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필사] 사생활의 천재들(정혜윤)

아름다운 존재 2023. 12. 7. 02:36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ㅡ카프카

 

나의 일과 기술, 그것은 살아가는 일이다.ㅡ몽테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해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는가라는 기예art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누구인가를 정해줍니다.(...) 자신의 존재를 예술 작품(기예의 대상)으로 삼는 것,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일입니다.' 프랑스어에는 '처세술', '생활의 기술'을 의미하는 art de vivre라는 표현이 있는데, 슈뢰더와 푸코에게 이 표현은 '살아가는 일이라는 기예', '기예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을 가리킬 것이다.ㅡ히로세 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과도 같아. 그렇기 때문에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지만 나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대답했어. 일단은 잠을 충분히 잤기 때문에, 밥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그리고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잤기 때문에, 내가 아이처럼 단순해졌기 때문에, 뭔가 좋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고 느꼈던거야. 그 전화를 받던 날 내가 읽었던 시의 한 구절은 이래.

 

다음 생애 태어날 때는

걸레가 되리

칠보 유리 색 걸레가 되리

 

쓰면 쓸수록 오늘의 하늘에 가까워지는

칠보 유리 색 걸레가 되리

 

자신을 더럽히며

부엌을 변소를 닦자

그리고 차별을 전쟁을 닦아내자

 

만약 세계가 있다면

그 한쪽 구석부터 닦아내기로 하자

 

만약 영원이 있다면

평소의 한 순간을 빛나게 하자

ㅡ<다음 생에 태어날 때는> 중에서, 나나오 사카키.

 

만약 내가 바쁘다면 평소의 한 순간을 영원처럼 빛나게 하느라 이것저것 하느라 바쁘고 싶어. 만약 내가 걸레라면 내가 닦은 부분을 살펴보고 자랑하고 싶어. 우리는 점점 한 가지 틀로 세상을 보고 있어. 그렇게 보는 한 결코 눈치채지 못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다는 것을.

 

고민은 무거워도 행동은 가볍게. 거창한 질문 앞에 우리의 행동은 사소한 것부터.

 

네가 평소에 가장 잘 하는 말이 뭔지 알지? "그럼 나라도 어떻게든 해볼게. 그런데 기왕 할 거면 잘하자."야. 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해. '음, 이놈은 천재다.' 너는 절실함에서 천재야. 영혼의 부지런함에서 천재야. 너는 가만히 있지 못함에서 천재야.

 

나는 점점 더 미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 나는 과거가 그립지 않아.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어, 과거는 미래 속에 자꾸만 자꾸만 나타나니까. 과거는 미래에 달려 있으니까. 미래가 없다면 과거도 현재도 없어.

 

벤야민에게 미래는 별자리였어. 그는 예전이 지금과 충돌해 미래라는 별자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을 거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의 고유한 희망의 원리를 다시금 사유해야 하고 그 사유는 예전이 지금을 만나서 우리의 장래 자체를 위한 어떤 형식이 마련되는 하나의 미광, 하나의 섬광, 하나의 별자리를 만드는 형식을 거쳐 진행되어야 한다.

ㅡ<반딧불의 잔존>,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미래가 별자리라는 말이야. 미래가 우리를 비춰준다는 말이겠지. 이건 위대한 상상력이라고 생각해. 바로 그런 상상력 아래서 예전과 지금이 만나. 우리 모두 과거를 가지고 지금을 살고 있지.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만나게 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어.

우리의 선택은 미래의 관점으로 과거와 현재를 보는 거야. 그렇지만 그것은 물론 휘황찬란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단지 작은 섬광, 미광이야. 빛은 희미하고 곧 꺼질 듯 깜빡거려. 그러나 그 빛은 오로지 사랑하기 위해서만 반짝이지. 그래서 이탈리아의 작가 파솔리니는 작은 반딧불이에서 희망과 미래를 봤어.

 

우린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 거야.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힘 있게. 우리가 맺는 관계가 바뀐다면, 혹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꾼다면 세상도 바뀌어, 이건 진리야.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인생,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야. 우린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사랑을 나누고 슬픔을 달래고 용기를 내고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갈등을 풀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어느 선에선가 타협을 하고 돈을 벌고 일을 하러 가야 하고 가족들을 먹여야 해.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거지. 단 희망을 이 사이에 깨문 현실주의자.

우리 인간은 수많은 하찮은 것을 만들어내지만 그 하찮은 것 속에서 수많은 숭고한 것을 만들어내는 존재야. 용기도, 사랑도. 믿음도. 신도. 그러므로 사소하고 하찮은 것 속에서 어떤 것을 자기 중심점에 놓아야 할지를 잊지 말아야 해. 바로 그 자리에서 고유한 희망의 원리를 만들어내야 해.

 

사생활이란 카프카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인생, 일상들을 말한다. 이들은 그런 사생활에서 천재다. 사생활을 보여주는 데서 천재들이 아니라 사생활을 살아내는 데서 천재들이다. 그들은 진부하고 시시하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데서 천재다. 그들은 자기 삶에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문제를 직면하는 데, 그것을 푸는 데, 그것에서 보편성을 보는 데 천재적이다. 즉 그들은 삶의 태도에서 천재다.

그들은 어디에도 기록될 것 같지 않은 역사 바깥의 시간 속에서 천재들이다. 그들은 매일 반복되는 시간, 자신의 기억 속에서도 결국은 흐릿해질 시간을 살아내느라 뜨거운 열정을 퍼붓는다.

그들은 자기 내면에 내일의 사과나무를 심는 데 천재다. 그들의 나무는 그들 내면에서 자란다. 그들에겐 세상이 내면이다. 사생활이 내면이다. 그들의 영혼은 피부에 묻어있다. 그들은 자기에게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는 데 천재적이다. 그들은 기억력의 천재들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을 기억하는 데서 천재들이다. 

그들은 하나뿐인 자신의 무기가 뭔지 알고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무한히 활용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한번 살아보기 위해서. 그들은 먼 미래에 자신에게 주어질 최대 행복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여기의 생활 속에서 충만해지는 최소 행복을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존재해본 적 없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 우리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바로 그 사람이 너무 빨리 되는 바람에 치열하지도, 창조적이지도, 타인에게 영감을 주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자기 삶의 천재가 되는 것에 대해서ㅡ박수용(자연다큐멘터리 감독)과 함께>>

 

§ 그 이후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 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뼈 한 조각을 보면서 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겐 꽃 이름을 아는 것보다 어디선가 꽃이 피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걸 느껴야 합니다. 낙엽 하나가 떨어져도 낙엽이 떨어지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경쟁이 너무 치열합니다. 우린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면서 그 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잊습니다. 내가 원래 뭘 하고 싶어 했던가, 이것을 잊습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오솔길과 변두리의 철학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슴 뼈를 떠올립니다.

나는 밤길을 걸으면서 낮 동안 일어났던 일을 사소하게 느꼈던 그 시간을 잊지 못합니다. 낮의 사소함과 사슴 뼈의 의미는 선택과 행동의 순간에 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무엇이 나에게 중요했었고 뭐가 사소했던가? 어떻게 하면 후회하지 않을 시간을 살 것인가? 하지만 나는 또한 모든 개체는 먹고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 또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큰 것을 요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높은 기준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은자가 되자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이 두 생각이 내겐 정-반-합(harmony)의 세계로 이해됩니다. 현실적인 조건 즉 인간의 규칙과 내가 따라야 할 자연의 규칙들 사이의 소통, 이것이 내겐 진정한 마음속 소통입니다. 저 시베리아 우데게족 최고의 신은 엔두리입니다. 엔두리는 바로 화합(harmony)의 신이죠. 내게 화합은 이런 모습입니다. §

 

§ 영원히 지속될 어떤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여기를 영원처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

 

§ 콘텐츠는 항상 과정 중에 나옵니다. §

 

§ '더 큰 것이 있다. 더 큰 것이 있다. 사소한 것들은 잊힌다. 그 오솔길의 끝에.' §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ㅡ변영주(영화 감독)와 함께>>

 

§ 마음속이 어쩐지 뭉클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

 

§ 주어진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써, 또 현재 함께 있지 않은 사람들의 관점들을 내 마음속에 있게 함으로써 나는 의견을 형성한다. 즉, 나는 그들을 대표한다. 이러한 대표의 과정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실제적 견해를 맹목적으로 채택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내가 다른 어떤 사람과 같이 되려고 하거나 또는 그와 같이 느끼려 하는 식의 감정이입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인원수를 셈해서 다수에 참여하는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실제로 내가 아닌 것이 되어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주어진 문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마음속에 더 많은 사람의 관점들을 현재화시킬수록, 그리고 내가 그들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할까를 더 잘 상상할수록, 나의 대표적 사유의 능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고 나의 최종적 결정, 즉 나의 의견은 더욱 타당하게 될 것이다.

ㅡ<칸트 정치철학 강의>, 한나 아렌트. §

 

우린 사실 나 자신을 아는 문제조차도, 괜찮은 인간으로 사는 것조차도 남의 손을 빌려야만 합니다. 남의 힘을 빌려야만 합니다. 저는 그런 의존성이 부끄럽기는커녕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은 아주 커다랗습니다. 더 컸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힘이 세다거나 우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훨씬 더 의지가 강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독 속에서 아주 커다란 타인과 아주 커다란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결국은 나 자신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존재를 비추는 만남에 대해서ㅡ윤태호(만화가)와 함께>>

 

§ 그때 제 삶은 이랬습니다. 화실 퇴근을 9시로 친다면 그 뒤 시간을 한 시간 단위로 잘랐습니다. 배경 연습, 습작 연습, 터치 연습, 잘 때까지 책 읽기. 저는 그것을 정말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시작하고 한 일주일은 힘들었는데,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고 제가 그려놓은 것들이 쌓이니까 방에 들어오면 정말로 묵직했습니다. 내가 나를 칭찬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

 

§ 존재감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존재감을 얻기 위해 언제까지고 시시덕거리며 비위나 맞춰주고 있을 수만은 없단 걸요. 나도 내 말을 해야 하는구나. 그래야 상대방이 편안해하는구나. 내가 자존감을 갖고 있어야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진짜 기뻐하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겠구나. 저 역시도 제 친구가 대단히 훌륭할 때 어쩐지 저까지 존중받는 느낌이 들곤 했었으니까요. §

 

§ 제가 놓쳐버린 시간들도 후회합니다. 얼마 전에 소설가 한 명과 영화감독 한 명과 알래스카로 22일간 여행을 갔습니다. 그분들은 정말 저를 한없이 배려하고 존중해줬습니다. 누구는 일정을 짜고 누구는 운전을 하는데 저는 짐이나 날랐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또 제 십 대를 후회했습니다.

저를 학대하기만 했던 시절이지 타인을 위한 배려나 존중에 대해선 생각도 못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만화로 생각해보면 어떤 컷이든 그 그림을 필요로 하는 이야기와 가치와 함께 갑니다. 저는 만화로 이젠 뭔가에 기여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제가 잘 아는 마이너의 세계와 관련된 일일 겁니다.

저는 거울을 앞에 두고 '난 왜 이런 몸으로 태어났을까?' 평생 궁금했고 지금도 궁금합니다. 이제 그 뉘앙스는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몸으로 태어나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뭔가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

 

우리가 우리 삶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우리가 어떤 필연성을 우리 삶에 부여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어떤 행동인가를 할 때뿐일 겁니다. 우린 대체로 과거에 필연성을 부여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요. 그러나 일어난 과거의 일은 필연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당시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대체로 원인과 결과를 착각합니다. 내가 원래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행동을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는데 행동 때문에 신념이 만들어진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거대한 세계는...... 우리가 자신을 알기 위하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는 거울이다. 요컨대 나는 세계가 나의 교과서가 되기를 바란다.

ㅡ<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박홍규.

 

 

 

<<인간의 서식지에 대해서ㅡ김산하(야생영장류학자)와 함께>>

 

§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것은 일종의 포르노를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움직이는 게 있으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야말로 생물학적 인지 메커니즘의 오용입니다. 스마트폰의 동작은 서랍 열고 닫기 같은 겁니다. 방 안에 앉아있다가 괜히 일어나서 한 번 옷장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요. 이런 인조적인 인터페이스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저는 제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부터는 MP3로 음악을 듣는 것도 그만뒀습니다. 음악에게 미안합니다. 음악을 평가 절하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인조적 인터페이스들만 보는 것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 혹은 자기 세계만 들여다보는 형국입니다. 다른 나라에 다녀오면 우리가 얼마나 자기 세계에 콱 박혀있는지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자기 것에 사로잡혀있지 않거나 자기 것을 갖고 있지 않아야 딴 걸 볼 수 있습니다. 생물은 매일매일 인풋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잘 먹는 사람도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먹고 일주일 동안 뱃속에 저장한 것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생물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란 게 있습니다. 들어가고 나오고 또 채워지고 비워지고 정체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이디어의 원천인 셈이고, 이 흐름이 표현의 의지를 키우고 생명력이 됩니다.

어쨌든 영장류 연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저는 어려서부터 이상하게 동물 책을 좋아했습니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스리랑카부터 덴마크까지 여러 나라에서 살아서인지 모든 생태계가 제겐 고향 같았습니다.

스리랑카에 살 때는 간지러워서 티셔츠를 들춰보니까 바퀴벌레가 두 마리 들어있었습니다. 어렸지만 그때도 원래 그런 것이려니 생각했습니다. 제 배에 바퀴벌레가 있을 만하니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책이 좋았고 도서관이 좋았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게 좋아서 고3 때 학자가 꿈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책이 아니라 책의 향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킁킁 동물처럼 향기를 맡으면서도 고매하게 다뤄야 하는 어떤 것, 그것이 제겐 책이었습니다. 동물과 도서관을 좋아하니 동물학자가 되자고 결심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마니아가 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한다면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사랑하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사랑 말고는 다른 말로 표현을 못합니다. 경쟁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니아는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동차 마니아, 레고 마니아, 온갖 마니아들이 있는데 마니아들은 자기 관심 방면에 있어서 전문가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저는 전문가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수업 시간에 생물에 대해 배울 때 해부도 같은 것밖에 배우지 못해서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결국 동물자원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과는 동물 잡아먹는 과였더군요. 그래도 동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긴 했습니다.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도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었습니다. 저에겐 항상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계획을 인조적으로 만들어간다, 이것이야말로 나답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OO이 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 OO이 되기 위해서'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미래완료형 때문에 희생을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고3 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희생을 한 번 치렀기 때문에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고 굳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고3 때 치른 희생이란 것도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요. 제대하고 났더니 동생이 자기가 수업을 들었는데 그 수업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바로 최재천 교수란 분의 수업이라고 말해줬습니다. 그러곤 저를 데리고 가서 최재천 교수에게 소개해줬습니다. 우리 형인데요, 하면서요.

당시 최 교수는 서울대에서 까치를 연구 중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까치 연구팀에 남자가 한 명 필요하다고 했고, 마침 저도 남자니까 까치 연구를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새 연구는 처음이었는데 그 기간에 행동생태학이란 것에 눈을 떴습니다. 까치를 연구할 때는 둥지까지 크레인을 타고 올라갑니다. 하루는 엄마 까치가 외출하고 난 둥지 안을 쓱 들여다보는데 둥지 분위기가 너무나 가정적이었습니다.

그 둥지를 보는데 뇌세포 어딘가에 수십 년간 깊숙이 파묻혀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어려서 스리랑카 해변을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달렸는데 그때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제임스 라스트 악단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악이 흘러나오던 바로 그때가 떠오른 것입니다. 까치 둥지의 가정적인 분위기를 보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까치들은 둥지를 만들 때 나뭇가지로 먼저 골조를 세우고 진흙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그런데 그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 엮여 빈 공간이 살짝 보이는 것이 마치 창문 같아 보이고 전망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그때부터 딴생각이 싹텄습니다.

생물학은 공통점에 대해서 말하고 차이점에 대해선 말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비비원숭이 무리가 있는데 한 마리는 따로 놉니다. 한 마리는 무리를 따라가지 않기로 합니다. 그럼 우리 생물학자들은 따로 노는 한 마리는 보지 않기로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따로 노는 한 놈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겁니다. '쟤는 왜 그럴까?' 그래서 기존의 데이터 중심의 정량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에 투신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

 

§ 영장류의 특징은 호기심과 지루해함의 반복입니다. 처음엔 강력하게 호기심을 느꼈어도 그것이 해소되면 이내 지루해합니다. §

 

§ 긴팔원숭이를 쫓아다녔던 그 지옥 같은 고생은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거칠고 드넓은 산에 몇 달이고 나 홀로 있습니다. 내가 쫓을 긴팔원숭이는 저 위에서 날아다닙니다. 저는 저 높은 곳을 보면서 홀로 뛰고, 뛰고, 또 뜁니다. 집에 돌아오면 땀, 피, 흙이라는 3대 자연 물질이 제 몸에 묻어있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잠자리 위에 뻗어서 '이걸 누가 알아줄까?'란 서글픈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 절 도왔던 것은 오히려 제게 아무런 미래 계획이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인생은 미래완료형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알 게 뭐야?" 하고 맥주 한 병 마시고 쉬고 나면 그만이었습니다. 데이터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규율은 엄격하게 지켰기 때문에 자부심이 있었고, 제일 좋은 데이터를 모으려는 의욕과 의지도 있었습니다. 그 복잡한 열대우림에서 신비로운 자연만큼이나 복잡한 움직임을 구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안에서도 작동되는 자연의 질서를 찾아낼 때 과학의 아름다움이란 걸 느꼈습니다.

나무 꼭대기엔 긴팔원숭이가 있고 그 위엔 독수리가 날고 있는 그 풍부함. 그 많은 사건들의 집합체인 자연을 보면서 과학을 통해서 역사에도 기여하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하나의 생물이 갖는 의미는 서식지에 대한 한 가지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긴팔원숭이가 열대우림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 삶 자체가 자신의 서식지를 이용하는 하나의 좋은 표현이었습니다. 호랑이만 해도 인도네시아 호랑이가 다르고 시베리아 호랑이가 다릅니다. 하나의 생명은 그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의 생명은 그 서식지가 낳은 걸작입니다. §

 

§ 제겐 제 자신을 키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에게 과제를 부여하는 겁니다. 어떤 과제냐면 하나의 동물을 관찰하듯 자기를 관찰한다는 겁니다. 우리들이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고 있지만 다른 생명체가 그러하듯 우리 인간에게도 자기한테 맞는 해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해법을 찾는 제일 좋은 방법은 자기의 원래 관심사에 집중해보는 것입니다. 자기의 원래 관심사란 것마저 불투명하게 되어버렸다면 어린시절의 자기로 되돌아가 보는 겁니다. 저도 동생과 함께 <스톱>이란 동물만화책을 내면서 자신을 얻었습니다. 동물을 잘 알리고 제대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렸을 때부터 동생과 매일 한 이야기였고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저는 자신을 키우려는 자는 동물의 장점과 인간의 장점을 다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의 장점은 자신을 삶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동물은 자기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무당벌레가 묵묵히 걸어가는 것을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무당벌레는 걸어가는 자기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수만 년 역사를 통해 다듬어진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수행하면서, 그러면서도 변화합니다. 이구아나가 바닥에 누워 햇볕을 쬐는 것을 보십시오. 저는 이것을 보고 동물 세계에도 럭셔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동물들도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향유합니다. 동물들에게도 자기 삶을 즐기는 시간이 있습니다. 동물들도 생존에 관한 문제는 빨리 해치우고 삶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동물들은 자기 세계를 향유함에 있어 당당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당당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운데 자기가 귀여운 줄도 모릅니다. 동물들은 미학적으로 나름의 스타일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완성'이란 자기가 속한 곳에 딱 맞게 되어있단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장점은 작가적 시점을 가질 수 있단 겁니다. 즉 삶에서 좀 물러서서, 좀 떨어져서 마치 하늘에서 자신을 보듯 삶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저를 살펴보면 저의 서식지는 자연과 도시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인데 그 안에 여유로움이 있으면 됩니다. §

 

§ 저는 제 분야의 전문적인 학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제가 알게 된 과학적인 콘텐츠를 잘 이용하고 싶었습니다. 이론만큼이나 실천이 중요했습니다. 제인 구달에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녀는 학계를 박차고 나와 환경운동을 합니다. 그녀는 제 눈에 이 세상을 조금은 다른 곳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제인 구달이 한국에 오면 식당에 갈 때마다 매번 이런 말을 합니다. "물 따르지 마세요." 번번이 말합니다. 식당 갔다 나올 때 식탁을 보면 자리마다 마시지 않고 컵에 담긴 채 남아있는 물이 가득합니다. 그 물이 전 지구적으로 보면 엄청난 낭비입니다. 저도 3, 4년 전부터 제 삶에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덧붙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저는 절대로 음식을 남기지 않습니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아무리 층수가 높아도 적어도 내려올 때는 타지 않습니다.

저에겐 삶의 디테일이 중요합니다. 왜 디테일이냐고요? 그건 간단합니다. 우리는 결국 디테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정책 결정권자도 아니고, 우리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삶의 디테일뿐입니다. §

 

§ 한번은 제인 구달이 이화여대에 강연을 하러 왔습니다. 거기엔 포스코에서 지은 유리로 된 건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서는 빠져나가질 못했습니다. 제인 구달을 만나러 온 수많은 학생들이 꺄악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인 구달이 화를 냈습니다. 어서 저 비둘기부터 내보내주자고 해서 제가 잡아서 내보내주었습니다.

그때 비둘기 심장이 어찌나 뛰던지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용을 보고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는데 용은 더 무서웠더라는 영화 같은 거요. 사람들이 동물들이 근처에 오면 경기를 일으키는 원인이 뭘까요? 제인 구달은 마이크를 잡고 바로 이런 것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은 인공적인 미학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이를테면 가을에 공원에 가면 아저씨들이 낙엽을 쓸고 있습니다. 치우지 말아달라고 하면 주민들이 지저분하다고 항의를 해서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조경이란 이름으로 공원들도 천편일률적이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추한 것, 감추어야 할 것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잠깐 숨을 곳, 잠깐 쉴 곳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비가 오면 잠시 피해갈 처마 밑 같은 곳 말입니다. 지렁이 수준의 숨어 있을 만한 곳도 있고, 새 수준, 고양이 수준의 숨어 있을 곳도 있습니다. 인간 한 명 한 명에게도 이 도시에 잠깐 쉬어갈 곳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마이크로 하비타트(미소 서식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동생과 막 마이크로하비타트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우연히 주남저수지 근처에 사는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주남저수지에서 좀 떨어진 동판저수지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선 아침에 해 뜰 때 철새가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로지 그 지역에서만 해볼 수 있는 일, 그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거기 가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결국은 그 지역을 좀 더 잘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모든 서식지는 오로지 거기서만 살 수 있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곳에서처럼 살 수는 없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장소만이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아닙니다. 아예 인간 한 명 한 명이 다른 인간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쉴 만한 곳, 살아갈 곳이 되는 거죠. 자신의 친구나 애인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이 하나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밀고 나가려면,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소중한 존재로서 인정받았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인정과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용기를 내기가 힘듭니다. 젊은 시절에 사랑이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자신을 인정했었다는 것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자신감 그 이상입니다. 자기를 뛰어넘게 합니다. 세계가 바뀌는 겁니다.

제가 인도네시아로 봉사활동 갔을 때 사람이 미어터지게 타는 작은 버스가 못 견디게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쯤 인도네시아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세계가 변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못 견뎌 했던 버스마저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내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이것이 한 인간에게 갖는 의미는 엄청납니다. 내가 이렇게 이런 걸 추구하고 살아도 되는구나! 적어도 한 사람은 알아주는구나! 사랑의 기술이 바로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되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의 치어리더가 되는 겁니다.

한국에서 사랑은 몸값 계산처럼 돼버렸습니다. '몸값 떨어지기 전에 빨리 결혼해야지.' 같은 것 말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오염시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랑을 말할 때 아름다운 구속이란 말을 합니다. 이 말은 틀립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랑을 하게 되면 타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와도 대체 가능하지 않게 서로 결합력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요철 맞추기 같은 겁니다. 얼마나 꽉 들어맞느냐의 문제입니다. §

 

서식지를 찾는다는 것은 내가 뿌리째 옮겨간다는 말입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것을 '이주의 열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더 나은 곳으로 옮겨가고 싶어 한다는 거죠. 그는 옮겨가는 것을 기준으로 욕망과 사랑을 구분했습니다. 욕망은 상대방이 내게로 오길 바라죠. 그러나 사랑은 다릅니다.

욕망은 (...)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원하게 된다, 이때 나는 중력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 대상들이 내게로 빨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 한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ㅡ<사랑에 관한 연구>, 오르테가 이 가세트.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온전히 알 수 있게 하는 나의 자리, 장소. 누구에게나 절실히 필요한 그것, 바로 사랑이고 서식지겠지요. 이제 사랑의 고백은 이렇게 바뀔지도 모릅니다.

"나의 서식지가 되어줘."

 

 

 

<<보는 것에 대해서ㅡ조성주(청년운동가)와 함께>>

 

§ 지난해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를 휩쓰는 모토는 '아프니까 청춘'입니다. 저희도 아픈 청춘입니다. 그러나 저희 모토는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닙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자.'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에 따르면 청춘 시절에 고통스러운 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잊히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아픔은 통과의례가 아니고 구조의 문제입니다. 우린 시간이 흘러 청년이 아니어도 아플 것입니다. 우리가 낳는 아이들이 아플 것입니다. 이 아픔은 가만히 있으면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는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믿는 대로 봅니다. 우리는 본다고 하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길 선택한 셈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난 무엇을 보았다'고 하지만 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세계 속 우리의 위치 자리에 따라서 봅니다. 

 

 

 

<<말하기와 듣기에 대해서ㅡ엄기호(사회학자)와 함께>>

 

§ 경험이 죽고 난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건 소비입니다. 체험이 경험이 되지 못하고 소비가 되어버리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여행입니다. 여행을 가면 너 나 할 것 없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느라 바쁩니다. 그렇게 사진만 찍다 보면 나중엔 그곳이 어디였는지 설명도 못합니다.

제 눈으로 사물을 감상하고 제 입으로 말하는 법을 잃어버린 자리에는 소비만 남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아이(ENFANT)'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경험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피렌체에서 만난 한 여인이 있는데요. 그녀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며칠째 피렌체에만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뭐였을까요? 다비드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미술관 문이 열리면 하루 종일 멍하니 다비드를 보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녀는 다비드 때문에 처음으로 남자 몸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러니 다비드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충만한 시간과 그 시간 안에 농축된 이야기가 경험입니다. 이때 시간은 잠시 정지되고 재정의됩니다. 이 시간의 핵심은 미래를 향한 유예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의 충만함입니다. 이런 시간엔 뭔가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만남이 없는 여행은 체험일 뿐입니다. 학생들이 떠나는 체험학습에서 시간은 일정표, 스케줄일 뿐입니다. 이런 여행에서는 경험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가 중요합니다.

경험이 전수의 문제라면 체험은 소비의 문제고, 경험이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라면 체험은 그저 감탄사만 남겨두고 자신이 겪은 것을 잊게 합니다.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시간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혹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걸 감내하는 용기 같은 것까지도 필요합니다.

세계가 나에게 던져주는 충격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제 교실도 뭔가 함께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시험 정보가 오가는 무미건조한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린 점점 대학에서 동료를 만나지 못하고 경쟁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지식은 암기하면 되지만 삶의 지혜는 경험이 아니면 얻기 힘듭니다. §

 

§ 저는 네 이야기를 하되 그 안에서 동시대성을 찾아보라고 말합니다. §

 

§ 우리가 기대에 부응하려고 할수록 우린 너무나 바쁘고, 사회는 우리가 싫어하는 그 모습 그대로 쌩쌩 잘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린 기대와 희망을 착각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을 꿈꾸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

 

사회가 우리를 일컬어 말하는 대로 자신을 말하지 말자.

우리가 사랑했으나 포기했던 것들이 우리 삶을 가난하게 합니다. '이건 사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우린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삶이 텅 비게 되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도 사라졌기 때문에 사회가 우리를 보는 대로 우리도 우리를 봅니다. 사회가 우리를 일컬어 말하는 대로 우리도 자신에 대해 말해버립니다. 무능력자라든가 패배자라든가...... 그런 것들로요.

'창의력'이라 하면 남과 비교해서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말이 되어가고 '상상력'이라 하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창의력은 경쟁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는 힘입니다. 상상력의 반대말은 '무시'입니다. 상상력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시는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상상력에 관한 한 제가 늘 인용하는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보고 싶습니다. 제목은 '부채'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ㅡ 누군가를 사랑할 때, 오로지 그에게만 열렬히 빠져 있을 때는 거의 모든 책 속에서 그의 초상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그렇다. 그는 주연인 동시에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온갖 이야기 속에서, 장단편 관계없이 다양한 소설 속에서 그는 항상 새로운 변신을 거듭하며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상상력은 무한히 작은 것 속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능력, 즉 내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새로운, 압축된 충만함을 담을 수 있는 어떤 외연적인 것을 찾아내는 재능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이미지를 접힌 부채의 그림처럼, 다시 말해 펼쳤을 때야 비로소 숨을 쉬고 새로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안쪽에서 활짝 펼쳐 보이는 부채의 그림처럼 받아들이는 재능이라고 말이다.

ㅡ<일방통행로>, 발터 벤야민.

우리에게 가장 빠져있는 것이 아마 타인에 대한 상상력일 것입니다. 타인은 그가 누구이건 우리 상상력의 눈높이와 같습니다. '지가 별수 있어?' 이 말은 내가 타인에 대해서 아무런 상상도 하고 있지 않다는 고백입니다. 우리 상상력이 별 볼 일 없다는 고백입니다.

리더나 리더십이란 말도 오염되어있습니다. 리더는 좋은 대학을 나오고 고액 연봉을 받고 고급 차를 타는 사람이 아닙니다. 리더는 자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새로운 세상이 존재하는구나. 그것이 가능하겠구나.' 생각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나의 리더이고 스승입니다.

가장 안쓰러운 말은 잉여입니다. 사실 남아도는 것, 과잉, 여분의 것, 철철 넘치는 것이 우리를 예술가로, 천재로 만들어주는데요. 진짜 기쁜 것은 꼭 필요한 일만 하고 사는 게 아니라 해도 해도 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건데 말입니다. 지금 잉여란 말은 재기불능의 상황, 영원한 실업만을 말합니다.

지속가능하다는 말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지속가능하게 해야 하나요? 우리에겐 지속시켜야 할 것과 당장 폐기처분해야 할 것을 구분할 능력이 필요합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우린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른 시각은 말로 표현됩니다. 세계에 대한 다른 시각은 뭐죠? 그건 세계를 다시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다.

언어학자인 촘스키는 인간의 잠재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언어에도 관심이 많다고 말합니다. 왜냐고요? 언어야말로 규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규칙 체계를 따르되 그 틀 안에서 자유롭고 창조적입니다. 인간 정신도 그렇습니다. 규칙을 따르되 그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촘스키는 유한한 수단의 무한한 활용에 대해 강조합니다. 우리도 사실 수단이라고는 몸뚱이 하나입니다. 내 자신을 얼마나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쓸 수 있을까요? 유한한 나를 무한히 활용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엄기호가 희망이나 기대, 경험이나 체험, 고백이나 증언 같은 언어들을 재검토하는 것은 제발 가만히 무기력하게 수동적으로 살지 말자는 뜻과 함께 인간 정신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말이나 같습니다.

엄기호는 사람을 옹호하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는 쪽으로, 나 혼자선 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우리의 문제는 특수한 게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수단이 아니라 이유를 생각하는 쪽으로, 용기를 내는 쪽으로, 내가 누군가의 동료가 될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보자고 말하는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은 계속 축소되고 있습니다. 사실 삶이 축소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좋습니다. 곧 죽어도 소설을 써야 하는 사람에게는 삶은 좋은 소설을 쓰느냐 마느냐 문제로 축소되고 맙니다. 어찌 되었든 노래를 불러야 하는 사람에게는 삶은 좋은 노래를 부르느냐 마느냐 문제로 축소됩니다.

그러나 지금 삶은 생계나 생존의 문제로 축소되고 있습니다. 너무 축소되어서 그 안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조건에만 갇혀있다면 우린 언어를 잃어버립니다.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사는 기능적인 삶이라면 언어는 파괴됩니다. 그러나 먹는 입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말하는 입도 있고 키스를 하는 입도 있습니다. 환경이 어찌 되었든 노래하고 시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네가 누구인지는,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지에 달려있다.

엄기호는 인간은 존엄한 것이 아니라 존엄해지려고 하기 때문에 존엄하다고 말했습니다. 삶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의미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의미를 찾으려 하는 한에서만 의미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하려고 발버둥 치는 한에서만 그럴 것입니다. 우린 이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말이 중요해집니다. 이야기가 중요해집니다. 모든 이야기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작과 끝에 갇혀있습니다. 단기 목표 달성형 삶 속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사회적 기대에 갇혀있으면서도 희망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 자아에 갇혀서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 고백이라 하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과장하는 것과 자신의 드라마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 현실의 한계와 고통과 불만족에서 의미를 끌어내려 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드는 사람, 세계와 자신이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용기를 내보지 않는 사람, 삶은 주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한느 사람, 함께 추구해야 할 목표를 갖지 못하는 사람, 타인을 경쟁자로만 여기는 사람, 남이 욕망하는 것만을 욕망하는 사람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말과 이야기를 갖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에 옮겨간 직장, 이사한 집들, 연봉의 금액 이런 것들만 남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우리 각자에 관해 완전히 독특한 것은 우리가 속해있는 범주들이 아니다. 완전히 독특한 것은 완전하고 신뢰할 만한 인간이 되기를 배워가는 자기만의 여정이다. 이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안에는 온갖 도전 장애 위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누군가에게 가르쳐줄 교훈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뭔가를 가르칠 텍스트,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여러 각도에서 생각한다.

ㅡ<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파커 J 파머.

 

오로지 사랑의 언어만이 제게 지속가능한 힘을 줍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줄곧 이방인이란 느낌을 갖고 살았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편의상 앞으로 이방인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이방인은 세계에서 복잡하기로 이름난 도시에서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골목 안에 붐비는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치즈와 백포도주를 한 병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일흔 살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빈자리를 찾다가 그에게 합석을 부탁했습니다. 그는 합석한 남자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튤슈를 사랑합니다."

이방인은 합석한 남자가 질문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아 다시 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습니다만......"

"전 이미 대답을 했는데요. 제 일은 튤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저는 튤슈만을 사랑해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그녀만을 사랑할 겁니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에 목을 매고 있죠."

그렇다면 도대체 튤슈는 누구일까요?

"네댓 살쯤 먹었을 때일 겁니다. 저녁 무렵이었죠. 저는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분이 하시는 구멍가게 앞에 앉아있었죠. 그날 저녁 그 앞으로 여자애 하나가 지나갔죠. 아니, 지나갔었나 봅니다. 머리를 곱게 기른 열네댓 살짜리 여자애가. 순간 제가 구멍가게 안으로 갑자기 뛰어들어와 흥분해서는 '아버지, 저 애와 결혼할래요!'라며 떼를 썼다더군요. 아버지가 어찌나 이 일을 두고두고 반복해서 말했던지 나중에는 그 장면이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르더군요.

그때부터 그 여자애는 제게 구체적인 존재로 다가왔죠. 기억하지 못했던 사건을 떠올린 셈인데 마치 경험하지 않았던 사건을 경험한 느낌이라고 할까. 어쨌든 튤슈는 그때 보았던 여자애입니다."

"나중에 그녀를 만났습니까?"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그녀를 찾아다녔죠. 그렇지 않다면 뭣하러 일흔 살이나 먹은 늙은이가 낯선 도시를 이렇게 헤매고 있겠소? 제가 모르는 곳의 모르는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제가 모르는 여자가 튤슈입니다. 저는 그녀를 찾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 믿음 하나로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죠."

그 노인은 몇 번인가 튤슈를 만났습니다. 전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도나우 강변의 기차역에서. 발칸 반도의 어느 궁에서. 지중해의 어느 도시 모텔에서. 그렇지만 매번 그녀를 찾자마자 곧 잃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찰나의 번쩍임이었습니다.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혹시 생계를 어떻게 이어나가시는지......"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를 찾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일들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녀를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론 충분히 않습니다. 제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제가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제가 살아갈 의미가 없죠.

저는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신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죠......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을 단지 자신만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죠.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면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의 존재 이유는 커지죠. 사람들마다 존재하는 이유는 다릅니다. 그리고 저의 존재 이유는 튤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튤슈를 사랑하면서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튤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리십니까?"

"일일이 설명하는 거죠. 예를 들면 오늘 밤 저는 당신에게 튤슈를 사랑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제가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당신에게 살아 숨 쉬는 구체적인 존재로 인정을 받은 셈이죠...... 제 외침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져 제가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된다면 그 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매 순간 숨을 쉬며 살고 있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유로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인파 속에서 마치 노래를 흥얼거리듯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너를 사랑해 튤슈. 사랑해 튤슈 너를. 튤슈 너를 사랑해. 사랑해 너를 튤슈. 튤슈 사랑해 너를...... 나흘째 오후에 한두 시간 문화 광장에 나가고 있습니다. 혹시 내일 거기로 오시면......"

"거기서 뭘 하는데요?"

"목소리가 잠길 때까지 '너를 사랑해 튤슈!' 하고 소리칩니다."

이방인은 다음 날 문화 광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날 밤 합석했던 노인을 찾아냈습니다.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눈을 감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어요. 그의 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녹음기로 그의 고함소리를 녹음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때는 굵은 목소리로, 어떤 때는 쉰 목소리로, 속삭일 수조차 없으면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습니다. "너를 사랑해 튤슈!"라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왜 그 노인의 고함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그 순간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이 원시적인 고함에 관심을 갖는지 생각해보았다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다 "너를 사랑해 튤슈!"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남자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용기가 나지 않아 저렇게 소리치는 남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어쩌면 그는 우리 대신 튤슈를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이 이야기는 터키 작가 아지즈 네신의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위해서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삶을 바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하는 무언가를 위해 삶을 바치는데 그것이 나를 만들고 빚고 키웁니다. 내 삶은 거기에 빚집니다.

사랑에는 나만의 드라마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와 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불안에 대해서ㅡ홍기빈(정치경제학자)와 함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을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아라'라는 정해진 매뉴얼과 같은 규칙 혹은 청사진이 아니다. 살아가며 이런저런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그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내가 원래 만들고자 했던 미래는 어떤 것이었고 내가 소중히 하려 했던 것, 내가 반드시 피하려 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일깨워주고 또 내가 생각했던 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느슨한 행동 지침이다. (...) 사회를 설계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제 많은 사회가 아니라면, 그 문제들이 해소되고 개선된 사회라면,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대략 그릴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사회를 바꿔나가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 그렇게 그려낸 사회는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유토피아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그런 '아무 데도 없는 곳'은 아니다.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한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것을 일컫는 말일 뿐이다.

ㅡ<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홍기빈.

 

§ 안전하게 합리적인 계산이나 하면서 익히 알려진 행동들만 하다가 죽을 거라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애초에 우리가 뭐 하러 태어난 것일까요? 인간에게 인생관, 종교 등과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은 미스터리 같은 인생의 심연 앞에서 삶을 펼쳐나가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당나귀도 인간도 본질은 합리적 계산기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을 펼쳐내는 존재란 것입니다.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쯤 우리는 완벽하게 뭔가를 알고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자신이 원하는 가상의 미래라는 것을 얼기설기 엮어놓고 그것을 계획 삼아 삶을 펼쳐왔습니다.

살고 나서야 그 계획이란 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깨닫게 되지만, 삶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경험을 통해서 다시 미래를 그립니다. 그 경험을 미래랑 연결시키면서 길잡이로 삼습니다.

현재와 미래는 변증법적 관계입니다. U2의 <주 스테이션(Zoo Station)>이란 노래에는 '시간은 미래를 과거로 만드는 기차'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현재는 미래가 있기에 존재합니다. 미래는 현재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안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상태가 돼버립니다. §

 

§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의미 있게 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일 수도 있고 자식새끼 먹이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신념일 수도 있고. 거기에 무슨 우열이 있겠습니까? 자기 삶의 미션이란 것, '그걸 포기하면 내 인생은 끝이다.' 그런 게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라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미션을 피해 도망갑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데 물고기 뱃속이란 공간은 숨만 쉬고 있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그런 상태인 곳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서 다시 미션을 수행합니다. §

 

§ 인간에게 있어서 리스크와 불안은 존재와 자연의 일부였습니다. 불안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불안감은 모든 사람을 다 지배합니다. 인간은 불안을 버텨내는 법을 배워야 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불안이 낳은 가장 좋지 않은 결과는 저마다 개인화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확대재생산 되면 서로를 공격합니다. 남을 해치면 강해진다는 착각을 합니다. 이 세상을 청소년소설이나 영화처럼 보는 겁니다. '나는 혼자야. 내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해.'라고 합니다.

노래 가사 중에 "내가 제일 잘 나가"란 게 있습니다. 그 노래 밑에 깔려있는 정서도 불안입니다. 걸그룹의 노래들을 들어보십시오. 자기계발서의 유행 역시 불안의 산물입니다. 자기계발서들은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에게 솜사탕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을 불안에 몰아넣으면 미친 듯이 자기 착취를 합니다. §

 

§  불안을 극복하는 두 가지 방법은 첫째, 도를 닦는 것, 곧 참선과 같은 것이고, 둘째는 옆 사람과 자꾸자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섞여있습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돈 없이 행복하게 사는 걸 익히는 겁니다. 돈 없이 품위 있게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오는 불편함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만약에 정 돈이 없어서 '난 시골 가서 폐가 하나 얻어서 살래.'라고 결심해도 실제로 그렇게 살아보려고 한다면 엄청나게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알게 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것만 있으면 다른 건 다 필요 없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붙들고 싶은 것 그것 하나가 있다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아주 소중한 거 하나만 남기고 다 비울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소중한 것을 지키고 사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버리는 쪽으로 자기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불안에 직면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두 가지뿐입니다. 짐승이 되거나, 인간을 뛰어넘는 인간이 되거나.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모르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스펙을 위해 자격증 하나 따는 것과 '찐하게' 연애 한 번 하는 것. 뭘 고를래?' 마흔 넘은 사람들은 당연히 '찐하게' 연애하는 것을 고를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계산을 하죠. 뭐가 손해이고 이익일까 헤아려보죠.

그런데 자기 삶을 앞에 두고 계산이란 걸 할 때 돈 계산 말고 다른 계산을 하는 능력이 자꾸만 사라지는 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정산은 삼사십 년 뒤에 한다고 생각해보십시다. 저는 그 학생에게 당신의 노후 준비는 이십 대를 이십 대답게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엄청난 구조적 모순 속에 있습니다. 다만 구조적 모순만 따지면 끝없는 자기 연민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이십 대는 재테크를 할 것이 아니라 저항하고 맞서야 합니다. 연대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제발 자기 연민 이런 거 그만합시다.

그러는 한편 가난해지더라도 살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나머지를 버릴 수 있는 힘을 바로 이십 대에 길러야 합니다. 한번은 또 다른 스무 살짜리 여대생을 만났는데 그 학생이 저에게 연금보험을 들었다고 자랑합니다.

저에게 "선생님, 복리의 마법을 아세요?"라고 묻습니다. '연금이나 보험은 일찍 들수록 유리하다.' 뭐 이렇게들 광고하니까 요새 학생들이 연금이나 보험에 많이 듭니다. 저는 "학생, 그 돈 가지고 뭐 하고 싶어요?"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여행 가고 싶고, 뭐도 먹고 싶고, 뭐도 배우고 싶고, 뭐도 하고 싶고, 뭐도 하고. 가만 듣다 보니 자기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 달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사십시오. 그래도 그 일을 수십 년 뒤로 미룰 거예요?"라고 물었죠. §

 

§ 제가 비그포르스란 낯선 스웨덴 사람을 소개한 이유는 지금 한국 사람들 앞에 신자유주의 정치 경제 모델 말고 다른 모델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다른 세계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희망을 준비하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신자유주의 정치 경제 모델을 대체할 다른 정치 경제 모델을 시도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현재 지구상에서 실제로 현실화된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 스웨덴 모델이었기 때문에 비그포르스를 소개한 것입니다.

만약 한진중공업이나 쌍용 사태 같은 일이 스웨덴에서 벌어졌으면 정부는 이 사람들을 어디다 배치해야 할지 나섰을 겁니다. 만약 5천 명이 해고되고 한창 때의 스웨덴이라면, 이사할 집에 이사 비용까지 다 챙겨줬을 겁니다. 노동자가 직장에서 해고되면 나라에서 다 파악해 어떤 교육이 필요할지, 어디로 재배치해야 하는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는 개인의 서비스나 열정까지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있지만 보편적 복지의 개념에는 어떤 것은 돈으로 따지면 안 된다는 합의가 들어있는 겁니다. 무상보육 이야기도 이 때문에 나옵니다. 애를 낳는 것은 돈과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 중에 "경제의 목표는 좋은 삶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경제의 목표는 재산의 축적이 아니라는 거죠. '좋은 삶'을 사는 경제란 건 무엇인가?.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저는 '피어나는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여기선 개인의 의식 변화도 필요합니다. 30년 전에는 우리나라에 맞벌이 부부가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상당히 많은데요. 그래서 두 배로 잘 살게 되었나요? 아닙니다. 이상하죠. 거꾸로 맞벌이 안 하면 먹고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 마음속에 자본주의적 마인드가 들어와서 임금 삭감 없이 노동 시간 깎으면 '애나 보자.' 이게 아니라, '노느니 돈 벌지.' 해서 '더 일해서 더 많이 벌어야지.'라고 생각하죠. 말짱 도루묵입니다. 그러니 제도만 고치면 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한 가치관, 기준도 고쳐야 합니다.

요새 사람들이 많이 불안해합니다. 불안을 없앨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불안이 많이 사라집니다. 불안 없는 삶을 꿈꾸기 때문에 불안해집니다. 인류 역사에 인간이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불안은 삶의 일부분입니다. 불안과 어떻게 친구가 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불안을 내 친구로 만드는 거죠. §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우리에게 최소한의 중요성을 차지했던 것을 최대한으로 생각해보고 최대한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최소한으로 한번 바꿔서 생각해봅시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미뤄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가능의 자리로 한번 불러보는 겁니다.

 

집단적인 자발적 소박함이 집단적 궁핍화에 대한 유일한 긍정적 대안이 되고 있다.ㅡ<새로운 빈곤>, 지그문트 바우만.

이 소박함이, 이 궁핍함이 경제적인 소박함이나 궁핍함만을 말한다고 저는 생각지 않습니다. 한 아프리카 부족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에 따르면 사람을 정말로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입을 옷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입니다. 친구를 언제든지 경쟁자로 여길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뼛속 깊이 추운 가난뱅이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애를 쓰는 것은 무엇에 소용이 있을까요?

그러나 완전한 의미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의미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일상적인 삶이란 언덕을 끝없이 오릅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시지프스의 후예들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뭔가 해보자.' 이런 작은 실천, 작은 믿음에서 나온 작은 실천들이 우리를 살립니다. 베르테르가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로테를 만나는구나.' 그 기쁨 하나로 온통 황홀감에 휩싸인 것처럼요.

 

 

 

<<우리라는 별자리에 대해서ㅡ정병호(천문인마을 천문대장)와 함께>>

 

그가 그렇게 별을 보러 다니면서 하지 않은 일이 한 가지 있었어요. 자신을 남에게 맞추는 일, 그는 그것만은 결코 하지 않았어요. 그가 요새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시작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원하면 일단 시작하라!' 그게 그의 신조였어요. 그가 얼마나 막무가내였느냐 하면, 대학 때 그는 회기동에 살았어요. 밤에 방에 자려고 누워 있다가 무심코 시계를 한 번 봐요. 그때 머릿속에 청량리역 막차 시간이 임박했단 생각이 스치고, 그러고 나면 그는 뛰어나가고 말아요. 막차가 떠나기 전에 별을 보러 서울을 떠나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지요.

그는 그런 식으로 자기 본능에 충실했다고 해요. "그래도 그 당시까지 별 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맘은 없었습니다. 그저 별 보러 다닐 만큼 쉬는 날이 많은 직업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 정도만 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어요. 그는 졸업하고도 망원경을 메고 버스를 타고 서울 외곽에 나가 고개 위에 앉아 별을 보곤 했습니다.

 

아직도 그는 겨울 산에 갑니다. 그는 전망이 좋은 바위에 올라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기 보이는 저 능선이 어디로 연결되는가, 저 밑에 어떤 마을을 품고 있을까 헤아려보는 것이 저는 좋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신이 오를 산봉우리만 보고 생각하면서 등산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라고 내게 말했어요. 그는 자신이 올라야 할 산봉우리가 아니라 그 산봉우리에 오르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했어요. 그렇게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은 어떨까요? 혹자는 모든 것이란 무의미하다고 말하지만 모든 것을 찾아보고 기억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일까요?

그는 주말이면 천문대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별자리에 대해 강의를 합니다. 별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그가 맨 먼저 하는 말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기대를 내려놓으라고, 휘황찬란한 은하 사진 같은 것은 잊으라고, 대신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 눈으로 직접 보라고 합니다.

그가 고요와 침묵을 주문합니다. 그는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눈으로 별을 보고 가슴에 담아가라고 합니다. 그는 우리 눈이 3차원이라고 말합니다.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이란 건 뭘까요? 3차원이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깊이였습니다. 눈으로 볼 때 우리는 3차원의 깊이 속에 별과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그는 220만 년 전 이제 막 직립보행을 시작한 우리 조상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먼 은하에서 출발했던 그 빛을 보고 "와! 보인다, 보여!" 하고 반가워했던 그 맘을 상상해보고 그 상상을 잊지 말고 살아달라고 말하고, 별이 나에겐 보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보였을 때 느꼈던 반가움을 잊지 말고 살아달라고 말하고, 우리가 보는 작은 빛이 실은 몇천억 개의 수많은 별들이 모여있는 것이란 것도 잊지 말고 살아달라고 말합니다.

그의 지론은 다른 모든 위대한 이론들처럼 단순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아는 만큼 보이고 계속 계속 더 보려 할수록 더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마 하늘의 별들이 그에게 어느 밤에 이렇게 속삭였을지도 모르지요. '이 우주엔 도저히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것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다 볼 수 없지만, 보려고 노력하고 애쓰며 사는 것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는 것은 숭고한 것이다.' 그럴 때 그에게 별은 친구이자 교사, 고향이자 미래, 아니면 그 자신일 겁니다. 그 자신의 가슴속 말을 별이 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외부 은하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외부 은하는 몹시 어둡기 때문에 한참을 보고 있어야 겨우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참 보고 있다가 겨우 알아보는 것, 그는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실은 피곤한 일입니다. 두 시간 반을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망원경으로 하늘을 노려보고 있으면 낮에도 눈앞에 가물가물합니다. 그래도 자신이 뭔가를 애써서 찾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아무리 어둡더라도 결국은 보인다.' 그것이 그에게 별이 전해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별을 보는 것을 별을 겪어봤다고 말합니다. 별을 겪어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망원경의 그 엄지손톱만 한 작은 렌즈로 몇억 광년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에 놀라고, 지구가 그리고 우리 지구인이 우주에서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에 놀라며 겸손해지고,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으로서도 신의 존재와 창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대체 누가 이걸 다 여기 우주에다 올려놨을까 감탄합니다.

 

그는 아직도 별은 취미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에게 취미란 게 대체 뭐냐고 다시 물어봤지요. 그는 내가 했을 때 즐거운 것, 그걸로 굳이 뭘 이루려고 하지 않는 것, 그 세계에 들어가 끝없이 헤집고 다니고 싶게 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대답은 특별해서 놀라운 게 아니라 그가 대답대로 살고 있어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어린이들과 만든 크리스마스 인형을 보면서 아인슈타인이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에게 한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크리스마스의 불빛들이 반짝이는 즐거운 축제에서 어린이 여러분과 만날 것을 생각하니 정말로 기쁘군요. 여러분이 이러한 축제로 탄생을 기리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가르침들은 너무나도 간단하답니다. 그러나 거의 2000년이 지났음에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어요. 친구들의 행복과 기쁨을 통해 행복해지는 방법을 배우세요. 서로에 대한 미움이나 다툼을 통해서가 아니고 말이에요. 만약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감정을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다면 인생에서 짊어져야 할 짐은 훨씬 더 가벼워질 겁니다. 아니 적어도 이겨낼 수 있는 정도는 될 거예요. 그리고 참을성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여러분의 길을 찾아간다면 곳곳에 기쁨을 퍼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너무나 원하는 것, 가장 보고 싶은 것들의 이름을 하늘에 묶어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별자리를 보면서 사자나 게와 비슷하다고 상상하려 애쓸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옛사람들의 상상력에 동참하는 중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사랑한 것들의 이름을 하늘에 올려놓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볼 때 우리의 사소한 욕망과 불만은 어쩐지 좀 누추하게 느껴집니다.

정병호 대장은 "저 별들을 누가 올려놓았나?"라고 물었습니다. 그 대답은 영원히 수수께끼지만 저 별들 앞에 붙은 이름과 희망은 분명 지상에 사는 인간이 무언가를 동경하는 마음으로 밤하늘 위에 올려놓았을 겁니다. 내가 이 지상에 사는 동안 품을 수 있는 가장 큰 동경은 뭘까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남을 하나의 동경이 뭘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 우리는 필시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삶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예 내가 별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몸부림치는 별 말입니다.

저는 '스타 탄생'이란 말이 쓰이는 방식이 싫습니다. 이제 희망은 그렇게 휘황찬란한 레이저쇼 같은 스포트라이트 속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수년간 그런 헛된 희망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스타입니다. 별의 찌꺼기로 우릴 만들었으니까요. 이건 은유가 아니라 과학적인 말이란 것은 아시죠?

우리는 이미 탄생한 스타들입니다. 그리고 자꾸 다시 탄생합니다. 다시 탄생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별입니다. 다시 탄생할 수도 있는 날, 그것은 아까 정병호 대장이 표현했던 그런 날입니다. '모든 것을 다시 알고 싶어지는 순간' 말입니다. 그런 순간에 우린 다시 탄생합니다.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나는 스물다섯 살부터 태어난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전까지의 삶은 삶으로 치고 싶지 않다는 거죠. 프루스트는 '나는 내가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전에 말했습니다. 그런 고백 뒤에 그는 대작에 착수했습니다. 내가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전혀 모르고 살았던 시간들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하겠기에 우린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별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고 싶은 별입니다. 내면에 소용돌이가 있는 별인 것이죠.

저 넓은 우주처럼 한계가 없는 것을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단순하고 진실한 사랑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 존재 속에 별을 깊숙이 심읍시다. 내가 별이 되어 비추고 싶어 했던 얼굴들을 깊숙이 심어놓읍시다. 우리가 재킷을 벗으면 가슴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게 합시다. 저는 별을 심자고 했는데 이것을 '별을 먹자.'라고 표현한 시인도 있더군요.

 

그 새벽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셀 수도 없이 많은 별을 하나의 기준으로 일렬로 줄 세워보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별들에 딱 하나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전혀 지루하거나 교훈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당연했습니다. 우리는 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별을 따라가는 그 시간은 별 하나하나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너머로 새벽이 서서히 밝아왔습니다. 이런 말이 생각났습니다. '천사들은 인간처럼 이미 있는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나타난 곳에 그들의 장소를 만들어낸다.' 그 별들이, 여명이 천사 같았습니다. 다들 나타나면서 그들만의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빛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해가 떠올랐습니다. 해가 뜨니 그쪽이 동쪽이란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일출은 그토록 찬란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밀히 밝아왔습니다. 저는 너무나 아름다운 별을 봤기에 처음엔 실망했습니다. 뭔가 다른 거대한 것, 찬란한 것을 기대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깨달았습니다. 험한 사막을 새벽에 몇 시간씩 걸으면서 별빛의 세례를 받으며 해가 뜨길 기다렸던 것이 그 자체로 여명이었다는 것을.

저는 제가 손을 잡을 수 없는 것과 손을 잡은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에 넣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저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저는 제 눈동자를 세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것 또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별빛, 그런 여명을 보는 광부들에겐 말버릇이 있었습니다. 저는 광부들이 잘 쓰는 단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즐겁게 하다'란 단어였습니다. 광부에게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광부들은 사막에서 한낯의 뙤약볕과 흙먼지와 싸우며 하루종일 아무 말 없이 기계처럼 일합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누구든 자신이 왜 노동하는지, 왜 사는지 잊고 맙니다. 자신이 세상의 일부란 것도 잊게 됩니다. 광부들은 저에게 자신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말합니다.

고립감과 소외감에 시달리는 광부들이 말하는 즐거움은 대도시의 즐거움과 다릅니다. 대도시에서 엔터테인먼트는 쇼 비즈니스와 스타 마케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사막에서 즐겁게 하는 것은 소비나 수동적인 쾌락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서로 조금씩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게 된다'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도시 스타들에 열광하고 그것을 화제로 올리는 것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작은 재능을 보고 듣는 것을 더 즐깁니다. 그것이 광부들을 즐겁게 하는 일 중 하나였습니다.

 

노래를 가장 잘 부르거나 춤을 가장 잘 추는 사람, 가장 아름다운 사람, 가장 힘이 센 사람, 가장 솜씨가 좋은 사람,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은 가장 존경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불평등과 악덕으로 향한 첫걸음이 되었다. 이러한 최초의 선호로부터 한편으로는 허영심과 경멸이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심과 선망이 유래했는데, 그 새로운 누룩곰팡이에 의한 발효는 마침내 행복과 순수에 치명적인 화합물을 발생시켰다.

ㅡ<인간 불평등 기원론>, 루소

불평등한 재능으로 서로서로를 판단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오로지 우리가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평가에 의해서만 자신이 존재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서 우린 서서히 자기 존중감을 잃게 됩니다. 자신을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루소는 남의 판단으로만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내는 사람을 경멸했습니다.

자신을 가장 중시하는데도 자신을 계속 남과 비교하게 되는 이 이상한 시대에 정병호 대장은 마치 불평등한 재능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루소의 '미개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남들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자연을 애호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따라 살려 하지 않고 자연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는 자연에 자연처럼 반응하고 자연처럼 규칙적으로 자연처럼 단순한 수단으로 살아갑니다. 그 역시 대화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입니다. 천문인마을 다락방에서도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지만 그건 자신과 동시대인들의 자유를 위해서였습니다. 제게는 그 모습이 마치 자유를 열렬히 강조했던 루소 같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권태롭지 않기 위해서도 성공하기 위해서도 엄청나게 많은 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수단은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그는 거의 매 순간 만족스럽습니다. 그는 수많은 것을 욕망하느니 자연이 부추기는 마음속의 충동을 따르길 권합니다. 그가 꼭 이루고 싶은 꿈은 산악 스키를 배우는 것과 바이칼 호수에 가는 것입니다. 그가 왜 그런 꿈을 꾸게 됐는지 언제부터 그리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오로지 '그러고 싶다'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