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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겨울의 언어(김겨울)

아름다운 존재 2024. 1. 2. 14:31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 글을 쓰면서는 더 많은 거짓말을 한다. 글로 구현된 '나'는 이미 내가 아니라 나로부터 기원한, 나보다 조금 더 낫기를 바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거짓말들을 우리의 상으로 삼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 철학자들처럼, 모두 거짓말을 향해 나아가는 진실한 인간들일지도 모른다."

 

겨울과 함께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가 나를 절망시키면서도 동시에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다고 믿는 것.

 

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여전히 그 어느 겨울에도 그 어떤 시간도 녹이지 못하더라도. 끝끝내 무엇도 녹이지 못하고 사라질지라도.

 

"너는 누구니?" "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나는 읽고,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생각하고 쓰고 생각하고 쓴다.

 

책 300페이지를 읽는 일. 40분짜리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일.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일. 미술관 내부를 아주 천천히 걷는 일. 그러는 동안 나의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마음을 활짝 열어두는 일. 그럴 때 왠지 인류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낀다.

 

우리가 서로의 엽서인 만큼이나 우리는 어디에선가 좌절해야 한다. 삶은 이어지고 현실은 포장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산책, 혹은 여행 같은 산책, 혹은 여행이기를 바라는 산책에는 모두 잠깐의 자기중심적 환상이 있다. 물론 환상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겠냐마는. 나는 광화문의 길쭉한 건물들을 올려다보면서, 지금 저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사람들, 동물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상상력을 탓하면서, 머쓱한 마음으로 엽서의 일부가 되곤 하는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껍데기에 삶을 바치지 말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히 삶을 지켜낼 것.

여기서의 삶은 과정으로서의 삶, 매일의 시간, 바로 그것이다. 어딘가 깃발을 꽂아 놓고 그리를 향해 달려가느라 도달하는 결과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삶은 바로 여기에 있고 그다음 몇 초간에도 있으며 바로 내일에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모든 때에 있으므로 매 시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 되기를 바랐다. 나에 점점 가까워지는 삶, 내가 아닌 부분을 줄여나가고 나인 부분을 늘려나가는 삶, 오래 걸리더라도 그런 삶을 살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매일 또렷이 바라보며 묻는다. 무엇을 원하는가? (스무 살) 읽고 씀으로써 살아남고 싶다. (스물다섯 살) 읽고 쓰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서른 살) 읽고 쓰며 인간의 생각의 집에 속한 아주 작은 티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읽고 쓴다.

 

무엇을 원하는가? 인류가 쌓아 올린 생각의 벽돌에 작은 티끌로 남고 싶다. 철학의 황홀경 속에서 살자. 무엇을 원하는가? 사람들이 덜 고통받기를 원한다. 후원처를 늘리고 고기를 먹지 말자. 무엇을 원하는가? 죽음 앞에서 진짜 벌거벗은 사람이 되었을 때 마지막까지 원할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 정면으로 서는 것이 내가 삶을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나는 마치 운동선수처럼 안으로 들어가는 훈련을 했다. 매일매일 들어가고 나오고, 들어가고 나오면서 핵심을 잊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발버둥을 쳤다. 그렇게 '나의 전문가'가 되었을 때 나는 반쪽짜리 삶을 가까스로 살게 되었다.

 

거대한 뭔가를 놓치고 있었던 게 맞다. 손을 맞잡고 몸을 기대로 곁을 지키며 생각하는 법을 몰랐던 게 맞다. 사람과 사람으로 눈을 맞추는 법을 배우지도 훈련하지도 못해서 기껏해야 파멸적인 연애 관계에서나 할 수 있었던 게 맞다. 이런 것을 삶에서 제외한다면, 오로지 나에게만 골똘히 몰두한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는가? 자신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치는 방 안에서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면서 어리석음만 훈련할 따름이다.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늘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던 뭔가, 말하자면 웃음의 따뜻함이나 사람의 온기나 애틋한 다정함 같은 것을 늦게라도 훈련해야 한다. '고향 없는 인간'이라고 '사랑 없는 인간'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방문을 걸어 잠그던 일을 청산해나가고 있다. 이제 막 삶을 배우기 시작하는 초보자의 어설픈 포복. 연극을 전공한 언니를 생각하곤 한다. 나를 깎아내어 남이 되어보는 그런 일을 언니는 도무지 어떻게 했던 걸까? 그런 숭고하고 끔찍하고 아름답고 절절한 일을? 친절하고 귀여운 언니에게는 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 같은 '남의 멍청이'에게도 따뜻할 수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언니가 농사지어 보내준 옥수수를 먹는다. 이제는 땅에서 뭔가를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우리 언니.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느끼는 언니. 나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언니가 보내준 옥수수를 김이 나도록 쪄서 먹는 맛은 안다. 그게 내가 가까스로 가늠할 수 있는 삶의 지혜. 삶의 생동. 삶의 기운.

 

나의 세포는 수천 억 번이고 교체되고 있고 영원히 고여 있을 것만 같던 시간도 기운을 내며 흐른다.

 

어쨌든 살아내는 모든 사람은 결국 살아내는 사람이 된다.

 

실패와 무마의 순환 속에서 항해는 이어진다.

 

아침 식사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충만의 시간이다. 과일이며 빵이며 하는 간단한 것들을 준비해 책상에 앉는다. 독서대에 끼워놓은 잡지를 책상 위에 올린다. 한 입씩 천천히 먹으며 새로운 것들을 머릿속에 넣는다. 과학 잡지일 때도 있고 철학 잡지일 때도 있고 페미니즘 잡지일 때도 책에 대한 잡지일 때도 있다. 이번 호의 주제는 죽음이다. 천천히 먹는다. 음식도 글도 차근차근 머릿속에 넣는다. 아침 바람이 깨운 정신에는 글이 잘도 들어간다. 밤새 굶주리고 허기졌던 몸과 정신이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찬다. 익숙하고 지겨운 생각이 신나게 박살 난다. 나는 몇 개의 구절을 두세 번 되뇌며 빼먹은 재료 같은 것을 찬장에서 꺼내 온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삶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거의 죽은 상태다."(버트런드 러셀의 말이다.) 근사한 철학자들의 문장을 오물오물 씹어본다. 나는 거의 죽어 있나?

아직은 완전히 죽지 않았으므로 매일 아침 '작은 죽음'에서 깨어나는 일을 축하할 수 있다. 무사히 깨어났고 깨어난 것에 비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성공적인 부활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비탄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아침을 사랑하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축하 만찬은 한 시간가량 이어진다.

 

오늘 저녁에 죽더라도 완벽한 하루를 보내지 못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말기로 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도 생각한다.

다 먹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오늘도 기어코 몸에 연료를 공급하고 정신을 깨웠다. 이 풍요로운 만찬에 어울리는 하루를 준비해본다. 바짝 깬 정신으로 죽기 전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약속들은 그 자리에 있고 나는 웃으며 하나씩 악수한다. 아, 그거면 됐어. 그거면 됐다.

 

기차의 여정은 정확히 끝나기에 달콤하다. 우리는 이 기차가 변수 없이 목표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평소에 어깨 위로 떨어지던 불빛을 마치 아름다운 별인 것처럼 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도 목표지가 정해져 있다면, 끝나는 시간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다면, 곁의 소란과 고통이 먼 메아리처럼만 존재한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안다. 목표지도 시간도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삶이 아니라는 것을. 나의 고통이 나에게서 유리되어 존재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삶이 아니라는 것을.

 

목적지에 도착한 기차에는 이제 나의 자리가 없다. 여전히 떠나야 한다.

 

이 세계가 이렇게 넓다는 것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영역이 실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그 모든 게 인간이라는 것이 아주 기쁘다.

 

통제 밖의 세계. 의미가 없는 삶. 그렇기에 겸손하게 노력하는 마음. 그것은 어느 순간 우리를 해방시킨다. 내가 자기혐오에 빠질 때마다, 나의 못남을 탓할 때마다, 나의 삶에 구멍이 나고 균열이 생긴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내가 나의 못남을 탓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나의 오만일지도 모른다고. 그만 투덜대고, 다시 한 발짝 내디뎌야 한다. 혼돈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가이 맞이하며.

 

공감이라는 찌르르한 뇌의 신호도 무뎌지지 않게 연마하기. 살아 있는 몸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이 나의 정신을 이끌 것을 생각하며 뛰고 추고 읽고 보고 쓰고 만든다. 이것만 할 수 있어도, 아니 이걸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쓰는 글은 나의 신체 감각에 상당 부분 기초하고 있다. 특히 문학적 감수성이 관여되는 글을 쓸 때는 추상적인 감정을 다루기 위해 구체적인 신체 감각을 총동원하며, 시를 쓸 때 이 감각은 극대화된다. 나는 추상을 만지고 맛보고 잡아 늘려보고 삼켜본다. 내 글은 내 몸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나는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유지하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몸의 근육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 찾아내서 원하는 방향과 속도와 강도로 움직이는 것, 늘리고 줄이고 던지고 잡는 것. 현대무용 안무를 추고 있을 때 느껴지는 신체의 무한한 쓰임과 스트리트 댄스 안무를 출 때 느껴지는 정확한 제어 감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글에 스며든다.

 

클래식 음악은 그 모든 소란 속에서도 꿋꿋이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을 때. 한 줄 가사마저도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표현하고 싶지 않은 슬픔에 압도될 때 기대앉을 수 있는 거대한 벽이 거기 있었다. 그 벽이 아니고서는 언어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고 감정에 침잠할 수 없었다. 그것이 잊을 만하면 돌아가게 만드는 클래식의 힘이었다. 나는 에밀 길렐스와 베토벤과 하이페츠와 사라 장에게 학창 시절의 일부를 빚지고 있다.

피아노를 다시 배우면서 그땐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 벽의 작은 무늬들을 살펴보게 됐다. 수백 년간 소리의 세공사들이 빚어낸 형태가 조각보처럼 모여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소리의 형태가 세심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언뜻 보면 파도처럼 출렁이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벽을 더듬다 보면 왠지 언어도 시간도 세월도 아주 오랫동안 초월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멜키아데스처럼 조용히, 잊힐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짜고 기워도 더 이상 촘촘해지지 않는 언어의 체를 내려놓은 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물론 우리는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리는 매일 뭔가를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일을 하러 가고, 피곤해하고, 커피를 들이부으며 일을 하고, 소셜미디어를 구경하고,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고 샤워를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각자 주어진 삶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를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하지만 내가 문득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우리를 위해 지어진 도시에서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문명을 누리며 살아간다. 수도꼭지를 열면 나오는 물과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은 우리의 영광이다. 배설물을 눈앞에서 치울 방법이 있고 지구 반대편까지 빛의 속도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 역시 우리의 영광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드는 순간까지, 우리가 인지하고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이 우리의 영광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광 더미 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반짝이는 영광 더미는 얼마나 불안정한가? 매일의 영광스러운 일상은 툭 건드리면 산산조각 날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태풍과 홍수와 가뭄 앞에서 인간은 아직도 무력하다. 자연은 우리가 이길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인간을 보호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영광 더미는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 오래도록 버티고 싸우고자 할 것이다. 매일의 커피 한 잔을 지키기 위해. 매 끼니 먹을 고기를 위해. 시원한 제철 과일을 위해. 마음 놓고 쓸 충전기와 물을 위해. 일상이 위협받기 시작하면 그제야 우리는 버티기 위한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열심히? 어떻게? 우리는 모두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따뜻한 물을 포기하거나 고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 지경이 되기 전에 기술 개발을 안 하고 뭐했냐고 누군가를 탓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런 준비는 언제쯤 될까? 적어도 커피값이 겨우 100원 올라간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커피값이 네 배 정도로 뛰면 될까? 그러면 모두 값싼 대체제를 찾고는 만족해버릴까? 또다시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길 때 질문이 자라난다.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선택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어느 부분도 당연하지 않다.

 

늘 기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오늘 쓴 텀블러를 세척하고 재활용품을 분류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한숨을 쉴지언정 그런 의식이 큰 문제에 있어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하게끔 도와주는 작은 계기임을 상기한다.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기는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질문이 자라나는 곳에서 시간이 멈추듯, 질문이 멈춘 곳에서 관성이 자라난다.

 

나는 다음 달도 같은 반에 등록했다. 한 달 사이에 더 많은 회원들과 안면을 텄고, 감도 조금씩 되찾았고, 코치님에게 칭찬도 들었고, 수업 후에도 전완근이 아프지 않게 됐다. 긴장과 부끄러움을 익숙함과 교환하며 땀 흘리는 즐거움을 찾아가는 기분이 상쾌하다. 어디 가서 일을 해도 긴장하거나 지적받을 일이 줄어가는 삶에서 이런 미숙함이 반갑다. 얼마나 안정된 삶을 꾸리든지 우리는 영원히 삶의 초보니까. 그리고 초보자의 미덕은 겸손이다. 오만과 습관을 내려 놓고 알고 있는 스텝을 연습 또 연습할 일이다. 배드민턴이야 초보라는 이유가 많은 것을 용서해주지만, 삶은 곧장 흘러가 버릴 테니까.

 

매일의 목표는 그날의 커피를 마시는 것, 그럴 수 있게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엉망이지만, 조금 행복한 엉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