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삶
마음가짐의 변화, 정신의 북극성, 내 앞의 태양을 가리지 말게!
네가 그렇게 정신을 쏟을 만한 것이 아니다!
온갖 무의미한 관습과 요구에 맞추느라 사랑을 얼마나 자주 포기해야 했던가! 자신들의 삶에서 지금처럼 중요한 순간에 유일하게 본질적인 것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부차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 되겠는가?
현재 소유한 것에 대한 만족감
자신 이외에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행복의 근원이 아닐까? 물질적인 근심과 불필요한 욕구, 야망과 원한, 환상을 우선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삶에 이웃을 배려할만한 공간이 있을까? 순전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하나 사람은 욕망이 점점 커져서 결국에는 그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은 도덕심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상실하고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따라서 내적으로 욕망의 혼란 상태에 허우적대고, 결국에는 그 결과가 외적인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도덕적인 삶이 자신의 절제에 있다면, 부도덕한 삶은 위험한 욕망에 자신이 지배당하는 삶을 뜻한다.
모든 것은 연장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어떤 삶에서나 법이 필요하다. 내적인 법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법을 존중한다면, 그처럼 자발적으로 법을 준수하고 존중하는 태도만으로도 자유를 향유하기에 충분히 성숙했다는 뜻이다. 엄격하게 적용되는 강력한 법을 내면에 지니지 않은 사람은 자유라는 공기를 호흡할 수 없다. 자유라는 공기는 자칫하면 인간을 자극하여 제멋대로 행동하게 하며, 도덕적인 죽음을 안기기 때문이다. 자유는 존중이다. 자유는 내적인 법에 대한 순종이다. 이 내적인 법은 권력자의 독선도 아니고, 군중의 변덕도 아니다. 명령권을 쥔 권력자도 먼저 조아리는 비인격적인 초월적인 규칙이다. 우리가 자유를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바뀌어가면 된다.
우리 사회생활을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특정한 원인들을 살펴보면, 그 원인들 하나하나에 그럴듯한 명칭을 붙일 수 있고, 그 원인들을 얼마든지 길게 나열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부수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의 혼동’이라는 하나의 일반적인 원인으로 귀착된다. 물질적인 행복, 교육과 자유 등 문명사회와 관련된 모든 것은 그림의 액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제복을 입었다고 수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군복을 입었다고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액자가 그림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그림은 인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의식과 성격과 의지 등 지극히 개인적인 면을 지닌 인간이다. 그런데 액자를 정성스레 선택해 멋지게 꾸미는 동안 우리는 그림이란 존재를 잊고 무시하며, 심지어 훼손하기도 한다.
우리 삶은 외적으로는 좋은 물건들로 가득하지만 영적으로는 황폐하기 그지없다. 엄밀히 말하면 없어도 상관없는 물건들은 주변에 넘쳐흐르지만, 정작 반드시 필요한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의식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하려고 한다면, 마치 생매장당한 것처럼 괴로워할 수 밖에 없다. 산더미처럼 쌓인 하찮은 것들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햇빛도 제대로 받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삶을 되찾아야 한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고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본래의 자리에 되돌려놓고, 인간의 본질적인 진보는 정신의 성장에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무엇이 좋은 램프라고 생각하는가? 화려하게 장식된 램프가 아니다. 정교하게 좍되고, 값비싼 금속으로 제작된 램프도 아니다. 좋은 램프는 밝은 빛을 비추는 램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간이고 시민인 이유는, 우리가 많은 재물을 지녔고 언제라도 재밌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지닌 지적이고 예술적인 교양이나, 우리에게 허락된 특권과 자유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인간이고 시민인 이유는, 쉽게 꺾이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에 있다. 이 말은 오늘날에만 적용되는 진리가 아니라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어야 하고, 자신의 삶을 살며,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어떤 길을 택하더라도 목표를 향해 걸으며, 갈림길에서 방향을 상실해서도 안되고, 불필요한 짐에 시달려서도 안 된다. 당신이 지향하는 방향과 당신에게 남은 힘을 면밀하게 점검하고,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아야 한다. 하루하루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본질적인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짐을 단순화하며 가볍게 해야 한다.
단순함이란 무엇인가
본질, 즉 근원은 내면적인 것이다. 단순함은 일종의 정신 상태이다. 단순함의 주된 존재 이유는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다운 인간, 즉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인 사람은 단순하다.
우리는 각기 다른 선물을 안고 세상에 태어났다. 황금이나 화강암 혹은 대리석을 선물로 받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무나 찰흙을 받았다. 우리 임무는 그런 재료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칫하면 소중한 재료를 망칠 수도 있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찮은 재료로 불멸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다. 예술이 영원한 이상을 형태로 표현해내는 행위라면, 진정한 삶은 고결한 미덕을 일상의 행위로 실천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의와 사랑, 진실과 자유, 도덕심 등과 같은 고결한 미덕을 일상의 삶에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표현해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조건이나 타고난 재능에 상관없이 진정한 삶은 가능하다.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행운이나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런 재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것이다. 순간적인 광채가 낮의 길이를 더해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질이다.
단순함이란 능력은 생물학적으로 물려받는 재산이 아니라 끈질긴 노력의 결과물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바르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과학은 많은 사건이 복잡하게 뒤엉킨 세계에서 소수의 일반적인 법칙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런 규칙을 찾아내려면 그야말로 무수한 암중모색이 있어야 한다! 수세기 동안 지루하게 계속된 탐구의 결과가 때로는 한 줄의 원리로 축약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도덕적인 삶은 과학의 일생과 무척 유사하다. 도덕적인 삶도 처음에는 혼돈 상태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자체를 실험 및 관찰 대상으로 삼아 탐구하며 때로는 실패하기도 한다.
인간은 행동하고, 그때마다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함으로써 삶에 대해 조금씩 더 깊이 알아간다. 삶의 법칙도 알게 된다.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실행하라!’는 법칙이다. 이 목표를 실현하는 데 열중하지 않고 다른 곳에 한눈파는 사람은 살아 있지만 삶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사람이다. 자기중심주의자, 향락주의자, 야심만 가득한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이삭이 패지 않는 밀을 먹는 사람처럼 삶을 소모하며, 삶이 열매 맺는 걸 방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망가진 삶이다.
반면에 고결한 미덕의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삶을 희생함으로써 삶을 구하는 사람이다. 겉모습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독선적으로 보이고 삶을 향한 우리 열정을 억제하려고 만들어진 듯한 도덕적 계율들도, 결국에는 하나의 목표를 지향한다. 우리가 보람 없는 삶을 살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도덕적 계율은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의 방향으로 끌어간다. ‘삶을 낭비하지 말고 결실을 맺으려고 노력하라! 삶을 헛되이 소모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삶을 희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 말에 인간의 경험이 요약되어 있다. 모든 인간이 직접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 경험은 더 많은 희생을 치를수록 당사자에게 더욱 소중한 것이 된다.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때 그의 도덕심은 더욱 확고해진다. 또한 그는 방향을 파악하는 자기만의 방법과, 모든 행위에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자기만의 내적인 규범도 갖추게 된다. 따라서 과거에는 우유부단하고 혼란스럽고 복잡하던 사람이 단순해진다. 자신의 내면에서 형성되어 하루하루 현실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검증되는 이 법칙에 끊임없는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의 판단과 습관적인 행위도 달라진다.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과 숭고함, 즉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분투에 잠재된 신성하고 감동적인 면에 일단 매료되면, 진정한 삶의 매력을 떨쳐내기 힘들다. 그 매력은 강렬한 데다 지속적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어떤 것보다 우선시된다. 권력과 힘의 필연적인 위계도 그런 식으로 조직된다. 본질적인 것은 명령을 내리고, 부수적인 것은 명령을 따른다. 이런 단순함에서 질서가 생겨난다. 내적인 삶의 메커니즘은 군대에 비교할 수 있다. 군대는 규율을 통해 강해지며, 규율은 상급자를 향한 하급자의 존경과 하나의 목표를 향한 모든 에너지의 집중에 있다. 규율이 느슨해지면 군대는 그에 따른 대가를 호되게 치른다. 하사관이 장군에게 명령할 수 없는 법이다. 당신의 삶, 다른 사람들의 삶, 사회적인 삶을 신중히 살펴보라. 어떤 결함이 눈에 띄고 삐걱대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로 인해 후유증이나 무질서가 뒤따른다면, 십중팔구 하사관이 장군에게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단순함의 법칙이 중심을 차지하고 지배하는 곳에서는 무질서가 사라진다.
세상을 떠받치는 모든 힘과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창조물, 지정한 즐거움,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희망을 더해주는 모든 것, 어둠에 잠긴 길을 조금이나마 밝혀주는 모든 것, 힘겨운 삶을 통해 우리에게 숭고한 목적과 무한한 미래를 약속해주는 모든 것. 이런 모든 것이 단순한 사람들로부터 잉태된다. 단순한 사람은 이기심과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데 급급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다른 목적을 부여하고, 삶을 살아가는 기술이 궁극적으로는 삶을 희생하는 방법이란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라
현실 세계에서 표현되는 우리 삶만이 아니라 우리 생각도 깔끔하게 정돈할 필요가 있다. 우리 머릿속은 그야말로 무질서한 상태이다. 나침반도 없이 가시덤불로 가득한 숲 속을 걷고 있는데, 울창한 나뭇가지에 가려 햇빛마저 볼 수 없어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에게 어떤 목표가 있고, 그 목표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란 걸 깨닫는 순간, 우리 생각을 그 목표에 걸맞게 정리한다. 우리를 지금보다 더 낫고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사고방식, 즉 비효율적인 생각, 이해, 판단은 가차없이 배제된다.
따라서 누구에게서나 흔히 눈에 띄는 현상으로, 자신의 생각을 가볍게 취급하는 나쁜 습관을 일차적으로 멀리한다. 일반적으로 생각은 고유한 기능을 지닌 중요한 도구이지 장난감이 아니다. 화가의 작업실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다.
많은 도구가 제자리에 놓여 있다. 달리 말하면, 도구 하나하나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배열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작업실 문을 열고 원숭이들을 들여보내면 어떻게 될까? 원숭이들은 작업대 위에 올라가고, 줄에 매달리기도 하고, 옷감을 몸에 두르고 슬리퍼를 머리에 뒤집어쓸 것이다. 또 붓으로 재주를 부리고 물감을 맛보고, 초상화의 뱃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화포에 구멍을 뚫기도 할 것이다. 원숭이들은 이런 놀이를 무척 재밌게 생각하며, 작업실에서 신나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화가의 작업실은 원숭이들을 풀어놓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인간다운 인간은 그저 존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인간다운 인간은 성심껏 행동하지 메마른 호기심을 채우려고 행동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시도라는 구실을 내세우더라도 그런 호기심은 깊은 감동을 맛보지 못하고, 진정한 행위로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기생충처럼 따라붙으며 우리를 괴롭히기에 서둘러 바로잡아야 하는 또 하나의 나쁜 습관은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분석하려는 강박증이다. 그렇다고 내면의 관찰과 의식의 점검에 무관심해지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삶을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과 행동의 동기를 명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강박적 자기 점검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자신의 삶과 생각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자신을 일종의 기계장치처럼 분석하고 분해하려는 광기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강박적 자기 점건은 시간을 낭비하고 자신의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이다. 산책하기 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겠다며 운동 근육을 해부학적으로 세밀하게 분석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첫걸음을 떼기도 전에 뼈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너에게는 걷는 데 필요한 것이 모두 있다. 그러니까 당장 걷기 시작하라!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네 힘을 분별력 있게 사용하라.’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지나치게 조심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인간이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걸 깨닫는 데는 약간의 양식만 있으면 충분하다.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수단을 적절히 사용하는 합리적인 인간
일탈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따끔한 경험을 통해 배운다. 새로운 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평범한 것이 영원한 것이다. 평범한 것만이 오랫동안 지속되며, 평범함에서 멀어지는 행위는 지극히 위험한 모험을 무릅쓰는 짓이다. 단순한 것은 무가치한 것이란 착각에서 깨어나 다시 단순한 삶을 찾는 사람은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양식은 누구나 타고나는 속성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평범하고 무가치한 능력이 아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단순한 양식은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먼 옛날부터 대중의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오래된 민요와 비슷하다. 양식은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조금씩 축적된 자본이다. 양식은 무척 소박한 보물이다. 따라서 양식을 상실한 사람, 혹은 양식을 상실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똑똑히 목격한 사람만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한다. 양식을 얻고 간직하기 위해서라면, 예리한 관찰력과 올바른 판단력을 유지하려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칼이 부러지거나 녹슬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한다. 하물며 자신의 생각은 얼마나 소중하게 돌보고 관리해야 하겠는가.
삶은 좋든 싫든 우리에게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해야만 어떤 사상이든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존재가 사상보다 당연히 시간적으로 앞서며, 누구도 삶을 살지 않고는 삶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일시적인 여행자인 우리는 어떤 거대한 움직임에 작은 기여라도 하도록 이 땅에 부름을 받았지만, 그 움직임은 우리가 예측한 것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파악한 적도 없으며, 그 궁극적인 목적을 짐작해본 적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역할은 우리에게 부여된 단순한 병사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므로, 생각하는 방법도 이런 상황에 적합하게 적응해야 한다.
인간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든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든, 가르치는 사람이든 배우는 사람이든, 또 손에 펜을 쥔 사람이든 망치를 든 사람이든 진리를 분별하는 건 똑같이 힘들다. 인류가 진보하는 과정에서 얻은 몇몇 깨달음은 분명히 인류에게 큰 보탬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 인류에게 닥치는 문제의 숫자와 범위도 증가했다. 어려움은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인간의 지성은 계속 장애물을 만난다. 미지의 것이 사방에서 우리를 억누르고 옥죈다. 그러나 갈증을 해소하려고 연못의 물을 몽땅 퍼낼 필요가 없듯이,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인간은 몇몇 기본적인 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 기본적인 것들이 무엇일까?
첫째로 인간의 삶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신뢰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허용된 사고의 범위 내에서, 모든 존재물의 기저에 존재하는 것을 믿고 신뢰한다. 우주가 안정되고 합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을 것이란 확고한 믿음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 잠재되어 있다. 꽃과 나무와 짐승이 평온하고 편안하게 공존하며 살아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 어둠을 밝혀주는 아침, 바다로 흘러가는 냇물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는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 존재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믿어도 된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둘째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인간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확보한 것이며, 그것이 자신감의 근거가 된다. 인간에게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가 있다. 자신감을 유지하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감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키워가며, 더욱더 자신의 것으로 확실하게 만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내면에서 자신감을 키워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자신감에서 안정된 에너지와 침착한 행동, 삶에 대한 사랑이 잉태되기 때문이다. 또 자신감이 있을 때 노동도 알찬 결실을 맺는다. 근본적인 자신감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힘을 움직이게 하는 신비로운 원동력이다. 또한 자신감은 우리를 키워주는 자양분이다. 우리 삶에서 자신감은 빵보다 더 중요하다. 따라서 자신감을 흔들어놓는 것은 무엇이든 나쁘다. 비유해서 말하면, 독이지 양식이 아니다.
삶 자체를 공격하며 삶을 유해한 것으로 규정하는 사상 체계는 지극히 위험하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삶을 고통이라 주장하는 생각들이 만연했다. 뿌리에 강력한 부식제를 뿌린다면 나무는 당연히 말라죽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도 이런 부정적인 철학을 억제할 수 있다.
무한의 공간에서 전율하며 살아가려는 의지, 생명의 근원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놓아두면 좋겠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할 수 없다. 삶 자체를 존중하며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편을 가르치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어떤 음식이 건강에 해롭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의 사고방식이 우리에게서 신뢰와 즐거움과 힘을 빼앗아간다면 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인간적인 생각만이 진실된 것이므로 비관주의는 비인간적인 것이다. 게다가 비관주의에는 논리도 없을뿐더러 겸허함도 없다. 삶이라 칭해지는 경이로운 것을 감히 나쁜 것이라 생각하는 수준에 이르려면 삶의 근본을 파악했거나 직접 삶을 만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척 오래전, 젊은 시절에 이 세상을 창조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들이 그런 착각에서 깨어난 것을 보면, 비관주의적인 생각은 잘못되었던 게 분명하다.
다른 음식을 먹자. 우리에게 원기를 주는 생각으로 우리 영혼을 살찌우자. 우리에게 가장 진실한 것은 우리 힘을 확실하게 북돋워주는 것이다.
우리는 신뢰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적정한 삶을 위해서는 희망도 필요하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신뢰의 한 모습이 희망이다. 삶은 그 자체로 결과이고 열망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출발점이 있고, 지향하는 도착점이 있기 마련이다. 삶은 변화이고, 변화는 열망이다. 무한한 변화는 끝없는 희망이다. 모든 사물의 근본에는 희망이 있고, 그런 희망이 인간의 마음에 반영되어야 한다. 희망이 없다면 삶도 없다. 우리를 존재하게 한 힘이 우리에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자극한다. 끊임없이 진보하라고 우리를 부추기는 그 집요한 본능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로는 삶을 통해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로는 삶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삶보다 더 좋은 것이 생성되므로 삶은 그 좋은 것을 향해 천천히 움직여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힘들게 씨 뿌리는 사람이므로, 모든 씨 뿌리는 사람이 그렇듯이 내일을 믿고 기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류의 역사는 꺾이지 않는 희망의 역사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이 오래전에 끝났을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도 꿋꿋하게 전진하고 어두운 밤에도 길을 찾아 나섰던 이유, 또 넘어지고 파산해도 다시 일어서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 포기하지 않았던 데는 인류에게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아야 했다. 희망이 인류에게 힘을 북돋워주는 강심제인 셈이다. 우리에게 논리밖에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어디에서나 최종적인 승자는 죽음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고, 죽음을 맞으며 이 결론을 새삼스레 다시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고, 그 때문에 우리는 꿋꿋하게 살아가며 삶의 가능성을 믿는다.
외형적으로 보잘것없고 초라한 행색을 띠더라도 희망에 경의를 표하자!
물방울 하나가 바다의 존재를 의심할까? 햇살이 태양의 존재를 의심할까? 하지만 우리의 지나친 걱정은 그런 경이로운 일을 해냈다! 굳이 비교하자면, 젊은 학생들의 흥겨운 장난기와 역동적인 열정을 질책하는 걸 주된 임무라 생각하며 항상 투덜대고 불평하는 늙은 교사들이 이와 비슷하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 우리를 둘러싼 신비로운 현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크게 뜨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때이다.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쌓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세상이 우리 두뇌보다 훨씬 크다는 걸 생각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세상이 정말 경이로운 것이라면 틀림없이 미지의 것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세상을 어느 정도 신뢰하더라도 경솔한 짓을 했다고 비난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다행인가!
용기를 되살려주고, 희망이란 신성한 불꽃을 다시 태우도록 해줘야 한다. 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대지에는 다시 꽃이 피며, 새들은 보금자리를 짓고, 어머니는 아기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지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데 용기를 갖고, 나머지는 별의 숫자를 헤아렸던 창조주의 뜻에 맡겨두자. 요즘 같은 환멸의 시대에 낙심한 사람들에게 활력을 되살려줄 만한 말을 나에게 기대한다면, “용기를 북돋우고 희망을 잃지 마라. 대담하게 큰 희망을 품는 사람일수록 거짓을 진실로 믿을 가능성이 떨어진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다,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희망이더라도 가장 합리적인 절망보다 진실에 더 가깝다.
인간이 걷는 길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빛은 선량함이다. 선량함은 혼탁한 세계를 맑게 하고 단순화한다. 선량함이 상처를 붕대로 감싸고 눈물을 닦아주며, 불안감을 가라앉히고 괴로운 마음을 달래주며, 용서하고 화해를 주선하는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맡고 있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역할이다.
단순하지만 보람 있게, 인간의 운명에 딱 맞아떨어지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 ‘믿음과 희망을 갖고 선량하게 살라!’
좋은 종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활기 넘치고 역동적이어야 한다. 신뢰와 희망과 선량함 그리고 삶의 무한한 가치를 실질적으로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당신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당신에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필요성을 알려주어야 한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이 궁극적으로는 해방을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라는 깨달음을 주고,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마음을 키워주어야 한다. 용서를 더 쉽게 하고, 행복감을 덜 뽐내며, 의무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막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
단순하게 말하라
말은 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며, 마음이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형태이다. 따라서 생각이 곧 말이라 할 수 있다. 삶을 단순한 방향으로 개선하려면 말과 글에 신경을 써야 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듯이 단순하게 말해야 한다. 물론 정직하고 꾸밈없이 말해야 한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솔직하게 말하라!
말을 최대한 절제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일을 해낸다. 침묵하는 힘을 키워라. 말을 줄이면 그만큼 당신의 말에 담긴 힘이 커진다.
정신적으로 균형이 잡혀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를 적합하게 선택하는 사람
단순한 예술의 잉태를 돕는 영감의 근원은 우리의 깊은 내면에 있다. 그 깊은 내면은 끝없이 이어지는 삶이란 현실이며, 그런 현실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누구나 이해하는 민중 언어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과 대략적인 운명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해주는 소수의 표현 방식에서 찾아내야 한다. 그 소수의 표현 방식에 진실과 설득력, 장엄함과 불멸성 등 모든 것이 있다.
단순한 의무
쉬운 의무
우리는 매년 서너 번쯤 성대한 축제일을 맞이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평범한 날들의 연속이다. 또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로 극심한 다툼을 벌이는 경우보다는,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의무를 수행하는 날들이 더 많다. 그런데 성대한 모임에서는 그럴싸하게 옷을 갖추어 입으면서, 작은 행사에서는 뭔가를 빠뜨린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나는 “단순한 의무를 다하고 기본적인 정의부터 행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려운 의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거나 불가능한 일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의무를 완벽하게 해내는 걸 등한시하기 때문에 활력을 상실한다.
우리는 단순한 의무를 기억해야 한다. 단순한 의무는 무엇일까? 우리가 개개인의 능력과 자원, 여유로운 시간을 활용하여, 혜택을 받지 못한 불우한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능력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당신에게 남아 있는 작은 부스러기들을 빠짐없이 모아라. 당신에게 남은 사소한 것을 소중히 생각하며 정성껏 간수하라. 오래지 않아, 그 작은 것들이 당신의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 노력을 게을리하면 그 대가를 호되게 치르게 되는 것처럼, 정성껏 노력하면 구원의 손길이 당신을 향할 것이다.
역사와 자연에서 배우고 영감을 얻어라. 역사와 자연이 힘겹게 지나온 과정을 통해 우리는 번영이나 재앙이나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며, 하찮은 것이라고 소홀히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짓이고, 무엇보다 끈기 있게 기다리며 다시 시작할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단순한 의무는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있는 것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멀리 있는 것에는 매력을 느끼고 관심을 갖는다.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열정을 쏟기도 한다. 가능하면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여 먼 곳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참되고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해악한 행위가 행해지면 그 행위를 지체 없이 보상하는 게 중요하다. 범인이 보상에 기꺼이 동참하면 다행이지만, 경험에 따르면 범인의 협조를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자신의 역할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막연한 운명에서도 신성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또한 일련의 경험을 통해 고통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하기에 삶을 사랑하고, 불행한 존재이면서도 고결한 존재인 까닭에 인간을 사랑하며, 감성과 지성과 영혼으로 인류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 것도 중요하다.
달리 방법이 없다. 나보다 훨씬 강한 힘이다!
악을 공격해 파괴하는 전투력. 길가에 버려진 채 잊혀진 생명을 구하려는 어머니의 마음. 겸손한 자세로 지루한 연구를 끈질기게 계속하는 자세.
어ᄄᅠᆫ 것도 그 자체로는 위대한 것도 아니고 하찮은 것도 아니며, 우리 행위와 삶은 그 안에 스며든 정신에 의해서만 가치가 결정된다.
욕구를 단순화하라
단순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아라
즐거움과 단순함은 오랜 단짝이다. 동료와 친구를 단순하게 맞아들이고, 단순하게 만나라. 먼저 열심히 일하라. 그리고 동료들을 최대한 친절하고 충직하게 대하고,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는 험담을 하지 마라. 그럼 분명히 성공할 것이다.
장사꾼 근성과 단순함
육체노동으로 해야 하는 일이나 따뜻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일, 혹은 머리를 짜내야 하는 일 등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우리가 자신의 일에 불어넣는 최고의 것은 누구도 돈으로 보상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똑같은 능력과 똑같은 힘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결과가 빚어진다는 사실만큼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걸 명확히 입증해주는 것은 없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 일을 대하는 마음자세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쪽은 장사꾼 근성을 지닌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단순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대가를 받지만, 장사꾼 근성으로 일하는 사람은 결실을 맺지 못하지만 단순한 영혼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일에 담아낸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앞사람의 일은 모래알과 같아 영원히 아무것도 빚어내지 못하지만, 뒷사람의 일은 밭에 뿌려진 살아 있는 씨앗과 같아 싹을 틔우고 수확물을 거두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적절하게 설명할 만한 다른 비밀은 없다.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기계는 재생되지 않고, 장사꾼 근성으로 해낸 일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들이 성실하고 헌신적인 이유는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에 단순함이란 보물을 간직하고 있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기 때문이다.
돈은 많든 적든 악습을 낳는 씨앗이다. 지성과 친절과 연륜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악행만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당신의 돈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당신의 돈을 분배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까지 타락할 위험이 농후하다.
모든 것에는 적정한 자리가 있다!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상대적으로 소중한 것은 대체로 공짜로 얻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그 보물을 공짜로 나눠줄 수 있어야 한다.
명성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선행
감춰진 것을 올바로 평가하는 능력
내면의 삶, 즉 내면의 세계가 힘을 잃으면, 요컨대 우리가 겉모습에 신경을 쓰느라 내면의 세계를 경시한다면, 겉모습으로 얻은 것만큼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겉치레만 요란한 무용지물, 즉 겉으로는 깃털 장식과 황금줄로 멋지게 꾸몄지만 뱃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당신과 함께하는 사람들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람처럼 단순한 마음을 당신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선행을 베풀며 내면의 성소를 더욱더 정성껏 유지해야 한다.
세속적 사회와 가정생활
가족의식만큼 중요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가족의식에는 사회제도의 효력과 지속성을 보장해주는 크고 작은 미덕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식의 근저에는 과거에 대한 존중이 자리 잡고 있다. 가족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공통된 기억이다. 분할할 수도 없고 양도할 수도 없는 신성한 자본이라 할 수 있는 공통된 기억은 가족의 성스러운 자산이다. 가족 구성원이면 누구나 공통된 기억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기억은 주로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하나는 추상적인 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사실이다. 추상적인 형태에서는 언어, 생각의 방향, 감정과 본능 등에서 공통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물질적인 예에서는 초상화, 가구와 건축물, 의복과 노래 등에서 공통된 흔적이 발견된다. 이방인의 눈에는 그런 흔적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가족의 일원으로 그 흔적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유물이다.
우리는 어떤 상대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의 본래 모습을 견지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세속의식에는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한 면이 많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뛰어난 인물을 꾸준히 키워내는 단순한 가정이 있다고 해보자. 이런 집안에서는 사람과 가구와 관례 등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다. 결혼을 통해서, 혹은 사업이나 사교적 관계를 통해 이 가정에도 세속의식이 스며든다. 세속의식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모든 것이 낡고 부자연스럽고 고리타분한 것이다. 한마디로 현대적인 멋도 없다. 세속의식은 처음에는 비판과 조롱을 자제한다. 그러나 이 때가 가장 위험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적이 바로 옆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세속의식의 속삭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으면 이튿날 당신은 가구 하나를 없애버릴 것이고, 그 이튿날에는 좋은 전통 하나를 제물로 바칠 것이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소중한 위치를 차지했던 가족의 유물들이 하나씩 고물상으로 옮겨갈 것이고, 결국에는 효심도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관습과 달라진 환경에 옛 친구들과 늙은 부모는 낯선 곳에 내던져진 듯 당혹스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에는 그들을 멀리할 것이다. 세속의식의 원칙은 낡은 것을 없애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완전히 달라진 환경이 갖추어지면, 당신 자신도 새로워진 환경을 보고 놀랄 것이다. 주변에는 옛것을 떠올려줄 만한 것이 전혀 없지만, 세속의식은 이래야 옳은 것이기 때문에 만족스럽다고 당신에게 속삭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당신의 착각에 불과하다. 세속의식에 물들면, 우리는 순수한 보물을 하찮은 고철 조각인 양 내던져버린다. 하지만 새롭게 받아들인 환경에 곧바로 어색하게 느껴지고, 그 상황의 웃음거리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어서 처음부터 당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내세우며 가족을 지키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후회하게 된다.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과 동시에 세속의식의 선동에 굴복한다. 부모 세대는 절제하는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지만,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의 판단에 가부장적이라 여겨지는 삶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대는 큰돈을 들여서라도 최신 유행을 쫓아가려 애쓰고, 유용한 물건들을 헐값에 팔아버린다. 우리에게 ‘기억해줘요!’라고 애틋하게 호소하는 물건들로 집을 꾸미지 않고, 아무런 철학도 담기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물건들로 가구를 채운다. 아, 내가 착각했다. 그 물건들은 어떤 철학도 담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안이하고 피상적인 삶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그 물건들의 곁에 있으면 세속의식에 찌든 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허례를 중시하는 삶, 호화로운 삶, 혼잡스런 삶과 밀접히 관련된 물건들이다. 가끔 그런 물건들을 잊으려고 노력하더라도 그 물건들은 우리 생각을 되살려내며 다른 의미로 “기억해줘요!”라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때 “기억해줘요!”는 클럽과 극장과 경마장에 갈 시간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가정은 구성원들이 바깥에서 한참 동안 나돌다가 잠깐 휴식을 취하며 머무는 임시거처로 전락해버린다. 집에 오랫동안 머무는 습관은 바람직하지 않다. 집에는 우리 영혼에 말을 걸어줄 만한 영혼이 없다. 잠자는 시간과 식사하는 시간이 끝나면 즉시 집을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등진 사람처럼 무력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외출하는 걸 광적으로 좋아해서 자신의 사방에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세상이 멈춰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한두 명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집에만 죽치고 있는 걸 가장 싫어한다. 그들은 집에서 지내는 걸 죽음보다 싫어한다. 집에서 공짜로 빈둥대며 즐기는 것보다, 돈을 들여서라도 밖에서 지루하게 지내는 걸 더 좋아한다.
우리 사회는 조금씩 양 떼와 같이 무리 짓는 삶을 향해 다가간다. 그런데 양 떼와 같은 삶을 공적인 삶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양 떼의 삶은 양지에 모여드는 파리 떼와 비슷한 삶이다. 인간의 세속적인 삶은 어떤 경우에나 거의 비슷하다. 이런 보편적인 진부함이 공공심의 본질 자체를 해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변한 게 분명하다. 사람들이 불량한 욕망에 굴복하고, 단순함과 단절했기 때문이다.
식구가 많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아야 가정생활이 꾸려지는 것은 아니다.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는 먼저 가족의식이 있어야 한다. 작은 마을에도 고유한 역사와 윤리적인 흔적이 있듯이, 작은 가정에도 고유한 영혼이 있을 수 있다. 그 영혼을 장소의 정령, 집안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기운 등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여하튼 가정은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세계이다.
어떤 집은 문을 열자마자 따뜻하고 자애로운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어떤 집이든 집에 있는 물건들에서 집주인의 마음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방주인의 인생관은 책이나 사진을 정돈하는 방법에서도 읽혀진다. 어떤 방에서는 삶의 즐거움과 활력이 느껴진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안식처를 만들자.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고, 사랑이 은밀히 속삭여지는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자.
단순한 아름다움
하루살이 꽃을 치장하는 데도 영원불멸한 산을 꾸밀 때와 똑같은 정성과 사랑을 쏟은 창조주의 뜻
어떤 존재의 아름다움과 시적인 정취는,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집과 식탁과 옷차림에는 우리의 의도가 담겨 있어야 한다. 미적 감각과 선의만 있으면 충분하다. 인간은 뭔가를 만들면, 그 안에 자신의 전부를 담는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것을 기호로 바꾼다. 이런 의미에서 옷은 단순한 덮개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 기호이다. 몸단장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수록 그 가치가 높아진다. 몸단장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려면 자기만의 참된 멋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돈을 쏟아붓더라도 그 몸단장이 당사자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 가면에 불과하다. 그 자체로는 아름답게 꾸몄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는다면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작가 카미유 르모니에의 글 인용
자연은 여성의 손가락에 매력적인 능력을 부여했다. 여성이 본능적으로 배우는 것으로, 누에게 명주실을 자아내고 민첩하고 명민한 거미가 거미줄을 만들어내듯 여성만이 지니는 능력이다.
여성은 자신만의 우아함과 순진함을 표현해내는 시인이다. 여성은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욕망에 그 신비로움을 입힌다. 그런데 여성이 다른 부분에서 남성에 필적하려고 보여주는 재능들은, 몸단장을 위해 작은 천 조각에 쏟는 독창적인 발상과 착상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나는 여성의 그런 능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존중되기를 바란다. 교육이 각자 고유한 정신으로 생각하고 고유한 마음으로 느끼는 방법을 가르치고, 순응이란 원칙을 위해 억눌리고 획일화되던 내면의 잠재된 자아와 개인적인 작은 사건을 겉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듯이, 훗날 어머니가 될 어린 아가씨가 몸단장이란 미학을 일찍부터 탐미하며 자신의 옷을 직접 짓고, 나중에는 자식들에게도 직접 옷을 지어 입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여성은 자신의 솜씨와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걸작, 즉 ‘드레스’를 즉흥적으로 지어내며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표현하는 능력을 일찍부터 키워가야 할 것이다. 그런 드레스가 없다면 여성은 누더기 더미에 불과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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