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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박연준)

아름다운 존재 2023. 12. 27. 15:24

모든 흉터는 내 안에서 신이 될 수 있다.

 

자연과 비슷하게 맞춰 지내기. 자연스럽게 살기. 이게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억지로 꾸미지 아니하여 이상함이 없다"는 뜻이다. 무엇을 위해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 상태다.

 

찰스 부코스키가 한 명언이 있다. "노력하지 마. Don't try." 안심이 되는 말 아닌가? 나는 그의 말을 안달복달하지 말고 순리에 맞게 살라, 지나치게 애쓰다 상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사람이 상한다는 건 독해지고 비루해진다는 거다.

무엇이든(행동이든 결과든 선택이든 과정이든) 적당한 거리에서 숨쉬듯 받아들이는 자세, '되는 대로 즐겁게' 해보려는 자세가 좋다. 숨쉬듯 자연스럽다는 것.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 군대에서나 통용될 법한 이 말은 끔찍하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다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장 좋은 건 생긴 모습대로 사는 게 아닐까?

 

헬싱키로 여행을 갔을 때 놀랐다. 북유럽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분위기 때문이다. 이게 뭘까. 그들을 둘러싼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에너지, 적당히 풀어져 있지만 중심은 잡혀 있는 걸음걸이. 나는 그곳에서 어떤 유행의 흐름도 감지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좋을 대로 옷을 입은 듯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뚱뚱하다고 손가락질 받을 만한 몸집의 여성이 레깅스에 재킷 하나를 툭, 걸쳐 입고 거리를 행보했다. 근사해 보였다. 대부분 타인의 모습에 무관심했다. 그들이 '자기'로 충만해 있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타자의 생각과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는가. '체면'과 '치레'라는 말은 관계 속에서 늘 우리를 억압해왔다.

 

헬싱키에서 나는 '멋'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멋이란 자연스럽고 견고하고 건강한 것이다. 자신이 자신임을 좋아하는 것, 자기다움으로 충만한 것! 타자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때, 멋 내지 않을 때 멋이 난다. 그곳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내 안에도 '자연스러운 당당함'이 있음을 느꼈다. 움츠려 있던 자아가 제대로 숨을 쉬었다. 아마도 타인의 시선이라는 통제 아래 있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풀어진 것이리라. 그때 나는 스스로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며칠 동안 내내! 행복했다! 이런 게 행복이라면 행복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멋지다고 생각하는 마음, 내 생김을 긍정하는 자세에서 오는 게 분명하다.

진정한 멋을 위해선 일단 자연스럽게 숨쉬는 게 중요하다. '자연스럽다'는 '자유스럽다'는 뜻을 품는다. 자유스러움보다 더 좋은 상태가 있을까? 어떤 운동이든 호흡이 중요하다. 숨을 참거나 잘못 쉬면 근육이 경직된다. 자연스러운 호흡이 없는 스트레칭은 근육에 산소 전달을 하지 못해 효과가 없다고 한다. 숨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인생을 이완시키는 것도 경직시키는 것도 숨쉬는 자세에 달려 있다. 무리하지 않고 나답게, 편안한 자세로 사는 일. 좋은 삶을 꾸리는 열쇠라고 믿는다. 너무 편하게 말고, 너무 애쓰지 말고, 자연에 맞춰 천천히 살기로 하면 우리가 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을까?

 

쓰는 일은 과정이 곧 결과입니다.

 

그냥 나다운 상태로 꾸준하고 소소하게 빛났으면 좋겠다. 몸에 마음을 가져다 댈 때 그 '꼭 맞음'의 느낌으로. 허리가 구부러질 때 마음이 허리에 가 같이 구부러지고,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땐 마음도 손에 가서 얼른 잡히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놀지 않는 상태로 지내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파스칼 키냐르가 썼던가? 프라하에서 첫 아침은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다. 가장 좋은 아침은 내가 발견하기 전에는 찾아오지 않는다.

 

휴가는 행복을 더이상 유예시키지 않아도 되며 지금 이 순간을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다. 나의 오늘이 어제와 분명히 다름을 선언하고, 비로소 내 의지대로 주어진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이 얼마나 감동적으로 다가오는지 백수가 되어보니 알겠다. 더이상 보이지 않는 도둑에게 귀한 것들을 빼앗긴 채 찡그리고 살 순 없다. 휴가는 '인생'이란 큰 덩어리에 갈라진 틈, 어떤 '사이'에 도착하는 것이다. '사이'에서 우리는 목적에서 놓여나 자연스럽게 머물거나 스밀 수 있다. 쉬자. 주먹을 펴고, 욕심과 걱정에서 놓여나자. 나는 가벼워지고 내 삶은 더 말랑하고 행복해지리라.

치열하게 흐르는 삶. 거센 물결 속에 작고 반짝이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운이 좋은 사람, 눈 밝은 사람만이 이 징검다리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맛있게 건너갈 것이다. 모두에게 그런 행운이, 가능한 많이, 가능한 자주 있기를.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적당히 무관심한 게 좋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인생이 제아무리 화려하게 치장을 한다 해도, 진실은 남루하다는 것.

 

잠깐 들릴 수 있는 동네 책방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삶은 작고, 또 작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선물 자체가 아니다. 선물(마음)을 주고 싶어하는 상대의 '자세'다. 네가 좋아하는 것, 그거 해주고 싶은데, 해줄 수 있는데! 이런 말. 말이 전부다. 그게 선물의 시작이다. '말이면 다가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이도 있겠지만, 글쎄. 나는 어기더라도, 우선 다정한 말을 건네는 이에게 마음이 간다. 내겐 말이 다다. 쏘아붙이거나 소리치지 않고, 나쁘게 말하지 않는 것. 말로 사람을 우선 끌어안는 것, 그게 다정함이다.

 

평온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엄마를 가진다는 것.

그것은 세상 무엇과도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고수는 '춤추듯' 한다. 고수의 동작엔 '억지'가 없다. '쓸데없는 힘'이 없다. 힘을 뺀 듯 자연스럽고 에너지가 넘친다. 몸에 밴 리듬이 모든 동작을 춤처럼 보이게 한다. 그들은 다음 동작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행동한다. 나처럼 아마추어로 발레를 흉내내는 초보자들은 언제나 동작을 만들기에 급급하다. 동작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춤이 아니다. 고수가 되기 전엔 춤이 아닌 것들(두려움, 흉내내기, 어설픔, 고심, 망설임, 진지함) 속에서 춤을 흉내낼 수밖에 없다. 진정한 무용수는 몸, 마음, 음악이 삼위일체가 되어 피어난다. 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고수에게는 동작이 보이는 게 아니라 어떤 근원적인 감정, 뉘앙스, 에너지가 보인다. 음악이 보인다. 춤추는 자는 음악을 몸에 입고 춤춘다. 춤추는 자의 옷은 음악이다!

무대 위에서 새처럼 날아다니는 발레리나를 보고 "나는 왜 저렇게 안 될까"라고 탄식하자 옆에 있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마디한다. "이런 날도둑!" 무용수가 저렇게 춤추기까지 자기 시간과 열정과 땀과 마음을, 그러니까 그의 인생 전부를 지불했을 텐데. 고작 일주일에 세 번, 잠깐씩 취미로 배우는 자가 언감생심 저런 실력을 바라다니! 그게 도둑 심보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내 목표는 발레 무용수처럼 한 점의 군살 없이 완벽한 몸을 가지는 게 아니다. 다만 튼튼하고 곧은 몸으로, '춤추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계속 배워보는 거다. 지금은 춤이 아니라 동작을 만들어보기에 바쁘다지만, 언젠가는 음악을 입고 춤출 수 있기를. 그게 목표다.

뭐든 어릴 때 배워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냥' 하다가 잘하게 되고, 어른들은 '잘' 하려다 그냥 하게 된다. 아이처럼,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냥' 해야겠다. 생각 없이 그냥 하다가 잘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기쁨은 클 테니까. 계속할 것이다. 일주일에 세 번, 발레교습소에 나가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오전에는 발레를 배우고, 오후에는 공책을 펼쳐 시를 쓰는 할머니. 공책을 새것으로 바꿀 때마다 맨 앞에 적어놓는 문구를, 할머니가 되어서도 적어놓을 것이다.

"춤추지 않으면 무용수들은 길을 잃는다."ㅡ피나 바우쉬

시를 쓰는 내 정체성과 무용수의 정체성이 크게 다르다고 생가하지 않는다. 시는 '언어가 추는 춤'이라 믿는 까닭이다. 길을 잃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심연은 아래로 깊고 깊은데, 우주의 광활함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너무 커다란 것, 그것은 볼 수 없다. 너무 작은 것과 마찬가지로.

 

호프 자런의 <랩 걸>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아빠와 나는 집까지 가는 3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을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습관을 오래전부터 지켜오고 있었다. 조용히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북유럽의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고, 아마도 제일 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조용히 함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름답다.

 

스마트폰은 자신은 스마트하면서 사용자는 점점 멍청해지게 만든다. 나는 모든 '불편'을 겁내는 겁쟁이가 되었다. 버스나 지하철 시간을 미리 알지 못하면 답답해하고, 구글 지도 없인 새로운 곳을 헤매지 않는다. SNS로 타인의 삶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며 그들의 삶에 수시로 영향을 받는다. 그들이 가는 곳을 가고, 그들이 먹는 것을 먹고, 그들이 하는 것을 하고 싶다. 온갖 소식, 첨단 기술, 널려 있는 정보들을 수동적으로 들여다본다. 남이 실시간으로 검색한 것을 재검색하고, 검색으로 알게 된 것을 일상에 데려온다. 편리하고 안온한 삶을 얻은 대신 뭔가 큰 것을 잃은 것 같다. 그게 뭘까?

'미리 알지 않는 삶', 알 필요가 없는 삶을 되찾고 싶다.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 결정을 작은 기계에 의존하는 행위가 마땅찮다. 나는 언제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겁내게 되었는가? 버스에서 카페에서 거리에서 여행지에서 그리고 집에서까지, 왜 이 작은 기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나? 이 앵글은 얼마나 답답한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기계를 사용하는 자인가, 아니면 기계가 나를 사용하고 지배하는 존재인가? 이 작은 기계가 나를 대변할 수 있는가, 대변하고 있는가?

한밤중 자유로를 달리는 광역버스에서 내리려고 일어서다 깜짝 놀랐다. 버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좀비처럼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내리려고 일어서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무서웠다. 모두 뭔가에 홀려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버스에서 내리는 동시에, 이제 나는 스마트폰에서도 내려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유용한 기계임은 분명하지만 본말이 전도되었다. 사람이 집에 사는 게 아니라 집이 사람 위에 올라타 있는 광경을 본 것 같았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조금씩 변화하며 느리게 진화한다. 오직 인간만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발전한다. 어떤 발전은 퇴보를 불러온다. 스마트폰 때문에 우리는 바보가 되고 있다. 남이 보여주는 것을 보고, 자극적으로 편집된 텍스트와 이미지에 노출된 덕에 읽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긴 글을 읽지 못하고 남의 의견과 자기 의견을 구분하지 못한다. 진득하게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한다. 일찍 스마트폰에 노출된 어린아이들은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한다. 일도 처리하지 못한다. 스마트폰의 탁월한 기능 때문에 사람들은 24시간 일할 수 있고, 일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온종일 '작은 컴퓨터'를 손에 쥐고 살게 됐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자는 손안에 세상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세상이 스마트폰만한 크기로 작아진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할 수 없는 게 많아졌다. 할 수 없는 일은 바로,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어떤 소식도 '미리' 알지 않고, 알 수 없다는 게 이토록 홀가분하다니. 알 권리보다 더 중요한 게 '알지 않을 권리'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새삼 감격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폴더폰으로 도착한 새 메시지를 하나 읽고 답장을 보내는 일, 독서와 생각, 멍때리기뿐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으니 멍하니 앉아 생각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더불어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궁금해하는 일(생각으로 이어진다)도 생겼다.

쉴 때도, 차로 이동할 때도, 자기 전과 일어난 직후에도 틈틈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나는 말하자면 1분 1초도 '그냥' 쉰 적이 없던 거다. 작은 컴퓨터와 몸을 떨어져 지낸 적 없이, 쉬임 없이 노동하고 있던 것과 진배없다. 스마트폰에 일찍 노출되는 요새 아이들은 일평생 '그냥 쉬는 것'이 뭔지 모르고 살지도 모른다. 혼자 있을 때도 우리는 '그냥' 앉아 있지 못하고 늘 무언가를 들여다보지 않는가(게임, 검색, 메시지, 텔레비전, 온라인 쇼핑, 독서 등).

 

나는 오랫동안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편리하다는 것에 속아,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렸을까? 서서히 거북목이 되어 어깨가 굽고, 두통이 생겼으며, 장기 집중력을 잃었고(이게 제일 문제다!), 이십대 때에 비해 독서하는 시간을 상당히 많이 빼앗겼으며, 독서하다 수시로 방해를 받고, 남의 삶을 들여다보느라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했다. SNS는 좋은 점이 많지만(소통하고 공감하고 중요한 정보를 빨리 알 수 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 계정만은 없애지 않고 두었지만, 중독되면 문제가 된다. 사람들이 무얼 먹고, 입고, 읽고, 쓰고, 구입하고, 사랑하고, 여행하고 사는지 '폭포수'처럼 쏟아내기 때문에 피로해진다. 내 삶이 알지도 못하는 타자들의 영향 아래 놓인다. SNS에 보이는 타인의 삶은 여과된 삶이기에 내 일상과 비교했을 때 터무니없이 좋아 보이기도 한다. 여과지에 걸러진 상태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오해와 이해를 남발하게 된다.

 

세계는 서로 너무나 깊이, 연루되어 있다.

오롯이 혼자의 탓으로 잘못되거나 혼자의 덕으로 잘되는 일이란 없을지 모른다고. 날아가는 나비가 말한다.

 

나는 하루에 6기나 30분을 꼬박, 무언가를 이해하는 데 쓴다. 이해가 가능하지 않더라도, 시간을 들인다. 그게 직업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딱 하루만, 옛날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소용없을지 모르지만.

아빠.

언젠가 바지를 추키며 허리띠를 매다 이렇게 말한 적 있지?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복해 말했잖아. 당신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옆에서 안 들리는 척했지만.

그날의 풍경이 자꾸 떠올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허리춤을 잡고 있는 당신 모습. 밤에 눈을 감으면 내 발목 근처를 휘감고 서성이는 것 같아. 의아해하는 당신 얼굴이.

어쩌다......라니. 모르지.

누가 알겠어요?

그런데 말이지. 모두 당신 책임만은 아니야. 세상에 어쩌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 것 알아. 안 그래야지, 하는데 그렇게 되는 일들.

오랜 시간 사랑했으면서, 악을 쓰며 미워도 한 것. 그거 미안해요. 당신 인생인데 내 인생인 것처럼, 멈춰 세우고 길을 바꾸라고 악을 쓴 것도 미안. 당신이 숨겨놓은 술병을 찾아내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며, 싱크대에 쏟아부은 일도.

지나고 나니 미안하네. 부질없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지. 당신 인생인데 내가 함부로 화를 냈어. 가족이 이렇다니까.

 

그(존 버거)는 언제나 '다른 방식'으로 보고 말한다. "위를 바라보던 눈을 감고 아래로 더 아래로 눈을 돌릴 때 비로소 우리의 눈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의 작은 생명체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껴안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가 이야기할 때, 나는 진심으로 놀란다. 그가 대상을 보는 것은 그것을 다르게 읽어내고 사랑으로 껴안는 행위다.

 

행복은 능동적으로 찾아내고, 배워야 한다. '행복의 교본'이 있다면 나는 먼저 이 책(그리스인 조르바)을 떠올리리라.

조르바는 도덕적이지도 성숙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인물이다. 나는 그저 달리는 심장처럼 구제불능이고, 깃발처럼 자유로이 살다 간 어느 천둥벌거숭이, 드물게 행복에 겨운 영혼으로서 그가 좋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오늘밤 어둠이나 내일 아침 불안에 대해 고민하는 아기는 없다. 아기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판단하지 않는다. 만져보고 판단한다. 모든 위험 요소가 아기에겐 위험이 아니다. 위험을 감지하고 동동거리는 것은 그 옆을 지키는 어른이다. 아이에겐 편견이나 걱정, 유예가 없다. 지금 이후의 시간이 없다. 생이 이끄는 대로 살 뿐이다. 그런 순간은 인생에서 얼마나 짧은가? 짧아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조르바는 이 짧은 시간을 자기 의지로 '길게' 늘여놓은 인물이다. 그는 '늙은 아기'다. 늙었지만 도무지 늙지 않아,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할 일도 없는 사람이다. '행복'은 '생각'을 우습게 따돌린다. 생각과 따로 존재한다. 가령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와 행동하고 생각하는 자' 둘 중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 고민할 때, 조르바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뭘 그렇게 따분한 이야기를 하는 거요? 자, 일어나 일단 춤이나 춥시다!"

나는 아직 베를린에 있다. 나는 너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느라 인생의 대부분을 쓰고 있지 않은가, 회한이 든다. 바뀌지 않을 습성일 테지만. 한낮 30도가 넘는 태양 아래서 춤추는 베를린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면 괜히 부끄럽다. 그들의 그을린 피부와 땀방울을 보며, '노는 정신'을 부러워하며 중얼거린다. 아! 인생은 조르바처럼, 그리고 당신들처럼!

 

사람들 사이의 깊은 관계 속에는 수많은 덫이 있고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려면 그 덫을 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ㅡ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 김지우 역,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