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교통사고가 난 날은 겸손을 배우기 딱 좋은 날이었다. 내가 무엇을 누리든 그것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카탈루냐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수십 년간 아침에 일어나면 피아노로 바흐의 푸가를 두 곡씩 연주하곤 했다. 그것은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었다. 그는 그것은 집을 축복하는 방식이자 세계를 재발견하는 방식이고 그 일부가 되는 기쁨을 누리는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 생각났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인간적인 것이다."
힘이 필요할 때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다르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어."
공허할 때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
지겨울 때도 그렇게 말했다. 변화가 필요할 때도 그렇게 말했다.
선택이 어려울 때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
말을 해야 할 때는?
"어떤 이야기를 살아 있게 하고 싶어?"
가장 삭막한 사이는?
"만나도 할 이야기가 없는 사이."
사랑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하는 것."
나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걸 빼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
행복할 때는?
"내가 찾고 기다리던 이야기를 만나는 것."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싶은 곳은?
"좋은 이야기 속."
나 자신에 대해서 아는 법은?
"적어도 내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안다."(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최선의 나로 사는 법은?
"감탄한 이야기에 나를 결합시키는 것."
사는 동안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은?
"자신의 이야기를 찾고 만나고 만드는 것."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적 정체성의 핵심이다.
나에게 삶은 좋은 이야기를 찾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마음으로 언제나 불러낼 수 있는 이야기들은 에너지로 변해 나를 내 자아 바깥으로 끌고 나오고 움직이고 살아 있게 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많은 에너지는 이야기가 변신한 것이나 다름없다. 영향을 받는 이야기, 의미를 두는 이야기가 바뀌면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고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면 삶의 방향도 바뀐다. 창조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뭔가에 의미를 둘 줄 안다는 뜻이니까.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더 나은', '더 좋은', '더 새로운'이라는 단어만 넣으면 삶은 갑자기 도전할 가치가 있는 모험으로 변한다. 이것도 삶의 발명이다. 이럴 때는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더 깊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선 모든 생명이 지금보다 더 햇살과 바람을 즐겼으면 한다. 모든 생명이 지금보다 더 존중받고 자부심을 느끼고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모든 생명이 자신의 힘을 찾고 자기 자신이 되면 좋겠다.
앎의 지도라는 말을 들으니 소설가 존 쿳시가 생각이 난다. 그가 자주 쓰는 문장 중에 "앎을 살아낸다"는 문장이 있다. 그에게 삶은 그냥 삶이 아니고 어떤 앎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덧없는 시간에 왜 서로 반목하고 증오하지 않으면 안 되지?
26년이 거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지극히 짧은 시간이라고 할 만하다. 이 짧은 일생동안 무엇을 했는가. 완전히 나를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이 흉내와 허망. 왜 좀 더 잘 살지 않았던가? 자신의 것이라고 할 만한 삶을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친구야! 아우야! 자신의 지혜와 사상을 가져라. 나는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나의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여태까지 나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나의 삶이 아니었다는 앎. 식사는 식사 이상, 노래는 노래 이상, 삶은 자고 먹고 노래하는 그 이상의 것, 우리가 뭐라고 말하든 그 이상의 것, 죽을 때 돌아보고 후회할 우리의 것, 소중한 것이라는 앎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가?
세계에 대한 앎이 바뀌어야 한다.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알아야 한다. 알았던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다행히 어떤 앎은 지도다. 새로운 앎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어야 가능성이 태어난다.
지금 현재의 상황에 대해 나는 아무런 물증도 지식도 없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미래의 문이 닫히자마자 우리의 지식은 전부 죽은 지식이 되리라는 사실을.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너는 꼭 우리에게 알려줘야 해. 네가 본 것을. 우리 미래의 문이 닫히지 않도록." 우리가 새로운 앎을 살아낼 수 있게.
슬픈 자아가 있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경이로운 생명들의 관계였다.
더 좁은 세계, 더 작은 사랑을 주제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수많은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고 수치심을 떨치기 힘들다. 그렇게 살았고, 이제 더는 그렇게 살기 싫기 때문에, 나 자신이 좀 더 큰 그릇의 사람이 되면 어떨까 싶은 소망이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사랑과 더 큰 세상의 일부"라는 말이 내게 중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르 귄의 말이 나에게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굳이 우리가 살 수 있었던 세상 중 가장 작은 세상에 맞춰져 있다. 우리는 세상을 우리 인간들과 우리의 소유물로 축소시켰지만 그런 세상에 맞게 태어나지는 않았다." 이런 세상에 맞게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맞게 태어난 것처럼 살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에너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살 수 있었던 세계보다 더 작은 세계의 한 부분으로 맞춰 살려면 좁은 틀에 자신을 억지로 구겨 넣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꽤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 결과는 좋지 않다. 억지로 맞추는 데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자신이 진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게리 퍼거슨도 회복은 "현실을 작게 만들고 싶은 욕구를 내려놓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는 표현을 쓴다. 어쨌든 "더 큰 사랑과 더 큰 세상"은 내 가슴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입 밖으로 나가기만 기다리던 말들이었다.
세월호 이후 내게 가장 크게 바뀐 점이 있다면 삶이 사라지는 것을, 삶을 잃어버리는 것을, 우리의 인간적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무척 아까워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도. 그것을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더 많이 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유족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다. 유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구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지 않기를 바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다는 그 무의미와 싸우며, 자신의 아픈 가슴속 생각 중 가장 좋은 것을 내주면서 변화의 일부분이 되려고 하는 것이 유족들의 사랑이다. 나는 유족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나 개인에게 갖는 의미를 알고 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큰 사랑과 더 큰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면 유족들 덕분이다. 유족들은 슬픈 마음의 일부분을 해방시키고 그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이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매한 행위로써의 사랑을 발명했다. 이것이 많은 유족들이 반복적으로 하는 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는 한 문장에 담긴 말 없는 말들이다. 나는 사랑은 창조 행위라는 말을 그들을 보면서 이해한다.
단, 유족의 말이 나를 숙연하게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유가족이 더는 없는 세상을 꿈꿔야만 한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유한한 삶 속에 무한한 것은 오직 슬픔뿐인 것만 같은, 혼자서 겪어내고 혼자서 감당해야 할 괴로움이 너무 많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에 형태를 부여할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을 어떻게 발견할까? 이 문제는 이제 내게는 싱거울 정도로 쉬워졌다. 나는 책을 읽으면 된다. 내게는 새 책에 대한 기대가 새 삶에 대한 기대, 곧 내 목소리와 합쳐질 새 목소리에 대한 기대나 같았다. 작가들은 나에게 새 '눈'과 새 '목소리'를 준다.
피로와 자신 없음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힘을 내야 할 때. 그러나 일단 힘을 내면 잠깐이라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OO를 사랑하게 된 그 시간에 감사드린다.' 이 문장에 내 인생 전체가 담겼으면 좋겠다.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은 시간과 삶이 준 가장 큰 선물이고 삶의 의미는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므로. 그리고 삶은 결국은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말할 줄 알게 되는 하나의 과정이므로.
이사 레슈코의 경우, 전에는 생명이라고 생각도 못해 본 것 하나하나를 고유한 생명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사랑의 능력과 힘이 생겨났다. 애시는 새로운 사랑의 이름이고 새로운 사랑은 새로운 연결고리를 준다. 그는 돼지, 당나귀, 닭, 염소 등 공장식 축산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마지막 얼굴을 찍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물론 이번에도 연결이다. 그의 마음은 동장농물도 귀중한 생명체로 사랑과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연결되었고 잔혹한 세상에서 다정함을 찾으려는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이사는 나이 든 농장동물들과 함께한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래의 나에게 닥칠 일에 대해 계속해서 두려워하겠지만 그래도, 이 동물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초연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최후의 쇠락을 마주하고 싶다.
그의 작업은 이렇게 자신의 최후를 맞이하고 싶은 사람들과도 연결될 것이다. 긴 시간이 흐르면 어떤 시간 속에서는 이사 레슈코는 애시가 되고 애시가 이사 레슈코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이들이 될 것이다(이미 어느 정도 나는 이사 레슈코다. 우리 부모님의 병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내 건강과 죽음의 공포에 잠시 사로잡혔다. 그 사실은 비밀이었고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었는데 이사 레슈코가 말해줘서 고맙다). 이 이야기 안에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진짜 삶과 진실이 있다. 이사 레슈코의 '새 목소리'는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갈 힘이 있다. 이제 내 가슴에는 칠면조를 위한 자리도 있고 공장식 축산 동물들을 위한 자리도 있다.
"휴대폰이나 노트북에 필수적인 광물 중에 콜탄이라는 것이 있어요. 콜탄에서는 탄탈룸이 추출되는데 탄탈룸은 전기를 꼭 붙잡고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콜탄이 가장 많이 묻혀 있는 나라는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인데 IT산업이 발달하자 콩고민주공화국이 부자가 되는 것은 따놓은 당상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반대로 아동들이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되었고 고릴라들은 서식지를 잃었어요.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마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처음 알게 된 것처럼 많이 놀랐어요. 그 뒤로 몇 번 휴대폰을 바꾸려고 하긴 했는데, 에이 관두자, 다음에 바꾸지 뭐, 그렇게 미루게 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것은 나의 새로운 목소리다. 내가 동물의 서식지가 파괴되는 것을 의식해서 뭔가를 하지 않기로 하고 처음 한 일이었다. 나의 새로운 목소리가 나의 오래된 목소리를 이기길 바란다(나의 오래된 목소리는 세련된 디자인의 편리한 최신 상품을 좋아한다).
스마트폰과 콩고민주공화국의 아이들과 고릴라의 이야기에 내가 놀랐다면 우리가 세상과 연결되는 무수한 방식, 그 여파의 예측 불가함에 놀랐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나는 세상에 어떻게 연결되면 좋을까?'라는 심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새로운 목소리'는 내가 지구의 현실과도, 미래와도 연결되는 하나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나는 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고릴라와 아이들과 숲이 생각난다.
나는 몇 번은 좋은 꿈을 꿨었지만 아직 이 세상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해봤다. 이 사실이 슬프기 때문에, 좋은 연결이야말로 기쁨이자 힘, 어둠 속의 희망(나는 다른 입장에서,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희망을 걸고 있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생명, 자연, 삶의 의미와 가치(삶의 의미와 가치는 우리가 미래 지향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마음이 있는 사람들, 변화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강하고 고귀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다. 그 사람들을 존경하면서 그 사람들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받고 살고 싶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되어야 할 것이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는 우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세상으로 데리고 간다. 그의 눈은 누구의 눈과도 같지 않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본다. 우리가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는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작은 동물들에 가치를 부여해 탐구했고 작은 동물이 남긴 흔적만으로도 생명체의 생사고락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바다의 숲>의 미덕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단 꿈꾸고 모험하는 것을 완전히 긍정해준다. 찬 바다에 365일 들어가는 것은 크레이그 스스로 만들어낸 즐거움이다. 크레이그는 진정으로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발명해낸 셈이다. 나는 바로 이런 발명ㅡ스스로 삶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ㅡ이 '삶은 소중하다'는 말이 뜻하는 바라고 느낀다. 그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원했고 그 결과 닫혀 있는 세계를 열어주는 육지 포유류이자 수륙 양서류 인간이 되었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우리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살면서 자신에게 힘을 주는 말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힘을 주는 단어 속에 살게 되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힘을 주는 단어를 끝까지 밀고 간다. 크레이그에게는 바로 "바다에 들어가지 않을래?"가 힘과 마법의 말이다. 그 말에 반응한 사람이 로스다. 둘이 함께 잠수할 때마다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고 로스는 결국 크레이그가 왜 그렇게 바다에 몰입하는지 몸으로 이해하고 자신도 야생의 황홀경을 경험하게 된다. 모험을 함께 나눈 둘의 우정은 강력했다. 크레이그는 자신의 힘을 찾고 친구를 찾고 길을 찾고 평생 골몰할 관심사를 찾는 삶의 발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스의 기나긴 두려움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아이를 낳게 되자 로스는 아버지를 찾아보았다. 아버지는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로스는 아버지 또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둘 사이에 화해 비슷한 무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둘의 짧았던 화해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또다시 연락을 끊어버렸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역시 가장 큰 두려움은 마음이 만들어낸 두려움이고 대체로 가장 큰 두려움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 이것이 로스 아버지에게 벌어진 일이다.
로스와 마지막으로 대화할 때 아버지는 로스를 보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내면만을 봤다. 로스는 두 번 버림받은 셈이지만 이제 더 이상 아버지와의 일에서 상처를 받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의 내면만을 봤던 것과는 달리 로스의 눈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수많은 생명이 사는 더 큰 세계와 연결되면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전에 없던 생명의 에너지가 몸속 여기저기를 흘러 다니는 경험을 했다. 그것을 로스는 "(마음속) 주먹이 펴지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아주 멋진 자유와 해방의 표현이다. 크레이그와 물속에서 지내는 동안 로스의 가슴속에는 두려움이 아닌 다른 것들, 이를테면 사랑, 호기심, 꿈, 신뢰, 우정 같은 것들이 더 견고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로스에게 바다는 로스의 내면 깊숙이 얼어붙어 있던 두려움과 사랑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것이었다(야생의 자연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비춰주는 거울 같은 것이라고 크레이그는 말한다. 다이빙에 실패한 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던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발밑에 아무것도 닿지 않아서다. 바다는 내가 발밑에 아무것도 닿지 않으면, 즉 토대가 없으면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비춰 보여주었다. 두려움은 깨졌고 사랑은 단단해졌다. 이렇게 로스는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로스의 이야기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발명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크레이그와 로스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문어 선생님의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잠수하며 '바다의 숲' 마법을 경험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야생과 인간의 끊어진 '실'이 다시 연결되는 회복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크레이그는 문어, 오징어, 수달, 상어를 선생님으로 모시면서 야생의 경이와 연결되었고 경이로운 사람들과 연결되었고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실을 복구"하였다. 스승의 발명이 우정의 발명, 우리의 발명, 연결의 발명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 인류 전체에게 필요한 회복의 발명이다. 세상은 당신이 마법을 바라면 마법을, 회복을 바라면 회복을 줄 것이다! 단, 당신이 진실로 원한다면!
크레이그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창조적이고 투쟁적인 기쁨을 준, 가장 중요한 단어는 '실'이었다(사방에서 끊어진 실 같은 관계만 보는 지금, 이 단어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실'은 "바다에 가지 않을래?"처럼 그에게 힘을 주는 단어이자 희망의 단어로 그는 동물의 실, 식물의 실, 인간의 실이 서로 엮여 탄탄한 '밧줄'이 되기를 희망한다. 크레이그 생각에 그렇게 되면 자연도 인간도 회복된다.
나는 이 장면을 읽을 때 부러움으로 그야말로 가슴이 찢어질 뻔했다. 따개비로 뒤덮인 거대한 고래 얼굴이 신처럼 로스를 굽어보는 장면이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에서 벗어난 로스가 본 세상이다. 두려움의 감옥문을 열고 나와서 본 현실은 그렇게나 크고, 그렇게나 신비롭고, 그렇게나 놀랍도록 다정한 것이었다. 고래와 헤어진 로스는 자신이 그렇게나 원하던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아버지였다. 로스는 바닷속에서 이룬 것ㅡ사랑과 신뢰ㅡ을 바다 바깥에서도 이루었다. 바다가 그가 스스로의 모습을 변신시키는 마법을 부릴 수 있도록 받아들여줬고 도와주었다. 나는 이것이 밧줄로 연결된 세상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 사랑을 나눠주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나의 세계가 무한히 확장되었다. 돌핀맨의 삶, 복 피디의 삶, 연산호를 걱정해서 복 피디에게 제주로 와달라고 연락한 사람들의 삶, 춘삼이의 삶, 춘삼이를 야생 방류하려고 애쓴 사람들의 삶, 춘삼이를 품고 있는 바닷속 다른 생명들의 삶, 이들 생명과 질적으로 다른 관계를 맺은 크레이그와 로스의 삶, 나에게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라고 권한 친구와 후배의 삶, 또 뭐가 있지? 나를 무사히 제주공항에 데려다준 기장과 승무원 일동의 삶? <바다의 숲>을 펴낸 출판사 편집자들의 삶? 내가 모르는 모든 삶. 아! 쌍안경을 발명한 사람의 삶도. 그리고 우리 세월호 아이들의 삶도(내가 복 피디를 알게 된 것은 세월호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모여서 이 한순간이 되었다. 그 숱한 이야기와 시간들이 돌고래 무리를 입 벌리고 바라보는 생명에 무지한 멍청이(나)를 둘러싼 봄의 대기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쓸쓸함 너머, 덧없음 너머, 세상은 빛나고 있었다. 나는 보고 싶은 것을 봤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내 마음속에 무의미가 도사리고 있다 해도 세상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내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 같다).
'춘삼이-아기-시월이' 무리는 나를 확 붙잡았다가 약간의 물거품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그 짧았던 시간이 내게는 영원하다. 찰나와 영원이 대정 앞바다에서 만났다. 그 짧았던 순간 나의 이야기에 기적이 실처럼 엮였다. 나는 행복 중 최고의 행복, 기다리던 바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봤다는 믿을 수 없는 행복을 맛보았다.
삶의 의미는 삶을 가치 있게 사는 데 있고, 우리는 이것을 자아실현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렇게 자아를 실현하면서 삶을 살아내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부른다. 바닷가에서 돌고래를 기다리는 것이 나에게는 나다운 것이고 행복이고 자아실현이다.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기쁜 일을 기다리는 것이 나다운 것이고 나의 자아실현이다.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기쁜 일이 일어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이 또한 나의 자아실현이다.
만약 어떤 평범한 하루가 유난히 빛이 나는 하루로 기억에 남는다면 어떤 한 순간이 진실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생명 그 자체, 춘삼이가 살아서 다시 돌고래의 삶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되어야 할 것이 된다!) 그 자체에 감동했고 그 감동은 진실했다. 자아실현을 하는 데 힘을 쓰려면 그냥은 어렵고 창조적으로 힘을 쓰게 도와줄 뭔가가 필요하다. 토대와 기준이 될 단어와 문장도 없이, 같이 할 사람도 없이 힘을 낼 수는 없다(다시 말하지만 토대가 없다는 것은 나의 두려움이다. 힘을 쓰려고 해도 쓸 기준이 없거나 낮다는 것도).
2번 돌고래는 나에게 기쁨을 상기시킨다. 그 단어를 들으면 나는 언제나 그날의 진실한 기쁨, 깨끗한 기쁨, 티 없는 기쁨, 생명이 약동하는 기쁨을 느낀다. 나 아닌 생명의 에너지를 받는다. 그리고 이런 진실한 기쁨을 삶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기쁠 수 있고, 이 말은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힘을 낼 수 있다는 뜻이고, 나는 기쁨을 맛볼 준비가 되어 있다. 즉, 기쁨을 위해 살자고 생각하게 된다. "오늘 뭐 하세요?", "놀라고 기뻐합니다."
내가 2번 돌고래를 본 것은 확률상 기적 같은 일이지만 확률로 치자면 우리의 탄생도 설명이 썩 잘 되지 않는다. 일단 출발은 이렇다. 우리 부모가 만날 확률은?
여러분의 부모가 만날 확률(2만분의 1)과 두 사람이 여러분을 임신하기 위해 함께 있을 확률(2천분의 1)을 곱하면 여러분이 태어날 확률은 기본적으로 4천만분의 1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적 확률을 아직 고려하기 전이다. 여러분의 어머니가 평생 10만 개의 난자를, 아버지가 4조 개의 정자를 생산한다고 하면, 여러분이 여기 있을 확률은 대략 40경분의 1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의 부모보다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유전적으로 여러분은 15만 세대 이전에 시작된 혈통이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만 설명하면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날 확률이 대체 얼마라는 말인가? "여러분이 존재할 확률은 '2백만 명이 모여 각자 면이 1조 개인 주사위를 던져 모두가 똑같은 면이 나올 확률'과 똑같다." 우리가 이렇게 태어난 존재라고? 우리가 태어난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바로 '삶!' 이걸 가지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번잡스러운 선물, '삶!' 그런데 이 문장 뒤에 받고 싶지 않은 선물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현실이란 거대한 계획 아래, 여러분은 지구에 도착했다. 대재앙이 목전에 닥친 적시, 적소에 말이다. 사실 너무도 완벽하다. 할리우드도 이보다 나은 플롯은 생각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보다 더 장대하고 세심하고 놀라운 이야기는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 시대에 '생각하는 동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이야깃거리임에 틀림없다. 이제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하나뿐이다. 딱 지금 이 시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더 이상 여행하기를 원치 않아. 이제 나는 나의 눈을 찾고 싶어. 나 자신을 찾고 싶어.
-사뮈엘 베케트
사람들이 만약 같은 장소를 지겨워한다면 같은 존재는 어째서 지겨워하지 않는가.
-페르난두 페소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넴바시아 여행기를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폐허에서 여행자는 희망 없는 투쟁에 기꺼이 뛰어드는 영혼을 본다.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치열한 투쟁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영혼을 보는 것이다. 그 영혼은 승부를 떠나서 마치 게임을 하듯 그 투쟁에 몰두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하여 내 영혼은 이렇게 맹세한다. 다시는 내 마음에 인생의 환락, 도취, 근심으로 부담 주지 않으리라. 나는 허공에 튀어 오르는 불꽃같은 상태로 내 영혼을 보존하리라.
니코스의 충실한 독자였던 나는 이 문장이 낯익어도 너무 낯익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일생에 걸쳐 아무런 대가도 보상도 바라지 않고(대가나 보상 때문에 하지 않게 되는 일이 너무 많으므로) 용감하게 삶 속으로 돌진하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 '튀어 오르다', '솟구쳐 오르다'는 그가 특히 좋아하는 표현으로 그는 어디 가서 뭘 봐도(꼭, 모넴바시아가 아니어도) 허공에 튀어 오르는 불꽃이 되고 싶어 했지 납작 엎드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여행자는 풍경을 보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본다고 한 것은 프루스트였던가?).
나는 내 삶에 경이로움을 섞어놓고 싶어졌다. 경이로움은 내 안에 없던 빛이 내게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니 이제 나는 나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절대로 자기 홀로 창조적이지 않다. 자율성에는 한계가 있고 세상에 나와는 다른 생각,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사방 어디를 봐도 보이는 것이 나뿐이었다면 나는 지금쯤 '나-나-나-나'로 이어지는 가시철조망에 찔려 죽었을 것이다. 나를 변하게 하는 것은 고백도 아니고 내면의 응시도 아닌, 다른 사람, 다른 생명, 다른 이야기다. 내가 자꾸만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그날 밤의 경이로움과 같은, 세상에 숨겨진 경이로움과 마주치는 그 우연을 기대해서다. 우리는 시간과 우연의 자식들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시간과 우연을 초월해서 살아남는 경이로운 것들,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불멸일 것들, 우리를 끝까지 기쁘게 인간이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도 별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왜 내가 너를 사랑해야 해",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어"가 맞는 대답이다. "왜 내가 다른 생명을, 미래 세대를 생각해야 해?",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어." 이것 역시 맞는 대답이다. 외롭지 않고 싶다는 것은 우리 모두 열망하는 감정이지만 외롭지 않기는 무척 어렵다. 우리가 외롭기를 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으므로. 무관심, 무책임, 외면, 조롱, 무시, 냉소, 혐오가 많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구 생명이 겪고 있는 위기 때문에 뭔가 '포기'하는 사람, 뭔가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쉬운 길을 택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다정함도 온기도 사랑도 책임감도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각자의 어두운 기억이 두텁게 쌓여가는 이 세상에서, 결국은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에너지가 발산되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 '우리 모두의 것인 삶'에 대해 뭐라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감동적이다. 그래서 다른 생명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전에 하던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는ㅡ포기와 자제와 하지 않음 쪽으로의 변화를 살아내는, 그렇게 미래 세계의 일부가 되려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경이로워 보인다. 지구의 여러 문제에 우선 자신의 삶으로 대답하려고 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제하고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줄 알기 때문에.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런 사람들의 핏속에는 별빛이 흘러다닌다. 피부에는 별빛 가루가 뿌려져 있다. 이 사람들의 빛이 내게로 흘러온다.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말을 건넬 사람도, 기댈 곳도, 기대할 것도 없이 살게 된다. 나는 하늘의 별을 볼 때처럼, 심금을 울리는 희생과 헌신과 책임감의 이야기들에 매료된다. 나의 욕망 중 가장 큰 욕망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한 욕망이고 나는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본다. 나는 이 경이로운 마음들과 함께 멀리 가보고 싶다. 더 많은 하지 않음, 포기를 발명하면서.
행복해지려고 그렇게 했다고?
좋아. 행복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외로워 보이는군
솔직히 말해도 될까?
네가 예전처럼 근사해 보이진 않아.
네가 행복하려고 한 선택 때문에
너는 내가 예전에 알던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야
너의 행복이라는
그 헛소리를 다 뒤집으면 거기에 희망이 있어
그럴 마음이 들면 전화해
전화번호는 같아
-미상(<바뀌지 않는 전화번호>, 파르테논이 정면으로 보이는 카페에서 본 시)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자연이 아니고 돈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장은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윤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이 이야기 속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일부 인간만이 남는다. 이 세상이 최선의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잘 적응한 인간만이 살아남는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메인 서사다. 이것이 우리가 공유하는 정신적 배경이다.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적응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가 지구에 드리운 그림자가 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왔다. 코로나바이러스, 기후위기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살아 있고 죽이는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살아 있고 죽이는 언어를 쓴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힘이 있다. 우리는 현실의 세계를 살지만 허구와 환상의 세계-이야기의 세계에도 살기 때문이다. 내면에 깊게 뿌리내린 다음 우리가 그 안에서 굳어져 그것에 따라 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야기의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힘이다.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 하나의 이야기밖에 모른다면 하나의 삶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세계가 다른 삶이 가능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쨌든 이것들은 내가 마음 편히 깃들 이야기들이 아니다. 나의 좋은 부분을 자극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 이야기이도록 놔둘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새로운 운명을 마련해주고 새로운 가능성에 마음을 열게 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얼마나 애타게 지구를 돈을 벌어줄 자원으로 보고 싶어 하는지 잘 아는 아미타브 고시의 지도가 가리키는 출구 쪽 화살표에는 '이제 이야기를 바꿔라'라고 쓰여 있다. 앞으로는 자연을 빼놓고는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원으로 보는 이야기 속에는 어떤 탈출도 해방도 없다.
내 생각에 자부심은 아주 깊은 감정과 관련이 있다. 깊은 감정을 느낀 어떤 일을 하면서 올바른 길을 가고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자부심이다. 등산이나 카약 같은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기던 더그가 깊은 감정을 느낀 것은 자연이었고 그에게 그런 감정을 선물한 자연을 지키려고 하는 동안 그가 먼저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부심이 얼마나 중요하고 좋은 것인지, 인간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아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인류가 해온 일이기도 하다. 모닥불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진화한 영장류 동물로서, 우리는 이야기를 듣는 자에서 이야기를 돌려주는 자로 변해간다. 어떤 이야기를 돌려주려고 하느냐 그 문제가 남을 뿐이고, 이야기를 하는 동물로서 좋은 이야기를 (이 세계에) 돌려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더그는 자부심을 가지고 삶을 선택했고 선택한 일에 가진 모든 돈과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더그 덕분에 나는 광활한 칠레의 국립공원들을 상상하고 그런 거대한 보호구역이 있는 미래를 더 열렬히 원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삶은 릭에게 녹아들었다. 릭 또한 두 친구들처럼 자연을 지키는 일에 힘을 보태는 것을 평생 해야 할 일로 생각하게 되었다. 릭은 친구들을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진짜배기 우정이고 그야말로 살아 있는 관계다.
이본 쉬나드와 더그 톰킨스와 릭 리지웨이는 모험을 떠나 텐트 안에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들의 텐트 안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이 땅과 저 땅이 연결되면 진짜 아름답겠지?", "이 땅과 저 땅이 연결되면 저 큰 나무 밑에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피크닉을 즐기겠지?" 솔직히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해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삶을 돈에 통째로 팔고 싶지 않은 한 인간으로서, 큰 나무 그늘 아래 쉬는 것 같은 마음의 평화를 주는 이야기가 필요한 한 인간으로서, 지구를 자원뿐만이 아니라 경이롭고 성스러운 선물로도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가 그립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 텐트 속이 내 서식지 같다.
더그의 꿈은 더그가 뜻밖의 카약 사고로 숨진 다음에 아내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 새로 탄생하리라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 삶에서 파괴의 에너지가 빠져나간 세상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바로 그 모습일 것이다.
<지도 끝의 모험>은 야생을 모험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친구와 사랑을 찾고 인생을 바쳐 해야 할 일을 찾고 자신의 삶을 만들고 아직 우리가 가보지 못한 길을 만들면서 살아간다는 고난이도의 인생 모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가 듣고 나누는 많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인류가 달라질 미래를 믿지 않는다. 사실은 달라질 자신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보는 대로 세상을 본다. 하지만 미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 생각이고 꿈이다. 세상은 우리의 상상과 꿈과 생각대로 만들어지고, 상상하고 꿈꾸지 않으면 영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미래를 믿지 않으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이야기꾼의 능력이다. 이야기는 "그다음엔 어떻게 돼?", "그 일 다음엔?"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를 잃는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결국은 타인이 그린 지도를 따라 타인ㅡ부동산 개발업자나 파워엘리트, 메인파워, 인싸, 인플루언서, 국회의원 등등의 뭐 그런 파워풀해 보이는 이름을 가진ㅡ이 쓰는 이야기에 따라 살게 된다. 문제는 누구도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따라 하고 있는 이야기 중 뭔가를 잊어버려야 한다. 각자를 지배하는 메인서사ㅡ어느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게 만들어버린ㅡ의 환상을 깨야 한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믿었던 것, 그래서 그 길을 향해 달려가게 만들었던 이야기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래서 삶과 미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쓰면서 다른 미래에 살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내 눈에 릭과 친구들의 희망과 열정은 이 불타는 지구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정을 현실 유지가 아닌 없던 것의 창조에 바쳤다. 나는 이 열정을 공유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같은 꿈을 꾸는 것에 대해선 극도로 말하지 않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어떻게 에너지를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겠는가?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있다. 나는 나의 에너지의 대부분이 감탄할 만한 이야기를 따라 사는 데서, 마음이 가는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려고 하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살 때 나는 어디에 힘을 써야 할지 모르는 슬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나 자신을 겨우 신뢰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타인의 이야기에서 에너지를 받는 것을 이야기의 초대라고 표현해왔다. 이제는 이 이야기의 초대에 따라 길을 가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고 지구는 더 이상 황금 보물을 찾아 정복할 곳이 아니라 잃어버린 의미와 신비를 되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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