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었든 읽지 않았든 책과 함께 있으면 왠지 마음이 놓여요. 작가니까 늘 책을 읽고 쓸 것 같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종종 있거든요. 강연을 가거나 혹은 작품을 쓰기 시작하면 오히려 책을 더 못 읽게 되더라고요. 그런 날들이 길어지면 약간의 우울증이 와요. 그런데 책을 읽고 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또 괜찮아지더라고요. 한마디로 밥을 먹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내가 먹는 음식이 내 몸을 만든다면, 내가 읽은 책이 내 인생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제가 오죽하면 동화는 어른들에겐 치유제, 아이들에겐 성장제라고 할까요? 정말 아이들이 읽는 책이 그 아이의 인생을 만드는 건데 사람들은 책에 너무 인색해요. 그러고 나선 나중엔 후회를 하죠.
지금 네가 읽은 책들이 나중에 널 구원해 줄 거야.
우주는 여름이야말로 책 읽기에 제일 좋은 계절이라 말하고 싶었다. 땡볕을 피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읽는 책이야말로 마음의 아이스크림이니까.
여태 아무에게도 하지 않던 말들이 담담히 흘러나왔다. 누군가 마법이라도 건 것 같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워 숨겨왔던 내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닌 마을 주민들 앞에서 버젓이 털어놓다니. 거듭 생각해 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일은 우주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행여 들킬까 봐 꽁꽁 감추었던 비밀도 말하고 나면 별거 아니라는 것. 오래 묵힐수록 꺼내기만 힘들 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밀은 감출수록 무겁고, 밝히고 나면 깃털처럼 가볍게 날려 보낼 수 있다는 것도.
“그나저나 시계는 언제 고치지?”
우주가 커피를 홀짝이며 책방 안 시계를 돌아보았다. 쿡이 앉은 자리 위쪽의 시계는 3시, 반대편 쪽 시계는 11시 20분, 주방 쪽 시계는 9시 5분이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시간을 사는 것 같아. 매일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저 시계들처럼.”
시계를 보던 우주가 무심히 읊조렸다. 말해놓고 보니 꽤 그럴싸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들은 자주 누구나 각자의 삶이 있는데도 모두가 똑같이 살아야 할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 나이엔 공부를 해야 하고, 저 나이엔 직업을 가져야 하고, 남들 결혼할 땐 결혼해야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사야 하고............ 그러고는 정해놓은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실패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사람은 남들이 공부할 때 공부하는 대신 놀 수도 있고, 남들이 직장을 다닐 때 더 나은 꿈을 위해 공부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우주는 지금, 이 순간 책방 자서점의 삶이 감사했다. 더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보기엔 고장 난 시계처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을 많이 들여다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자신다운 삶을 살고 있는 이 시간이 우주에겐 더없이 보람찼다.
“시집이니까 받을게요. 시를 읽는 건 언제나 좋으니까.”
“저도 시는 늘 옳은 것 같아요. 읽고 있으면 뭐랄까? 심장이 말랑말랑해지면서 좀 더 순수하게 살아도 괜찮겠단 생각이 마구 들거든요. 그리고 세상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도 같고요.”
우주는 며칠 전부터 계속 읊조렸던 시 한 편을 또다시 소리 내 읽었다. 시가 가슴 안에서 셔벗처럼 사르르 녹아들었다. 문득 마음에 풍랑이 일 때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특히 오늘 같은 날, 우주의 마음속에 시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럴 땐 차라리 종일 편안하게 책이나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우주는 읽던 시집에 다시 눈길을 던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시 밭에서 제대로 뒹굴뒹굴 놀고 싶었다. 제 속에 있는 어린아이를 끌어내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바깥은 이제 제법 큰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다. 우주는 시집 속 시 행간을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천천히 한 행 한 행을 눈에 넣었다. 그러자 조금씩 발걸음에 힘이 생겼다. 그럼 그거로 됐다. 설령 가던 길이 낯설어 헤맬지라도 그 헤맴조차도 설레는 시 밭 속 행군이 될 거니까.
우주는 문득 오늘 하루는 설국이 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고립된 책 고독을 즐기는 것도 그 나름의 맛이 있으니까.
글이란 게 참 힘이 센 것 같아.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잖아.
“와, 이 시 정말 좋은 시인가 봐요. 여러 사람 울리는 거 보면 말이에요.”
새삼 혼자만 운 게 아니라는 말에 한민이 웃었다.
“진실한 시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공자도 이런 말을 했나 봐요. 시를 쓰는 건 말을 꾸미는 게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라고요. 누군가한테 잘 보이려고 쓰는 것도, 인정받으려고 쓰는 것도 아니라는 거죠. 시인을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아요.”
“그렇게 위안이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그때 문득 깨닫게 되었어요.. 나의 욕망만 채우기 위해 살다 보면 쉽게 지치고 쓰러진다는 것을요. 의미가 남지 않는다고나 할까.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면서 돌이켜 보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왔지?”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간 살아온 시간들을 생각해 보니 고개가 떨궈지더라고요. 성공이 뭔지 모르면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하루하루 살았거든요. 그래서 오로지 일만 생각했죠. 일이 나고, 내가 일이니까 일만 잘하면 인생을 잘 사는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일만 했더니 일은 계속 내 곁에 있지만 다른 것들이 떠나더라고요. 여자 친구가 떠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더라고요.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그래서 이 책방을 여신 건가요?”
잠시 우주가 말을 멈추자 한민이 물었다. 두 사람 사이로 책방 안의 고요가 와락 끼어들었다. 우주는 잠시 통유리 창을 바라봤다. 까만 어둠 속에 여전히 날리고 있는 눈발을 보니 속으로 조금 걱정이 됐다.
“맞아요.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돌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책방을 하기로 했어요. 책은 저를 살리기도 하지만 독자들을 살리기도 하잖아요.”
스스로를 빛내기 위해서는 계속 흘러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고인 물은 썩어도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 법이니까.
길 위의 삶은 매일이 달라
한 번도 같은 하늘, 같은 바람, 같은 해가 뜬 적이 없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우릴 둘러싼 풍경들도
같은 적이 없어.
혹시라도 힘들고 지친 마음이 늘 같은 무게와 크기로
자리하고 있다면,
매일 다른 풍경과 얼굴들을 보며 조금씩 날려 보내.
‘그래, 계속해보자! 하다 보면 어느 날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설령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어도 하는 동안의 삶은 남잖아. 그럼 된 거야.’
갚을 길 없는 빚을 독촉받는 기분! 직장 생활을 할 때 우주의 시간은 그랬다. 손 안에 움켜쥐고 있어도 돌아서면 사라지고 말아 매번 아쉽고 부족한 것이었다. 그 탓에 매일 종종거렸고, 허우적거리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냈다. 그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꽤 오랜 세월 동안 시간은 원래 그런 거라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책방 자서점으로 들어오면서 달라졌다. 마치 민달팽이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시간들이 온전히 몸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하더라도 책방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취가 그랬고, 간간이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랬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세상에 고스란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래서 한 해를 보내고 난 우주의 손엔 딱히 쥐어진 건 없어도 마음에 새겨진 무늬는 찬란했다.
쿡! 예전엔 값없이 주어진 건 그냥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지금은 그 반대야. 오히려 값없이 주어진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이고 소중한 것이란 생각이 들어. 오늘 같은 햇볕도 그렇고, 눈만 들면 보이는 풍경도 그렇고, 이렇게 내 옆에 있어 주는 너도 그렇고.
그리고 책방을 하면서 느낀 건데, 믿어주는 마음만큼 중요한 게 없단 생각이 들어. 사실 믿는 데 돈이 드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도 우린 꽤 믿는 것에 인색한 것 같아. 뭔가를 믿고 도모하면 결과는 꽤 값진 것들이 많은데 말이야. 내가 쿡을 믿고 책방을 시작한 거나, 또 우리가 손님들에게 보냈던 자서전 같은 것도 그렇잖아. 그들이 우리 책방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더라면 사연을 안 남겼겠지? 그런데 믿고 남겼기 때문에 우린 거기에 맞춰 글을 지어 보낸 거잖아.
“괜찮아요. 당장 봄이 아니어도 봄이 온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설레니까.”
“우주 사장님, 태양이 왜 위대한지 아세요?”
“스스로 빛을 내니까. 그리고 그 빛을 모두에게 내리쬐어 주죠.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빛을 나눠주더라고요. 우주 사장님이 올해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네요.”
우주는 그런 쿡의 뒷모습을 잔잔히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이제 쿡이 아니라 자신이 태양처럼 빛을 내 모두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그래서 책방 자서점을 들렀다 가는 모두에게 가슴 가득 따뜻한 빛을 안고 돌아가게 하고 싶어졌다.
문득 그 기대만으로도 성큼 다가온 봄이 몹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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