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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삶을 바꾸는 책 읽기(정혜윤)

아름다운 존재 2023. 12. 4. 12:33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를 바꾸어 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힘 있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아닐까요? 

 

결국 쿤데라가 참지 못했던 키치는, 불확실함 속에서 지혜를 찾아내길 멈춰 버린, 가능하면 최대한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며 안도하는, 그렇게 획일적이 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우리 모습일 것입니다.

 

카뮈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의 고뇌에 한계가 있는 한, 나는 그의 뜻을 수락했으며 나 또한 그 고뇌 속에 빠져 들었노라고 나는 그에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절망에 몸을 맡겨 버리거나 이성을 잃는다면 더 이상 그를 동정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말의 어조에는 뛰어난 데가 있다. 어떤 종류의 영혼의 힘은 영혼의 표현을 통제함으로써 부행에 한계를 그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어조는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영혼은 자신의 운명에 항거하여 투쟁하는 인간에게 언어의 여러 가지 위력을 제공함으로써 예술이 삶 속으로 파고들게 한다.-알베르 카뮈, <스웨덴 연설·문학 비평>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가 소중히 했던 많은 것들이 이미 위협받고 있습니다. 불안은 인간성마저 무감각하고 경쟁적으로 바꿔 놓고 있습니다.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며 우리가 까맣게 잊게 된 것 중 하나는 바로 타인의 중요성입니다.

독일 소설가 제발트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제정신이 아니다."라고도 말합니다. 지금 인류의 숫자가 70억이라면 우린 70억 인류의 고뇌를 공유합니다. 우리가 한숨을 쉴 때 70억 인류어치의 한숨을 쉽니다. 그런데 그 70억 인류는 다 외따로 떨어져서 70억 무게의 불안과 고립을 맛봅니다. 만약 누군가 지금 외딴 방에서 홀로 "나는 망했어. 끝났어. 바닥에 떨어졌어. 사는 건 끔찍해!"라고 절망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바로 지금 이 시대 공통의 고뇌인 것입니다.

모두의 이야기를 한 군데 끌어모아 본다면, 70억인분의 슬픔을 끌어모아 본다면, 자주 슬펐던, 자주 왜소해졌던, 자주 삶의 무의미를 말했던, 자주 환멸감을 말했던, 자주 경쟁을 말하면서도 배려와 관용을 그리워했던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에 모아 본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쓸모 있는지가 나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 그러나 잃어버린 것들, 우리를 울고 웃게 했던 것들을 다시 찾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면, 위협받으면서도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면 무엇이 쓸모가 있는지 나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두가 괴로움에 다 같이 시달린다는 사실을 깨닫게만 된다면" 구원은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은 우리 영혼을 통해 꿈을 꾸는 존재입니다. 책은 누군가 미래를 위해, 다가올 세대를 위해, 한마디 남겨 놓은 흔적들입니다. 책은 원시인이 동굴에 남겨 놓은 벽화와 같은 정신을 나눠 갖습니다. 꼭 하고 싶은 한마디를 동굴 벽에 새겨 놓은 것과 같습니다. 장밋빛 환상을 유포시키는 책이 아니라, 뻔한 상식이나 원한 감정이나 음모론으로 가득한 책이 아니라 고통과 불안을 직시한 책들만이 우리를 구해 줄 수 있습니다.

 

무능력은 재능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일을 지속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행스럽게도 우린 이미 어느 정도는 능력자입니다. 우연히 태어난 이 삶을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려고 하니까요.

 

최고의 여행은 물리적 이동이 아니란 것, 결국은 정신의 여행이란 것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 속 주인공 버드는 어느 순간 묻습니다. "수치스러운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며 도망치면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대체 어떤 나 자신을 지켜 내겠다고 시도한 것일까?" 그는 "난 이제 도망치는 건 그만둘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들을 살리려고 빗속에서 택시를 타고 질주합니다. 만약 내가 사고로 죽어서 아들을 살리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내 삶은 말짱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요.

나중에 <오이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를 읽다 보니 그는 어려서부터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좋아했고 실제로 삶에서 선택해야 할 때마다 허클베리 핀의 이 말을 읊조렸다고 합니다. "좋아, 지옥에는 내가 간다." 저는 이 말이 <개인적인 체험>에 나오는 주인공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을 거란 느낌이 듭니다. 저는 곧 또다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들춰 볼 것입니다. "지옥에는 내가 간다."란 말을 찾아서요.

오에 겐자부로는 <신곡> 또한 좋아합니다. 저는 언제 <신곡>도 읽어야겠다고 쭉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좋아하고, 보르헤스도 좋아하고, 이탈로 칼비노도 좋아하고, 아무튼 위대한 작가들은 다 <신곡>을 좋아합니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공백의 페이지다. 완전히 공백 상태인 오늘만이 아니다. 내 일생 속에는 거의 공백인 수많은 페이지들이 있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지 않는 일이다.-장 그르니에, <섬>

그런 생일을 보내고 나서 장 그르니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자신'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게 됩니다. 의지할 데 없는 존재들끼리 서로서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을 봤으니까요. 자기 삶을 국부적인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저 역시 지금은 책과 나를 더 이상 구분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책도 저를 그들의 세계에 끼워 주고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저도 언제부턴가 보고생각하고 쓴 대로 살고 싶어져 버렸습니다. 저도 한 번 "그렇게" 살아 보고 싶은 겁니다.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건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탈로 갈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쿠빌라이 칸은 여행자 마르코 폴로와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칸은 폴로에게 유토피아, 태양의 땅 같은 약속의 땅에 대해 묻습니다. 폴로는 그러한 항구들로 가는 길을 지도 위에 그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칸은 최후의 상륙지가 야후의 나라, 바빌로니아 같은 지옥의 도시들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여행이란 부질없는 게 아니냐고 말합니다. 여기서 폴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길에도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입니다. 쉬운 길은 다수가 택하는 것을 다수가 택한다는 이유만으로 택해 그 사회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나중엔 그것이 지옥 같은 것이란 것도 알아채지 못하게 되지만 그래도 그것은 선택하기 훨씬 쉽습니다. 어려운 길은 지옥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마치 지옥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 그 사람들이 살도록 자리를 넓혀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운 것은 그런 사람이 드물어서가 아닙니다. 분명히 주위에 있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것은 그걸 지키기 위해선 나도 지옥과 싸워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고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저 역시 제가 한 점 먼지에 불과하더라도 세계의 한 부분이 될 맘이 생겼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인간에 대해 알게 된 말들이 떠오릅니다.

사르트르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자신이란 고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동시에 인간은 "누구나 인간의 대표자"라고.

<소로의 일기>에서 소로는 말했습니다. "내 안에 무언가를 사랑하려는 정신은 분명히 있다. (중략) 어떤 경우에든 나를 지켜주는 근거는 바로 사랑이다. (중략) 이에 근거해서 나를 만나라. 그러면 나도 강한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이 나를 비난하거나 내가 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순간마다 나는 지체없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사랑하는 나의 정신에 의자하자.'"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의 아름다운 문장도 떠오릅니다.

"나는 누구인가?" 예외적으로 이번에만 격언을 끌어들여 말하자면, 사실상 이런 질문은 모두 왜 내가 영혼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아는 것으로 귀착되는 문제가 아닐까? (중략)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여러 가지 취향,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친근성, 내가 빠져 드는 매력, 나에게 발생하는 사건들, 오직 나에게만 발생하는 사건들을 넘어서, 또 내가 실천한 수많은 행동, 나만이 체험하게 된 감정들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나의 차별성이 무엇이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하겠다. 내가 이 차별성을 인식하는 정도가 얼마나 분명하냐에 따라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엇을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세계의 운명에 대해 나만이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가 무엇인가의 문제가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빈센트 반 고흐는 말했습니다. "청춘은 반드시 돌아온다. 자기가 낳은 것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