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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지적 생활의 즐거움(필립 길버트 해머튼)

아름다운 존재 2023. 2. 3. 15:36

지적 생활은 일종의 투쟁이며 훈련입니다. 지적으로 생활하는 기술이란 유리한 환경을 발판삼아 발전해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에 필연적으로 얽혀 있는 숱한 사정과 제약 속에서 우리 자신을 극복시켜나가는 행위입니다. 이로써 지성은 풍요로워지고 강인해집니다.

 

지적 생활이 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 없이는 지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연마해야 합니다. 타인의 삶에 눈길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명성을 얻겠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매일 정해진 계획에 쫓기는 생활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적인 실수와 실패에서 허무를 맛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적인 결여 속에서 눈부신 지성이 태어난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의 지적인 노력을 통해 꿈꿔왔던 완성된 삶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다는 확신을 안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적인 탐구의 매력은 여기에 있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우리는 우주의 영원한 법칙을 해명해내고 있으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대해 확고한 신뢰를 갖게 됩니다. 그런 시간들이 축적되어 우리는 지성의 본질, 나아가 이 세계를 축조한 신의 섭리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한층 더 몸 상태가 건강하게 유지되어야 했기에 바쁜 시간을 쪼개 개인적인 시간을 만들고, 그 시간에 다른 모든 활동과 만남을 포기한 채 육체를 가다듬은 것입니다.

 

지적 생활은 결국 신경조직에서 행해지는 활동입니다. 신경조직이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몸을 움직여야 됩니다. 육체를 단련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우리가 참아내고 수용할 수 있다면 그 효능은 지금껏 발견된 그 어떤 진정제보다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걸출한 지성의 소유자라고 해도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혀놓으면 마음이 지쳐버립니다. 책상과 마주보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 능력의 십분의 일도 끄집어내지 못합니다. 책상은 지적 생활의 모태가 아닙니다. 책을 펼쳐놓는다고 해서, 펜과 씨름한다고 해서 지적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적 생활은 말 그대로 생활 전반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고하고, 창작하고, 영감을 얻는 매순간입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감히 이렇게 단언합니다. 우리 모두는 지적 생활에 최적화된 두뇌를 타고났다고. 모든 인간은 지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진화되어왔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충분히 잠자고, 하루 중에 잠시라도 신체를 단련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몇 년 간 12시간 가까이 공부든, 저술이든, 분야에 상관없이 지적 활동에 매진한다면 엄청난 재능과 능력을 개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활동은 절대로 우리 몸에 아무런 이상도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자신합니다.

 

칸트는 우선 생활을 연구했습니다. 자기 몸과 철학자라는 직업에 가장 적합한 생활패턴을 찾아내고자 30년 넘게 스스로 관찰하며 조금씩 진보시켜나갔습니다.

 

칸트는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잠들었습니다. 몸에 하루 동안 주어지는 시간의 총량을 정확히 입력함으로써 집중할 때와 휴식할 때를 명확히 구별했습니다. 칸트에게 육체는 기계였습니다. 기계가 순조롭게 작동하려면 끊임없이 기름칠을 하고 돌봐야 하며, 설계도대로 관리해야 합니다. 칸트는 자기 몸을 작동시키는 최고의 기술자였습니다.

 

그는 건강이야말로 철학자로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임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력을 다해 건강을 유지하고자 힘썼습니다.

 

칸트의 생활에는 세상이 말하는 일반적인 습관이나 취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몸이 요구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위대한 두뇌 노동자는 세상 사람들의 습관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지적 생활에는 희생과 절제와 남다름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생활습관에는 다수의 인간이 요구하는 편리성이 가득합니다. 대중이 만들어낸 편안한 일상은 사실 진정한 편안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태이자, 지나친 휴식, 또는 도가 넘치는 향락입니다. 최고의, 그리고 최선의 지적 생활에는 중대한 방해가 될 뿐입니다.

 

칸트는 자신의 지적 생활에서 수면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취급했습니다. 양질의 수면을 확보하기 위해 매순간 조심했고, 계획대로 몸을 움직였습니다. 날씨와 계절에 상관없이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나선 이유도 숙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몸에 맞는 습관들을 찾아내 칸트처럼 장기간 실천한다면 각자의 재능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지적 생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행복은 내 안의 질서들로부터 만들어집니다. 좋은 습관이 행복을 불러옵니다.

 

내 몸에 맞는 나만의 습관이 필요

 

양질의 지적 생활은 절대적인 고요함을 가져오는 습관을 원한다는 점입니다. 차분하게 정돈된 생활에서 지적인 습관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습관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만의 습관을 만들어 철저히 따른 인고와 절제와 목표의식은 칸트로부터 배워야 될 최고의 인생철학입니다. 독립된 인격은 독립된 생활에서, 독립된 정신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남들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말을 하고, 법을 어기고 정부를 무시한다고 해서 독립된 인격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격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은밀한 개인적 일상에서 인격의 독립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두뇌활동에 나서고 싶은 분이라면, 지적 생활을 동경하고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생활을 관리해야 합니다. 나만의 규칙을 세워야 합니다. 그 규칙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합니다. 각오가 필요한 일입니다. 지적 생활은 동경이 아닌 각오에서 출발합니다. 특히 권위 있는 지적 생활을 참고하여 현명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관리하고 만들어나갔는지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대신, 무작정 따라해서는 곤란합니다.

 

나에게 맞는 생활습관을 찾아내 지켜나가는 것

 

요리는 지적 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일종의 과학입니다. 우리 목적에 적합한 음식을 만들고, 적당량을 섭취하는 일련의 습관은 우리가 익혀야 될 과학 중의 과학이며, 인류를 현재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낸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동은 어떤 활동과도 맞바꿀 수 없다는 굳은 신념이 필요합니다. 날씨에 상관없이 하루 한 번은 밖으로 뛰어나가 맑은 공기를 쐬고, 사람들 곁을 스쳐지나가야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육체를 단련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중요한 지적 업무를 잠시 내버려둘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합니다. 이런 신념 없이는 지적 생활이 요구하는 건강한 육체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지적 생활은 건강이 오랫동안 유지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건강도 실력입니다.

 

충분한 에너지를 얻으려면 대량의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빈번하게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노동 외의 시간에도 몸을 강제로 움직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대기에 신체를 노출시켜야 합니다. 매일 신체를 외부환경에 노출시킴으로써 우리 몸은 건강해집니다.

 

지적 노동자로서 야망이 컸던 홈볼트는 허약한 육체에 발목 잡히는 일이 없도록 인내심을 갖고 강도 높은 육체 개조를 시작했습니다. 운동을 통해 몸이 피로에 익숙해지도록 연습한 것입니다. 장차 그의 앞날에 펼쳐질 위대한 탐험은 바로 이 마음가짐에서 출발했습니다. 홈볼트의 경우 운동이라는 강제적 습관이 새로운 문명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특수한 지적 목표를 촉진시키는 훌륭한 자극제로 활용되었습니다.

 

핵심은 자기계발입니다. 어린 시절 반항아였든 모범생이었든 훗날의 결과는 자발적인 훈련이 어느 정도였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학교교육은 부차적 수단에 불과합니다.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기 나름의 성숙과정과 발전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그대로 흡수해 학교 내에서 수재로 불린 사람들도 훗날 기대만큼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때도 중요한 건 나름의 성숙과정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교사가 가르치는 것만 익히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 외에 자신이 추구하는 또 다른 배움의 목표를 설정하고 덧입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장차 어떤 인간이 되느냐는 그의 정신력에 달려 있습니다. 지적 생활을 꾸준히 추구하려는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똑똑한 반항아일지라도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못합니다. 같은 이유에서 전세계에서 시험성적이 제일 좋은 사람이더라도 부여되는 지적 활동에 끌려가는 자는 결국 스스로를 잃고 맙니다.

탁월한 지적 생활자들은 자신만의 지적 활동을 구축해왔습니다. 프랭클린은 공교육이라는 지적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자발적인 지적 활동으로 이를 충분히 만회시켰습니다. 아무런 지적 훈련 없이 두각을 나타낸 지식인을 나는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적 생활도 쾌락을 추구합니다. 이 쾌락은 육체의 쾌락과는 달라서 매우 독특한 기쁨입니다. 지적인 쾌락은 훈련에서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인내를 기르고 정신을 단련시킵니다. 육체적 훈련이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라면 지적인 훈련에서는 고통이 곧 기쁨입니다.

 

나의  지적인 잣대를 활용하여 나에게 도움이 되는 책과 읽어봐야 소용 없는 책을 가려낼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적 활동, 특히 글을 쓴다는 건 준비된 자료와 나의 생각을 하나로 융합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출해내는 과정입니다.

 

지적 훈련의 기준은 내적인 법칙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이 훈련의 주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훈련을 쌓는 주체성이 요구됩니다.

 

훈련은 누구나 괴롭습니다. 그 괴로운 시기에 인내했느냐, 상대보다 한 번이라도 더 그 같은 고통을 이겨낸 경험이 축적되었을 때 그의 노력은 승리로 이어집니다. 고통에 대한 단련, 포기하고 싶다는 유혹을 물리친 경험이 승부의 절정에서 상대보다 앞선 정신력이 되어 승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정신력의 차이가 승패를 가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정신력의 유무는 하늘과 땅 차이에 비할 수 있습니다.

 

성취하고 싶은 소망이 있을 때 인간은 그 소망을 위해 자제력을 발동시켜 관능의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 훈련을 통해 삶이 주는 거대한 중압감을 견뎌내는 정신력이 만들어집니다. 정신력은 자신을 뒷받침해줄 강인한 육체를 만들어냅니다. 강인한 육체는 강도 높은 지적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두뇌를 책임집니다.

 

세상엔 수없이 많은 요리가 있지만, 음식을 만드는 방법만 높고 본다면 결국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재료끼리 주고받는 맛의 뒤섞임을 알고 있을 것, 둘째는 재료에 따른 화력의 사용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물리적 환경뿐 아니라 심리적 환경에서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의 최종 목표, 즉 정신적 향상은 과학지식의 총량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뭔가 새로운 지식을 배우게 되면 반드시 지성 전체의 구조에 변화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화합물이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성분에 의해 다시금 변화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지식을 넓혀나가는 것은 장점과 단점을 모두 안고 있습니다. 열성적인 교육론자들은 배워서 나쁠 게 없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배운 것이 내 안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적 생활자들은 과도한 지식습득으로 자기만의 개성을 잃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지식의 축적이 지적 생활의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는 배운 것을 나만의 개성으로 새롭게 배출하기를 원합니다 그 길에서 지식은 매우 중요한 이정표인 동시에 때로는 무지가 전에 없던 창의적 발상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지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을 자연스럽게 융합시키는 것이야말로 지적 생활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예프케는 다양한 분야를 탐구하고 정통했으나 굳이 힘들게 찾아내려 노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분야까지 탐구하는 미련함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입니다. 이는 뿔을 찾으러 떠났다가 귀를 잃어버린다는 유대인 속담에 나오는 어리석은 낙타를 떠올리게 합니다.

 

당신의 조부는 지적 생활 앞에서 절박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몰라서 초조해진다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두려움을 모르고 사셨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분은 매일 하고 싶은 공부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쫓기는 사냥감의 심정으로 지식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식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이 찌듯 그분은 즐기듯 지적 영역을 탐구했고, 세월이 차곡차곡 쌓여감에 따라 지성인으로서의 발자취가 확대되었습니다.

당신의 조부는 자신이 지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타인과의 비교로 불행한 압박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분은 고대 로마인처럼 라틴어를 아름답게 구사하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라틴어 실력이 부족하다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만일 당신의 조부가 고대 로마인을 만나 그가 하는 말을 반밖에 알아듣지 못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분은 당대 라틴어 전문가들과 비교해 월등한 능력을 보여주셨으나,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라틴어는 지적 즐거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조부께서는 누군가와 경쟁하려고 서재에 틀어박혔던 게 아닙니다. 세상의 강요로 서재에 갇혔던 것도 아닙니다. 고대 로마의 저술가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책을 읽었고 라틴어를 공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조부는 철저히 혼자였으나 외롭지 않았습니다. 책장에 남아 있는 위대한 지식인들의 생명이 친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적 생활은 정통함을 추구했을 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한 가지 분야를 정하고, 이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지 않고 꾸준히 즐겁게 연구하는 지적 생활은 작은 땅에 만족하며 토지를 경작해 질 좋은 무공해 농작물을 수확하는 농부의 삶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농을 꿈꾸지 않습니다. 내 육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넓이는 밭을 일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물이 그 밭에 뿌리내리게 되기까지 땀방울을 흘리는 것, 이보다 아름다운 지적 생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뇌는 쓸데없습니다. 우리는 본능으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길로 망설임 없이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한 과목, 또는 두 과목으로 압축해 지식을 쌓고 교양을 축적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조상들은 하나를 공부했고, 여기에 정통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여섯 가지를 공부하고, 그중 단 한 분야에도 정통하지 못하는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은 배움을 실천에 옮겨 자기만의 사상을 갖추려고 노력했다면, 우리는 배우는 과정에 집착하여 '배웠다'는 과거형을 자랑삼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부디 그들이 접한 수많은 과목들 중 하나를 선택해 생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연구에 매진해달라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바람입니다.

 

지식의 가치는 유용성이 전부는 아닙니다. 연구자가 전공을 선택함에 있어 정부가 선택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연구자는 오직 자기 목소리, 자기 생각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분야가 돈이 되는지, 이를 전공했을 때 교수가 될 확률이 높은지, 나중에 훈장이나 메달 수상자가 될 수 있는지를 따지게 된다면 이미 순수한 지성의 발현은 물 건너갔습니다.

 

학문과 예술의 본질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지의 표출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명예를 위해, 돈을 위해 학문과 예술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걷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내면의 욕구에 따라 일생을 지성에 받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적 훈련이란 명목으로 관심도 없고 재능도 없는 곤충학을 10년 가까이 공부한다는 건 너무나 잔인한 일입니다. 불필요한 지적 훈련 탓에 정작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하고 젊은 날의 정력을 모두 소진한 청춘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젊음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정신적 양식은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지식은 음식과 같아서 먹고 싶은 것, 궁금한 것, 내 입에 맞는 것을 탐하는 건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억지로 머리에 주입된 지식이 우리 삶에서 탈을 일으킵니다. 당신은 스스로 기억력이 나쁘다고 하셨지요? 그건 일종의 배탈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억지로 주입된 지식에 혐오감을 느낀 것입니다. 당신의 뇌는 원치 않는 지식을 망각하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이를 두고 당신은 나는 머리가 나쁘다, 내 기억력에는 문제가 있다, 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요.

 

메모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해두세요.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쓰는 단계가 되면 메모를 보지 마세요.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끄집어내야 합니다. 메모는 과연 이 장면이 내 머릿속에 남을 만큼 인상적인지를 시험하는 단계에 불과해요. 당신이 메모한 것이 정말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그걸 꺼내보지 않더라도 필요할 때 기억날테니까요. 그러니 잊어버렸다고 아쉬워해서는 안 됩니다. 기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잊어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편안해집니다. 잊어버린 게 많다는 건 그만큼 지워야 될 것들을 미리 삭제한 것이에요. 수고를 덜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기십시오.

 

좋은 기억력이란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선택 기억이든, 합리적 기억이든 본질은 '연계'입니다. 관련이 있는 것들 사이에서 개인의 연상력이 작용하고, 머릿속에 하나의 질서가 새롭게 생성되는 창의성이 핵심입니다. 지성의 올바른 작용과 조화는 기억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억력은 연마할수록 확장됩니다. 제대로 된 연마법을 익힌다면 누구든지 남보다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기억력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지적 근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 역사상 뛰어난 지성인들을 관찰해보십시오. 그들의 예리한 지성은 모두 훌륭한 기억력을 토대로 성장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진실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들을 뇌리에 영원히 새겨넣었습니다. 단순히 암기만 하고 그친 게 아닙니다. 그 진실에 자신의 삶을 '연계'시켜 새로운 질서를 합리적으로 생산해냈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잊어버릴 줄도 알았다는 점입니다. 당신처럼 망각을 겁내는 일은 없었습니다 기억되지 않는 것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고 되찾으려 발버둥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아홉 개를 잊어버려도 자신의 지적인 생활이 투영된 하나의 가치관이, 진실이, 목적이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절약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뭔가를 배우거나 연구하는 등의 지적 활동에 임할 때 의지를 갖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나라는 존재로 가득 채우겠다, 라는 강한 기개를 드러내야 합니다.

 

단지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고려했을 때 나의 특성과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의 역량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대상을 최소화시킨다면 대상에 대한 이해의 척도는 보다 깊어질 것입니다. 정신활동의 결과물이 좀 더 견고해질 것입니다. 우리 삶에 미치는 정신의 영향력이 더욱 심화될지도 모릅니다. 하나의 사리에 정통해지는 것은 다른 사물과 대상에 대한 이해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는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동일한 숙명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야에 정통해진다는 것은 다른 분야의 정통성을 의심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대인에겐 시간이 지연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기다림과 미뤄짐을 무조건 손해로 여깁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지연되었기에, 미뤄졌기에 위험을 피하게 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그런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행운은 그저 행운일 뿐입니다. 어쩌다 보니 재수가 좋아 한 번쯤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버립니다. 보편적인 나타남은 일시적인 행운이 아닙니다. 실체를 갖춘 지혜입니다. 우리는 늦어짐의 지혜에 대해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조차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이 닥치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스스로 여유를 만들어냅니다. 나아가야 될 길을 정확히 판별하여 앞날을 예측함으로써 시간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시간 동안 사람의 인생이 다르게 결정되는 이유는 시간의 '질'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들여 반복적으로 주입시킨 기억

 

요점은 인간성입니다. 나의 인간성이 구현되고 만들어져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인 시간은 매우 귀중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시간의 올바른 형태는 사람마다 다른 모습입니다. 명사들 얘기처럼 1분도 허비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렇게 모인 시간들이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쓸데없이 사전을 뒤적거리고, 대수롭지 않은 팜플릿을 훑어보는 도중에 내 안의 위대한 인간성이 돌연 출몰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서 나만의 영감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계기를 개인적인 시간이 만들어줍니다.

 

전력을 다해 무엇인가를 하는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무익한 시간이다.

 

인생의 쓴맛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쓴맛에서 고유의 향취를 찾아내는 것도 시도해볼 만한 노력입니다.

 

독일인은, 나처럼 게으른 사람도 있습니다만, 여름이든 겨울이든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납니다. 아침식사는 보통 아홉 시에 먹는데, 그때까지 네 시간 동안 공부를 합니다. 중간에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실 때를 제외하곤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식사시간은 보통 삼십 분 내외입니다. 아내와 대화를 나누거나, 아이들에게 요즘 공부하는 내용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서재로 돌아가 여섯 시간 동안 공부합니다. 저녁식사를 끝마치는 데 한 시간 반쯤 걸립니다. 이 시간 동안 아이들 공부를 봐주고 잠들기 전 네 시간을 다시 서재에서 보냅니다. 매일 이런 생활을 반복합니다. 여간해서는 외출하거나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인 에르스텟이 동시에 최고의 의사일 수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며, 철학자 칸트가 뛰어난 천문학자가 된 이유입니다. 대문호 괴테는 식물학, 광물학, 물리학에 정통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전형적인 독일인의 은둔 덕분입니다.

 

인생은 순수한 흥미에 반응합니다. 그 반응이 우리를 보다 높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정말로 간절한 것은 시간과 건강입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회는 쉬지 않고 찾아옵니다.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에 스스로 충실하다면 타인과의 비교는 무의미합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충실히 살아가고 있으며,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지적인 삶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고 살아가는 것과 '눈에 보이는 세계'만 믿고 살아가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내 마음속엔 어떤 믿음이 숨을 쉬고 있는가? 나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는가? 스스로 반문해보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 사람은 눈앞에 닥친 시련과 고통과 외로움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겪은 고난은 그를 병들게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세계'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작은 시련에도 눈물짓습니다. 그에겐 눈앞의 세계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만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세계에서 마음껏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명심해야 될 점은 그 세계엔 나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 외에는 누구도 함께 해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희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변화시키려는 노력 중 하나가 지적인 생활에의 동경이라고 생각하렵니다.

 

지성의 명령은 확실히 무거운 사명입니다. 제멋대로 살고 싶은 인간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지성의 명령은 영혼과 육체에 대한 축복이기도 합니다. 이 축복은 물질적이지 않고, 허세를 부리는 데도 쓸모가 없으며, 값비싼 보석처럼 누구에게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이 문명으로 대접받는 이 시대에 지성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음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면 결국에는 본능의 노예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지성에 속한 자는 본능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반대로 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본능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합니다. 어떤 삶이 행복인지는 각자 판단할 몫이지만, 그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정직해져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합니다. 현재 나는 본래의 내가 가진 능력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 평가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련과 고난을 두려워하는 삶보다는 삶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낫고, 삶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지성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나의 힘은 미약하지만 나를 붙드는 믿음의 힘은 위대합니다. 나의 별은 어둔 밤하늘을 외로워하지만 지성이라는 태양은 나의 암흑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내일은 새 생명이 찾아옵니다. 오늘과 다른,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곧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나의 삶을 결정합니다. 생존은 조건일 뿐입니다. 생존이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은 성실과 품격이며, 생활에 대한 애정과 지적인 힘입니다.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것은 내 손으로 이룩한 지적인 발달이 조화된 우주에 근접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것이 이성을 갖춘 한 인간으로서 온 생애를 바쳐 도달해야 할 목표라고 확신합니다.

 

행복이 그리운 까닭은 소유의 순간 때문이 아닙니다. 소망한 것이 성취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조금씩 그 소망이 완성된 것 같은 흥분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물줄기만 길어 올려 그것으로 만족하는 삶이 진정 용기 있는 삶입니다.

 

시도를 두려워하는 자에겐 결과도 없습니다. 모든 결과엔 과정이 필요합니다. 과정이 고통스러울수록 결과는 달콤합니다. 나무는 아픔으로 성장합니다. 겨울의 매서운 북풍이 봄을 향한 나무의 갈망을 대담하게 만듭니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닙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입니다.

지적 생활을 삶의 활력소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한 마음과 불성실한 행동, 타인에 대한 불순한 태도는 그 자태가 비록 아름다울지라도 결국에는 인생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보다 지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인간의 목표입니다. 그 같은 경지에 도달했을 때 육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온갖 종류의 욕망과 불만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법을 통해 인간은 악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강제성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진심만이 나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법과 원칙에 따른 행동은 범죄를 저지르고 싶은 마음을 되돌리는 데 불과합니다. 설령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우리는 죄를 범하고 싶은 마음조차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각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험준한 고개도 오르다보면 끝이 보이고, 파도가 휘몰아치는 대서양의 한 가운데서도 돛대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새벽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인생은 언젠가 당신에게 보답할 것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약해졌다는 신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두려운 까닭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두려운 까닭은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믿기만 한다면 인생은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을 믿어주기만 한다면 그의 말과 행동이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건강은 육체의 강건함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정신과 감성이 올바를 때 건강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환경의 노예가 아닙니다. 인간에겐 환경을 지배하고, 환경을 새롭게 정의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목표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도 아닙니다. 환경과 조건은 목표를 향한 여정에 잠시 들르는 여관 같은 곳입니다.

 

가능한 것, 현실적인 것, 내 능력에 적합한 것, 내가 소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찾기

 

가난한 젊은이가 꿈꿔야 할 생활은 귀족들의 사치스런 하루가 아닙니다. 이상과 현실은 가까울수록 좋습니다. 당신에겐 두 발뿐입니다. 당신이 한 번에 걸을 수 있는 걸음은 한 걸음이 고작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간의 수명이 100년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하루라는 날들이 모여야 100년이라는 세월이 가능해집니다.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미래의 한 날엔 오늘 하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하루에 내가 해야 할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내가 소원하는 미래의 한 날은 정확히 오늘 하루만큼 멀어집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충고하겠습니다.

"돌진하라!"

이 짧은 한 마디가 내적인 위기에서 나를 구원해준 마술이었습니다. 무력해진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준 지팡이였습니다. 내가 겪었던 갈등과 아집과 피해망상을 깨뜨려준 바위였습니다.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게 해준 다리였습니다.

"돌진하라!"

나는 그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습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인생과 충돌했습니다. 이 목소리는 나의 상태가 아직은 무력해질 때가 아니라고 말했고, 포기하지 않도록 타일렀고, 육체적인 피로나 감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줬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혹은 영혼에 남아 있는 건전한 의식을 자극했습니다. 현재의 나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무기력한 염세주의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육체적으로 비굴해진 것은 아닌지, 정신적 공황이 내 그림자를 완전히 뒤덮은 것은 아닌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아무에게나 무릎을 꿇고 적선을 바라는 내 비겁한 굴종의 본성에 반항하게 했습니다.

"돌진하라!"

이것은 명령이었습니다. 나의 사회적 위치와 눈앞의 과제를 모두 뛰어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습니다. 그 명령이 손가락질하는 곳엔 항상 내가 있었습니다. 내가 돌진해야 할 상대는, 넘어뜨려야 할 적은 항상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를 비굴하게 만드는 적도 나였고, 나를 허약하게 만드는 적도 나였으며,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적도 언제나 나 자신이었습니다. 인생은 나 자신과의 승부였습니다. 승자는 항상 나였고, 패자도 항상 나였습니다. 나는 인생의 모든 고비에서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맛봐야 했습니다. 그 반복적인 경험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승리를 기뻐하지 않게 되었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돌진하라!"

이 명령이 시키는 대로 이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는 내가 쓰러뜨려야 할 또 다른 나를 찾아 떠돌아다녔을 뿐입니다.

고귀한 영혼은 자유를 갈망합니다. 참다운 것을 요구합니다. 올바른 것을 사모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평생을 좌우합니다. 고귀한 영혼의 갈망과 요구와 사모를 방해하는 건 육체에 매몰된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는 타인에게 이 책임을 전가하려고 수없이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다른 이에게 내가 겪은 실패와 좌절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순간, 나의 귓전에 "돌진하라! 이 비겁한 인간이여."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울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현재 속박을 경험하고 있다면, 당신을 속박한 자가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챘다면, 주저하지도, 망설이지도 마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돌진하십시오! 당신을 꽁꽁 묶어버린 당신을 향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훌륭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위인들 못지않게 훌륭해질 수 있습니다. 위인이란 자유롭고 고상한 영혼입니다. 위인은 어떤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어떤 세력이나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유롭고 고상해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가르쳐준 세상을 보고, 남들이 원하는 나를 만들어서는 자유로워질 수도, 고상해질 수도 없습니다. 자유롭고 고상한 영혼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들 인생이 품을 수 있는 최선의 목적입니다.

이밖에는 단지 불필요한 대용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부라고 믿었던, 그리고 가장 소중하다고 믿었던 명예나 권력, 부, 사랑 등은 자유롭고 고상한 영혼을 지니지 못한 인생들이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잠시의 위안일 뿐입니다. 소멸된 육체에겐 명예도 필요 없고, 권력도 필요 없고, 부와 사랑도 필요 없습니다. 육체적인 목적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모든 게 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롭고 고상한 영혼은 육체가 소멸한 후에도 영원히 기억됩니다. 이 세계에 나의 발자취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운명은 두 번의 인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동물적 행위를 행복으로 여기며 살기엔 한 번뿐인 인생이 너무나 안타깝고 소중합니다. 인생을 사랑한다면 자기기만을 축복으로 왜곡했던 지난날부터 반성해야 합니다.

 

문명은 인간의 정신을 나태하게 만들었고, 우매하게 만들었습니다. 과학과 기술과 산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은 외형적으로 더욱 편리해졌지만, 안락한 삶에 젖어버린 인간은 치열한 정신력의 극복보다는 손에 잡히는 이기의 도움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다움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다움을 상실한 인간은 스스로를 불신하게 되었고, 자기도 믿지 못하는 나를 사람들 앞에 내보인다는 것에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신경쇠약의 본질입니다.

 

신경쇠약증을 예방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정상적인 직업과 평화로운 가정생활입니다.

 

내적인 건강만이 열풍처럼 불어 닥친 신경쇠약의 유행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입니다.

 

만에 하나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신경쇠약증에 걸린 것 같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육체적 수단과 두 가지 정신적 수단을 동시에 복용하기 바랍니다.

먼저 세 가지 육체적 수단은 충분한 수면과 신선한 공기, 적절한 운동, 그리고 알콜과 육식의 섭취를 줄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정신적 수단은 보다 지적인 향상을 바라는 나에 대한 믿음과 지성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다섯 가지 외엔 신경쇠약증을 치료할 만한 다른 수단은 없습니다.

 

지적 생활은 삶의 은혜와 사랑을 나 자신에게 베풀어주는 도구입니다.

지적 생활은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을 재는 것입니다. 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왔는지 스스로 점검해보는 것이 지적 생활입니다.

 

젊은이여,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라. 아름다운 것들을 가까이 하라. 그대의 욕구를 추하고 더러운 것들로부터 아름다운 것으로 옮겨라. 이것이 세상에서 그대를 지켜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행복해지기 위한 노동, 자아를 찾기 위한 노동이 아닌 강제적이고 수탈적인 노동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가축화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젊은이는 아직 인생이 시작되기 전에 충실해져야 합니다. 산을 향해 단 한 걸음이라도 내딛기 전에 마음을 다잡아야 됩니다. 당신이 오르려는 봉우리가 어디쯤인지 미리 확인해야 합니다. 산길에 미숙한 서툰 안내자를 뒤쫓지 마세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산행이 처음인 친구들과 함께 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걸음을 주목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당신에게 허락된 시간 안에 오를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말을 명심하십시오. 산에서는 욕심을 부려선 안 됩니다. 산은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제나 그곳에 있습니다. 당신이 산에 오를 수는 있어도 산이 당신 곁으로 다가와주지는 않습니다.

명심하세요. 산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혼자서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전율이 온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병에 걸렸다. 의사는 단순한 감기라고 진단했다. 나는 속으로 그의 무지를 비웃었다. 이것은 그냥 병이 아니다. 내 몸을 찾아온 열병은 감염된 세균이 아니었다. 나는 지쳤던 것이다. 현대인의 지나친 감격에, 그 끊임없는 환멸에, 도처에서 낭비되는 힘에, 희망과 절망을 혼동하는 어리석음에, 청춘을 향한 광적인 사랑에 나는 지쳐버린 것이다.

모든 이상주의적 허위와 약해빠진 철학, 냉소적인 시선, 음미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랑, 더욱 깊어진 불신,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놔주질 않는 고독,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의혹에 지쳤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내 곁에 리하르트 바그너말고는 다른 친구가 없다는 것을. 그 쓸쓸한 침묵을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위의 글은 니체의 독백과도 같은 서술입니다.

 

사람들에게 보답을 기대하지 마세요. 그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 기뻤던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당신의 선행에 값을 매기지 마세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행만이 사랑입니다.

 

친구에게 뭔가를 기대하기 전에 친구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류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이 목표는 나를 향한 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한 이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량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직스런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고, 적 앞에서는 확고부동하며, 염치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친절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성실한 자에겐 보상의 시기가 반드시 찾아오는 법입니다.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약속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실망은 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감사할 때 인생은 더 많은 노력을 선물로 베풀어줍니다.

당신 인생에 함부로 명령을 내리지 마십시오. 당신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미소로 승리하십시오. 당신 자신에게 반항하십시오. 그리하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남에게 명령할 때는 웃는 낯으로 하십시오. 웃음은 칼보다 강합니다.

 

그들은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내가 자랑하는 것과, 내가 가지고 싶은 것으로 나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이 최후의 전투에서 우리의 무기는 오직 인내뿐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만이 우리의 무기이며,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무기입니다.

나의 마음속엔 우주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내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진실을 추앙하고, 거짓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보다 넓은, 우주를 닮은 마음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마음을 거역하고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우주의 완성은 나의 완성에 있는 것입니다. 완성된 존재로 나의 영원한 지성에 다가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자유는 아닙니다. 자유는 모든 악한 풍파 속에서 나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것, 내 욕망을 다스리는 것, 혈기를 참아내는 것, 그것이 나의 자유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를 쟁취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명예와 호화로운 저택이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공허하고 따분하게 생각된다면 당신의 삶이 억눌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에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당신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자연의 뜻을 상기하십시오. 당신을 태어나게 만든, 그리고 당신을 존재하게 만드는 자연의 질서를 기억해내십시오. 질서가 당신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 깨달으십시오. 그래야만 사람들 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적으로부터 배운다.

 

적으로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경멸하고 싶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는 마십시오. 당신의 적에게 긍지를 가져야 됩니다. 당신이 그들의 적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가지십시오.

 

인생을 굳세게 헤쳐 나가는 길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리떼처럼 울부짖으며 만인이 함께 누릴 수 없는 인생의 향락에 홀로 달려드는 것입니다. 한 점의 고깃덩어리를 가운데 놓고 서로의 목덜미를 향해 송곳니를 박아버리는 것입니다. 물어뜯고 싸우면서 함께 사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것이 얼마 전부터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유물주의적 생존경쟁입니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먹잇감이 되는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둘째는 지적 생활을 추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성의 빛을 희망으로 삼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입니다. 교양과 정신을 고양시키고, 강자와 약자의 구분 없이, 서로의 살결에 이빨자국을 남기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노동, 그것이 실현된 이상입니다.

당신이 어떤 직업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그 일에 필요한 능력을 갖출 것, 둘째, 지나치게 많이 일하려고 하지 말 것, 셋째, 그 일을 사랑한다고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말 것.

 

노동은 생명이며, 직업이 생활의 척추라는 것

 

태어남은 인생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이 초대는 오직 한 번뿐입니다.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인생은 결코 두 번 반복되지 않습니다. 운명은 우리에게 단 한 번의 삶을 약속해주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점점 더 가속화되는 편리한 기계문명은 우리의 지적 욕구마저 자신들에게 맡기라고 강요한다. 우리는 의존이라는 편리성에 길들여져 버렸다. 인류 역사를 고찰하건대 길들여짐은 언제나 '우민'의 씨앗이 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