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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행복해지려는 관성(김지영)

아름다운 존재 2025. 3. 12. 16:08

마음을 다한 ‘지금들’이 삶을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 주리라는 것을 믿고, 내일이 아닌 오늘, 나중이 아닌 지금을 삽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쉽게 울지만 쉽게 웃고, 쉽게 불행하지만 결국 행복해진다. 고작 책 한 권, 고작 밥 한 끼, 고작 문장 하나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의 멋짐에 대해, 매일 감탄하고 감동한다.

 

불행한 일이 많았던 날엔 좋아하는 일을 해 행복의 영점을 맞춘다. 아끼는 차와 함께 읽고 싶었던 책을 보거나, 내일이 없을 것처럼 뛰거나, 집 앞 곰탕집에 혼자 슬리퍼를 끌고 나가 소주를 곁들이기도 한다. 가끔은 미친 척, 좋아하는 사람과 다음 날 오후 반차를 신청하기도 한다.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해 버릇하지 않으면 내일도 행복에 실패할 것을 알기에, 스스로를 기쁘게 만드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고, 다 잘될 것이라고, 불행이 열거된 하루의 끝에도 기어코 ‘그래도’로 시작하는 문장을 더해, 대체로 불행하더라도 끝내 행복해지고야 만다.

 

우연한 행복은 무르다. 타의에 의해 쉽게 망가지고, 스스로도 확실하게 손에 쥘 수 없다. 때문에 나는 보다 적극적이고 단단하게 행복하려 한다. 삶의 디폴트 값으로 불행을 이해하고, 오늘 나의 최종 기분으로 행복을 선택하는 것. 이러한 날들이 쌓이면 마침내 행복은 ‘관성’이 된다. 종래에는 반드시 돌아가고야 마는 최종적 감정 상태.

 

이후 나는 ‘설마’하는 유의 모든 일들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당장 내일 내가 사라지더라도 사실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님을 분명하게 실감했다. 상극인 듯 닿아 있는 ‘죽음’과 ‘행복’의 존재를 동시에 의식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 일은, 일종의 임사체험이었다. 상투적이지만 절대적인 메시지의 체화. 오늘 살아있음에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룰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더 쉽게 행복해졌고, 더 적극적으로 행복하기로 했다.

 

결국 행복은 노력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을 통해 ‘발견’하고 단련을 통해 ‘유지’하는 것

 

에밀리 디킨슨은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행복도 습관이라고들 한다. 더 나아가 행복은 관성이 되어 마땅하다. 보다 본질적인 속성으로 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 고작 책 한 권, 고작 밥 한 끼, 고작 문장 하나로도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보다 견고한 행복을 구축할 수 있으리라.

 

자주 울더라도 결국 웃게 될 것이다. 대체로 불행하더라도 결국 행복해질 것이다. 단언컨대, 고작 __________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그 멋진 일이, 당신께도 깃들길, 아니 당신이 선택하길,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계절이 있다. 같은 온도, 같은 바람도 저마다 체감이 다르므로, 누군가에게는 이미 온 계절이 누군가에게는 아직일 수 있다. 반팔 입은 사람에게는 이미 온 여름이 패딩 입은 사람에게는 한참 아득하듯. 무리해서 타인의 계절에 맞추었다가는 병이 나기 십상이다. 그 대가가 고작 감기 정도라면 차라리 다행일까. 남 눈치를 보느라 생의 크고 작은 관문과 선택에서 내 계절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의 계절에 맞춘, 맞지 않는 옷을 입는다.

오늘도 내게는 바람이 차다. 아무래도 나의 봄은 좀 더 더디게 오려나보다. 내일은 꼭 패딩을 입을 것이다. 그럼 내가 그랬듯, 나의 패딩에 용기를 낸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계절을 찾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작 외투 하나로, 각자의 계절을 찾아가는 ‘4월 패딩 연대’가 이루어질지도.

 

퇴근과 주말을 기다리는 쳇바퀴 같은 일상, 마땅히 이성적이어야 할 하고많은 이유들. 매일매일의 책임과 의무에 충실하면서 어른이 되는 만큼 일탈과 멀어졌다. 삶이 안전해지는 만큼 오늘은 지루해졌다. 숱한 해야 할 것들 속에서 하고 싶은 일, 그것도 순전히 (장래가 아닌) 지금 (가족이 아닌) 나의 (발전이 아닌) 기분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철이 없거나 이기적인 것이었다. ‘일탈’보다는 ‘일상’이, ‘즉흥’보다는 ‘계획’이 조금 더 어른의 단어에 가까웠다.

하지만 가끔은 순간순간의 욕구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도 꽤 괜찮은 삶의 지혜가 아닐까. ‘출근을 해야 해서, 너무 일러서, 너무 늦어서’와 같은 계산 대신 이따금 철모르는 낭만주의자가 되어 보는 것. 간헐적인 즉흥은 삶을 기대하게 한다. 하고 싶은 것들을 상상하고 나열하게 하고, 의외성을 부여해 뻣뻣한 일상을 기름칠한다. 돌이켜보면 적당한 무모함은 아직은 뜨겁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내일 바다 어때?” 정도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굳이 거창할 필요도 없다. 생전 사지 않던 스타일의 옷을 사보는 것도, 걷지 않던 길을 걸어보는 것도, 고작 수요일의 늦은 밤 홀로 곱창에 소주 한잔을 하러 나서는 것도 좋겠다. 그도 아니면 지금 문득 떠오르는 친구에게 전화해 묻는 것은 어떨까. “오늘 뭐 해?” 어쩌면 아주 오래전 잊었던 그 말 말이다.

 

당연한 일상에 정기성과 테마를 부여하니 그럴듯한 놀이가 되었다. 이 별것 아닌 사소한 장치가 요즈음의 일상을 설레게 한다.

 

여행이 별건가. 평일이라는 긴 일과를 마친 후 주말이라는 이름의 여행이 시작된다. 관성에 젖은 일상도 이름 붙이기에 따라 한층 더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아쉬운 대로 일상 여행법을 추천한다. 살고 있는 동네의 새벽길을 걸어본 일이 있는가? 매번 지나치기만 했던 식당의 문턱을 넘어본 일은? 구태여 밖으로 나설 필요도 없다. 배달음식 시켜 먹기, 집에서 영화 보기와 같은 별것 아닌 일상일지라도, 조금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 나름의 멋진 여행이 될 수 있다. 돌아보면 여행이 좋았던 까닭은 대부분 ‘그때 그 장소’가 아닌 여행 중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 기인했다. 사소하지만 귀한 순간들을 알고 놓치지 않고 기뻐하는 것. 하루하루를 최대한으로 곱씹으며 아쉬운 마음으로 놓아주는 것. 요컨대, 설레는 연습. 아무래도 당분간은 그렇게 수련하는 마음으로 지내야겠다.

 

잊고 있었다. 길을 잃을 자유,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만족스러울 때의 쾌감.

 

Free Internet은 편리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길을 잃을 자유와 연결되지 않고 알지 않을 권리를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용도 없는 시간도 필요하다. 죄책감 없이 낭비할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다. 멍 때리기를 조금 더 격상시켜 표현하면 명상, 사색이다. 비워야 채울 틈이 생긴다. 효율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시간을 여백 없이 빼곡이 채우기면 한다면, 그 어느 틈으로도 내적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멍 때리기는 뇌 건강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하니, 이제 그만 해묵은 죄책감을 거두어도 되지 않을까.

 

부디 포기 말라. 마음만 달리 먹으면 매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다.

 

가끔은 어려도 좋고, 오그라들어도 좋다. 조금 더 감정 표현에 관대해질 때 우리, 보다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효율적으로 쓴다는 것이 그만 문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닫힌 마음으로는 그 어떤 감동도 흐를 수 없었다.

 

우리, 어차피 헤어질 테지만 그래도 추억은 남는다. 때때로 다칠지언정 모든 찰나의 추억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사람이고 싶다.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The Last Word)>에서 주인공 해리엇(셜리 맥클레인)은 죽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쓰기 시작한다. 자신이 죽었을 때 듣고 싶은 말들을 앞서 생각하고 그에 맞춰 자신의 삶을 개조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의되고 싶은 키워드를 다음과 같이 꼽았다. ‘가족의 사랑’, ‘동료들의 인정’, ‘선한 영향력’, 자신만의 한 방인 ‘와일드카드.’ 완벽하고 이상적인 엔딩을 위해 그는 각각의 요소에 맞는 재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돈 버는 일이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도 없다. 순수한 애정에 의무가 깃들 때, 때로는 부담이 설렘을 가로막기도 한다. 각각이 역할을 나누어 분화되어 있는 존재 방식도 사실은 썩 괜찮다. 어떤 일은 생각만으로 가슴이 뛰고 시도만으로 삶을 기대하게 한다. 어떤 일은 생계와 무관한 영역에 남도록 지킬 수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어떤 일은, 이 모든 일들이 지속될 수 있도록 일상을 지탱한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도 출근을 한다. 출간 원고 작업이 한창이지만 감사히도 생계와는 무관하니 마음에 여유가 있다. 이달부터는 재즈보컬을 배운다. 영 자신은 없지만, 가슴이 뛴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때로는 부족할지라도, ‘전문가인 척’, 즉 전문가여야만 하는 환경으로 스스로를 내모는 것이 실제 그렇게 거듭나는 지름길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노력이 쌓이면, 열반에 오르듯 그 어느 날 자기 확신이 완성될까. 어쩌면 ‘어른’의 개념만큼이나 추상적인 게 ‘전문가’는 아닐까. 한 살 한 살 나이만 먹고 역할만 늘었지 영영 성취되지 않는 상태인 ‘어른’처럼, 한 해 한 해 연차만 쌓이고 경력만 늘었지 아는 게 많아지는 만큼 모르는 게 많다는 것 또한 깨달아버리는, 영영 성취되지 않는 목표가 ‘전문가’일지도. 무언가를 ‘잘한다’는 것은 ‘잘산다’는 것만큼이나 끊임없는 의심의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더 많은 ‘전문가인 척’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 더 많은 ‘확신의 말’을 해보기로 한다. 부족한 경력, 부족한 실력이지만 더 많은 시험 혹은 기회 앞에 스스로를 세워보고, “~인 것 같아요” 대신 “~입니다”를 쓰며 내뱉은 말로부터 도망치지 않기로 한다. 무엇보다 타인의 용기를 자만으로 폄하하지 않기로 한다. 부족하게나마 ‘척’ 하며 보완해나가는 이들만이 진실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저 오늘 나의 할 일은 내 몫의 줄거리를 성실하고 줏대 있게 써 나가는 것이 아닐까.

 

혼자를 연습하며 비로소 단단해짐을 느꼈다.

 

“행복은 어떠한 상태가 아니라 진행하는 한 방향”이라는 말이 있다. 퇴사를 하든 하지 않든, 선택의 기준은 오로지 내 행복의 방향이어야 한다. 돌아보니 입사하지 않아도 괜찮았듯 가끔 불행해도 퇴사하지 않아도 괜찮다. 100% 행복으로만 가득 찬 일상은 어디에도 없다. 더 이상 남의 손에 이끌려 선택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으니 그저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잘하고 있다 대신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 잘될 것이다 대신 잘되지 않아도 나는 괜찮을 것이라고. 내 마음의 주인이 나인 이상 우리, 다 괜찮다.

 

바쁜 일상에 치여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땀 흘리고, 생각하고, 잘 먹고, 잘 자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쩌면 우리는.

 

오늘의 생활 나아가 삶 전반에 대해 나만의 시선, 기준을 가지고 내 주변을 내게 소중한 물건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관계들로 채워 나가는 것. 행복은 결국 이 단순한 미션의 성취다.

 

“불교에서는 식사도 일종의 수행으로 보고 ‘공양’이라고 해요. 이 상이 차려지기까지의 과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언하며 먹습니다.” 잊고 있었다, 식사 한 끼에도 감사하는 법. 감사도 근육이다. 써 버릇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법정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에서 말했다. ‘즉시현금 갱무시절’, 즉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를 가지고 되씹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를 두지 말고,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최대한으로 살라.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다.”

 

행복은 성취가 아니라 과정이라 했던가. 완벽한 성취의 ‘그날’은 없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 삶의 순간순간은 그 자체로 여정이자 도착지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다시 한번 오늘을 살겠다.

 

‘혼자 여행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면서 나의 세계는 확장되었고, ‘혼자 소주 마실 수 있는 사람’이 되면서 그 세계는 더욱 다채로워졌다. 그것들은 나로 하여금, 언제든 동행에 구애받지 않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언제든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으며-즉 생의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그로 인해 언제든 발 디딘 자리에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임을 자신하도록 했다.

혹자는 ‘고작 소주’로 유난이다 혀를 내두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작 소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좀 멋진 일이다.

 

다만 한 가지 꼭 지키는 것은 그 끝에 ‘그래도’로 시작하는 문장을 하나 더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래도, 아직 괜찮다.” “그래도, 다시 힘내보자.” 딱 그만큼의 긍정과 딱 그만큼의 용기면 대체로 충분했다.

 

모두가, 자신의 마음과 투쟁 중이다. 고민 하나 없는 사람 없고, 불안하지 않은 이 없으며, 우울을 모르는 자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울고 싶지 않은 마음 하나 없다. 산다는 것은 마음을 붙드는 일인지도. 간헐적 기대와 행복에 기대어 불안, 우울과 더불어 사는 과정인지도. 내가 나를,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덜 아픈 마음이 더 아픈 마음을 끊임없이 보듬고 붙드는 여정인지도.

 

그제야 깨달았다.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스스로 강제했던 정서적 자립은 한편 고립이기도 했다는 것을. 나의 불행이 흘러넘치지 못하게 세워두었던 벽은 한편 나를 향해 흘러오는 마음들에게 벽이기도 했다는 것을. 내가 힘들다 말하는 대신 괜찮다 말하기를 택했기 때문에 상대 또한 괜찮아야만 했고, 내가 기대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도 내게 기댈 수 없었다.

 

기꺼이 먼저 짐이 됨으로써, 상대 또한 내게 기대도 좋음을 서로에게 주지시킨다. 어쩌면 진짜 배려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서 참 다행이다.

 

‘마음 방학’이라는 자체 제도를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마음에 방학을 주는 것인데, 어느 날 문득 마음에 빨간 불이 들어올 때 ‘작전타임’을 외치듯 스스로 부여한다. 원칙은 간단하다.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최대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한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염려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잠시 내려놓는다. 내일의 나에게 후일을 맡기고 오로지 ‘지금 나의 기분’만을 생각하는 철없는 이기주의자가 되어보는 것. 무엇을 하고 싶은지, 먹고 싶은지, 끊임없이 지금의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방법들을 묻는다.

어떤 마음 방학에는 무례한 약속을 취소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또 어떤 마음 방학에는 휴가를 내고 경주로 떠났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음 방학은, 느지막이 일어나 먹고 싶은 메뉴로 밥을 지어먹고 읽고 싶었던 책을 보다가 달리기를 하고 돌아와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해야 하는 일’의 부채감에 미뤄 놓았던 ‘하고 싶은 일’들에게 기꺼이 일상의 자리를 내어 준다. 지극히 사소하지만 나를 웃게 하는 것들.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우는 시간은 시든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삶에 애정을 환기시키고 삶과 나를 화해시킨다.

 

마음 방학은 생의 주인공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 일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기대와 의무를 의식적으로 거두어 내고 작은 판단부터 온전히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내려봄으로써, 생활의 부침에 이리저리 틀어진 행복의 기준점을 다시 나로 맞추는 일이다. 이 간헐적이고 사소한 이기적 선택들이 모여 삶의 행로를 조금 더 ‘나의 행복’을 위하는 방향으로 조율해 나갈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