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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이주영)

아름다운 존재 2023. 11. 6. 08:44

조금만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다소의 불편함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불편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게 되니까. 생활과 삶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활은 생각하지 않아도 유지되지만, 삶은 생각하지 않으면 망가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사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나의 삶을 망칠까 겁이 났던 것이다. 생각하는 생활을 하면 내 삶은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소중한 삶을 위해 생활과 삶의 경계를 허물기로 했다.

 

에두아르는 그라제콜에 입학하기 전까지 자신이 아는 것도 많고 무척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랑제콜에 입학한 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들어간 그 학교에 모인 아이들은 다들 천재였다. 에두아르처럼 죽어라 열심히 공부해서 그 학교에 합격한 아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 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은 무언가를 알기 위해 매번 읽어야 하고 때론 읽은 책을 다시 읽어야 했던 에두아르와는 달리 스윽 한 번 훑어만 봐도 다 기억했다. 에두아르는 읽고 읽고 또 읽어도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가기 힘든 아이들 사이에서 에두아르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뿐이었다.

에두아르가 '머리가 좋다'는 말에 민감한 것은 천재들 사이에서 느꼈던 열등감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어떻게 하다가 지금의 미친 책벌레가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에두아르는 천재들 사이에서 상대적 열등감을 느끼면서 그들과 동등해지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러는 사이 책 읽기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처음으로 그가 대단해 보였다.

천재들 사이에서 부딪혔을 자신의 한계에 좌절하지 않고 지금의 책벌레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일 테니까. '열등감'으로 불안해지고 우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열등함을 보완하기 위해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열등감은 가져볼 만한 것 같다.

 

남편이 어릴 적 어머니를 졸라서 받아낸 어려운 책은 한두 권이 아니다. 생떼쟁이 막내아들을 키우느라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다. 어느 날 시어머니께 아이가 읽지도 못할 그 어려운 책들을 왜 사주셨냐고 여쭤본 적이 있다. 어머니는 사달라고 해서 사줬다고 하시며 이런 설명을 덧붙이셨다. 지금은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으니 나중에 커서 이해할 수 있을 때 사주겠다고 하면 아이는 그 책을 커서도 읽지 않게 된다. 단, 생떼를 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주어야 한다. 아이가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욕구가 절정에 달하면 그 물건에 대한 애착과 호기심이 생긴다. 부모는 아이를 관찰하면서 아이가 관심을 보이거나 관심이 생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되는 순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의 관심거리와 관련된 책이나 물건을 사주어야 한다. 아이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부모 마음대로 먼저 제안하거나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고보니 시어머니는 내게도 이런 방법을 썼던 것 같다. 결혼 후 내게 가장 시급한 것은 프랑스어 학습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집에 갈 때마다 모아 놓은 신문기사 조각들을 주셨다. 기사 내용은 한국 관련 뉴스, 내가 관심을 보였던 인물이나 장소에 관한 것들이었다. 프랑스에서 살려면 알아야 하지만 내 관심 밖의 것들과 관련된 기사를 오려주신 적은 한번도 없었다. 마흔 넘긴 중년에게는 따분한 내용의 어린이용 동화책을 선물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인상파 화가와 관련된 두꺼운 책들을 선물해 주셨다. 생떼를 부리기에는 너무 나이 든 손녀뻘 막내며느리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살피면서 프랑스어 공부를 즐겁게 하기를 바라셨던 거다. 어머니의 호기심 자극법이었던 거다.

이런 어머니 덕분에 에두아르는 평소 관심있는 것들을 책을 통해 하나씩 알아가며, 알아가는 것에 대한 즐거운 맛을 보았을 것이다. 동시에 관심이 가는 것도 하나씩 늘어났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지적 호기심은 하늘을 찌르게 된 것 같다.

에두아르의 지적 호기심이 부러운 이유는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가져 멋져 보이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알고 싶은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일이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독서는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에두아르는 나보다 더 즐거운 삶을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야기의 전말은 내가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책을 읽은 것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지적 부적절함에 대하여'라는 꼭지에서 "교육의 목적이 지식이 아닌 지혜를 키워주는 데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골백번은 들어왔고 천 번 만 번 동감하는 소리다.

저자는 이야기에 설득력을 싣기 위해 몽테뉴의 교육 철학이 담긴 말과 생각을 인용한다.

선뜻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그 사람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아는가" "그 사람 시와 신문을 쓸 줄 알아?"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 사람은 더 선해지고 현명해졌는가?" 우리는 가장 많이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오성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공허하게 비워놓고서 오로지 기억을 채우기 위해 분투한다.

 

굳이 책을 사게 된 경위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지 않아 건성으로 들었지만, 그의 말을 쉽게 요약 정리하자면 'A책을 읽다보니 B를 모르겠어서 B에 관한 책을 사서 읽었는데, B에 관한 책을 읽다보니 이번엔 C와 D를 모르겠어서 C와 D에 관한 책을 사서 읽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결론적으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게 늘어난다.

에두아르가 미친 책벌레가 된 데에는 이러한 사연도 있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여러 권의 책을 돌려 읽는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모르는 것이 늘어나고 있다.

오늘보다 내일 더 무식해져 있을 사나이, 내 남편 미친 책벌레 에두아르가 유식해질 날이 오기는 할까?

 

에두아르가 남들은 다 읽은 책을 읽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 무식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읽지 않은 책을 읽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책과 작가들이 존재하며, 평생을 다해도 그들의 존재를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가 아는 무언가를 모르는 사람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공부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영광을 보자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에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두아르는 출세가도를 달리며 대외적으로 성공한 위치에 오르고 싶어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적 호기심을 채워나가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짓이라도 평생 그만큼 했으면 지겨울 만도 한데 오십 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공부하고 독서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에두아르는 외삼촌 부부를 설득할 묘안을 생각해 냈다며 즐거워한다. 한마디도 못하고 찌그러져 있어야 했던 식사시간 내내 혼자 설득법을 강구하고 있었나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모파상의 단편소설 <부아텔 영감>을 찾아 전문을 스캔하고 프린트한 후 손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소설은 오물청소부로 일하는 '부아텔 영감'의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한다. 부모가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와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면 오물청소부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푸념과 함께 옛일을 회상한다. 군복무시절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카페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을 만나게 된 부아텔은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 부아텔은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가서 부모에게 그녀의 존재를 알린 후, 제대와 동시에 부모에게 그녀를 데리고 가서 소개한다. 그녀를 직접 본 부모는 피부색이 까매도 너무 까맣다는 이유로 아들의 결혼을 반대한다. 부아텔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떠나보낸다. 사랑하는 여인을 보내야만 했던 부아텔은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며 살아간다. 그녀와 헤어진 후 부아텔이 오물청소부가 되기까지의 삶을 작가 모파상은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 후반부에 부아텔의 한마디 대사로 그의 삶이 얼마나 허망했을지 내비친다.

그 일 이후, 나는 아무것에도, 그 아무것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지요. 어떤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는 내가 되었지요. 오물청소부.

에두아르가 생각해 낸 이 노골적인 방법이 효과가 있을지 의문스럽다. 며칠 후, 외숙모로부터 답장이 도착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나의 조카 에두아르'로 시작하는 외숙모의 편지에는 모파상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단편 <부아텔 영감>을 접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19세기 말에 쓰인 이 작품이 21세기인 오늘까지 전하는 바가 크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녀 아들의 결혼 문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에두아르가 생각해 낸 방법이 외삼촌 부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몇 달 후, 결혼식 초대장을 받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도 하지만, 에두아르의 묘안이 통한 것 같아 청첩장을 받아들고 우리는 만세를 불렀다. 유명 영화감독과 패션모델의 결혼식에 걸맞은 화려한 파티가 열렸다. 결혼파티에서 외삼촌 부부는 에두아르를 보자 꼭 껴안아주었다. 외숙모와 얼싸안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뿌듯함으로 충만한 미소가 가득하다. 새벽녘까지 계속된 결혼파티에서 에두아르는 새신랑보다 더 해맑게 웃고 있다. 당사자보다 해결사가 더 행복해 보인다. 해결사를 남편으로 둔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은 스스로를 남과 다르다고 믿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남과 다른 나를 꿈꾸는 인간의 기본 심리 저편에는 허영심이 자리하는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우리가 삶이라는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며 살아가고, 고프먼의 말대로 우리의 자아가 목격자의 해석으로 평가되는 '연출된 자아'라면, 우리 모두는 일정량의 허영심을 필요로 한다. 허영심은 우리를 보기 좋게 치장하는 것이자 나 스스로를 대우하는 하나의 도구인 셈이다.

'허영심',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닌 듯하다. 그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기애가 없다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아닐까?

24시간 나와 함께 있는 나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평생을 온전히 사랑받는 것일 테니까. 나는 나를 바람직한 형태로 사랑하고 있는가? 나의 허영은 나를 목격하는 사람들 눈에 멋지게 보이는가? 허영심의 힘으로 삶이라는 무대에 '나'라는 주인공을 어떻게 연기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내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내 배역을 잘 연기했더냐? 그랬다면 박수를 쳐다오."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침대 위에서 거울을 가지고 오라 명하고, 머리를 빗고 수염을 깎은 후에 했다는 말이다.

 

<작문 숙제>

다음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의 일부이다. 글을 읽고 '보바리 부인'에게 인생의 희망을 줄 수 있는 편지를 작성하시오.

그녀 가슴에 남은 것은 공허뿐이었다. 그리고 똑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제 항상 똑같은 날들이 하나씩 줄지어 지나가는 것인가! 셀 수도 없이 많은 날들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이어진단 말인가! 다른 사람의 경우,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적어도 뭔가 생활의 변화가 일어날 기회가 있다. 때로는 우연한 일로부터 무한한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그러면 환경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신의 섭리인 것이다. 미래는 깜깜한 복도이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문은 꽉 잠겨 있다.

그녀는 연주를 그만두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연주한단 말인가? 누가 듣는다고? 그녀는 연주회에서 짧은 소매 벨벳 드레스를 입고 에라르 피아노의 상아 건반을 가벼운 손끝으로 두드릴 일이 없을 것이고 감탄의 속삭임이 미풍처럼 주위를 감도는 것을 느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뭣하러 수고스럽게 연습을 한단 말인가? 그녀는 스케치북도 자숫감도 장롱 속에 처박아 버렸다. 뭣하러? 무슨 소용이 있기에? 바느질은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

'책은 충분히 읽었어.'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하릴없이 앉아서 부젓가락을 발갛게 달구거나 비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중략)

그녀는 다시 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고 숯불을 일궜다. 열기에 몸이 나른해지자 권태가 더욱 무겁게 엄습했다.

 

"가끔 서로에게 작문 숙제를 내주는 놀이를 해보면 어떨까?"

"좋아!"

 

며칠 후, 이번에는 내가 에두아르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다음은 시마다 마사히코의 일기체 소설 <네가 망가지기 전에>의 일부이다. 다음 글을 읽고, 피노키오와 곰돌이 푸, 각각의 시선으로 바라본 하늘을 상상하고 일인칭 시점으로 묘사하시오.

이렇게 인적 없는 오후의 교외 공터에서 곰돌이 푸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모든 행동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야 직성이 풀리는 피노키오는 물었다.

"푸, 너는 거기서 뭐 하고 있니?"

푸는 마늘냄새 나는 트림을 하면서 대답했다.

"군만두를 오십 개나 먹었거든. 너무 배가 불러서 움직일 수가 없어."

소문대로 상당히 칠칠치 못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 피노키오는 손을 내밀어, "나는 피노키오야. 잘 부탁해"라고 인사를 건네며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푸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푸는 드러누운 채, 얼빠진 목소리로 "나 이렇게 있고 싶어. 너도 같이 누워 봐"라고 말했다.

"지금 나는 여행하는 중이라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어. 무엇보다 빨리 성숙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피노키오가 냉담하게 잘라 말하자, 푸는 낭창한 소리로 웃었다.

"뭐가 웃겨?"

피노키오는 발끈해서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나는 하늘을 보고 있어. 하늘 같이 보자."

푸의 말대로 하늘을 올려다 본 피노키오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하늘 따위 어디에서 보든 똑같아. 나는 이것보다 훨씬 파란 하늘과 높은 하늘을 본 적 있어." (중략)

"나는 뭔가 행동하지 않으면, 따분해서 죽어버릴 거야."

"나는 따분해도 죽지 않는데."

"정말? 치매 안 걸리고 잘도 버티는구나. 아니면, 미친 건가?"

"나는 어느 쪽도 아니야. 네가 보기엔, 내가 미쳐 보이는지 모르지만 말이야 하지만 우린 같은 세상에 살고 있어. 너는 열심히 세상 속에 자신을 확립하려 하고 있어. 하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나는 세상 속에 내 자신이 녹아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나는 하늘이 될 수도 있고, 들판이 될 수도 있고, 파리가 될 수도 있는 봉제인형이 되고 싶어. 그런데, 너는 사람으로 진화하는 것에 집착하는 마리오네트야."

피노키오는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푸, 너는 세상과 싸우려고도 하지 않고, 세상을 여행하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나는 계속 여행을 해왔어. 여행은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어 주지."

푸는 다시 군만두 냄새를 풍기는 트림을 한 번 하고, 양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글: 에두아르 발레리 라도-

햇살 좋은 날이나 바람이 세찬 날, 테라스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주영이 급하게 거실로 뛰어 들어와 외칩니다.

"문장이 떨어진다!"

햇살과 바람은 자주 그녀에게 문장을 선물하는 듯합니다. 그런 날이 아닌 오늘도, 주영은 지난여름부터 아팠던 허리를 불편한 의자에 고정한 채, 인내심 있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끝이 없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한 시간을 보내고, 하나의 이미지와 한 개의 단어를 오 분 넘게 떠올리는 일.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배가 고파지지 않는 이상 아무도 제지할 수 없고 멈추게 할 수 없는, 일상과 상관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일. 이처럼 매력적인 일이 또 있을까요?

 

책이란 우리네 인생과 함께하는 좋은 벗인 것 같습니다. 때론 다정하게 다독여주고 때론 따끔하게 충고하며, 어떤 때는 생각지 못한 고민을 털어놓아 당황하게 만듭니다. 책이란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그런 조금은 골치 아프지만 사랑스러운 친구입니다. 저는 그런 친구가 제법 많고 앞으로도 계속 사귀어나갈 생각입니다.

 

-에필로그: 이보다 더 성공적인 삶이 있을까-

나는 성공에 관심이 많은 우리에게 '에두아르식 성공을 위한 인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애플의 기술에 인문학에서 얻은 상상력, 창의력 등등의 무언가가 녹아 있는지는 몰라도 그 기술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편하고 게으르게 살 수 있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배신감마저 든다. 계산기 대신 암산을, 구글맵 대신 지도와 그림자의 방향을 고집하는 에두아르는 어쩌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편하게 살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건 아닐까?

여기 주목받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에두아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좋지 않은 머리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사용하려 드는 고집쟁이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덜렁이 모지리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읽을 수 있는 능력'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돈이나 명예로 얻은 성공은 언제 깨질지 모를 아슬아슬함이 있다. 우리는 그래서 불안한지도 모른다. 에두아르는 그저 앉아서 주구장창 읽으며 뭔가를 알아가는 것이 즐겁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며 감탄하고 동감하며 울고 웃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풍요롭게 만든다.

스스로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는 삶.

이보다 더 성공적인 삶이 있을까? 절대 깨지지 않는 내면의 단단한 풍요로움으로 무장한 에두아르는 진정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