,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는 쓸쓸한 시간과 공간을 온기로 채우는 최고의 땔감이다.

 

진짜 부러워해야 할 사람은 친구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삶의 고저 속에서 한결같이 곁에 있어줄 단 한명의 친구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한다.

 

입맛은 길들여지면 익숙해지므로 어디서든 잘 먹는다. 잠자리도 고집스럽게 굴지 않는다. 그러면 전 세계 어디든 나의 집이 된다.

 

어떤 삶이 부유한 삶인지는 오직 스스로 평가하는 하루 끝 나의 감상에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바다가 좋으면 바다에 살면 되고 산이 좋으면 산 곁에 살면 된다. 책과 글이 좋으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택하면 된다. 좋아하는 일을 쫓는데는 억만금의 돈이 들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건, 무엇을 좋아하건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혼자도 아니고, 틀리지도 않았다. 다르다는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숨기고 부끄러워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영화 '족구왕'의 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