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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취향 육아(이연진)

아름다운 존재 2024. 8. 9. 22:18

네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지켜줄 동안, 너 자신의 행복은 누가 신경 써주지?

누군가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주기 위해선 나도 상대방 못지않게 즐겁고 편안해야 한다는 그 명징한 메시지에 어둑하던 시야가 비로소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의지나 결정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시절이 요란할수록 더 단순해져 볼 필요도 있었다. 그저 자신의 몸과 마음이 느끼는 ‘기분 좋음’을 선택하기로 결심하는 것. 좋아하는 솜이불에 폭 파묻힌 듯 ‘아, 이 느낌이야’ 하게 되는 감각을 하나씩 짚어보는 것. 다른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나 자신과 아이에게 그런 행복을 챙겨주면 어떨까 싶었다.

동동거리다 지쳐 탁 놓아버리는 대신 일상을 좀 더 느슨히 꾸려보기로 했다. 그러자 내가 겪는 모든 감각이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찻잔과 티스푼이 부딪히는 찰나의 영롱함, 봄볕에 보송하게 마른 잠옷에 팔을 끼워 넣을 때의 쾌적함 같은 것들. 꽃샘추위가 기승인 날엔 라벤더 오일을 떨군 더운물에 발을 담그고 오후를 지났다. 아이도 나도 따뜻한 물과 라벤더 향을 좋아하므로 그런 밤이면 꿈도 없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조금 쌀쌀해도 쾌청한 아침엔 맞창을 활짝 열어 목련 냄새 깃든 바람에 머리칼을 맡겼고, 아지랑이 간지러운 오후엔 아이와 창가에 앉아 꿀 섞은 우유를 데워 마셨다. 각자 피곤해지지 않을 만큼의 집안일을 나누고, 마침내 봄비가 내리던 날엔 블루베리와 토마토 묘목을 사다 심었다. 생각난 김에 식구들의 속옷과 베갯잇을 아이가 자주 뺨을 부벼오던 잠옷과 같은 브랜드의 순면으로 싹 바꾸고, 한동안 청결한 향으로 온 가족을 킁킁거리게 만들던 비누를 다시 꺼내어둔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날그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좋으면 좋은 만큼 들여보는 아주 작고 느린 정성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조금씩 조금씩. 아이가 소소한 ‘좋은 기분’에 푹 젖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새싹처럼 씩씩해진 아이는 야물야물 집안일을 하며 느낀 뿌듯함에 엄마를 돕고, 텃밭을 돌보며 느낀 흐뭇함에 물 조리개를 꿰어 들었다. 돌아보면 그렇게 얻은 좋은 기분들이 이리저리 그물코처럼 짜여 아이의 생활과 습관을 엮어왔다. 손 씻기, 책 읽기, 기도하기... 사소하지만 제가 찾은 즐거움에서 그 움직일 힘과 방향을 얻어 이뤄낸 결과이니 그 가치는 천금만큼 귀하다.

어쩌면 오늘의 할 일을 아는 것보다 오늘의 기분을 아는 쪽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날에도 묵묵히 나를 지키며 함께 걸어줄 그런 기분을 찾아내고, 또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일들은 한결 순조로울 테니.

무얼 하든 좋은 기분이 먼저, 숙련은 다음이라 정했다. 일상이 완벽하고 조심스럽기보다 따스하고 유쾌하기를 더욱 바라게 되었다. 아이의 어린 날, 속도와 효용은 잠시 미뤄둔 채 삶이 주는 순수한 감각들을 담뿍 맛보기를. 저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의 온도를 기탄없이 느껴보기를. 그리하여 훗날 자신에게 다가오는 좋은 것들을 성큼 알아채고 웃으며 끌어안을 수 있기를.

 

사랑이 활활 타오르고 봄을 앞두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불어오는 눈이나 찌르는 듯한 비바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길에는 인생의 온갖 작은 아름다움이 뿌려져 있는데.

-루시 모드 몽고메리, <ANNE 6: 행복한 나날>

앤은 여섯 아이를 키우는 소란에도 아름다움은 있으며 삶의 어디에나 행복은 흐른다고 말한다. 예컨대 가족의 미세한 기척, 새로 돋는 잎새의 천진함, 낯선 이의 작은 친절. 아무렴. 어느 시절이고, 어디서고 우리 삶은 민민한 것들 틈에다 이런 반짝임을 숨겨두곤 하니까. 군인이 되겠다는 아들을 걱정하는 다이애나에게 건넨 앤의 말도 참 사랑스러웠다.

“나라면 그런 일로 걱정하지 않겠어. 또 다른 생각에 빠지게 되면 그런 건 잊어버리고 마니까. 전쟁은 과거의 것인걸, 뭐.”

생각으로 생각을 잊는다. 얼마나 그녀다운 마음 정화법인지. 외부에서 ‘엄마’로 현존하는 고단을 잠시 잊고 내 안의 담요를 찾아 살며시 덮어보는 일. 앤은 생각에 빠져드는 일이 육아의 동력이 됨을 내게 깨쳐주었다. 덕분에 몽상에 잠길 때마다 들던 자책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능률이 감상보다, 이성이 감성보다 우월하다는 자격지심을 앓고 있었다. 이성적인 사람들 틈에서 감성적인 내 존재는 쉽게 작아 보였고, 스스로도 그런 성향이 마뜩잖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언제라도 접속할 수 있는 내면이 있다는 것, 견고한 일상 중에도 꿈에 젖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모은 사소한 조각들로 비단처럼 보들보들한 행복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 나 같은 이가 받은 최고의 축복일 테다.

 

엄마는 오랫동안 ‘워킹맘’이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 살림은 물론 시댁과 친정 식구들을 보살피고 월간지를 펴내며 전시회를 열고 틈틈이 봉사도 다니신다.

“엄마는 어떻게 그걸 다 했어요? 우리 어릴 때. 안 힘들었어?”

“복 짓는 마음으로 했지. 그렇게 지은 복 다 너희에게 가기를 기도하면서.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사랑 담아 그저 귀하게 하면 그게 바로 복 짓는 일이 되는 거란다.”

이 대답이 아프도록 좋아서. 이때 드는 아릿함의 끝에 ‘맞아. 복이란 것도 결국 내 손으로 지어가는 거지’ 하는 생각까지 더해지면 순식간에 연한 힘이 돋는 것만 같아서.

언젠가는 꼭 나 혼자서 큰 것만 같은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할 뿐 나는 얼마나 많은 이의 기도와 눈물로 이만큼 자랐는지, 또 살았는지. 모두가 밉다가 그만 내가 제일 미워져버리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날 누군가에게 나는 얼마나 큰 기쁨이고 축복이었는지, 이 낡은 일기장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 끝내 몰랐을 터다.

엄마의 일기를 열고 홀로 앉은 밤. 이 안에 든 소박하고도 위대한 마음을 잊지 않으며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낌없이 사랑하며, 구석구석 온화롭게. 움켜쥐고 살 것도 많지 않지만, 언제고 돌아봤을 때 후회할 것도 없이 홀가분한 모양새로. 그렇게 잘 살고 싶어졌다. 매일매일 따스한 글과 밥과 마음을 지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토닥토닥 정다웁게. 이를테면, 복을 짓듯이.

 

이처럼 들쑥날쑥하지 않은 잔잔한 일상이야말로 살면서 누리는 진정한 호사가 아닐까 싶다. 그 자체만으로 삶에 평온한 힘을 더하는, 그런 생활.

가정이 일정한 리듬을 가질 때 아이의 안정감은 무럭무럭 싹을 틔운다. 고르고 평온한 마음 밭에선 습관과 성격도 한결 곱게 여물 것이다. 일상에 스며 있는 사소한 것들, 그러니까 하원 후 아이가 갖는 또렷한 여유, 일정한 취침 시간, 잠들기 전 도란도란 읽어주는 한두 권의 책, 식탁에서 피어나는 따스한 대화. 이런 것들의 반복으로 가정은 공감이 머무는 안락한 곳이 되어간다.

누구라도 정서가 불안하고 마음 둘 곳 없을 때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지 않을까? 반면 가정에서 규칙적이고 일관적인 생활을 해온 아이들은 이사, 전학, 부모의 이혼 등 돌연한 스트레스 상황에도 자신을 단단히 지키며 유연히 대처할 수 있다.

아이 안에 새겨지는 것도 결국 특별한 하루가 아닌 소리 없는 강물처럼 흐르는 평범한 날들일 것이다. 왜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사진으로 남아 있는 어떤 날보다 사진으로 찍지도 않은 그 숱한 날들을 더욱 애틋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힘으로 일생을 힘껏 살아간다. 하여 나는 믿는다. 그냥 흘러가는 날들, 예측 가능한 보통의 일상을 더 많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될 거라고.

 

아이가 가까운 곁에서 자라는 동안 나는 그저 편안하고 평범한 엄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범하다는 말은 어딘지 부족하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지만, 그게 꼭 나쁜 뜻은 아님을 그렇게 알려주고 싶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은 눈송이의 모양만큼이나 다양한걸. 조금은 다른 속도와 호흡으로 사는 사람도 있는걸. 뭘 하든 한 번에 하나씩 해내는, 느려도 둔하지는 않은. 오래 더듬어 찾은 자기 방향으로 타박타박. 서서히 나아가는 사람.

 

나는 페스탈로치가 강조한 ‘노작 교육’ 개념에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다. 졸음 쏟아지던 교육학 개론 시간. 사람은 Head(지성), Heart(감성), Hand(작업)가 나란히 자라야 한다는 그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거기다 형광색 별들을 주렁주렁 달아가며 나 또한 얼마나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아이를 키우며 그 말을 다시 떠올린다. 시대가 복잡해질수록 삶의 본질을 잊지 말자 다짐한다. 타인을 먼저 챙기고 배려하는 마음, 함께 쌓는 도타운 정, 생활의 감각을 차근차근 익히는 것보다 중한 것이 또 있을까.

컵을 씻어두는 일만으로도 일상이 나를 장악하는 게 아닌 내가 일상을 돌본다는 편안한 느낌이 든다. 아이에게도 이 소박한 아날로그적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세상이 편해질수록 스스로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는 소중해질 테니까. 맨손으로 사람의 일을 해내는 건 정말 건강하고 기쁜 일이니까. 낡아 보여도 인류가 살아온 방식이며 나와 남편이 자란 방식. 그 가치가 아이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라며.

물론 이건 스스로에 건네는 다짐이기도 하다. 주부 생활 십 년 차. 여전히 야트막한 솜씨와 별개로 자꾸만 알게 되는 건 이 끝도 없는 일거리에 어떤 마음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오늘이 달라지고 계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허전한 날일수록 내 앞에 놓인 자잘한 일에 마음을 담아보려 자신을 다독인다. 그렇지 않으면 육아의 감정마저 푹, 가라앉아버릴 테니까.

주어진 사소한 일들을 무작정 견디기보다 장면마다 아름다움과 가치를 부여하고 포착하는 능동성을 가져보라고 벽안의 철학자는 권고한다. 평범한 구절 같지만 무수한 선인과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커다란 솥에 넣고 오래오래 정성껏 졸여내 얻은 말 같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어쨌거나 사소한 일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물론 그렇기에 그 안에서 경이를 느끼기란 쉽지 않고 매일의 사소한 일들 앞에선 너무 쉽게 주눅이 들곤 해도. 그러나 삶은 또 그래서 재미있는 게 아닐까. 곁사람과 곰실곰실한 하루를 나누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소한 일에 또다시 사소한 위로로 맞서는 거침없는 기쁨과 낭만의 조각들을 느껴보는 것. 조금조금씩. 그런 자기 현실의 바탕 안에서 행복한 생활을 빚어가는 일은 그러므로 나날의 아름다움을 최대로 불려가려는 가장 치열하고 간절한 노력일 것이다.

부릅뜨고 노려봐도 일상은 어렵고 삶은 유한하다. 그러나 별 헤듯 가늘게 눈을 뜨고 바라보면 순간은 반짝인다. 바쁜 육아 중에는 종종 잊히는, 그러나 미욱한 나로서는 육아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생의 면모다.

 

육아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본다. 혹시 어른의 보폭과 성미를 아이에게 보채고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본다. 아이는 이방의 땅에 갑자기 떨어진 여행자다. 불과 며칠, 몇 달, 몇 해 전 밀쳐지듯 여기에 왔다.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 부모가 바라는 어떤 모습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지어진 대로 ‘살아내기 위해’ 무수한 적응을 겪어내고 있다.

 

진솔하고 천진한 그(앙리 루소)의 그림을 마주할 때면 어느새 ‘맞아, 우리에겐 각자의 향기와 소용이 있지.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 그 자체로서 이미 프로인 거야’ 하며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친김에 내가 만약 대단한 실력자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너도 나만큼은 해야 한다는 욕심과 완벽주의로 아이에게 더 높은 성과를 원하고 이 쉬운 걸 왜 못하냐며 가차 없는 피드백을 내뱉지는 않았을지. 혹은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나의 업적이나 실수로 오해하며 조마조마 살진 않았을지.

척척박사 엄마로 애써 거듭나 아이의 존경과 경쟁의 대상이 될 이유가 내겐 없다. 나는 아이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무엇이든 편히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보다 앞서 달리지 않으며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서로 놓친 것을 차근차근 깨우쳐주는 사이이고 싶다. 혀에 모터 단 듯 설명하고 채근하며 어른의 위용을 뽐내기는 차라리 쉬울지 모른다. 오히려 아이만큼 키를 낮춰 대상을 바라보고 내 안팎에 솎아내야 할 거친 뿌리나 뽑아내야 할 돌부리가 없는지 살피는 데 더 많은 인내와 배려가 필요함을 절절히 알아가는 요즘이다.

 

그래, 어차피 초보이고 아마추어인데 위축되고 조바심 낼 필요가 있을까.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즐기면 그뿐인 것을. 기준을 낮춰 나 자신을 ‘아마추어 육아러’라 생각하니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작지 않다. 조금씩 어깨가 가뿐해지고 웃음이 늘어났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부모는 음악과 무관한 회사원과 전업주부다. 많은 음악 영재들이 음악 가족 안에서 자라며 충분한 도움과 지원을 얻지만, 조성진에겐 가계의 음악적 유산도, 부모의 올인도 없었다. ‘그림자 부모’로 통하는 그의 부모는 어떤 경우에도 욕심을 내거나 나서지 않았다. 학교에 먼저 찾아간 적도, 아이의 레슨에 간섭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어떤 대학에 지원시키겠다는 등의 뚜렷한 목표도 갖지 않았다. 다만 아이를 믿었을 뿐.

“부모님이 음악을 잘 모르셔서 무조건 나를 지지해주신 것 같다. 덕분에 나 스스로도 나는 항상 잘될 거란 자신감과 믿음이 있었다. 믿어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다.”

쇼팽 콩쿠르 우승 후, 조성진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의 분야를 잘 모른다는 건 과열 방지 장치를 단 것과도 같다. 잘 몰라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아이를 믿는 수밖에 없다. 물론 가만히만 있는다고 될 일은 아니다. 아이 모르게 그 온도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다난한 시행착오와 숨죽인 노고가 필요할 것이다. 물밑으론 바삐 물을 저어도 수면 위에선 평온해 보이는 백조처럼. 그렇게 묵묵히 믿으며 다정히 바라보는 것. 나는 이것을 ‘아마추어의 우아함’이라 부르고 싶다.

 

물론, 우리의 한 조각 에피소드는 영화나 소설의 서사에 비하면 한참 성글고 지극히 현실적이다. 하지만 이 모든 순간순간이 우리에겐 거대한 ‘사건’이었다. 현재를 아우르는 시공간 어딘가에 작은 틈이라도 났더라면, 오늘의 우리는 아주 달라졌을 터.

내 곁의 이 아이도 그렇다. 살아오며 마주친 여러 장면들, 풍경들. 개중에 이해하기 힘들고 더러는 너무 아팠던 기억들조차 이 아이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부족한 내 손으론 억지로 꿰려야 꿸 수 없던 것, 만들래야 만들 수 없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해할 수 없었으니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언덕과 굽이가 여기를 향한 에두른 길이었다면, 후회도 미련도 눈 녹듯 사라진다. 그래, 어쩌면 나는 이 아이의 엄마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내 삶의 모든 성분 중 하나라도 달라졌더라면 말이다. 아찔함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가. 대체 어떤 인연으로 우리는 이렇게 만났을까? 엄마는 그 생각을 하면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어준 모든 것. 그래서 지금 우리를 만나게 해준 모든 것이 다정하게만 느껴진단다. 이제껏 나를 스쳐간 모든 우연과 인연들, 바람결 하나에까지 고마운 마음이 들고는 해.

정말이지 우리는 어디서부터였을까? 이 작은 아이 안에 얼마나 많은 삶과 눈물과 웃음이 들어 있는지 나는 영원히 모를 테다. 오랜 시간, 무수한 씨실과 날실이 쉼 없이 오간 끝에 맺힌 곱디고운 한 점. 아이야, 그렇게 태어난 네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너는 아니?

여기 당신과 나 역시 다르진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다정한 신비다.

 

아이와 처음 만난 봄으로부터 몇 해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이가 혼자 노는 일은 아직 거의 없어서 “엄마 뭐해?”나 “엄마 이것 좀 봐요!”의 순간이 여전히 많다. 종종 귀찮고 특히 무언가에 집중해야 할 때는 화도 난다. 하지만 생각한다. 이 많은 사람 중에, 이 넓은 우주에서, 나에게 이토록 순수하게 다가와주는 이가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나를 향하는 그 애의 꿀에 재운 듯한 눈빛, 보드란 손길, 눈 맞추며 터뜨리는 웃음. 그런 것들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지. 어쩌면 내게 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 오늘 내 곁을 맴도는 이 작은 온기가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칠십구억분의 일. 굳이 그런 확률을 헤아려보지 않더라도.

 

집에서 가장 깨끗한 볕이 들고 예쁜 꽃이 보이는 곳을 아이 방으로 내주었다.

새날 아침이면 찬물로 세수하듯 아이 방을 쓸곤 한다. 창을 열어 맑은 바람과 햇살을 들이고 책장을 살살 닦아내며 생각한다. 아이가 보는 세상이 꼭 이랬으면 좋겠다고. 크든 작든, 혹은 물리적이든 아니든 세상 한구석에 자신을 위하는 공간과 그에 마음을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복스러운 일인가. 그런 사소한 몸짓이야말로 아이 삶에 빛을 던져주는 일이 아닐까? 깜깜한 밤에도 기댈 만한 작은 빛을 북극성 삼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이불 안에서 잠들고 그들의 체온 곁에서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집. 덕분에 ‘인테리어’와 ‘라이프스타일’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집을 이루는 많은 요소 중 우리가 정말 꼭 쥐고 살아야 할 게 무엇인가를 오래오래 곱씹을 수 있었다. 아이가 몇 날이고 웃으며 들어가 지냈던 그 간결한 상자 집 위로는 위대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오두막집도 어렵지 않게 겹쳐 들었다. 수많은 곳에 자신의 아성을 쌓고, 파리에 호화로운 대저택을 거느렸던 노장이 여생을 보낸 바닷가의 네 평 통나무집. 그리고 오랫동안 가슴에 머물러온 그의 당당한 고백.ㅡ이곳이 나의 궁전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해요.ㅡ현재 가장 작은 세계문화유산으로 기록된 그의 오두막집은 작지만 우아하고, 간소하지만 안락하다.

 

집을 보살피는 이로써 나는 요즘 쓸고 닦고 광내고 비우는 일 이상의 무언가를 하고 싶다. 더 많이 사랑하고 느끼며, 우리의 영혼을 한 줄금이라도 성장시킬 수 있는 집. 마치 잘 닦인 거울처럼, 나란 사람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순진무구한 집. 그래서 때로는 나를 위로하고 때로는 나를 일깨우기도 하는. 낙서 가득한 벽이나 뻑뻑한 창틀에도, 녹슨 문고리에도 평생 누구도 앗아가지 못할 우리의 이야기가 어룽더룽 쌓여가는 집. 그렇게 우리와 함께 나이를 먹고 삶의 모퉁이를 돌기도 하며, 저녁의 온건함과 아침의 찬란함을 가득 품게 된 집. 진실, 선함, 아름다움. 그런 가치가 깃든 집의 기억을 아이에게 주고 싶다.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이 많은 아이는 더 튼튼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유년 시절의 따뜻한 기억은 마치 방전되지 않는 배터리 같아서 살아가는 데 오래오래 큰 힘이 된다고. 그렇다면 그 배터리가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곳은 바로 집, 이 아닐까.

식구들과 나의 성정을 오롯이 담아주는 곳. 세상의 때를 다 털어내고 마침내 푹 쉴 수 있는 곳. 오늘 어떤 낮을 보냈든, 어느 거리를 걸었든 우리는 모두 집으로 간다. 내내 아늑하고 따뜻할, 아마도 천국의 부근.

 

따뜻한 잔을 잊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인 내가 정말 힘써야 할 일은 스스로 따뜻하게 있는 것. 내가 식음으로써 아이의 뜨거움을 빼앗는다든지 밍밍하게 흩어버리지 않는 것. 그런 게 아닐까. 이 아침, 작은 부엌에서 피어난 한 줌의 온기가 오늘 아이가 만날 모든 이에게 전해지고, 그 온기가 또 누군가에게 전해지며 자꾸자꾸 둥글게 퍼져나간다면 더욱 좋겠고.

 

생텍쥐페리의 작품에는 장르라는 잣대를 대기가 어렵다. 그의 글들은 그가 딛고 선 시대와 상황을 철저히 관통하며 자아낸 그만의 서사, 그러니까 ‘그’라는 장르 그 자체였다. 돌이켜 생각했다. 삶이란 개개인이 써 내려가는 자기 자신만의 장르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작품들을 품은 유일무이한 도서관인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세상의 금형 틀에 찍혀버리기 전, 조물주께선 이미 천상의 솜씨로 우리 안에 서로 다른 모차르트를 심어두셨음을 잊지 말자고.

어린 왕자의 장미가 그렇듯 마당의 꽃은 ‘꽃들’이 아닌 ‘그 꽃’일 때 비로소 아름답다. 흠이 있어도, 조금 늦되어도 자기 자신으로 피어나기에 당당하다. 얻어다 심은 것, 피다 만 것, 심은 사실조차 잊었는데 방실방실 피어난 것 등 저마다의 속도와 서사가 다양하니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각자 됨. 그 자체로 눈물겹게 아름다운 여기, 우리처럼.

내게서 나온 이 아이 역시 나와 다르게 지어진 존재임을 안다. 그렇게 각각의 장르인 우리가 서로의 다름에 너무 애 닳지 말고 다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사랑하기를. 마치 저 깊은 곳에서 하나의 물줄기로 연결된 두 연못처럼, 따로 또 같이. 서로의 생태계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오래오래 화목하기를.

만약 나의 육아에도 장르가 있다면, 그리고 아이와 나의 합보다 큰 ‘우리’라는 장르가 따로 있다면, 그 장르는 진실되고 아름다운 수필이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육아가 거대한 서사일 필요는 없다. 그저 잔잔한 수필 같은 것이면 좋겠다. 우리의 길에는 화려한 범선이나 금은보화 대신 맑은 샘물과 순한 사슴이 있었으면 좋겠다. 걸음걸음, 어느 오후 산책처럼 호젓하기를. 다만 서로의 손을 잡고 걷는 다정한 길이기를.

 

저녁엔 뚜걱뚜걱 우엉 밥을 짓고 달래 간장을 재었다. 봄이라고 이런 메뉴를 생각해내는 내가 어쩐지 기특했다. 옆에 단정히 앉아 야물게 숟가락을 놀리는 아이를 보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이, 오늘이 바로 기적이구나. 조각 잠 아닌 한잠을 자고, 아이가 콧노래 부르며 학교에 가고, 식구들 모두 자기 자리에 앉아 도란도란 웃으며 밥을 먹는. 한때 너무도 간절하던 일들이 매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지금이야말로 어느날 나의 꿈들이 기적처럼 이루어진 순간이라고.

어쩌면 종일이 꿈인가도 한다. 언젠가 상상 속에 살그머니 그려나보던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것. 이제는 매일 보는 얼굴이 된 그들과 매일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 사랑이 날로 불어난다는 것. 아마도 생시가 꾸는 가장 복스러운 꿈.

봄밤이 여름으로 깊어간다. 어깨에 닿아오는 숨이 일순 곤하기에 이불을 매만져주는데 아이가 반짝 몸을 돌려 말한다.

“엄마, 아까 쉐이크피어(셰익스피어) 좋았어. 내일 또 읽어요. 안녕.”

잊을 만하면 들어서는 낯익은 꿈처럼, 평온하게.

매일 꿈을 이루며 산다. 지금 꾸는 꿈도 계절이 지나는 새에 다 이루어질 터다.

 

모든 일이 완벽하게, 꼭 지금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건 사람뿐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아이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모든 걸, 더 빨리, 더 많이 주고 싶어 하는 걸까? 인공 비료를 쉼 없이 뿌려 크게만 키운 식물은 정말 건강할까? 빠르게 성장하기만 하면 그만일까? 자라는 몸과 머리를 마음이 숫제 따라잡을 시간은 있었을까? 때맞춰 고요해진 무채색 겨울 마당은 어느 계절보다 더 당당하고 홀가분해 보이는데.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요.

고집을 부리지도, 초조해하지도 말아요.

이 순간이 지금 내게 건네는 좋은 것들을 놓치지 말아요.

시간만이 약인 시절도 있답니다.

이것이 내가 지난 몇 해 동안 마당 식구들로부터 받은 응원이다. 마당이 주는 여느 기쁨ㅡ딸기나 토마토 열매 몇 알, 사진 몇 장ㅡ과는 비할 수 없는 귀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아이 밥에는 마음이 담긴다. 아무렇지 않게 밥을 푸고 와락와락 나물을 무칠 때도 엄마라서 갖는 수굿한 마음이 깃든다. 소망보다는 감사로, 솜씨보다는 둥근 정으로. 어디서나 흔히 사 먹는 음식과는 비교 불가. 새겨지는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여 엄마 밥상은 재료가 대단치 않아도, 별난 기술이나 화려한 양념이 없어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작은 접시 몇 개 차리고 둘러앉은 소박한 식탁을 내가 이토록 아끼는 이유.

 

동그란 얼굴, 순한 눈매, 아기새 같은 지저귐,

어쩜 너는 냄새도 예쁠까.

새순처럼 연한 팔다리,

산달바람에도 쉽게 흩어지는 밤색 머리칼.

아가, 내내 그렇게 반짝여줘.

나는 너의 곁에서 오래오래 너를 응원하며 지켜볼 거야.

너의 좋은 날과 궂은날, 너의 젊음, 너의 사랑.

너의 인생을 여기서 언제까지나 바라볼 거야.

엄마는 너의 팬이야.

 

삶에는 취향의 적립이나 향유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니까 생명을 품어내고 보듬어내는 일. 그에 따르는 모든 데데한 행위와 소박한 의지들. 크고 작은 미련들. 아팠던 포기들. 아이에게 가장 가까운 어른인 나부터가 아이야, 세상은 아직 이렇게나 다정한 곳이란다. 진심으로 토닥여주기 위해 한 번 더 참아보는 숨. 눈앞의 사소한 일들을 쓱싹쓱싹 해치워나가며 걱정조차 사치로 전락시킬 때의 통쾌함. 도리 없이 무릎이 꺾이고 눈물이 흐를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 있던 풍경들, 마음들.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 틈으로 많은 것이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다. 목숨처럼 아끼고 지새우며 좋아하던 것들은 어느 날 희미해지거나 때론 더 또렷해지기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는 그 자리를 겸허와 용기로 채워 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자기만의 취향이라는, 혹은 안목이라는. 내가 파둔 그 깊고 안락한 굴에 갇혀버리는 대신 내가 모르는 것들과 비어 있는 부분을 더욱 바라보아야 할 때가 아닐지. 그래야만 독선에 사로잡히지 않고, 호기심 어린 시선과 상상하는 일에 인색한 마음의 구두쇠가 되지 않을 테니.

감사하게도 나는 그런 부류의 좋은 어른들을 적잖게 봤다. 책 속에서, 영화 속에서, 그리고 삶에서. 그리고 나 역시 부족하게나마 그들과 비슷한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어졌다. 자꾸자꾸 내 세상을 넓혀가는 아이 덕분에 취향이란 걸 뛰어넘는, 더 중요한 일이 내게도 생겨버렸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비로소 인생의 희로애락을 조금씩 보고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면, 이 또한 아이와 보낸 사소한 일상의 조각들 덕분이리라. 몸의 영역은 좁아졌지만, 마음의 영역이 넓어졌다. 더 많은 상황과 사람 그리고 내가 꽁꽁 싸매둔 마음의 매듭까지도 언젠가는 공기가 드나들 듯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을거란 믿음이 생겼다. 이젠 또 어떤 세상눈이 생길지 기다려지기까지 하고.

 

평범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담백한 재능이라는 사실도 차츰 알아간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날 때부터 마냥 그 일을 해온 듯 걱실걱실 매일의 삶을 일구는 세상 모든 이의 모든 하루가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에 뒤늦은 존경심이 들었다. 지금껏 새벽하늘의 북극성이나 가시 돋은 여름 장미 같은 무언가를 사랑해왔지만, 이제는 풀꽃 같은 나의 일상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게 하는 일. 그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일은, 아마 없을 것만 같아서.

여전히 나는 팬으로 산다. 지금의 나는 주부이자 팬이며 내 애정의 주요 대상은 집과 우리 가족이다. 하여 적은 재주로 집안을 돌보고 상을 차린다.

나는 여태 살림이 아득하고 수시로 육아가 버거운, ‘삼류 주부, 이류 엄마, 일류 팬’이다. 아,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마침내 ‘덕업일치’의 꿈을 이루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