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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작은 빛을 따라서(권여름)

아름다운 존재 2023. 12. 20. 10:00

꿈은 부러운 것이 없게 만든다.

 

내가 되고 싶은 거 되는 게 최고 아닌가요.

 

아무도 몰라줘도 내 안에서는 빛나는, 많은 이야기가 살아 있는 나만의 왕국. 그것을 나는 완전히 잃어버린 걸까. 혹시 내가 버린 건 아닐까.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도 문을 여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새벽 여섯시 차가운 셔터 끝을 잡아 힘차게 올리는 아빠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여는 시간 여섯시, 닫는 시간 열두시는 법으로 정한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시간이었고, 우리 슈퍼만의 신성한 약속이었다.

 

나에게도 그 사건은 충격이었다. 시간이 약인 건 맞는 모양인지, 조금씩 그 충격의 강도가 약해졌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진 것만은 분명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날 이후 나에게 가장 큰 변화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몹시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공부도, 연극반도 모두. 덩달아 배우 아카데미의 일 역시 사소하게 느껴졌다. 그곳에서의 거절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두렵고 무서운 것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소중한 어떤 것을 놓치는 거였다. 아빠의 여객선 사건 이후 내 몸을 통과한 건 그런 마음이었다.

 

나는 내 몸에서 강력한 화학 작용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뭔가가 내 속의 어떤 것을 건들었다. 무엇이? 개나 소나와 엑스와 오인아 실장의 비웃음, 아빠의 뒤뚱거리는 트럭과 할머니의 팽팽해진 글씨 등등 그간 내 몸을 통과한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합쳐져 내 속을 순간적으로 헤집어놓았다. 꽉 쥐었다가 들고 흔들었다. 감았다가 내동댕이쳤다. 내 마음속은 처참한 폐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헤집어놓은 폐허의 어느 틈에서 약간은 당돌하고 얄밉기도 한 것 같은 누군가가 '까꿍' 소리와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폐허 속에서 발견된 그 아이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오은동을 대신해 또박또박 실장에게 이 말을 내뱉었다.

"연기를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쵸?"

 

하지만 이내 엄마의 느긋한 표정에 안심되었다. 엄마의 느긋한 표정은 언제나 우리를 안심하게 했다. 아무리 큰일이 일어나도 엄마가 느긋하면 우리도 느긋해졌다. 문득 지금껏 벌어진 일의 중심에서 엄마는 줄곧 느긋한 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면 우리는 한껏 불안했을 것이다.

 

"할머니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 아니에요.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 그걸 가장 예쁜 말로 노래처럼 하는 거. 아니, 그냥 할머니 일기 있잖아요. 일기도 시가 될 수 있어요."

 

"또 망하는 거야?"

"뭐가?"

"우리 슈퍼."

엄마는 과일 코너에서 썩은 사과를 골라내며 말했다.

"우리가 언제 망했냐? 또 망하냐고 말하게?"

엄마는 과도로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멀쩡한 곳을 잘라 내게 건넸다.

"너네 먹고, 입고 이 앞에서 놀고."

"문 닫게 생겼잖아."

나의 말에 엄마는 특유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문을 왜 닫냐?"

엄마는 사과 알맹이를 입에 넣고 사각사각 경쾌하게 씹었다.

"머리를 또 굴려봐야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너그 오메가 머리가 비상하니라.'

할머니가 마당을 쓸며 엄마를 치켜세웠던 일이 생각났다. 엄마와 아빠는 슈퍼가 심란한 일을 겪을 때마다 청소를 하고 뭔가를 궁리했다. 지금도 그렇다. 다시 이기기 위해 전략을 짜고, 때론 종목을 바꾸며 변신했다. 외부의 파도에 쉽게 흔들렸지만 마냥 휩쓸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무엇보다 엄마의 이 말이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우리는 망한 적이 없다는 말.'

그 말을 들은 이후로 폐허 오은동은 자주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나도 망한 적 없다.'

 

예전의 나라면 자기 추천은 민망해서 더더욱 싫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방식이 더 멋지다고 느껴졌다. 폐허 오은동은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선택하는 걸 더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가족들을 앞세우고 일부러 혼자 천천히 걸었다. 어두운 공기 속에 가족들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 하나 없는 밤을 보내다 귀가하는 길이었다. 그런데도 이 순간이 무척이나 성공적인 순간이라고 느꼈다.

간당간당. 엄마의 입에서 최근에 많이 나온 단어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 단어는 마치 종소리 같았다. 간당간당...... 간당간당. 위태로운 시간을 버티고, 살아내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울리는 종소리. 그 종소리를 들으며 확신했다. 내일도 우리 필성슈퍼는 망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문 열기를 선택할 거라고 말이다.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양팔을 벌린 것처럼 슈퍼의 양쪽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실패의 순간에 도사리는 성공의 순간들'

우리 삶은 수많은 실패의 연속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얻고 성장하며 변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