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습니다. 난 이제 더 이상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않아요. 뭔가를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도 않고요.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죽기 전에 읽고 싶은 몇몇 책들이 있답니다.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를 말하긴 어렵군요. 읽지 않고 떠난다면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 것 같아요. 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을 읽고 싶고, 미클로스 반피(헝가리 소설가, 귀족, 정치인)의 <트란실바니아 3부작>을 읽고 싶고,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을 읽고 싶어요. 나는 생이 끝나갈 시점에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곤 한답니다. 에드먼드 윌슨이 생의 마지막 나날에 침대 발치에 산소 탱크를 둔 채 히브리어를 공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읽지는 않는다 해도 호기심에서 살펴보거나 어떻게 쓰였는지 보려고 꺼내 드는 책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정말로 알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그런 갈망이 있는 거죠.
지난 수십 년 동안 나는 책을 읽지 않거나 읽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과 오랫동안 정말 친하게 지내거나 편안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독서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선 뭔가 빠진 게 있지요. 언급하는 말의 폭, 역사 감각, 공감 능력 같은 게 부족해요. 책은 패스워드지요. 영화는 너무 단순해요. 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는지도 모르겠군요. 언젠가 내가 시끄러운 술집에 앉아 있을 때 한 남자가 나에게로 와서ㅡ우리 동네에 있는 술집이었어요ㅡ뭐라고 말을 했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러자 내 귀에 가까이 대고 다시 말했어요. "네루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사실 네루다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친구가 되고자 하는 그 사람의 정겨운 시도가 따뜻하게 느껴지더군요. 나는 나중에 네루다를 읽었어요. 그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네루다를 안 읽었을지도 몰라요.
모든 책을 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책을 잘 읽는 사람이라 해도 읽지 않고 남아 있는 책들이 엄청나게 많기 마련입니다. 덜 알려진 책뿐 아니라 기초가 되는 책들도 그렇습니다. 영원히 안 읽게 되거나 반드시 읽어야 하거나 또는 애서가 친구인 자크 보네(프랑스 소설가)의 말처럼 언젠가는 읽게 될 책들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흥미로운 작가들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나가이가후의 <스미다강>과 다른 두세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된 것은 자크 보네 때문이었습니다. 읽어야 할 게 너무 많고, 언제나 그러하겠지요.
그녀(윌라 캐더)의 묘비에는 <나의 안토니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어요.
무언가 완전하고 위대한 것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여러분은 자기 인생의 영웅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마느이 것이고 흔히 첫 번째 소설의 기초가 됩니다. 그 어떤 이야기도 자신의 이야기만큼 잘 쓸 수 있는 것은 없지요.
레오토가 그처럼 힘센 사람이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선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많은 말들을 했지요. 그 가운데 하나는 이겁니다. 선택하는 법을 알아라.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당신의 언어는 당신의 나라다. 나는 이 말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걸 거꾸로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당신의 나라는 당신의 언어다, 라고 말이에요. 두 경우 모두 비슷한 의미예요. 둘 다 우리의 진정한 나라는 지리적인 것이 아니고 언어적인 것이라는 의미죠. 또는 우리가 실은 언어 속에서, 아마도 모국어 속에서 살고 있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애국심이 아닌 삶에 대한 충심은 언어에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리노이주에서 제임스 존스와 로니 핸디라는 여자가 세운 글쓰기 학교에서는 문장의 형태와 리듬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글쓰기 교수법의 일부였습니다. 존스는 자신의 소설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장기간 집필중이었고, 로니 핸디는 그의 뮤즈였지요. 그곳 글쓰기 학교의 학생들은 매일 몇 시간씩 앉아서 헤밍웨이, 포크너, 토머스 울프 등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들을 손으로 베껴 써야 했습니다. 그런 글들의 힘과 특징을 느끼고 받아들이기 위해서였어요. 그것은 모방의 방법일 뿐이었지만 아마도 생각만큼 어리석은 방법은 아닐 겁니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춤을 가르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군요. 리듬감이 있는 사람에게는 뭔가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모든 작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적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렇게 쓰고 있어요. 날마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답니다. 글을 다시 계속 써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줄 또는 몇 마디 단어를 끄집어낼 수 있다면 좀 더 잘 진행됩니다. 때때로 잘 풀리는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 풀리는 날이 더 많아요. 나는 내가 쓴 글에 실망할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때도 글을 씁니다. 그러나 글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쓰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지ㅡ정확히 누구라고 규정하진 않겠지만 아마 한 여자일 것입니다ㅡ모든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벨이 말한 것처럼 지적인 한 여자일 거예요.
나는 펜을 쥐고 손으로 씁니다. 그런 다음 전동 타자기로 타이핑을 하지요. 손쉽게 노트북컴퓨터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나는 전동 타자기의 소리를, 타자기의 키가 두드려대는 약간의 불규칙한 소리를 좋아합니다. 난 두 손가락으로 자판을 친답니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실제로 작곡을 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단어들에, 단어의 무리들에 귀 기울이고 있지요. 나는 나를 다음 문장들로 인도해주는 그 소리에 자꾸자꾸 귀 기울이며 듣는 것을 좋아해요. 때로는 내가 쓰고자 하는 것에 길을 보여줄 몇 가지 단어를 적어놓기도 하고 그런 단어들을 글에 포함하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성입니다. 질서 있게 정리하는 일이지요. 머릿속에는 소설에 관해서, 심지어 장에 관해서 많은 것들이ㅡ아주 많은 것들이ㅡ들어 있습니다.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토다>를 쓰기 위해 나는 먼저 연대순으로 선을 그리고ㅡ그것은 그런 종류의 책입니다ㅡ그 선을 따라 모든 것을 표시했습니다. 내 방엔 커다란 메모 보드와 푸시핀이 있었어요. 각 장마다 한두 개의 푸시피닝 필요할 것 같더군요. 나는 각 장별로 특이 사항과 세부 내용을 거기에 푸시핀으로 꽂아두었습니다.
글쓰기 작업을 전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서 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글을 쓰곤 해요. 작품을 지니고 다니면서 말입니다. 그 작품이 작가의 동반자인 것입니다. 작가는 마음속에 항상 그것을 담아두고 수시로 살펴보며, 잘 연결할 방안을 찾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작가에게 최고의 동반자가 됩니다. 작가는 그 작품과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지요. 그것은 작가의 유일한 동반자가 됩니다.
글쓰기는 10일 동안 계속될 수도 있고ㅡ조르주 심농이 그런 경우랍니다ㅡ수 주일, 수개월, 수년 동안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습니다.
나는 이 작품을 위해 두 권의 두꺼운 공책을 작성했습니다. 내 일기장에서 그 소설을 쓰는 데 쓸모가 있을 것 같은 내용들을 가져와서 부문별로 나누어 적어놓은 참고 자료집이었죠. 주로 날씨, 장소, 대화, 얼굴, 죽음, 사랑, 섹스, 사람 등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토다>. 거기에 이 자료의 반의반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1년 동안, 어쩌면 그 이상 이 작품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자신감을 잃어버렸어요. 주인공의 설정이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지요. 얼마 후에 나는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중심이 되는 것을 바꾸면 필연적으로 다른 것들도 바뀌게 마련이죠.
나는 앞에서 예술의 자유를 언급했습니다. 그 자유는 도덕에 관한 상식적인 생각이나 그 어떤 교리문답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또한 그 어떤 타협적인 것도 뚫고 나아가는 자유ㅡ진정한 욕구ㅡ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금기도 없어야 합니다.
언어는, 영어는 우리가 막 함부로 대하긴 하지만ㅡ관리인도 없잖아요ㅡ그럼에도 중요한 것입니다. 신성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모든 것을 실어 나르고, 언어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언어에 많은 노력과 주의를 기울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을 '토다'라고 하면 안 돼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몰라요." 나는 그들과 언쟁을 벌였어요. 하지만 발행인이 "안 됩니다, 선생님. 다른 제목을 다셔야 해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올 댓 이즈'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 책의 제사를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건 꿈일 뿐, 글로 기록된 것만이 진짜일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바라되 열광하지 않는 것이 작가로서 적합한 상태다."
어떤 식으로 글을 쓰시는지요?
손으로 써요. 나는 글을 쓰는 그 친숙한 느낌에 익숙해져 있어요. 그런 다음 자리에 앉아 타이핑을 하죠. 그러고 나서 다시 타이핑하고, 고치고, 다시 타이핑하고, 그렇게 끝날 때까지 계속해요. 이런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게 여러 차례 입증되었지만,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문단을 쉽게 써나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나에게는 이 문장들을 다시 쓸 기회가 필요해요. 그걸 나 자신에게 다시 말하고 문단을 다시 한 번 살펴볼 기회가 필요하며, 전체 텍스트를 한 줄 한 줄 매우 조심스럽게 검토하면서 써내려갈 기회가 필요한 거예요. 여기에는 말하자면 나 자신처럼 쓰고자 하는 일종의 모방 충동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수정의 과정이네요?
나는 처음 쓴 부정확하고 불충분한 표현을 싫어해요. 글쓰기의 온전한 기쁨은 글을 다시 점검하여 어떻게든 좋게 만들어보는 기회에서 오는 거예요.
더 어려운 일을 안고 있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단호히 맞서며 살아가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에서는 여성이 그런 경우죠.
나는 삶과 죽음의 올바른 길이 있다고 믿어요. 난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답니다. 내가 영웅이나 영웅주의를 포기한 건 아니에요. 우린 아주 넓은 의미에서 이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저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나 은성 훈장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일상적인 영웅주의가 있지요. 유도라 웰티의 <자주 다닌 길>에 나오는 흑인 할머니가 그런 경우라고 생각해요. 할머니는 손자의 약을 구해 오기 위해 멀리 떨어진 읍내까지 철길을 따라 걸어가곤 하지요. 난 진정한 헌신이 영웅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헤밍웨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대부분의 사람이 셀린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아요. 그는 유능한 작가지만, 개인적으로 난 그의 성격이 달갑지 않아요. 나는 그를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어요. 그들은 모두 헤밍웨이가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하지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에서 즐거운 일 가운데 하나는 위인들을 재배치할 수 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인물들은 강등시킬 수 있다는 점이에요. 그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지요. 그래서 난 헤밍웨이를 아래로 내려보냈어요. 그는 지하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뿐이다."-장 르누아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즉 우리가 살아가고 얘기하고 굳게 지켜나가는 관습적인 삶이 있어요.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이 있죠. 이 삶은 생각과 환상과 욕망의 삶인데, 드러내놓고 얘기하지 않는 삶이에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본성에 충실해지는 때에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난 믿어요. 텔레비전에 나와서 그러는 경우도 있을 테고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에서는 이 두 가지 것이 완전히 구분되지요. 나는 그걸 깨닫고 있어요. 그래서 그에 관한 작품을 쓰려고 한거예요.
등반과 관련하여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곳까지 와서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거예요. '난 할 수 없어. 난 이걸 할 수 없다는 걸 알아. 난 틀림없이 이걸 할 수 없어. 그렇지만 해야 해. 난 해야만 한다는 걸 알아.'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죠. 그러나 그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에요.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어쨌든 그 경험은 당신을 어떤 식으로인가 성장시키지요.
솔 벨로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비의 왕 헨더슨>은 별것 아닌데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옆에 표시를 하게 되면 거의 모든 페이지에 그런 표시를 하게 되는 책이지요. 그 소설은 굉장한 작품이에요. 벨로는 언젠가 나에게 버지니아주에 있는, 말을 키우는 시골에 관해 써보라고 권했답니다. 내가 아내의 가족들과 그곳에 땅이 있는 장인에 대해 얘기해주었을 때였어요. 나는 버지니아주의 말을 키우는 시골에 관해 뭘 쓸 만큼 많이 알지 못한다고 그에게 말했어요. 그곳에 간 게 열 번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지요. 그러자 그가 깜짝 놀라 말을 했어요. 이렇게 말했죠. "그렇군. 그런데 말일세, 난 <비의 왕 헨더슨>을 쓸 때 아프리카에 가본 적이 없다네."
우리는 시인들의 불만에 대해 얘기했고, 우리 사회의 문화나 국가가 자신들에게 합당한 수준의 존경심이나 명예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생각에 대해 얘기했어요. 그중 절반 정도는 나중에 뒤늦게 오지만 말이에요. 우리 문화는 덧없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고, 어떤 특정한 것들과 사람을 무시하는 문화예요. 삶의 가장 깊은 본능은 오래오래 지속되는 것, 어떤 가치 있는 것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에 열심히 관여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성취하든 성취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아마 그래서 예술가들이 내 소설에 등장하는 것일 거예요.
영화는 본질적으로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것이에요. 위로의 힘을 지닌 영화는 아주 드물죠.
나는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고 그걸 되살려내는 데 기쁨이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엔 전반적인 진실의 문제가 있어요. 우리에겐 우리의 삶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충분히 있어요. 우린 이미 사실과 허구가 모호하게 뒤섞인 것을 보아왔어요. 자신들의 책을 논픽션 소설이라고, 즉 논픽션 허구라고 설명한 작가들을 보아왔어요. 나는 다소 고전적인 관점을 지지해요.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객관적 진실 같은 게 있다고 믿지요. 빅토르 위고의 <관찰한 것들>이 하나의 예랍니다. 아무도 신의 진실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은 신의 진실이 아니에요.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서의ㅡ우리가 관찰한 것으로서의ㅡ진실인 거죠. 나는 틀릴 수 있어요. 우리 모두가 다 그래요. 그 안에 실수가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의도적인 실수나 부주의함에서 비롯된 실수는 아니에요. 그건 단지 우리 모르게 기어든 실수죠.
당신의 책상에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그 책에 쓰지 않은 것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용기"에 대해 이사크 디네센을 칭찬했을 때, 그건 무슨 뜻이었습니까?
나는 그 책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 있어요. 알다시피 그녀에게는 자신에게 매독을 옮긴 남편이 있어요. 그녀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고 결혼 생활이 있지요. 연애 사건도 있고요. 우리는ㅡ나는 그녀의 전기를 읽어보지 못했어요ㅡ엄청 많은 일들이 그녀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이런 얘기들이 이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는 없어요. 남편이 간략하게 언급되고, 그녀의 아버지도 짧게 언급될 뿐이죠. 다른 많은 인물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이 여자와 이 여자의 삶에 대해 매우 강렬한 느낌을 가지게 되죠. 그녀를 알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럼에도 그녀는 이를테면 치마를 올리거나 이불을 까는 것 같은 사소한 것들을 보여줄 의무는 없었어요. 나는 그 점을 존경한답니다. 난 어떤 중요한 것들을 얘기하고 시시콜콜한 얘기는 하지 않는 책을 쓰는 게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글을 쓰고자 하는 궁극적인 충동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궁극적인 충동이요? 이 모든 게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에요 남아 있는 거라곤 산문과 시, 책, 그리고 글로 기록된 것들뿐이겠죠. 인간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책을 만들어냈어요. 책이 없다면 과거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우린 이 세상에 벌거벗은 채로 있겠죠.
"나는 언제나 배우들을 영웅으로 여기는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아무리 친밀감을 느낀다 해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작가는 화가와 비슷한 점이 있답니다. (...) 물론 풍경에는 실제 장소에 대한 절대적인, 바꿀 수 없는 묘사가 있습니다. (...) 여러분이 배경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배경 역시 정보를 줄 거예요.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하지만 말이에요. 여러분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그림은 여러분의 관심이 결코 배경에 가지 않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그것은 여러분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거기에 놓인 겁니다."
그녀는 1868년 밀라노에서 열린 서대한 무도회에 관한 기사 가운데 일부를 큰 소리로 읽어준다.
그것은 왁자하고 즐거운 그해의 가장 큰 행사였다. 한편 상류 사회가 그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같은 도시에서는 고독한 천문학자가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
정적이 흘렀다. 새로운 행성이라.
-<영화>
"작가로서 출발한 초기에는 대개 자신의 목소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보통 확실히 자리 잡은 어떤 작가의 영향을 받거나 그 작가에게 끌리기 마련이죠. (...) 그 작가가 뭘 하든 그걸 따라서 해보려고 합니다. 그 작가가 사물이나 현상을 어떻게 보든 그와 똑같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점차 그런 애착은 약화되고, 여러분은 다른 작가들에ㅡ그리 강렬하지 않게ㅡ끌리게 되고 여러분 자신의 글에 끌리게 됩니다. 그러한 연습과 변화를 거치다 보면 다른 작가가 끼어드는 일 없이 전적으로 자신의 글을 쓰는 때가 오고, 그러면 비로소 여러분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리게 됩니다."
"아주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사용해야 하고, 생활 대신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뭔가를 얻어내려면 아주 많은 것을 글쓰기에 바쳐야 해요. 그렇게 해서 얻어내는 것은 아주 소소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건 의미 있는 거죠. (...) 거의 아무 대가 없이 그 모든 것을 한 것입니다."
설터는 소설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그것을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소설을 허구를 뜻하는 픽션이라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하며, 모든 것은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작가들을 무시한다. 설터에게는 본질적으로 진실인 이야기만이 중요했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이야기는 소설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소설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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