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우리의 일상이고 인생이고 삶입니다. 작가들이 자질구레한 일상을 스토리로 바꿔 책에 담듯, 몸이 존재하는 바로 그곳에서 글을 쓰면 됩니다. 일상의 사소한 관찰, 경험, 만남이 스토리의 재료입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놀이처럼 즐거우면서도 철학처럼 근원적이죠.
글쓰기를 통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와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쓰지 않고는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정확한 단어를 고른 뒤 뜻이 통하도록 문장으로 빚어내야만 비로소 생각과 감정이 명쾌해지니까요. 무엇이든 글로 써야 오롯이 내 것이 됩니다. 일주일, 한 달, 일 년, 십 년, 심지어 인생을 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에 녹여두지 못한다면 한순간도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단언컨대 글을 쓴다면 무심코 흘려보낸 소소한 행복을 주머니에 담을 수 있습니다. 필력에 얽매이지 않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글을 쓰겠다는, 쓰도록 돕는, 자신의 삶을 살아보겠다는 진실된 마음입니다.
짧은 글이라도 자주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글쓰기 세상으로 들어가게 될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글감을 발견하는 감수성이며 꾸준한 집필입니다.
육아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부모가 더 크는 성장 과정입니다. 또 아이들은 저절로 크지만 결코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엄마라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겁니다.
그 경험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아기를 위해 모든 걸 용인했던 그때를요.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러분은 충분히 위대한 업적을 쌓은 겁니다. 생명을 만드는 일에 온몸을 다 바치는 사람은 오직 엄마뿐입니다.
고된 일상의 연속이지만 글을 쓰지 않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감정, 생각, 경험 같은 자잘한 것들을 문장으로 옮기는 과정에 많은 것들이 정화되기 때문이죠. 또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느낄 수 있습니다.
육중일기를 쓰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많은 행복을 우리가 놓치며 사는구나.’ 우리 주변에는 행복이라 할 만한 것들이 넘치는데도 우린 언제나 자극적이고 새로운 일만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런 흥분만 즐기는 게 가능할까요. 쾌락만 쫓는 게 옳은 걸까요.
삶은 퍼즐 맞추기라고 생각합니다. 매 순간은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되어 우리의 삶을 채워나갑니다. 그 어떤 조각도 다른 조각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무늬나 그림이 없는 테두리의 조각일지라도 모두 소중합니다. 행복은 화려한 클라이맥스에도 존재하지만 하루하루 묵묵히 넘기는 책장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평범한 일상도 문장에 담기는 순간 스토리가 됩니다. 삶은 그런 스토리의 연속입니다. 오직 쓰는 자만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무엘 울만은 그의 시 ‘청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와 나의 가슴에는 무선통신소가 있다. 하느님과 사람에게서 아름다움, 희망, 환호, 용기 그리고 힘을 받고 있는 한 그대는 젊은이다.”
일상을 기록하며 생각과 감정의 실마리를 찾으십시오. 그것이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유로 커나갈 때 인간은 밀도 있는 존재로 성장합니다.
정말 쓰다 보면, 의도를 버리고 풀어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스토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일상에서 스토리를 건지는 일은 평범한 자극을 인지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끝은 뭐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펜을 들고 끼적여보는 것이죠. 이 작은 수고로움이 한 편의 이야기가 되고, 이런 이야기가 쌓이면서 자신만의 생각, 태도, 관점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철학이고 가치관입니다.
눈앞의 작은 것에서 시작해보세요. 때로는 모래알처럼 낱낱이 흩어지더라도 쓰는 걸 멈추지는 마세요. 모든 글감이 달콤한 솜사탕처럼 부풀지는 않으니까요. 그래도 멈추지 말고 계속 쓰세요. 쓰다 보면 스토리가 되고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됩니다.
지금 앉아 있는 장소를 쓱 둘러보며 눈에 들어오는 것을 써보는 건 어떨까요?
어디에서 언제 잡힐지 모르지만 계속 미끼를 던지는 거죠.
작업 중인 원고의 얼개를 보면서 채워 넣을 글을 구상했습니다. 낮에 메모해둔 것도 있으니 그걸 기초로 살을 붙이면 됩니다. 설계도면을 그리는 것처럼 치밀하지도 않습니다. 할머니들이 커다란 벽걸이 달력에 ‘약’, ‘머리’ 하는 식으로 일정을 표시해두는 것처럼 간단합니다. 엉성한 구성이 끝나면 다음은 손이 가는 대로, 문장이 만들어지는 대로 끌어낼 뿐입니다.
한번 써보세요. 눈으로만 보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어쩌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나열하다 보면 어느새 비슷한 내용의 문장을 서너 개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한 편의 글로 자랄 씨앗이 됩니다. 건성건성 ‘어쩌면’을 남발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지만 자석에 끌리듯 내면의 에너지가 향하는 소재가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그걸 노리는 거죠.
난 올겨울에도 파란색 패딩조끼를 즐겨 입었다. 정확히 4년 전 여주 아울렛 시즌오프 할인 때 3만 6,000원을 주고 샀다. 어떻게 이리 쌀까 의아했지만 오리털은 여전히 빵빵한 보온력을 발휘하고 있다. 신발은 보통 검은색 운동화를 신는다. 이 또한 할인점에서 4만원에 샀는데 2년 정도 신으니 버티지 못하는 듯하다. 얼마 안 가 터지고 찢어질 곳이 보인다. 청바지와 면바지 두어 벌을 돌아가며 입고 티셔츠도 검은색 몇 벌이 전부다. 이사하고 아내가 날 위해 배정한 공간은 붙박이 한 칸이 고작이다.
난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는 편이라 뭘 사거나 고르는 일에 흥미가 없다. 가진 것만이라도 더 낡지 않아 새로 살 일이 없었으면 한다. ‘구매’나 ‘비교’를 담당하는 시신경이 끊어진 건 아닐까 의심도 든다. 뭔가를 사는 과정이 대단히 간단해졌다. 물론 아내는 너무나 엉성하다고 진단을 내렸지만.
아무튼. 이런 내게도 갖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건 바로 ‘공간’이다. 나만을 위한 공간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혼자만의 시간만큼이나 필요한 게 혼자만의 공간 아닐까. 직장을 다닐 때만 해도 꽤 넓은 공간을 혼자 썼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내 예상대로 되어 있는 공간은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정신적 해방은 그런 곳에서 이뤄진다. 사무실이 더 편하다는 누군가의 고백을 그래서 난 이해한다.
물론 글 쓰는 일은 공간을 따지지 않는다. 도서관에서도, 공원 벤치에서도, 지하철 출입문 앞에서도, 아이들이 소리치며 떠드는 놀이터에도, 장난감과 책이 뒤엉킨 서재의 책상에서도 글은 나온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그 공간에서 세상과 얼마나 자유롭게 분리되고 또 연결되느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한 해 동안 풀지 못한 것은 ‘공간’에 대한 욕망이었다. 오직 나를 위한 작은 책상 하나, 몇 명 앉아서 함께 글 쓸 테이블 하나 들어갈 공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있으면 좋은데 꼭 필요한가. 이 질문에는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컴컴한 방에서 스탠드 불빛에 겨우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책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공간을 사진에 옮겨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거기에는 어떤 부족함도 없었다. 신경을 간질이는 잡음은 모두 어둠 속에 숨길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종이와 연필. 모니터와 키보드. 이것만 있으면 세상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있지 않은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게 욕심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참았던 숨을 터뜨리는 기분이 든다. 답답했던 가슴에 시원한 공기가 돈다. 욕심이 하나 사라지면 그만큼 건강해지리라.
_욕심과 필요 사이의 어디쯤에서
‘나는 OOO을 기억한다’로 시작하는 글을 쓰는 것
제 방법은 그녀의 ‘기억한다’를 ‘원한다’로 바꾼 겁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우선 [나는 삐리리를 원한다]라고 쓰세요. 그리고 다음 문장부터는 ‘삐리리’를 쓰지 말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쓰면 됩니다.
어떤 것도 좋습니다. 마음이 가는 곳으로 손을 놀려보세요.
곱씹어보면 존재에 관한 물음은 결국 역할에 관한 고민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해야 하는가,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고립무원에서 혼자 사는 게 아니라면 누구나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그 속에서 감당하는 여러 역할 간에 경중을 따지고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는 게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인 셈이다.
우리는 한순간도 역할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관계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무엇이 되지 않는가. 엄마의 아들, 할아버지의 손자, 고모의 조카, 누나의 동생이 되며 또 병원에서는 그날 태어난 열한 번째 신생아가 된다. 그런 고리는 끝없이 만들어지고 끊어진다. 물론 평생가는 역할이 있는 반면 몇 분만에 끝나는 역할도 있다. 관계를 맺는 데 신중해야 하고 역할은 고심해서 맡아야 한다. 관계와 역할에 관한 질문이 멈춘다면 삶은 크게 요동칠 수 있다.
민오 아버님이라는 낯선 이름이 나를 다시 물음표 앞에 세웠다. 나는 어떤 아빠가 될 것인가. 아이들은 아빠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지금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놓치는 것은 없나. 오늘 아쉬웠던 점은 무엇인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가. 충분히 사랑을 표현하고 있나. 충분히 사랑하고 있나. 누군가의 무엇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_‘누군가의 무엇으로 산다는 것’ 중에서
살면서 갖게 되는 수많은 이름이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슴 뛰는 이름은 아빠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관계에서 감당하고 있는 당신의 역할에 대해 한번 써보세요. 철학적인 냄새가 전혀 안 나도 좋아요. 시시껄렁한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아가며 경험했거나 들었거나 느꼈던 것을 한번 써보는 겁니다. 친한 언니의 뒷담화에 배신감을 느꼈던 이야기도 좋아요. 온 집안일을 다 챙겨야 하는 며느리로서 느끼는 감정도 좋아요. 무뚝뚝한 남편의 아내가 쓰는 글도 기대됩니다. 말 안 듣는 아이들의 엄마로서도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노트를 펼치세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써보세요.
아내, 엄마, 며느리, 딸, 잘 아는 동생, 친한 언니, 문화센터 수강생 등. 쓰다 보면 머리를 스치는 짧은 일화가 떠오르지 않나요. 그 일에 대해 한번 써보세요. 아무런 경험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나열한 역할을 수행하며 어떤 일을 하는지 쓰십시오. 아내로서 하는 일부터 쓸까요.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 써내려가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곳으로 뻗어나갈 겁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루 중 제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쓰고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요? 아내인가요? 엄마인가요? 회사원인가요? 좀 더 구체적으로 써도 좋아요. 빨래하는 사람인가요? 청소하는 사람인가요? 통장관리하는 사람인가요? 어제와 오늘이 달라도 좋습니다. 마음이 가는 그 역할에 대해 써보세요.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거기에서 출발하세요.
공감은 몸으로 하는 겁니다.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상황으로 완전히 녹아들어가서 온몸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겁니다.
절감했습니다. 도움이라는 건 말로 하는 게 아니다, 필요한 순간에 몸으로 하는 것이다, 내 수고를 한 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다, 내 불편함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진정한 공감이 아닐까요. 말로만 이해한다고 하면 무슨 소용인가요. 상대방의 입장에 100% 공감했다면 바뀌는 게 맞습니다. 온몸으로, 행동으로.
주제나 메시지를 미리 고민하지 마라. 일단 쓰고 그 속에서 발견하라.
일단 쓰자. 눈앞의 컵으로, 손등의 상처로, 친구에게서 날아온 메시지로 글을 시작하라. 쓰다 보면 한 편의 엉성한 초고가 나온다. 이 초고를 다듬어 한 편의 글로 완성시킬 수도 있고, 얼마 전에 써둔 또 다른 엉성한 초고와 버무려 새로운 글로 키울 수도 있다.
일상의 소재를 글감 삼아 쓰다 보면 자신의 관심사나 고민거리를 알 수 있다. 엉성한 초고에서 사랑, 인간관계, 진로, 건강, 비전, 가족 등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발견된 주제를 중심으로 글을 다듬으면 엉성한 초고와는 전혀 다른 글이 탄생한다. 이전에 썼던 짤막한 글에서 에피소드를 가져올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통계나 뉴스, 혹은 며칠 전 인문학 책에서 봤던 인상 깊은 구절 등을 인용할 수도 있다.
다른 조건은 없다. 단어 4개만 넣으면 된다.
주변의 평범한 사물, 사람, 현상이 모두 글감이다. 또 이들은 무관해 보이지만 모두 연결된다. 이를 테면 안경, 손톱, 알람, 똥이라는 소재는 ‘나’라는 주제를 통해 하나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은 굴뚝같지만 “쓸 게 없다”는 이유로 글쓰기를 이어가지 못한다.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기다리지 말라. 우리 삶이 서너 편의 에피소드로 요약할 수 있단 말인가! 느껴야 한다. 알아봐야 한다. 눈치를 채야 한다. 주변에 수많은 글감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 “쓸 게 너무 많아” 오히려 괴로울 것이다. 무심코 흘러가는 수많은 찰나, 이 모두가 좋은 글의 씨앗임을 명심하자.
쉽게 쓰자. 구체적이고 익숙한 단어로 출발하자. 관념으로 가득한 문장을 전면에 배치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건 단순히 ‘어떤 사건이 있었다’가 아닙니다. 사건의 본질은 그래서 ‘나는 어땠다’가 아닐까요. 그 순간을 타임캡슐처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뿐입니다.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면 충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글로 풀어야 풍부하게 그 순간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일상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람처럼 눈썹을 스치는 생각, 확 끓어올랐다 가라앉은 그 감정. 참 좋았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그걸 남기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너무 아름다워 간직하고 싶었다는 한 엄마의 말처럼 우리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일은 일상에서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걸 얼마나 담아내느냐에 따라 삶의 농도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아이들에게 “오늘 시험 잘 봤어?”라는 질문 말고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나요?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이들이 사랑을, 우정을, 빈부격차를, 약자와의 공존을, 우리 사회의 정의를,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을 물어 온다면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해줄 수 있나요? 이런 문제를 혼자 고민해본 적이 없다면 그래, 한번 얘기해보자,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엄마는 말이야, 엄마는 이렇게 생각해, 엄마 생각은 조금 다른데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책을 읽고 뉴스를 본다고 그걸 말할 수 있을까요? 정보를 전달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읽기와 듣기로 정보를 습득했다면 말하기와 쓰기를 통해 정리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말하기와 쓰기 중에서도 쓰기가 먼저입니다. 게다가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누가 알려주지 않습니다. 책에서 볼 수도 없죠. 자기 자신만이 그것을 꺼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써야 합니다.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면 먼저 내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쓰는 행위가 필수적인 것이죠. 잘 쓰는 사람은 말도 잘합니다. 이미 쓰면서 자신의 언어로 정리를 해놨으니까요. 누가 써놓은 글을 읽기만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정보를 능가하는 것은 굳건한 가치와 철학이니까요.
우리에겐 이런 공간이 필요합니다.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곳. 정직하고 순수한 표현 자체가 곧 자신인 곳. 그것으로 충분한 곳. 의심 없이 비판 없이 존재를 인정받는 곳.
글쓰기를 통해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약한 자신을 토닥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생각지 못한 용기를 발견해 힘을 얻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잊고 있던 추억이 생생하게 살아날 때는 글쓰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소했던 일들이 이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안겨 줍니다. 덮어두고 살았다면 아까웠을 소중한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이처럼 꾸밈없이 자신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가진 것이 모자라고 재주가 못마땅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지요.
살아가는 건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오가는 좋은 감정이나 행동, 이를테면 배려, 친절, 양보, 우정 따위도 결국은 사랑의 다른 모양 아닌가요. 아이를, 아내를, 남편을, 부모를, 형제를, 이웃을, 같은 하늘 아래 공기를 나눠 마시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가기와 사랑하기. 몇 번을 곱씹어봐도 참 비슷한 두 말입니다.
글을 쓰면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거리의 할머니가 어머니 같고, 하굣길에 만나는 모든 아이들이 아들과 딸 같습니다. 서툰 화장, 어색하게 담배를 문 모습의 대학생은 젊은 시절을 불러옵니다. 그때의 심정을 회상하며 청춘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눈길도 주지 않았던 저녁노을에 마음이 울렁이고, 세찬 바람에도 기필코 봉우리를 핀 들꽃에는 눈물이 일렁입니다. 또 얼마나 많은가요. 나를 사랑하면서부터는 주변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마당을 쓸면 세상 한 켠이 깨끗해진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선물 하나가 제 삶의 한 순간을 미소로 채워 주었습니다.
글쓰기가 가꾼 엄마의 삶과 그들의 사랑을 받는 아이, 남편은 또 어떤가요. 그렇게 사랑이 사랑을 낳고, 손에서 손으로 온기를 전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글 쓰는 사람은 메마른 건초 더미에서도 따뜻한 쌀밥을 지어낼 수 있습니다. 어울리는 단어를 골라 적절히 배치해 뜻이 분명한 문장을 만듭니다. 그 문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한 편의 아름다운 글이 되는 것이죠.
시간은 힘 있는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약한 자에게 관대하지도 않다.
동서고금, 계급고하, 남녀노소 막론하고
다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만인은 시간 앞에 평등하다.
20년 가까운 시간 앞에서
나는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만든 사람이다.
-만인은 시간 앞에 평등하다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생각과 감정을 아까워하세요. 문장에 담아 인생의 한 조각으로 새기세요. 바로 거기에 내 삶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글을 쓰려면, 스스로 유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힘든 상황조차도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우리를 성장시킨다.
가끔 무료해질 때는 주변 사람을 구경합니다. 어떤 책 보나, 무슨 공부하나, 메모는 하나, 손톱을 물어뜯나, 생수를 마시나, 정수기 물을 받아 마시나. 뭐 그런 잡스러운 행동을 보며 그 장면을 문장으로 옮겨봅니다. 일종의 글쓰기 산책입니다.
한 솥에서 뜬 국이라고 해도 누구는 짜다, 누구는 싱겁다고 합니다. 같은 곳을 다녀와도 기억에 남는 부분은 다릅니다. 한 사람을 놓고도 저마다 내리는 평가가 다릅니다. 우리 삶도 그렇죠. 비슷한 듯 다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와 같은 삶은 없습니다. 내 향기는 내가 만드는 겁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어요.
자기 인생의 사관이라고 생각하세요. 글 쓰는 비서를 하나 뒀다고 치세요. 그리고 그냥 쓰는 겁니다. 일기라고 생각해도 좋고 에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자기가 주인공인 소설이라고 해도 문제될 건 없습니다. 어차피 제작, 각본, 연출 모두 자신이 하는 거니까요. 날 기억할 사람, 나 말고는 없습니다. 내 역사를 내가 기록하는 거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세요. 기왕이면 재밌게 쓰는 겁니다.
남들과 다를 게 없다고 단정 짓지 마세요. 살펴보면 다르지 않은 게 없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을 알아가고 그것을 삶의 한 장면으로 남기는 게 중요합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어도 향기는 퍼집니다.
심지어 배변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위해 비닐장갑까지 껴야 했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살이를 인생의 훈장으로 생각합니다. 둘째 며느리임에도 자신이 감내한 그 긴 세월을 원망하지 않고 복이라 여깁니다. 지금도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문득문득 시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 말이 축복처럼 떠오른다고 합니다. “고맙다, 내 딸.”
쓰면 그만입니다. 어떻게 쓰냐고요? 감정 그대로, 편하게, 두려워 말고 쓰면 됩니다. 처음부터 작품을 염두에 두면 어려우니 그냥 ‘끄적인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해야 비로소 내 인생이 됩니다. 살아가며 글쓰기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없습니다. 이보다 더 탁월한 친구는 없습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써라. 말이 곧 글이다. 편하게 쓰라. 두려움이 글을 막는다. 두려워 말라.
어리석음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결함이 아닐까. 인간은 어리석기에 조건 없이 마음을 주고, 어리석기에 눈물 흘리고 아파한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이 우리를 따뜻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날카로운 고드름으로 자기 구역임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후회할지언정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게 낫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있단 말인가. 어리석어 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의 절반을 보지 못한 셈이다.
-‘어리석음 예찬’ 중에서
저는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는데도 지금은 글로 먹고살게 되었습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스승이라 여기는 사람은 미국의 시인인 나탈리 골드버그입니다. 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쓰다 보면’인데 나탈리 골드버그의 ‘무조건 쓰라’는 지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무조건 쓰다 보면 평소에는 가보지 못한 내면의 보물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죠.
내 삶을, 내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리석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에서 힘을 얻습니다. 나를 향한 문장이 아니었는데도 나를 위한 위로라고 생각하죠. 문학을 찾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요. 작가들이 단어의 바다에서 험한 파도를 헤치며 건져 올린 문장은 독자들에게 건강한 한 끼 식사가 될 겁니다. 제 글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건강한 문장이 누군가의 눈을 타고 들어가 마음을 적시고 손발을 녹이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게 글이고 그런 글을 써야 하는 게 바로 글 쓰는 이들의 숙명이 아닐까요.
눈에 띄는 책이나 시집을 집어 들어보세요. 쭉 훑어도 좋고 중간쯤을 펼친 뒤 천천히 읽어가도 좋습니다. 한 문장만 찾으면 됩니다. 또는 하나의 단어라도 괜찮습니다. 거기에서 출발하는 거니까요.
몸이든 마음이든 상처를 입었다면 우선 잘 아물도록 정성을 다하자. 치유가 우선이다. 베이고 찢기고 벗겨진 상처는 시간이라는 양념과 버무려지며 흉터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상처가 아문 뒤에는 흉터에 집착하지 말자. 오히려 흉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상처는 순간의 아픔이지만 흉터는 내 삶의 고전이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흉터가 답해줄 것이다.
-‘흉터로 뭘 할 수 있지’ 중에서
평생을 나라는 인간과 붙어살았던 몸. 그 몸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짜증을 유발하는 것은 최고의 글감입니다. 이야기는 곧 감정입니다. 우리가 무슨 역사에 길이 남을 사마천의 <사기>를 쓰자는 게 아니잖아요.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담아낼 소재가 있으면 그걸로 되는 겁니다. 거기에 무궁무진한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히고 귀찮게 했던 그 녀석. 쳐다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 녀석을 글로 옮겨보세요. 하품처럼, 재채기처럼 숨길 수 없는 이야기가 샘솟을 겁니다.
비유는 곧 연결성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관찰에 재미가 들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하루를 보내며 만나게 되는 사소한 물건이나 현상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글 쓸 거리는 넘쳐난다는 사실에 행복해집니다. 때로는 시간이 부족하고 표현력이 딸리는 게 걱정스럽습니다. 연결성! 유치환 시인에게는 깃발이 곧 백로의 날개이고 소리 없는 아우성입니다. 아무 관련도 없는 것들이 시인의 눈에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비유의 본질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관점에 따라 모두 연결이 된다는 겁니다.
나를 스치는 사건이나 현상, 잠시라도 눈에 들어왔다 나가는 물건들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 모든 것들이 곧 나와 연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내 모습이 보이고 내게서 그것들이 보입니다.
자, 주변을 한번 둘러볼까요. 수많은 물건, 사람, 장면이 포착될 겁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을 주나요? 그 느낌은 나와 어떻게 연결이 되나요? 그것이 오늘의 글감이 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연결될 수 있습니다. 쓸거리는 넘쳐나는데 재능과 시간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바로 뭔가를 써 내려갑니다. 뭘 쓰냐고요? 그냥 씁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쓰면 그만입니다. 눈에 포착된 광경을 글로 옮기는 것이라 어렵지 않습니다. 키보드, 마우스, 연필, 책상 위의 먼지, 유리창의 얼룩에 대해 아무렇게나 쓰는 거죠.
글 쓰는 게 일이지만 까마득하게 글이 안 써지는 날도 있습니다. 할 말은 많은데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책상 앞에서 연필만 만지작거리다가 몸을 돌려 책장을 째려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손이 가는 책을 꺼내들어 몇 장 훑어봅니다. 타인의 문장을 마중물 삼아 글을 쓰는 방법도 이런 날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그놈의 글이 어디에 숨었는지 좀처럼 나오질 않습니다. 안 나오는 글을 기다리느니 뭐라도 쓰는 게 낫겠다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거나 쓰자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그래, 이게 좋겠다. 너무나 익숙해 문득 낯선 느낌이 드는 내 책상에 대해 써보는 거야. 스탠드와 독서대. 그리고 또 시시껄렁한 잡동사니에 대해. 아무렴 어때. 그냥 손목이나 풀어보는 건데 뭘.
이른바 묘사하기입니다. 눈이 가는 대로 손을 움직이는 것이니 메시지를 찾을 필요도, 다듬을 필요도 없습니다. 준비운동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글에 생각을 담아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문장을 만드는 것이죠. 본 것만 써야 한다거나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등의 기준을 세우지 마세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그저 손이 가는대로 쓰십시오. 이를테면 김이 올라오는 커피 잔과 그 잔을 감싼 두 손을 이렇게 써보는 겁니다. 커피의 아우성이 모락모락 사방으로 퍼진다. 귀담아 들으려 두 손을 감쌌다. 아, 따뜻하다.
쓰는 행위 자체를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글쓰기는 머리를 쓰는 일이면서도 몸을 쓰는 일입니다. 글 쓰는 이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손이 무거워지는 겁니다. 글은 머리와 가슴에서 나오는데요, 어디를 통해 나오는 걸까요? 바로 손입니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생각도 문장이 되지 않으니까요. 손이 둔해지지 않도록 수시로,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주의할 것은 엉덩이가 가벼워지는 겁니다.
글을 쓸 때는 머릿속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수많은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얼굴을 내밉니다. 그래서 글 쓰는 일은 끝없는 이어달리기의 유일한 선수가 되는 겁니다. 바통을 넘길 다음 주자가 없습니다.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죠. 들썩이는 엉덩이로는 깊이 있는 답을 찾지 못합니다.
한 가지만 추가하자면, 어느 장면을 상세히 묘사하다가도 그 장면을 원거리에서 보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게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무뎌진 칼날 때문에 신경질이 난 심리를 쓰면서도 창밖의 하늘, 바람이 열고 들어오는 창문의 흔들림 등을 알려주는 거죠. 우리는 결국 이 세상 속에 있으니까요. 아무리 화가 나는 아침이어도 하늘과 바람과 구름이 옆에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의 사물을 정하세요. 아무것이나 괜찮습니다. 본 대로 써보세요. 컵이라면 색깔, 모양새, 놓인 위치, 내용물, 느낌 등을 떠오르는 대로 쓰는 겁니다. 테이블 위의 그릇이나 가정통신문 더미도 괜찮습니다. 테이블 자체를 써도 좋습니다. 눈에 띄는 대로 쓰면 그만입니다. 어차피 정답도, 기준도, 감독관도 없습니다. 내가 쓰고 내가 읽어보면 됩니다.
제가 위에서 커피에 대해 쓴 것처럼 하나의 사물이나 장면을 서너 문장으로 써보세요. 그리고 이것을 다양한 문장들로 바꿔보는 겁니다. 무궁무진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랄 겁니다.
한 곳을 바라보세요. 눈에 포착된 한 장면을 글로 옮기는 겁니다. 전체적인 모습이나 이미지를 쓴 후 세부적으로 기술해보세요. 쓸 게 많아서 힘들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며칠 뒤’보다는 ‘이틀 뒤’, ‘여러 명’보다는 ‘여덟 명’, ‘자동차보다는 빨간색 스포츠카’가 더 좋다. 상황 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림을 그리며 읽을 수 있도록 소스를 충분히 주는 것이다. 물감을 아끼면 안 된다.
강조하기 위해 부사를 많이 쓰면 오히려 의미가 퇴색된다. ‘나는 김밥을 정말이지 너무나 좋아한다.’보다는 ‘나는 김밥을 좋아한다’가 깔끔하다. 힘든 하루를 보냈을 때, ‘어제는 진짜 너무 힘들었다’고 쓰지 말라. ‘힘든 하루였다.’로 시작하고 뒤 따르는 문장에서 감정을 담아 승부를 보라.
문장은 생각과 일치해야 한다. 인지부조화를 경계하라. 하려는 말을 문장으로 정확하게 옮겼는지, 다르게 해석되지는 않을지 따져보자. 정확한 어휘와 표현을 선택하자. “그런 뜻이 아니었어!” 비겁한 변명이다. 글은 내 손을 떠나면 그만이다.
단문과 장문이 적절히 어울려야 한다. 비슷한 음절이 반복되면 멈칫하게 된다. 내 입에 찰싹 붙어야 남도 읽기 쉽다. 좋은 글은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간다. 정답은 없다. 낭독하며 최대한 다듬자.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온리원입니다. 바다 너머 다른 곳에 여러분의 인생이 또 있나요? 당신의 삶을 살아주는 다른 누군가가 있나요? 여러분은 이 세상에 유일합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우선입니다. 특별하다는 건 바로 이겁니다. 내 삶은 내게 아주 특별한 거죠.
당신의 삶에 집중하세요. 내가 성장하고 행복하고 가슴 아팠던, 결국 나를 바꾸어놓은 내 삶의 작은 붓질에 집중하세요. 그런 붓질이 하나하나 모여 삶이란 거대한 그림을 그려내는 겁니다.
약간만 물러서서 바라보면 내 삶에도 소중한 순간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세울 정도는 아니어도 자신에게는 충분히 의미가 있죠. 기승전결이 딱 부러지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다른 이의 삶은 말 그대로 그들의 삶입니다. 영감을 얻으면 되는 것이지 내 삶이 그렇지 못하다고 속상할 이유는 없습니다.
언제나 똑같지만 매 순간 새로운 것, 저는 우리의 일상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해요. 어떤 일상이든 스토리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삶은 그런 스토리가 가득 찬 문학입니다. 매일 수많은 자극이 우리를 관통하지만 습관에 길들여진 우리는 그저 같은 일상이라 여기며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감수성이 사라진 삶은 물안경 없이 물속에 뛰어든 것과 같습니다. 감수성을 찾으세요. 눈을 뜨세요. 하루에 하나의 스토리면 충분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히 값지니까요.
왜 글을 쓰려 하나요? 놓쳐왔던 일상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서 아닌가요? 나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와 현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나만의 철학과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내 삶의 주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아닌가요? 그러니 내 이야기,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이 글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글이 어떤 상처를 보듬을지, 어떤 궁금증을 해소해줄지, 어떤 통찰을 줄지, 어떤 생각을 잉태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입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글에 담지 마세요.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담으면 됩니다. 정리가 덜 되었다면 덜 된 채로, 아직 답을 찾는 중이라고, 생각이 여전히 복잡하다고 말이죠. 글 속에 삶이 드러나야 독자도 마음을 엽니다.
글 쓸 때는 말이죠, 마음을 편하게 먹으세요. 누가 보는 거 아니잖아요. 이 글은 공개하지 않으면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지금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그냥 글로 그대로 옮기면 됩니다. 아무 생각이 안 난다고요? 그럼 그걸 문장으로 옮기세요.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쓰고 나면 다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앞뒤 따지지 말고 생각 나는 대로 써보세요.
사는 데 특별할 게 있을까. 맛있는 것 먹고 재밌게 놀고 편히 쉬며 하루하루 보내는 거 아닐까. 즐겁고 배부르면 그만이다. 고생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뭔가. 밥 한 번 먹자 아닌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자식에게 어머니가 해주는 가장 큰 선물은 밥 아닌가. 고단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저녁밥상 앞에서 숟가락을 들 때 아닌가.
-‘귤 껍질을 까며’ 중에서
현재의 조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니 그게 또 하나의 스토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지금 이 순간의 저를 만들어놓은 거죠. 글을 쓰지 못하는 순간은 있어도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사건이 늘 새롭게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꼭 굴곡진 삶이어야만 좋은 글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우리 대부분의 삶은 잔잔한 일상으로 채워졌습니다. 어떤 의미를 건지느냐가 관건입니다. 그게 바로 스토리이죠.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약간의 입김만 불어넣어주면 환하게 불이 들어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뭔가를 거창하게 구상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지금 하고, 먹고,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있는 일상적인 것들을 문장에 담으세요. 그렇다면 애써 글감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겠죠. 지금 가장 자주 접하는 것, 고민하는 것, 상심에 빠뜨리는 것. 그것이 바로 글감 그 자체입니다.
우선은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자신에게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사건을 스토리로 인식하느냐 못하느냐는 결국 글쓰기에 대한 관점이 결정합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세차게 흐르는 강줄기도, 거센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도 모두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일도 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바라보세요. 일상이 스토리입니다. 삶이 문학입니다.
5분 글쓰기, 지금 써봐요
오늘 하루 한 일을 써보세요. 만약 지금이 오전이라면 아침에 했던 일을 몇 가지만 써보세요. 세수, 아침 준비, 아이들 가방 챙기기, 인사하기, 현관 청소 등 주부라면 늘 해오는 그런 일상적인 것들도 좋습니다. 문화센터에서 뭘 배웠을 수도 있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오늘 한 일을 쓰는 거니까요. 자, 이제 그중 하나를 선택해서 글로 써볼까요.
막막하다면 육하원칙을 떠올려보세요.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어쩌다가 왜 그 일을 한 것인지 쓰는 겁니다. 글 같지도 않다 생각지 마시고 한번 해보세요. 일단 써보면 그다음은 앞에 쓴 문장들이 끌어줄 겁니다.
큼직하게 한 젓가락을 떠 한입 가득 넣는다. 쌉쌀한 양파와 시원한 오이, 어금니를 간지럽히는 쫄깃한 면발, 침샘의 뚜껑을 열어젖힌 양념. 미동도 않고 낮잠을 주무시는 막내. 이보다 더 환상적인 점심은 없다. 우울했던 기분은 고작 비빔면 한 그릇에 모조리 날아갔다.
인생 뭐 있나. 잘 먹고 잘 자고 가끔 웃어주면 그게 행복이다.
-‘비비고 비비면’ 중에서
한 끼 식사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저야 인스턴트 비빔면을 이야기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건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게 아닙니다. 생명 유지 활동이면서도 육감을 발휘하는 중요한 경험입니다. 동시에 좋은 글감이 되기도 합니다. 눈을 감고 침샘이 열리는 걸 느껴보세요. 먹을 준비에 분주한 몸 구석구석을 차례차례 둘러보세요. 침이 나오고 위산이 분비되고 소화기관으로 혈액이 모이는 게 느껴지나요. 향긋한 냄새가 코를 마취시킵니다. 예쁘게 담아낸 음식은 헤집어놓는 게 미안할 정도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요.
먹는 순간도 좋습니다. 요리하는 과정도 당연히 이야기가 됩니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마련하는 장면을 담아도 괜찮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상상을 해보세요. 어울리는 단어를 찾고, 알맞게 배열해서 적당한 문장을 만들어보세요. 글 쓰는 게 요리와 비슷하지 않나요.
5분 글쓰기, 지금 써봐요
지난 일주일 동안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었던 음식에 대해 써볼까요.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즐겨 해주는 요리나 반찬을 소재로 써보는 것도 좋습니다. 재료를 사서 다듬고 준비하는 과정, 불을 이용해 조리하는 과정도 함께 문장으로 옮겨보세요. 맛있는 글을 쓰면 음식도 맛있어집니다.
상상만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TV나 잡지에서 보기만 하고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생각하며 쓰는 겁니다. 일종의 기대평이라고 해두죠. 설레는 마음으로 상상하는 겁니다.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상해도 좋아요.
하지만 그게 아버지의 사랑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으신 거겠지. 이렇게 저 자신을 납득시키면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이렇습니다.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늘 일상의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아버지의 표현을 안 하시니까, 무뚝뚝하시니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으니까라는 말에 속지 마세요. 받은 게 없다고 단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늘 표현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사랑법을 알고 계시나요?
여러분 주변에서도 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일, 때론 놓치더라도 아차 하며 다시 돌아보는 일. 그리고 그것을 한 편의 글로 남기는 일. 그것이 바로 내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이고 그래야 삶의 깊이가 더 깊어지지 않을까요. 찰나의 모임이 삶입니다. 삶은 환희의 순간만 모아놓은 화보집이 아니라 순간이라는 조각을 맞추는 퍼즐과 닮았습니다. 아무 색깔도 무늬도 없는 조각일지라도 삶을 이루는 한 부분입니다. 미래의 어떤 시점도 지금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법. 그것이 바로 글쓰기이고 그래야 내 삶이 됩니다.
글쓰기는 배워서 나아지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지금 함께하고 있는 ‘성장하는 글쓰기’, ‘내면을 두드리는 글쓰기’는 저마다의 연장으로 직접 다듬어야 합니다. 설계도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목표도 불분명합니다. 어떤 작품이 나올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죠. 그러므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자신의 글이 더 빛날 거라 기대하지 마세요. 누구에게 배워야만 익힐 수 있는 글쓰기 방법이나 기술은 없습니다. 있다 해도 이미 그것은 그 사람의 체취가 묻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좋은 글쓰기 수업은 학생이 여러 소재를 다양한 관점에서 직접 써보도록 글쓰기의 멍석을 까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습작과 고쳐쓰기의 끈적한 과정을 체험한 뒤에야 좋은 글장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는 쓰고, 고민하고, 고치고, 다시 쓰고, 또 고치는 문장과의 줄다리기가 있을 뿐입니다. 글은 그렇게 깊어집니다. 몇 시간의 강의와 실습으로 울림통이 단단해질 거라 기대하는 건 욕심입니다. 많이 쓰고 많이 고쳐보는 게 최선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작은 변화’에 주목하는 겁니다.
눈으로만 이 책을 읽고 계시다면 연필을 들어 주세요. 고개만 끄덕이고 끄덕이지 않는다면 바뀌지 않습니다. 작은 변화를 자신의 이야기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작은 변화가 끝없이 일어나는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뜨거운 문학이 되는 겁니다.
봄날이 온다는 건 단단한 땅이 물러진다는 것이고, 물러진 틈으로 새 생명이 솟아난다는 거잖아. 인고의 세월 끝에 틈 사이로 비추는 햇빛과 눈이 마주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내게도 이번 봄은 특별하다. 온몸이 설렌다.
-‘봄날이 온다’ 중에서
늘 같을 수는 없습니다. 변화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니까요. 어제와 달라진 게 뭔지 한번 찾아보세요. 이제 곧 달라질 게 뭔지 상상해보세요. 기분이 좋아지나요? 아니면 우울해지나요? 플러스든 마이너스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감지하고 기록하는 것이니까요. 명심하세요. 고개만 끄덕이고 끄적이지 않는다면 바뀌는 건 없습니다.
이렇게 글로 풀어놓으면 설레는 심정을 짧은 이야기로 담아둘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이 마음을 다시 꺼내 볼 수 있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5분 글쓰기, 지금 써봐요
가까이에서 시작해봐요. 어제와 달라진 걸 먼저 찾아볼까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이나 머리 모양에 대해 써보세요. 혹은 최근에 새롭게 시도해본 밑반찬이나 찌개에 대해 쓰는 것도 좋습니다. 여태 해오던 것과 조금이라도 달라진 게 있다면 글감으로 갖다 써보세요.
날씨나 계절을 소재로 삼는 것도 좋습니다. 이 녀석들은 비슷한 듯싶으면서도 조금씩 다르니까요. 소나기 뒤에 쨍쨍한 햇볕. 발이 푹푹 빠지는 폭설 그리고 며칠 뒤 선물처럼 찾아오는 따뜻한 바람. 빨래가 하고 싶어질 정도로 햇살이 강한 날 또는 빨래가 밀리는 장마철.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흐린가요, 맑은가요? 바람이 부나요?
영화 <형>에서 형이 동생을 보며 내뱉는 애정 어린 말이 바로 ‘야이 개새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이 말은 접속사가 되어 배우와 관객의 감정을 이어준다. 울다가 웃으면 OOO에 털 난다는데 아내와 나는 웃다가 울다가 서로를 쳐다보고는 또 웃고 영화로 돌아가 다시 울었다. 시나리오도 그랬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그랬고 아들만 셋을 둔 상황은 더 그랬다. 나 같은 사람은 울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이사하고 추워서 집에만 있던 어느 날. 여전히 어수선한 집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심심하다, 놀아달라, 달달한 거 없냐는 둘째의 간청이 거듭되니 미안한 마음도 커졌다. 숙제 삼매경에 빠진 큰형만 남겨두고 나들이 삼아 길을 나섰다. 뽀드득 눈도 밟고 시원한 공기도 마시고 원하던 것도 손에 넣은 두 놈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집으로 향했다. 둘째는 혹시라도 넘어질까 동생을 얼마나 챙기던지.
영화를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혼밥, 혼술, 혼행이 유행하는 시대. 1인가구가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거라는 시대.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지는 요즘, 형제라는 고리를 만들어준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그 고리를 통해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고 결국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리라.
“야이, 개새야!” 조금 더 크면 너희들도 이런 말을 하겠지. 욕을 가장 먼저 배운다고 하는데 안 쓰게 할 수는 있어도 귀를 막을 수는 없을 노릇이니. 아빠는 욕하는 사람을 싫어하지만 서로 아끼고 산다면 딱 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서로 응원해줄 수 있는 형제가 되길.
-욕을 허락하는 조건
삼형제의 아빠로서 바라는 건 이겁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라.
쓴 글을 놓고 보면 의도했던 글보다 그렇지 않은 글이 훨씬 많습니다. 늘 새로운 자극이 우리를 건드립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떠오르기 때문이죠.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거나 생소한 운동을 시작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최근에 본 영화, 드라마, 책,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뉴스 어떤 것도 소재가 됩니다. 자신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면 아주 좋은 글감이죠.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고 느꼈는지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써보면 생각지 못했던 스토리를 발굴하게 될 겁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좋으니 일단 써보세요. 끝부분에서 자신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서 시작하세요. 마지막에 자신의 이야기로 건너오면 됩니다. 연필을 들고 시작해보세요. 어떤 이야기들을 듣거나 봤는지 써보세요.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썼지 않은가. 심한 다툼의 시작이 바로 나였던 그런 날이 있었지 않은가. 그런 것이다. 약간만 물러서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대개 이해가 간다.
(...)
혼자 놀라고 혼자 다독이고 혼자 위로한 오늘 아침, 나는 아내의 행동을 이해한다.
-‘나는 아내를 이해한다’ 중에서
유리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채 소통의 가뭄에 목말라하고 있다면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불러 교감하길 권합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적절한 소통 환경을 갖추길 바랍니다. 인간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존재입니다. 피가 흐르듯 말이 흘러야 합니다. 몸 밖으로 나의 언어가 나가고 다른 이의 언어가 내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죠.
모든 대화는 다릅니다. 그래서 새롭습니다. 어떤 대화도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 나눈 짧은 대화 또는 한 마디의 인사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큰 의미를 잉태할 수 있습니다. 잔잔한 호수에 큰 물결이 일었다면 어떤 힘이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 누군가의 말을 문장에 담으세요. 그 말이 가진 의미를 다듬어보세요.
이렇게 대화를 쓴 다음에 그냥 이 대화가 이뤄진 상황을 설명하며 써 내려가면 됩니다. 그다음은? 저도 모릅니다. 어떻게 대화가 이뤄졌는지 쓰다 보면 다음 문장이 떠오를 테니까요. 스토리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다. 믿으세요.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아 근사하다.
계획과 직관이 이끄는 삶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 친구 앤이 말하는 유연성입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는 거죠. 그래야 생각지도 못한 근사한 일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때는 이런 삶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니, 첫 책을 낼 때까지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고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근사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어디 내놓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쓰지 않더라도 글을 쓰는 삶은 위대합니다. 아무리 깊은 생각도 글 쓰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더 깊어지지 않습니다. 자신과 주고받은 끝없는 문답,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고통스런 줄다리기 그게 바로 글쓰기이니까요. 쓰면서 생각은 분명해지고 자신의 철학을 세울 수 있습니다. 복잡한 현상을 마주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쓰기를 통해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죠.
오늘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하루
하루 24시간은 아주 깁니다. 한 잔의 커피와 같죠. 맛, 향, 빛깔을 즐기듯 내게 주어진 하루를 음미할 수 있습니다. 틈틈이 찾아오는 새로운 자극이 있습니다. 어제의 해가 오늘과 다르고, 아침까지만 해도 꽃봉오리가 입을 열지 않았는데 오후에 집에 들어오면서 보니 활짝 웃고 있습니다. 내 기분만 놓고 봐도 어제와 오늘이 다릅니다. 하물며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이 사회는 어떤가요.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습니다. 정신없이 보낸 하루는 테이블 위에 놓인 다 식어버린 커피입니다. 즐기지 못한 하루가 아깝습니다. 다시 커피를 뜨겁게 데워 차분히 하루를 되새겨야 합니다. 오늘이 어제와 달랐음을, 현재를 살아야 내일도 온다는 것을, 행복은 금세 떠나기 때문에 얼른 맛봐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감수성을 가지라는 게 톡 찌르면 툭 하고 터지는 눈물주머니를 차라는 게 아닙니다. 일상에 무감각해지지 말라는 것이죠. 하루하루 아깝게 흘려버리는 행복이 많다는 걸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까운 오늘을 장작처럼 태우지 마세요. 설사 그랬더라도 오늘만의 의미를 새겨야 합니다. 잠깐의 자국만 남기고 사라지는 일상의 경험을 내 삶의 한 조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오늘을 살며,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어떤 과정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행복의 조건은 새롭게 등장하고 기준은 높아질 뿐입니다. 결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이죠. 그걸 놓치지 않게 해주는 게 바로 감수성입니다. 오늘 하루를 잘 포착하세요.
무료하고 심심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흐르는 대로 흘러가다 문득 이게 뭐하는 짓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낯선 그 녀석의 위용이 대단해 저는 금세 쪼그라들었고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보이지 않는 답을 찾는 일은 지루하고 외롭고 어두웠지만 즐거웠습니다. 많은 글을 썼고, 수 권의 책을 내면서 저는 답을 찾아 나갔습니다. 여전히 답을 모르는 질문을 만나지만 삶이란 그렇게 생소한 질문을 찾고 다시 답을 하면서 이어지는 게 아닐까요?
문득 스치는 물음표. 그게 바로 글감입니다. 그런 질문이 글로 자라나야 합니다. 그 질문에 답을 해봐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지켜야 할, 또 지키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지. 그러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양보할 수 있는지. 그러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에너지를 쏟는 일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일이 나의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처럼 낯선 때로는 외면했던 질문이 여러분의 민낯을 보여줄 겁니다.
삶은 문득 떠오른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하고 다시 질문을 던진 뒤에는 또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떠올린 질문이 없다면 지금의 삶은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글 쓰는 삶은 우리를 느낌표와 물음표의 끝없는 이어달리기로 안내해 줍니다. 그러면서도 일상의 행복을 놓치지 않게 해주죠.
우리의 일상은 끝없이 흐르는 물입니다. 같아 보여도 새로운 일들이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쓰지 않는다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연필을 잡는 행위를 통해 시간을 잠깐 세워야 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거죠. 시공간을 초월한 나만의 세상에서 오늘 또는 방금 포착한 글감을 요리하는 겁니다. 진실되게 그러나 말하듯 편하게 말이죠.
쓰는 행위를 통해 생각과 감정은 깊이를 더합니다. 껍질을 뚫고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 뼈를 만집니다. 중요한 질문과 답은 거기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일상의 시시껄렁한 고민은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내공이 깊어지면 사람이 단단해지죠.
감수성, 질문, 글 쓰는 행위. 글 쓰는 삶의 세 가지 공구입니다. 돈이 들지 않습니다. 약간의 관심과 시간만 지불하면 충분히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일궈낸 글 쓰는 삶. 여러분은 이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글을 쓸 때는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의식이 풀어내는 대로, 때로는 무의식에 사로잡혀 써 내려가야 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쓰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고쳐 쓰면서 명료해집니다. 그러니 글을 쓸 때는 우선 내면의 검열관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그저 손이 움직이는 대로 써 내려가면 그뿐입니다. 나무를 키우는 과정, 원석을 캐는 과정,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걸 다듬고 쓸 만한 것을 건져내는 건 나중의 일입니다.
일단 쓰세요. 무지막지하게 많이!
중요한 것은 일단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 솔직해지는 겁니다.
쓰다 보면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고, 그 문장이 다시 생각을 이끌어냅니다. 준비됐나요. 한번 신나게 춤춰봅시다. 연필과 함께 춤을.
지나고 나면 잊혀질 일도 이렇게 한 편의 글로 다듬어두면 근사한 선물처럼 마음 한 구석에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좋아요. 쓰다 보면 정리가 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쓰면 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 왜 우리는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걸까? 왜 하필이면 당신이고, 그 사람인 걸까?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하늘이 맺어주는 게 아닐까요. 이보다 더한 우연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만남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됩니다. 어떤 관계가 되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런 인연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겠죠.
새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었구나. 참 따뜻한 분들이었구나. 참 많은 사랑을 받았구나.
많은 이들이 관심과 정을 줍니다. 받을 때는 몰라도 생각하면 할수록 고맙습니다.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사는 게 꽤 퍽퍽했겠다 싶습니다.
일상에 놓쳤던 고마웠던 일을 찾아보세요. 사랑받고 있는 게 별건가요. 아주 작은 관심이 곧 사랑입니다.
내 이웃이고 친척이고 자식이고 아버지이고 형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면 한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의 일이 결국 내 일이 되고 우리의 일이 되는 것이죠.
묵묵히 제 길을 가는 건 의롭다. 도드라지진 않지만 그런 우직함이 세상을 지탱해왔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정해진 길을 가는 일이 답답하다.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변화로 이어지고 도전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는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따로 있나. 분명한 뜻을 갖고 있다면 길이 없어도 통하기 마련이다. 무분별하게 꽃과 나무를 꺾지만 않는다면. 길을 내면서 나가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꾸준히 가느냐, 신선한 공기를 마시느냐,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느냐가 아닐까. 길에 얽매이지 말자.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이 옳은지만 생각하자.
-길에서 벗어나야 길을 볼 수 있다
제가 쓰는 글의 대부분은 제 자신에게 하는 조언이면서 다짐입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지 않길 스스로 맹세하는 거죠. 저는 꾸준히 글을 쓸 것이고 그것을 즐기려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기, 욕심을 조금 줄이기, 순간을 만끽하기. 그리고 이런 것들과는 조금 달라 보이지만 사랑하기. 저는 이런 자잘한 것들에 눈이 갑니다.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수백 개라면 행복할 이유도 수백 개입니다. 도서관에 데려간 막내가 형을 따라 잠깐이라도 혼자 놀아주면 그게 행복입니다. 자다 깬 녀석이 울기는커녕 아빠의 작업을 구경하며 잠깐이라도 옆에 앉아 신기한 듯 쳐다봐주면 그게 행복입니다. 세상의 반은 언제나 빛이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절반은 늘 해가 들지요.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찾지 않았으면 합니다. 행복을 갈망하지 마세요. 파랑새는 이미 옆에 있습니다.
쓰기 전에는 그걸 몰랐습니다. 행복은 쟁취하는 거라 믿었어요. 목표를 이루는 순간에 아드레날린처럼 퍼지는 게 행복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며 생각을 빚다 보니 내 삶의 매 순간에 행복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행복은 일상을 누리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부산물입니다. 성실히, 즐기며,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냄새를 맡고 피부로 느껴보세요. 행복은 그런 거라 생각해요.
<혁신가의 질문>을 쓴 박영준 코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앎(Knowing), 함(Doing), 삶(Living)의 조화를 이야기했습니다. 돌이켜보니 이 셋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과 행동이 분리될 수 있을까요? 실천하지 않으면서 영광스러운 삶을 바라는 건 위선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쓴 대로 살고 사는 대로 쓰려고 합니다. 앎과 삶이 하나로 수렴되게 하는 것이 살아가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불안할 때도 있지만 아는 것을 흔들림 없이 실천할 때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또 쓴다는 어느 작가처럼, 저 역시 매일매일 더 나은 글을 세상에 내놓아 이미 구천을 떠도는 저의 오래된 체취를 말끔하게 몰아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삶도 글로 빚어내길 바랍니다. 일상에 글쓰기를 곁들인다면 그 풍미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집니다. 삶의 향기를 더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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