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거리는 언제나 있죠, 쓰지 못하거나 쓰지 않고 있을 뿐. 에세이의 글감이란 다름 아닌 일상 그 자체니까요. 일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감이 있는 셈입니다.
읽는 데 그치지 말고 매주 조금이라도 써주세요. 완성하지 않아도 돼요. 열 문장이어도 충분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완주가 아니라 '시작'에 있으니까요. 부담이 되어 아무것도 못 쓰는 것보다는 아무 말이라도 한 줄 써놓는 게 훗날 반드시 도움이 됩니다. 글을 직접 써봐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글감 안내서만 읽고 그치는 것은 러닝을 하고 싶은데 유튜브로 러닝 영상을 보고, 목공을 배우고 싶은데 유튜브로 목공 영상만 보는 것과 같아요. 그런 사람을 우리가 쓰는 사람, 뛰는 사람, 만드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론은 숙지할 수 있어도 몸으로 익힌 감각 없이는 늘 '시작 전'의 단계일 수밖에 없어요. 지면에 발이 닿는 기분을, 나무의 질감을 직접 느껴보세요. 휴대폰 메모장에 단 몇 줄이라도 써보는 겁니다. 그 외의 나머지는 다, 쓰고 난 후의 일이에요. 써야 문체가 생기고, 써야 퇴고를 하고, 써야 제목을 짓고, 써야 투고를 합니다. 일단은 쓰는 게 먼저입니다.
이 삶은 당신에게만 일어나는 유일무이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가장 잘 옮겨 적을 수 있는 사람도 당신이에요. 수많은 등장인물과 섬세한 디테일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기록이나 글쓰기와 관련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은 '하찮게 시작하기'입니다. 다른 사람의 에세이를 읽으며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왜 글로 쓰지 못 했지?' 하는 생각을 한 적 없으신가요? 그럴 때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연습은, 하루에 한 장면을 붙잡아 짧은 글을 써보는 겁니다.
"나를 대표할 만한 나의 애호에는 무엇이 있을까?"
글을 쓰려는 사람이라면 아이처럼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맘속에 품은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되는 거죠. 그동안 '굳이' 물음표를 달지 않았던 모든 것을 향해 '왜?'라고 물어보세요. "왜 그렇지?" "왜 그래야 하지?" "왜 이렇게 부르지?" "왜 다들 그렇게만 생각하지?"
사는 일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을 적립하는 일이 아닐까?
익숙해진 모든 것을 향해 '왜?'라고 한번 물어보는 거예요. 지금껏 무심히 지나쳐온 말이나 행동에서 관점을 살짝만 틀어보면 바로 그것이 글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관용적인 표현을 쭉 모아 놓고 '아닌데, 아닌데?' 하는 청개구리의 심정으로 그 말을 바꿔보세요. 관점을 살짝만 틀어보는 연습, 굳은 내 생각을 말랑하게 하는 연습을 해보는 겁니다. 말장난 같지만 당연하게 생각한 현상을 달리 보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 후로는 어떤 단면만을 보고 좋겠다, 부럽다, 저 사람은 걱정도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어요. 카메라가 비추지 않은 나머지 장면들, 사각의 프레임 너머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안이나 고민이란 게 있겠지, 여깁니다. 우리 존재가 그렇게 불완전하고 연약하다는 걸, 그러므로 누구나 삶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분명한 것은 '내가 나로서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에세이는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에요. 나의 약점, 나의 취약함, 나의 결핍, 나를 오래 괴롭혀온 고민을 털어놓고 그것을 보완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 글쓴이도, 읽는 이도 힘을 얻습니다. 누구든 삶에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취약성을 드러내고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친밀하게 느끼게 되고요.
김혜자 선생님은 혹시나 상을 타면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드라마 <눈이 부시게> 내레이션을 읽고 싶어졌다면서, 까먹을까 봐 걱정되어 찢어온 대본을 꺼냈어요.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콤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틈틈이 감동하는 일, 그것이 우리의 숙제가 되기를.
"마침 그 시기에 번아웃 증상이 심해지는 바람에 받게 된 상담에서 선생님이 '쉴 때 너무 집에만 있으려 하지 말고, 한 달에 한두 번은 일부러라도 바깥에서 새로운 자극들을 받아보면 좋겠다'고 권유했어요. 축구를 보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것은 이미 일상에서 자주 해왔던 익숙한 자극들이니, 축구를 보는 대신 매번 프로그램이 달라지는 전시회에 가서 새로운 시각적 자극을 받거나 자전거 대신 춤 같은 걸 새로운 걸 배워 새로운 근육을 써보거나 산책을 하더라도 새로운 공간에 가서 해보라고요."
황선우, 김혼비 두 작가가 나눈 편지 모음으로 이루어진 책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의 일부입니다.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로 새로운 자극을 받아보라는 거죠. 나라는 존재를 하나의 방으로 여긴다면, 이런 새로운 활동은 오래 닫혀 있던 창을 열어 묵은 공기를 내보내고 맑은 공기를 들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 '환기'가 되는 셈이죠. 글감은 그런 새로운 자극 속에서 피어납니다.
쓸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 때 저는... 늘 책장 앞으로 갑니다. 그곳은 저의 가장 크고 너른 곳간이니까요. 곳간 문을 열고 책 한 권을 뽑아들면 언제라도 '오늘의 글감'을 찾아서 나올 수 있습니다.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 먼저 좋아하는 글들을 읽는 과정을 저는 '예열의 독서'라고 부릅니다. 요리하기 알맞은 온도로 오븐을 예열하듯이, 쓰는 일에도 마음의 예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좋아하는 작가들의 문장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다 보면 글 쓸 마음이 서서히 데워지고 어느 순간 '아, 나도 뭔가를 쓰고 싶다' 하며 책상에 앉고 싶어지는 순간이 와요.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주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말을 믿어주세요. 지금 책장에 꽂혀 있는 모든 책이 곧 미래의 글감이라는 사실. 동시에 그 글감으로 어떤 글을 쓸 수 있는지 '예시'를 보여주는 참고서이기도 하다는 걸요. 읽는 자리에서 쓰는 자리로 옮겨 앉으려는 사람이라면, 에세이 한 편을 읽을 때에도 되도록 이런 생각을 켜둔 상태여야 해요. '이 주제/소재로 나는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쓰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방금 읽은 남의 글이 나의 글감으로 변모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빌려 쓰는 글감'을 활용하는 거예요. 크게 보면 주제와 소재로 나뉩니다. 어떤 글의 주제(메시지)에 공감했을 때, 나는 같은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글을 어떻게 전개해보고 싶은지, 나에겐 비슷한 듯 다른 어떤 에피소드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거예요. '꾸준함도 재능이다'라고 말하는 글 한 편을 읽었다고 해봅시다. 같은 메시지를 나는 어떤 에피소드, 어떤 구성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평소 '재능'에 대해 가져온 생각, 꾸준함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은 에피소드, 재능과 관련해 인용하고픈 완전히 내 마음 같은 문장, 이런 것들이 떠오르겠죠. 시작이 어렵다면 처음엔 내가 읽은 글의 구조(직접 겪은 에피소드로 시작-생각 전개-인용문으로 마무리 등)를 빌려와 비슷하게 써보는 연습을 하는 것도 좋아요.
그냥 읽지 말고 내가 읽는 모든 것을 나의 재료로, 또 교재로 삼으세요.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게 좋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음껏 편애하세요. 편애야말로 깊은 애정이니까요. 어떻게 이렇게 썼지? 감탄하다가 조금 질투도 난다면 편애의 대상을 찾은 겁니다. 이 글에서 어떤 부분이 특별히 좋았는지 골라도 보고, 왜 좋았는지 이유도 찾아보고, 문장을 옮겨 써보기도 하세요. 그러는 사이 물이 들듯 내 마음에도 그런 글이 배게 될 거예요. 결국은 자신이 무척 좋아했던 스타일의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음식이 그렇고 옷이 그렇듯이요. 수많은 음식을 거쳐 결국은 내가 좋아하는 맛의 요리를 직접 만들어 먹게 되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내게 어울리고 또 입었을 때 기분 좋은 스타일에 정착하게 되는 것처럼요.
좋아하는 것을 닮아간다는 건 기분 좋은 성장 중에 하나입니다. 자, 이제 책꽂이에서 좋아하는 에세이집 한 권을 꺼내 펼쳐보세요. 지금껏 글감이라 불러왔지만 실은 '나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했던 숙제를 계속 이어가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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