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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마음을 비워둘게요(이애경)

아름다운 존재 2022. 4. 12. 21:19

p.6

삶을 담백하게 만들고 나니 무엇은 붙잡아야 하고 어떤 것은 그냥 흘러가게 두어야 하는지도 보인다. 요새는 대부분 되는대로 놓아두는 편인데 딱히 애쓴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 것 같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될 일은 되더라는 경험치가 쌓여서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나태하게 사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늘 사소한 것에서 온다. 사소한 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인생이라는 미로의 큰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 너무 단순하고 찰나적이라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사소한 것들이다.

내 마음을 위로하는 건, 방향을 제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건 에베레스트에, 심연에, 우주 끝에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내 곁에, 일상에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보통의 언어 속에 그 모든 답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어제보다 조금 더 단순해진 나의 삶에 감사한다.

 

p.41

가능한 천천히, 머릿속으로 단어를 고른 후에 이야기한다. 부정적인 말이든 긍정적인 말이든 말에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p.42

평균적으로 2,000개의 단어만 알면 일상생활을 하며 소통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한다. 기왕이면 내 입술에 담긴 2,000개의 단어가 긍정이면 좋겠다. 가능하면 격려의 단어, 위로를 주는 문장, 상대방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말을 하고 싶다. 나 때문에 마음을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그 다친 마음을 내가 되받아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p.55

삶을 유쾌하게 사는 사람들의 언어는 다르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서일 것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자존감에서 온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들은 상황에 주눅 들지 않는다. 자존감은 우뚝 서 있고 상황은 흘러가니까. 구김살 없는 당당함이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고 그 매력이 그 사람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선배는 패션도 남다르고 취향도 특별하며 개성이 선명해 남이 뭐라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선배의 그런 점이 참 좋다.

 

p.84

그녀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살아보니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려면 천천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대로 가는 것이 현명하다. 한 번에 에너지를 많이 쏟으면 성큼 앞설 수 있을지 몰라도 금방 지치고 주저앉을 가능성이 크다. 조금 늦더라도 꾸준히 가는 게 맞다.

버겁지 않은 속도로 가야 오랫동안 좋은 배우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게 공감되는 것 같다.

 

p.94

가시가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찔리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두거나, 혹여 찔리더라도 상대를 탓하지 않기. 떨어져 나와 내가 받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집중하기. 가시보다는 그 너머 상대의 연약함을 인정해준다면 그들과의 관계가 조금 더 편해질 테니 말이다.

 

p.95

겸손하다’.

겸손은 누군가 나를 칭찬할 때 ... 아니에요하며 머리를 조아리며 수줍게 말하는 태도가 아니다. 내 덕이 아니라 모두 여러분의 덕이고,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은 거라고 머리를 긁적이는 게 아니다.

겸손하다는 건 상대가 이해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뭔가 그런 사정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 데까지 마음이 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더해지는 것이다. 어떤 일에서든 상대방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고 인정하면 내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거나 고집을 피우지 않게 된다.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전에는 겸손을 이렇게 정의한다.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

 

p.106

솔직히 예전에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뛰어남과 나의 기발함과 나의 당돌함과 나의 능력이 더해져 이 모든 것을 이뤄냈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어어어감탄사만 내뱉었을 뿐.

앞으로도 나는 어어어만 하고 싶다. 우연히, 누군가의 도움으로,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라는 신발을 신고 인생을 걷는 게 내 계획으로 이룬 것보다 더 값지고 귀하고 쉽다는 걸 깨달았기에.

 

p.107

내 꿈은 소박하다. 좋은 사람들과 밥 한 끼 먹을 때 망설임 없이 밥값을 지불할 수 있는 마음과 물질적 여유. 사실 큰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은 없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욕심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바람이 소박의 기준을 훌쩍 뛰어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늘 내려놓고 또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요즘은 누군가에게 먼저 베풀면 어디선가 그만큼 채워지는 일이 생긴다. 여유로워 베푸는 게 아니라 베풀고 났더니 다시 채워져 모자람이 없는 것. 나눔과 채움의 순환이 이렇게만 되어도 내 꿈은 이뤄질 것 같다. 여유롭지는 않더라도 모자람 또한 없는 것이니까. 어쩌면 그것이 내가 추구해야 할 소박함일 수도.

 

p.114-115

우리는 상황이 원하는 대로 바뀌면, 나중에 이렇게 되면 뭘 할 거다,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예쁘게 꾸며야지, 돈이 좀 모이면 다른 사람을 도와야지, 남자친구가 생기면 거기 꼭 가봐야지, 좋은 회사로 이직하면 정말 성실히 일해야지, 이런 류의.

생각해보면 그런 일은 평생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나중에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담지만 나중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할 때 나중만약과 같은 단어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의 만약. 하지만 오늘 벌어질 일도 예측할 수 없기에 내일 일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만약을 기다리다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만약이후에 하려고 하는 수많은 계획들은 모두 사라진다. 그러니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떻든 간에 나는 내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지금, 오늘 해야 할 일이 아닐까?

 

Bloom where you’re planted.

당신이 심겨 있는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

 

우리는 늘 다른 땅을 부러워한다. 내가 서 있는 땅은 뭔가 부족하고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어디엔가 심어져 있다면 내가 할 일은 뿌리를 잘 내리는 일이다. 멋진 정원에 심길 때를 기다리지 말자. 내 자리에서,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곳에서, 내가 일하는 그 자리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니까.

 

p.118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삶은 침묵과 도약이 놓인 체스판 같은 것이다. 침묵과 도약은 반드시 공존하는데 우리는 침묵에 의연하지 못하다. 침묵은 원하지 않고 도약하기만을 바란다. 도약의 도약을 원하고 이어지는 침묵은 실패로 여긴다. 그래서 침묵하는 이들에게 이 시간은 지난하고 암울하다.

그럴 때는 고양이가 되어본다. 엎드려 웅크리고 있는 동안 자기 키를 몇 배나 훌쩍 넘을 만큼, 용수철처럼 점프할 에너지를 모으는 데 집중한다. 다른 고양이가 뛰든 날든 상관하지 않는다. 목표를 명중시키지 못해도 다시 웅크리고 다음 도약을 기다린다.

고양이에게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배운다. 액체설이 있을 정도로 유연한 고양이의 부드러움, 어디에 얹혀살더라도 자기가 주인인 양 당당한 자존감, 집사를 부릴 줄 아는 노하우. 모두 고양이에게서 배운다.

 

p.125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변화를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변화는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기 새의 탄생과 같은 것이다. 엄마 새는 아기 새가 잘 부화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감싸줄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부리로 껍질을 대신 깨어줄 수는 없다. 껍질을 부수고 나와야 하는 건, 막을 먼저 뚫어야 하는 건 아기 새다.

 

p.128

늘 무언가가 되려고 삶을 불태우듯 노력하며 살지만 결국 끝에 가서 남는 건 별로 없지 않았던가. 평범하든 평범하지 않든 나다움을 유지하면서 일상을 소중하게 살아내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 같다.

 

p.131

좋은 사람도 때로는 나쁘고 때로는 좋다.”

플라톤의 말이다.

나는 가끔 좋다가 가끔 나쁘기도 하니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참 많다.

 

p.134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내 안에는 상당히 독특하고 특별한 DNA가 있다고. 때문에 나의 인생도 상당히 독특하고 특별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나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비교하는 마음이라고. 비교하기 시작하면 나에게 독이 되고 나의 독특함은 상처를 받아 주눅이 들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몰라도 나는 남과 비교를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눅도 잘 들지 않는다. 그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살뿐이다..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이 본인이 독특하다고 여겼듯이 세상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특별하다. 각자 다른 DNA를 갖고 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외형과 마음의 생김새도 다 다르다. 그래서 비교라는 독을 마시지 말라고 했던 말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적용된다. 그 독을 마시는 순간, 우리의 독특함은 상처를 받고 우리의 영혼은 죽어가게 될 테니까.

 

p.150

혼자라고 생각될 때, 세상에 오직 나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 때 이 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내가 사라지면 우주의 어떤 별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나는 그렇게 누군가와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고. 나는 그만큼 큰 무게와 의미를 가진 사람이며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p.153-154

이런 일들을 내가 직접 겪든 주위 사람들이 겪든 한 번, 두 번 늘어나니 세상 무너지는 큰일로 생각했던 것도 그러려니하고 넘어가고, 예전이면 크게 마음 상할 일도 마음이 따끔하고 마는 경우도 생긴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생각만큼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조금씩 터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모두가 비슷한 무게의 짐을 지고, 문제들을 겪으며 또 풀어나가며 산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게 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친구의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되었다. 어떤 상황이 오든, 무슨 일을 겪든 저런 태도로 살면 되겠구나. 되도록 가볍게, 조금 더 긍정적으로 말이다.

 

p.155

마음의 병이든 몸의 병이든 병이 오는 것은 병의 일이고 이기고 지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이 둘을 분리하면 대응이 좀 더 쉬워진다. 병이 어떻게 찾아왔든 내가 할 일은 내보내는 일이다. 이기려고 애쓰는 일이다.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나는 이기기 위해 애쓰고 이겨내면 된다.

 

p.157

신이 계시니 큰 문제는 아니지요.”

 

그가 숙소 문제를 해결해준 것도 아니었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우리 모두의 마음에 평화가 임했다고 할까? 그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갑자기 모든 상황이 너그럽게 느껴졌다. 소년의 미소를 지닌 아저씨를 통해 천사의 말을 들은 듯 부산스럽던 마음이 안정됐다.

그렇다면 뭐, 다른 숙소를 찾으면 되지. 사라졌던 여유가 그의 한마디에 다시 돌아왔다.

 

p.165

심각하게 생각하면 안 돼, 그러면 버티기 힘들어.”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 것. 물론 그렇다고 인생을 가볍게 여기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깊게 마음을 담아 오랫동안 문제에 머무르다 보면 그 생각에만 에너지를 쏟게 되고 시간을 허비하게 되며 결국 버티는 데 실패한다는 의미였다.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또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친구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인생은 소풍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버티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게 조금씩 삶을 버티는 에너지를 저장해두면 가까스로가 아니라 유연하게버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버티다보면 힘주어 버티지 않아도 잘 살아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p.172

하지만 살아가는 것이 모두 인연 만들기와 절교의 짜깁기라는 걸 깨달으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되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도 딱히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경험하게 된다.

 

p.178

그럴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단순해지는 것이다. 일단 이 우울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살펴본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사건에 의해서인지, 내면의 문제인지 혹은 호르몬 때문인지. pMS 같은 여성 호르몬 때문이라면 대부분 무시하는 편이다. 생리 주기에 따라 감정이 들쑥날쑥하는 것을 수십 년 동안 경험했기에. 그럴 때는 그냥 하고 싶은 걸 하거나 먹고 싶은 걸 먹고 빨리 자는 쪽을 택한다. 가끔은 pMS가 아닌 경우에도 ‘생리전 증후군이라 단정짓고 유쾌한 TV프로그램을 본 뒤 자버린다. 이상하게도 다음날이면 괜찮아지는 때가 많다.

 

p.183

우리는 한순간도 미래를 알 수 없다. 10년 후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1초 후의 삶도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과 만나더라도 헤어짐의 인사에는 되도록 진심을 담아야 한다. 나와 그 사람의 마지막일 가능성이 늘 열려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