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번도 넘게 해온 일을 하면서 어떻게 기계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매일 똑같으면서 어떻게 매일 새로울 수 있을까.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어떻게 지금 해야 할 일에 몰입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를 만들까.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예술을 하면서도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이 있고,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하면서도 예술가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한수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휴머니스트
작은 일에 열심인 사람이 되고 싶다. '작은 일'을 '하찮은 일'과 동의어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건 큰 일을 잘 해낸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압도적인 경외감과는 다른 감정이다. '계속 그렇게 고집스러워 주세요.' 하고 조용히 응원하고 싶은 마음, 나도 내 몫의 작은 일에 진지하게 임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든다. 동시에 그 사람은 분명 큰 일도 잘 해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인생의 반환점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 이제는 삶의 태도를 조금씩 바꿔보고 싶다. 조금 멍청해도 성실하게. 조금 느려도 우직하게.
혹시라도 지금 자신에게는 성실히 일하는 것밖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낙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우직한 근성을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민첩하고 영리한 머리보다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도 끈기 있고 성실하게 해나가는 '지속의 힘'이야말로 일을 성공으로 이끌고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진정한 능력이니까 말이다.
-이나모리 가즈오, <왜 일하는가>, 다산북스
그 후론 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다른 일과 연이 되면 그 일도 해보고 있다. '꼭 이런 일을 해야지, 반드시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됐다.
몇 년 전,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를 보다가 크레딧에서 '명수현'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작가님이 여기서 왜 나와?'
혹시 동명이인은 아닐지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드라마 작가로 전향하신 모양이었다. 이미 이름만 들으면 아는 드라마도 많이 집필하셨다. 여전히 그 이름은 배신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시트콤 작가로 꿈을 정한 뒤 국문과에 진학해 대학을 졸업하고 이직을 할 동안 그녀는 각본가로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며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내 우상!'이라는 자랑스러움 뒤에 느껴지는 헛헛함. 용기가 없어서 가지 못한 길을 여전히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을 보며 느낀 그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특별히 야망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대단한 걸 해야지.' 하는 결심을 하고 시작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좋아하는 걸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사람들이 '대단한 걸 하네?'라고 말해주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꾸준히 앨범을 내고 후배들을 양성하는 이유는 '그냥 좋아서'였다. 좋아서 꾸준히 하다 보니, 게다가 잘하다 보니, 거기에 운까지 좋다 보니 성공이 따라왔을 뿐이다.
난 사랑으로 영화를 완성한 것뿐인데 누군가에게 '야망', '야심'이라는 틀에 맞춰 해석되는 것이 낯설었어요.
무언가를 사랑으로 하는 사람의 '성공'은 '피어남'이라는 단어가 훨씬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황선우, <멋있으면 다 언니> 뼛속까지 내려가서 만든다는 것: 영화 <벌새> 감독 김보라 편, 이봄
피어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땐 그 과정에 나만의 '쾌'를 조금씩 설치해 두자.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부스러기처럼 여기저기 '쾌'의 떡밥을 떨어뜨려 놓고 하나씩 회수하는 거다. 결국 과자를 줍다가 당도한 곳이 일터일지라도 말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한편으로 걱정도 됐습니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에 대비되는 뭔가 대단히 이상적인 행복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아,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가볍게 여기는 추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행복은 그런 거였습니다. 소소함. 홀로 소소하게 행복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 시간들을 머릿속 비좁은 방에 억지로 밀어 넣고는 '난 지금 행복해서는 안 돼'라는 주문과 함께 문을 닫아버린 후, 사소한 행복의 디테일이 내 자전적 기억에서 사라졌을 테지만요.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김영사
아니, 작가님... 절 아시나요...? 나는 줄곧 행복과 일상을 떼어놓고 생각했다. 행복은 행복이고 일상은 일상이라고. 행복은 너무 고귀하고 거대한 것이라 일상 따위와 감히 섞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런데 행복의 본질이 '소소함'이라니.
그러고 보면 내 주변 사람들은 일상에서도 행복을 잘만 발견하고 있었다. 널려 있는 행복들을 도토리 줍듯 모아서 수시로 꺼내먹었다. 모두 내 눈 앞에도 있었지만 무시하고 지나쳤던 것들이다. 가족과의 시간도 나중에, 하늘을 보는 것도 나중에, 여행도 나중에. '나중에'라는 말 뒤로 내가 줍지 못한 행복은 몇 바구니나 될까.
얼마 전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을 보며 마음이 좀 힘들었다. 주인공 조에게 과몰입을 한 탓이다. 주인공 조는 뉴욕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루한 일상을 버티는 힘은 재즈 밴드의 뮤지션이 되겠다는 꿈이다. 조는 그토록 동경하던 뉴욕 최고의 재즈 밴드와 협주를 하게 되고, 입단 제의를 받는다. 드디어 평생 간직해 온 꿈을 이룬 것이다. 인생 최고의 날, 조는 꿈에 부푼 눈빛으로 밴드를 이끄는 도로테아에게 묻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조의 물음에 도로테아는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내일 밤에 다시 와서 이걸 반복하는 거죠."
그 순간, 조는 깨닫는다. 꿈이 현실이 된 순간, 그건 또 다른 일상이 되어 반복될 뿐이라는 것을. 그 장면을 보던 내 표정도 조의 벙찐 표정과 다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조가 발견한 행복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풍경을 빛내는 초록, 늘 곁에 있던 가족들이다. 지루하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
행복을 조금 더 만만하게 바라보고 싶다. 쉽고 흔하고 편한 편의점처럼 생각하고 싶다. 행복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여기저기 발에 채이는 것이, 당장이라도 손에 쥐려면 쥘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니까. 남편과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오늘의 만만한 행복을 꽉 쥐어봐야겠다.
나는 '하면 된다'라는 말을 싫어한다. (중략) 그 말은 '된다'라는 결과를 빌미로, 남을 또는 나 자신을 가두거나 낭떠러지로 밀면서 몰아세우고 강요한다. 무조건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좋아해서 곁에 두니까, 마침내 되는 거다.
-김여진,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매일 피아노를 칩니다>, 빌리버튼
'그냥 좋아서' 매일 피아노를 친다는 작가의 에세이다.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작가는 피아노에 매우 진심이다. 매일매일 수련하듯 피아노를 치고,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구간에서 좌절하다가 울기도 한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그것을 스스럼 없이 표현하는 태도에 대한 부러움.
은공이의 일상은 안온하다. 은공이가 웬만한 일은 웃어넘기는 성격이라, 멀리선 그저 평화롭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애가 세상 무너질 듯 한숨을 쉰다거나(내가 잘 하는 것), 주어진 환경이나 운명에 불평하는 것(내가 잘 하는 것2)을 본 적이 없다. 은공이는 인터넷 뱅킹도 쓸 줄 모르고 요즘 집값이나 주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가뿐하게 산다. 나라면 지루하다고 느낄 일상에서 행복을 잘도 발견한다. 어제는 야식으로 떡볶이를 먹어서 행복하고, 오늘은 예쁜 구름을 봐서 행복한 식이다. 은공이가 행복을 느끼는 방식을 보면 조금 약이 오르기도 한다. 그건 마치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인 보물 찾기를 떠올리게 한다. 혹은 돌멩이를 줍고 '이게 내 행복'이라고 이름 붙이면 돌멩이가 보석이 되는 게임 같은 것. 아무튼 그 애에게 행복은 늘 손을 뻗으면 닿는 것이다.
얼마 전 은공이는 올해의 세 가지 목표를 다 이루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세 가지 목표가 뭐였는데?"
"파마하기, 사랑니 뽑기, 운전면허 따기."
"그건 목표가 아니라, 주간 계획 정도 아니냐?"
나의 비아냥에도 은공인 특유의 '아랑곳하지 않기'로 응수했다. 그저 올해 목표를 다 이루어서 만족스럽다며 흐뭇해할 뿐이었다.
강연자가 말한 행복의 공식은 이것이다.
행복의 공식 = 성취하는 것/바라는 것
그 공식에 따르면, 성취하는 것을 늘리거나 바라는 것을 줄이는 것, 둘 중 하나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은공이를 떠올렸다. 바라는 걸 줄이고 성취하는 걸 늘리는 방식으로 행복에서 허우적거리는 '행복의 공식'의 산증인을. 어쩌면 은공인 행복학 천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공식 따위 계산하지 않아도 나날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건지도.
저는 쾌락은 일회적이라고, 행복은 반복이라고 생각해요. 쾌락은 크고 강렬한 것, 행복은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에 있는 일들이라고. 그래서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습관론이 나오게 되는데, 행복한 사람은 습관이 좋은 사람인 거예요. (중략) 우리 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이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거예요.
-이동진, <이동진 독서법>, 위즈덤하우스
대단하지 않아도, 깊은 의미 같은 건 없어도 그저 좋아하는 세계가 있어서 나는 종종 스스로 부자라고 느낀다.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을 좀 더 단단히 쥐어본다. 그렇게 내 삶을 조금 더 좋아하는 쪽으로 이끌어본다.
-김민철, <치즈>, 세미콜론
어떤 사람들은 직장을 다니면서도 이직 '지원', 공모전 '공모', 자격증 시험 '응시' 같은 걸 했다. 합격의 기회뿐 아니라 낙방의 기회 역시 그런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어차피 넘어질 수밖에 없다면, 잘 넘어질 것.
아프지 않게, 다치지 않게,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조준호, <잘 넘어지는 연습>, 생각정원
어느덧 '낙방 전문가'가 되며 내가 깨달은 것은, 세상은 넓고 잘난 사람은 발에 채이는 돌멩이만큼이나 많아서 낙방하는 일도 그만큼 숱하다는 사실이다. 돌멩이에 걸려 넘어졌다고 해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굴 필요는 없다. 그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진 것뿐이니까. 조준호 선수의 말처럼 다치지 않게 잘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 그만이다.
유도에서는 낙법을 친 다음에 벌떡 일어나지 않는다.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천천히 일어나 도복을 단정하게 정리한다. 그래서 '잘 넘어지는 일'과 '잘 일어서는 일' 사이에는 '그리고'가 필요하다.
'그리고'는 넘어져서 입은 상처와 통증을 찬찬히 바라볼 여유다. 왜 넘어졌는지에 대한, 다시 넘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일어서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계획이다.
-조준호, <잘 넘어지는 연습>, 생각정원
사람들이 작당해서 나를 욕할 때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네 놈들이 나를 욕한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는 게 아니고, 니들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닐 거다. 그러니까 니들 마음대로 해봐라. 니들에 의해서 훼손되거나, 거룩해지는 일 없이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
-김경,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김훈 인터뷰, 생각의 나무
결국 열등감이 찾아올 때, 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굳이 그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며칠 동안 그러고 나면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땐, 그 생각이 '오늘 점심 뭐 먹지'보다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는 때가 온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문제가 있을 때마다 뚝딱뚝딱 해결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가끔은 시간에 맡겨두고, 조금 못난 내 모습을 인정하면서, 부정적인 마음이 사그라들길 기다리는 시간들도 필요하지 않을까?
덴마크의 심리학자 일자 샌드는 <어쩌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됐을까>에서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멀어지는 수많은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당신이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면 기존에 교제하던 사람들 중에서 더 이상 당신과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사실 괴로운 일입니다. 질투는 곧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자 샌드, <어쩌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됐을까>, 인플루엔셜
마지막 문장에 허를 찔렸다. 열등감이라는 감정이 왜 이렇게 괴로운가 했더니 '질투는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잘난 친구를 보는 게 배가 아파서가 아니라, 친구로 인해 내 결핍을 자꾸 비춰보게 되어 괴로운 것이다. 열등감은 타인과의 비교에서 생기는 감정이라는데 결국 해결책은 나에게 있었다. (왜 인간관계의 거의 모든 문제는 돌고 돌아 나 자신과의 문제로 귀결되는 걸까?) 결국 이 지난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야만 한다. 결핍이 해결되지 않는 한, 열등감은 내 결핍을 충족한 사람들을 숙주 삼아 평생 나를 따라다닐 테니까. 그러니 열등감을 없애는 첫 번째 스텝은 마음의 마른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조금씩 그 우물을 채우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의 행복에 순수한 응원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리사는 내 값싼 동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잘 자라고 있었다. 태생적인 환경의 열악함이나 상대적인 부족함은 있을지언정, 그게 리사의 인생을 비극적이거나 불쌍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리사가 삶에서 느꼈을 행복이나 기쁨, 풍파에 부딪히며 배웠을 가치 있는 것들에 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스스로 돈을 벌겠다고 후원도 닿지 않는 지역으로 떠난 걸 보면 앞으로도 리사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당차고 씩씩하고 결기 있게. 후원이 끊어졌을 때에야 나는 리사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한 움큼 부끄러움을 삼키며 나는 배웠다. 동정이든 차별이든 그 아래 깔린 근본 생각은 다르지 않다는 걸. 어떤 대상을 자기 삶의 반경에 없는 분리된 존재로 취급하는 것(고아들이 불쌍하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특정한 면만 부각시켜 인격화하는 것(장애인은 무능하다), 자신은 결코 되지 않을 이질적 대상으로 상대를 보는 것(공부 안 하면 노숙인 된다). 하나같이 타자화하는 말들이다.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서해문집
공감과 동정을 가르는 한 끗의 선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늘 다짐한다. 함부로 상대의 불행을 가늠하지 말자고. 먼저 울어버리지 말자고.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짐작하지 않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선의마저 필터링해야 한다면 세상은 한층 더 각박해지지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연습해보려고 한다. 평등한 시선에서 감정의 과잉 없이 전하는 조금은 건조한 위로를.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은 본인의 과제일지 모르나, 나를 무시하느냐 마느냐는 타자의 과제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지만 개입하거나 저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래, 마음대로 해보시든지' 하고 타인의 과제와 나의 과제를 분리하면 그만입니다.
'타인의 과제를 제멋대로 짊어지려고 하니 괴로울 수밖에 없다'고 아들러는 말합니다. (중략) 나는 나의 과제에 집중하면 그만입니다. 타인의 과제를 짊어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이 아닌 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가면 됩니다.
-고바야시 쇼페이, <그래서 철학이 필요해>, 쌤앤파커스
머리로는 선을 그으면서도 기어코 타인의 과제를 끌고 와 끙끙 앓는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그랬다.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마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렇게 다른 사람의 과제에 관여하는 통에 정작 내 마음 돌볼 에너지는 남아나지 않았다.
오은영 박사는 한 상담 프로그램에서 타인의 비판이 두려워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연예인의 고민에 명쾌하게 답했다. 누가 나를 싫어한다 해도 그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니 돌려주라고, 내 것이 아닌 감정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라고. 너무 간명해서 서운할 정도인 그 솔루션을 곱씹어보니 '과제를 분리하면 그만이라'던 아들러의 말과 닿아 있다.
이제는 '내 과제가 아닌데 어쩔 수 없잖아.' 하는 마음으로 흘러가게 두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인간관계 때문에 마음이 고달파질 때, 아들러의 말을 떠올려보자. 내 것이 아닌 과제에서 관심을 거두고, 대신 나에게 열중할 에너지를 비축하자. 이때만큼은 우정도 동료애도 제쳐두고 너와 나의 과제를 냉철하게 분리하는 모진 사람이 되어보는 거다. 당장 해결해야 할 내 과제만 해도 산더미니까.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
마실 수 없는 술,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게 있다.
-에쿠니 가오리,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소담출판사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원고를 몇 번 고쳐 쓴 다음에는 한 달 정도 서랍 속에 넣어두고 그냥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는 그 과정을 '재워둔다'라고 표현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진득하게 재워둔' 다음, 시간이 지나 작품을 펼쳐보면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또렷하게 보인다고.
어쩌면 인간관계에도 '재워지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서랍에 넣어두고 내버려두는 시간.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시간만 흘렀을 뿐인데 한참 뒤 서랍을 열어보면, 어떤 것들은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나도 너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으므로.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지 시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여전히 인간관계는 어렵다. 도통 예측할 수 없고, 애쓰는 대로 되지 않으며, 노력한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 50대 선배들의 증언처럼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인간관계는 모래알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무 꽉 쥐려고 애쓰지 않으려 한다. 그저 하나씩 배워나갈 뿐이다. 아무렇지 않게 멀어지듯 아무렇지 않게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음을, 가끔은 재워두는 시간이 필요한 관계도 있다는 것을 배운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서러움은 그렇게 현재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결핍이, 어쩌면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비어 있는 부분을 채우려 애쓰는 사이, 그런 것을 중요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지도.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알에이치코리아
과거의 서러움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나 역시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장점보다는 단점에 골몰하며 보냈으니까. 당시엔 괴로웠지만 그 고민의 시간들이 알게 모르게 나의 좋은 부분들에 기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같은 결핍을 가진 누군가의 마음을 헤어릴 수 있는 일말의 공감 능력이라도 만들어 주었을 것이라고. 그러니 누군가가 밝고, 해맑고, 긍정적이라는 것은 어쩌면 결핍을 채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일 수도 있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나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안간힘. 비어 있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내면을 단단하게 다져가며 완성한 정체성. 나는 그런 내공을 가진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품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일을 줄이기 위해 내가 찾은 방법은, 상투적이게도 책을 읽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눈 앞에서 지적당하지 않고도 언어 감수성을 높일 수 있다.
비거니즘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는, 채식을 하는 친구에게 "솔직히 고기 먹고 싶지?", "식물은 안 불쌍해?" 같은 장난섞인 말이 얼마나 무례한지 알게 됐다. 고유한 존재로 어린이를 바라보는 책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면서는 어린이들을 뭉뚱그려 '초딩'이나 '잼민이' 같은 말로 희화화하지 않기로 했다.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내 언어를 돌아보게 된다. 모든 책은 저자가 사랑하는 무언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 그 시선을 체험하고 저자의 마음을 헤아리면 '그런 말은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지.' 하고 공감하게 된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기에, 우리는 좀처럼 이 바깥을 상상할 수가 없다.
-배윤민정,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푸른숲
가족 호칭의 불평등을 다룬 이 책은 비단 비대칭적 호칭 체계에 대한 문제 제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호로써의 언어를 넘어, 언어가 은밀하고 뭉근하게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방식을 지적한다. 무의식중에 쓰는 말에도 권력이 있고 위계가 있음을, 그것이 누군가를 무겁게 짓누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말이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쩌면 언어를 고르는 일은 상상하는 일과 다름 없을지도 모른다. 나를 둘러싼 의심의 여지 없는 세계의 바깥을 상상하는 일.
그럼에도 자주 실수하고, 지적당한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그 순간을 조금 참아내면, 말을 고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나의 언어는, 그리고 세상의 어떤 부분들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라 믿는다.
온화한 모습으로 다정한 말을 건네지만, 결과적으로 고통을 준다면 잔혹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중략) 내가 생각하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은 상대를 배려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도움을 준다. 자신의 온화함과 다정함을 통째로 던지기만 한다고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하타노 히로시, <내가 어릴 적 그리던 아버지가 되어>, 애플북스
퍼스널 컬러가 좋아하는 색깔이면 안 될 게 뭐란 말인가. 말 그대로 퍼스널 컬러인데. 사진 속 '제일 맘에 쏙 든' 주황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자꾸만 몇 개의 틀에 나를 욱여넣으려고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8개로 혹은 16개로 카테고리를 나누고 그중 어디에 속할지를 결정하는 건 간편한 선택이다. 누가 그걸 정해주면 더 좋다. 물론 자신에게 뭐가 어울리고,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이런 틀을 활용해 취향을 더 뾰족하게 다듬고 다채롭게 확장한다. 하지만 아직은 취향이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 선다형인 나 같은 사람들에겐 그 틀은 도리어 스스로를 가두는 벽이 되어 버린다.
물론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 내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불확실한 것이 많을수록 가장 확실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나의 마음이 향한 것들로 완성한 나만의 취향 지도 안에서 나는 쉽게 행복에 도착한다.
-김민철, <하루의 취향>, 북라이프
저자는 취향만으로 책 한 권을 쓸 정도로 뾰족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식의 나는 늘 이런 사람들을 선망했다. 좋아하는 것이 명확한 사람, 지금 최고 유행하는 것을 갖다 줘도 '그건 내 취향이 아니야.' 하며 고개 저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에게도 취향이란 건,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몇 개의 답안지에서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지도를 그리듯 꾸준히 그려나가는 것이다.
30년을 넘게 살아 놓고 아직도 내 취향을 제대로 모른다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130세 만기 보험이 나오는 시대를 살며 나에 대한 탐구를 멈추기에는 이르다. 그걸 멈춘다는 건 행복에 가닿기를 멈추는 일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원색은 내 얼굴에 쥐약이다. 붉은 톤의 옷을 입는 날엔 얼굴이 더 붉어 보이고 노란 톤의 옷을 입은 날엔 유달리 거무죽죽해 보인다. 그래도 내 퍼스널 컬러는 내가 정한다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아직은 아주 작은 동네 지도에 불과하지만 작으면 어때, 계속해서 '나만의 취향 지도'를 그려 나가고 싶다.
예민성은 자신의 에너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일상생활의 변화나 스트레스에도 다른 사람보다 에너지 소모가 더 큽니다. 자신의 예민성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생활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에너지를 적절히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홍진,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글항아리
살다 보니, 시비를 가리고 진상을 규명하는 것보다 나를 스트레스 받는 환경에서 구제하는 것이 더 우선일 때도 있다. 그건 비겁한 것도, 비효율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 사소한 데 쓰이는 마음의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
부정적인 에너지를 아껴 좋은 에너지로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선 상대를 고쳐서 갈등을 해결하려는 생각일랑 일찌감치 접어두고, 내 선에서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게 훨씬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게 예민한 사람들이 이 소란스러운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일지도.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유명한 드라마 제목처럼 말이다.
귀여운 것들이 세상을 구한다더니. 작고 귀여운 이어플러그는 오늘도 예민한 나의 세상을 구한다.
남에게는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가장 한심하고 초라한 모습을 스스로에게 매일 보여 주고 산다면 그것이 진정 내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유행처럼 불고 있는 자존감을 높이란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험한 행동을 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신미경,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 뜻밖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의 저자는 제철 재료를 공수해 정성스러운 1인분의 음식을 만들고, 아침에 눈을 뜨면 요가 매트를 펼치는 일상의 루틴에 대해 말한다. 누군가와 함께 할 때만큼이나 에너지가 필요한 이 일들은 오롯이 자신을 보살피고 돌보기 위한 것이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좀처럼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자취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빈틈없고 살뜰한 저자는 최소 유니콘, 책의 장르는 판타지나 다름없었다. 이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세상엔 침구에 뿌리는 향수를 뿌리는 사람들이, 의식처럼 식탁보를 펼치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정말로 있다.
혼자 있을 때도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종일 집에 있어도 하루 한 번은 씻고, 좋아하는 잠옷을 입고, 무해한 음식을 먹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사람. 그건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진짜 취향 말이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기 위해 할 일은 생각보다 거창한 게 아닐 것이다. 나를 행복하게 할 진짜 내 취향을 찾는 것, 타인을 만날 때만큼의 에너지를 나에게도 투자하는 것, 나에게 조금 더 다정해지는 것. 그뿐일지도.
오늘은 자기 전에 향수를 뿌려봐야겠다.
내가 인생 리셋 놀이를 그만두게 된 건, 인생이 매일매일 계속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평생 간직하고 싶은 행복과 기쁨, 환희 잊고 싶은 실수와 흑역사, 절망 같은 것들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좋은 날들과 좋지 않은 날들의 총합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그러니 인생 리셋이란 과거를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더 나은 오늘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방식으로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주 조금씩 배의 방향을 바꾸는 조타수처럼 어제보다 더 나은 하루를 살다 보면 결국은 완전히 다른 종착지에 닿아 있겠지.
그래도 가끔은 '여태까지는 없던 걸로 치고! 인생 까짓 거 다시 시작하면 되지 뭐!' 하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패기가 그립다.
책을 읽는다고 유능하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모두 자기만큼의 사람이 될 뿐이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읽는 삶이, 적어도 나에게는 꽤 만족스러웠다는 사실이다.
-이현주, <읽는 삶, 만드는 삶>, 유유
어쨌든 나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 중 책을 읽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더욱 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계속 읽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다 보면 '책이 내 인생을 바꿔줬어요.'라고 할 만큼은 아니어도, 조금이나마 더 좋은 어른의 모습에 가닿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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