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그 일, 그 순간에 주목하고 집중하려면 '느낌'을 올리고 '의식'을 내려야만 해요.
예를 들어 지금 산책을 한다고 칩시다. 지금 눈앞의 풍경에 집중하고 싶다면 올곧게 선 겨울 나뭇가지, 구름 낀 파란 하늘, 새들의 날갯짓, 묵직한 바람소리를 느끼면 됩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어제 회사에서 잘못한 일, 내일 정리해야 할 것들, 풀지 못한 관계, 이런저런 약속 같은 것들을 의식하면 눈앞의 것들이 다 떠나버려요. 그러니까 느낌을 올린다는 건, 나를 감싸는 바람, 지나가는 새소리, 향기, 모든 것을 감각하는 겁니다. 몸속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요. 그처럼 온몸이 촉수인 사람으로 살려면 의식이 아니라 느낌을 올려야 하는 겁니다.
제 인생에도 어떤 한순간에 온전히 머물렀던, 감각만이 살아 있던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몇 번은 있습니다. 책을 통해 '현재에 집중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 마흔 즈음 이후 다섯 번 정도였어요. 이제는 그런 순간을 더 늘리고 싶고 매 순간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장과 순간>에 쓴 '몸으로 읽는다'라는 말은 제가 책 속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들, 깨달은 바를 몸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실천하며 살고 싶다는 바람이자, 그렇게 살겠다는 의지를 담은 말이었습니다. '의식을 누르고 느낌을 올린다'라는 문장은 그 첫 번째 방법이 될 겁니다. 다시 출발선에 선 느낌입니다.
또 한 가지 노력은 가능한 한 몸을 많이 움직이려고 합니다. 50대 중반에 깨달은 것인데 어느 날 제 스스로를 돌아보니 몸은 소파에 붙이고 넷플릭스를 보면서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시끄럽더라고요. 그 이후 반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마 대부분 동의하실 텐데 몸을 바쁘게 움직일 때 오히려 머릿속이 비워집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몸은 번잡하게 하고 마음은 평안하게 두려고 해요. 걸을 수 있는 거리는 걷고, 쉬는 날에도 가만히 있기보다 운동을 하거나 움직이려고 하고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일상에서도 쾌감의 시간이 늘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간과 장소, 여건 등 완벽한 조건이 갖춰져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초급자의 단계라면, 길을 걷다가도 그런 쾌감의 순간을 만날 수 있는 것이 고급자의 수준일 겁니다. 초급자 단계를 벗어나 고급자의 단계로 나아가고 싶어요.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 했습니다. 어느 곳이든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머무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는 뜻입니다. 저 역시 그 방향을 향해서 어렵지만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되었든지 간에 거기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선택했다면 돌아보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 나의 상황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극적인 희열을 추구하기보다 좋은 상태인 '쾌'를 유지하려고 하죠. 그렇게 생각하면 때로는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산책하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저 대학에 가고 싶다, 저 회사에 가고 싶다, 저 직업을 갖고 싶다'라는 바람 자체는 욕망일 수 있지만 여기에 '노력'이 더해지면 '희망'이 됩니다. 그러나 노력 없이 이 같은 바람이 실현되기를 원한다면 그건 '망상'입니다. 이걸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랭 드 보통은 "쾌락의 가장 큰 장애물은 망상"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을 욕망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망상의 시대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봐요. 욕망과 상상, 희망을 구분하고 그 사이에서 길을 찾아야 해요. 망상에 가까운 욕망을 내려놓고 희망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찌개백반을 먹으면서 캐비어가 올라간 랍스터를 먹고 싶어 하는 건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이 찌개백반을 가장 맛있게 먹는 것, 이것이 행복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친구가 들고 있는 신형 휴대폰이 갖고 싶을 수 있지만 내 휴대폰이 구형이라고 해서 친구의 신형 폰보다 모든 게 안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내게 익숙한 버튼, 사용 방식, 무게나 휴대성 등 좋은 점이 분명히 있어요. 이렇게 시작하면 이야기가 끝도 없을 거예요. 내가 이미 가지고 있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잘 들여다보고 좋아해보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겁니다.
'정결한 고독'은 이해인 수녀님의 시에 있는 말이고, '티 없는 희열'은 김화영 선생의 표현입니다. '산뜻한 낙화'는 법정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저는 이 세 가지가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단어의 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결한 고독'을 먼저 얘기해볼까요?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은 고맙고 좋은 일이지만 그런 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어요. 정결한 고독은 그런 가능성을 늘 생각하자는 뜻에서 제 마음에 담은 말입니다. 고독을 기본값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SNS에서 '좋아요'나 '하트' 같은 걸 받고 싶어 하죠. 내가 올린 콘텐츠에 '좋아요'가 100개였는데 200개가 되면 좋지만, '좋아요'가 하나도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럴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불행하다고 느낄 거예요. 하지만 하트가 0인 것을 기본으로 두고 반응이 좋을 때를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한다면 하트 개수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겠죠.
비슷합니다. '나'라는 사람의 기본값을 '나 하나', 1로 놓자는 거예요. 어쩌다 2가 되고 10이 되고 100이 되면 신나는 일이겠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것, 예외라고 생각하자는 겁니다.
저는 여전히 꽤 바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매일 회사에 출근하고 보고도 받고 회의도 하고 미팅도 잦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누구와도 마주치거나 대화할 일이 없기도 합니다. 보고받을 일도 없고 미팅도 약속도 없고 제가 참석해야 하는 회의도 없는 날인거죠. 그런 때 괜히 제 사무실 밖으로 나가 후배들에게 먼저 말을 붙여도 되지만 그러지 않아요. 제 방에서 제가 좋아하는 책을 ㅇ릭거나 개인적인 일을 하면서 오롯한 시간을 보냅니다.
앞으로도 세상과 꾸준히 교류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제 의지와 달리 삶은 어느 순간 나를 혼자 남겨둘지도 모릅니다. 살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분명히 고독한 순간이 올 겁니다. 그 순간을 정결하게 맞느냐 아니냐는 자기 자신에게 달렸어요. 그러니 '정결한 고독'이란 내 척추 하나로 제대로 서 있는 것에서부터 생을 시작하자는 이야기입니다.
'티없는 희열'도 인생에서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지금 이 순간의 희열을 느끼지 못해요. 맑고 깨끗한 물을 마시면서 이게 맥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그 맑은 물을 온전히 즐기지 못해요. 거울에 비친 주름진 얼굴을 보면서 내가 스무살이면 진짜 좋을 텐데, 하며 한숨 쉬죠. 희열과 망상을 맞바꾸는 겁니다. 10년 후엔 분명 지금의 나를 그리워할 텐데요.
언젠가 문득 떠오른 문장이 있어서 적어뒀습니다. "사는 게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한 답. 숨 쉬는 게 사는 거다." 지금 숨 쉬는 게 희열이에요. 가만히 느껴보니 사는 게 숨 쉬는 것이더라고요. 뒤늦게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이 쓴 시에 "걸어 다니는 게 행복이다"라는 문장이 있었어요. 숨을 쉬면서, 물을 마시면서,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티없는 희열로 가득 차야 합니다.
'산뜻한 낙화'는 간단합니다. <문장과 순간> 마지막에 캔 윌버의 <무경계> 중 한 구절을 실었는데요. 늙은 고양이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 숲속 나무 밑에 들어가 조용히 죽음을 맞고, 병든 울새는 나뭇가지에 앉아 황혼을 바라보다 조용히 눈을 감고 땅에 떨어진다는 내용의 글이었어요. '조용히 눈을 감고 땅에 떨어진다'라는 것, 이것이었습니다. 그냥 툭 떨어지는.
아주 좋은 풍경 속에서 책을 읽다가 혹은 사유하다가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순간에 그냥 그대로 툭 끝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꿈에 그리는 죽음은 이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제가 죽음을 맞을 때 이런 자세이고 싶어요. '산뜻한 낙화'라는 말은 그런 마음을 담기도 했고, 산뜻하게 낙화하기 위해 사는 동안 어떻게 피어나야 하는지 고민하게 해주는 말이기도 해서 새겨두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책은 즐거움의 대상이지 숙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걸 제일 먼저 경계합니다. 책은 작가의 권위가 있어서 읽는 나의 권위와 충돌합니다. 즉 책과 나의 만남은 권위와 권위의 만남이에요. 이를테면 박웅현이라는 권위와 괴테라는 권위가 만나는 거죠. 한쪽에 짓눌리지 않고 두 권위가 나란히 만나는 거죠. 그렇지 않고 책의 힘이 너무 세서 박웅현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이걸 해야 합니다. 괴테라는 권위는 이미 세상의 인정을 받았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 권위를 인정하세요. 백 명이 맛있게 먹은 음식이라도 내가 맛없으면 그만인 겁니다. 다만 지금은 아니어도 그 요리가 맛있게 느껴지는 날이 올 수 있어요. 그 요리는 그때 즐기면 됩니다.
많이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세요. 몇 권을 읽었는지 숫자로 지성을 뽐내는 건 딱히 멋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로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무리 전 세계 사람이 대단하다고 한 책도 나하고 닿지 않으면 끝인 거예요. 그건 그저 종잇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다가 덮었다면 그것은 그저 그때 그 책과 내가 닿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책을 읽다가 덮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나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어떤 책이든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돈을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이 정리된 사람은 어떤 조건에서도 행복의 순간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왕이면 왕으로 잘살면 되고 당신이 소몰이꾼이면 소몰이꾼으로 잘살면 된다"라고요. 헤르만 헤세도 비슷한 얘기를 했죠. 신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으면 박쥐로 살아야지 타조로 살겠다고 한들 타조가 되겠느냐고요. 돈을 굴리고 버는 데 타고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겁니다. 다 같을 순 없어요. 그래서 저는 돈과 행복은 등가교환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살아남기 위해서 남의 답을 제 답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읽고 있으면 주변 선배들이 와서 물어요.그 스물한 권짜리 대하소설을 읽는다고 광고 기획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 하고요. 요즘 유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봐라, 잡지를 봐라, 유행어에 관심을 가져라 등의 충고를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는 그 말에 동의되지 않았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기에 제 답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거죠. 당장 카피를 쓰는 데 도움이 되진 않을지 몰라도 저에게는 제가 읽는 책이 보약 같았습니다. 당시에 김주영의 <객주>, 도올 김용옥의 책들, 동양사상에 관련된 책들, 고전들을 주로 읽었습니다. 당연히 주변 시선이 고울 수 없었죠. 패션 브랜드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 노장 철학을 왜 읽고 있냐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심 불안하긴 합니다. 그런데 불안하다고 트렌드를 잘 좇아가고 찾아내는 동료나 후배처럼 할 수 없었어요.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들보다 분명히 못 할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감각으로 날아다니는데 제가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본질을 잡자, 그게 내 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 겁니다. 그리고 머지않은 시간에 제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입증했습니다. 자막만으로도 광고가 됐고, 가치가 녹아 있는 광고가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인생에는 안팎으로 나를 찾아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밖에서 툭 치고 오는 질문일 수도 있고 내 안에서 솟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습니다. 회의록도, 제가 읽은 책도 제 안에서 찾은 저의 답이었습니다. 세상은 이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 그 말에 동의가 되는지, 내가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나를 찾아오는 모든 질문에 대해서는 온몸으로 대답해야 한다는 겁니다.
얼마 전 20대 시절에 읽었던 <말테의 수기>를 우연히 꺼내 보게 됐는데요. 맨 앞 빈 페이지에 '84. 12. 15. 밤 9시 춘천 청구서적에서'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리고 그 아래에 이런 메모를 해두었더라고요. "글쎄, 그렇다니까. 중요한 건 객관적 평가가 아니라 주관적 가치라니까." 그러고 보면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저를 찾아오는 질문들에 성실하게 답해왔던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의 마무리는 헝가리의 작가 산도르 마리아의 소설, <열정>(솔출판사, 2001)의 이 문장이 좋겠습니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예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삶에도 범퍼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차가 어딘가에 부딪혔을 때 범퍼가 있다면 끝까지 닿지 않고 그만큼의 여유가 생깁니다. 치명적이지는 않아요. 삶도 같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범퍼가 없다면 사고 났을 때 충격을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언가를 기필코 이루겠다는 마음보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경제적, 심리적, 시간적 범퍼를 마련하는 데 좀 더 주안점을 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잠시 멈춰 선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멈춰 서서 그 상태를 어떻게 넘겼다고 해도 그 다음에 더 큰 파도가 닥쳐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죠. 그러니 힘들고 지칠 때 제 상태를 어떤 말로 규정짓지 않고, 그때그때 방법을 찾아서 어떻게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슬럼프도 내가 인정하는 순간에 슬럼프가 됩니다. 월마트 창립자인 샘 월튼이 이런 말을 합니다. 경기 불황에 대한 경영 전략이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경기 불황에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라고요. 자기 상태를 어떤 단어나 용어로 고정시키면 거기 매이게 된다는 의미로 한 말 같은데 동의합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힘들어질 수 있어요. 심리적인 게 확실히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슬럼프를 겪은 사람들 중에는 슬럼프를 겪던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모르다가 다 지나고 나서 '아, 그때 내가 슬럼프였던 것 같아'라고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험난한 때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 시기를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서까지 해야 하는 일은 없지만, 때로는 '번아웃' '슬럼프'처럼 어떤 말을 자기 안에 깊이 심어두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 인생을 나에게 맞추면 거센 파도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주파수를 내 안에 맞추는 작업을 먼저 하시면 좋겠습니다.
좋은 건 좋은 것대로 흡수해서 차곡차곡 쌓아 따라가고,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흡수해서 반드시 기억해두세요. 정면교사할 것 반면교사 해야 하는 것을 다 흡수해서 자신만의 것을 만드세요.
사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사회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 그 사이에서 내 생각을 지키는 게 불편해질 수 있어요. 남들과 비슷하게 가는 게 훨씬 편하죠. 다만 그러다 보면 휩쓸려 본질을 잃기 쉽습니다. 종종 이야기합니다만, 세상은 옳은 말과 옳은 말의 싸움일 가능성이 높아요. 내가 싫어하는 누군가도 본인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악해서도 아니고 그 사람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틀렸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의 옳은 말과 나의 옳은 말 사이에서 나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나가는 겁니다. 그런 노력을 해보는 것이죠.
더욱이 사춘기 아이들은 아직 성인이 아니지만 이 시기는 자기 의견이 강해지는 때입니다. 이런 때에는 부모의 강압적인 말이 먹히지 않아요. 내 생각은 이런데 참고해서 네가 판단을 내리라고 이야기해주는 게 낫습니다. 아이의 결정이 내 생각과 다르다면 충분히 내 의견을 전하되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는 겁니다. 부모인 나와 의견이 다르지만 어쩔 수 없어요. 뭐든 본인이 좋아서 해야 능률도 오르고 행복한 법이잖아요. 또한 선택과 책임이라는 배움을 얻을 수도 있고요.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가 말한 것처럼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결별해야 하는 법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만의 발걸음을 떼야 하는 일이에요.
아이의 판단이 부모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때 부모가 해야 하는 건 부정적인 결과가 있을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아닙니다. 혹 아이의 선택이 좌절로 끝나더라도 '네 뒤에 부모가 있다'는 사실만 아이 마음에 확실히 심어주면 됩니다. 이건 자녀가 사춘기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같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는 크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훌륭한 어른으로 잘 클 거예요.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애들은 잘할 거고, 잘 살 테니 지지해주고 웃어주고 믿어주세요.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배우자를 '기필코' 사랑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결혼식에서 반지를 끼는 건 이런 의미예요. 내가 너를 기필코 사랑하겠어. 너의 입 냄새에도 불구하고, 너의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너의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널 사랑하고 말겠어,라는 거죠. 그러니까 결혼은 시작과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문장과 순간>에서 "승리의 시가 끝나고 노동의 산문이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을 이야기했었습니다. 로맨스가 있는 연애가 '시'라면 생활로 들어서는 결혼은 '산문'일 겁니다. 연애 시절 상대에게 가졌던 환상과 기대는 결혼 생활에 들어서면 깨질 수밖에 없어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Haappily ever after,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대요,를 꿈꾸며 결혼하면 3개월 만에 이혼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살면서 '해피'하지 않은 순간이 자주 올 테니까요.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났는데 얼마나 많이 부딪히겠어요. 이 사람은 대체 왜 그렇지? 왜 바뀌지 않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행복할 줄 알았는데 행복하지 않네? 결국 노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는 거죠.
또한 결혼은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이기도 해요. 제가 2003년 신년사 중 하나로 "힘든 일이 있을 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좋은 일이 있을 땐 평생 처음 보는 것처럼"이라는 문장을 썼어요.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다들 겪는 걸 우리도 겪는구나 하면 되고요. 와인 한 잔 마시면서 잔을 부딪칠 때 "와, 진짜 좋은 순간이다!" 감탄하면서, 마치 처음 와인을 마시듯 살면 됩니다.
인생은 새로 고침의 반복입니다. 30대에도 40대에도 60, 70대에도 다시 새로 고침을 하고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새로 고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세요.
'아모르 파티'라는 말,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이 말은 굉장히 강렬한 의지를 가진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새로 고침을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내가 은퇴를 했어요. 나이 70이 됐어요. 사고로 몸이 불편해졌어요.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인생이 끝난 건가요? 아뇨. 아모르 파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새로 고침이에요.
만약 중년이니 새로운 목표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좋은 어른'이 되는 걸 목표로 권합니다. 이걸 목표로 삼고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인지 고민하면서 '새로 고침'해 나아가면 경쟁력이 생기기 시작할거예요. 본이 되는 어른이 되기 위해 내 능력을 키우려 애쓸 거고, 후배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새로운 환경을 만들려고 하고 사람들을 더 많이 포용하게 될 겁니다. 그러다 보면 기회가 옵니다. 많이 불안하고 흔들리는 중이시라면 지금부터 기필코 좋은 어른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워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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