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프랑스어 수업에서는 나를 잊어버리기에 대해 배웠다. 프랑스어는 ‘연기하다’와 ‘놀다’에 같은 단어를 쓰는데 언어를 처음 배울 때는 원어민을 연기하는 게 필요하고, 그건 놀아야 하는 거고, 그러려면 나를 잊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무대 위에서 내가 잘하나 못하나를 의식하는 배우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거다).
아, 나한텐 지금 이게 가장 필요하구나. 연기하듯 쓰기, 놀 듯 쓰기, 나를 잊고 쓰기.
밖으로 나갔다. 방에는 자아가 너무 많으므로.
“잘 써야겠다는 마음 때문에 한 줄도 못 쓰겠다”고 말했더니, 글쓰는 이에게 그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했다. 글 쓰기에 좋은 컨디션 같은 건 없다고. 망할 것 같아도, 망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도 그냥 묵묵히 써야 하는 거라고.
무엇을 써야 할까. 어떻게 써야 할까. 장강명 소설가는 글쓰기란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엉망진창이지만 하루 이틀 쓰다 보면 중심이 잡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방향을 찾고 싶다. 내 스스로가 “참 잘했다”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그것이 글 쓰는 사람의 길이라면 더욱 좋겠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눈앞의 성과 말고 결국은 모두가 헤매고, 의심하고, 가끔은 포기한다는 이야기를. ‘여기에 쓰인 법칙대로 따라하면 이들과 비슷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보다 ‘사실은 그들도 당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성공 법칙 같은 거, 잘 몰라도 큰 일 안 생긴다고. 일하는 거, 조금 느려도 큰 사고 안 난다고. 화려한 무대 조명 아래 감춰진 어둠이 아니라, 평등하게 쏟아지는 햇볕 아래서 사람들과 수다 떨고 싶다. 해가 지면 아무 말 없이 멍하니 같이 지평선을 바라보고도 싶다.
교사이기 전에 사람인 걸 잊지 않으려고 한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 틀린 건 지우고 다시 쓰면 돼. 지금은 못해도 괜찮아. 꾸준히 연습하는 게 중요한 거야.”
이 책에는 시간의 층위가 여럿 존재하지만,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욘나는 “축복이라 할 만한 재능을 지녀서, 매일 아침 새로운 삶을 시작하듯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언제나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바로 가까이에서 기다리고, 욘나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다.
-토베 얀손, <페어플레이>
다행스러운 것은 욘나의 재능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마음으로 일어나기. 나는 밤의 일들을 모조리 망각한 채 뭐든 할 수 있는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다. 어제로부터 가져온 것은 하나도 없고, 한 번도 나를 미워한 적 없다는 듯 나를 사랑해버릴 수 있다.
그러니 밤에는 일단 가만히 누워 아침을 기다리는 게 가장 좋겠지. 아침은 꼭 올 것이고, 아침의 나는 밤에 생각하는 나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가 보는 나’의 모습도 정확하지 않음을 안다.
또 어떤 모습이든 내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이로써 나는 더 넓어진다.
애초에 나의 것이라 여기지 않은 면모와 내가 좋아하는 면,
모두 ‘나’가 될 것이다.
스스로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언가로 규정하고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고 앓는 것이 ‘실’이었다.
모든 것을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넓어지자는 것이
이제 좀 편해지고자 내린 최선의 결론이다.
사람은 파도처럼 계속 밀려오고 난 그것을 꽉 잡을 수 없으니,
그것에 몸을 싣고, 힘을 빼고, 둥둥 떠 다니면 되는 거겠지.
늘 새롭고 신나게 둥둥.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든 교류하고 통했다면 그걸로 좋다.
춤이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춤을 맛깔나게 추는 아이돌과 댄서들이 좋기도 했고, 춤과 노래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순간이 좋기도 했고, 춤을 계속 추면서 나아지는 나의 동작이 좋기도 했고, 땀 흘리는 유일한 취미라 건강한 기분이 들어서 좋기도 했다. 아무래도 본질은 과정을 즐기는 데 있는 것 같다. 뭐가 어째서 좋든 일단 난 춤을 출 때 행복하다. 춤에게는 바라는 것도 없다. 그저 연습하기 전과 후가 약간만 달랐으면 좋겠다. 하지만 못해도 좋다. 못해도 된다는 것을 알 때 나는 좀 더 가벼워진다. 문득 인생을 춤추듯 살면 어떨까 싶었다. 못해도 좋으니, 잘해야 한다는 부담은 내려놓고, 춤추듯 즐겁게.
그로부터 며칠 뒤 다시 길 위에 섰다. 이번에는 천천히 걷고 달리기를 반복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속도로 달리는 것. 다른 사람의 속도와 경쟁하는 것이 아닌, 나에게 가장 편안한 페이스를 찾는 것. 달릴 때 가장 중요하다는 이 두 가지는 비단 달리기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운동회의 달리기가 아니라 오래 달리기처럼 천천히 이뤄지는 것이었다.
무엇도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막막한 마음을 떨쳐내는 데에는 하루 아침이 아니라 수십, 어쩌면 수백 개의 아침이 모여야 한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길이 가득한 세상에도 두 발로 거뜬히 나아갈 수 있는 주로가 있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달리기를 통해 과거로부터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웠고, 빠르게 달리는 누군가를 뒤쫓는 것이 아닌 나만의 속도를 찾았다.
주로에서 보낸 숱한 시간이 나에게 남긴 메시지는 결국 이 한 마디다.
내가 멈추지 않는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
대리님은 마치 디즈니 그림체처럼 맑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작은 것에서도 기쁨을 찾았고, 대부분의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임신한 몸으로 가파른 길을 오르는 것이 힘들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내게 말했다.
“뭐든 천천히 하면 힘들지 않아.”
보다 작은 특수기호 불분명한 ‘나’를 찾으려 애쓰지 말기
나에게 없는 것보다 있는 것에 집중하기
사랑하는 것을 아낌없이 사랑하기
행여나 무언가 부족할까 봐 걱정하지 않기!
이런 자세로 쭉 살만큼 튼튼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운동을 하고 제철 채소를 먹고 영양제를 챙기고 따뜻한 물을 마시자.”
오늘을 잘 사는 사람부터 되기로 한다.
미래의 내가 되고 싶은 할머니는 튼튼한 할머니다. 강인한 체력에서 나온 여유로움으로 하루하루가 명랑한 할머니.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도전하거나 포기할 때 세월을 핑계 삼지 않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갈수록 혈기 왕성해지는 삶. 갈수록 다채로운 자아가 깨어나는 삶. 그런게 바로 내가 바라는 미래다.
그즈음 나를 움직였던 책 제목이 있다.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일상을 지탱하는 몇 가지 즐거움과 함께 살아간다면, 엄청난 ‘무엇’이 필요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서른이 된 내겐 일 말고도 사랑하는 것이 많았다. 매일 내 귀를 설레게 하는 뮤지션도 있었고, 갓 가족이 된 고양이도 있었고, 일과에 지친 나를 깨워주던 요가도 있었다. 덕질과 고양이와 요가. 내가 사랑하는 세 가지가 삼각형을 이루어, 안정되게 나를 지지해주는 느낌이었다.
“나는 말야. 네가 열심히 무언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 것 같아.”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의 내가 되고 싶다. 변하고 싶다. 나아지고 싶다. 깊어지고 싶다. 쉰이 넘은 선배는 이제서야 자기 자신이 마음에 좀 든다고 했다. 매일 제자리에 머무는 듯한 하루지만, 조금씩 반복하다 보면 나도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때의 나는 내가 퍽 맘에 들게 될까.
무엇을, 왜 쓰고 싶은지 모르면서도 써야 한다는 마음만은 선명할 때, 어떤 사람들은 펜을 든다.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마주 보는 것은 텅 빈 공간이다. 텅 빈 종이. 텅 빈 화면. 비어 있어서 자유롭고, 비어 있어서 두려운 여백을 그들은 가만히 응시한다. 머뭇거리고 뒷걸음치기도 하다가 결국 한 글자, 한 단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그 뒤로 한 문장, 한 단락이 따라오고 쓰는 이는 옷을 짓듯, 그림을 그리듯 언어를 매만진다. 엉망인 채로, 때로는 손기술을 탓하기도 하며 묵묵히 써내려간다.
그런 사람들의 밤은 겨울밤처럼 길다. 지나간 시간의 페이지를 다시 찬찬히 넘겨보고, 다가올 날들의 파도를 가늠해보기도 하며, 내 속에 무수히 잠들어 있는 말들을 홀로 발굴하는 캄캄한 밤. 글 쓰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고고학자다.
책을 읽는 건 정적인 일이지만, 한편으론 무척이나 동적이기도 하다. 읽는 이의 내면이 물결치고 내려앉았다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거리의 동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정지된 채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그래서 읽는 사람은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삶이란 참 슬픈데 웃기고, 알 수 없지만 신나기도 한, 참으로 묘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요지경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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