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마시는 법은 먹고 마시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우울증도 분노도 짜증도 실은 영양 과잉에서 오는 경우가 참 많아.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명심해라, 이제 너도 어른이라는 것을. 어른이라는 것은 바로 어린 시절 그토록 부모에게 받고자 했던 그것을 스스로에게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애정이든 배려든 혹은 음식이든.
여러분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정말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또 다른 나인 남과 나누어야 한다는 거예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레스토랑이라고 생각하고 혼자서 가장 우아한 포즈로 먹는 것. 그리고 우아하게 생각하는 거야. 나는 귀한 사람이고 당연히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고 말고.
육체를 보살펴야 한다. 네 육체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말을 들려주고(책으로라면 더 좋지) 좋은 향기를 맡게 해주어라. 해도 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 나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내 몸에서부터 시작해야 해. 정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고, 그리고 정신보다 육체를 위하는 게 효과가 빠르고 좋으니까.
네가 어떻게 자랐든, 네 부모가 너에게 무엇을 했든, 네 학력이 어떻든, 체중이 얼마든, 이 세상이 얼마나 개떡 같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는 귀하고 품위 있고 좋은 삶을 살겠다.
아무리 좋은 점이 많아도 나쁜 점이 치명적인 사람을 만나서는 안 돼.
너는 네가 버는 돈보다, 네가 겨우 얻은 커리어보다 중요하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이야. 너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가끔은 네 자존심을 완전히 버릴 만큼 중요하단다.
이것들 중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내가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존중하며 내가 나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유기농 제품 비싸. 그러나 유기농 제품을 먹도록 하자. 비싸면 조금만 먹기로 하고. 같은 돈이면 좋은 것을 조금만 먹는 것이 훨씬 더 좋아.
인생은 늘 도박꾼의 몫!
모든 관계에서, 특히 여자들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단다.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말이야. 아주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 이 법칙은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제는 사랑하는 내 자신에게 좋은 음식을 주려고 해. 싸구려 재료들을 먼지가 앉도록 오래 보관하다가 합성 조미료에 비벼 낸 음식은 이제 먹지 않아.
사랑하는 딸, 인간의 세포는 6개월마다 모두 바뀐단다. 그러니 인스턴트 음식에 쌓였던 먼지와 싸구려 기름기, 그리고 합성 조미료에 지친 네 세포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자. 너는 소중하니까.
언제나 자신을 잘 살피고 물어서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네 영혼이 원하는 것을 살펴라.
그것을 선택할 때 너는 그것을 잘할 수 있어. 그리고 행복할 거야.
우리는 진정 무엇을 위해 사니?
네가 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너 자신밖에 없다.
현실은 생각보다 늘, 훨씬 드라마틱하단다. 성 프란치스코가 "주님, 제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하게 해주시고 할 수 없는 일은 당신께 맡기게 해주시며 이 둘을 구분하는 지혜를 주소서" 했던 기도는 그러니까 인생에 대한 이런 통찰에서 나온 것이었을 거야. 실제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점을 타고났는지 잘 살펴보고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너의 취향. 먹어도 죽지 않으니까 늘 실험을 해봐. 옷을 잘 입는 사람의 비결이 뭔지 아니? 사서 못 입었던 옷이 엄청 많았다는 거. 요리 잘하는 사람의 비결? 망친 요리가 많았다는 거야. 그러니 두려워마.
그러니까 누군가를 네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바꾸려고 하지 마라. 누군가 너를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하거든 그와는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좋아.
백합은 가시가 있을 수 없고 나팔꽃은 꼿꼿이 설 수가 없단다.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고치려고 해서는 안 돼. 고치려고 하는 순간, 네 영혼은 네가 너를 거부하고 너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알아듣고 말 거야. 때로 영혼은 우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영혼은 자신을 싫어하는 혹은 미워하는 자아가 시키는 일에 복종하지 않아. 영혼은 진정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고 느낄 때만 자신을 변태시키려고 한단다. 그것도 자신이 타고난 한도 내에서 말이야.
이것은 결코 절망적인 소식이 아니야.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학습을 시키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못하는 이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점이야.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을 잘 살피고 물어서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저기 저 연예인이 입은 옷, 저기 내 친구가 다루는 악기는 중요하지 않아. 네 영혼이 원하는 것을 살펴라. 그것을 선택할 때 너는 그것을 잘할 수 있어. 그리고 행복할 거야. 그렇지?
돈을 벌러 다니는 일은 숭고한 일이야. 돈을 벌기 위해 육체 혹은 정신을 사용해 노동하는 일은 신성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육체를 움직이는 노동은 우리 영혼에 아주 유익하단다. 모든 노동 중에서 머리를 별로 쓰지 않고 육체만 사용하는 노동은 있어도(뭐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거의 없지만, 비교적 육체만 사용하는 노동 말이야) 오직 머리만 쓰는 노동은 (설사 그게 스티븐 호킹이라도) 거의 없으니 모든 노동은 실은 육체노동이라고 할 수 있지. 남들이 다 머리를 써야 하는 것으로 아는 소설 쓰는 일도 그래.
엄마가 말하지만 소설가의 가장 큰 미덕은 엉덩이 힘이 세야 한다는 것이야. 아,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려니 좀 우습긴 하다. 나는 소설가의 가장 큰 미덕은 어쨌든 앉아 있는 힘이라고 생각해. 그러자면 엉덩이와 허리가 특히 튼튼해야 해. 엄마 친구인 교수도 이 말을 하더라도. 학문을 하는 데도 허리와 엉덩이 힘이 최고의 조건이라고 말이야.
톨스토이가 쓴 <크로이체르 소나타>라는 소설에는 그런 성찰이 나오지. 과잉 영양을 노동으로 소모하지 못하는 자가 갈 곳은 성적 집착과 타락이라고. 과잉 영양과 육체 노동의 결여는 모두의 멸망이라고.
그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지리산으로 내려가 돈이 들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 먹는 것과 입는 것, 편안한 것에 대한 모든 욕심을 버린다고 말이야. 그는 실제로 한 끼 정도밖에 먹지 않아. 옷은 옷장이 필요 없이 세 벌 정도?
엄마는 꽤 돈이 많고 학식도 많은 상류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단다. 솔직히 나는 그들 중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본 일이 거의 없어. 물론 그들이 불행해 보였던 것은 아니야. 아주 불행할 비율은 엄마가 만난 가난한 사람들보다 적다고도 할 수 있었어. 돈이 어느 정도 완화해줄 수 있는 불행은 참으로 많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적어도 내가 만난 그들은 '지루해' 보였어.
모르겠어. 나는 여러 번 강렬한 이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정말 많은 옷을 갈아입고 수많은 명승지를 여행하고 골프와 승마 혹은 산악자전거나 요트를 즐기며 버라이어티하게 살고 있는 듯했지만, 심지어 그들은 얼마든지 춤이나 섹스의 파트너도 바꾸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늘 지루해하고 있다고 느꼈단다. 그러니까 그것은 가진 것이 많은 자의 '둔함' 같은 것이었어. 내가 그들과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은 이유 중에는 "내 처지가 그들과 어울릴 만하지 않아서"라는 것 외에도 바로 이런 단점이 있어.
뭐랄까 영혼의 생동감? 유연함? 삶의 역동성? 같은 것을 가장 많이 느낀 부류는 나의 경우는 시인과 성직자 정도? 놀랐다고? 그래 놀랐지. 나도 처음엔 전혀 알지 못했던 거란다. 여기에 소설가는, 그러니까 잘 나가는 소설가는 끼지 않아. 시인이나 성직자라고 해도 '세상에서 잘나가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모든 이는 여기에 끼지 못해.
이들의 특징을 나중에 생각해보니 인문학적 소양과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존재의 가벼움 말이야. 이 세상에서 버거운 질량을 가지고 존재하는 돈다발, 땅문서, 집, 건물, 전자 제품, 자동차 혹은 인간관계에 대해 별로 집착할 것도 지킬 것도 없는 이들은 놀랍게도 훨씬 더 질량이 나가는 나무와 산과 들, 그리고 강과 바다와 우주와 별을 즐기고 있더란 말이지. 그리하여 놀기 좋아하고 웃기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은 이들과 함께 늘 같은 소주를 먹고 늘 같은 삼겹살 혹은 싸구려 막회를 먹으면서 우주의 유머를 알아버렸단 말이지. 삶이 막 의미 있고 재미지더란 말이야.
인간은 살기 위해 노동하지만 노동이 결국 우리를 진정 '살게 하는' 신비
무엇보다 네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네 자신을 사랑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엄마는 그것을 권한다. 네 자신을 스스로 미워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보약이라도 영양제라도 먹지 말아야 해.
어른이 도니다는 것은 이렇게 사실과 사실 아닌 것, 사실과 망상, 사실과 집착, 사실과 환영 사이를 구분하게 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 모든 현상 속에서 사실을 골라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단다. 마치 유능한 외과의사가 대동맥과 대정맥뿐만 아니라 실핏줄을 갈라내고 떼어내어 접합하고 꿰매듯이 점점 더 섬세해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단다. 알겠니? 섬세하게 구분해낼 줄 아는 사랑이 힘이 세다는 것을 말이야.
나빠 보이기도 하는 일이 일어나는데요, 그건 좋은 일로 가는 모퉁이일 뿐이니까요.
오늘은 네게 어떤 날이니? 앞에서 엄마가 권해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그렇고, 전쟁 포로가 됐던 사람들의 인터뷰도 그렇고, 위험한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해야 할 때 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게 뭔지 아니? 그건 화려한 생일 파티도 아니고 처음 키스를 했던 그날도 아니야. 그들이 가장 그리워한 건 그냥 평범한 어느 날이라고 했다. 친구랑 공원 벤치에서 점심으로 싸 간 샌드위치를 먹으며 웃던 일,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끓이는 맛있는 수프 냄새가 나던 일, 학교에 가던 일, 집 안의 냄새, 혹은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웃던 거. 어쩌면 SNS 상의 친구들과 깔깔거리던 일... 그래, 오늘이 바로 네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제발 다시 왔으면 하고 바랄 그날이라는 거, 잊지 마라. 아아, 너무도 소중한 이 일상의 평화를.
돈은 내가 그것을 진정 의미 있게(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그러니까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부모님께 선물을 사드리고 친구에게 밥을 사고 적은 금액이지만 의미 있는 기부를 하고) 사용할 때만 가치가 있다.
그 고통이 가짜였고, 힘들다고 죽을 것만 같다고 어쩌면 나를 속인 것이 아니었을까?
감사하라, 더욱 감사하라,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 당신의 인생이 바뀌게 될 것이다.
사람은 절대 가지고 있을 때, 편안할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지 않아. 그래서 고통은 우리에게 늘 새로운 길의 모퉁이를 돌게 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제가 안 죽고 밤새 중풍도 안 걸리고 이렇게 멀쩡하게 일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밖이 추운데 저희 집은 아주 따뜻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도 밤새 아무 일 없이 잘 자고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 북한이 핵을 가지고 난리를 치는 모양인데 밤새 핵전쟁이 안 나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밤새 이 집이 안 무너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밤새 저를 이렇게 무사하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열쇠가 있었다면 그건 감사였어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내게 남은 것, 내게 아직도 주어지고 있는 것, 내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을 자각한 순간 고통은 힘을 잃었어요. 왜냐하면 남은 것이 잃어버린 것보다 훨씬, 아주 훨씬 더 많았거든요.
새날엔 새로운 일을 만들어보자.
신선한 물아, 고마워, 내 몸에 들어가 살도 빼주고 신선한 에너지를 내게 주렴.
삶은 자기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네가 그렇게 살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
그러니 작은 실수들, 많은 실패들, 끝나지 않은 시련들은 너를 성숙하게 만들려는 신의 섭리로 생각해보렴.
비싼 것이 나쁠 수는 없다. 가격에 비해 덜 좋을 수는 있지만 말이야. 사실 아무것도 몰라 망설일 때는 비싼 것을 사면 실패는 없어. 이게 슬픈 현실이다.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 모든 고통이 다 거기서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거의 모든 고통이 그리로부터 나온단다. 엄마도 집착인 줄 모르고 집착했던 몇몇 사람과 욕망과 관념을 가지고 있었단다. 어느 날 알게 되었지. 그 사람들이 나쁘고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괴로운 게 아니라 꼭 그래야 한다고 믿는 내 마음에서 모든 고통이 끊임없이 생산된다는 것을 말이야.
집착과 사랑을 어떻게 구별하느냐고? 엄마도 여기서 많이 고민했어. 그건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해야 알아내는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굳이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이런 거다. 그것으로부터 고통이 온다면 그건 집착인 거야. 그가 이렇게 하면 네가 기쁘고 그가 저렇게 하면 네가 슬픔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그게 집착이야. 사랑은 그가 어떻게 하든, 그가 너를 나쁘게 대해도, 그가 다른 사람과 가버린다 해도, 심지어 그가 죽는다 해도 변하지 않는단다. 그가 너를 아프게 할 때, 얼른 그와의 심리적 거리를 조금 더 떨어뜨려 그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며 바라볼 수 있으면 사랑이고 그렇지 않으면 집착이다.
사랑과 집착이 100퍼센트 순도로 있겠느냐마는 만일 이런 일이 좀 더 빈번하다면 네가 가진 감정이 집착일 확률이 높단다. 사랑하면 잘 헤어질 수 있지만 집착하면 헤어지지도 못해. 세상에서 가장 나쁜 관계는 헤어지지도 못하는 관계란다. 만일 네게 계속 고통을 주는 사람과 (그게 누구든) 심리적 거리를 잘 유지하지 못하면 그게 집착이다.
이것은 부모 자식이라 해도 마찬가지야. 서로는 부모 자식이기 이전에ㅡ자식이 설사 미성년자라 하더라도ㅡ우주의 자손이란다. 존재는 그 자체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서로 스밀 수는 없어. 필요에 따라 거리를 두어야 하고, 칼릴 지브란의 말대로 "서로 사이에 바람이 지나갈 수 있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거다. 샴쌍둥이를 봐라. 두 존재를 분리시키기 위해 위험한 수술까지 감행하지 않니?
어차피 사랑도 가족도 모두 인간 사이의 소통이고 관계니까 말이야. 두 사람은 두 사람이고 어떤 사람도 똑같지 ㅇ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진정한 관계가 시작되는 거야.
바로 그런 날은 녹두죽을 먹자. 그도 아니면 단식을 해도 좋겠지. 덜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채워내지 못한다. 엄마가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손에 가득 든 은을 버려야 금을 얻을 수 있고 금을 버려야 다이아몬드를 얻는다. 삶은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주려고 손을 내미는데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손이 없는지도 몰라.
이 글을 쓰다 말고 엄마는 창살로 들어오는 햇살에 두 손을 내밀었다. 따스하고 보드랍고 까슬까슬한 이른 봄의 햇살이 노랗게 손바닥을 적셔온다. 느껴보렴. 이게 실은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하지 않니? 이 귀하고 감사한 것들이 아무 대가도 없이 이 천지에 가득하지 않니? 그러니 너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
먹는다는 것은 먹는 사람의 자유잖아! 내 입에 들어가는 건데 내 맘대로 해야지
사람이 진정 자립을 한다는 것, 사람이 진정 어른이 되어 자기를 책임진다는 것은 간단하더라도 자기가 먹을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 포함돼. 아주 중요한 요소지.
내가 먹을 것 내 맘대로 만드는 것도 인간 존엄의 큰 요소이고 심지어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이제 너도 어른이니 네 먹거리를 이렇게 만들어 먹는 게 좋지?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입만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엄마가 전에도 말했지만 우울해지려고 하면 몸을 움직여라. 딱 한 번만 움직이면 돼. 이럴 때 제일 좋은 게 바로 요리나 집 안 청소 혹은 음악을 들으며 걷기 등인 거 같아. 네가 우울해하는 데는 수만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딱 한 가지야. 우선 몸을 움직이고 맛있는 것을 먹고(네 몸에 좋은 것, 살도 안 찌는 것 말이야) 따뜻하게 너를 감싸는 것. 그리고 좋은 말씀을 읽거나 듣고 밝은 생각을 하는 것.
엄마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만일 네가 외롭거든 지금은 남자 친구를 사귈 때가 아니야. 배가 고픈 사람은 제 몸에 나쁜 것에도 크게 흔들리는 법이란다. 만일 네가 외롭거든 지금은 독서를 해야 한다. 더욱 혼자 있어야 해.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를 규칙적으로 하는 것, 봉사를 하는 것이란다. 기도는 일정 시간을 정해서 해(특히 이른 아침이라면 그 효과는 10배, 20배가 넘지). 그리고 봉사... 알지? 너를 기다리는 수많은 손길들이 있어. 일주일에 한 번, 서너 시간 정도를 내보는 것. 이건 너에게 아주 좋은 방법이야.
만일 외롭기 때문에 아무나 만난다면 그건 그 사람을 너의 외로움을 위해 이용하는 것일 수 있단다. 사람은 수단이 아니거든. 누군가가 외로워서 그냥 여자가 필요한 차에 너를 만났다면 너도 그리 좋지는 않겠지.
그러니 좋은 선택을 위해 우선은 너를 알아야 한다. 네 몸이 어떤 상태인지, 네 맘이 무엇을 원하는지, 네가 느끼는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더라. "당신은 진정 당신 몸속에 살고 있나요?" 난 그 질문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어. 그럼 내가 내 몸에 살지, 어디 살아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 정말?
오늘은 네 몸을 한 번 느껴보아라. 네 몸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수많은 단것인지, 싸구려 기름이 범벅된 것들인지, MSG로 위장한 맛있고 자극적인 것들인지. 그래 가끔 그럴 수도 있지. 그렇지만 한 번 더 물어봐. "정말?"
배고플 때, 몸에 나빠도 좋은 재료로 만든 것들이 아닌 걸 알면서도 막 아무거나 쑤셔 넣고 싶을 때, 엄마도 멈추고 호흡을 가라앉히고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정말?" 그러자 뜻밖에도 눈물이 나오더구나. 아니, 내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어. 나는 내 나쁜 감정들과 느낌들(외로움, 소외감, 절망감, 상실감, 분노심 같은 것들)을 그런 것들로 얼른 위장하고 싶었던 거야. 그럴 때 몸은 오히려 비우기를 원했더라고. 좀 가만히 나와 함께 있고 싶어했던 거더라고. 맑은 차를 마시며 천천히 혼자 생각을 가다듬어 자신의 나쁜 것들을 알아보고 정화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지.
외롭다는 것이 고통스럽다면 네 자신과 함께 있어봐라. 어차피 네 자신과 함께 있지 못하면 누구와 함께 있어도 외로워. 그리고 그럴 때의 외로움은 '골 때리는 외로움'이란다. 그러니 혼자 잘 지낼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네 육체를 돌보고. (엄마가 늘 말했지만 육체와 정신이 둘이 아니고, 우선 육체가 반응도 빠르고 눈에도 잘 보이니까 말이야.)
어제는 거리를 걷는데 바람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내 목에 감겨 있던 스카프를 풀어 백에다 매어주었단다. 오늘은 새소리에 눈을 떴어. 늘 마시던 커피 대신 허브를 우린 차가 마시고 싶어 그렇게 했다. 밤새 내 베개맡에 떨어져 내린 후회들을 모아 볕에 내다 말렸다. 감사하다고 말했단다. 이 모든 것들, 이 하늘, 이 바람, 이 공기 그리고 이 아침... 내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이 모든 것들에 감사하다고, 이 시간을 귀하게 쓰고 싶다고.
사랑하는 내 딸, 창문을 열고 대청소라도 해보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라는 이중창을 들어보렴. 삶은 이렇게 다시 시작된다. 오늘이 그날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너는 다시 시작할 수 있고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있어. 그걸 잊지 마라. 네 청춘을 축복하고 싶다. 고통마저 눈부실 수 있는 이 청춘의 봄날을!
그래, 우리는 모두 외롭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늘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렵고 복잡하고 어리석은 길을 돌아 돌아 원래 있어야 할 그 쉬운 지점으로 온다. 그리고 어떤 유혹이 있어도 우리가 올바르고 선하게 살면 끝이 좋을 거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단다. 이게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운명의 전부이다.
엄마는 가끔 죽음을 생각한단다. 이 나이가 되면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실은 젊은 날부터 그랬어. 내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에 나는 이 글을 쓰고 네가 오면 함께 깔깔거리며 먹을거리들을 준비한단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에 내게는 오늘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단다.
아름다운 나의 딸, 그래 하루씩 사는 거야. 오직 오늘이 있을 뿐이야. 그게 인생의 전부이다. 엄마를 만나러 오는 버스 안에서 네가 보는 풍경이 온통 봄빛이라면 네 인생은 전부 봄인 거야. 엄마는 이제 너를 마중하러 들길을 걸어 나가련다. 죽는 날 아침에도 거울을 보며 말하고 싶구나. "네가 살아온 모든 날 중에서 오늘 네가 제일 아름답다" 하고.
한 사람도 고통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고통이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 인생에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그 이미지, 그 표상이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지도 몰라. 엄마는 그걸 깨닫고 나서 많이 편안해졌다. 지금도 나는 미열이 나고 허리가 아프면서 목이 따가워. 아마 며칠 무리했더니 감기 몸살이 오는 듯도 하다. 그러나 내게는 아스피린도 있고, 내게는 따스한 잠자리도 있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지나갈 거라는 지혜도 있고, 내게는 이 아픔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어리석음이 없다. 그러니 이 밤 엄마는 참으로 행복하단다. 이 행복을 너에게도 전하고 싶다. 그렇지? 자, 오늘도 좋은 밤!
엄마가 삶의 후반으로 접어든 젊은 날부터 세상에 좋은 모든 말씀과 책을 찾아 읽고 듣고 하고 이제야 느끼는 점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지금, 여기 그리고 나!'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지금 여기만 존재하는 것이고 오직 내가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것!
친구 땜에 속상하니? 괜히 미안하다고 했니? 괜찮아. 그러나 이 후회에서 배울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네 미안함의 배후를 밝히는 것이란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대입할 수 있는 단어를 열 가지쯤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야. 놀랐어? 그래 연습 없이 되는 것 없어. 정말이야. 가끔 그 연습이 실패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오늘은 답답한 속에 시원하고 매콤하며 칼칼한 오징엇국 혹은 찌개를 먹고 향긋한 차를 마시렴.
엄마는 비 오는 저녁에는 향기가 좋은 초도 몇 개 꼭 밝힌단다. 그래그래,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내일은 새날이야. 너도 새 사람이고 친구도 다시 새 친구이다.
오늘 밤에는 엄마가 시 한 편을 보낼게. 고은 시인의 <부활>. 오징어가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려무나. 엄마는 오징어만 생각하면 이 시를 떠올려. 자유와 관능과 슬기의... 와우 시인이란 역시 멋진 사람들. 그래그래, 오늘도 좋은 밤!
언제나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게 힘들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게 힘들고, 잘 사는 것만큼 잘 죽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비워야 잘 내려오고, 잘 죽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우리의 누추한 삶은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단다.
이 침묵을 수월하고 매끄럽게 이어가주는 것이 바로 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였어, 쓸데없이 개입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 침묵이 수월해지고, 침묵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상황과 남의 공격에 휘둘리지 않는 힘은 오직 침묵으로만 길러질 수 있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김"은 진실로 진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실행하기가 아주 어려워. 진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려면 평소에 자신을 잘 대하고 사랑하며 존중하고 있어야 해. 엄마의 이야기는 그리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무엇보다 "너 자신을, 바로 이 순간을, 네가 있는 이곳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야.
엄마가 말해준 먹거리는 네 "영혼의 집"인 육체의 원소야. 집을 사랑하는 사람이 집 안에 독극물이나 해로운 것을 들이지 않듯이 네 영혼의 집인 육체에도 좋은 것만을 주어야 한다. 사실 어쩔 수 없이 해로운 것을 먹을 때에는 그것이 없을 때를 생각하며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엄마가 네게 주고 싶은 모든 것이야. 지금, 여기, 너 자신 그리고 사랑하며 감사하기.
엄마는 죽을 때까지 깨닫고 싶다. 이제는 그래서(엄마의 이런 공부는 이제 20년째 들어서고 있다 이제야 약간! 감이 오는구나) 고통 속에서도 살짝 변화를 가져오는 약효를 미리 발견하곤 해. 가끔은 이 고통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궁금하기도 하고. 20년 동안 "싫어요! 고통받기 싫어요!" 발버둥 치면서 얻은 건 고통이 조금 더 복잡해지고 길어졌다는 거야.
삶은 공평하지 않다. 삶은 평화롭기만 하지도 행복하기만 하지도 않아.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나면 삶은 신기하게도 우리에게 그 너머의 신비를 보여준단다. 마치 히말라야로 떠난 사람이 "여기 왜 이렇게 추워요?", "산소는 왜 이리 희박하죠?", "아아, 대체 언제나 여름이 와서 우리는 반팔 옷을 입을 수 있죠?"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봐.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각오하고 떠난 사람에게 히말라야는 미지의 천년설과 눈이 멀도록 푸른 하늘을 보여준다고 하지.
이제 독립을 하고 어쩌면 새 가정을 꾸밀 날을 앞두고 있는 너를 응원한다. 엄마가 언제나 그렇게 말하듯 삶은 자기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네가 그렇게 살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 그러니 작은 실수들, 많은 실패들, 끝나지 않은 시련들은 너를 성숙하게 만들려는 신의 섭리로 생각해보렴. 오늘은 혼자서 따뜻한 된장차를 마시며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글을 읽자.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성공한 날이고, 이보다 더한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잘못하면 그저 배를 채우는 먹거리를, 그 가난하고 빈한한 식사를, 그들은 그 하얀 천 하나로 갑자기 문화로 만들어버린 거야. 가난하든 아니든 우리는 품격 있는 식사를 한다, 고 말하는 것 같았찌. 그 뒤로 여행을 하면서 늘 젊은이들을 눈여겨보곤 했는데 여학생들은 저녁에 광장에서 똑같이 그렇게 빈한하고 가난한 바닥 식탁에 가끔은 일회용 티 라이트도 밝혀놓곤 하더라구.
물론 엄마도 가끔 질 낮은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들을 막 때우고 싶은 때가 있단다. 그게 특별히 먹고 싶어서라면 모르겠는데 그냥 귀찮아서 말이야. 잘 생각해보면 바로 그때가 실은 엄마의 생 전반의 기력이 떨어지는 때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알지. 음식은 그런 바로미터 역할을 하고 그럴 때 엄마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한단다. 이 식사가, 이 식사의 앞과 뒤가 내 인생의 많은 모자이크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실은 이거야. 네가 설사 너무 바빠 며칠을 라면만 먹고 산다 해도, 네가 너무 가난해져서 엄마도 떠난 먼 훗날에 신선한 요리를 하나도 해 먹을 수 없다 해도, 너는 소중하다고. 너 자신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일을 절대로 멈추어서는 안 돼. 앞에 놓인 음식이 무엇이든 그것을 감사하며 맛있게 먹고 웃어. 큰 경지에서 인생을 보고 너무 많은 것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오늘 하루 먹은 음식이 별로 맛없었다 해서, 오늘 고른 내 요리가 별로라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잘못되어 지지 않듯이 말이야. 그렇지 않니?
그래도 행복하지 않다면 생각해봐야 해.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있는지 말이야. 너희들이 자랄 때 정말로 싫어하던 게 있었지. 바로 형제나 자매 혹은 남의 집 아이들과 비교해서 비난하는 일 말이야. 교육학 책에도 그러면 안 된다고 써 있더라. 엄마는 사실 가끔씩 견딜 수 없어 그걸로 너희들을 혼내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니까. 그런데 놀란 것은 네가 부모에게 그렇게도 요구했던 그 '비교 금지' 항목을 너 자신에게는 아무 저항감 없이 들이대고 있더라는 거야.
그러니까 이런 거. "남들은 다 부모님이 이렇게 해주는데 나는...", "남들은 이렇게 좋은 날 다 놀러가는데 나는...", "남들은 다 선물 받는데 나는...", "남들은 다 비키니 입을 만큼 날씬한데 나는..."
그래 이제 좀 정신이 드니? 그 남이 누굴까? 정말로 네가 엄마에게 "그 남이라는 사람들 중에서" 댈 수 있는 이름이 10명이나 될까? 아니, 단언컨대 그 남은 없어. 만일 있다면 그것은 머릿속에 존재하지. 바로 "그래야만 한다"라는 증후군. 그리고 그 "그래야만 한다"의 내용도 실은 그리 신빙성이 없고 천상의 항목인 것도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인생을 행복하게만 살다 간 사람은 없어. 다만 덜 행복하게 더 행복하게 살다 가는 사람들이 있단다. 어떤 것을 택할지는 네 몫이야.
그러니 눈을 크게 뜨고 이 순간을 깨어 있어라. 네 고민이 깊어지면 고민하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고 그 고민이 가리키는 바를 바라보아라. 깊은 고민은 네가 무엇에 얽매여 있는지를 말해줄 거야. 거꾸로 거기서부터 매듭을 푸는 것도 인생의 한 지혜야. 엄마가 마음이 힘들 때 몸으로부터 시작해보라는 말을 했듯이 말이야. 감사하지 않니? 우리는 로마의 황제도 먹지 못했던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니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참 풍요롭단다.
사랑하는 내 딸, 엄마는 오늘 오이를 사다가 오이지를 담그려고 해. 네가 어린 시절부터 '외할머니표 오이지'라고 불렀던 그 오이지를 말이야. 오이에 끓인 소금물을 부으며 나는 그렇게 어렸던 너와 그걸 받아먹던 너의 조그만 입과 그때는 아직 젊었던 외할머니와 나를 다시금 추억하겠지. 올여름 이 오이지를 먹으며 우리는 또 어떤 추억을 만들게 될지 엄마는 모른다. 다만 그렇게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읽다 보면 우리는 생각지도 못할 또 다른 좋은 것에 도달해 있게 될 거다. 엄마가 생을 믿고 그래 왔듯이 네 생을 믿어라. 걷듯 가벼이 앞으로 나아가거라. 다만 이 한순간이 너의 생의 전부라는 걸 잊지 마라.
그리고 네 몸은 네 영혼의 집. 그걸 가꾸는 이들에게 어떻게 나쁜 일들이 오겠으며 설사 온다 한들 무슨 근본적 위험을 줄 수 있겠니?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서로 좋은 하루를 맞자. 멀리서 서로 그리워하는 것도 이런 초여름 밤에는 감미롭겠구나. 그래그래 오늘도 그렇게 좋은.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사] 관계를 정리하는 중입니다(이평) (0) | 2023.06.28 |
---|---|
[필사] 기획자의 독서(김도영) (0) | 2023.06.24 |
[필사] 내가 공부하는 이유(사이토다카시) (0) | 2023.05.23 |
[필사]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사이토다카시) (0) | 2023.05.19 |
[필사] 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장재형) (0) | 2023.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