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외부의 사건이나 조건이라도 사람마다 다른 영향을 끼치고, 모든 인간은 같은 환경 속에서도 각기 다른 세상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개인의 사상, 감정, 의지의 동요 정도만이 인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의 사정은 사상, 감정, 의지 등을 초래하는 선에서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각자의 견해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라서 사람은 세상을 불행하게 바라볼 수도, 진부하고 단조롭게 바라볼 수도, 또는 풍요롭고 재미있으며 유의미하게 인식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겪은 흥미로운 사건을 질투한다. 하지만 이 경우 오히려 자신이 경험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재미있게 묘사할 줄 아는 타인의 이해력을 탐내야 한다. 재치 있는 사람은 똑같은 사건이라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지만, 평범한 두뇌를 소유한 자는 고리타분한 일상의 한 단면으로만 생각한다.
우매한 독자는 시인이 겪은 매력적인 순간이 부러울 뿐, 완전히 평범한 사건을 위대하고 아름다운 순간으로 그려낸 시인의 대단한 상상력은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침울한 자는 어떤 사건을 두고 슬픈 장면으로 기억하고 쾌활한 자는 흥미로운 논쟁거리로 생각하며, 무기력한 자는 그저 무의미하게 스쳐 지나가 버린다.
깊은 만족감은 정신력이 좌우한다.
인간의 지상 최대 행복은 오로지 인격에 달린 것
내면이 풍요로운 자는 바라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총명한 사람은 온전히 홀로 있을 때조차 자신만의 생각과 상상만으로 큰 즐거움을 얻는다. 반면에 아둔한 자는 아무리 사교 활동, 연극, 유흥거리를 즐겨도 고통스러운 권태로움을 피할 도리가 없다. 선하고 절제하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는 환경이 곤궁해도 만족을 찾는다. 하지만 탐욕스럽고 남을 시기하는 약한 사람은 아무리 부자여도 만족을 모른다. 하지만 비범하고 뛰어난 정신을 지닌 인격을 추구하는 자는 대다수 사람이 좇는 향락을 번거롭고 성가시다고 생각한다.
고상한 성격과 뛰어난 지능, 낙천적 기질과 쾌활한 마음, 강인하고 튼튼한 몸, 즉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사실은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적 재산이나 외부의 명예를 얻기보다 위에 언급한 자산들을 얻고 불리는 데 힘써야 한다.
모든 생활 과정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소소한 활동만이 아니라 전신에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은 움직임에 있다.’라는 옳은 말을 했다. 삶은 움직임에서 만들어지며 삶의 본질은 움직임에 있다.
대체로 행복의 90퍼센트는 건강에 달려 있다. 건강은 모든 향락의 원천이다. 반면에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외부의 자산도 누리지 못한다. 정신적 특성, 심성, 기질에 있는 주관적 자산도 병약함 탓에 침체하여 쇠약해진다.
온갖 사회 활동, 오락, 유흥, 사치를 갈망하는 일은 시간 낭비이지 비참해지는 길이다. 이런 비참함을 막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내면의 풍요, 즉 정신의 풍요다. 정신이 풍요로워지면 지루함이 설 자리가 없다. 정신이 풍요로운 자는 무한히 활발한 사고 활동,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현상으로 새로워지는 지적 유희와 힘, 그 힘을 항상 다른 것과 조합하려는 의욕들에 차 있다.
재치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고통과 근심이 없고 안정과 여유를 찾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러다 결국 고요하고 겸손하면서도 논란을 일으키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이런 사람은 타인과 어느 정도 친교를 맺은 뒤 위대한 정신을 위해 은둔하고 나아가 고독해지는 길을 택한다. 정신적으로 가진 것이 많을수록 외부에서 필요한 게 적고, 그렇게 생긴 시간적 여유 속에서 온전히 자신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정신이 탁월한 자는 그리 사교적이지 않다.
재능이 넘치는 자는 아주 삭막한 환경에서도 자기 생각을 꽃피우고 그 생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올리버 골드스미스(아일랜드 출생의 영국 시인, 소설가 겸 극작가_역주)는 이렇게 썼다.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행복을 스스로 만들고 찾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자신에게 줘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이 많을수록, 향락의 원천을 자신 안에서 찾을수록 행복해진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자급자족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를 독일어로 ‘행복은 스스로 만족하는 이의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외적인 것을 취하기 위해 내적인 것을 상실하는 일, 즉 화려함, 지위, 사치, 직책, 명예를 위해 자신의 평안, 여유, 독립심을 완전히 또는 상당 부분 포기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자유로이 발휘해야 행복해진다고 가르친다. 스토바에우스 역시 이 가르침을 이어받아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윤리학>에서 언급했다. ‘행복은 자신의 재능에 비례하여 성공할 수 있는 행동에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높은 지성을 갖춘 사람은 지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훌륭한 것을 소유하며 정신적 향락의 원천을 가진다.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귀중하지 않다. 그러니 외부의 어떤 방해도 없이 자신의 소유를 즐기고 자기 다이아몬드를 연마할 수 있는 여가만이 필요하다.
저급한 인간은 어떤 느낌이라도 받아들일 자세를 취한다. 아무리 작은 소리나 사소한 상황이라도 마치 동물적 감각으로 관심을 가진다.
정신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의지의 개입 없이 단순히 인식만으로 가장 활달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심지어 그에게는 이런 관심이 필요하다. 이때 인간은 이런 관심을 본질에서 고통과 상관없는 생소한 영역, 말하자면 유유자적 살아가는 신들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이에 따라 남아 있는 자들의 삶은 무감하게 흘러가 버리는데, 그들의 생각과 열망은 오로지 일신의 안위라는 하찮은 이익에 몰두하는 바람에 온갖 불행에 빠지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람은 자신의 사생활 이외에 제2의 지적인 생활이 있다. 이런 지적인 생활이 점차 본래의 목표가 되어 사생활을 지적 생활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여긴다. 반면에 특별할 게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재미없고 공허하고 우울한 본성을 토대로 삶의 목표를 확신해 버린다.
지적인 생활은 특히나 통찰과 인식이 풍부해지면서 일관성을 갖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온전히 완벽한 예술품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실제적인 삶,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하고, 깊어가기는커녕 자기의 구태의연한 생활을 연장하는 데 안주하는 삶과는 대조적이다.
몰두하고 고독을 기꺼워하며 자유로운 여가를 최고의 자산으로 여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불필요하고, 있으면 부담만 될 뿐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완전히 자기 내부에 무게 중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의 방식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그 재능에 따라 사는 삶이 가장 훌륭한 존재가 되는 길
자연스럽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욕구는 사치, 호화, 화려하고 빛나는 것들이다. 이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고 충족시키기도 매우 어렵다.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대상은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이 돈이 있을 때 자신을 압박하는 지루함을 잠시 벗어나기 위해 돈을 써버리는 바람에 빈곤에 시달린다.
숙고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외부의 아첨하는 말이나 상처를 줄 만한 생각에는 되도록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편이 좋다.
이런 것에 거리를 두지 않으면 타인의 의견과 생각의 노예가 된다.
다른 사람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신과 무관하며 실제로도 점점 무관심해질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하찮은지, 개념이 편협하지, 신조가 옹졸하지, 견해가 잘못되었는지 자신이 깨닫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각자의 현실과 개인의 상태에 따라 자신만의 세상에서 산다는 통찰을 얻으면 행복해진다.
인간이 공통으로 가진 어리석음에서 헤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어리석음 자체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 대부분이 얼마나 잘못됐고, 이치에 어긋나고, 망상에 사로잡혔으며 터무니없는지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없다. 더군다나 대부분 상황에서 타인의 견해는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적고, 심지어 비호의적이기까지 하다. 꼬인 마음으로 내뱉는 언사와 어조에 귀 기울인다면 병들고 짜증이 날 것이다. 게다가 명예 자체도 실제로는 간접적인 가치만 있을 뿐 직접적인 가치는 없다.
이런 인식 과정을 거치면 인간이 공통으로 가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평정심과 쾌활함이 증대되어 더 확고하고 확신에 찬 태도를 보이고, 행동은 솔직하고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은둔하는 생활 방식이 마음의 평화에 아주 유익한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누군가의 시선 속에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휘둘릴 필요가 없어져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순수하게 이상적인 노력을 통해, 더 정확하게는 절망적인 어리석음이 끌어들이는 수많은 실제적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견고한 자산을 쌓는 데 더 관심을 쏟아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가치 있는 일은 실행하기 힘들다.
지위는 관습적이고 본래 허무한 가치다. 지위의 효과는 가장된 존경이며 대중에게 선보이는 희극이나 다름없다.
어떤 날은 누군가 소크라테스에게 “저 사람이 당신을 모욕하고 비난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답했다. “아니다, 저자의 말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비난을 받아도 거리낄 게 없다.
명예가 훼손당해도 진정한 자존감이 있다면 실제로 무관심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부족하여 무관심해지기 힘들다면 총명함과 교양으로 분노를 숨길 수 있다.
결국 허수아비를 퇴치하는 일은 개념을 수정하는 철학자의 몫이다.
고대의 전설적 인물 에피카르모스(그리스의 희곡 작가, 시칠리아풍의 희극을 씀_역주)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내가 마음대로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자기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망상에 빠져 있다.
자기가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개는 개에게 가장 아름다운 존재다.
소는 소에게, 당나귀는 당나귀에게, 돼지는 돼지에게 그렇듯이.
충분히 명성을 얻을 만한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작품 자체에 대한 애정과 그로써 생기는 자기만의 기쁨이 아니라 명성을 통한 격려가 필요했더라면 인류가 접하는 불멸의 작품은 극소수 또는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훌륭하고 올바른 것을 창조하고 악한 것을 피하는 사람은 대중과 그 대중을 대변하는 자의 판단에 맞서고 그들을 무시해야만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일은 스스로 절대적인 가치를 잃지 않아야만 가능하다. 위대한 마음과 위대한 두뇌의 가치와 행복은 절대적인 가치를 잃지 않는 한 자기 내면에 확실히 존재한다. 즉, 명성 자체가 아닌, 명성을 얻게 해주는 것이 진짜 소중하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마음을 다해 자기 자신에게 감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공로가 생기는 원천이 된 도덕적이고 지적인 성향과 능력에 행복이 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자신을 위해 반드시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어떻게 비칠지,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고 부차적인 흥미만 돋울 뿐이다. 따라서 명성을 실제로 얻지는 못했더라도 명성을 얻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미 가장 중요한 것을 갖고 있다.
이런 사람은 명성이 없어도 가장 중요한 것을 가졌다는 사실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판단력이 없고 현혹되기 쉬운 대중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훌륭한 사람이라서 부러워할 만한 대상이 된다. 훌륭한 사람은 후손이 자신에 대해 안다는 사실이 아닌 수 세기 동안 보존하고 숙고할 가치가 있는 생각이 본인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에 커다란 행복을 느낀다. 이런 행복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행복은 우리 손에 있고,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은 우리 손에 없다.
위대한 마음과 정신의 풍요
유능한 지성과 올바른 판단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최고 수준의 선천적 재능을 지녔다고 확신하지 못하면 수많은 연구와 지루한 작업을 꺼려선 안 된다.
모든 향락과 행복이 부정적인 성질을 가졌지만, 고통은 긍정적인 성질을 갖는다.
인생은 실제로 즐기기보다는 극복하기 위해 존재한다.
너무 불행해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에게 아주 행복해지라고 요구하지 않는 일
세상의 소유물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마라, 아무것도 아니니.
세상 전부를 다 가졌다 해도
기뻐하지 마라, 아무것도 아니니.
고통도 희열도 이 세상에 그저 지나가니
세상을 지나쳐라, 아무것도 아니니.
안와리, <소헤이리>
위선은 젊은 시절에 그 정체가 일찍이 탄로 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대부분의 화려함은 연극 무대의 장식 같은 겉모습에 불과하고 그 안에는 사물의 본질이 빠져 있다.
예를 들어 깃발과 화환이 달린 배, 축포, 조명, 북과 나팔, 환호와 외침 등은 모두 기쁨을 나타내는 간판, 암시, 상징과 같은 상형문자다. 하지만 기쁨 자체는 그곳에 없다. 오직 기쁨만이 축제 참석을 거절했다. 기쁨이 실제로 나타날 때는 초대도 없이 자기 스스로 거침없이 찾아온다. 종종 가장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일상 속에서 전혀 빛나지도 않고 영광스러운 자리도 아닌 곳에 슬그머니 나타나곤 한다.
사교 모임, 클럽, 살롱과 같이 상류 사회라고 불리는 실체는 알고 보면 빈약한 극본, 기계 장치, 의상이나 장신구로 꾸민 그럴싸한 저질 오페라일 뿐이다.
큰 불행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모든 종류의 수단에 균형을 맞춰 요구치를 낮게 설정하는 것이다.
왜 영원하지도 않은 것에 정신을 피로하게 만드는가?
노력과 희망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항상 앞을 내다보고, 다가오는 일을 보며 조급해져서 먼저 달려가 미래의 행복을 맛보려 한다. 그러면서 현재를 무시하고 즐기는 일 없이 지나쳐버린다. 이들은 나이에 비해 조숙한 용모를 가졌지만 사실은 이탈리아 당나귀와 같다. 당나귀는 머리에 묶인 막대기에 달린 건초 다발에 정신이 팔려 눈앞만 바라보고 건초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속도를 높여 달린다. 이런 당나귀 같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눈앞에 닥친 일에만 매달려 임시적 삶으로 자신을 속인다. 미래에 대한 계획과 걱정에 전적으로 몰두하거나 과거를 그리워하지 말고 현재만이 유일하게 실재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미래는 늘 인간의 생각과 다르게 나타나고 과거 역시 생각에 따라 달라지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 모두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이 보기와 달리 그리 별것 아님을 알 수 있다. 멀리 있는 물체를 맨눈으로 볼 땐 작아 보이지만 마음속에서는 커진다. 현재만이 참되고 실재적이다. 현재는 실제 시간으로 채워지며 현재 안에서만 인간이란 존재가 머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현실을 항상 쾌활하게 받아들여 존중해야 한다. 그러니 직접적인 불쾌감이나 고통 없이 견딜 만한 자유로운 시간에는 매 순간을 의식적으로 즐겨야 한다. 이 말은 곧 과거의 희망이 좌절되었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우울해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 과거에 대한 불만과 다가올 일에 대한 근심으로 현재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거나 고의로 망치는 일은 아주 어리석다. 걱정도 후회도 일정 시간만 하고 끝내야 한다.
그러므로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편이 좋다.
제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지난 일로 치부하자,
제아무리 괴로워도 언짢은 마음을 진정시키자.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라.
그것은 신의 뜻에 달렸다.
그리고 현재에 대해서는 ‘하루하루를 각각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라.’는 세네카의 말처럼 현재의 시간을 오롯이, 되도록 편안하게 보내도록 하자.
오늘은 한 번뿐이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청년이 주된 인생의 과제로 배워야 하는 부분은 외로움을 견디는 방법이다. 외로움이야말로 행복과 내면의 평정을 가져오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음식을 절제하면 육체의 건강이 회복되고 사교를 절제하면 영혼의 평안함이 회복된다.
외로움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
외로움을 사랑하는 마음은 직접적이거나 자연적인 충동으로 나타나지 않고 간접적으로, 특히 더 고귀한 정신을 지닌 사람에게서 점차 발전해 나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발전을 꾀하려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군집 본능을 극복해야 한다.
사교계에서 어느 정도 혼자가 되는 법을 배우고, 이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바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들에게 도덕적으로나 지적인 면에서 크게 기대하지 마라.
인간의 시기심은 그들이 얼마나 불행하게 느끼는지를 보여준다. 타인의 언행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지루한지를 나타낸다.
인간은 시기심이 유발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도 나쁜 결과가 나온다면 인간의 일이 우연과 오류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성만으로 우연과 오류를 극복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아침은 정신적인 일이든 육체적인 일이든 가리지 않고 예외 없이 어떤 일을 하기에 적당하다. 아침은 하루의 청춘과도 같은 때로, 모든 것이 쾌활하고, 신선하고 발랄하다. 어떤 일이라도 강인하게 해낼 능력을 준비해 둔 상태다. 늦잠을 자서 아침 시간을 줄이거나 무가치한 일이나 대화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아침을 삶의 정수로 여기며 신성시해야 한다.
모든 불쾌한 일은 되도록 가볍게 받아들이고 단조롭고 절제된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모든 이의 타고난 개성을 인정하고, 그 개성을 종류와 성질에 따라 이용하겠다는 생각만 하면 된다. 개성이 변하길 기대하거나 개성 그 자체를 전적으로 비난만 해선 안 된다.(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가장 현명하다. ‘나는 그를 변화시키지 않고, 이용할 것이다.’) 이것이 ‘서로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자.’라는 격언의 진정한 의미다.
누군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때 무생물이 본성에서 기인한 필연성 때문에 그런 것처럼 인간도 그런 필연성으로 행동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거추장스러운 인간의 행동에 분노하는 일은 인도에 굴러온 돌을 보고 화내는 일만큼이나 어리석다.
거대한 천체의 운행을 초라한 자아와 연관 짓고 지구의 혜성을 지상의 사건이나 자질구레한 일에 관련시키는 점성술은 가련한 인간의 주관성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아주 오래전에도 항상 벌어졌다.
인간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버릇없이 키우면 무례한 자가 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너무 쉽게 동조하거나 과한 호의를 베풀면 안 된다. 돈을 빌려달라는 청을 거절해서 친구를 잃는 일은 없지만, 돈을 빌려주면 친구를 아주 쉽게 잃고 만다.
마찬가지로 오만하고 다소 소홀하게 친구를 대한대도 쉽게 친구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지나치게 친절하고 예의를 차리는 바람에 상대가 너무 거만해져서 참을 수 없게 되어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 자주 있다. 특히 인간은 자신이 상대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가만히 있질 못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자만하고 거드름을 피우게 된다. 어떤 사람은 그저 다른 사람과 잘 사귀고 종종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자신이 상대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수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타인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한다고 여겨 예의의 한계를 넓히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에 적합한 사람은 거의 없으니 특히 자신을 저급한 본성에 맞춰 친구를 사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누군가를 내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상대는 그 즉시 내게 무언가를 도둑맞은 듯 느낄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복수로 무언가를 내게서 되찾으려고 할 것이다. 교제에서 우월함은 한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발생한다. 이에 따라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상대방 없이도 잘 지낸다는 인상을 주어야 바람직하다. 이럴 때 우정은 굳건해진다. 대부분은 때때로 업신여겨도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는다. 오히려 무시할수록 그들은 우정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에 맞는 이탈리아 속담이 있다.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존중받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에게 정말 소중하다면 그 사람 앞에서는 자기 생각이 범죄라도 되는 것처럼 감정을 숨겨야 한다. 달갑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한 마리 개조차 과도한 친절함 앞에서 무장해제 되는데 인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개념과 격언에 따른 지도가 필요하다.
추상적인 규칙과 격언이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이론 지침과 조언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먼저 규칙을 이해하고 그다음에 규칙을 실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규칙의 이해는 이성으로 단번에 얻을 수 있지만, 규칙의 실행은 연습을 통해서만 서서히 얻게 된다.
허세는 자기 실제 모습이 아닌 남에게 더 낫게 보이길 바라는 모습을 조작해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여 본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꼴이다. 어떤 개성을 지닌 듯 뻐기는 일은 자신이 그 개성을 지니지 않았음을 자인하는 거나 다름없다. 누군가 용기든 박식함이든 뛰어난 정신이든 재치든 여복이든 부유함이든 고귀한 지위든 그밖에 어떤 것이든 과시하는 행동을 보이면 바로 거기에 그 사람의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정말로 어떤 개성을 온전히 지닌 사람이라면 그 개성을 드러내거나 과시하지 않고 묵묵히 만족한다.
관대한 사람은 이와 정반대로, 말하자면 이 정도 잘못은 용서받고 그 보답으로 타인을 용서하자고 생각한다.
재능과 지성을 보이는 일은 단지 간접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의 무능과 우둔함을 비난하는 행위다. 더욱이 세속적 본성은 자신과 반대인 것을 볼 때 반란을 일으키며 반란의 은밀한 원흉은 시기심이다.
총명한 사람이 무지한 자를 미워하는 것보다 무지한 자가 총명한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이 백배는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접하는 예의범절이 그저 미소 짓는 가면을 뒤집어쓴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가면이 조금 비뚤어지거나 갑자기 벗겨져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사실상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면 옷을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상태로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인간이 알몸뚱이가 되면 대체로 그러하듯 저속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자기 행동의 본보기로 삼아선 안 된다. 타인과 처지, 상황, 관계가 동등하지 않고 품성의 차이가 행동에 다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할 때도 그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충분한 고찰과 예리한 숙고를 거쳐 자기 성품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독창성이 없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하는 일과 인간의 원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마라. 인간이 믿는 모든 부조리함에 일일이 대응하다 보면 므두셀라(969세까지 살았다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_역주)의 나이가 되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화할 때 아무리 우호적인 말이라도 지적하는 발언을 삼가야 한다.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은 쉽지만, 누군가를 개선하기란 불가능하진 않아도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얼토당토않은 말을 우연히 듣고 불쾌해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대화를 두 바보가 연기하는 코미디 연극의 한 장면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 그것은 입증된 사실이다.
누군가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들면 일단 믿는 척해라. 그러면 상대는 대담해져 더 심한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 거짓을 폭로당한다. 반대로 상대가 숨기고 싶은 진실 일부가 그에게서 누설되었다면 그것을 불신하는 시늉을 해라. 그러면 상대는 나의 반박에 자극을 받아 모든 진실을 하나씩 털어놓을 것이다.
사적인 일은 비밀로 하고, 친한 지인이라 해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사실 이외에는 완전히 모르는 채로 남겨두어라.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라도 남에 관한 지식이 시간과 상황에 따라 인간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자신의 지성을 드러내기에 좋다. 침묵은 신중함의 문제이고 말은 허영심의 문제다. 이 두 가지 일에 주어지는 기회는 똑같은 빈도로 자주 온다. 하지만 인간은 종종 침묵이 주는 지속적 이익보다 말이 주는 일시적인 만족감을 선호할 때가 있다. 어쩌다 한번 혼잣말로 크게 외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활기찬 사람에게는 있을 법한 일이지만 습관이 되지 않도록 자제하는 편이 낫다. 버릇처럼 혼잣말하다 보면 사상과 말이 친숙해져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점차 생각이 말로 튀어나올 수 있다. 생각과 말 사이에 넓은 틈을 벌려두어야 현명하다.
인간은 보편적 진리에는 둔감하고 무관심하지만, 개인의 사사로운 일에 관해서는 집착하는 성향을 보인다.
원수가 알아선 안 될 일은 친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내가 나의 비밀을 지키면 그 비밀은 나의 포로가 된다. 내가 그 비밀을 누설하면 나는 그 비밀의 포로가 된다.
침묵의 나무에는 평화의 열매가 열린다.
남에게 속아서 쓴 돈보다 유익하게 사용한 돈은 없다. 인간은 그 일을 겪고서 직접적인 현명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적의를 품지 말아야 한다.
‘사랑도 원망도 하지 마라.’는 말을 이해하면 처세술의 절반은 아는 거나 다름없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믿지 마라.’는 말에는 나머지 절반의 처세술이 담겨 있다.
분노와 증오를 말이나 표정으로 나타내는 일은 쓸모없고, 위험하고, 어리석고, 가소롭다. 행동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분노나 증오를 드러내선 안 된다.
어조 없이 말하라.
누군가의 말을 그 얘기를 들은 다른 사람의 지성이 판단하도록 놔둔다.
예의 바른 표정과 친근한 어조로 말하면 실제로 정말 무례한 발언을 하더라도 직접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생애는 단순히 자기가 스스로 만든 결과물이 아니다.
인생은 주사위 놀이와 같다. 던진 결과가 가장 바라던 결과와 같지 않으면 우연히 떨어진 것을 능숙하게 수정해야 한다.
한 가지 개념은 모든 일에는 적합하지 않다.
시간의 영향과 사물의 가변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의 반대 상황을 상상해야 한다. 그래서 행복에는 불행을, 우정에는 불화를, 좋은 날씨에는 악천후를, 사랑에는 증오를, 신뢰하고 마음을 털어놓는 데는 배신과 회한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보고 그 반대로도 똑같이 해보면 좋다. 그러면 인간은 언제나 침착하고 쉽게 속지 않으므로 진정한 처세술의 원천을 영구히 가질 수 있다.
오직 변화만이 영원할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견고함에 속지 않고 다음 변화가 일어날 방향을 예견한다.
적절하게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일은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그러므로 시간에 이자를 빚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떤 일 앞에서도 크게 환호하거나 너무 비탄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가변성이 있으므로 언제든지 형세가 바뀔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불리한지 판단하는 데 속임수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가 크게 통곡했던 일이 나중에 가장 최선이었다거나 크게 기뻤던 일이 가장 큰 고통의 원천이 된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갑작스러운 기쁨과 슬픔을
너무 많이 느껴서
이제 어떤 일을 맞이한다 해도
어느 쪽에도 유약하게 끌려가지 않는다.
어떤 재난이 닥쳐도 대개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이 얼마나 대단하고 그 종류도 많은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지금 일어난 일을 앞으로 일어날 일의 아주 작은 부분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스토아학파의 신조다. 인간은 절대 자신의 조건을 잊어서는 안 되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불쌍하고 애처로운 신세인지, 얼마나 많은 재앙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인간은 자기 주변을 한 번만 돌아보면 된다. 인간이 어느 곳에 있든 머지않아 비참하고 암울하며 결실을 보지 못하는 생존을 둘러싸고 고군분투하며 안달하고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본 이후 인간은 자기 요구치를 낮춰 모든 사물의 불완전함 속에서 자신을 찾는 법을 배우고 재난을 피하거나 견디기 위해서 재앙을 주시한다.
크고 작은 재앙은 인간의 삶을 이루는 참된 요소이므로 언제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짜증 나는 사람이 되어 매 순간 인생의 고통을 한탄하고 얼굴을 찌푸리거나 벼룩에 물렸다고 신을 불러선 안 된다. 조심스러운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서 비롯되는 사고를 예측하고 예방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영리한 여우처럼 크고 작은 불운(대개 불운은 서툰 부분을 감춰버렸을 뿐이다.)을 잘 피해야 한다.
순간마다 인간을 괴롭히는 사소한 사고는 행복함에 젖어 너무 해이해지지 않도록 큰 재난을 견뎌내는 힘을 반복해서 훈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어떤 일도 예민하게 받아들이거나 마음에 담아두고 내내 곱씹어서는 안 된다.
그중 어떤 것도 내면에 다가오지 않게 하여 길 위에 가로놓인 돌멩이처럼 치워버려야 한다.
절대 어떤 일을 자꾸 숙고하고 되새기면서 내면화하지 말아야 한다.
위험한 일의 결과가 불확실하고 행복한 일로 바뀔 수 있다면 절망하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 하늘에 푸름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악천후를 걱정하며 낙담하지 마라.
모든 사물의 객관적 존재, 즉 단순한 표상으로의 존재는 언제나 마음을 즐겁게 하지만 의지에서 비롯된 주관적 존재는 고통과 슬픔으로 강하게 억눌려 있다.
늙어서는 인간 세상에서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편안하게 견딜 만한 현실에 안주하고 그 현실을 즐기면서 작은 일에도 기뻐한다.
성숙한 인간은 인생의 경험 덕분에 세상을 청년이나 소년과 다르게 보는 공정함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일단 사물을 단순하게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소년과 청년은 자신이 멋대로 만든 엉뚱한 생각, 인습적 편견, 기이한 상상으로 구성된 환영으로 덮어버려 진짜 세상을 왜곡한다. 경험은 가장 먼저 청년기에 만들어진 망상과 잘못된 개념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을 한다.
이에 앞서 청년기에 망상과 잘못된 개념을 형성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게 비록 소극적일지라도 최선이다. 하지만 이는 몹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이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처음에 아이의 시야를 되도록 좁게 유지하면서 그 범위 내에서 명확하고 정확한 개념을 가르친 뒤, 올바르게 인식하게 한 다음에 점차 시야를 넓혀나가야 한다. 그러는 중에도 모호하거나 절반만 이해하거나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없도록 계속 신경 써야 한다. 이때 사물과 인간관계에 대한 아이의 개념은 여전히 제한적이고 매우 단순하지만, 명백하고 정확하므로 개념을 수정하지 않고 확장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이 과정을 청소년기까지 계속하면 된다. 특히 소설책보다는, 예를 들어 프랭클린의 <자서전>이나 카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 같은 적절한 글을 읽어야 한다.
중요하지 않거나 대체로 불쾌했던 기억은 다시 떠올리지 않는 편이 낫다. 하지만 꼭 기억할 필요가 있는 일이라면 기억력에 맡겨두어야 한다.
인생을 아무리 요란하게 치장하고 꾸며도 머잖아 빈곤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그리고 인생을 아무리 좋은 빛깔로 색칠하고 장식해도 본질에서 모든 인생은 똑같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고통의 부재에 따라서만 평가할 수 있을 뿐 향락이나 부귀영화를 얼마나 누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존재 전체가 보잘것없고 공허하다.
백발노인이 여전히 학구열이 넘치고 음악이든 연극이든 무엇이건 간에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려는 감수성이 남아 있다면 그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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